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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 ㅣ 밀리언셀러 클럽 104
모치즈키 료코 지음, 김우진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골키퍼나 투수처럼 손으로 하는 일에 남다른 능력을 가진 친구에게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오, 그는 정말 신의 손을 가졌어."
또한 때로 인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예감했을 때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정말 신의 손이 한 일이야."
'신의 손',
그것은 재능이자 운명이다. 신이 허락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라 여기기에 얼른 운명으로 생각되는 지도 모른다. 니체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운명적인 것은 비극의 아우라를 가진다. 하물며 그것에겐 죽음의 냄새마저 도사린다. 죽음처럼 미리 결정되어 있고 도저히 변경 불가능한 탓이다. 그래서일까? 죽음이 불행이듯 운명은 자주 저주처럼 여겨진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가능하다. 재능은 곧 저주라고.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어느 날 아주 오래된 나무를 본다.
수백 년을 산 나무다. 장자의 옆에서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 나무는 말이죠, 그저 오래 살고 있다 뿐이지 별 쓸모는 없어요. 집을 지을 수도 없고 문짝으로도, 바퀴로도 도대체 사용할 수가 없어요. 아마 세상에 이렇게 쓸모없는 나무도 찾아보기 힘들 걸요." 그러자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때문에 이 나무는 이토록 오래살 수 있었던 것일세." 나무는 아무런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천재들은 제대로 천수를 누리지 못했는데 이 사실을 대비해 보면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피터 파커의 다음과 같은 말은 꽤나 설득적이다.
"이것(스파이더맨 능력)은 축복이자 저주다!"
'신의 손'은 그 모순을 함축한 말이다.
이를테면 카인의 표식이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바람에 신으로부터 영원한 유랑의 형벌을 받는다. 그는 신에게 애원한다. '이런 살인자의 몸으로 세상으로 나갔다간 저의 죄 때문에 언제 다른 사람들 손에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자 신은 카인의 이마에 표식을 준다. 그리고 세상에 선포한다. '이 표식을 가진 자를 건드리면 내가 똑같이 보복하리라.' 카인은 안심하고 세상에 나간다. 표식을 가진 탓인지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다. 동시에 아무도 자기 곁에 다가오지 않는다.
카인이 잘 보여주듯이 피터 파커가 말하는 저주란 고독이다. '신의 손'은 에덴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화염검처럼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질시와 몰이해라는 가위로 싹둑!
천재가 불길한 것은 묘지를 배회하는 유령과도 같은 그림자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홀로 죽거나 고독에 미쳐서 광기의 희생양이 될 미래를 예언하는 것과도 같은 그림자를...
소설 '신의 손'에 드리워진 것도 그런 그림자다.
이 소설은 14회 일본 미스터리 대상 신인상 수상작인 '대회화전'으로 먼저 소개된 바 있는 모치즈키 료코의 데뷔작이다.
2004년 집영사문고본으로 첫 간행되었을 때의 표지.
이름에서 이미 알아차렸을 지도 모르지만 료코는 여성작가다. 1959년에 태어났으니 데뷔작은 40대 중후반에 나온 셈이다. 흔한 말로 늦깎이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기에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무명 작가로서의 삶이 길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추측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이 소설, '신의 손' 때문이다. 소설이 저자 료코와 똑같은 여성 작가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기스기 교코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녀를 만나 그녀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그녀를 '신의 손'이라 부른다. 그녀는 분명 신이 부여했으리라 여길 정도로 재능이 있었고 글에 대한 열정은 더 커서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을 남겼으나 한 번도 출간되지 못했다. '신의 손'을 가졌으나 내내 무명 작가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몸 속에 괴물을 한 마리 키우는 것과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녀는 세상에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에 절망한 나머지 자신이 키우던 괴물에 끝내 먹혀버린 것일까?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져 버린다. 어차피 소수만 알고 있었던 존재. 그 이름은 곧 세상에서 잊혀져 버린다.
그런데 10년 후, 불현듯 그 이름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대중과 평단의 호평 속에 공신력 있는 문학상을 받은 한 소설이 실은 기스기 교코의 작품을 훔친 것이라는 고발이 나온 것이다. 고발한 주체는 다카오카 마키라는 여성.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의사인 히로세를 통해 기스기 교코와 내연의 관계였다는 편집자 미무라에게 자신의 원고를 보내 그것을 증명하려 한다. 미무라가 그 원고를 본 결과, 놀랍게도 그것은 분명 기스기 교코의 것이었다. 더구나 그 원고는 단 한 번도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다카오카 마키가 사라진 기스기 교코일까? 미무라는 히로세를 만나 그 진상을 알아보려 한다. 밝혀진 사실은 다카오카 마키는 기스기 교코가 아니라는 것. 더구나 그 둘 사이엔 아무런 접점조차 없다. 생판 남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카오카 마키는 어떻게 세상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기스기 교코의 원고를 가지게 된 것일까? 미스터리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미스터리는 누구도 몰랐던 기스기 교코의 진실된 초상으로 인도한다.
기스기 교코의 초상을 보았을 때, 얼른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바로 '다락방의 미친 여자'다.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는 페미니즘에 있어 또 하나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그것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남성 중심 문명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여성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사회의 가장 구석진 자리(격리된 공간의 일종으로써)인 다락방에 갇힌 것이다. 물론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재능으로나 지성으로나 오히려 정상인들보다 더 비범하다. 실은 바로 그 때문에 다락방에 갇힌 것이다. 그녀의 재능과 지성으로 남성 사회를 유지시키는 남성만이 가지는 전유물들을 획득하여 남자들을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에게 그건 전복의 징후였고 더구나 길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에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을 보이지 않는 다락방에다 가두게 된 것이다. '광기'의 팻말을 여성의 목에다 걸거나 '괴물'로 치부하여...
실제로 19세기에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던 글쓰기를 과감하게 감행했던 여성들은 모두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굴레를 뒤집어 써야만 했다. 글을 쓰려는 여자들은 그 시기 남자들에게, 그것도 작가인 남자들에겐 더욱 주제 넘은 건방진 짓이었고 그 어떤 미덕으로도 상쇄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악행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그러므로 감히 펜을 통해 경계를 넘으려 했던 여성들은 당연히 쏟아지는 비난과 격리를 감수해야 했다. 쓴다는 것엔 그만한 위험이 뒤따랐다. 재능은 그녀들에게 저주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신의 손'의 기스기 교코 역시도 그렇다. 그녀는 현대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오직 그것만이 그녀 삶의 전부다. 그녀는 미친 듯이 글을 쓴다. 수 년간 오로지 열정만으로 골방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엄청난 양의 글을. 남성들은 그녀를 길들일 수 없었다. 여기서 길들인다는 것은 그녀에게서 펜을 뺏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녀가 남성 사회에 전혀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암시로 그녀가 쓰는 글들은 대부분 범죄와 파멸 그리고 죽음이라는 어두운 이야기들이다. 사회의 안정된 기반을 허무는 이야기들. 그렇게 그녀는 격리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오로지 남성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주의 깊게도 교코를 상대하는 편집자들은 모두 남성으로 소설은 설정하고 있다. 19세기 여성들이 글을 쓰는 남성 작가들에게 포위되어 다락방에 '미친 여자'로 갇히게 되었듯이 교코 또한 똑같이 갇히는 것이다. 정녕 기스기 교코는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신의 손'은 사실 이런 이야기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미스터리이고 결국 기스기 교코의 실종과 오랜 세월이 지나 불현듯 도래한 그녀 원고의 비밀도 풀리지만 보다 심층적으로 보자면 남성의 음경이라 할 수 있는 펜을 차지하기 위해 분투했던 여성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너무 식상한 표현이라 쓰기 싫지만 이만큼 그걸 선명히 드러내는 말도 또 없는 것 같아서 부득불 쓴다.) 여성의 해방과 자유를 향한 몸부림과도 같은.
과연 그녀는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결말에 밝혀지는 비밀은 누구에게는 실패로 읽혀질 수 있을 것 같지만 난 성공으로 보인다. 그녀는 그것으로 모든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들에게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영원한 물음표의 존재. 19세기의 상황으로 보자면 그것이야 말로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던 펜을 되차지한 여성의 모습이랄 수 있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가장 독립된 여성의 모습이니까.
광기가 투쟁이고 격리가 해방이다. 이런 비틀림이야말로 남성 중심 세계의 중력으로부터 여성들을 벗어나게 만드는 날개인 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결말을 긍정적으로 본다. 더구나 뒤늦게 출현한 원고는 교코를 둘러싼 모든 남성 가해자에게 그대로 복수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투쟁(그렇게 불러도 좋다면)은 성공한 것이다. 같은 여성 작가인 모치즈키 료코는 어쩌면 아직은 무명 여성 작가로서 데뷔하기 험난했던 경험으로 교코에게 빙의되어 이 소설을 써내려 갔던 지도 모른다. 교코가 토해낸 언어들은 그대로 소설을 쓰던 당시 료코의 심정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료코인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게 교코로 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은 료코가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먼저 알려진 '대회화전'과 꽤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회화전'의 전개는 좀 '스타카토'적인 면이 있었는데 '신의 손'은 '레가토'적인 면이 강하다. 그 이음새를 단단히 하는 것이 투명하게 묘사하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다. 그래서 더욱 교코의 고독과 방황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어쩌면 남자인 나보다도 지금도 펜을 들고 기꺼이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되려는 여성들이 더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신의 손'은 그런 그녀들을 위한 연가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