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삶에는 늘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있기 마련이다.

 흔히들 불행이라 부르는 명함을 들고 불현듯 방문하는 이런 불청객 때문에 삶은 자주 맨발로 작두를 타는 듯한 불안을 가지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개인의 삶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에도 이런 불청객의 방문은 얼마든지 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97년의 IMF일 것이다. 예고 없이 찾아온 그 불청객은 내일의 희망을 갖고 착실히 살아가던 평범한 가정들을 일거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집을 가진 자는 집을 잃었고  둥지 안의 새들처럼 도란도란 살던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지기도 했다. 삽시간에 절망과 공포가 교차하는 거리로 나앉게 된 이들은 새삼 삶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져리게 느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여기엔 그들이 책임질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한 것은 어릴 때부터 어른들 말씀이나 교과서에서 배워왔던 그대로 성실하게 자기 맡은 바를 다해 살았던 것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렸다. 경악말고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라는 대로만 하면 이대로 계속 순탄하게 살아가리라는 생각을 IMF는 비웃으며 뿌리채 뽑아버렸다. 삶은 그들이 믿었던 것보다 훨씬 허약했다. 자신이 아무리 잘하고 열심히 한다고 한들 조금만 큰 바람이 불어도 쉽게 꺼져버릴 등잔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분명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IMF는 그렇게 기존의 가치관을 전복시켰다. 아버지의 말씀은 더이상 신뢰의 대상이 아니었고 믿음을 얻지 못한 기성의 권위들은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코스모스는 사라지고 카오스의 우주가 도래했다. 더구나 그 우주에 도사린 예측불허의 불청객이 가지는 압도적인 힘은 허무마저 가져왔다. 많은 이들이 이제 삶은 항로없는 비행이며 온전히 자기만이 항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어디선가 주입된 머리 속의 말들은 그저 공허한 관념에 불과했고 오로지 손으로 쥘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만 유일한 가치로 여겨졌다.


 삶이든,사회든 똑같이 불청객은 불안과 허무를 동시에 가져와서는 우리가 디디고 있는 발판을 없애 버린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열심히 달리다가 뒤늦게 자신이 허공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캐릭터와 똑같이 우리들도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날 안심시켰던 그 모든 것이 단순한 착각에 불과했구나 하는 통렬한 깨달음과 함께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뭐랄까, 리부트(reboot)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 즉 모든 것을 다시금 시작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실연이나 이혼을 겪고 다시는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다시 처음부터 알아가고 맞춰가야 한다는 게 싫어.' 근원적인 측면에서 이와 똑같은 이유로 우리는 불청객을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학도 불청객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도 불청객만큼이나 내가 딛고 있는 '발판 빼내기'의 전문가라는 뜻이다. 문학을 읽다보면 때로 경험하지 않는가?  문학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세상의 창살을 문득 드러내어 내가 지금까지 조악한 편견에 갇혀 있었음을 일깨우더니 결국 갑자기 내 발 아래 놓여진 아득한 허공을 느끼게 만드는 경우가 말이다. 흔히들 문학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달라지게 만든다고 하는데 바로 그 느낌을 달리 일컫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일변시키는 것을 문학이 가져다 주는 자유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면 불청객은 꼭 회피의 대상만은 아니다. 그들이 주로 하는 발판의 제거는 아득한 추락의 공포와 함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스스로 정립해야 한다는 지겨움마저 가져다 주지만 사실은 그 추락의 깊이만큼 우리를 해방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안정이란 것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길들여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토끼와 같이 너무나 거기에 익숙해져서 아무리 내 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더라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고양이를 기른다. 원래는 '길냥이'였다. 야생의 습성이 강했기에 처음 집에서 키울 때 아주 애를 먹었다. 늘 바깥으로 달아나려고 해서 어떻게 나가지 못하게 하느냐가 매일의 고민이었다. 그랬는데 1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도통 집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안아 들고서 문을 열면 내게서 빠져나가려고 기를 쓴다. 이제 어떻게 데리고 나가느냐가 고민이 되었다. 이 정도로 고양이는 이미 자신이 속한 세계가 바뀌었다. 지금 이 세계에 너무 길들여진 탓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내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는 것은 결국 세상이 만든 창살을 우리 스스로의 한계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내 집에 편히 거한다는 '안주'는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만든 감옥일지도 모른다.


 이렇다면 불청객은 오히려 열쇠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문을 열고 사실은 히키코모리나 다를 바 없는 우리들을 밖으로 내모는 존재인 것이다. 물론 불청객은 기존 세계의 파괴와 허무를 가져온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파괴와 허무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안다. 그가 파괴하는 것은 실은 나를 규정하고 있는 틀이며 허무 역시도 그 틀을 떠받치는 근거의 삭제를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 결국 그는 나를 얽매고 있는 사슬을 풀어주는 존재다. 그렇다면 실은 환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까지는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라는 단편집을 읽고 느낀 것을 갈무리한 것이다.

 이 단편집엔 모두 8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읽다보면 모든 단편에 면면히 흐르는 공통점을 깨닫게 된다. 바로 불청객의 존재이다. 8개의 단편 모두 불청객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삶에 느닷없이 출몰해서는 삶을 이전과 다르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도 똑같다.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5년만에 갑자기 돌아온 오빠와 그가 데리고 온 여자가 집안에 일으키는 변화나 '이사'에서 믿고 맡겼던 포장이사업자들의 주인공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의 파괴. '보물선'에서 가장 이기적인 자본주의적인 삶을 살던 이에게 가장 이타적인 삶을 살던 이가 문득 찾아와 선사한 불행이라든가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갑자기 찾아온 과거의 인연들이 가져온 혼돈(그들이 찾아오는 계기가 하필이면 '지진'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모두가 그렇다. 이렇게 8개의 단편 모두 누군가가 꼭 찾아와서는(그들은 '엄습'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문득 도래한다.) 나이테처럼 지울 수 없는 파문을 남기는 동일한 패턴을 반복한다. 그러니 하나의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김영하는 왜 이렇게 자꾸 불청객을 등장시키는 것일까? 그것도 늘 혼란과 불안을 가져다주는 불청객을 말이다.


 나는 그걸 이 단편집이 쓰인 사회적 상황에서 이유를 찾고 싶다. 단편집은 원래 2004년에 나왔는데 대부분 2000년을 언저리로 해서 쓰인 것들이다. 말하자면 IMF와 미국의 9.11 사태의 여파가 꽤 강력하던 시기의 산물인 것이다. 개인들이 불현듯 도래한 외부적인 힘에 마구 휘둘리던 시기. 내내 등장하는 불청객은 바로 그 힘의 은유가 아닐런지. 정말 우리에게 도래했었던 현실의 반영으로써 말이다. 그 때 우리들은 종횡무진 쏟아져 들어오는 불청객들 때문에 좌충우돌 하느라 잔뜩 불안했었다. 그들은 멀쩡히 안방에서 잘 살고 있는 아버지를 방에 갇히게 만든 '오빠'였고 애지중지하던 골동품을 부셔버린 '포장이사업자'였으며 남부러울 것 없었던 '재만'을 피고인 신분으로 국정원에 불러가게 만든 '형식'이었다. 불청객 때문에 삶은 쪼들리고 상처입었으며 완전히 부서지기도 했다. 어찌 불청객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김영하는 8개의 단편을 통하여 내내 묻는다. 과연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을까?

 물론 불청객은 날선 톱니바퀴와 같다. 그들과 마주하면 소설의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깍여나가게 된다. 하지만 김영하는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꼭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아직 그것이 독인지 아니면 득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바로 그 자화상을 아직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마음이 나는 '오빠가 돌아왔다'의 단편들을 끌고간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은 그 때의 우리들은 상황 한가운데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바람을 이리저리 타느라 정신이 없어서 거울을 볼 때 필요한 객관적인 거리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내 몸에 와 닿는 피부의 아픔과 몸의 힘겨움만으로 불청객을 막연히 두려워하고 불안해할 뿐이었다. 우리에겐 거울이 필요했는데 김영하는 아마도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주려는 것 같다. 제대로 된 삶의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 우리들을 위해 그 자화상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울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편들은 모두 하나의 실험이며 그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불청객과 대면한 나의 자화상을 제대로 보기 위한 거리를 만들어주려는 데 있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단편들이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부분에서 느닷없이 끝나는 게 아닐까 한다.


 단편들 모두가 '기승전'만 있다. 여기엔 '결'다운 '결'이 없다. 불쑥 들어왔다 불쑥 나가버리는 불청객 같다.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더욱 실제 삶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삶도 죽음에 이르기 전에는 '결'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엔 결말이 주는 바로 이 황당함이 실은 김영하의 노림수 같다. 바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 같은 것 말이다. '소외효과'란 연극을 아주 인위적으로 만들어 관객을 연극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관객을 하나의 대등한 참여자로서 연극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것을 김영하가 쓰는 것 같다. 엉성한 상태의 이야기 덩어리로 만들어서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에 내재된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음미하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거울로써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설의 바퀴 하나를 빼버린 것과 같다. 끊임없이 덜커덕거리는 마차 위에서 어떻게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왜 이리 불편할까 하면서 내내 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 단편들은 불청객스럽다. 불청객이라는 존재야말로 '결' 자체를 거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청객은 틀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길을 마련해주고자 함인데 분명한 '결'이 있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틀이 되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혹은 그래서 더욱 '결'은 없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불청객이 사실은 오롯이 우리 스스로 항로를 개척하게 만들기 위한 존재라면 진정한 '결'은 소설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소설이 우리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결'은 어디까지나 우리 마음에 있을 수밖에 없다.  정말로 김영하는 이것을 배려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꽤 매너 좋은 불청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삶의 모퉁이마다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불청객은 늘 마주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삶이 허약하기에 이 불청객들은 아무래도 불안한 존재이지만 '오빠가 돌아왔다'는 무조건 회피할 게 아니라 환대할 필요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들로 인해 나 자신이 더욱 나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불청객은 순수한 응시를 가져다 준다. 나도 모르는 새에 세상이 덧씌웠던 시선에서 해방되어 나의 참된 시선으로 나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청객이 두려웠던 것은 내 진실된 모습을 확인하기가 두려웠던 데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것 같다. 나에 대한 신뢰가 바로 불청객에 대한 환대를 낳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오빠가 돌아왔다' 단편에서 왜 이혼해서 오래도록 따로 살던 엄마가 오빠가 데려온 여자에게 그렇게 했는지 또 오빠의 귀환을 계기로 바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는 지가 이해된다. 세상이 내 선택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선택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세상이든 상관없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니까. 분명 '오빠가 돌아왔다'의 불청객들은 궁극적으로 그 믿음을 우리에게 주기 위한 전령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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