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관 1~3 세트 - 전3권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예전 내게 라틴어를 가르친 한 스페인인 교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여기에 대해 처음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완전히 바꿔 주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를 직접 만나기 전의 나는 그것을 로마 역사를 배경으로 한 아주 재밌는 소설이겠구나 정도로만 여겼었다. 그런데 읽어보니 아니었다. 산만함을 용납하지 않는 달변의 화술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도록 하는 소설로서의 재미도 월등했지만 더 나아가 뛰어난 역사서로써의 면모마저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2부, '풀잎관'이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 로마를 다룬 역사서에서 겨우 몇 개의 문장, 좀 더 나아가봐야 기껏 서너 페이지 정도로만 접했던 사건을 1권은 519페이지, 2권은 595페이지, 3권은 400페이지로 무려 세 권이나 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놀랐는 지에 대해 말하려면 일단 제목인 '풀잎관'의 뜻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소설에서 콜린 매컬로가 묘사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흔한 풀잎으로 만든 소박한 관이지만, 개인의 용맹함과 결단력으로 군대나 군단 전체를 구한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로마 역사 전체를 통틀어 받은 이가 겨우 몇 사람에 불과할 정도로 대단히 명예로운 훈장이다. 다시 말해, 풀잎관은 어디까지나 한 단체를 커다란 위기에서 구해내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그대로 이 소설에서 로마는 엄청난 위기에 봉착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에선 '동맹시 전쟁(BC 91 ~ BC 88)'으로 기록된, 자신들에게 로마 시민권 부여를 거부하는 로마를 상대로 이탈리아인들이 일으킨 전쟁이다. 사실 이 전쟁은 로마에게 미증유의 위기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 상대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이탈리아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이 때까지 계속 로마와 거의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니발이 침략했을 때, 로마가 지금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니발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던 이탈리아였다. 그만큼 충성스럽게 오래도록 함께했기에 이탈리아는 많은 면에서 로마와 거의 다를 바 없었다. 이 말은 이탈리아가 로마와 똑같이 싸울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로마가 지금까지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만의 군대 편성, 전술의 덕이 컸다. 하지만 이제 로마는 그 이점을 전혀 얻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도 똑같은 로마의 군대 편제로 동일한 전술을 구사하며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로마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인 로마 자신과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찌 위기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 시간을 2부, '풀잎관'은 담는다. 그 전쟁이 어떻게 비롯되었고 경과했으며 무엇을 남겼는지, 그 과정을 세 권에 걸쳐 조목조목 아주 상세하게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읽은 역사서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까지 겨우 몇 줄 혹은 몇 페이지로 밖에는 만나 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정말로 이만한 분량으로 다룬 책은 보지 못했다. 그러니 놀랐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나 풍부하게 쓸 수 있었을까 하고.


 물론 여기에 대해선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소설이니 소설가가 상상력을 발휘하면 이만한 분량쯤은 어렵지도 않다고. 하지만 그럴 경우 위험이 따른다.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상상력은 쉽게 허황과 그것을 설득력있게 만들려다가 장황의 늪에 빠지고 그러다 그만 설득력을 잃고선 오히려 독자들의 차디찬 외면만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풀잎관'에서 자주 등장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연설에서와 똑같이, 두말할 것도 없이 설득력이다. 그것이 작품의 성공을 좌우한다. 놀랍게도 이 소설은 설득력으로 가득하다. 어떤 사건이든, 로마 원로원의 어떤 연설이든, 중요 인물들의 어떤 심리이든, 모두 있음직하고 그럴만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솔직히 실제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만한 설득력이 그저 콜린 매컬로의 상상력, 필력으로만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 분명 어마어마한 자료 조사와 충실한 검토, 그 의미에 대한 숙고가 있었으리라. 그래야 가능한 것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감히 이 소설이 그 어떤 사건이든 인물의 초상이든지 간에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또 감히 이 소설을 뛰어난 역사서의 면모마저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동맹시 전쟁'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이 '풀잎관'을 읽는 게 가장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앞서도 말했듯이 대부분의 역사서에는 아주 개략적인 소개만 있다. 설령 인물이 등장해도 '어디가서 무엇을 했고 결과가 이렇다'라는 정도의 '행위와 결과'만 있지 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잘 나오지 않는다. 행여 나와도 깊이 서술하진 않는다. 하지만 콜린 매컬로는 오히려 거기에 더 주안점을 둔다. 이 인물이 어떤 연유로 그러한 선택을 하고 행위했는지 그 과정을 더 충실히 복원하여 독자를 깊이 참여토록 하는 것이다. 마리우스와 술라만이 아니다. 필리푸스, 카이오스, 루푸스, 드루수스, 술피키우스 그리고 킨나만이 아니다. 정치에서 소외되었다고 할 수 있는 여인들인 율리아, 리비아 그리고 아우렐리아만도 아니었다. 3편에서 마리우스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작은 도시 민투르나이의 일개 촌부의 마음마저도 콜린 매컬로는 독자들에게 깊이 체험토록 한다.(아아, 이 장면은 '풀잎관'에서 가장 멋진 장면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저마다 입체적인 면모를 지닌 독립적 인격으로 다가오고 그런 까닭에 마리우스의 성공과 파멸을 동시에 가져온 예언에 대한 집착도, 술라의 질투와 고독도, 루푸스의 정치에 대한 환멸도,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기 위한 드루수스의 절박함도, 미트리다테스의 학살로 문득 자신이 가야할 길에 눈을 뜨게 된 술피키우스의 회심도 다 생생하게 다가왔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풀잎관'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당대의 역사를, 역사란 무엇보다도 생생한 인간들이 활약하는 장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역사라는 말을 쓰니까 문득 영화 '변호인'에도 나와서 더욱 유명해진 역사학자 E.H 카아가 떠오른다. 그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그가 '대화'란 말을 쓴 것은 과거의 사실이라고해서 고정불변의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선에 따라 그 의미가 늘 새롭게 재조명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 말을 실감하게 된 것이 바로 '풀잎관'이었다.(아마도 그래서 갑자기 그를 떠올리게 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제 동맹시 전쟁을, 당시 주된 행위자였던 마리우스와 술라를, 그리고 로마와 이탈리아를 과거와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콜린 매컬로의 이 책을 통해 바뀌게 된 것들이 참 많았다. 특히나 예전엔 마리우스와 술라 모두 권력에 눈이 먼 이들로만 생각했었는데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로마와 이탈리아 반목의 원인이 되었던 로마 시민권 역시도 그것이 이탈리아인들에게 얼마나 절박했는지 잘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알게되어 그것도 모르고 마냥 로마 편만 들었던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카아의 '대화'는 과거의 역사가 동시대의 문제를 풀어가는데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풀잎관'은 여기에도 해당되었다. 솔직히 이것은 소설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정말로 '풀잎관'은 당대의 긴급하면서도 긴요한 문제에 대해서 좋은 참조가 될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이 '풀잎관'을 한 번은 꼭 벗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 역시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해서 그렇다. 그것은 바로 이주(移住)의 문제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이 문제가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바로 최근에도 시리아 난민 사태가 있었다. 난민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로 유럽 곳곳이 격한 논쟁과 갈등으로 시끌벅적했다. 더욱 난민을 통크게 받아들인 독일에선 올 새해 첫날에 난민들이 일으킨 쾰른 대성상 집단 성폭행 사태로 더욱 찬반양론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심각한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해 일찍 이주민을 유입시킨 유럽 사회에선 항상 그런 갈등이 있어왔다. 실제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유럽의 우익화는 늘어나는 이주민과 상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주민이 유럽의 정치 지형마저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 미래가 현재의 미국일 지도 모른다. 이주민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트럼프가 공화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려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나라 역시도 모두 알다시피 고령화 사회로 착착 나아가고 있고 심각한 저출산을 겪고 있다. 유럽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일 지도 모른다. 더구나 우리는 북한도 있다. 만일 통일이 되면 우리도 필연적으로 '풀잎관'의 문제를 겪을 것이다.


 '풀잎관'은 바로 그럴 때 능히 도움이 될 수 있다. 이탈리아인에 대한 로마 시민권 부여 때문에 로마 원로원에서 일어난 갈등이 지금과 진정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갈등은 3부에 걸쳐 내내 재현된다. 리키니우스-무키우스 법이 발단이었다. 이 법은 '마스터 오브 로마 가이드 북'에 따르면 'BC 96년 인구조사에서 가짜 로마 시민 발각 사례가 급증한 것을 성토하는 목소리라 높아지자(p. 124)' 이에 대응하여 가짜 시민을 가려내어 신규 등록자를 처벌할 것을 목적으로 한 법이었는데 그렇게 가짜 시민으로 등록한 대부분이 바로 이탈리아의 로마 동맹 도시들의 사람인 지라 특히 처벌 조항 때문에 로마가 이탈리아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가 원로원에서 첨예한 논쟁을 일으켰다. 이 법을 옹호하는 자들, 즉 차별을 주장하는 자들과 그 법을 반대하는 자들, 즉 포용을 주장하는 자들의 언설이 지금의 논쟁과 아주 유사하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 보면 포용을 주장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이유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일례로 포용 편에 섰던 루푸스는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디 리키니우스-무키우스의 법의 처벌 조항을 더 진지하게 들여다봅시다! 어떻게 우리가 군대와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우리가 더불어 공존해야 하는 사람들을 매질할 수 있습니까? 이 의사당의 일부 방종한 무리가 이곳 동료들의 혈통에 대해 비방할 수 있다고 한들, 우리가 이탈리아인들과 그렇게 다른 존재입니까? 이 점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 여러분이 숙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때려서 아들을 훈육하는 아버지는 나쁜 아버지입니다. 그 아들을 자란 후에 아버지를 증오하지, 사랑하거나 존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반도에 사는 우리의 이탈리아인 친족을 매질한다면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로마 시민권 획득을 막는다면, 속물적인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막대한 벌금으로 벌한다면, 탐욕스러운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집에서 쫓아낸다면, 냉담한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을 모두 합치면 얼마나 큰 증오일까요? 원로원 의원 여러분, 퀴리테스 여러분, 그것은 우리와 똑같은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품게 하기에는 너무나 큰 증오입니다.”(1권, p. 373~374)


 '더불어 공존해야 할 존재들이라면 증오만 부추기는 수단 보다는 사랑과 존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루푸스의 말은 우리의 현실에서 증오만 부추기는 정책을 폈던 국가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생각한다면 꽤나 설득력이 있다. 비근한 예로 과거 일본이 재일한국인에게 했던 '외국인지문등록법'이 있다. 범죄가 일어났을 경우에만 필요한 지문을 그것도 하필이면 재일한국인만 등록하게 했던 그 법은 재일한국인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었고 하여 일본의 재일한국인 사회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마저 엄청난 공분을 자아내어 그 여파로 일본 사회마저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또한 2005년 프랑스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이주민들의 폭동은 이주민들에게만 가혹한 경찰이 처사와 그것을 정책적으로 방관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 사회들이 이렇게 이주민들을 배제하면서 얻으려고 했던 것은 오직 안정이었다. '풀잎관'에서 이탈리아인들에게 시민권 주는 것을 결사적으로 거부했던 필리푸스와 카이오스가 내내 주장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그 정책이 가져다 준 것은 더 커다란 혼란 뿐이었다. 특히나 독일은 여기에 대해 명확한 반대 증거가 되고 있다. 독일도 프랑스와 비슷한 규모의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프랑스와 같은 혼돈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범국가였던 독일은 노동력이 되는 남성들이 아주 많이 사망하여 전후 독일 경제 부흥으로 노동력 수요가 급증하자 바깥 국가에서 이주민들을 대폭 받아들여야 했는데 그 때부터 이미 그들을 더불어 공존해야 할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이 독일 사회와 잘 조화될 수 있도록, 루푸스 말로 하자면 독일을 사랑할 수 있도록, 태도와 제도에 있어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서 그것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정비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일의 모습은 루푸스의 방법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풀잎관'이 좋은 참조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뜨거운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는 '풀잎관'에서 그 문제를 두고 등장하는 다양한 주장들을 우리가 있는 현재의 실제 사례들에 비추어 어느 것이 어리석고 또 어느 것이 현명한 것인지를 판단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풀잎관'은 결코 한 번의 감상으로 그치는 작품이 아니다. 반드시 오늘의 문제와 결부하여 몇 번씩 곱씹게 만든다. 카아의 '대화'엔 역사적 사실이 수동적인 습득의 대상이 아니고 적극적인 사유 참여의 대상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런 면에서도 '풀잎관'은 합당한 면모를 보인다. 누구의 주장이든 그것은 우리의 사유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콜린 매컬로는 뛰어난 필력으로 그 주장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담아내고 있기에(2권에서 필리푸스가 로마에 나타난 상서롭지 못한 현상들을 증거로 내세우며 드루수스를 공격할 때조차 그렇다. 거기서 필리푸스가 내세우는 많은 증거들은 설령 그것이 스카우루스의 말마따나 조작된 것임을 안다 해도 전혀 허무맹랑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 긴 목록은 그야말로 콜린 매컬로를 대단하게 보도록 만든다. 특히 그 목록을 빼곡히 채운 상상력과 왠지 납득하게 만드는 필력을. 소설에서 가장 증오를 받을 인물의 말조차 그렇게 세심하게 구성하다니, 이런 존중과 배려를 보면 콜린 매컬로야 말로 루푸스와 드루수스의 정신을 진정 실천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절로 거기로 이끌려 들어가 자신의 사유를 가필하게 된다. 다시 말해, 콜린 매컬로가 은근히 초대한 대화에 어느 순간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루푸스가 현실적인 측면에서 든 포용의 이유를, 2권의 드루수스는 좀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밝히는데,


 “우리 로마에는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내에서 우리는 모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왕처럼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느끼는 기분을 좋아하고 우리보다 열등한 사람들이 우리의 높은 콧대 밑에서 기어다니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왕 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정말로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하려면 무슨 핑계라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탈리아인들이 우리보다 열등하다는 그 어떤 자연적인 근거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2권, p. 120)


“이제는 우리에게서 이 무서운 악을 없애야 할 때입니다! 이 악이란 이탈리아에 있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간주되는 것, 우리 로마인들을 계속해서 특권층으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로마는 이탈리아입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로마입니다. 이제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자격을 줍시다!”(2권, p. 123)


 이것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우열의 기준은 누군가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한없이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준일 뿐인데 우리 역시 그것이 내게 이익이 된다는 이유로 타협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최근에 필리버스터로 더욱 우리들의 관심을 달군 '테러방지법'은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서도 '풀잎관'은 1권에서 루푸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우리의 사유를 요청한다.

 “유급 정보제공자를 고용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고국을 무기력하게 만들 질병을 수십 년 동안 확산시키는 꼴이 될 것입니다.  첩자들, 옹졸한 공갈범들, 그리고 친구는 물론이고 친척에 대한 끝도 없는 의심이라는 질병말입니다. 어느 공동체든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런 자들은 공포가 사람들을 지배할 때나 억압적인 법이 제정될 때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기 마련이지요. 제발 이런 비루한 자들이 생겨나게 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대로 로마인이 됩시다. 공포에서 해방된, 외국 왕의 술수 위에 있는 존재 말입니다.”(1권, p. 376)


 이렇게 '풀잎관'은 과거의 죽은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들을 단순한 감상자로 놔두지도 않는다. 소설에 있는 어떤 말이든, 사건이든 어느 순간 그와 비슷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슬쩍 다가와서는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은근히 묻는다. 발터 벤야민은 진리를 향한 읽기란 잠들려는 나를 뒤흔들어 깨우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풀잎관'의 독서가 정녕 그러하다. 되씹고, 곱씹다 어느새 사유의 지도를 그리게 된다. 그 지도는 어쩌면 지금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소마에 준이치라는 일본의 역사학자는 '상실과 노스텔지어'라는 책에서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그 자체는 담론이며 우리의 관념에서 상기됨으로써 처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상기 책, p. 21)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관념 속으로 지속적으로 들어와 집요하게 대화를 요청하는 콜린 매컬로의 '풀잎관'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로마 역사를 처음 만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된다. 지금까지 겨우 몇 줄이나 얼마 안 되는 페이지 속의 초라한 실체로만 보았던 로마의 인물들인데, 이토록 풍성하고 자세하게 만나다 보니 이제야 비로소 그들을 제대로 알게 되어 마치 처음 만나는 것과 같은 기분을 가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만들어나가는 로마의 역사 또한 어떻게 처음처럼 다가오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동맹시 전쟁'을 둘러싼 제반 상황을 '풀잎관'을 통해 지금에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더욱 이렇게 간주할 수밖에 없다. '풀잎관'은 로마 역사의 신대륙으로 인도한다. 인물도, 사건도, 과정도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그것도 지금 나의 현실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하여. 그러니 사유 역시 일신(一新)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소마에 준이치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개인을 기점으로 역사를 생각한다는 것은 (...) 자신 안에 과거라는 어둠이 스며들어 내가 해체될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몸을 내던지는 것(같은 책, p. 33)'이라고. 이 말대로 역사는 현실을 상대화시켜 지금의 내가 가진 생각을 해체하고 전복할 수 있다. 여기서 자유를 느낀다면 '풀잎관'은 한층 더 즐거운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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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8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1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2월의 일주일은 잠을 정말 적게 잔 것 같다. 축제는 원래 그 빈자리에서 그것의 즐거움이 더 뼈져리게 각인되는 법이다. 어제까지 그런 공동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 정신이 돌아오고 있다. 어쨌든 난 승리만을 바랄 뿐이고 그 때까지는 이길 수 있는 말을 끝까지 응원하련다. 실망할 것도 알고, 배신할 것도 알지만 그냥 더이상 패배는 원치 않으므로, 이런 쓸데 없는 말은 신간 추천을 하는 자리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떤 마음으로 내가 신간을 고르는 것인지는 선택의 투명성을 위해 밝혀 놓아야 할 것 같아서 굳이 던져 놓는다.


 그럼, 2월의 신간들 중 내가 추천하고 싶은 작품들을 소개해 본다.

 2월의 신간을 훑어 보는데 반가운 이름들이 눈에 띈다. 윤대녕과 김원일이다. 하지만 반가울 뿐이고 읽고 싶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윤대녕은 솔직히 그동안 많이 실망해서 더 이상 읽고 싶지 않다. 김원일도 '불의 제전'까지 포함해서 많이 읽었고 좋아하는 작가인데 이왕이면 나중에 좀 차분해진 다음에 만나고 싶다.

 이번 필리버스터 기간에 나는 틈틈이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을 읽었는데(그동안 너무 시간이 없어서 2월 후반에야 겨우 손에 잡을 수 있었다.), 다시 읽었는데도 너무 좋았다. 원래 난 이 작품을 통해 오츠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때나 지금이나, 이런 단언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그녀의 최고작이다.



 이 소설의 핵심은 작중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낸 모린의 편지 두 장에 있다. 거기서 모린이 오츠를 비판했던 것, 정확히 오츠가 그녀가 전혀 되어보지도 못했고, 경험해보지도 못했던 로레타와 모린의 삶을 담아냈던 소설 '그들' 자체에 대한 비판을 오츠는 어떻게 헤쳐나갔던가 하는 것이 '그들'의 '코어(CORE, 괜히 핵심이라는 말을 반복하기 싫어서 이렇게 쓴다)'다. 이것은 그대로 특히나 소외된 자들을 다루는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매서운 질문이다. 계급적으로 절대 그들이 될 수 없는 작가들이 그들을 묘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츠는 말한다. 설령 내가 그들에 관해 아무리 써도 정작 그들은 내 글을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그렇다면 문학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저 모사를 통한 자기 위안, 정당화일 뿐인가? 문학은 언제나 전위에 있는 실천을 질투하거나 무시하려는 자들의 비겁을 은폐시키고 있을 뿐인가? 이런 면에서 오츠의 '그들'은 비슷한 주제를 다뤘던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이건 사실 지금도 쓰고 있는 리뷰에 썼던 것인데 여기서 쓰고 있다. 아무튼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은 이런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으며 그래서 좀 더 차분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곱씹고 써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나라가 안팎으로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그게 안되는 것이다. 나 원, 리뷰 하나에 뭐 그렇게까지 말하나 싶겠지만 이건 '그들'에 대한 내 애정의 문제라서 그렇다. 정말 좋은 작품이기에 그 매력을 잘 보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은 것이다. 물론 전적으로 욕심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게 안 된다. 자꾸 신경이 다른 쪽으로 가서... 그래서 되도록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나중에 만나고 싶은 것이다. 나도 모르게 사설이 길어졌다. 이게 다 '그들'의 리뷰가 내 뜻대로 잘 써지지 않기에 그러는 것 같다. 어쨌든 바로 신간 추천으로 뛰어든다. 


 MOST WANTED


 1. 조 월튼, '타인들 속에서'

 조 월튼의 이 작품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아작에는 SF 덕후들이 서식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자기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출판사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조 월튼의 이 작품 정말 대환영이다. 2012년에 발표되어 SF 상의 양대산맥인 휴고와 네블러를 휩쓸고 그것도 모자라서 영국의 판타지 대상까지 먹어치운 무서운 작품이다. SF와 판타지 계가 이 작품에 이처럼 상을 몰아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동병상련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인 열 다섯 살의 모리가 SF와 판타지 소설책 덕후이기 때문이다. '타인들 속에서'는 그런 그녀의 일기다. 그러니 책덕후로서의 면모가 얼마나 많이 나올 것인가? 그런 모습에서 SF와 판타지 독자들은 자신들의 초상을 보게 되었고 그것이 이 책에게 무서운 수상 경력과 인기를 가져다 준 것이다. 단적으로 워싱턴포스트지의 리뷰어 엘리자벳 핸드의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SF와 판타지 팬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동안 남다른 취향으로 외로움과 그 고독이 사무쳐 눈물을 뚝뚝 흘려본 이라면 이 책을 통해 위안과 격려를 받게 되리라. 그리고 확인받게 되리라. 당신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so so ...


 2. 주노 디아스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

 

 '드라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 이어 세번째로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주노 디아스의 소설이다. 나는 이전에 나온 두 작품을 모두 읽었는데 그래서 당연히 세번째 나온 이 소설도 읽고 싶다. 유니오르가 계속 등장한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옴니버스 단편집이라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내내 만나온 등장인물이 계속 나온다고 하니 현재는 어떤지 궁금해 손에 들고 싶어진다. 이렇게 썼지만 솔직히 선정되는 게 더 걱정이다. 전의 두 작품을 읽은 지가 오래 되어 벌써 내용이 가물가물한 탓이다. 지금 헤아려보니 거의 백지 상태나 다름 없어서(아, 참으로 빈약한 나의 메모리여...) 아무래도 이 작품이 선정되면 리뷰를 쓰기 위해서라도 앞의 두 작품도 읽어야 할 것 같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싶다.

 





 3. 마이클 코넬리 '파기환송'


 미키 할러가 돌아왔다. 그것도 변호사가 아니라 검사로.

 '탄환의 심판'에서 우리는 회심한 그를 보게 되었다. 검사가 그 회심의 결과다.

 검사로 일하는 미키 할러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지만

 '나인 드래곤'에서 슬쩍 예고되긴 했지만 '탄환의 심판' 때처럼 미키 할러와 해리 보슈의 콜라보가 펼쳐진다는 점도 이 소설을 펼치게 만드는 충분한 유혹 거리이다.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이, 나로서는 나오면 읽고 싶은 게 마이클 코넬리 소설이다. 

 어차피 구입해서 읽을 거 신간평가단으로 읽으면 꿩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마당쓸고 돈줍고이지 않을까 해서 사심 가득 추천해 본다.







 4. 엘리너 캐턴, '루미너리스'

내가 가장 신뢰하는 맨부커 상을 그것도 최연소의 나이로 탔다니 작품의 내용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도대체 이 작품이 어느 정도이기에 그런 영예를 안을 수 있었을까?

 궁금증이 자꾸만 귀밑을 간질거린다.

 인생의 막장으로 내몰린 자들이 마지막으로 인생 역전을 꿈꾸며 찾아온 금광에서 벌어지는 살인 이야기라니, 흥미를 끌만한 요소는 제법 다 갖춘 것 같다. 제목의 '루미너리스'는 빛을 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과연 그들을 이끌고, 찾게 된 빛은 무엇이었을지 호기심이 인다.






 5. 도리스 레싱 '그랜드마더스'

 '

 




  2013년 한 편의 영화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바로 앤 폰테인이 감독한 '투 마더스'로, 평생 친구로 지내온 두 여자가 상대의 십대 아들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미국에서 '퍼펙트 마더'란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당연히 격렬한 논쟁이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 여파로 아래 포스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제는 '마더'를 빼버린 'ADORE'가 정식 제목이 되었다. 


 아무튼 이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것이었고, 영화를 보면 원작 소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도리스 레싱의 '그랜드마더스'였다. '그랜드마더스'는 2003년에 나온, 표제작 '그랜드마더스'를 포함 네 개의 작품을 엮은 책이다. 도리스레싱의 마지막 소설집이기도 한데, 과연 말년의 그녀는 어떤 심정으로 이런 소설을 썼던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꼭 한 번 읽어보고픈 소설이었는데 이렇게 나와주어 정말 반갑다. 이 기회에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도 다시 보고 싶다. 이 역시 내 빈약한 메모리 사양으로 영화의 자세한 내용들이 가물가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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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3-05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주노 디아스 신작이라니!!!

오드득 2016-03-06 23:21   좋아요 0 | URL
오! 시이소오님도 주노 디아스 좋아하시나요? 와, 정말 반갑네요^^

시이소오 2016-03-06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노 디아스 신작을 응원하는 의미로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리뷰를 올렸죠. 이 책 읽으면 누구나 주노 디아스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

오드득 2016-03-06 23:36   좋아요 1 | URL
시이소오님 말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저도 `오스카 와오`를 읽고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요^^ 리뷰도 얼른 만나보겠습니다^^

2016-03-08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1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상암동 YTN 건물에서 폭탄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김종인이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게 아닐지
박영선의 뻘짓만 아니었다면 오늘 일과
어제 이종걸의 분투로 필리버스터 중단이
오롯이 신의 한 수가 되었을텐데 아쉽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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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필리버스터를 통해 그간 몰랐던 매력적인 정치인들을 쏙쏙 만나다보니, 갑자기 나의 세미갓, 커트 보네거트가 생각났다.

 그의 에세이집, '나라 없는 사람'을 보면 '어떤 사람이 얼간이인가?'란 제목의 글이 있다.



  제목대로 얼간이에 대한 이야기다. 커트 보네거트가 생각하는 얼간이는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 스스로의 노력으로 타인의 말을 검증하지 않고 무턱대고 믿고 따라하는 사람이다. 커트 보네거트에 따르자면 우리나라는 KBS,MBC,SBS를 비롯한 조중동, JTBC를 제외한 온갖 종편 기자들, 필리버스터에서 박근혜 이름만 나오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 반사적으로 왈왈 짖어대는 새누리 의원들, 그리고 자신을 쉽게 해고하고 통신이든, 금융이든 마구잡이로 사찰하겠다고 하는 여전히 묻지마 지지를 보내고 있는 35%의 지지자들과 같은 얼간이들로 넘쳐나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커트 보네거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얼간이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우리나라 교과서에까지 등장하여 우리도 잘 아는 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이 한 마디 말 때문에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은 종교 탄압을 거행했다. 때문에 아시다시피 거기엔 종교는 없다.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아마 스탈린과 중국이 해석했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교는 인민을 부당한 현실에 수동적으로 길들이고 저항 의지를 앗아가는 '백해무익(실제, 중국에서 이렇게 표현했던 것으로 안다.)'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커트 보네거트는 그런 해석이 아니라고 한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본다.


*****

  "스탈린 치하에서 자행되었고 지금도 중국에서 계속되고 있는 종교 탄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런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독재자들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들이댄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그 말을 했던 1844년 당시, 아편과 아편 추출물은 누구나 복용할 수 있는 유일한 진통제였다. 마르크스 자신도 아편을 복용한 적이 있다. 그는 아편을 먹고 통증이 일시적으로 가라앉자 대단히 고마워했다. 마르크스는 그저 종교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 그걸 비난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금언이 아니라 일반적인 설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그런 얘길 썼던 당시 우리 쪽에서는 아직 노예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자비로운 신으 눈으로 과거를 되돌아볼 때, 카를 마르크스와  미합중국 중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가?

 스탈린은 마르크스의 언급을 법령으로 바꿔치면서 좋아라 했고 중국 독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나 그들의 목표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도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해, 사회주의자들은 종교와 신을 부정하며 그러기에 지독하게 불쾌한 종자들이라고 주장해왔다."

*****


  솔직히 커트 보네거트의 몇 배 이상으로 마르크스를 공부했을 스탈린이나 중국 독재자들이 마르크스가 어떤 의미로 그 말을 썼는지 몰랐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들은 자신들의 정권 장악에 방해가 되는 성직자나 종교 세력들을 몰아내려고 그 말을 이용한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때 많은 이들은 마르크스의 원저를 읽지도 않고 단지 그 말만 듣고 스탈린과 중국 독재자들이 성직자들과 종교 세력들을 일소할 때 모른 척 하거나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여겼으나 실은 스탈린과 중국 독재자들에게 농락당한 것 뿐이었다. 한 마디로 얼간이가 된 것이다.

 종교와 신을 부정한다며 사회주의자들을 불쾌한 종자들이라고 공격한 미국인들도 얼간이인 것은 다르지 않다. 솔직히 그들에게도 마르크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따윈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뇌리엔 오직 저 잡놈의 사회주의자들을 제대로 공격해서 지지자들을 줄여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을 테니까.


 힘을 가진 권력의 말에 진실은 없다.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약자를 보호할 때 뿐이다.

 그렇지 않고 권력이 약자를 내몰기 위해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라 한들 술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부화뇌동하는 것은 얼간이에 지나지 않는다.


 말은 무섭다. 펜은 정말 칼보다 강하다. 언론이 장악되고 한없이 한 편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우리나라. 지금의 필리버스터는 그 사실을 등골이 오싹하도록 알리고 있다. 4년 동안, 그들의 저 많은 노력들이 우리의 눈과 귓가에 일절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니! 경악은 분명 나만의 것이 아니었으리라. 많은 이들이 필리버스터를 보고, 국회까지 찾아가 방청하는 것은, 이명박 시절 나꼼수에 열광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 모두는 지금 사회에 대한 의식이 있다. 이명박 시절에도 그랬다. 분명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디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들을 수 없었다. 세상은 순탄하게 흘러가기만 했다. 왜 이럴까? 이상하다. 나만 괜히 삐딱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도 한다. 그래, 나 혼자 이런 생각가져서 뭐 하겠어? 내가 뭐라고? 자포자기와 자학도 한다. 약한 나, 외로움만 커져 간다. 그 때, 나꼼수가 나왔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네가 틀린 게 아니라고!


 우리는 바로 그런 지지와 응원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던 것이다. 신념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위축과 소멸을 향해가는 신념을 굳건히 하고, 결기를 돋울 지지와 네가 생각하고 있는 길로 계속 뚜벅뚜벅 걸어가도 된다라는 응원. 우리는 정말 그런 게 필요했던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사를 따라 내려가면 몸은 편하다. 하지만 의식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알고 있다. 적어도 괴물이 아니라면 말이다. 저 경사 아래로 내려가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 지 우리는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우리 정체성마저 좌우할만큼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도.

 그 본질적인 것을, 그것이 없다는 삶의 의미마저 부정당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한없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그래도 비탈을 오르려 매달린다. 손으로 단단히 흙을 거머쥐고 매달린다. 힘들다. 그런 나를 비웃고 내려가는 이들 사이에서 외롭다. 그 때, 나꼼수가 나타나 같이 올라가자며 내 엉덩이를 밀어주었던 것이다. 적어도 내게 나꼼수는 그랬다.


 비탈길을 오르려 애쓰는 이들에겐 정말로 그런 게 필요하다.

 희망은 상상만으로는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필리버스터가 그 일을 하고 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며,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내 몸과 엉덩이를 밀어주는 사람들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랜 시간 사막을 횡단하다 가까스로 오아시스를 찾은 이와도 같이, 반갑고 기쁘다.

 커트 보네거트도 그랬다. 너무나 냉소적이었던 그 사람, 아주 회의적이었던 그 사람. 그렇다고 희망을 버리지도, 변화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도 우리의 필리버스터 처럼 자신의 엉덩이를 밀어 줄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같은 글의 마지막에서 그는 그 사람을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파워스 햅굿(Powers Hapgood).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회주의자인데, 커트 보네거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

 나는 그들과 동시대인 사회주의자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인디애나 폴리스의 파워스 햅굿이다. 햅굿은 전형적인 촌뜨기 이상주의자였다. 사회주의는 이상주의다. 데브스처럼 햅굿도 중산층 출신이었고 이 나라에 경제적 정의가 더 광범위하게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좋은 나라를 원했다. 그뿐이었다.

 하버드를 졸업한 후 햅굿은 탄광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자 형제들에게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조를 결성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1927년에는 메사추체츠 주에서 무정부주의자 니콜라 새코와 바살러미오 반체티의 처형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햅굿의 부모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통조림 공장을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다. 파워스 햅굿은 공장을 물려받자마자 그것을 종업원들에게 넘겨주었고 얼마 후 공장은 파산하고 말았다.

 우리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만났다. 당시 그는 산업별 노동조합의 간부였다. 노동쟁의가 가벼운 싸움으로 번졌을 때 햅굿은 증언을 하기 위해 법정에 출두했다. 판사는 그를 보자 이렇게 물었다.

 "햅굿씨, 나와주셨군요. 당신은 하버드 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처럼 버젓한 사람이 왜 그런 삶을 택하셨소?"

 햅굿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존경하는 판사님, 그건 예수의 산상수훈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 팀 파이팅! (p. 22 ~ 23)

*****


 이렇게 커트 보네거트에게도, 우리들에게도 당신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이탈리아 감독 파솔리니가 말했던 반딧불 같은 것들이...



   그가 한 젊은이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1975년. 2월에 그는 한 글을 발표한다. '반딧불에 대한 논고'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거기서 그는 반딧불을 무솔리니와 같은 서슬 퍼런 독재 치하에서도 비록 반딧불처럼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절멸되지 않았던 민중들의 저항의 상징으로 삼았다. 결국 그 반딧불은 그보다 훨씬 광막했던 무솔리니 체제의 어둠을 몰아내었다. 그래서 반딧불은 파솔리니에게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쓰여진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은 희망과 저항 의지는 추상적인 상상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무엇이든 감각할 수 있는 실제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물론 이 책이 실제 목적하는 바는, 파솔리니가 논문에서 했던 절망, 그러니까 무솔리니 체제 아래에서도 생명을 잃지 않았던 반딧불이 현대 소비 사회에서는 소멸되어 버렸다는 절망에 반박하는 글이지만 말이다. 그는 파솔리니의 체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끈질기에 남아있는 반딧불의 계보를 여기서 들려준다.

 커트 보네거트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란 말로 경고한 것처럼, 그저 지배적인 해석과 현상에 함몰된 나머지 스스로 애써 찾아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타협하고 쉽게 포기해 버리는 바람에 놓쳐버린 희망과 저항의 흔적들을 말이다.

 위베르만은 말한다. 이미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 라고.


 희망도 그럴 것이다.

 필리버스터가 이렇게 찾아온 것처럼.

 '잘 알지도 못하기에 포기 역시 이르다'는 말을 이 순간, 단단히 새겨 두련다.

 그리고 커트 보네거트처럼 희망의 반딧불이 되어 준 필리버스터에 나온 의원들에게 이렇게 외쳐주고 싶다.

 우리 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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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2-29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100개정도 누르고 싶은 글..

오드득 2016-03-05 00:41   좋아요 0 | URL
앗, 기네스님 이런 격한 공감, 진심으로 너무나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2-29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팀 파이팅!!

오드득 2016-03-05 00:42   좋아요 1 | URL
시이소오님도 우리 팀이죠? 함께 파이팅 외쳐주기로 해요^^

2016-03-01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5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 원, 자야하는데 홍종학 의원이 워낙 마성의 필리버스터라 잘 수가 없네. 초반 우리나라 경제 실상에 관한 상세한 논의로 지금 우리나라 경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마구 경각심을 갖게 하고 7년동안 130일에 걸친 고강도 세무조사를 3차례나 받은 다음카카오 사태를 통해 정부가 어떻게 말 안 듣는 포털을 통제하는지 보여줘서 그동안 궁금했던 포털의 꼬리내리기가 확. 이해됨. 그것도 모르고 세월호 참사 때 다음 카카오 행위에 대해 욕만한 것이 좀 미안했음.
그 외에도 여러가지 새로운 문건으로 자꾸만 내 뇌리에 카페인을 들이부어주심.

도중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홍종학 의원 플리버스터 하는데 계속 방해하던 조원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홍종학 의원이 조원진 의원과 좋은 추억이 있다면서 함께 술마신 이야기를 함.
그 때가 공무원 연금 개혁 할 때로 여야 공무원 사회 대타협이 이루어져 기뻐 술마셨다고 함.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로 여야 합의고. 사회대타협이고 나발이고 뭐고 다 날아가버림. 정말 우리나라 민주주의 맞는지- -)

그 여파로 조원진은 자신의 지역구 사람들을 이끌고 당시 같이 합의에 참여했던 강기정 의원의 지역구로 감.
아시다시피 강기정 의원의 지역구는 광주.
조원진은 5.18. 광주 묘역을 참배했고 거기서 강기정 의원 옆에 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신나게 열창함.

그 이야기를 다 하자,
갑자기 그 뒤로 지금까지도 몇 시간이 지났는데
방해 잡음이 하나도 안 나옴.
조원진 뿐만 아니라 같이 계속 방해했던 하태경도
잠잠,
입을 어떻게 닫게 만드는지 좋은 방법을 배움.
좋은 추억이라 하면서 상대에겐 치명적 약점이 되는
을을 공개해버리는 것임.

이러니 마성이라 할 밖에. . .
필리버스터가 참 좋다.
이렇게 매력적인 정치인이 우리나라에 많다는 걸
알게되었으니.
몰랐던 여러가지 일도 상세히 배우고. 꿀잼.
지금 보니 조원진 나가고 없네.

이 좋은 걸 자주 좀 하시지.
슈퍼스타 K. 보다 재밌구만
그러고 보니 필리버스터와 슈퍼스타 K가
비슷한 것 같네

그런데 나 빨리 자야하는데 말이지. . .
(그런데 북플로 쓸 때 제목은 어떻게 적는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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