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안철수 때문에 마냥 갑갑하기만 했었는데

 이런 후보가 있었구나.

 저번에 안심번호로 후보 경선 투표 왔을 때 이 사람을 잘 몰라서 난 이동학을 찍었었는데...

 한 사람의 인격이라는 건, 원래 사소한 것에서 그 진실이 드러나는 법...

 하여, 나는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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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0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30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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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나는 지금까지 오감 중에 미각을 가장 소홀히 여겼고 음식 역시 생존을 위한 섭취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다. 맞벌이인 부모님 아래서 외로이 자라 집밥의 기억이 별로 없는 탓인 지도 모른다. 황석영 작가는 과거 홀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느라 부엌에서 멀어지자 가게에서 사온 간단한 인스턴트 음식들로 끼니를 때웠다고 하던데 나도 그랬다. 솔직히 잘 차린 밥상은 내게 식욕 보다 텅 빈 집에서 홀로 마지못해 끼니를 때워야 했던 시간의 외로움을 먼저 상기시켰다. 상 위의 풍경이 풍성하면 할수록 생선가시만큼이나 앙상했던 내 과거가 더 두드러져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음식에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으려 했다. 내게 밥도둑은 없었다. 밥도둑이 즐거운 식사를 달리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면 더욱 나와는 먼 존재였다. 내게 수저를 들게 만드는 진정한 신호는 식욕 보다는 허기였고 그것을 채우는 일도 정해진 시간에 태엽을 감아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왜 '황석영의 밥도둑'을 읽게 된 것일까? 실은 나도 잘 모른다. 단지 황석영 작가의 책이라기에 손에 들었고 처음 '철모에 삶아 먹은 닭 두 마리'를 읽을 때는 분명 그들만큼 곤궁했을 농부들의 닭과 돼지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서리해가는 추억 속 인물들에게 화부터 났었다. 게다가 이 책은 나를 당혹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본디 내가 음식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지만 이 책엔 생경한 음식들이 참 많이도 나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 페이지로 넘기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작가가 어찌나 하나의 음식에 얽힌 개인적인 추억담과 그 음식의 정보 그리고 만드는 방법을 흥미로우면서도 절묘하게 엮어내는지 이야기가 가진 중독성이 상당했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를 타칭 '조선의 3대 구라'라고 하더니만 헛소문이 아니었다. 잘 몰랐던 황석영 작가의 개인사를 알게 된 것도 좋았으나 특히 낯선 음식을 알아간다는 즐거움이 컸다. 나는 홍어에게 생식기가 있다는 것도, 그것으로 가격 차이가 심히 나는 암수를 구별한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러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어느 순간 다 읽어버렸다. 뚜렷한 동기는 없었으나 읽는 재미가 완독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냥 재밌었다고 할 수만은 없다. 페이지가 거듭될수록 어느새 마음 속에 자리잡은 질투의 감정이 차츰 커져갔던 것이다. 그에겐 참으로 많은 음식에 대한 추억이 있었지만 내겐 없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음식은 매듭이라는 사실이다. 음식은 그저 끼니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같이 먹는 사람, 함께 한 시간도 묶어 분별 가능한 하나의 마디로 만들어주는 존재였다. 삶은 어떻게 보면 모래강과도 같아서 단단히 묶어두지 않으면 사람도, 시간도 흘러가다 어느 순간 모래 아래로 가라앉아 망각되고 만다. 하지만 음식은 그걸 통조림처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적어도 황석영 작가의 개인적인 시공간에선 그랬다. 음식이 단단한 매듭이 되어 마치 책에 꽂아둔 책갈피처럼 작가가 누군가, 어떤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쉽게 찾아내선 그 추억을 오롯이 재현시켜 주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매듭이 음식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더라도 내 기억의 창고는 빈약했다. 빈 독의 바닥을 구르는 쌀 몇 톨. 씁쓸했다. 절로 서문의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아주 아프게.


그러나 배고픔은 어떤 먹을거리로든지 달랠 수가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 먹었던 음식의 맛에 대한 그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맛있었던 음식도 함께하는 이가 없으면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으며 넘쳐나는 풍성한 먹을거리도 고독한 식사의 허기를 달래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즈음 음식 프로가 부쩍 성행하는 것을 보며 음식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공동체성의 뿌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p.10~11)


 나는 홀로 먹는 것에 익숙했고 일부러 고수했다. 외로움을 되새기고 싶지 않아 지레 음식의 매듭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니 추억의 잔고가 별로 없는 것도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다. 나를 지키려고 들인 습관이었지만 나를 더 빈곤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제 깨닫는다. 진정한 풍요는 내 성의 견고함이 아니라 타인과의 결부에서 온다는 것을. 내게도 황석영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처럼 타인이란 존재가 있어아만했던 것이다.


 내게는 어쨌든 내 존재를 비춰주고 확인시켜줄 타인이라는 거울이 필요했던 셈이다.(p.48)


 어쩌면 깨닫는 것이 너무 늦어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황석영 작가가 넌지시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음식의 매듭은 그것이 유일무이할 때 더욱 단단해진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타관 객지에서 그런 강렬한 토속 음식은 알지 못하게 시달렸던 다른 종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달래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p.197)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오직 한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유성이 함께 한 사람과 시간을 한층 더 굳건하게 묶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이 작가가 다시 가 본 해남 땅에서 보았던 것처럼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읍내를 둘러보니 온통 순댓국, 삼겹살, 해물탕 같은 간판이 즐비했다. 어디나 어슷비슷한 식당이 전국화되고 있는 것이다.(p.207)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처럼 음식도, 맛도 양산화, 평준화 되고 있는 것이다. 단조로운 일상이 우리의 신경을 무디게 만들듯,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고유성을 상실한 닮은꼴의 음식들은 경험의 선명도를 떨어뜨린다. 결국 그렇지 않았다면 강렬했을 추억도 흐릿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처럼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는 것은 다만 먹는 순간을 즐겼다는 것 뿐이다. 시간의 소비만 있지 추억의 예금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는 이렇게 과거의 나와 다르지 않은 아이들, 현재의 나와 판박이인 어른들이 많다고 밝힌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은 정체도 모를 미국식 페스트푸드로 점심을 때우고, 어른들도 야외에만 나가면 그저 고기를 떡 벌이지게 지글지글 구워서 독주에다 실컷 마시고 쿵쾅거리는 가라오케 기계를 틀어놓고 법석댄다. (p.107)


 현실은 점점 타인과 더불어 오래 공유할 추억을 만들기 힘든 상황으로 가고 있다. 더구나 지금의 인간 관계란 헤어질 때 버릇처럼 말하는 '언제 한 번 밥먹자'라는 말의 공허한 울림과도 같이 형식적이면서 파편화되어 버린지 오래다. 나는 정말로 뒤늦게 깨달았는 지도 모른다. 지금의 현실이 내가 뭔가 하기엔 너무나 버겁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이런 내 모습이 과거의 나와 너무 비슷하다는 것을. 그 때의 나는 외로움을 무척이나 많이 느꼈지만 그 상황에 나를 수동적으로 길들이려했을 뿐,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하여 현재의 후회와 자책을 가졌으면서도 나는 어느새 또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래. 상황 탓은 그만두자. 그렇게 하여 본들 황석영 작가에 대한 부러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외부에서 나를 의탁할 곳을 찾고 그런 곳이 없다며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내가 먼저 그런 거점이 되자. 추억을 동냥하기 보다는 내가 먼저 나눠주기로 하자. 그것도 어디서도 대체가 불가능한 고유한 경험을. 이렇게 마음 먹는다. 앞에서 인용한 것에 바로 이어지는 말 그대로다.


 장아찌는 장독대가 사라지면서 백화점의 반찬가게로 옮겨갔고, 서로 담 너머로 장을 빌리거나 찬을 나누고 들밥을 함께 먹던 문화는 식구끼리의 외식문화로 바뀌었지만, 실천하기에 따라서는 회복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p. 107)


 동의한다. 실천이 중요하다. 나는 그것을 무엇보다 요리를 통해 해보려 생각한다. 이렇게 작정하게 된 것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책을 통해 음식이야말로 고유성의 발현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나 때문이다. 집밥의 경험이 거의 없었던 나. 내가 한 집밥을 누군가 먹고 즐거워한다면 그 때의 나에게도 위로가 될 것 같아서이다. 물론 내가 만든 음식으로 누군가를 즐겁게 만든다는 것이 지금의 내겐 턱없는 욕심이긴 하다만. 그래도 발걸음을 떼고 끝까지 걸어가 보고 싶다. 언젠가 내가 만든 음식 때문에 누군가 추억을 밥도둑처럼 즐거이 맛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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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바야흐로 행복 강박 시대다. 작년에 한 신문이 젊은층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세 명 중 한 명(33.9%)이 기쁨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에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과장해서 표현한 적이 있다고 했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남에게 뒤쳐지는 것이 싫어서라고 대답했다. 행복도 이제 경쟁 대상이다. 그만큼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러는 이유가 뭘까? ‘뒤쳐지기 싫다’는 말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현실 도피 심리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가져온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여기엔 개인적인 원인만은 아닌, 사회적인 원인도 있다. 학창시절, 나는 문제를 풀 때 내가 아는 것이 맞는지 틀린지 확실하지 않아서 불안한 문제일수록 빨리 정답을 확인하고 싶었었다. 해답을 향한 욕망의 크기는 내가 지금 느끼는 불안의 강도에 비례했다. 행복 강박도 동일하다. 불안할수록 집착하게 된다. 불안이 소멸된 상태로써의 행복에 대한 희구가 갈수록 절박해지는 탓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불안의 시대라 일컫는다. 북한은 연일 핵도발을 하고 있고 언제 해고될 지 모르는 비정규직 비율은 날로 높아지고 있으며 가계 부채 비율은 아주 심각한 상황이다. 다수의 경제 전문가들이 2017년에 우리나라에 커다란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 경고한다. 여기저기서 불길한 지표와 예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판이니 아무래도 가느다란 막대 위에서 위태롭게 돌고 있는 접시와도 같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행복에 대한 천착도 높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떤 행복이어야 할까? 너무도 불안한 우리는 그저 어서 빨리 안정을 얻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 해야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는지 따져 볼 여유가 없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파시즘은 언제나 사회가 한창 불안할 때 도래했다. 그처럼 우리는 커다란 불안 앞에서 쉽게 자유를 포기하는 경향이 짙다. 선택에 뒤따르는 위험 보다는 모방을 통한 안정을 취하려든다. 때문에 막연히 남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의 모델로 여기고 뒤쫓는다. 그것은 또한 타인의 인정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해서 더욱 견고해진다. 행복은 결국 기성품 같은 것이 된다. 치수는 미리 정해져있고 우리는 이제 자신의 기준을 그것에다 억지로 맞춰야 한다. 그런 우리들은 마네킹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는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의지로 선택된 것이며 외모는 근사해 보일지라도 내면은 공허하다.


 우리는 성공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타인으로부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지는 몰라도 자기 삶이 피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었을 때 과거에 자신이 한 일이 보람 있었다고 느끼기 보다 허망함을 느끼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p. 189)


 자전거를 탈 때, 우리 몸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 느끼지는 못해도 흔들리는 자전거 위에서 계속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불안과 행복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불안할수록 우리가 정말 해야 할 것은 행복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에 대한 숙고일 것이다. ‘법륜스님의 행복’은 그런 균형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30년간 법문을 강의한 내공으로 부드럽고 친절하게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며 사회와 가족 내에서 만나는 모든 갈등에 있어서 내가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먼저 관조하는 것이 왜 보다 현명한 방법이 되는지 그리고 현재에 충실할 것과 자신의 처지를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조언한다. 그런 조언들이 이 책엔 참으로 넉넉하다. 때문에 실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여기에 의탁해 풀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내게도 특별히 와닿는 조언이 있었다.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바탕에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깔려 있어요. 또 이런 자기의 자아상에 집착해서 자기를 우월하게 여겨요. 그런데 현실의 자기가 그만큼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해하는 것이지요.(p. 34)


 그런 것이었나? 내 부족함의 감각이 실은 내 우월함의 반영이었다니! 난 늘 자신을 겸손하다 여겼는데 실은 그것도 우월이 굴절된 잔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졌다. 법륜스님의 조언이 균형점을 옮긴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이제까지 전혀 서보지 못했던 자리에서 나와 관계 그리고 삶을 응시토록 하는 것이다. 기성품화된 행복은 불안의 부정에 따른 반향으로써 성립한다. 품고 헤아리기 보다는 배척하기에 급급하다보니 행복마저 브랜드(brand)가 되어 버린다. 즐김이 아니라 소유의 대상일뿐이고 실체도 없는 기호. 유토피아란 인간 실존이 가진 부정성을 부정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라는 찰스 틸리히의 말을 믿는다면 유토피아란 브랜드화한 행복의 극대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비롯하여 많은 유토피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디에서나 늘 폭력적인 배제와 억압이 항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나치의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유태인을 생산했다고도 말한 바 있다. 즉 유토피아는 배제와 억압의 폭력으로 성립되고 지탱되는 것이다. 


 축소판인 맹목적 행복도 그러하다. 뒤쳐지기 싫어서 행복을 과장해서 표현했다고 많은 이들이 대답했듯이, 여기에도 서열을 매개로 한 배제는 그대로 통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륜스님은 내 행복을 위해 희생된 타인을 먼저 고려하라고 말한다. 불안의 공포로 자신의 시야를 가리기 전에 함께 떨고 있는, 나보다 못한 타인을 먼저 보라고 하는 것이다. 외면이 아닌 직시, 배제가 아닌 배려의 요청이다. 그리고 참된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시작이다. 불안이 전염시킨 오늘날 행복의 행태를 볼 때, 이런 법륜스님의 ‘낯선 자리’로의 인도는 내게 적절해 보인다. 낯선 자리로 가는 것은 스스로를 다양한 삶의 맥락 속으로 삽입하는 것을 뜻한다. 자신을 산포하여 천변만화 하는 것이다. 어디든 서 있을 수 있는 이런 자에게 행복은 더 이상 어딘가에 있는 지점이 아닌, 지금이라도 당장 결심만 하면 되는 선택 사항일 것이다. 결과의 중시로 무시되었던 과정이 복원되고 미래 역시 현재 앞에 꼬리를 내릴 것이다. 이 비전을 법륜스님은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는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


 정녕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법륜스님의 조언 옆에 나를 놓고 비교해 보니 솎아낼 것도 많고 용기도 아주 많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도 지금 당장 나의 바깥으로 첫 발을 내밀어 보려 한다. 법륜스님이 '자꾸 “내일부터” “모레부터” 하면서 미루지 말라(p.25)'고도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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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3-13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 강박..... 그러게요. 진짜 그래요.

만나는 많은 분들의 목표가 행복한 삶이라고 하는데, 저는 굳이 행복해야 하나? 라고 반문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전 이 책을 구매하지 않았어요, 제목에 행복이라고 쓰여있는 부분이 조금 불편했어요. 아하하.

행복한 기분이 즐거운 기분, 무엇인가 잘 되는 상태를 말한다면
그 반대의 균형점도 중요한 게 아닐가 싶었어요. 괴롭더라도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말이죠.

헤르메스님, 그런데 균형이요, 너무 어려워요... ㅠㅠ

오드득 2016-03-13 23:22   좋아요 0 | URL
와아, 마녀고양이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정말 반가워요^^ 마녀고양이님은 저랑 통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네요. 저 역시 행복해야 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습니다. 실은 어떤 상태가 정말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구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행복 때문이 아니라 정청래 의원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리뷰도 사실 그것을 중심으로 썼었는데 너무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것 같아 다시 썼어요. 저는 이 책, 정청래 의원 컷오프 되는 날 너무 상처를 받아 치유 용으로 찾아 읽었어요. 들끓는 내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쉽고 차분한 어조가 필요했거든요. 원래 리뷰엔 정말 엄청 분노도 쏟아냈었는데^^ 어쨌든 지금 전 완전 절망 상태입니다. 더불어 민주당에 과연 미래가 있는지조차 의심할 정도로... 그런 가운데 행복을 생각해 보게 되었네요. 어떤 정해진 상태가 아니라 지금 현재 자체가 어떤 모습이든 얼마든지 행복이 될 수 있다는 법륜스님의 말을 믿고 싶어졌어요. 그거라도 있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무튼 현재 저는 그러네요. 어쨌든 마녀고양이님 정말 정말 반갑습니다^^

마녀고양이 2016-03-14 21:14   좋아요 0 | URL
이렇게 격하게 반가와해주시다니! ^^

저도 정청래 의원 컷오프로 엄청나게 상심하고, 오늘 이해찬 의원 컷오프로 민주당을 계속 지지해야 하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대표를 믿고 있고, 그 분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동안은 그냥 따르려고 합니다. 선거 때 보면 알겠지요.... 김종인 대표의 능력인지, 오만인지 여부를요.

2016-03-15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6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라마 '시그널'이 오늘로 끝났다. 아니, 이젠 어제인가?

 원래 '싸인'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김은희 작가였지만, 보다 더 이 드라마를 특별히 챙겨 보게 만든 것은 우연히 예고편에서 본 이재한(조진웅 역)의 다음과 같은 대사 때문이었다.


"거기도 그럽니까? 돈 있고, 빽 있으면 무슨 개망나니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살아요?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


 왜 이렇게나 이 대사가 마음을 울렸을까? 분명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자각 때문이리라.

 그것을 타파하고픈 변화의 갈구, 목소리에 실린 절박함이 느껴져 1화 방영때부터 각잡고 지켜보게 되었다.


 한 마디로 좋은 드라마다. 이제 겨우 3월이지만 올해 최고의 드라마라고도 부르고 싶다.


 포스터 역시도 역대급! 정말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시그널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드라마적 대답이 아닐까 싶다.

 박해영과 이재한이 무전을 주고 받으며 한결 같이 하는 말, "포기하지 않으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그대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 끝까지 갑니다."


 라는 이재한 형사의 말이 뭉클한 것도 제발 그렇게 되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온전히 드러났으면 하는 우리의 간구가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설정 또한 세월호 참사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혹시 드라마 보실 분들은 여기서 멈춰주세요.)


 일단 1화에서 부터 15년이 넘도록 경찰서 앞에서 자기 딸을 유괴 살해한 범인을 잡아달라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과 겹친다.



 과거의 이재한 형사와 현재의 박해영 경위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하필이면 무전기라는 것도 그러하다.



 이는 세월호 참사 당시 우리의 눈물을 많이도 쏟게 했던 아이들의 핸드폰을 많이 연상시킨다.

 배터리가 닳은 무전기로 통신할 수 있게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결코 사건을 이대로 미제로 남겨둘 수 없다는 이재한 형사의 절박함이었다. 세월호 참사 때 아이들이 부모에게 보낸 문자에 담겨진 것도 그런 절박함과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이 무전기는 1화에서 유류품 상태로 박해영 경위에게 발견된다. 죽은 자가 남긴, 정작 그 장본인은 아직도 찾지 못한 그런 자의 유류품으로. 산자와 만나는 것이다.

 팽목항에서 아이들의 유류품으로 나온 핸드폰들과 똑같이 말이다. 이런 유사성으로 드라마의 무전기는 세월호 아이들의 핸드폰을 은유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드라마에서 과거와의 무선은 언제나 11시 23분에 일어난다.



 이 시간도 그대로 세월호 참사를 반영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 11시 23분.

 정확히 모든 공영 방송에서 공히 '세월호 승객 전원 구조'가 보도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오보였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과거와의 무선은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그것을 위해서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절박함에서 일어난다.(결국 미제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이재한 형사의 의지도 그런 마음의 연장이다.)

 이는 11시 23분에 일제히 전국으로 보도된 그 오보를, 과거가 바뀌어 그것이 사실 보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이어진다.

 11시 23분은 비극적인 과거를 바꿔,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절박함의 시간이다.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또한, 마지막 화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되는 빨간 목도리도 세월호 참사를 반영한다.

 한 장면이 인상깊었다.

 이재한 형사가 쓰레기 하치장에서 열심히 빨간 목도리를 찾고 있는데 박스 줍는 할머니가 그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나타난다.  그런데 그 두른 모습, 가만히 보면 세월호를 잊지 말자는 노란 리본과 비슷해 보이지는 않는가?




 왜 하필이면 결정적인 증거가 목도리인 것일까? 그것이 세월호 리본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너무 나간 해석일까? 하지만 이재한이 미국에서 받은 증거 사진에 담겨진 빨간 목도리의 모습이라든지,


(이것을 거꾸로 놓고 보면 세월호 리본과 비슷하다)

 

 할머니가 두른 모습을 보면 그렇게 확대 해석인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이 빨간 목도리는 박해영의 형 박선우가 죽었을 때 그를 죽인 경찰이 가지고 간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박선우는 그야말로 세월호 참사 때 죽은 아이들을 상징하고 있다.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과 세월호 참사는 이렇게 만난다.

 그것이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서 일어난 비극이라는 점과

 하필이면 그것을 주도했던 것이 경찰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나 박선우의 경우, 그를 죽인 경찰은 그대로 세월호 참사 때 아이들이 수장되는 것을 방관한 해경을 나타내고 있다. 경찰이 고등학생을 살인한다는 설정이 그냥 나온 것 같지는 않다. 해경을 연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다시 말해, 경찰이 죽인 박선우는 해경이 죽인 세월호 참사 아이들이다. 빨간 목도리는 바로 그 방에서 발견되었다. 이 희생자와 현장 때문에 빨간 목도리는 세월호 리본으로 보인다.



 여기에 박선우를 죽인 경찰을 찾아온 이재한 형사가 하는 말이 더욱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 아이는 어딘가 자신을 지켜 줄 어른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 어른을 찾았던 거야. 자기 가족을 지키려고."


 어른... 자신들이 언제 익사할지 모르는데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해경들을 보면서 세월호의 아이들 역시 애타게 찾지 않았을까? 자신들을 지켜줄 어른을...

 그런 마음이 선우에게도 있었고, 때문에 선우는 그대로 세월호의 아이들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으로 인해 붕괴된 가정을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키고 싶다는 선우의 열망은 세월호의 아이들 역시도 가지고 있었으리라.


 이렇게 드라마 '시그널'은 설정과 주제 모두에서 강력하게 세월호 참사를 환기하고 있으며 보는 우리들에게 포기하지 말 것을, 미제로 남겨두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재한 형사의 절박함이, 비분강개가 내게 더욱 와닿았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기에.

 그래서 더욱 작가는 이재한 형사의 뚝심을 두드러지게 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가 하나의 푯대가 되어 포기하려 하고 마음 다잡지 못하는 우리들이 보고 따라올 수 있도록.

 마지막 화에 나온 차수현 경위가 이재한 형사와 자신의 옛 사진을 바라볼 때 배경에 있었던 빨간 등대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또 그 장면은 팽목항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팽목항에서 유가족이 아이들을 찾고 싶어하는 마음과 차수현 경위가 이재한 형사를 찾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닮아 있었기에...


 다시 보면 훨씬 더 상세하게 잡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허락한다면 꼭 다시 보고 싶다.

 드라마 '시그널'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더우기 세월호 참사에 대한 드라마적 응답은 처음이 아니던가!


 그건 그렇고 결말 부분,

 역시나 김은희 작가의 작품답게 한껏 열려있다. 예상은 했었다. '싸인'도, '유령'도 그랬으니까.

 그래도 이재한 형사가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너무 모호해서 마치 시즌 2를 염두에 둔 것처럼도 보인다.

 (나오려나? 나오면 정말 좋겠지만...)

 

 나는 이재한 형사가 가지고 있었던 무전기 때문에 이게 혹 김은희 작가의 특기인 언해피 엔딩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었다. 무전기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불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절대 자신이 있는 요양병원으로 오지말라고 했던 문자.

 이것은 분명 미래의 누군가가 알려줬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무선이 이뤄진다는 말.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이재한 형사가 가지고 있는 무전기가 미래의 누군가에게 들어가야만 가능하다.

 과거와의 무선은 어디까지나 이재한 형사의 무전기로만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오직 하나밖엔 없다.

 과거에 그랬듯이 이재한 형사가 죽어야만 가능하다. 과거가 바뀐 후, 15년동안 이재한 형사가 계속 무전기를 가지고 있는 장면에서 보듯 이재한 형사가 살아있을 경우 박해영은 무전기를 가지지 못한다. 무전기는 늘 이재한 형사에게만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요양 병원엔 장의원이 보낸 조폭들이 이재한 형사를 수색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장의원의 도시 재개발 비리를 인터넷으로 폭로한 것도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킨다. 오프라인 언론이 침묵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주로 많이 말했던 것은 인터넷이었으니까.)


 이런 이유로 그 때, 이재한은 납치되어 실종되거나 죽었고 뒤늦게 도착한 차수현과 박해영이 무전기만 수습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왜 요양 병원에 오지말라고 한 것일까?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어쨌든 썩 편한 결말은 아니다.

 

김은희 작가답게 연애엔 별 배려가 없다. 

(이래서 공중파는 아예 생각 안했는 지도)

흑...보면 볼수록 불쌍한 차수현 경위...

하긴, 이재한 첫사랑도 그렇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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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3-1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그널에 홀릭해서, 금토를 기다렸는데..... 어제 끝났네요.
시그널 시즌 2를 논의 중이라는데, 나왔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열린 결말이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작가가 전달하고 싶었던 ˝포기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라는 메시지는 잘 다가왔으니까요.
우리, 포기하지 말아요. 쪼옥~

오드득 2016-03-13 23:24   좋아요 0 | URL
물론입니다. 이재한 형사를 따라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겁니다^^
시즌 2도 포기하지 말고 제발 나와주세요... 치지직... 치직...
 
살인해드립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로런스 블록 지음, 이수현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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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켈러(Keller). 주인공의 이름이다. 모음 하나만 바꾸면 킬러(Killer)가 된다. 주인공의 직업이다. 그는 살인청부업자다. 의뢰를 받으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날아간다. 나이는 중년, 일처리는 야무지고 뒷처리가 깨끗해서 업계에서는 제법 인정을 받고 있다. 덕분에 의뢰는 끊이지 않고 노후 대비도 튼튼하다. 하지만 능력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어서 삶은 외롭고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장거리 세일즈맨을 닮은 업무 특성상 그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어딘가에 도착할 때마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란 여기가 과연 자신이 정착할만한 곳인가 알아보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머물게 되기를 희구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좋은 곳에 못처럼 박혀선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며 보통 사람처럼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직업이 별스럽다 뿐이지 그는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일 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사이코 패스도 아니고 어떤 뚜렷한 계기가 있어 살인청부업자가 된 것도 아니다. 그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저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와버렸을 뿐이라고 한다. 생업으로 삼을 작정도 아니었고 관심은 물론 소질도 없었는데 그저 몇 번 하다보니까 어느새 직업이 되고 말았다고. 그리고 자신의 고백에 결론을 내듯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진로는 준비하는 게 아니야. 중간에 우연히 그 일에 대비하게 만든 사건들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진로는 선택하는 게 아니야.(p.158)


 지금의 모습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저 삶이 흐르는 곳으로 '어쩌다 보니' 배를 타고 떠내려가다 문득 정박하게 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 대다수가 직업을 가질 때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켈러의 방황이나 고민 혹은 욕망에서 우리의 닮은 꼴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 번쯤 지금의 삶이 뭔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마치 한참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가다 틀린 지도를 갖고 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아이처럼 실은 내가 가고자 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으로 왔다고 느낄 때가. 그런 기분을 가져본 이라면 켈러에게 많이 공감할 지도 모른다. 로런스 블록은 켈러를 평범한 사내처럼 보이도록 묘사하고 있고 켈러의 이야기는 갑자기 삶이 공허를 느껴버린 중년의 이야기로 읽어도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이제 매튜 스커더 탐정 시리즈로 우리에게도 제법 이름을 떨친 로런스 블록이 98년에 불현듯 내놓은 ‘살인해드립니다’는 그런 켈러의 이야기다. 장편은 아니고 열 개의 에피소드가 들어 있는 단편집이다. 이 작품은 장르상 하드보일드로 분류된다. 그러고 보니 켈러의 이야기들의 뿌리가 되는 하드보일드도 실은 공허함의 발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하드보일드는 더쉴 해미트의 '말타의 매'에서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해미트는 주인공 샘 스페이드의 입을 통해 자신의 하드보일드가 어디로 향해 갈 것인지 일러 준 적이 있다. 샘 스페이드는 자신이 언젠가 맡았던 한 사나이의 실종 사건을 설명하는데 알고보니 그 사나이는 실종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길을 가다 위에서 떨어지는 벽돌에 목숨을 잃을뻔한 일을 겪고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 자신의 삶이 공허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나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해미트는 현대인의 영혼을 좀먹는 공허와 불안은 다름아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영역의 협소에서 초래된다고 하면서 하드보일드를 통해 무엇보다 한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과 결단을 강조해 갈 것이라 천명했다. 세상의 논리 보다는 자신만의 논리로 움직이는 샘 스페이드는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그 뒤를 이은 필립 말로와 루 아처에서도 그건 변함없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살인해드립니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열 개의 에피스도가 모여있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제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주제가 바로 '선택'인 것이다. 열 개의 에피스도를 주의 깊게 읽다보면 켈리를 중심으로 하여 이 선택이 처음의 '제로'에서 점점 더 그 영역을 넓혀가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켈러는 첫 에피소드인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에서 이미 자신이 정착할만한 곳을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여, 살인을 그만두고 그의 정착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러는 켈러의 결정이 너무도 갑작스러운 지라 결말이 좀 억지스러운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좀 더 세세하게 들어가 보면 왜 결말이 이렇게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로런스 블록이 켈러의 이야기를 통해 정말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로런스 블록이 그 이상향에 켈러를 머무르지 못하게 한 이유, 그것은 켈러에게 아직 아무런 주체적인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그 곳은 원해서 온 곳이 아니었다. 살인 의뢰를 처리하러 들른 곳이었다. 그런데 제거 대상인 '잉글먼'이란 남자는 정부가 증인 프로그램으로 보호하는 자였다. 그는 정부에 의해 강제로 이름을 바꾸고, 사는 곳을 바꾸고, 삶마저 바꾼 자였다. 켈러에게 완벽하게 이상향으로 보였던 그 곳은 실은 강제성으로 넘치는 곳이었다. 그는 잉걸먼의 바뀐 삶을 보면서 그런 독단성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상향이지만 개인의 의지는 전적으로 배제된 공간. 이것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된다.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 이는 그대로 개인의 의지가 전무하다는 것의 표명 아닌가. 사실 개의 이름이 하필이면 군인을 뜻하는 솔저라는 것도 이것을 나타낸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겉모습이 아무리 완벽하게 보인다 해도 그 곳은 켈러의 정착지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단순히 겉모습에 현혹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켈러에게 정착의 동기를 강하게 심어준 한 웨이트리스의 결혼 반지가 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암시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공허를 발견하는 순간은 동시에 그동안 세상이 내 두 눈에 콩깍지처럼 씌워놓았던 현혹이 벗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이런 순간이 많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청부살인업자라 그런지 주로 의뢰인의 정체와 살인 의뢰의 진짜 목적이 밝혀질 때 잘 나타난다. 때로 의뢰인은 켈러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며,(어떤 때는 목소리 변조로 성별마저 다를 때가 있다.) 의뢰의 이유도 의뢰인이 밝힌 것과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그 때마다 켈러는 자신의 의지로 현혹으로 왜곡된 질서를 바로 잡는다. 왜곡과 교정이 접점되어 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버지의 사진이다. 어릴 때 켈러의 어머니가 아버지 사진이라고 주었던 군인 사진은 사실 진짜 아버지가 아니었고 사진관에서 진열하기 위해 쓴 장식용 사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으로 뿌리 없는 자신을 자각하고 스스로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빨간 알약을 먹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네오가 그랬듯이 우리는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진짜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공허의 발견은 끝이 아니고 어쩌면 내 삶을 보다 더 진정하게 살기 위한 시작인 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결혼반지에 대한 진실을 안 켈러는 자신의 선택으로 바로 대상을 살해한다. 모든 것이 개인의 의지를 압도하고 있는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개인에게 선택할 의지가 있음을 입증하는 행위를 말이다. 때문에 결론이 그렇게 난 것이다. 거기서의 살인은 세상의 현혹에서 벗어난 개인 의지의 자유로운 구현을 의미하고 있다. 의뢰인의 진짜 정체와 목적이 밝혀졌을 때 켈러의 살인이 그러했듯이.


 (비록 로런스 블록은 이 에피소드를 쓸 때만 해도 이것으로 끝낼 생각이었지 이어갈 작정은 아니었다고 해도) 우리는 여기서 열 개의 에피소드 전체를 관통하며 주제에 있어서 대립하고 있는 두 지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하나는 선택이며 다른 하나는 그 선택을 막는 현혹이다. '살인해드립니다'에서 정말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주인공이 어떻게 대상을 제거하느냐가 아니라 바로 이 현혹과 선택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에 있는 것이다.


 에피소드가 나아갈수록 켈러의 선택 강도도 높아져 간다. 그저 의뢰 대로 대상만 착실하게 제거했던 그가 이제는 자기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제거 대상이나 제거를 할지 말지까지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현혹도 교묘해져 간다. 마치 어릴 때 오락실에서 했던 슈팅 게임에서 한 라운드의 보스를 물리치면 뒤의 라운드에서 더 강한 보스가 나오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제거 대상을 임의적으로 선택하여 보다 주체적인 된 켈러에 뒤이어 나오는 세번째 에피소드인 '켈러의 상담 치료'에서는 세상의 현혹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와 이렇게 말한다. (물론 진짜 아버지는 아니다. 켈러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에피소드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켈러에게 그 의미를 찾도록 하는 상담 치료사가 아버지와 비슷한 위치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분석가가 실은 저항하는 개인에게 아버지의 질서를 다시금 강요하는 자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디이푸스'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이며 이 때 상담 치료사는 사회 자체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가 인생의 모든 것을 선택했다고 보는 형이상학 이론이 있어요. 사실은 태어난 부모도 우리가 선택했고,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의 의지가 반영된 일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사고도 우연도 없다는 겁니다. (p. 106 ~ 107)


 마치 요즘 유행하는 아들러의 논지를 짧게 요약한 것만 같은 이런 말로 아버지이자 사회 자체이기도 한 상담 치료사는 켈러에게 실은 그 어떤 것도 강요는 없었으며 모든 것이 다 네가 선택한 것이라고 현혹한다. 켈러는 이 말에 혹하며, 그를 진심으로 믿고 갱생의 기회를 가져보려 하지만 결국 그 마음은 배반당하고 만다. 여기서 배반의 계기가 실로 의미심장한데 그것은 하나의 개 때문이었고 또 그 개가 매개가 된 불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개의 이름이 '넬슨'이다. 유명한 영국의 해군 제독의 이름인 것이다. 처음 나온 개의 이름은 '솔저'였다. 솔저와 넬슨 모두 군인인 것은 같다. 하지만 솔저는 명령을 받는 자고, 넬슨은 명령을 내리는 자다. 개의 이름이 솔저에서 넬슨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대로 선택으로 나타나는 켈러 개인의 자유 의지가 그만큼 더 강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상담 치료사의 아내를 유혹한다.(물론 유혹할 당시에는 켈러가 이 사실을 몰랐다.) 이 에피소드가 주로 정신 분석을 소재로 하고 있고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임을 생각한다면(아디사시피 정신분석학에서 이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는 개인을 사회에 종속시키는 강력한 기제(機制)로 모든 사회화의 기반이다.)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 상담 치료사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것은 그대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의 중대한 위반이 된다. 이것은 그대로 사회의 중대한 기반을 허무는 행위이기에 동시에 가장 강력한 개인의 저항 행위이기도 하다. 로런스 블록은 이 정도로 커다란 반항이었기 때문에 개의 이름을 하필이면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군인 중의 하나인 '넬슨'으로 지었는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넬슨이라는 개는 개인의 의지가 충만한 주체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로런스 블록은 그 개를 상담치료사를 죽인 뒤에 가지도록 한다. 억압하는 사회가 붕괴되어 비로소 자신의 온전한 주체성을 되찾은 것과 유사하게 말이다. 뒤이은 에피소드에서 개는 켈러가 가장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대상이 되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이제 켈러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저 바깥이 아니라 내부로 향한다.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이상향이 아니라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일에 있어서도 주체성을 발휘하는 영역이 점점 더 확장되어 간다. 그는 이제 단순한 살인 기계가 아니다. 그는 정보를 모으고 때로는 대상을 직접 만나기까지 하면서 탐문하며 스스로의 추리를 통해 사회가 강요한 질서가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질서를 만들어 나간다. 그 지점에서 그의 암살 여정은 일종의 영토 전쟁이다. 세상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하나하나 확장해 나가는 싸움인 것이다. 그럴수록 세상은 점점 더 허약한 모습을 보인다. 켈러 세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실제 아버지라고도 할 만한 화이트 플레인스의 노인이 제거 대상을 혼동하거나 쌍방 의뢰를 받는 등 해서는 안 될 실수를 자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실수를 바로 잡는 것은 언제나 켈러다. 그만큼 그는 내적으로 성장한다.


 마지막에 켈러가 열의를 담아 하게 되는 우표수집은 거기에 대한 결정적 증거라고 해도 무방하다. 처음에 그는 영원히 안주할 곳을 찾으려 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세상에 수집되려는 욕망이었다. 거기서 주체는 세상이었고 그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세계의 우표를 모은다. 그가 스스로 선별한 시기와 대상에 따라 세계가 수집되는 것이다. 관계는 전복되었다. 이만큼 강고해진 그의 주체성을 잘 드러내는 비유도 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우표가 된 세계엔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더 이상 개인에게 현혹의 힘을 뻗칠 수 없는 민낯의 세계를 나타내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작고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집어야만 하는 얇은 우표는 그대로 내가 공허에 눈을 뜨고 내 자신의 의지를 믿고 써보리라 결행한 순간 현혹의 힘을 잃어버린 세계가 어느정도까지 허약해질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이제 더이상 세계는 개인에게 아무런 불안도 고통도 주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켈러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대사는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이야기를 들어주실 필요는 없어요. 이미 행복하니까." (p. 444)


 '살인해드립니다'는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근저엔 우리도 마주할 수 있는 삶의 공허에 눈을 뜬다는 것의 의미와 그랬을 경우 놓이게 되는 세상의 현혹과 개인의 선택 사이에서의 갈등을 담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비록 소재야 덥석 손잡아 주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해도 충분한 공감과 함께 계속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이렇게 보게 된 것이 최근 내가 켈러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살인청부업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 역시 요즘 자꾸만 알 수 없는 허무에 젖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많이 생각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불안한 적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 켈러를 만났고 그에게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는 마치 친구의 고백을 읽듯 그의 이야기를 살갑게 읽었고 그의 고민에 내 고민을 투영해 나갔다. 어쩌면 여기서 지금까지 내가 쓴 모든 말은 그토록 안정과 희망을 갈망했던 켈러만큼이나 절박했던 내 마음이 걸러낸 언어일 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켈러가 보여준 길을 내가 가야 할 길로 믿고 싶다. 공허의 깊은 늪에 빠진 지금, 거기서 무력감과 불안만 길어내기 보다는 이 순간이 실은 보다 더 제대로 내 삶을 정비할 순간이라 생각하면서 중단없는 모색과 꾸준한 노력을 향한 의지를 돋우고 싶다.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길, 싸움은 직접 맞부딪쳐서 자신과 상대가 가진 힘과 그릇의 크기를 가늠하는 기회라고 했다. 그와 똑같이 나도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고 앞이 보이지 않지만 켈러를 믿고 두터운 연막처럼 무럭무럭 나를 덮쳐오는 세계라는 것에 부딪쳐 볼 생각을 한다. 지금 내 불안을 초래하는 세상의 힘이 실은 현혹에 불과하다는 켈러의 말을 뇌리에 새기면서 말이다. 정말로 힘껏 부딪혀본다면 지금은 커다랗게만 보이는 세상이라는 것이 한 장의 우표처럼 작고 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될 지도 모르겠다. 부디 켈러의 마지막 말을 나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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