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의 50가지 그림자
F. L. 파울러 지음, 이지연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진짜 기발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아주 먹음직스럽게 노릇노릇 구운 통닭을 표지로 하고 있는 '치킨의 50가지 그림자'는 제목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얼마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E.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패러디 하고 있다. 그것도 표지처럼 실제 통닭으로! 읽다보면 도대체 이런 기막힌 생각을 한 작가가 누굴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데, 하여 이름을 살펴보면 F.L 파울러. 하하하! 작가 이름조차 패러디다. E의 다음 알파벳을 쓴 F.L 이라니! 이것만 봐도 가명일 게 분명한데,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페이지에 보면 이름은 가명이며, 작가의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다고 나와 있다.



 비밀의 작가. 패러디. 그런 책 치고는 책의 만듦새가 꽤나 좋다. 양장본에다 요리책인지 소설인지 혼동될 정도로 많이 들어간 컬러 화보까지. 어쩌면 닭 요리책으로 알고 이 책을 구입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무려 이 책엔 치킨집 전단지까지 들어 있었다. 잠시 황금가지가 출판시장이 너무 열악한 관계로 치킨으로 사업을 확장했나 하는 생각도 했다. 하하...)


 (제목의 '치킨의 50가지 그림자'는 50가지 치킨 요리라는 뜻도 들어있지 않을까 한다. 소설은 이렇게 요리에 따라 하나씩 단락을 이루고 있으며 각 단락의 시작마다 이번엔 어떤 요리가 되는 지를 보여주는 사진이 저렇게 나온다. 사진이 꽤나 식욕을 돋구기에 이 소설을 밤에 읽는 것은 위험하다.)


 단락마다 말미엔 진짜 닭 요리 레시피까지 나오고 있으니. 때문에 누군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하, 이거 색다른 요리책이로군. 야한 소설처럼 만들었잖아!" 이런 본말전도가 충분히 예상될 법한 완성도다. 솔직히 나도 내가 소설책을 읽었는지, 요리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표지에 작가 자신이 '요리책을 패러디했습니다'라고 하니까 소설책이겠거니 생각하는 것일 뿐. 그러나 정말 집중해서 탐독했던 것은 레시피였다. 사진의 요리가 하도 먹음직스러워 만들어 먹고 싶어 미칠 것 같았으니까.


 어쨌든 작가가 소설이라고 방점을 툭 하고 찍어주고 있으니까 거기에 맞춰 생각해 본다면, 이 책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공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페미니즘적으로 보자면 불편한 이야기였다. 계급적으로 캔디 같은 여성이 커다란 재력을 지닌 남자에 길들여져 점점 SM의 세계로 빠져드는데, 거기서 보여주는 여성의 모습이 노예에 가까운 수동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의 쾌락을 자신의 쾌락으로 여기는 매저키스트가 된다. 닭이 요리사의 욕망에 맞춰 요리되는 것과 같다.


 파울러는 요리가 가지고 이러한 일방향, 재료는 그저 그것을 다루는 자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측면을 가져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세계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그 소설의 주인공 여성처럼 닭은 의인화 되어 식스팩 남성 요리사에게 묶이고, 찢기며, 파헤쳐지는 것이다.   그 과정을 파울러는 엄청나게 관능적으로 묘사하며 여성의 닭은 요리되는 모든 순간을 자신의 쾌락으로 경험한다.


 손에 쥔 16플라이 노끈 다발로 봉긋이 솟은 내 가슴살을 스치며 그가 묻는다. 천연섬유 노끈이 건드리는 감촉이란 놀랄만큼 관능적이다. 내 가장 깊숙한 곳, 가장 은밀한 그 곳이 더없이 맛있게 오므라든다.

 "몰라요." 내가 숨결만으로 말한다.

 "몰라요. 그리고?" 그가 위협하듯이 재우친다.

 "모릅니다. 요리사님."

 그가 귤 한 개를 집어서 서서히, 서서히 내 아래쪽 구멍에 들이밀어 이윽고 그것이 내 속에서 완전히 묻힌다. 아, 꽉 찬 느낌. (p. 46)


 (인용한 부분은 바로 이 로스트 치킨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다. 소설 부분이 끝나면 바로 이렇게 그 요리의 정체와 그것을 만드는 레시피가 공개된다)


  듣기로 SM적 세계는 과잉된 연극성의 세계다. 자신이 맡은 배역에 따르는 연기에 얼마나 충실할 수 있느냐에 따라 느낄 수 있는 흥분의 강도가 결정된다. 때문에 연기를 위한 상세한 규칙이 그 세계엔 존재한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잘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과정과 단계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과 단계엔 연기하는 자에 대한 배려는 없다. 배역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자신이 어떤 성향을 가졌던 주어진 배역에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SM 세계의 규칙은 궁극적으로 주체가 가진 고유한 본질을 희석시키고 소멸시키는 과정이다. 남는 것은 배역 뿐이다. 본말전도가 그 세계를 유지시키는 핵심 동력이다.


 SM 세계의 각 과정과 단계에 존재하는 세부적 규칙은 요리의 레시피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니 소설에 이런 식으로 레시피가 삽입되는 것도 그냥 재미를 주기 위해서는 아닌 것이다. 아마도 SM적 세계가 더없이 인위적이며, 그것도 배역을 정하고 연기를 강요하는 한 사람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세계라는 것을 암시하는 뜻도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나 이 레시피엔 닭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다. 그는 오로지 레시피에 따라 해체되고 다시 조립될 뿐이다. 그리고 그 레시피를 고른 자는 어디까지나 요리사다. 하지만 당하는 여성인 닭은 그것을 자기 파괴의 과정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요리되는 동안 자신이 더욱 맛있게 되어가는 것에 끝도 없는 희열을 느낀다.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쾌락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녀는 오로지 요리사의 욕망대로 되고 있을 뿐이다. 그 희열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의 소멸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조차 환희로 간주한다. 요리사에게 맛있게 먹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요리사의 욕망과 일치시킨다. 욕망의 일치는 순종의 궁극이다. 그것은 레시피의 매 단계마다 요구되는 자기 부정을 통한 순종에 따른 결과다. 어째 종교의 순교와도 닮아 보인다. 순교 역시 종교에서 요구하는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종교도 SM적 세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꽤 재밌게 즐겼다. 밤마다 허기를 몰고와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대한 제법 매서운 공격이었고, 공격의 방식이 재치 넘치는 패러디라 더욱 효과적으로 보였다. 너무나 외로운 밤, 외로움을 달래려 술 한잔 걸쳤다면 후식으로 읽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공자님 가라사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는 두 가지로 식욕과 성욕이라 하셨는데 이 책은 그 두 가지를 하나는 확실하게, 다른 하나는 은근히 채워주고 있으니까.


 좀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나도 요리를 꽤 즐기는 편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요리가 가진 애로틱한 면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다. 음식이 성애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영화  '아메리칸 파이'나 우리나라 영화 '몽정기'를 비롯하여 자주 봤지만 그저 웃어 넘겼을 뿐, 둘을 연결 짓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은 본격적으로 연결하여 재현하고 있는지라,(한 마디로 내가 그 세계에 푹 담겼다가 나온 고로 )앞으로 요리할 때마다 언뜻 떠오를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삼계탕이다. 앞으로 복날이 오면 난 언제나 그랬듯이 삼계탕을 만들어 먹을 터인데, 그것을 묶을 때 아무래도 이 소설의 장면이 생각날 것 같다. 이것, 참.


 (어쩌면 이렇게 묶어 버릴 지도, 왠지 이제 생닭을 보게 되면 Tie me up, Tie me up 하는 속삭임이 들려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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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3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7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의딸 2016-05-1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좋긴하나 식욕은 똑., 떨어지네요. ㅠㅡ

오드득 2016-05-17 22:50   좋아요 0 | URL
식욕이 떨어지는 게 다행이지 않을까 싶어요. 전 허기가 져서 정말 죽겠더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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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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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년생 여성 작가의 첫 단편집. 2012년에서 2015년 사이에 발표한, 모두 10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꼬치처럼 모두를 꿰뚫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으니, 바로 불안이다. 불안, 그것은 현대의 페스트다.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도, 그럴 수 있는 곳도 없다. 구조조정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들리고, 경제에 대한 불길한 예언이 연일 쏟아지고 있는 지금, 드리워지고 있는 불안이란 장막은 날마다 더욱 넓어지고  두터워져 간다. 그러므로 '지극히 내성적인' 단편집은 문학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란 말을 믿는다면 지금 문학이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다.


 여기 단편의 인물들을 비유하자면, 높고 가느다란 막대 위에서 흔들리면서 돌고 있는 10개의 접시라 해야 하리라. 그것은 정말 불안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소설의 카메라는 돌리고 있는 손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담아내는 피사체는 오로지 위태롭게 돌고 있는 접시 뿐이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안에 갈팡질팡 하지만 독자들은 정작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불안의 진짜 이유는 마치 제목처럼 '지극히 내성적인' 곳에 꼭꼭 감춰진 듯 하다. 그렇게 소설은 불안의 여파만 훑는다. 우리가 음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엄습한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는가 뿐이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다'고 말한다면, 거기에 대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제목을 살짝 바꿔 '나는 어떻게 근심을 멈추고 불안이란 폭탄을 해체하게 되었나'하고 응수하는 격이다. 그런 면에서 10개의 접시들은 지극히 개성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균형의 경로가 다 적절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비열하고, 어떤 것은 한심하며 또 어떤 것은 자기 파괴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소설은 건조한 묘사 만큼이나 모든 경로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배제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현상학적이라 할 만하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치중하고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는 의미다. 분명 독자는 판단이든, 공감이든 어떤 식으로든 소설에 개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언젠가의 자기 모습을 보게 될 것이므로.


 두 번째로 나오지만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있는 '팜비치'는 그녀에게 창비신인소설상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안정된 가정을 이룬 30대의 남자가 주인공인데, 그는 휴가를 맞아 해변에 갔다가 자신의 일상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마지막에 그는 발가락에 상처를 입는데, 그것은 마치 자신이 가져온 상어 튜브의 이빨에 물린 것 같다. 상어 튜브가 불안을 상징한다. 그는 휴가를 맞아 아이와 해변에서 놀고 있다가 아내의 명령으로 상어 튜브를 가져오기 위해 해변을 벗어난다. 그의 과거 회상에 의하면 어떤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안을 가져왔다. 회사 동료와 같이 걸어가다 우연히 맡게된 음식 냄새 때문에 멈춰 섰을 때, 그는 승진에서 누락하고 동료는 승진해 결국 혼자가 되었다. 해변에서 벗어날 때 그는 물내음을 맡으며, 슬리퍼 한 짝을 잃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상어 튜브를 찾아가는 길은 불안 속으로 점점 빠지는 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간신히 상어 튜브를 가지고 돌아오니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눈길이 가 있고 아이는 상어 튜브를 타려 하지 않는다. 아내는 마음을 두고 있는 남자가 진짜 팜비치에 살고 있다고 부러워한다. 그들이 현재 묶고 있는 리조트 이름은 '팜비치'. 그는 발가락의 상처처럼 엄습한 불안을 통해 자신이 진짜라 여겼던 삶이 가짜가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이후에 발표된 '구두', '오가닉 코튼 베이브', '틀니',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타투'는 그렇게 불안을 안게 된 이들이 삶에 매달리기 위해 어떻게 그것을 지워가는 지 보여 준다.


 '구두'는 자신보다 못한 타인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으로, '오가닉 코튼 베이브'는 진짜 믿지는 않지만 뭔가 거창하게 느껴지는 이념에 동참하는 것으로, '틀니'와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는 나보다 더 우월한 누군가에 기대는 것으로 그리고 '타투'는 그저 회피하고 해결을 지연하는 것으로 불안을 잠시 잠재운다. 맞다. 잠시다. 결국 그들의 모든 시도는 실패하니까. 작가는 그들의 패배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시도의 실패는 다른 경로를 찾게 만든다. '홍로', 대머리' '파란책' 그리고 '집이 넓어지고 있어'가 그렇다. '홍로'는 거짓을 진짜처럼 믿는 것으로, '대머리'는 끝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으로, '파란책'은 잘 알지도 못하고 성공에 대한 보장도 없지만 무작정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타자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으로 그리고 '집이 넓어지고 있어'는 환상에 대한 믿음을 통해 불안을 관통해 나간다. 혹은 '극복한다'고 말해도 좋다. 사실, 이 경로의 인물들은 성공하니까.


 그렇게 이 단편집은 '팜비치'를 시작으로 하여 불안을 대하는 두 경로가 나와 있으며 하나는 실패로, 다른 하나는 성공으로 귀결된다. 발표된 시점이 두 경로 모두 섞여 있기 때문에 작가가 실패에서 성공으로 나아가게끔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정말은 이 모든 것을 우리들이 흔히 취할 수 있는 태도 중의 하나로 그저 제시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현상학적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내게는 말한 바와 같이, 비관과 낙관으로 나뉘어 보이고, 낙관의 경로에서 은연 중에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작가의 조언을 듣는 것 같다.


 그런데 낙관의 경로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여기에도 뭔가 공통된 것이 보인다. 이 경로에선 '파란책'이 가장 먼저 발표되었고, '집이 넓어지고 있어'가 가장 나중이다. 

 

 '파란책'은 '팜비치'처럼 안정된 일상을 영위하던 중년 여성이 주인공인데, 그녀는 딸의 책상을 자신만의 간이 책장으로 만들었다가 새삼스레 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책이란 특정한 책이 아니라 책 그 자체, 즉 '보편으로서의 책'이다. 이것은 그녀가 결국 책을 사려고 서점에 들리는데 오직 책의 두께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서 드러난다. 책은 그녀에게 전적으로 타자였다. 알지도 못했고 실용적인 목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작정 책의 세계로 빠져든다. 책이 가진 허구 속으로.

 '파란책'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허무주의를 강의하면서 허무주의엔 부정적 허무주의와 긍정적 허무주의가 있다고 이야기했고 니체의 것을 긍정적 허무주의로 보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불안은 궁극적으로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고 결국 그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불안의 성격도 달라지게 된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통하여 허무, 즉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꿨다. '죽음 때문에'가 아니라 '죽음이 있기에' 오히려 삶의 긍정적 전망이 열린다고 보았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그녀도 그렇게 된다. 물론 그런 하이데거의 말은 검증할 수 없다. 전적으로 허구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음과 허무를 삶의 끝이자 비관이라 생각하는 것도 허구일 지 모른다. 정직하게 보자면 우리는 두 허구 중의 하나를 선택해 믿는 것이 아닐까?


 낙관의 경로는 허구의 믿음을 선택한 자들의 것이다. '파란책'의 주인공은 하이데거의 말을 전혀 모르는 남편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이미 하나의 강을 건너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p. 228)


 강, 그것은 현실과 허구 사이에 놓인 강이었고 그녀는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듯이 허구의 영토로 강을 건너고 말았다. 순전히 자의로. 바로 이것이 공통점이다. '파란책'에 나오는 남편과 같이, '홍로', '대머리, '집이 넓어지고 있어' 모두에서 우리는 주인공과 대립하고 있는 현실 세력들을 볼 수 있다.


 '홍로'에서는 여자의 남편이(진짜 남편은 아니고 주인공에게 월급을 주면서 아내로 고용한 사람이다. 즉 여자의 세계는 허구였다. 그녀는 아내를 연기하고 있었고 그 사실에서 늘 커다란 불안을 느꼈다. 그런데 오히려 그 허구를 껴안자, 스스로 진짜 아내라는 거짓말을 믿고 그렇게 행동하자 삶이 안정되기 시작한다.), '대머리'에선 암투병 때문에 벗겨진 머리를 가발로 가리고 있는, 주인공이 결혼하려는 여자의 언니가, '집이 넓어지고 있어'는 그녀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 자체가 그러하다. 대립하는 현실 세력 모두 패배한다. '홍로'에선 자신은 아직 벗어던져지 못한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허물을 허구를 믿은 여자가 마침내 벗어던진 것을 보며(p. 126), '대머리'에선 '구두'처럼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과 '가발'이라는 위장으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던 현실이 주인공에게 가발이 벗겨져 대머리라는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꾸며 결혼하려 하고 있었다. 사실 여자가 가발을 쓰고 주인공을 경멸한 것도, 주인공이 그 가발을 벗겼던 것도 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인공의 자존심이 진짜 상처 받았던 것은 자신이 결혼하려는 여자가 원래 패배자에게 잘 끌리는 성향으로 실은 그녀를 유혹할 때 전혀 거짓말을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결국 그는 허구로 지탱해 온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꿈꾸던 결혼이 끝장날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가발을 벗겼고, 거꾸로 그로 인해 현실의 한없이 약하고 초라한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는 그것을 보며 격한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집이 넓어지고 있어'에선 불가사의한 이유로 자꾸만 넒어지는 집이, 이미 그것만으로도 허구가 현실에게 이기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만, 자기 집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집까지 넓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현실 세계는 패배하고 허구를 믿었던 이들은 승리한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허구를 믿었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는 아무런 보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믿음을 통해 이전엔 결코 알 수도, 볼 수도 없었던 삶이 가지고 있었던 긍정적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을 작가의 조언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일단 한 번 강을 건너 보라며 그녀가 손짓하고 있다고. 어쩌면 이런 조언은 그녀가 소설가이기에 나온 것일 수도 있다. 허구에 대한 강한 믿음 없이 어떻게 허구를 생산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요즘 아주 인기 있다는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란 책에서 호모 사피엔스 자체가 허구의 생산에 있어서도, 허구의 믿음에 있어서도 유달리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끝내 그 때문에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허구를 짓고, 허구를 먹었다. 허구가 여기까지 우리를 끌고 왔다. 사실이 이렇다면 작가의 조언을 망상이라며 내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허구에 대한 믿음은 '지극히 내성적인' 망상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믿음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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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모신 하미드는 파키스탄 출신 작가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출간되는 그의 작품이고, 원래는 세번째 작품에 속한다. 그의 이름은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바 있는 두 번째 작품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로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이 책은 2012년에 우리나라에 나왔는데 번역한 왕은철의 후기를 보면 '2013년에 발표할 예정인 소설로 '신흥 아시아에서 엄청난 부자가 되는 법'이 어떤 소설일지 자못 기대된다'는 말이 나와있다. 제목에 사소한 차이가 있다. '엄청난'이 '더럽게'가 되었다. 보통 Rich와 같이 쓰면 '엄청난 부자'로 해석하니까 어떤 단어를 쓰든 틀린 것은 아니다. 중의적 의미로 보면 될 것 같다. 어쨌든 소설은 정말로 2013년에 나왔다. 2016년인 이제서야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조금은 늦은 셈이다.


 그냥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 작품은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와 함께 읽으면 보다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판단하게 된 것은 두 작품이 가지는 차이점 때문이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파키스탄인으로 미국에서 살았던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충분이 반영하여 미국이라는 외부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반면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은 파키스탄으로 상정되는 아시아에 있는 국가 내부에 일어난 일을 담는다. 전자는 외부인의 시각으로, 후자는 내부자의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각의 차이는 공교롭게도 인칭의 변화와 맞물리는데,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나'라는 1인칭의 소설인 반면, '떠오르는'은 당신이라는 2인칭의 소설이다. 외부자의 시각에서는 1인칭이었던 소설이 내부자가 되니 2인칭으로 바뀐 것이다. 나는 이 변화가 중요하고 이것이야말로 소설 '떠오르는'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핵심적인 열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 소설이 왜 하필이면 '자기계발서'를 패러디한 형식을 취했는지와도 상관있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나'라는 주인공이 미국인으로 상정되는 한 사람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혹시 알베르 까뮈의 '전락'을 읽어보셨다면 그와 똑같은 형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읽다보면 제목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실은 듣고 있는 미국인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그 미국인은 9.11에 대한 그의 반응 때문에 그를 암살하러 온 사람으로(그래서 그는 인종에 대한 근본주의자다.) 그의 고백을 들으면서 죽일까 말까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9.11 이후 전면적으로 대두 되었던 미국과 타자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나'가 바로 그 타자이며 그 타자의 내면을 오롯이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이 추구하는 바다. 다시 말해 이런 말을 들려주는 것.


 "당신네들은 파키스탄인 모두를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고 상상하면 안 돼요. 우리가 당신에 미국인들 모두를 변장한 암살자라고 상상하면 안되는 것처럼 말이죠. (...) 나는 당신이 내 얘기의 일부를 불쾌하게 생각했다는 건 알아요. 그렇다고 악수를 청하는 내 손을 거부하지 않기를 바라요."(주저하는 근본주의자, p. 160)


 외부자의 시각과 1인칭은 그를 위한 설정이었다.


 "떠오르는"은 내부로 들어왔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제 '당신'으로 불린다. 파키스탄 같은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했고 사랑은 이루지 못했으나 부자는 된 이의 일대기를 건조한 어조로 담고 있는 이 소설에서 그 인물은 내내 '당신'으로 호명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계발서'의 형식을 슬쩍 취한다. 이것은 어떤 효과를 노린 설정일까?


 '주저하는'은 타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떠오르는'에선 그런 목소리가 더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파키스탄은 온전히 타자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모신 하미드에게 '타자'란 미국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타자를 말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포섭되지 않은, 그래서 고유의 가치관과 독립된 문화로 하나의 거울처럼 신자유주의를 비춰 스스로 자신의 기형적인 모습과 한계를 자각시키는 존재다. '주저하는'은 그 거울을 세웠다. 그런데 '떠오르는'에서는 거울 자체를 문제삼고 있다. 과연 그 거울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다시 말해, 모신 하미드는 이런 질문을 소설을 통해 검증해보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미국에게 진정한 타자가 될 수 있는가?'


 미국의 진정한 타자가 되려면 파키스탄이 신자유주의에게서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내부의 시각으로 본 결과, 결론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무엇보다 이 소설이 자기계발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자기계발서 자체가 신자유주의로 인해 비로소 출현하게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낳은 학자들의 이론을 점검하면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이 한 개인을 1인 기업가로 만드는 것이라는 알게 되었다. 즉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회사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설령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위험도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한 개인의 책임으로 쉽게 전가시킬 수 있다. 그들이 못 사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력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가 원하는 바였다. 사회적인 것을 철저히 분쇄하여 모조리 개인화 시키는 것. 그렇게 되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계급 혁명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바로 지금 우리 사회처럼.


 자기계발서는 그 일환이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읽는 사람을 한 개인으로 보도록 만들었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 모두가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것은 노력하면 원하는 결실을 얻으리라 달콤하게 속삭였지만 본심은 결코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게 계속 시야의 중심을 자신에게만 두어서 결과적으로는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눈길이 향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봉사했다. 솔직히 자기계발서는 소위 말하는 돈없고 빽없는 99%의 노예들을 위한 것이었다. 1%에겐 자기계발서 따위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번에 드러난 로스쿨 부정 입학 사건을 보라. 요즘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취업을 위해 다시 큰 돈을 들여 취업 스킬을 가르쳐주는 학원에 나간다고 한다.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쓰고 면접은 어떻게 하고 등등을 학원에서 교육받는데, 로스쿨을 들어갈 때에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것은 전혀 배울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소개서에 이렇게만 쓰면 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검사장인 아버지를 보면서 법과 정의가 어떻게... 블라블라' 이러면 합격이다. 아버지나 가족의 직업이 합격의 원천인 것이다. 그러니 자기계발서 따위가 왜 필요하겠는가?


 결국 자기계발서는 노예의 도덕을 유포한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대타자'에게 나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도록 하여 그들이 원하는 인간형이 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이중 사고를 하게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식으로 서로 상반된 가치를 한 개인에게 별 비판 없이 수용토록 하는 것이 이중 사고가 아니던가. 자기계발서는 그런 것을 조장하고 결국엔 '신자유주의'라는 '빅브라더'에게 봉사토록 만든다. 9.11 이후 미국의 애국자법이 미국인들에게 '자유는 곧 감시'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듯이.


 바로 이런 자기계발서 형식을 빌려왔다는 것이 파키스탄이 제대로 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은 자기계발서의 말들을 소제목으로 하고 있는데 정작 소설에선 그것이 보장하는 성공과 행복을 하나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허위와 기만의 말일 뿐이다. 주인공의 행복은 그런 말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에 충실했을 때에 비로소 찾아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주저하는'에서도 핵심이었다. '떠오르는'에서도 그러한데 그래서 모신 하미드에게 '사랑'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은, 고린도서 13장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타자 중심이다. '떠오르는'은 가족 이야기까지 나와서 사랑이 가지는 타자 중심의 성격을 강조한다. 모신 하마드는 사랑에서 진정한 구원의 거울상을 찾고 있는 지도 모른다. 소설이 보여주는 바 그대로 파키스탄 역시도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이제 그 거울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 중심인 사랑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의 경로이다.

 과연 이 거울이 제대로 정초될 수 있을 것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 얼른 다음 소설이 나왔으면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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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전야의 최면술사 - 메스머주의와 프랑스 계몽주의의 종말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알마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1778년 2월. 한 독일인 의사가 파리에 도착한다. 그의 이름은 프란츠 안톤 메스머. 그는 프랑스에서 단단히 한 몫 벌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에겐 팔릴만한 것이 있었고 그것은 그만의 특별한 이론이었다. 그는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어떤 유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보지 못했으면서도 발견했다고 주장했는데 증거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뉴튼의 만유 인력을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대학자 뉴튼의 말에 따르면 별과 별 사이에도 인력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아무 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어떻게 힘이 작용할 수 있겠느냐며 그것은 분명 내가 말하는 유체가 인력을 매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당시는 과학이 지식인 계층에게 호사가의 취미로 널리 유행하고 있어서 그런 식의 과학적인 논증은 쉽게 사람들의 납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것만이 성공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먹혀들어갔던 것은 바로 다음에 있었다. 그는 그런 유체가 모든 생명체에게도 존재한다고 말했고 인간의 모든 생로병사마저 유체가 주관한다고 설파했다. 유체만 잘 관리하면 암도 치유가능하다고 하면서 실제 치료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그는 치료를 위해 방을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하는 일은 없었다. 환자가 그 방에 들어가서 만나는 것은 기이한 별자리들이 수놓인 벽을 배경으로 거울들이 반사하는 특이한 빛과 이상한 소음 그리고 부드러운 하모니카 연주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환자들은 자신의 병이 치료되었다고 고백했다. 메스머는 그 방의 모든 것은 인간의 유체를 자극하고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 말했다. 완치의 고백이 이어지자 프랑스 전역에서 메스머의 인기가 폭발했다. 라파예트, 니콜라 베르가스, 장 루이 카라 그리고 자크 피에르 브리소등 그를 옹호하고 뒤따르는 지식인들도 늘어났다. 수없이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메스머는 많은 환자들을 한꺼번에 치료하는 '위기의 방’을 만들었고, 아예 사람들 스스로 치유할 수 있도록 통 같은 것을 대량으로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그래도 인기는 꺾일 줄 몰랐고 시중에는 어느새 가짜 통들이 속출했다.


 프랑스 언론들은 메스머의 치료 방법이 기존 의학을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 보도했다. 그러니 프랑스의 의학계가 메스머를 곱게 볼 리 없었다. 메스머와 의학계 간에 유체의 실체와 치료의 진실을 두고 대대적인 공방이 벌어졌고 결국 우리도 잘 아는 화학자 라부아지에와 벤자민 프랭클린까지 가세한 위원회가 메스머의 주장을 검증했다. 결론은 ‘유체를 확인할 수 없다’로 났고 바로 기득권 지식인들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려 메스머는 프랑스 바깥으로 추방되었다. 이것이 정확히 프랑스 대혁명 11년 전에 일어난 메스머 유행의 전말이다. 로버트 단턴의 책,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는 바로 이것을 담는다. 단순히 상황을 독자에게 알리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미국의 유명한 유럽사 학자인 로버트 단턴은 해바라기 같은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프랑스 대혁명 하나만 바라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그에게 프랑스 대혁명은 하나의 기적과도 같다. 당시 프랑스 민중 대부분은 문맹이었다.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종종 루소와 같은 지식인들의 책들이 혁명으로 이끄는 선구자 격이 되어 민중이 들고 일어나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말한다. 지식인들의 언어와 논리가 없었다면 굶주림으로 마구 들끓고 있었던 체제에 대한 민중의 분노도 혁명으로 쉽게 결집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 프랑스 민중은 그 책들을 읽을 수 없었다. 거기다 당시의 민중은 오래도록 왕정에 익숙해져 있었다. 프랑스 혁명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민중은 왕의 손만 잡아도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란 믿음이 널러 퍼져 있었다. 마르크 블로크의 ‘기적을 행하는 왕'은 당시 그런 믿음이 기층 민중에게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으며 오래도록 신앙처럼 뿌리내리고 있었는지 잘 보여 준다. 왕은 민중에게 태양왕 루이 14세가 천명한 것처럼 거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무지와 빈곤에 찌들었던 프랑스 민중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빈곤층과 저학력 소유자들이 박근혜를 더 많이 지지하는 것과 똑같이 듯 전통적 권위에 맹목적으로 순응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신과 같은 왕을 단두대로 보내는 혁명을 일으킬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단턴에게 프랑스 혁명은 기적이었고 그 기적을 가능하게 만든 것을 단턴은 쫓았다. 그는 수많은 의문을 쫓는다. 혁명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선도했던 지식인들의 사상들은 과연 어떤 식으로 민중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압도적인 문맹 상황으로 볼 때, 책이 그 역할을 할 수 없었다면 분명 다른 경로가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민중 스스로 혁명의 주체로 성장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는 오래도록 거기에 천착하면서 마치 CSI와도 같이 끈질기게 그 흔적과 징후를 추적했다. 그는 정말로 태양만 바라보며 꽃봉오리를 돌리는 해바라기 같았다. 이번에 나온‘혁명 전야의 최면술사'를 읽고나니 더욱 그렇게 여기게 되었다. 이 책은 68년에 나온 로버트 단턴의 첫 책인데, 여기서 부터 메스머주의와 프랑스 혁명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마치 해부하듯이 상세하게 분석하여 어떻게 혁명 사상이 민중에게 광범위하게 유포될 수 있었는지 그것을 밝히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턴은 일단 지금의 상식으론 얼른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메스머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의 시각을 교정할 것을 권한다.


 ‘메스머주의가 오늘날에 터무니없이 보인다고 해서 역사가들이 이를 외면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메스머주의야말로 1780년대 글을 아는 프랑스인들의 관심에 완벽히 부합했기 때문이다.(p. 33)


 단턴은 당시 프랑스에서 과학이 왜 인기가 있었는지를 밝혀 프랑스가 혁명까지 가는 여정에 있어 메스머주의가 했던 역할을 드러낸다. 그 때 과학은 열기구나 비행기등 민중들에게 신기한 눈요기 거리들을 맣이 제공했다. 그런 실험이 있다는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구경했다. 그들에게 그 광경은 경이였고 오로지 신을 중심으로 돌았던 세계에 인간의 위대함이 거대한 지진을 일으키는, 한 마디로 자신의 세계관이 전복되는 체험이었다. 다수의 농민들은 하늘 높이 올랐다가 내려온 열기구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당신은 인간입니까? 신입니까?(p. 49)


 이제 왕은 신이 아니었다. 과학자가 신이 되었다. 왕족이나 귀족들조차 그들이 보여주는 실험을 지상에서 한 명의 구경꾼이 되어 쳐다보았다. 과학은 엄격하게 나뉘었던 신분 제도에 평등을 가져왔다.


  퐁텐이라는 이름의 한 평민 출신 젊은이는 1784년 1월 19일 리옹을 막 출발한 몽골피식 열기구에 뛰어들었고 왕자, 백작, 기사 그리고 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다른 유명인사 승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지상에서는 내가 당신들을 우러러보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대등하다.”프랑스의 젊음을 일깨운 행동이었다.(p. 227)


 이것은 그만큼 민중 자신을 사회의 주체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과학은 신의 섭리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저절로 이뤄지는 질서를 보게 했으며 질병도 악마의 시험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기도로 해결하기 보다는 그 원인을 스스로 곰곰이 따져보게 만들었다. 즉 모든 현상을 대하는데 있어서 주체로 행동하게끔 자극한 것이다. 단턴은 이런 식으로 루소의 책보다 구경거리로써의 과학이 민중을 더 계몽했다고 본다.


 메스머주의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메스머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과학은 민중에게 유리되어 있었다. 그것은 복잡한 계산이었고 어려운 수식으로 구성된 논리라 민중이 접근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민중에게 허락된 것은 구경으로 참여하는 것 뿐이었다. 그랬던 간격을 바로 메스머주의가 좁혔다. 이론에 어느 정도 비합리적인 면과 신비한 면이 있었던 덕분에 정통 과학이 요구하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의 짐을 덜 수 있었고 자연히 민중의 언어로 보다 손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로버트 단턴은 메스머주의가 정확히 과학이 사이비 과학과 신비주의로 변해가는 스펙트럼의 중간 부근에 자리잡고 있다(p. 68)고 말한다. 그렇기에 메스머주의는 과학이 열어놓은 민중을 주체로 만드는 길을 더욱 가속화 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이런 메스머주의의 힘을 일찍 알아본 자들이 있었다. 바로 당시 프랑스에 있었던 급진주의자들이었다. 지금 이 체제로는 더 이상 안되니 앙시앙레짐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급진주의자들에게 메스머주의는 참으로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과학이 지닌 민중을 주체로 자각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민중이 가장 손쉽게 받아들이는 과학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메스머주의를 통해 자신들의 급진 사상을 민중에게 전파시키려 하였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나중에 메스머주의는 푸리에와 생시몽등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로버트 단턴은 이런 식으로 주류 역사에서 그저 한 순간의 해프닝으로만 간주했던 메스머주의와 프랑스 혁명 사이의 연결 고리를 촘촘히 발굴해 낸다. 그리고 소개되는 수많은 사료와 인용이 단턴의 견해를 꽤나 설득력있게 만든다.


  프랑스 학자 르네 지라르는 모델론을 말한 바 있다. 쉽게 말하자면 혁명 같은 거대한 이념으로 기층 민중을 움직이기 위해선 그들이 쉽게 이해하고 모방할 수 있는 중간 모델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단턴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절로 르네 지라르의 모델론이 떠오르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은 바로 그런 중간 모델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메스머주의가 바로 그런 중간 모델이었다. 여기서 자신들의 사상이 문맹이 많은 대중들에게 쉽게 전달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일찍 깨닫고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이유로 편견없이 메스머주의를 받아들인 프랑스 급진주의자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 엘리트로서의 자존심은 던져 버리고 어떻게든 민중의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민중이 처한 상황과 그들에게 놓인 현실적 한계를 먼저 헤아리고 그걸 그대로 인정한 다음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자신들의 대의를 설득하려 한 것이다.


 이런 급진주의자들의 모습을 보다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다들 유행가의 후렴구처럼 국민, 국민 하지만 정작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대의를 몰라준다고 오히려 국민을 타박한다. 설득하려는 최소의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만이 진리이며 국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오해라고 공박할 뿐이다.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제발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를 읽어서라도 자신의 대의를 실현하려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꼭 좀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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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퀸 : 적혈의 여왕 1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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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영어덜트 판타지 소설에도 관심이 많다. 이번에 나온 '레드 퀸'도 거기에 속한다. 이 책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존에서 꽤 높은 순위를 오래도록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더구나 이제 갓 25살이 된 작가의 데뷔작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젊은 여성의 데뷔작이 이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하니 얼른 '트와일라잇'의 스테프니 메이어가 떠오른다. '레드 퀸'도 '트와일라잇'처럼 3부작으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된다. 과연 빅토리아 애비야드는 제2의 스테프니 메이어가 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쨌든 1부가 엄청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 영화화 작업도 한창 진행중이라고 하니까. 뒤이은 2부와 3부가 성공하고 영화까지 흥행한다면 애비야드를 제2의 스테프니 메이어라고 불러도 누구든 부정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레드 퀸'이 가진 설정의 얼개는 헝거 게임과 유사하다. 일단 계급의 격차가 현저한 디스토피아를 다룬다. 거기다 제목에 '퀸'이라고 나와 있듯이, 열악한 계급의 보잘 것 없었던 한 소녀가 결국 그 디스토피아를 허물게 된다. 여기서 벌써 식상함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설정은 헝거 게임의 커다란 성공과 더불어 이 장르의 대세가 되어 버렸다. 이후, 얼마나 많은 판타지 소설들이 '헝거 게임' 설정을 답습했던가? 솔직히 말해 '지긋지긋한 판타지 소설들''이라는 '커커스 리뷰의 표현은 결코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애비야드는 식상할 대로 식상해진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다. 신물이 날만큼 흔한 설정을 가져왔다는 것은 알고도 가져왔다는 것일테고 그렇다는 것은 그 식상함을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뜻이다. 신인으로서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은 보기 좋다. 하지만 그것도 다 독자가 식상함을 느끼지 않고 소설을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할 때라야 예뻐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그 자신감마저 마이너스로 채점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자가 소설 끝까지 흥미를 가지도록 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위해 애비야드는 변화를 추구했다.


 일단 소설이 담은 세계가 달라졌다. 

 레드 퀸의 세계는 비록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지만 헝거 게임과 같은 것은 아니다. 헝거 게임은 근대의 독재 국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드 퀸'은 중세의 전제 군주 나라에 가깝다. 왕이 있고, 왕과 함께 소수의 귀족들이 나라를 다스린다. 그런 그들을 특별히 '은혈(silver blood)'이라 부른다. 서양 속담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이 있다. 태생이 아주 좋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유행어가 된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은 물론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은 아주 옛날, 그러니까 중세 때  이미 존재했다. 하필이면 '은수저'가 된 것은 그것이  당시 귀족들에게 최고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애비야드는 이 은수저의 의미 그대로 은혈을 쓰고 있다. 그들은 특권 계층이며 막강한 힘으로 다수의 약하고 가난한 민중들을 착취한다. '은혈'은 비유가 아니다. 실제 그들의 피는 은색이다. 그리고 그 피 때문인지 그들은 영화 '엑스맨'의 뮤턴트들 처럼 초능력을 쓸 수 있다. 거대한 화염을 일으키고, 손을 바위처럼 만들어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동물들을 자기 뜻대로 부릴 수도 있고 식물을 순식간에 자라나게 한다거나 상처도 얼른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엑스맨과 똑같이 한 사람이 한 능력만 쓸 수 있다. 그런 능력으로 '적혈(red blood)'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지배한다. 다수의 민중을 이루고 있는 적혈은 붉은 피의 소유자들로 아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세계는 엑스맨의 매그니토가 그토록 바랐던 세계이기도 하다. 뮤턴트가 보통 사람들을 지배하는. 이렇게 사람도 달라졌다.


 '레드 퀸'의 세계는 오직 '피'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이 타고난 혈통으로 결정되던 중세와 흡사하다. 이것이 '레드 퀸'만이 가지는 독특한 지점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대부분 헝거 게임 류 판타지 소설들은 근대 국가 체제를 모델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드 퀸'은 중세 왕국이 모델인 것이다.그것은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엄격했던 중세만큼이나 심한 소설 속 세계의 계급 간 차별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제목을 다시 떠올려 보면, '레드 퀸', 즉 적혈의 여왕이니 우리의 주인공은 적혈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맞다. 그녀는 적혈이다. 이름은 메어 배로우(Mare Barrow). 작가는 주인공의 성을 배로우(Barrow)로 하여, 그녀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 배로우(Barrow)란 성이 낯익다면 당신도 메리 J 노튼의 'The Borrowers(마루 밑 버로우즈)'를 분명 읽은 것이다. 이 성은 바로 거기서 따온 것이다. 인간에게 기생하여 마루 밑에서 살던 조그만 인간 버로우즈. 메어의 처지도 그들만큼이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위로 세 명의 오빠가 있었지만 모두 전쟁터로 끌려가고 말았다. 오직 적혈이라는 이유로. 은혈이 인정하는 직업을 갖지 못한 적혈들은 18세가 되면 무조건 전쟁에 나가서 총알받이가 되어야 한다. 두 명의 오빠가 이미 죽었다. 아버지는 불구로, 메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소매치기를 한다. 결국 18세가 되어버린 메어는 직업이 없어서 군대로 징집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난 뒤, 은혈의 왕궁으로 갑자기 소환되어 거기서 일하게 된다. 알고 보니 그 소년이 바로 왕자 칼이었고 그 때, 메어는 소년에게 신세 한탄을 했는데 그 때문에 왕궁에서 일하게 해 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칼의 신부를 뽑는 이벤트가 열리게 되고 왕자의 신부가 되고픈 은혈 가문들의 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뽐내게 되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나 그만 메어가 거기에 휘말린다. 목숨이 위험해지려는 찰라, 메어는 놀랍게도 은혈만 할 수 있는 초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을 구한다. 그녀가 발휘한 것은 전기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능력. 압도적인 능력을 시전한 탓에 메어는 삽시간에 왕자비로 간택받는다. 엘라라 왕비가 적혈이 초능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메어를 유명한 은혈 가문의 잃어버린 자식으로 꾸미고 사람들이 그것을 의심하지 않도록 아예 둘째 왕자 메이븐의 짝으로 선포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만일 적혈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다면 메어뿐 만 아니라 가족까지 모조리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이제 메어는 생존을 위해 은혈인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 은혈만이 가득한 그 곳에서 유일한 적혈인 것도 외롭지만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감춰야 한다는 것이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은혈의 적혈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보면서도 무시하거나 은혈 편을 들어야 하는 나날이 계속된다. 유일하게 적혈인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알고 있는 칼과 약혼자인 메이븐, 그리고 그녀의 스승이자 칼의 외삼촌 줄리언 뿐이다. 칼의 어머니는 왕의 첫째 왕비였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했다. 그녀의 동생 줄리언은 정략적인 이유로 누나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은혈 체제를 증오한다. 그래서 메어의 정체를 알고도 기꺼이 돕는다. 칼도 마찬가지다. 완고한 성격 탓에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지만 메어를 마음에 두고 있다. 물론 메이븐도 그러하다. 어머니가 억지로 짝을 지어주었지만 그 역시 현재 체제는 문제가 많다고 여겨 적혈을 도와주고자 하는데 그러다 서로 좋아하게 된다. 이렇게 형제를 두고 메어는 삼각 관계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적혈이 이런 체제를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조직을 만들어 저항한다. 그것이 바로 '진홍의 군대'다. 메이븐은 적혈의 혁명을 위해 그들과 협력한다. 마음을 읽고 조종할 수 있는 엘라라 여왕의 감시 아래에서 메어는 자신이 적혈이라는 것을 숨겨야 할  뿐 아니라 적혈의 혁명까지 도모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삶을 살게 된다.


 이상이 '레드 퀸'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라 할 수 있다. 세계와 사람이 중세와 유사하게 바뀌고 정체성의 연기가 가져다 주는, 언제 들킬 지 모른다는 서스펜스와 형제 사이의 로맨스가 강조되었다. 이것이 애비야드가 꾀한 변화였는데, 어쩌면 이마저도 '뭐, 그리 참신한 변화는 아닌데?'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작 그녀의 자신감은 필력 혹은 이야기의 연출력에서 나왔다고 해야할 것 같다. 진부한 소재들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도록 소설의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계급 속에서 살아가는 메어의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적혈의 부조리한 처지에 대한 자각과 행동에 대한 결심들이 잘 묘사되어 있고 초능력을 통한 대결 장면도 인상적이며(아레나 같은 곳에서 능력들을 겨루는데, 그래서 리들리 스콧의 '글라디에이터'가 생각났다.영화에선 꽤나 화려하게 연출되지 않을까 싶다.) 후반의 반전은 놀라웠다. 무자비한 장면을 연출해야 할 때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일단 재미 면에서 왜 소설이 그만큼 성공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깊이 면에서도 날로 계급적 격차가 심해져가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소설이 잘 반영하여 왜 점점 가속화되어가는 그런 경향에 대해 우리가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확실히 2부와 3부를 기다리게 만든다. 아직 풀리지 않은 떡밥들이 있어 더욱 그렇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1부라서 캐릭터가 아직 완성되지 못한 탓이라 생각되니 그 점은 2부와 3부를 다 읽고나서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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