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퀸 : 적혈의 여왕 1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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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영어덜트 판타지 소설에도 관심이 많다. 이번에 나온 '레드 퀸'도 거기에 속한다. 이 책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존에서 꽤 높은 순위를 오래도록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더구나 이제 갓 25살이 된 작가의 데뷔작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젊은 여성의 데뷔작이 이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하니 얼른 '트와일라잇'의 스테프니 메이어가 떠오른다. '레드 퀸'도 '트와일라잇'처럼 3부작으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된다. 과연 빅토리아 애비야드는 제2의 스테프니 메이어가 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쨌든 1부가 엄청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 영화화 작업도 한창 진행중이라고 하니까. 뒤이은 2부와 3부가 성공하고 영화까지 흥행한다면 애비야드를 제2의 스테프니 메이어라고 불러도 누구든 부정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레드 퀸'이 가진 설정의 얼개는 헝거 게임과 유사하다. 일단 계급의 격차가 현저한 디스토피아를 다룬다. 거기다 제목에 '퀸'이라고 나와 있듯이, 열악한 계급의 보잘 것 없었던 한 소녀가 결국 그 디스토피아를 허물게 된다. 여기서 벌써 식상함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설정은 헝거 게임의 커다란 성공과 더불어 이 장르의 대세가 되어 버렸다. 이후, 얼마나 많은 판타지 소설들이 '헝거 게임' 설정을 답습했던가? 솔직히 말해 '지긋지긋한 판타지 소설들''이라는 '커커스 리뷰의 표현은 결코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애비야드는 식상할 대로 식상해진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다. 신물이 날만큼 흔한 설정을 가져왔다는 것은 알고도 가져왔다는 것일테고 그렇다는 것은 그 식상함을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뜻이다. 신인으로서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은 보기 좋다. 하지만 그것도 다 독자가 식상함을 느끼지 않고 소설을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할 때라야 예뻐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그 자신감마저 마이너스로 채점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자가 소설 끝까지 흥미를 가지도록 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위해 애비야드는 변화를 추구했다.


 일단 소설이 담은 세계가 달라졌다. 

 레드 퀸의 세계는 비록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지만 헝거 게임과 같은 것은 아니다. 헝거 게임은 근대의 독재 국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드 퀸'은 중세의 전제 군주 나라에 가깝다. 왕이 있고, 왕과 함께 소수의 귀족들이 나라를 다스린다. 그런 그들을 특별히 '은혈(silver blood)'이라 부른다. 서양 속담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이 있다. 태생이 아주 좋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유행어가 된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은 물론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은 아주 옛날, 그러니까 중세 때  이미 존재했다. 하필이면 '은수저'가 된 것은 그것이  당시 귀족들에게 최고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애비야드는 이 은수저의 의미 그대로 은혈을 쓰고 있다. 그들은 특권 계층이며 막강한 힘으로 다수의 약하고 가난한 민중들을 착취한다. '은혈'은 비유가 아니다. 실제 그들의 피는 은색이다. 그리고 그 피 때문인지 그들은 영화 '엑스맨'의 뮤턴트들 처럼 초능력을 쓸 수 있다. 거대한 화염을 일으키고, 손을 바위처럼 만들어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동물들을 자기 뜻대로 부릴 수도 있고 식물을 순식간에 자라나게 한다거나 상처도 얼른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엑스맨과 똑같이 한 사람이 한 능력만 쓸 수 있다. 그런 능력으로 '적혈(red blood)'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지배한다. 다수의 민중을 이루고 있는 적혈은 붉은 피의 소유자들로 아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세계는 엑스맨의 매그니토가 그토록 바랐던 세계이기도 하다. 뮤턴트가 보통 사람들을 지배하는. 이렇게 사람도 달라졌다.


 '레드 퀸'의 세계는 오직 '피'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이 타고난 혈통으로 결정되던 중세와 흡사하다. 이것이 '레드 퀸'만이 가지는 독특한 지점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대부분 헝거 게임 류 판타지 소설들은 근대 국가 체제를 모델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드 퀸'은 중세 왕국이 모델인 것이다.그것은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엄격했던 중세만큼이나 심한 소설 속 세계의 계급 간 차별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제목을 다시 떠올려 보면, '레드 퀸', 즉 적혈의 여왕이니 우리의 주인공은 적혈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맞다. 그녀는 적혈이다. 이름은 메어 배로우(Mare Barrow). 작가는 주인공의 성을 배로우(Barrow)로 하여, 그녀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 배로우(Barrow)란 성이 낯익다면 당신도 메리 J 노튼의 'The Borrowers(마루 밑 버로우즈)'를 분명 읽은 것이다. 이 성은 바로 거기서 따온 것이다. 인간에게 기생하여 마루 밑에서 살던 조그만 인간 버로우즈. 메어의 처지도 그들만큼이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위로 세 명의 오빠가 있었지만 모두 전쟁터로 끌려가고 말았다. 오직 적혈이라는 이유로. 은혈이 인정하는 직업을 갖지 못한 적혈들은 18세가 되면 무조건 전쟁에 나가서 총알받이가 되어야 한다. 두 명의 오빠가 이미 죽었다. 아버지는 불구로, 메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소매치기를 한다. 결국 18세가 되어버린 메어는 직업이 없어서 군대로 징집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난 뒤, 은혈의 왕궁으로 갑자기 소환되어 거기서 일하게 된다. 알고 보니 그 소년이 바로 왕자 칼이었고 그 때, 메어는 소년에게 신세 한탄을 했는데 그 때문에 왕궁에서 일하게 해 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칼의 신부를 뽑는 이벤트가 열리게 되고 왕자의 신부가 되고픈 은혈 가문들의 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뽐내게 되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나 그만 메어가 거기에 휘말린다. 목숨이 위험해지려는 찰라, 메어는 놀랍게도 은혈만 할 수 있는 초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을 구한다. 그녀가 발휘한 것은 전기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능력. 압도적인 능력을 시전한 탓에 메어는 삽시간에 왕자비로 간택받는다. 엘라라 왕비가 적혈이 초능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메어를 유명한 은혈 가문의 잃어버린 자식으로 꾸미고 사람들이 그것을 의심하지 않도록 아예 둘째 왕자 메이븐의 짝으로 선포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만일 적혈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다면 메어뿐 만 아니라 가족까지 모조리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이제 메어는 생존을 위해 은혈인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 은혈만이 가득한 그 곳에서 유일한 적혈인 것도 외롭지만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감춰야 한다는 것이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은혈의 적혈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보면서도 무시하거나 은혈 편을 들어야 하는 나날이 계속된다. 유일하게 적혈인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알고 있는 칼과 약혼자인 메이븐, 그리고 그녀의 스승이자 칼의 외삼촌 줄리언 뿐이다. 칼의 어머니는 왕의 첫째 왕비였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했다. 그녀의 동생 줄리언은 정략적인 이유로 누나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은혈 체제를 증오한다. 그래서 메어의 정체를 알고도 기꺼이 돕는다. 칼도 마찬가지다. 완고한 성격 탓에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지만 메어를 마음에 두고 있다. 물론 메이븐도 그러하다. 어머니가 억지로 짝을 지어주었지만 그 역시 현재 체제는 문제가 많다고 여겨 적혈을 도와주고자 하는데 그러다 서로 좋아하게 된다. 이렇게 형제를 두고 메어는 삼각 관계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적혈이 이런 체제를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조직을 만들어 저항한다. 그것이 바로 '진홍의 군대'다. 메이븐은 적혈의 혁명을 위해 그들과 협력한다. 마음을 읽고 조종할 수 있는 엘라라 여왕의 감시 아래에서 메어는 자신이 적혈이라는 것을 숨겨야 할  뿐 아니라 적혈의 혁명까지 도모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삶을 살게 된다.


 이상이 '레드 퀸'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라 할 수 있다. 세계와 사람이 중세와 유사하게 바뀌고 정체성의 연기가 가져다 주는, 언제 들킬 지 모른다는 서스펜스와 형제 사이의 로맨스가 강조되었다. 이것이 애비야드가 꾀한 변화였는데, 어쩌면 이마저도 '뭐, 그리 참신한 변화는 아닌데?'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작 그녀의 자신감은 필력 혹은 이야기의 연출력에서 나왔다고 해야할 것 같다. 진부한 소재들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도록 소설의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계급 속에서 살아가는 메어의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적혈의 부조리한 처지에 대한 자각과 행동에 대한 결심들이 잘 묘사되어 있고 초능력을 통한 대결 장면도 인상적이며(아레나 같은 곳에서 능력들을 겨루는데, 그래서 리들리 스콧의 '글라디에이터'가 생각났다.영화에선 꽤나 화려하게 연출되지 않을까 싶다.) 후반의 반전은 놀라웠다. 무자비한 장면을 연출해야 할 때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일단 재미 면에서 왜 소설이 그만큼 성공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깊이 면에서도 날로 계급적 격차가 심해져가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소설이 잘 반영하여 왜 점점 가속화되어가는 그런 경향에 대해 우리가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확실히 2부와 3부를 기다리게 만든다. 아직 풀리지 않은 떡밥들이 있어 더욱 그렇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1부라서 캐릭터가 아직 완성되지 못한 탓이라 생각되니 그 점은 2부와 3부를 다 읽고나서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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