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전야의 최면술사 - 메스머주의와 프랑스 계몽주의의 종말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알마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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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8년 2월. 한 독일인 의사가 파리에 도착한다. 그의 이름은 프란츠 안톤 메스머. 그는 프랑스에서 단단히 한 몫 벌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에겐 팔릴만한 것이 있었고 그것은 그만의 특별한 이론이었다. 그는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어떤 유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보지 못했으면서도 발견했다고 주장했는데 증거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뉴튼의 만유 인력을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대학자 뉴튼의 말에 따르면 별과 별 사이에도 인력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아무 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어떻게 힘이 작용할 수 있겠느냐며 그것은 분명 내가 말하는 유체가 인력을 매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당시는 과학이 지식인 계층에게 호사가의 취미로 널리 유행하고 있어서 그런 식의 과학적인 논증은 쉽게 사람들의 납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것만이 성공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먹혀들어갔던 것은 바로 다음에 있었다. 그는 그런 유체가 모든 생명체에게도 존재한다고 말했고 인간의 모든 생로병사마저 유체가 주관한다고 설파했다. 유체만 잘 관리하면 암도 치유가능하다고 하면서 실제 치료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그는 치료를 위해 방을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하는 일은 없었다. 환자가 그 방에 들어가서 만나는 것은 기이한 별자리들이 수놓인 벽을 배경으로 거울들이 반사하는 특이한 빛과 이상한 소음 그리고 부드러운 하모니카 연주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환자들은 자신의 병이 치료되었다고 고백했다. 메스머는 그 방의 모든 것은 인간의 유체를 자극하고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 말했다. 완치의 고백이 이어지자 프랑스 전역에서 메스머의 인기가 폭발했다. 라파예트, 니콜라 베르가스, 장 루이 카라 그리고 자크 피에르 브리소등 그를 옹호하고 뒤따르는 지식인들도 늘어났다. 수없이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메스머는 많은 환자들을 한꺼번에 치료하는 '위기의 방’을 만들었고, 아예 사람들 스스로 치유할 수 있도록 통 같은 것을 대량으로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그래도 인기는 꺾일 줄 몰랐고 시중에는 어느새 가짜 통들이 속출했다.


 프랑스 언론들은 메스머의 치료 방법이 기존 의학을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 보도했다. 그러니 프랑스의 의학계가 메스머를 곱게 볼 리 없었다. 메스머와 의학계 간에 유체의 실체와 치료의 진실을 두고 대대적인 공방이 벌어졌고 결국 우리도 잘 아는 화학자 라부아지에와 벤자민 프랭클린까지 가세한 위원회가 메스머의 주장을 검증했다. 결론은 ‘유체를 확인할 수 없다’로 났고 바로 기득권 지식인들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려 메스머는 프랑스 바깥으로 추방되었다. 이것이 정확히 프랑스 대혁명 11년 전에 일어난 메스머 유행의 전말이다. 로버트 단턴의 책,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는 바로 이것을 담는다. 단순히 상황을 독자에게 알리는 것은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미국의 유명한 유럽사 학자인 로버트 단턴은 해바라기 같은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프랑스 대혁명 하나만 바라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그에게 프랑스 대혁명은 하나의 기적과도 같다. 당시 프랑스 민중 대부분은 문맹이었다.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종종 루소와 같은 지식인들의 책들이 혁명으로 이끄는 선구자 격이 되어 민중이 들고 일어나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말한다. 지식인들의 언어와 논리가 없었다면 굶주림으로 마구 들끓고 있었던 체제에 대한 민중의 분노도 혁명으로 쉽게 결집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 프랑스 민중은 그 책들을 읽을 수 없었다. 거기다 당시의 민중은 오래도록 왕정에 익숙해져 있었다. 프랑스 혁명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민중은 왕의 손만 잡아도 자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란 믿음이 널러 퍼져 있었다. 마르크 블로크의 ‘기적을 행하는 왕'은 당시 그런 믿음이 기층 민중에게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으며 오래도록 신앙처럼 뿌리내리고 있었는지 잘 보여 준다. 왕은 민중에게 태양왕 루이 14세가 천명한 것처럼 거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무지와 빈곤에 찌들었던 프랑스 민중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빈곤층과 저학력 소유자들이 박근혜를 더 많이 지지하는 것과 똑같이 듯 전통적 권위에 맹목적으로 순응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신과 같은 왕을 단두대로 보내는 혁명을 일으킬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단턴에게 프랑스 혁명은 기적이었고 그 기적을 가능하게 만든 것을 단턴은 쫓았다. 그는 수많은 의문을 쫓는다. 혁명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선도했던 지식인들의 사상들은 과연 어떤 식으로 민중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압도적인 문맹 상황으로 볼 때, 책이 그 역할을 할 수 없었다면 분명 다른 경로가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민중 스스로 혁명의 주체로 성장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는 오래도록 거기에 천착하면서 마치 CSI와도 같이 끈질기게 그 흔적과 징후를 추적했다. 그는 정말로 태양만 바라보며 꽃봉오리를 돌리는 해바라기 같았다. 이번에 나온‘혁명 전야의 최면술사'를 읽고나니 더욱 그렇게 여기게 되었다. 이 책은 68년에 나온 로버트 단턴의 첫 책인데, 여기서 부터 메스머주의와 프랑스 혁명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마치 해부하듯이 상세하게 분석하여 어떻게 혁명 사상이 민중에게 광범위하게 유포될 수 있었는지 그것을 밝히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턴은 일단 지금의 상식으론 얼른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메스머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의 시각을 교정할 것을 권한다.


 ‘메스머주의가 오늘날에 터무니없이 보인다고 해서 역사가들이 이를 외면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메스머주의야말로 1780년대 글을 아는 프랑스인들의 관심에 완벽히 부합했기 때문이다.(p. 33)


 단턴은 당시 프랑스에서 과학이 왜 인기가 있었는지를 밝혀 프랑스가 혁명까지 가는 여정에 있어 메스머주의가 했던 역할을 드러낸다. 그 때 과학은 열기구나 비행기등 민중들에게 신기한 눈요기 거리들을 맣이 제공했다. 그런 실험이 있다는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구경했다. 그들에게 그 광경은 경이였고 오로지 신을 중심으로 돌았던 세계에 인간의 위대함이 거대한 지진을 일으키는, 한 마디로 자신의 세계관이 전복되는 체험이었다. 다수의 농민들은 하늘 높이 올랐다가 내려온 열기구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당신은 인간입니까? 신입니까?(p. 49)


 이제 왕은 신이 아니었다. 과학자가 신이 되었다. 왕족이나 귀족들조차 그들이 보여주는 실험을 지상에서 한 명의 구경꾼이 되어 쳐다보았다. 과학은 엄격하게 나뉘었던 신분 제도에 평등을 가져왔다.


  퐁텐이라는 이름의 한 평민 출신 젊은이는 1784년 1월 19일 리옹을 막 출발한 몽골피식 열기구에 뛰어들었고 왕자, 백작, 기사 그리고 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다른 유명인사 승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지상에서는 내가 당신들을 우러러보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대등하다.”프랑스의 젊음을 일깨운 행동이었다.(p. 227)


 이것은 그만큼 민중 자신을 사회의 주체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과학은 신의 섭리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저절로 이뤄지는 질서를 보게 했으며 질병도 악마의 시험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기도로 해결하기 보다는 그 원인을 스스로 곰곰이 따져보게 만들었다. 즉 모든 현상을 대하는데 있어서 주체로 행동하게끔 자극한 것이다. 단턴은 이런 식으로 루소의 책보다 구경거리로써의 과학이 민중을 더 계몽했다고 본다.


 메스머주의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메스머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과학은 민중에게 유리되어 있었다. 그것은 복잡한 계산이었고 어려운 수식으로 구성된 논리라 민중이 접근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민중에게 허락된 것은 구경으로 참여하는 것 뿐이었다. 그랬던 간격을 바로 메스머주의가 좁혔다. 이론에 어느 정도 비합리적인 면과 신비한 면이 있었던 덕분에 정통 과학이 요구하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의 짐을 덜 수 있었고 자연히 민중의 언어로 보다 손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로버트 단턴은 메스머주의가 정확히 과학이 사이비 과학과 신비주의로 변해가는 스펙트럼의 중간 부근에 자리잡고 있다(p. 68)고 말한다. 그렇기에 메스머주의는 과학이 열어놓은 민중을 주체로 만드는 길을 더욱 가속화 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이런 메스머주의의 힘을 일찍 알아본 자들이 있었다. 바로 당시 프랑스에 있었던 급진주의자들이었다. 지금 이 체제로는 더 이상 안되니 앙시앙레짐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급진주의자들에게 메스머주의는 참으로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과학이 지닌 민중을 주체로 자각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민중이 가장 손쉽게 받아들이는 과학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메스머주의를 통해 자신들의 급진 사상을 민중에게 전파시키려 하였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나중에 메스머주의는 푸리에와 생시몽등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로버트 단턴은 이런 식으로 주류 역사에서 그저 한 순간의 해프닝으로만 간주했던 메스머주의와 프랑스 혁명 사이의 연결 고리를 촘촘히 발굴해 낸다. 그리고 소개되는 수많은 사료와 인용이 단턴의 견해를 꽤나 설득력있게 만든다.


  프랑스 학자 르네 지라르는 모델론을 말한 바 있다. 쉽게 말하자면 혁명 같은 거대한 이념으로 기층 민중을 움직이기 위해선 그들이 쉽게 이해하고 모방할 수 있는 중간 모델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단턴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절로 르네 지라르의 모델론이 떠오르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은 바로 그런 중간 모델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메스머주의가 바로 그런 중간 모델이었다. 여기서 자신들의 사상이 문맹이 많은 대중들에게 쉽게 전달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일찍 깨닫고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이유로 편견없이 메스머주의를 받아들인 프랑스 급진주의자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 엘리트로서의 자존심은 던져 버리고 어떻게든 민중의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민중이 처한 상황과 그들에게 놓인 현실적 한계를 먼저 헤아리고 그걸 그대로 인정한 다음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자신들의 대의를 설득하려 한 것이다.


 이런 급진주의자들의 모습을 보다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다들 유행가의 후렴구처럼 국민, 국민 하지만 정작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대의를 몰라준다고 오히려 국민을 타박한다. 설득하려는 최소의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만이 진리이며 국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오해라고 공박할 뿐이다.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제발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를 읽어서라도 자신의 대의를 실현하려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꼭 좀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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