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선언 -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 년들의 목소리
한우리 기획.번역 / 현실문화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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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지금까지의 페미니즘 역사를 크게 3 단계로 구분한 바 있다. 1단계가 시몬느 드 보부아르로 대표되는 이른바 '평등 페미니즘'으로 보부아르의 유명한 말, '여성은 제 2의 성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간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성으로, 그렇게 오로지 부정과 결여의 존재로만 있어왔던 것에 반기를 들고 남성과의 동등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이라면, 2단계는 그런 평등의 추구가 실은 여성을 중성적인 주체로 만든다는 것에 문제 의식을 가지고 남성과 독립적인 여성만의 가치, 문화를 지향하는 페미니즘이다. 하지만 이런 여성 혹은 여성성의 강조도 그것을 너무 본질로 또 실체로 간주하다 보니, 그조차 남성과 남성성의 대비에서 나온 것으로 그 근원엔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고 또 이런 이분법적 구도 자체가 오히려 페미니즘이 진화하는데 족쇄가 된다는 이유로 아예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구도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페미니즘이 뒤이어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주장한 제 3 단계다. 이렇게 페미니즘은 단일하지 않고 이 속에도 종적으로는 겹으로 쌓인 여러 시대적 지층들과 횡적으로는 저마다 다양한 주장을 하는 지형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런 지층과 지형들을 무시하고 페미니즘을 단순하게 규정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잘못을 피하고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 크리스테바도 언급한 바 있지만 역사적인 접근은 유용한 도움이 될 수 있다. 페미니즘의 개념과 주장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빚어졌으며 또 어떠한 반박과 재정립을 통해 진화했는지 구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개념은 무에서 바로 툭 생겨나지 않는다. 개념들도 저마다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온갖 갈등들을 통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마모되고 형태를 잡아가는 것이 개념이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 현실 속에서 매일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자신이 서 있는 진지를 방호하기 위해 이론적 무장을 했어야 했던 페미니즘은 더욱 그랬다. 그러므로 우리는 페미니즘이 걸어온 저 과거의 발자취도 마땅히 돋보기를 들이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 그것에 도움이 되는 책이 하나 나왔다. 제목은 '페미니즘 선언'. 부제가 재밌다.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년들의 목소리'. 페미니즘 역사에 대해 지식이 많으신 분들은 이 부제가 모두 페미니즘에 중요한 분기점들을 이루거나 페미니즘 진영을 들끓게 만들었던 선언들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이다. 이 책은 부제가 말하는 대로 그런 선언문들을 모은 책이다. '레드스타킹 선언문'부터 메갈리아 남성 혐오 발언에 치를 떠는 분들이라면 더욱 기겁할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까지 모두 9편의 선언문이 담겨 있다. 이 책은 60년부터 79년 사이에 미국에서 발표된 선언문을 모은 것이지만 원서가 있어 번역한 것은 아니다. 저자가 직접 선별하고 번역해 모은 것이다. 저자가 이 시기에 주목한 것은 래디컬(급진적) 페미니즘이 폭발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래디컬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뿌리부터 파헤쳐 바꿔내려고 시도한 거대한 운동'(p. 18)이었다. 그만한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선 아직 그 시기만 천착해 다룬 책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당시 래디컬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핵심을 가장 잘 담아낸 9편을 선정하여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미국의 래디컬 페미니즘을 지금 우리들 앞에 가져온 것일까? 거기엔 한 때 엄청 뜨겁게 타올랐던 메갈리안 논쟁이 있었다. 저자는 메갈리안을 '한국적 맥락에서 태어나 자생적으로 성장한 래디컬 페미니스트'(p. 21)로 보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 미국의 래디컬 페미니즘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기에 메갈리안의 미러링이 증오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저자는 메갈리안의 미러링이 별종이 아니라 미국의 래디컬 페미니즘도 했었던 보편적인 것이라는 걸 독자들에게 주지시키려고 이 책을 발간한 게 아닐까 싶다. 적어도 한국의 자생적 래디컬 페미니즘 운동이 그냥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한국 페미니즘 계보에 어떤 형태로든 남겨두기 위해서.(p. 21)


레드스타킹 심벌


 이런 의도로 모인 9개의 선언문은 크리스테바의 구분에 따르면 모두 제 2 단계에 속한다. 남성과의 단순한 평등이 아닌 여성만의 독립적인 가치, 문화를 강조하고 구현하는 흐름에 있는 것이다. 9개의 선언문은 연대기 순이 아니다. 순서가 왜 이렇게 되어있는지는 책에 나와 있지 않으므로 나도 모른다. 그냥 내 생각엔, 가장 온건한 것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순서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에 있는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은 제목에서 받는 인상 그대로 정말 가장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레드스타킹 선언문'은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선언문 중 하나다. 이 선언문을 발표한 레드 스타킹 단체 자체가 래디컬 페미니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단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이 스스로를 '레드 스타킹'이라고 했던 것은 당시 남성 지식인들이 글을 쓰는 여성 지식인들에 대해 조롱의 의미로  '블루 스타킹'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강하고 혁명의 색깔이기도 한 '레드'를 그녀들은 들고 나왔다. 사실 그들은 혁명을 지향했다. 그들은 현 사회가 모든 권력이 남성에게 집중된 남성 지배 사회라고 규정했고 모든 제도와 물리력을 동원하여 여성들을 열등한 자리에 묶어두기 위해 억압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단적으로 '여성들은 억압받는 계급이다'라고 선언했다. 지금 여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모두 남성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들은 그런 개인 경험이 모두 정치적인 것이며 그런 경험들을 여성들 모두가 공유하여 여성의 계급 의식을 고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남성 지배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해 그런 계급 의식을 지양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것을 시작으로 여성은 더이상 남성보다 부족하거나 남성이 결여된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런 자기 검열까지 강요하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부당한 권력 관계에 더 주목했다. 이렇게 '레드 스타킹 선언문'이 하나의 계급으로써의 여성을 확고하게 정립했다면 뒤이어 나오는 '드센년 선언문'은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 본 여성성이 아닌, 여성 고유의 여성성을 강조하고 정립하는 선언문이다. '드센년(bitch)'은 남성 지배 질서에 편입되지 않는 모든 여성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남자들이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말하는 모든 여성의 면모가 실은 가장 여성적인 것(true woman)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드센년 선언문'인 것이다.


 드센 년은 여성을 노예로 부리는 사회 구조를, 여성은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적 가치를 위협한다.(p. 58)

 드센 년은 여성이기전에 인간이기를 주장하기 때문에, 사회적 압박에 굴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솔직하기를 주장하기 때문에 아웃사이더가 된다.(p. 59)


 '드센 년 선언문'은 남성의 시각에 종속되지 않은 여성, 남성 문화가 길들일 수 없는 여성 문화를 구현하려고 한다. 그렇게 남성이 아닌 여성이기 이전에 고유하고 독립적인 인간 존재로써의 여성을 강조한다. 이어서 나오는 '강간 반대 선언문'과 '미스 아메리카 대회를 멈춰라' 선언문은 모두 이와 연장선 상에 있다. 뒤이어 나오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제 2 단계 페미니즘에서 가장 유명한 슬로건 중 하나로 '레드스타킹'이 선언한 것을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페미니즘 운동은 본질적으로 억압받고 차별받는 존재들의 해방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동성애, 인종 차별과도 맥이 닿는다.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문'과 '흑인 페미니스트 선언문'이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한 때, 페미니즘 진영에서 레즈비언과 흑인은 거기서도 차별 받는 존재들이었다. 아무리 같이 페미니즘을 주장하고 있어도 레즈비언이나 흑인은 거부당하기 일수였다. 보다 더 열등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야는 오히려 더 넓어졌고 그들 때문에 페미니즘은 좀 더 넓게 확장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사회라면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범주는 사라진다.'는 '레즈비언 페미니즘 선언문'의 말처럼 페미니즘은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을 점차 완화시켜 나갔고, '흑인 페미니즘 운동'은 백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흑인 남성 역시 차별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 차별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더 넓게 포용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앤디 워홀을 총으로 쏜 것으로 유명해 영화까지 만들어진 바 있는 밸러리 솔래너스의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은 아마도 이 책에 실린 선언문들 중 남성들에게 가장 논쟁을 불러 일으킬 것 같은데, 그것은 아예 남성 자체를 여성 보다 열등한 존재로 재정립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솔래너스는 단적으로 남성이 실은 여성이 되기를 원하는 존재로, 남성이란 정말은 불완전한 여성이라고 정의한다.


 불완전한 여자로서 남자는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 즉 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일생을 보낸다. 끊임없이 여성을 찾고, 여성과 친하게 지내며, 여성에게 녹아들어가기를 원한다.(p. 176)


  그러므로 여성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운명이며, 현재의 남성 중심 사회를 모조리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신랄하게 설명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읽어보면 이 선언문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이내 알 수 있을 것이다.


밸러리 솔래너스의 삶을 그린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


 이렇게 대략적으로 선언문들을 소개해 보았다. 글이 다소 길어졌기에 여기서 총평을 해 보자면, 저자가 의도한 대로, 당시의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다. 생각해 보면, 혐오는 편견에서 비롯되고 오해는 고정관념이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혐오와 오해를 피하려면 무엇보다 대상이 되는 존재를 제대로 알고 헤아리는 것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앞에서 말했던 대로, 오랜 시간 종으로 횡으로 참으로 많은 변화와 다양한 맥락이 여기엔 존재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선언'은 분명 그 변화와 맥락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한층 더 넓히도록 만든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면 지나칠 수 없는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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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에는 정신분석 - 노답 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 우리 시대의 질문 4
김서영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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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신분석은 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개인을 제대로 정신분석 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에 대한 정신분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은 그릇 속 물과 같아서 사회가 흔들리면서 만들어내는 파동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미 주체라는 것 자체가 '대타자'라는 상징 질서 안에 편입되면 더 이상 주체로써 기능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사회 속 '나'라는 주체는 사회가 짜놓은 의미망 위에 찍어 놓은 하나의 좌표와 같다. 그러니 그 좌표만 분석해서는 지금 개인의 처지가 어떠한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진정한 해석은 오로지 그 좌표가 찍혀 있는 지도 전체를 헤아려야 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사회에 대해서 정신분석을 해야 한다. 이번에 나온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은 바로 이렇게 현재 한국 사회의 중요한 병리적 증상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정신 분석을 해 보는 책이다.


 원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연재된 것을 모은 책으로 '한국라깡과현대정신분석학회' 소속 9명의 학자들이 각자 쓴 9개의 글들이 모여있다. 저마다 다루는 사회 현상이 다르다. 백상현은 최근 들어 한껏 늘어난 멘토 의존 경향을 다루고, 김소연은 공부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 현상을 다루며, 이성민은 한국에서만 유독 엄격하게 자리잡은 선후배 관계를 초점으로 한국 특유의 수직적 관계를 분석하며, 정지은은 오포세대에 들어와 달라져 버린 결혼과 사랑의 의미를 정신분석적으로 되짚는다. 정경훈은 날로 극심해지고 있는 외모 지상주의를 분석하며 김석은 현재 한국을 가장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그리고 이만우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혐오와 폭력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홍준기는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세대 갈등과 한껏 높아져만 가는 불안 속에서 추구해야 할 사회적 대안을 모색하며 마지막으로 김서영은 이런 '헬조선'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각 글마다 분석하고 있는 대상은 우리가 살면서 피부로 부딪히는 것들로 알고 보면 우리 역시 한 번은 이유나 가치 판단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들이다. 그렇기에 라깡이나 바디우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인용되고 이론들이 전개되지만 거기에 별로 개의치 않고 살갑게 읽을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서술이 평이하기에 이해에 요구되는 허들이 그리 높지 않지만 말이다. 이런 글들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달리 보기'라 말할 수 있을 듯하다. 하나의 예로 멘토 열풍에 대해 분석한 첫 글은, 지그문트 바우만도 사람들이 삶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기 보다 누군가 대신 선택을 알려주기를 바라면서 자신보다 상위의 권위에 기대려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한 바 있는데, 이 글 역시 비슷한 논지에서 오히려 불안과 우울이야 말로 진정한 주체가 탄생하는 장소라고 말하면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자주 나타나는 텅 빈 풍경을 그 공간의 예로 든다. 사람들은 확고한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은 '해당 사회의 지식과 권위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p. 20)하며 '진리의 순간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던 정체성의 지식들이 우리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실패한 순간, 이러한 초과에 대해 우리 자신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아를 파악하려는 시도 속에서 실현'(p. 27)되며 그러므로 불안과 우울 그리고 공포 증상을 통한 내 정체성 붕괴의 경험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실은 시작(p. 31)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텅 빈 시간 속에 고독하게 내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 때문에 더욱 기댈 멘토를 찾는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 시간과 공간은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 환영해야 할 것이라며 이렇게 평소 우리가 근절하고 싶었던 불안, 우울 그리고 공포가 가진 긍정적 면모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지식과 해야 할 공부는 오로지 내 주체를 길들이거나 위축시킬뿐인 사회의 지식과 권위의 잔여물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횡단하여 내재된 균열이나 그것이 미처 당도하지 못한 외부의 것들이며 진리를 주장하는 그들의 기만에 찬 가면을 벗길 수 있는 계보들에 대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정신분석이 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정신분석이라는 조금은 색다른 도구로 그간 익숙한 한국 사회 문제들에 대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도록 하기에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 책은, 지금 '헬조선'에 누벼져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한번쯤 관심을 가져보았다면 꼭 읽어볼 것을 감히 추천드리고 싶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게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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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 - 변증법적 유물론의 새로운 토대를 향하여
슬라보예 지젝 지음, 정혁현 옮김 / 인간사랑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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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보예 지젝의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의 원래 제목은 '절대적 되튐'이다.

 되튐은 원래 화학 용어로 어떤 물체나 입자에 전자기파나 고속 입자가 와서 닿을 경우 운동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서 물체 또는 입자가 도로 튀어나가는 현상을 말한다. 다시 말해 되튐이란 부정(否定)의 운동이다. 그 되튐에 지젝은 '절대적'이란 말을 붙였다. 절대는 헤겔이 즐겨 사용했던 말이다. 대표적으론 '절대 정신'이 있다. 헤겔에게 절대란 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절대적 되튐이란 절대적 부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측면에서 부정이란 정립에 대한 반정립으로, 절대적 부정이라 함은 아무리 해도 종합적 정립에 이르지 못함을 말한다. 절대적 부정이란 메워질 수 없는 구멍,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다.


 지젝은 흔히 '포스트 모던 시대의 코뮤니스트'로 평가 받는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지하에 묻어 버린 거대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생명을 다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으며 레닌 식의 대중 혁명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변증법을 통해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기 전인 본래 모습의 '헤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헤겔의 진정한 유산을 아직 우리가 상속받지 못했다고 여긴다. 주체에 대해, 유물론에 대해, 혁명에 대해 헤겔은 우리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말들이 많다. 아니 이미 들린 말들도 오해로 점철되어 있다. 지젝은 그 오해를 불식시키려 하고 미처 듣지 못한 언어를 찾아 들려주려 한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에서 지젝이 하고 있는 일이다.




 그가 헤겔의 복권을 통해 무엇보다 지우고자 하는 것. 그것은 악셀 호넷이나 로버트 피핀이 형성한 헤겔의 모습. 그러니까 '상호 인정'의 헤겔이다. 지젝은 그것을 '기가 꺽인 자유주의적 헤겔'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지젝에게 헤겔의 생명은 인정이나 그 인정을 통해 서로 하나 되는 종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이 아닌 적대, 영원히 종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절대적 부정에 있기 때문이다. 일단 주체부터 부정의 산물이다. 피핀의 상호 인정이 가능하려면 타자를 인정하는 주체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젝은 그런 주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인다. 왜냐하면 피핀 식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상징 질서 내에 있어야 하는데, 상징 질서 즉 대타자에 편입된 주체는 지젝이 보기에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상징적 좌표 들의 빽빽한 짜임 외부 뿐이다. 헤겔을 경유하여 지젝이 주체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체는 주체로 정립되는 순간 주체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주체는 결코 정립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현재의 행위를 통해 소급적으로 정립될 뿐이다. 현재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계기가 되어 과거 자신의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젝의 주체다. 때문에 주체는 늘 완전한 자신을 누릴 수 없다. 그는 늘 자신에게 뭔가 빠져 있음을, 나 자신과 완전히 일치되지 못함을 느낀다. 그렇게 항상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때문에 그는 현재의 자신이 아니라 늘 과거로 소급하여 자신을 정립한다. 그 때 주체가 출현한다. 그 과거란 것은 언제나 소급하는 현재의 시점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므로, 과거의 소급을 통해 출현하는 주체도 한없이 임시적이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체는 늘 부정에 의해 자신을 정립할 수밖에 없다. 제목을 그대로 따와서 말하자면 되튐이야 말로 주체의 형성 작용인 것이다. 나아가 지젝은 그런 주체들이 모여서 만드는 사회 운동 역시 실은 부정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주 상생을 말하고 조화를 말한다. 가진자들도, 가지지 못한 자들도 한결같이 서로에게 그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지젝은 그것이 그저 거짓 연기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하나의 예를 든다. 레비 스트로스가 '구조 인류학'에서 대서양 부족들 중 하나인 원네바고 부족 마을 건물들 공간적 배치에 대한 분석이다. 그 부족은 공교롭게도 '위에서 온 자들'이라 불리는 지배하는 집단과 '아래에서 온 자들'이라 불리는 지배 당하는 집단, 이렇게 두 집단으로 확고히 분리되어 있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두 집단에게 지금의 마을 공간 배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지배하는 집단은 마을에 배치된 집들이 중앙을 둘러싼 하나의 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배 당하는 집단은  비가시적인 경계로 엄격히 분열된 두 개의 다른 마을로 보았다. 분명 같은 공간적 배치를 보았지만 해석은 이렇게나 달랐다. 사회적 공간에 대한 인지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시각에 좌우된다. 그리고 본다는 것은 단순히 관찰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도를 드러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실에다 투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각은 일종의 바람(desire)이다. 그렇게 지젝은 두 집단의 시각이 그들 스스로 가지고 있는 외상적인 중핵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외상적인 중핵, '그것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체를 조화로운 전체로 안정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사회적 관계의 불균형을 상징화하거나 해명 혹은 내면화 하거나 그것과 타협할 수 없는 근본적인 적대'(p. 172)를 말한다. 지젝은 적대, 이것이야 말로 실재라 말한다. 주체는 외상을 통해 실재와 대면하는데, 바로 이 적대가 주체들의 외상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쓰는 조화, 상생 같은 단어는 사실 이런 적대를 교묘하게 위장한 가면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만 따져 봐도, 위에 있는 자들이 하는 조화나 상생의 진심은 사실 '우리가 하는 일에 제발 딴지 좀 걸지 마라. 네 놈들은 그저 우리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기만 하면 돼!'인 것을 알 수 있고, 아래에 있는 자들의 상생은 '너희들은 너무 많이 가졌어. 이제 그것을 나눠 줄 때야.'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실은 이렇게 서로에 대해 분명한 적대를 드러내고 있으면서 말로만 그것을 감추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지젝은 본질이 이렇다면 그것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가 헤겔의 복권을 통해 진정 추구하는 것도 국가에 의해 구조적으로 가리워진 적대적 폭력을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내기 위해서다. 절대적 부정, 그것은 절대적 적대이기도 하다. 그 적대는 어떤 미사여구로도, 상징적 조작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오물이다. 국가는 자신의 존속을 위해서 어떻게든 그것을 세탁하려 하고 적대의 기를 꺾으려 하지만 지금의 백만 촛불처럼 그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있다가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단번에 그리고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지젝은 그 출현의 순간을 믿는다. 하지만 분명 많은 이들이 그의 믿음을 몽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고, 당신은 잘못된 플랫폼에서 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우리 뒤에 놓여 있는 압도적인 시간의 과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냐고.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개인화 되었고, 인지 자본주의는 적대 보다는 통합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수긍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주체란 어차피 과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과거의 그가 무엇이든 현재의 그에겐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주체가 되튐으로 형성된다고 믿고 있으니까.


 주체는 언제나 이미 그것의 재현 속에서 사라지는 X이다. (...) 물론 우리는 과거의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가상적 차원 뿐이다. 근본적으로 어떤 것이 새로 출현할 때, 이 새로운 것은 자신의 가능성 및 그 자신의 원인들과 조건들마저 소급적으로 창조한다. 하나의 잠재성은 과거의 현실 속으로 삽입될 수 있다.(p. 313)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무엇을 선택하고 행동하느냐를 통해 과거는 소급적으로 형성된다. 현재의 주체 행위에 되튀어 과거의 파장이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단절을 가져오고 그 시간과 함께 움직이는 상징 질서의 그물망에서 빠져 나오도록 돕는다. 그래서 되튐은 진정한 자유에 속한다. 지젝은 말한다. 칸트가 실천 철학에서 말한 자유는 사실 불가능한 실재라고. 왜냐하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위는 우리가 한 행위가 정말로 자유로운 행위였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의미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진정한 자유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진정으로 자유로웠을 가능성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불안을 어떤 병리적인 동기로 환원함으로써 이러한 외상을 길들일 가능성이다.(p. 527)


 병리적인 것, 불안, 우울증. 이것이야말로 주체를 주체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본다. 그 모든 적대적 증상들이야말로 내가 진정 자유롭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우리는 이 말을 얼른 납득하기 어렵다. 안정과 행복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외상을 대타자의 요구에 따라 길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나가 아닌 나가 되어 나인 것으로 알고 사는 가짜 나일 뿐이다. 절대적 되툄은 그런 가짜 나를 찢고 진짜 나를 되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사회가 은폐하고 왜곡하는 안정과 평화의 기만적인 가면 또한 찢는 과정이다. 그 기만의 언어와 정보 왜곡 속에 세월호 아이들을 비롯하여 얼마나 무구한 생명들이 희생되고 상처 입었던가. '박근혜 게이트'는 지금 우리에게 우리를 길들인 대타자의 민낯을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민낯에 대해 많은 이들은 거리로 나가 촛불을 밝혔다. 광화문 거리를 가득 메웠던 적대의 불빛. 그것은 진정한 주체의 강물이었고 자유의 파도였다. 우리는 그렇게 새로이 태어났고 역사도 태어났다. 바울의 이 말 그대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완전한 새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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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리맨 2018-02-0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잘 봤습니다
 
유령 작가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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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해리스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유령 작가'가 개정판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왔다. 원래는 대필 작가를 뜻하는 '고스트 라이터'란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이번엔 '유령 작가'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개봉된 영화 제목에 맞춘 것 같다.


 

 영화는 보았으나 소설론 이번에 처음 만났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는 오랜만에 만나보는 70년대 스릴러 영화의 분위기를 한껏 간직한 영화였다. 사건 보다는 분위기, 인물 보다는 공간을 적극 활용해 의미를 전달하려고 애썼다. 로만 폴란스키 자신이 성범죄 전력으로 많은 국가에서 입국이 금지된(입국만 하면 바로 체포될 것이므로) 망명자 신분이라, 비슷한 처지에 처한 전직 영국 수상 아담 랭에 감정 이입하는 듯해 보이는 장면도 있었다. 소설에서 아담 랭을 국제형사재판소에 고발한 현재 영국의 국방장관 라이카트는 '아담 랭은 CIA의 연금을 받고 은퇴해서는 장관님과 그 놈의 국제형사재판소를 향해 'fuck you'(번역은 다른 말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쓸만한 단어가 아니기에 이리 표현함. 영화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이완 맥그리거가 소설과 같은 대사에서 이 단어로 말함.)를 날릴 겁니다'라고 말하는 주인공 작가에게 이렇게 응수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추방을 죽음보다 더 끔찍한 형벌로 생각했어. 그리고 이봐, 랭이 망명자가 될 수 있겠어? 세계 어디에도 갈 수 없는데? 국제형사재판소가 뭔지도 모르는 개똥 같은 미개국 몇 나라조차 어려울 거야. 비행기라는 건 늘 엔진에 문제가 생기거나 연료 공급을 해야 하는 법이고, 그렇게 되면 어딘가에 착륙을 해야 할 테니까 말이야. 우린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그리고 그 때가 바로 그자를 잡는 순간이 될 거야." (p. 342)


 로만 폴란스키가 이 글을 읽었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는 이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내 마음을 가장 강하게 울린 문장이건만. 왜 여기서 이런 기분을 느꼈나 하면, 만일 지금 누군가 내게 '유령 작가'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키워드가 뭐냐고 묻는다면, 시국이 시국인지라 아무래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그것은 두 개로 하나는 '대필'이고, 다른 하나는 '비선 실세'라고.


 때문에 이 소설은 원래 저널리스트로 유명했던 로버트 해리스가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토니 블레어의 퇴임에 맞춰, 토니 블레어를 모델(소설의 전직 수상 아담 랭이 바로 토니 블레어다. 실제 로버트 해리스는 랭에 대한 묘사 때문에 토니 블레어 측으로부터 고소 당할 뻔 했다고 한다.)로 하여 쓴 소설이지만, 읽다 보면 왠지 영국만의 또 소설 속 만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고 꼭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우리가 최근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 또한 대필과 비선 실세가 아니었던가. 민주주의의 근간이 붕괴된 시점인데도 그것에 무한 책임이 있는 장본인인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는 것처럼 퇴진할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고 오히려 여성의 사생활 운운 하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자신이 피의자나 다름 없으면서 자신에게 있는 권력을 빌미로 주권자인 국민의 명령과 검찰 조사까지 깡그리 무시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안에서는 검찰에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히 조사하라고 명령하는 둥 막나가고 있으니 절로 라이카트의 '우린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그리고 그 때가 바로 그자를 잡는 순간이 될 거야.'에 마음의 결기를 다시 돋우는 것과 함께 울컥할 정도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반드시 잡고 싶다'고



 어쨌든 일단 이야기부터 간략하게 소개해 보도록 하자. 남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대신 집필하는 전문 대필 작가, 즉 '고스트 라이터'인 주인공에게 이제 막 영국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 아담 랭의 회고록을 대신 집필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2주 전, 원래 회고록 집필을 맡고 있던 마이클 맥아라가 익사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 내렸다. 정치인 회고록을 써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가장 쓸모 없는 책이라 생각하고 있던 주인공은(계속 주인공이라 하는 것은 소설에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나'가 화자가 되어 말하는 1인칭 시점이다. 영화에서도 주인공 이완 맥그리거의 배역 이름은 그의 직업인 'The Ghost'로만 표기 되었다. 소설에서 그는 아담 랭을 처음 만날 때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기도 한다. "당신의 유령입니다."라고. 이것이 소설 속 그의 진실이기도 하다. 로버트 해리스는 고유한 실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이름을 일부러 지워 유령이나 다를 바 없는 그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는 진정 유령이다. 유령은 개입이 금지된 존재. 그렇게 관찰자의 역할 밖에 할 수 없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바로 여기에서,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유령이란 한계를 통해 소설의 결말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동종 업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올릴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이 말을 하여 그 일을 떠맡게 된다.


 요점인즉슨 이름만으로 책을 파는 시대는 지났다는 겁니다. 우린 혹독한 시련을 통해 그 진리를 터득했죠. 책을 팔고 영화와 노래를 파는 건 이 심장입니다.(영화에서는 '가슴'이라 번역되었다.)(p. 35)


 그런데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집필 기간이 겨우 한 달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담 랭은 현재 미국에 있는데 그 집에서 집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맥아라가 써 놓은 초고가 마치 일급 기밀이라도 되는 듯 외부로의 유출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아담 랭의 집에 가보니 과연 검색이 엄격하고 맥아라의 원고 역시 금고에 보관되고 있었다. 주인공은 당연히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엄중히 관리하지? 고작 원고 아닌가?' 그런데 집필을 이제 막 시작한 시점에서 아담 랭이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범으로 고발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취임 시절 영장 없이 영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파키스탄인 네 사람을 미국이 불법 납치하도록 도왔다는 혐의였다. 퇴임 이후 가장 큰 위기를 맞은 아담 랭. 그마나 자신이 협조한 미국의 지지로 간신히 일상을 버텨 간다. 한편 원래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아담 랭을 정치 세계로 이끈 장본인이라고 하는 그의 아내 루스는 아담 랭이 비서 아맬리아와 바람을 피고 있다고 의심해 그에게 냉담하게 군다. 이런 비상 시국에 그것도 영 찜찜하기 그지 없는 대기 속에 홀로 놓이게 된 주인공은 심기가 영 편치 않다. 영화에서는 그런 그의 마음을 그가 일하는 방의 커다란 창문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흐린 날씨를 담아내는 것으로 표현한다.



 작업에 집중할 수 없던 그는 산책을 나가는데 그러다 우연히 맥아라의 시체가 발견된 해변에서 전날 밤 수상한 불빛들이 목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설마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맥아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맥아라의 죽음에 의문을 품게 된 주인공은 아담 랭과 회고록 집필을 하는 한편, 맥아라의 원고와 자료를 더욱 집중해 살피게 되고 그러다 맥아라가 비밀리에 남겨 놓은 단서들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맥아라의 자동차에 있는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그가 죽기 직전에 찾아간 장소에서 뜻밗의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바로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폴 에미트. 그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담 랭의 케임브릿지 대학의 연극 동아리 시절 아담 랭과 함께 연극을 했던 사람이었다. 맥아라는 바로 이 사람을 만난 뒤 돌아가다 죽은 것이었다. 과연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그 때부터 주인공은 아담 랭이 영국의 이익에 반하는 미국의 정책에도 반대하지 않고 한결같이 공조해 온 흑막에 연루되어 맥아라처럼 목숨마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과연 그는 무사히 아담 랭의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하지만 소설은 우리의 예상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파국은 갑자기 찾아오고, 진실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충격과 함께 밝혀지게 된다.



 소설의 원제는 'THE GHOST'다. 소설에서 유령 작가가 책을 쓰는 진짜 작가이듯, 여기서의 유령 역시 육체를 움직이는 실세 아니 실체를 뜻한다. 주인공이 아담 랭과의 첫 대면에서 자신을 '고스트'라고 소개 한 것은 실은 해리스가 심어 놓은 아주 강한 단서였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아담 랭은 정말로 '고스트'가 없는 존재로 밝혀지니까 말이다. 이 아담 랭은 앞서도 말했듯, 토니 블레어를 모델로 했다.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 출신 수상으로 처음엔 앤서니 기든스가 주장한 '제3의 길'을 주된 노선으로 걷겠다 천명하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갈수록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의 가장 강고한 협력 국가가 되어주는 등 자신이 말한 것과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부시의 푸들로 전락한 토니 블레어의 모습을 보면서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도대체 쟤 영혼(ghost)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우리가 길라임(이라 쓰고 박근혜라 읽는다.)이 '통일은 대박'이라는 둥, '혼이 비정상', '우주의 기운' 운운할 때마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로버트 해리스의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의문을 스스로 소설로 재밌게 풀어 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우리가 길라임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나 정책에 대해 최순실을 넣으면 다 납득이 되는 것처럼, 로버트 해리스도 이해 안 되는 토니 블레어의 행태에도 그런게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그렇게 나왔으리라. 소설의 마지막에서 충격적으로 밝혀지는 '비선 실세'는. 그 비선 실세의 존재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라 섣불리 믿기지는 않는다 해도.


 스릴러 소설가로서의 만만치 않은 저력을 문장이나 플롯 곳곳에서 느껴볼 수 있는 '유령 작가'는 오늘의 한국 현실을 대입해 읽어보면 더욱 재밌는 작품이다. 영화는 비극적 결말로, 소설은 다소 열린 결말로 끝나지만 현실은 부디 승리로 끝나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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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정유라 특혜 감사 결과 보도를 보면서 말이 안 나왔고 도대체 이대의 어떤 교수가 저렇게 파렴치 하고 치욕스런 일을 했을까 궁금했었는데,

그 중에 이인화도 있었군.

참 나, 그의 책을 읽었다는 게 다 부끄러울 지경이다.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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