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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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군대에 있을 땐, 열외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도 또 없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고 나선, 열외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불안한 일도 또 없다. 사회에서 열외란, 의자뺏기 게임에서 패배자가 된다는 뜻이다. 의자에 앉아야 안정된 삶을 가질 수 있는데, 내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열외 되는 것에 대한 공포도 같이 점점 더 자라난다. 다시 내 자리를 되찾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도, 뉴스도 연일 열외가 되어버린 자들의 불행한 처지를 열거하면서 경고를 쏟아낸다. 경고를 들을 것도 없이 눈으로 직접 보기도 한다. 열외자의 출현은 언론이나 소문으로만 접할 수 있는 나와 먼 생경한 현실이 아니라, 바로 내 지근거리에서 일어나는 이미 익숙한 현실인 것이다. 그런 삶의 목도는 마음 속 공포를 더 부풀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열외자가 생겨나는 속도도 거듭 빨라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휙휙 사라지는 사람들이 남겨 놓은 빈자리가 늘어난다. 어쩌면 저 빈자리가 내일은 내 자리가 되지 않을까 하여 나는 더욱 단단히 매달리기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죽인다. 조직이, 상사가 그리고 고객이 원하는 인간으로 철저히 변할 수 있게 노력한다. 사회에서 우리가 자존심을 굽힐대로 굽히고 더러는 굴욕마저 무릅쓰며 갖은 고생을 감수하는 것은 내가 속한 곳에서 열외가 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열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주원규의 '열외인종 잔혹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네 명의 열외된 인간들이 어쩌다 양머리를 한 수 십명의 테러리스트들이 획책한 열외가 되지 않은 자들의 성채라 할 수 있는 코엑스몰 점거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하루를 그리고 있다. 그 네명은, 이제 곧 어버이 연합에 스카우트 될 것만 같은 노인 장영달, '이태백'이 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비정규직인 이십대의 윤마리아, 회사에 개처럼 충성했지만 돌아온 것은 코 푼 휴지처럼 버려지는 것이 전부였던 중년의 노숙자 김중혁(이름 때문에 자꾸 동명의 소설가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마지막으로 게임 말고는 현실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없는 십대의 불량 청소년 기무로, 사실 현재 자신의 의자를 간신히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겐 가장 피하고 싶은 인생의 모습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네 명을 혼비백산 시켰던 양머리 테러리스트들도 결코 그들과 다르지 않았으니, 실은 양머리 테러리스트들 역시 열외자였고 그들이 일으킨 테러 또한 자신들과 같은 열외자들을 대량 생산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의 자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 재난 영화가 유난히 유행할 때 그 이유에 대해 어떤 평론가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재난 영화는 추락과 파산의 불안이 만연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의식적 소망을 담고 있다. 끝도 없이 불안을 가져다 주는 이 사회가 너무 진저리가 나서 어서 끝장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양머리 테러리스트들의 염원도 이와 같다. 그들의 테러는 줄기차게 야기되는 혼란과 불안을 서둘러 끝장내고 싶은 염원의 표현인 것이다. 코엑스몰의 점거 테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2부, '최악의 도시'는 알고 보면 요한계시록과 같은 종말론의 외피를 성글게 두르고 있다. 이 소설은 수박처럼 겉과 속이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소설의 분위기는 꽤나 희극적이지만, 속내는 종말을 희구하고 있고 굉장히 허무주의적이다.(그래서 희극적인 장면 또한 어쩐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로 보인다. 마치 작가가 '현실이 이토록 막장인데, 이런 걸 보고도 웃음이 나와?' 말하며 내 멱살을 잡는 느낌이다.) 양머리들이 그토록 찾았던 메시아가 간신히 나타나자마자 총알 한 방에 어이없이 죽고, 코엑스몰의 그 엄청난 테러 사건도 바로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결말은 오늘 날의 대한민국이 천민자본주의의 막장이며, 결국 우리 모두는 열외자가 되어버릴 운명에 처해있고 자신이 헌신하는 소설조차 그런 현실을 개선할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작가 자신의 말에 힘껏 마침표를 찍는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은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해야 하리라. 이미 열외자가 되어버렸거나 혹은 언제 열외자가 될 지 모를 우리들에게, 그래서 어쩌면 더욱 절박하게 원할, 그 어떤 위안도, 희망도 주지 않는다고. 다만 인도 신화에 나오는 '저그노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열외자로 만들어 짓누르는 이 천박한 시대가 어서 끝장 나기만 바랄 뿐인 것이다. 그의 소설은 무력하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지그문트 바우만에 의하면, 열외 인간의 양산은 현대화의 불가피한 산물이니까. 그는 주저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 쓰레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쓰레기가 된 인간들('잉여의', '여분의' 인간들, 즉 공인받거나 머물도록 허락받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인간 집단)의 생산은 현대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이며 현대성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것이다. 또 질서 구축(각각의 질서는 현존 주민들 중의 일부를 '어울리지 않는다', '적합하지 않다' 또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쫓는다.)과 경제적 진보(이것은 이전에는 효과적인 생계 유지 방식이었던 것을 격하하고 평가절하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로 인해 과거의 생계 유지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생활수단을 박탈하지 않을 수 없다.)가 초래하는 피할 수 없는 부작용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p.22)


 열외자의 생산은 배제를 통해 질서를 유지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서둘러 낡은 것으로 만들어 계속 새 것을  소비시키는 것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는 현대성(모더니티)에 허파처럼 내재된 것이다. 현대는 바로 그런 열외자의 양산을 통해 지속되니까 말이다. 열외자의 생산을 그치게 하려면 현대성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를 떠받치고 있다는 아틀라스 신쯤 되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한낱 개인에게는 너무나 벅찬 짐이다. 이쯤 되면 주원규 작가의 고백은 차라리 정직하다고 해야 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제발 용건만 간단히"는 자신의 소설에 대한 비아냥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가지는 가치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본다. 예전의 나도 그랬듯이, 우리들은 열외자의 문제를 흔히 아주 개인적인 사안으로 치부하기 쉽다. 최근에 나온 영화 '부산행'에서 열차에 몰래 숨어든 노숙자를 보고 김의성이 분한 배우가 아이에게 "너도 열심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것이 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시대 자체의 문제로 보게 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한 마디로 '파국의 지도'다. 막장이 되어버린 시대의 적나라한 모습과 그 아래 가리워져버린 열외자들의 목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주어 독자로 하여금 전체를 조망하도록 만드는 지도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문제라 여겼을 때, 내 시선은 언제나 내게로만 향했다. 그것도 늘 단점과 부족함만 찾아내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더 주눅이 들었고 더 불안했다. 하지만 지도의 조망은 내게만 향했던 시선을 타인으로 향하게 만든다. 나와 똑같이 힘들고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 이들을 보고 헤아리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열외자가 되었다는 절망,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날 계발시킬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진실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이 시작이 되어 배우고 성찰하여 결국 자신의 목적지를 지도 위에 스스로 설정할 수도 있다. 너무 낙관적인 것일까? 그래도 나는 믿고 싶어진다. 이 '파국의 지도'를 본 이들이 추락과 절망을 강요하는 시대를 바꾸기 위해 점점 더 많이 노력할 것이라고.


 알고 보면 희망은 믿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변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동력도 이 믿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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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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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고은의 '무중력 증후군'의 주요 인물들은 바틀비의 후예들이다. 바틀비는 '모비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동명 단편에 나오는 인물로, 현대 조직 사회에서 개인에게 부여된 모든 정체성과 역할을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말로 모조리 거부하는 사람이다. 막스 베버는 현대 조직 사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관료제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만큼 현대 조직 사회는 맨 위부터 가장 아래까지 맡은 역할이 세세하게 다 정해져 있으며, 그 모든 것이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유기적으로 돌아가도록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주인공  노시보가 일하고 있는 부동산 투기 조장 목적의 텔레마케터 회사가 바로 이런 관료제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그런 조직 내부에서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한 개인은 조직이 부여한 꽉 조인 정체성의 그물망에서 벗어난다는 게 참으로 어렵다. 노시보도 날마다 회사로 출근하면서 자신을 회사라는 두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미꾸라지로 여기고 있지만 쉽사리 그만두지는 못한다. 회사에서 해방되고픈 마음은 누구보다 강렬하지만, 그저 항상 사직서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으로 소심하게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바틀비는 다르다.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긴다. 관료제가 자신에게 부여한 정체성과 거기에 따르는 역할 모두를 실제로 단호하게 거부하고,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형성하고는 그것을 온전하게 지켜나가는 것이다. 허먼 멜빌은 산업 자본주의 여명기의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이 산업 자본주의라는 것이 철저한 분업화를 통해 한 개인을 도구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익명적인 존재로 만들 것이라 내다보고는, 그것에 대한 저항으로 바틀비란 인물을 구상한 것이었다. 바틀비의 거부는 도구화, 익명화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오직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정체성을 수호하는 분투였다. 그는 그렇게 시대의 중력을 거부했다. 정말로 무중력 증후군이 있다고 한다면, 바틀비는 그 증후군의 1호 환자였다.


 하지만 중력에 꽉 붙들려 있었던 노시보에게도 바틀비가 될 기회가 결국 찾아오고야 만다. 갑자기 달이 두 개로 늘어난 것이다. 영원히 하나일 것만 같았던 달이 두 개로 늘어나자, 세상이 이대로 영원히 한결같을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의 생각에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사직서를 내는 사람들이 생기고, 노시보의 엄마와 같이 항상 동일했던 일상의 궤도를 주저없이 이탈하는 사람들이 출현하는가 하면, 노시보의 형처럼 이런 기회를 통해 남몰래 꿈꾸던 삶을 제대로 누려보려는 이들도 나타난다. 물론 자살을 통해 절대적인 무중력 상태가 되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변화가 하필이면 달의 출현을 통해 도래하는 것은, 달이야말로 중력이 소속의 은유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달과 지구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맴돈다. 지구의 중력에 붙잡힌 탓이다. 달은 달아나고 싶어도 지구의 중력 때문에 달아날 수 없다. 오로지 지구의 중력이 허락한 궤도만 돌고 또 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달이 지구에 속해 있다고 여긴다. 그런 달이 두 개로 늘어났다. 달의 횡적인 분열은 그만큼 종적인 중력의 강도가 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강한 중력에 붙들려 있던 사람들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달은 두 개로 그치지 않고 세 개, 네 개 분열을 거듭한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생각은 일상과 멀어지고 예전엔 황당하게 보이던 것들마저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는다. 일상이 환상이 되고, 공상이 현실이 된다. '무중력 증후군'을 읽다보면, 그냥 소설 같기도 하고 판타지 소설 같기도 하다. 소설과 판타지가 뒤엉킨 모습이다. 이것이 누군가에겐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무중력은 소속을 상실시키는 힘이다. 거기엔 아무런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중력을 표방하는 소설이 분명한 경계를 가진다는 것은 모순이라 할 수밖에 없다. 무중력의 자유를 지향하는 이상 소설이 이렇게 마구 뒤엉키고 여러 가지가 혼합된 모양새가 되는 것은 필연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무중력을 추구한다. 표준 시간을 알려서 사람들의 시계를 일제히 거기에 맞추도록 만드는 시보(時報)만큼이나 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받는 우리들은 늘 시보(試補)로 잔존하는 현실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을 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무중력을 희구하게 된다. 하지만 소설이 표면상 추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작가는 무중력과 중력 중 어느 한 쪽에 선뜻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어느 하나를 딱 정해 정답처럼 제시하기 보다는 얼른 서로 대척(對蹠)으로 보이는 둘 모두가 실은 우리 삶에 다 필요한 부분이라며 역설한다.


 이는 시보라는 주인공 이름 자체에 이미 투영되어 있다. 사실 시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뜻이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아직 정식으로 무엇이 되지 못한 존재라는 뜻으로 그래서 사회의 규정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기도 하는 시보(試補)이고, 다른 하나는 표준 시간을 알리는 뜻으로 그래서 사회의 인정에 대한 강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는 시보(時報)이다. 지금까지 한 논의에 따르자면, 앞의 시보(試補)는 무중력을 그리고 뒤의 시보(時報)는 중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둘은 대척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존재에 중첩되어 있다. 작가는 일부러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둘 중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는 둘 모두 삶에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름만이 아니다. 작가는 신체와 의식 또한 대척 관계로 만들어 이를 더욱 강화시킨다. 제목인 '무중력 증후군'은 사실 병이다. 무중력을 취하면 취할수록 마음은 자유를 얻지만 그만큼 몸은 고장을 일으킨다. 마치 신체가 마음이 원하는 무중력을 거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이것을 소설에 누벼댄다. 그래서 무중력으로 기우는 우리의 마음을 그러지 못하게 붙잡는다. 이런 반대의 움직임, 역행이 소설 한 쪽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 반영된 작가의 마음은 소설 구성 자체에도 투여되고 있다. 만일 기승전결이 날렵한 직선처럼 잘 엮인 소설을 닫힌 부채라고 한다면 '무중력 증후군'은 펼친 부채에 가깝다. 독자를 정해진 이야기의 궤도로 따라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브뤼겔의 그림처럼 담고자 하는 이야기를 좍 펼쳐서 여러 모습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중력과 무중력이 가진 장점과 한계의 모습들을 말이다. 소설은 결과를 독자에게 제시하기 보다는 과정에 독자를 초대하려 한다. 그렇게 보다 많은 시야의 경험을 주려 한다. 결국 이름도, 신체와 의식 사이의 반목도 알고 보면 모두 이에 복무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애초에 문학의 역할은 경험의 나눔에 있었다. 여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연장자를 존중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많은 경험 때문이었다. 경험이 하나의 정보가 되어 듣는 이로 하여금 경험을 전수해 준 자는 했었던 시행착오를 피하도록 도왔던 것이다. 연장자의 입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한계가 있었기에 결국 문학이 그 짐을 나누어 받았다. 나는 문학을 잘 모르지만, '무중력 증후군'이 바로 이러한 문학의 본래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비록 간접적이며 파편적이고 거기다 문학적인 상상력이 빚어낸 것이긴 해도, 이 소설은 무중력과 중력에 관계된 다양한 양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고 말이다. 경험을 전수하는 것의 목적은 해답의 제시가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성찰하는 데 있었다. 제시된 경험은 참조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기반으로 현명한 대안을 창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청자의 몫이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내 삶을 무중력과 중력 어느 한 쪽에 둘 것인가 아니면 그 모두를 적절히 조합하여 융통성있게 이쪽 저쪽을 모두 섭렵하며 살 것인가는 바로 독자의 몫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시보는 자신의 가슴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 속에서 달을 찾아낸다. 서로 대척 관계에 있었던 중력과 무중력은 그렇게 통합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보가 수많은 경험을 관통해 비로소 이룬 결과였다. 그렇게 독자도 자신의 달을 이 소설과 동행하는 동안 찾게 될 것이다.

 과연, 당신의 달은 어디에서 어떻게 뜨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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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언론의 현재 스코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기사만 올라오면 득달같이 따라붙는 비난 댓글과 '꽃보다 청와대' 등 문 대통령과 그 참모에 대한 '맹목적'이라고 의심될만한 무수한 찬사의 멘션에 직면해야 하는 언론인들, 불편하고 부당하십니까? 맥없이 노무현을 떠나보내야 했던 상당수 민초들의 상처도 헤아려주셔야지요. 정석대로 본령대로 비판하는 일부 합리적인 기사마저 모두 쓰레기일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언론을 개털 취급하는 집단적 민의에는 곱씹어볼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시민들의 이 '비이성'은 지난 9년 민주주의 암흑기를 역사의 박물관에 가두지 않으면 또 망령처럼 엄습할 수 있다는 절박감의 표시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동전의 앞면이 그러하고요. 뒷면에는 언론보도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있습니다. 언론이 나쁜 권력에 대해 제대로 된 견제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실망감이 요체입니다. '언론의 자유가 과연 우리의 자유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하는, 지난 9년 아니 노무현 정부까지 합한 십수년 동안 언론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시민들은 여태 듣지 못했습니다. 

사전투표함 지키는 시민들 그러니까 지난 대선 개표부정을 강하게 의심하는 시민들을 이해 못하는 점도 그 맥락에 있습니다. 일말의 선거 사기라도 막아 보고자 수일밤을 풍찬노숙한 시민들, 그들을 '더플랜' 김어준의 음모론에 속아넘어간 우매한 자들로 규정할 수는 있어도 금번 선관위에 대한 신물나는 감시자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선관위의 그간의 선거사무가 시민들의 집단적 감시 '테러'를 당해도 쌀 만큼 한심했던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고압적 태세, 허술한 사무를 감안하면 앞으로도 우범자 취급을 받아 마땅합니다. 

앞으로도 그들을 '우중'이라 생각할 것입니까? 그런데 계몽하려 하지 마십시오. 조국 민정수석에게 "앞으로 검찰 수사지휘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 등신이 기자의 이름으로 최고 권부를 출입하는 이상, 그리고 이에 대한 내부 자성이 없는 이상, 언론은 당분간 냉소의 대상으로 묶이는 것은 온당해 보입니다. 그냥 시민들과 함께 가되,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똑똑한 벗으로서 자기 몫을 자각하십시오. 이젠 과거와 같이 여론주도층으로 대접 못 받습니다. 한 짓이 있으니 아니 한 일이 없으니.

'대통령되기 전' 문재인이 마이너일 때나 대세론의 주인공이 될 때나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는 태도는 불과 며칠전 당신들의 컨센서스였습니다. 왜 그런지 저는 알지요. 문재인을 비판하는 게 가장 쉽고 안전하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문바라기로 탈변하고 있는데 참 가증스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가장 속물인 언론인들, 언제 사람이 될 겁니까. 하긴 기자와 정자가 사람이 될 확률이 3억분의 1로 같다고 하더만요.


https://www.facebook.com/funronga/posts/1450039118386164?pnref=story



제 생각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만 같은 글이라 퍼오지 않을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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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인문학 - 새벽에 홀로 깨어 나를 만나는
김승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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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명상에 관심이 있었다. 이를테면 선종의 좌선 같은 것. 달마 대사가 했다고 하는 면벽수련. 하염없이 벽만 바라보고 앉아서 내면의 세계에 칩거하는 것을 은근히 동경했다. 세계를 지우고 궁극엔 나를 지우는 그런 일들을. 그만큼 내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는 그랬다. 죽음과 참 가까이 있었던 시절. 이젠 다 지나간 한 때의 이야기다. 언제 그랬나 싶게 한없이 일상인이 되어버린 나. 다름 사람들과 똑같이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일상 속에서 몸과 마음 모두가 거기에 찌든 피로로 버겁다 보니 바라는 것은 그저 수면이나 휴식일 뿐, 명상만큼 고차원적인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렇게 오래도록 명상이란 걸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걸 할 만한 시간이 없기도 했고. 그래서 문득 이 책을 보았을 때 시선이 한동안 머물렀던 것 같다. 마치 어른이 되고나서 우연히 어릴 때 가장 많이 갖고 놀았던 장난감을 발견하게 된 것 마냥. '아, 그래. 예전엔 이런 것도 했었지.'하는 느낌이랄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난날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까지 담아 새삼스럽게 되돌아 보게 되는 것. 김승호의 '명상 인문학'을 손에 들게 된 건 이처럼 그리움이란 원심력의 추동이었다.




 저자는 모르는 사람인데 주역 쪽으로 유명한 사람이란다. 주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명상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하여 더욱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이 취하고 있는 근본 전제에 개인적으로 허들이 존재했다. 바로 영육 이원론이다. 이 책은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별개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거대 전제 삼아 명상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방법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영혼의 존재도, 육체와 별개로 존재하는 영혼도 잘 수긍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이렇게 만들지 않으려면 저자가 왜 영혼이 존재하고 그것도 육체와 별개의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된 근거를 들어가며 상세하게 설명해야 하는데 이조차 너무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기에 읽다보면  '이 무슨 공상 속 객담이냐!' 하는 반응을 부를 수 있다.


 특별히 이런 부분.


 햔편, 밖으로 나온 태아의 내면에서는 또 다른 대단한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태아의 영혼이 뇌를 향한 대장정이 시작하는 것이다.(-> 비문 같다.  '그것은 태아의 영혼이 뇌를 향해 대장정을 시작하는 것이다.'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는 태어난 이후 자기 몸을 이루고 지배하기 위함이다. 또 한 몸 밖에서 오는 여러가지 신호를 감지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아이의 영혼은 점점 뇌로 올라간다. 호흡이 들뜨고 얕아지기 시작한다. (p. 77)


 영혼이 몸을 장악하기 위해 뇌로 올라가다니. 여기서 SF 호러 영화를 떠올리는 게 비단 나만은 아닐 것 같다. 저자는 '황제내경'을 근거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황제내경'이란 한나라 때 나온 지금으로 치면 의학책 같은 것으로 한의학의 원형이 되는 책이다. 그 '황제내경' 제2장에 나온 '혼령은 위(머리)에 잡고'에 따라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혼령은 어디서 나타나는 것인지(인간은 출생할 때 몸과 함께 혼령도 출산하는 것일까? 그것이 나중에 합쳐진 것이 태아란 말일까? 그렇다면 그 혼령은 어디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산모의 복중에서? 아니면 저 위 하늘 어딘가에서? 그것도 아니면 이것은 정말 상상하는 것조차 싫을 정도의 호러 같은 일이지만 속세를 유영하는 어떤 혼령이 출산되기를 기다렸다가 휙 끼어드는 것일까?) 또 바로 뒤에서 말하겠지만 저자는 영혼의 존재를 인간의 의식과 관련지어 긍정하는데, 여기에 따르자면 인간은 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영혼이 장악하기 전의 두뇌는 과연 무엇일까? 영혼이 의식의 전부라면 인간은 왜 두뇌라는, 인간 생활 에너지의 80% 가까이 쓰는 불필요한 낭비 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바로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이 '나의 몸, 나의 의식'이라는 자기 의식 일 수도 있다. 혼령이 뇌를 지배해야 비로서 나라는 주체가 태어난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혼령이 지배하기 전에 감각 기관에서 오는 정보를 통합하고 해석하는 두뇌는 '나'라는 걸 모르는 것일까? '나'가 아니면 어떻게 쏟아져 들어오는 감각 기관들의 정보를 취합 분류하고 적절한 조치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 자기 의식이 없다고 하는 동물들처럼. 혼령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하면 태아의 행위는 아무리 봐도 인간 보다는 동물에 가까우니 이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뭐, 이런 반론들이 무한정 솓구치는데 여하튼 저자는 영혼의 존재를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긍정하고 있다.


 영혼이란 무엇보다도 행위에 대한 주체로서 존재의 당위성이 인정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영혼이 없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역시 그것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태어난 것뿐, 자유 선택이 아니므로 영혼'이'(책엔 '의'로 되어있는데 오타 같다.) 없다는 주장은 그의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영혼이 없다면 인간은 생체로봇일 뿐, 모든 판단은 자동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판단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 주장에 따르면 '그'는 애당초 없었기 때문이다.(p. 37)


 나름 논리가 잘 서 있긴 하나 그렇다고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영혼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읽다보면 영혼의 범위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것이 보인다. 어떤 때 영혼은 의식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써 놓았다가 또 어떤 때는 영혼이 의식 전반을 포함하는 것으로 써 놓기도 한다.) 생각하고 질문한다는 것이 꼭 영혼만의 기능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반문이 가능해 보인다. 현재 뇌과학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의식은 오로지 두뇌 영역의 것으로, 영혼 없이도 얼마든지 성립과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조금은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영육 이원론을 굳게 밀고 나가는 것은 주역 사상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주역에서는 이 세상을 음양의 관계로 보고 있는데 이 음양이 그 말에서 우리가 얼른 떠올리게 되는 그늘과 빛 같은 것은 아니다. 저자에 따르는 음은 물질이고 양은 물질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공간을 채우고 부피가 있는 것이 '음'이며 그런 것이 없는 게 '양'이다.


 영혼도 양이고 귀신도 양이다. 온갖 괴상한 것은 다 양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세상엔 음과 양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물질과 괴상한 것만 존재한다.(p. 89)


 세상의 본질을 이런 대립적인 것들의 평형 상태로 보는 것이 바로 주역이 가진 세상에 대한 근본 시선이기도 하다. 저자의 영혼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런 주역에 근거한 것이며 지금 우리 자신은 음이 되는 육체와 양이 되는 영혼이 평형을 이룬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적어도 내가 보기엔 무리가 많이 가는 설명으로 내내 영혼에 대해 말해왔던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생각하는 명상의 의미도 밝혀지는 것 같다. 지속적으로 영혼을 상기하는 명상을 통해 평형 상태를 잘 유지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특히나 2부를 읽다보면 잘 느껴지는데 그 2부는 명상을 하는 방법에 대해 장소라든가 시간이라든가 자세라든가 하는 식으로 참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내면의 침잠을 방해하는 잡념과 지극히 수동적이 되면 될수록 일어나게 마련인 육체의 반란, 즉 활동하고자 하는 본능을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에 관계되어 있다. 그래서 명상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음'인 육체에서 솟구치는 본능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마치 접시 돌리기와도 같이, 접시가 계속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명상인 것이다. 본능이 힘을 얻으면 동물적인 욕구가 생기고 번뇌가 뒤따른다. 끝내 평형이 깨어지고 비틀거리다 바닥으로 떨어져 처참하게 부서진다. 그런 것을 막기 위해, 나를 나로서 잘 지속하기 위해 저자는 명상을 가져온다. 이는 명상의 목표를 주역의 원리로 설명하는 제 4부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바로 여기서 주역의 원리에 기대어 명상의 목표로 내세우는 것이 '부동심'인 것이다.


 부동심은 주역의 괘상으로는 천산돈에 해당되는데, 이는 산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이때 산이 하늘을 따라 요동하는가? 산은 그저 산일 뿐, 하늘의 일에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늘이란 세상 또는 세상만사인데 그에 대해 산처럼 부동의 자세로 견지하라는 가르침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p. 253)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것. 좌고우면 하지 않는 것. 일희일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부동심'이다.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균형 상태. 명상은 바로 이런 것을 가져오려는 시간이다. 내면의 침잠을 통한 지속적인 영혼의 환기로써.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영혼의 존재도, 영육 이원론도 결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이 부분은 나름 긍정할만한 게 있다고 생각하여 어쩌면 당신을 아주 지루하게 했을 지도 모를 이 리뷰를 썼다. 통신의 발달로 어디로든 쉽게 연결될 수 있기에 그만큼 더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폭풍우 치는 바다 위 일엽편주처럼 이런 저런 말들에 쉽게 흔들리고 상처 받는 게 요즘의 시대이기에 더욱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서 말이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여기저기서 조작과 선동의 언어가 난무하는 때엔 더더군다나. 


 갑자기 삶을 이야기 하다 불쑥 정치 이야기를 해서 문맥이 좀 난감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새 대통령이, 그것도 비로소 대통령이라고 인정할만한 대통령이 막 통치를 시작한 시점에 지지자들이 이런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 바람이 지나치게 앞서는 바람에 그만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이왕 엇나간 김에 내처 계속해 보자면, 나는 말 보다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을 본다. 거기 매 순간마다 드러난 됨됨이를. 내 신뢰의 근거는 바로 그것이다. 높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빌딩이나 들판이나 다 평지일 뿐이고, 깊은 해구로 들어가면 순수한 농도의 어둠 밖에 없듯이 보다 높이 그리고 깊이 헤아리면 치장과 현혹의 언어들은 다 걸러지고 본질만 남는 법이다. 그 본질에 무엇이 있는가? 바로 그것이 믿음의 절대 근거가 된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는 부동심이 된다.


 명상도 아마 그런 노력일 것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 깊이 내려가 헤아리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은 궁극의 자유이기도 하다. 세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넘나들기 때문이다. 지금 내 글처럼. 삶에서 정치로, 정치에서 삶으로 막 넘나들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삶이 정치와 다르겠는가? 삶과 정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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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7-05-11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깊이 헤아리면 치장과 현혹의 언어들은 다 걸러지고 본질만 남는 법이다.

이 구절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갑니다.

언젠가 ‘새벽에 읽는 주역인문학‘을 읽으면서,
님이 말씀하신것과 같은 그 부분이 혼란스러워,
제대로 된 리뷰를 올리지 못했었습니다.
걸래내고 남은 본질이 자꾸 바뀌는 느낌이랄까요.
6권짜리 주역원론이라는 책도 구입했는데, 들춰보지도 못했구요~--;

님의 리뷰를 보니, 깨닫게 되는 부분이 있어 감사인사 남깁니다, 꾸벅~(__)
..

오드득 2017-05-13 11:34   좋아요 0 | URL
앗, 양철나무꾼님도 주역을 공부하시는군요. 저도 영혼에 대한 부분에선 꽤 난감해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럽더군요. 주역의 근본이 음양이니 그런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 간신히 납득했습니다만.^^;
그리고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저도 주역에 관심이 생겨 공부하려는 참인데, 좋은 책 있으면 소개 좀 시켜주세요^^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 신영복 유고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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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어떤 이름은 삶의 어느 때와 단단히 결박될 때가 있다. 신영복이라는 이름이 그렇다. 그 이름은 내 20대와 떼어낼 수 없다. 그의 책을 처음 읽었고 더불어 벗하면서 사람과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는 눈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타인의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나로서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혼돈과 불안의 나날들을 그래도 자맥질을 하며 겨우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신영복이라는 구명조끼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랬던 그는 이제 여기에 없다. 그것도 예전 인기를 끌었던 가요의 제목처럼 벌써 1년이다. 1주기를 맞이하여 유고집이 나왔다. 그가 살아 생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글 중 미처 책으로 엮이지 못한 글들이 여기에 실려있다. 얼레에 무수히 감긴 실처럼 그의 책에 절로 내 질긴 그리움이 거듭 칭칭 감기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렇게 단단하게 얽히고 뭉친 그리움으로 육신 없는 혼의 언어를 소중히 받아든다.



 표지에 눈이 오래 머문다. 저자가 직접 쓴 글자들이 모여 있는 품새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지난 겨울 광화문 광장에 있던 내가 떠오른다. 이 글자들의 운집이 그 밤, 나 역시 일원이 되어 내부에서 목을 빼들고 바라봤던 촛불의 행렬과 꽤 닮아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냇물아 흘러 흘러’라는 노랫말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때 바라봤던 촛불의 행진은 문자 그대로 함께 더불어 흘러가는 강물로 보였으니까. 어둠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저마다 작은 빛이라도 되어서 정의가 바로 서고 위계에 상관없이 공정하며 아프고 약한 자의 마음을 먼저 돌볼 줄 아는 데다 사람이 오로지 사람이기에 존중받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밝히겠다는 의지로 묵묵히 흐르고 있는 빛의 강은 그야말로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란 그의 말을 절로 떠올리게 했다. 힘겨운 겨울이었다. 그 겨울, 밤바람을 맞으며 광장에 서 있었던 것은 겨울 한파보다 더 시리고 매서운 현실의 칼바람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모두가 너나없이 밤을 낮처럼 밝히는 하나의 숲이 되었던 덕분에 다행히 희망을 만들고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제 막 하나의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난파 중인 배에 고리를 걸어 그저 침몰을 막은 것에 불과하다. 이제 이 배를 어떻게 수리하고 어느 곳으로 몰고갈지 생각해야 한다. 겨우 결실을 맺기 시작한 희망의 과일이 다시 파과(破果)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책무를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지 말고 자신의 것으로 여겨 대안을 구축하고 실현하는 주체로서 참여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이 더욱 운명처럼 우리 앞에 도래했다고 여겨진다. 읽어 보니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대답들이 글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에 있는 글들이 20대에서 70대까지 거의 전 생애에 걸쳐서 발표한 것들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마다 변치않고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존재한다. 바위처럼 굳건하고 한결같기에 그의 신념 혹은 근본 철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이 말이다. 바로 '관계 중심'이다. 나는 이것이 중심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1998년에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고 하던가. 적어도 내겐 이것이 핵심으로 보인다. 그는 근대까지의 서양 철학이 내내 개별적 존재에게 중점을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덕분에 개별 존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충돌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로 인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마저 억압과 저항이 기저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은 예전의 그 역시 이런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감옥에 갇혔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얼른 상상하기 어려운, 무려 20년이라는 긴 수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늘 함께하고자 했던 민중의 밑바닥 현실로 들어갈 수 있어서 자신의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는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는 자신의 꿈에 있어서 바깥과 감옥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꿈을 감옥에서 구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 씁쓸한 패배감을 맛보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고 냉대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많이 배웠고 이론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가진 것도 없고 기댈 데도 없이 오로지 혼자의 몸으로 삶을 견뎌내야 하는 이들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그의 언어가 그들의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관념에 지나지 않았기에 제아무리 논리 정연하고 화려한 언변으로 포장되어 있어도 신뢰를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경험이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왔다. 시야의 지축이 흔들린 것이다. 그 때까지 그는 자기 앞의 사람을 자신이 이끌고 갈, 그만큼 그 사람에겐 자신만의 생각이나 삶의 경험이 없는 존재로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가진 삶이라는 거대한 맥락은 괄호쳐 버리고 눈 앞에 보이는 모습만 전부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감옥 생활을 통해, 통렬한 절망 뒤에 찾아온 혜안의 시야 속에서 그는 모든 이가 자신만큼 육중하면서도 광대한 삶의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 앞의 존재란 그저 빙산의 일각이며,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체화된 모든 삶의 내막을 다 껴안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도. 


 나의 존재라는 것이 과연 나의 개별적 존재로서 완성되는 것인가.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그 사람들의 걱정과 어떤 배려 속에 내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내가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관계는 존재’라는 말도 생각났어요.(p. 50~51)


 바로 존재론에 빠진 서양의 시각이 그것을 무시한 채로 개인의 껍데기만 보고 있었고 그것의 한계란 그대로 그것만 공부한 그의 한계가 되었다. 그런 서양의 시각은 무엇을 낳았던가? 타인을 단순한 존재로 치부한 것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자신마저 남들에게 그렇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결국 개인은 내재된 가치에 상관없이 오로지 겉모습을 이루는 조건에 따라 쉽게 계량화 되었고 무엇과 교환될 수 있는지에 따라서만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게 되었다.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관계는 이뤄질 수 없다. 진정한 관계는 공존과 조화가 생명인데, 교환가치는 경쟁과 우열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갈수록 인간관계가 황폐화되고 와해되는 것(p. 47)은 그 때문이었다.


 사람의 얼굴이 담겨 있지 않은 우리의 머리와, 사람과의 관계가 사라져 버린 우리들의 삶 속에 사람 대신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아있는지... 참으로 섬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p. 183)


 그는 그런 시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을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만이 가진 고유하고 온전한 가치로 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저마다 가진 삶의 결을 그의 처지에서 깊이 헤아릴 수 있는 '관계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관계론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었고, 지식이 아니라 뼈져린 삶의 경험이 바탕된 것이었기에 한층 더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삶 전체에 있어서 모음(母音)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진정한 배움을 감옥 생활이 가져다 주었기에 그는 감옥 생활을 사람들에게 '대학 시절'로 소개한다.


 내가 이것을 모음(母音)이라고 말한 것은 그냥 하는 표현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그의 모든 신념과 작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책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전체에 걸쳐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가 석방 이후에 동양철학 연구에 더 심혈을 기울인 것이나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붓글씨가 그랬듯이 말이다. 모두 근본엔 '관계 중심'이 있었다. 개별적 사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 보다 그것이 맺는 관계를 통해 발현되는 새로운 성격을 우위에 두고 있기에 동양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붓글씨 또한 그것의 높은 경지는 파격을 통한 균형 잡기에 있고 그것은 관계론적 사고가 없으면 성취되기 어려운 미학인지라 한층 더 수양에 힘을 쓰게 된 것이었다. 


 결과가 아니라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중시하기 위하여 고속 도로보다 완만한 속도 속에 풍경을 음미하여 그 안에 있는 자신을 조망할 수 있는 길을 선호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었다. 결과 중시는 얼마나 잘 그리고 빨리 이루느냐가 중요하기에 성장과 속도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도로의 문화다. 하지만 그것엔 모든 것을 수단으로 전락시킬 위험마저 내포되어 있다. 바로 그 위험이 지금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다. 아주 최근의 일이다. 삼성 중공업의 거제 조선소에서 크레인이 전복하여 7명이나 되는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것도 노동자들이 쉬어야 할 '노동절'에 말이다. 성정과 속도에만 치중한 나머지 당연히 해야 할 안전상의 조치들을 이행하지 않은 결과였다. 희생당한 그들이 기업으로써는 손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하청 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기에 더욱 소홀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수단이 되면 어떤 비극이 찾아오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역시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허다하게 일어났던 사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더욱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언제까지 이렇게 어이없이 삶을 희생당하는 이들이 생겨나야 할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중시했다면, 그 어떤 이도 수단이 아니라 고유한 목적으로 대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성장과 속도의 혜택마저 모두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오로지 소수의 주머니만 채운다는 사실을 신자유주의 10년을 거쳐 맨 가슴으로 쏟아진 냉수처럼 선명하게 경험한 지금, '자본 논리에 맞서 인간 논리를 지키는 길이 '도로의 문화' 대신 '길의 문화', '길의 정서'를 키워야'(p. 70) 한다는 그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니리라.


 이는 그대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해당된다. 그렇지 않아도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로 인해 역사를 올바로 세우지 못하면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얼마나 쉽게 그리고 처참하게 왜곡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된 요즘이 아니던가? 이처럼 역사가 쉽게 오염되는 근본에는 역사가 그저 과거의 사실로 국한되어 그만큼 쉽게 규정 가능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존재론적으로 개인을 바라보는 시야가 그대로 역사에도 투영되고 있기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이다. 이런 무분별한 변질을 막기 위해서라도 역사 역시 관계론적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드러난 하나의 사실로 판단하기 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흐름이 표출한 것으로 보고 거기까지 진행되었던 당대의 다양한 움직임과 깊은 내막을 당대의 처지와 한계를 고려하면서 두루 헤아려 보려는 노력이 말이다.


역사의 보편적 발전 구도는 오랜 불균형 상태와 일시적인 균형 상태의 교직이다. 이것이 사회 변화를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과정으로 파악하는 근거이다. 따라서 발전과 진보의 개념은 과정의 총체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더구나 선취된 이상적 모델로부터 실천을 받아 오는 과정도 아니다.(p. 243)


 이는 특히 진보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꽤 둔중한 경고가 될 것 같다. 출근길의 지하철처럼 종착지만 생각하면 도중의 역들은 그저 시간을 지체시키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미래의 모습만 고집하는 이들에게 현재란 바로 그와 같을 것이다. 자신이 정한 미래의 규격에만 맞추다 보면 현재란 늘 모자라고 부족하게 보이기 마련. 그래서 현재가 가진 장점과 긍정적인 가능성 또한 쉽게 무시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자주 범한다. 흔히들 보수는 쉽게 뭉치고 진보는 쉽게 분열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최근 대선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진보가 자주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신영복 선생의 말대로 자신이 선취하려는 이상적 모델을 현실과 상대에게 강요하고 있는 탓은 아닐까? 그러기 보다는 영국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말했던 대로 현재가 지금까지의 과정이 총체로 나타난 최선의 결과라 생각하고(이것은 현실의 한계를 온전히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혁 주체의 역량이 부족해서라거나, 대중이 덜 계몽된 탓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좀 더 나은 쪽으로 진전시킬 것인가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다면 대화와 협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이 책엔 오늘날 당면하고 문제들과 관련하여 새겨 듣고 사색할만 말들이 참 많다. 더구나 이 말들은 한 순간 표출된 것들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줄기차게 그의 내면에서 영글어 왔으며 선생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까지 했기에 더욱 설득력을 얻고 신뢰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삶 자체를 통해 온전하게 구현된 '관계 중심'은 결국 나와 그의 삶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자각과 그래서 함께 이 구차한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정언 명령으로 향해 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란 그 일생에 담겨 있는 시대의 양'이라는 말이나 '자기의 삶 속에 파편처럼 박혀 있는 분단의 상처'나 '개인의 팔자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민족의 팔자'(p. 192)라는 말에서 그것은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한 개인을 단면이 아닌 폭과 깊이를 지닌 입체로서의 인식하는 일은 이렇게 별개의 개인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삶의 어렵고 힘든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공동 운명체로서의 인식으로 이어지고 시대의 부조리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전선도, 부당하게 고통 받고 있는 병실의 구분도 없게 만든다.


 좋은 음식을 받을 때 당신의 ‘밥’이 생각납니다. 따뜻한 겨울 난로를 만날 때 당신의 ‘방’이 생각납니다. 만원 버스 속에서 여자들과 몸 부대낄 때 나는 당신의 ‘밤’을 생각합니다. 도시의 거리와 거리에 넘치는 인파, 그 흔한 보행의 자유 속에서 나는 당신의 묶인 ‘발’을 생각합니다. 당신을 전선에 두고 혼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미안합니다. 당신을 병실에 남겨 두고 혼자 퇴원하여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곳만이 전선이 아니며 그곳만이 병실이 아니라던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p. 257)


 나는 그의 이 고백이 그가 지향하는 '관계 중심'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내가 그 어떤 높은 지위와 좋은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로지 나로 인해서가 아니라 여기엔 내가 속하거나 어쩌면 내가 전혀 모를 수도 있는 다양한 삶의 주체와 맥락들이 연결되어 형성된 것이라는 깨달음과 설령 내가 가장 환한 곳에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 기꺼이 가장 어둔 곳에서 외롭고 아픈 이들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 마음. 이것이야 말로 초혼처럼 찾아온 그가 내게 전하고 싶은 밀알의 언어라고 믿는다. 더하여 광화문의 겨울밤을 밝혔던 빛의 강이 다음으로 나아갈 바다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나로 국한하자면, 그는 관계와 과정 중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될 내가 얼레가 되길 바란다고 할 수 있다. 나만 고집하지 않고 계속 타인들과 삶이 가진 다양한 측면들을 나처럼 여기며 감아갈 수 있도록. 그것도 무한정.


 냇물의 생명은 흐르는데 있다. 설사 바다에 다다른다고 해도 냇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일흔이 넘어서까지 과거의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계속 재구성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듯이 말이다. 유고를 먹먹한 그리움과 함께 읽고 난 지금, 나도 그 꿈을 꾸어본다. 감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에 기쁨을 느끼는 얼레의 나를. 결코 멈추지 않고 언제나 유동하며 잘 섞이는 냇물의 나를. '떨리는 지남철'과도 같이.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약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p. 248)


 그렇게 오늘의 내가 아니라 달리 변화될 내일의 나를 더 기대하는 나를. 죽순의 짧은 마디에서 나오는 강고한 힘이 대나무의 곧고 큰 키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p. 204)고 했던가. 이 순간 가지게 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그런 힘을 가진 마디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려 한다. 죽순의 마디가 그 힘을 뿌리에게서 배우듯이 오늘 내가 처한 현실을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치열하게 껴안겠다고 마음 먹어 본다. 외면도 않고 순응도 없이 보다 많이 품고 깊이 헤아리려 하며 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때까지 선생의 말은 내게 내내 '꽃세움 바람'이 되어주리라.


 봄바람은 가지를 흔들어 뿌리를 깨우는 바람입니다. 긴 겨울잠으로부터 뿌리를 깨워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는 바람입니다. 무성한 잎새와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한 바람입니다.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아니라 꽃을 세우기 위한 ‘꽃세움 바람’ 입니다.(p.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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