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트러몰로지스트 1 - 괴물학자와 제자
릭 얀시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제5침공'으로 우리나라에도 이제 제법 이름을 알린 미국 작가 릭 얀시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찾아왔다.

 '몬스트러몰로지스트(Monstrumologist)'가 바로 그 장본인. 얼른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괴물학자'가 되겠다. 제목 그대로 한 괴물학자와 열 두살 나이의 조수가 주인공인 19세기의 미국을 무대로 한 이야기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였던 전작과는 전혀 다른 크리쳐 물이다. '페니 드레드풀'이란 미드가 있는데, 이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취향 저격인 작품이었다. '페니 드레드풀'처럼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으스스한 공포물을 참 좋아하는데, '몬스트러몰로지스트'는 그런 내 취향을 정확하게 만족시켜주었으니까 말이다. 정말 손에 들자마자 끝까지 정신없이 읽었던 것 같다. 무더운 여름밤을 잊기에 제 격이지 싶다.



 소설은 실제 릭 얀시가 등장하여 한 요양원의 원장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릭 얀시는 원장에게서 누군가가 쓴 노트 열세 권을 받게 된다. 그것을 쓴 사람은 '윌리엄 제임스 헨리'라는 사람으로 자신이 1876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누구도 믿지 않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람의 신분을 증명할만한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물론 친척도, 태어난 고향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알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 노트로 조사를 좀 해 달라고 릭 얀시에게 노인이 직접 쓴 공책들을 준 것이었다. 직접 봐도 되었을텐데, 굳이 소설가 릭 얀시를 부른 것은 노인이 12살 때 겪었다고 노트에 기록한 이야기들이 전혀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가라면 일반인보다 좀 더 잘 정보들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의뢰하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 노트에 적힌 이야기가 '몬스트러몰로지스트' 본편이다. 이런 구성은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소설이 나오던 시기에는 흔한 것이었다. 이처럼 그 때의 장르 소설은 주로 누가 남긴 수기 혹은 목격담 같은 것으로 소개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 헨리' 이름 자체에세도 릭 얀시의 농담이 느껴진다. 심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윌리엄 제임스와 작가로 이름이 드높은 헨리 제임스, 그렇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형제의 이름을 하나로 합쳐 놓은 것이니까 말이다.


 본편으로 넘어가면, 윌리엄 제임스 헨리가 12살의 나이로 등장한다. 그는 부모를 모두 다 잃고, 아버지가 살아 생전 충실히 모시던 괴물학자 펠리노어 워스롭의 조수로 지내고 있다. 하루는 도굴꾼 에라스무스 그레이라는 노인이 찾아온다. 자신이 무덤을 도굴하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며 가져온 것이다. 그레이란 노인이 탁자에 놓은 것은 두 구의 시체였다. 하나는 10대의 어린 소녀였고 다른 하나는 성인 남자의 시체였다. 성인 남자는 마치 엄마가 자식을 껴안듯이 어린 소녀를 칭칭 감고 있었는데 하나가 정말 이상했다. 머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녀의 얼굴은 반쪽이 사라져 있었다. 무언가에게 이빨로 물어뜯긴 것이었다. 괴물학자 워스롭은 남자가 소녀를 잡아먹고 있었다고 말한다. 헨리는 의문을 가진다. 머리가 없는데 어떻게 잡아먹는단 말이지? 그 의문은 곧 풀린다. 남자에겐 입이 있었다. 바로 배가 입이었다. 남자가 소녀를 감싸듯 칭칭 감고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배로 소녀를 먹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헨리가 남자로 생각했던 것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보는 괴물이었다. 워스롭은 헨리에게 이름을 알려준다. '안트로포퐈기'라고. 한없이 잔인하고 사람을 잡아 먹는...



 그런데 헨리 못지않게 워스롭 또한 충격에 빠진다. 안트로포퐈기는 미국에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 남쪽 바다에서만 서식한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올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에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언제 처음 여기에 왔는지도 중요했다. 왜냐하면 안트로포퐈기가 자궁이 있는 자리에 뇌가 있어 번식이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두 마리 정도는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 여기로 왔는지 알아야 어느 정도의 숫자가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안트로포퐈기는 무리를 이루며 산다. 본거지를 찾아내 박멸하지 않으면 워스롭과 헨리가 사는 뉴예루살렘은 엄청난 위기에 처할 것이다. 워스롭은 자신과 똑같이 괴물학자였던 아버지의 기록에서 바너 선장이라는 인물을 찾아낸다. 무려 20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사람인데, 알고 보니 그가 바로 안트로포퐈기를 미국에 싣고 온 자였다. 그것도 위스롭의 아버지의 의뢰로.


 그 사실은 워스롭에게 정말 커다란 충격을 준다. 아버지는 왜 이토록 위험한 존재를 일부로 미국으로 가져온 것일까? 그 의문을 제대로 풀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안트로포퐈기가 처음 발견된 공동 묘지 근처 교회의 목사관에서 어린 자녀 네 명을 포함한 일가족이 안트로포퐈기에게 처참하게 살육된 것이다. 이대로 사태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게 된 워스롭은 자신과 똑같은 괴물학자이자 안트로포퐈기 토벌에 일가견이 있는 존 컨스를 부른다. 그러나 그는 안트로포퐈기를 상대하는 능력은 탁월해도 인간성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 자신의 목적만 중요하지 타인의 목숨은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친구 워롭스가 아끼는 헨리의 목숨이라 해도.


 이야기는 그렇게 안트로포퐈기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것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거기서 드러난 진실 앞에서 워롭스는 마침내 의문을 풀게 된다. 그것도 충격 속에서...


 '안트로포퐈기'는 다른 땅에서 흘러든 존재로, 그렇게 이주자들을 비유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인간과 전혀 다른 신체 구조와 인간을 잡아먹는 그들의 문화는 신체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낯설 수밖에 없는 이주자들의 모습을 많이 과장한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서식하는 땅으로 먼저 가 어떤 목적을 갖고 배에 태워 데려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흑인 노예'의 면모도 갖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 이주자들이 예측과 통제를 벗어났을 때 갖게 되는 두려움이 바로 이 소설에 선연하게 드리워진 공포가 아닐까 싶다.



 통제와 예측을 벗어난 이주자들을 상징하는 안트로포퐈기를 대하는 소설의 태도는 인물을 중심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존 컨스처럼 무조건 제거하고 보자는 식이다. 다른 하나는 워스롭처럼 그럴수록 더욱 알려고 애쓰자는 식이다. 물론 릭 얀시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후자다. 그랬기에 소설의 주인공을 괴물에 대해 공포라는 비합리적 감정이 아니라 관찰과 검증이라는 합리적 태도로 다가가는 '괴물학자'로 삼았을 것이다. 아예 소설에서는 워스롭이 헨리에게 존 컨스에게 절대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까지 한다. 여기서 작가가 왜 워스롭과 헨리 모두가 비슷한 처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드러난다. 헨리는 부모를 잃었다. 그는 아주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워스롭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어렸을 때,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애정을 받아본 적 없는 아주 외로운 소년이었던 것이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사에서 늘 혼자 지내야만 했던 워스롭은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만이 가장 커다란 소원이었으나 괴물 연구에 지나치게 빠져버린 그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늘 아픔과 자신이 못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자책에 빠져 있어야 했다. 존 컨스에게조차 워스롭이 괴물학자가 되어 이토록 열성을 다해 일하는 까닭이 실은 아버지의 인정을 그렇게라도 해서 받아보려는 것 아니냐는 빈정거림을 당할 정도로. 헨리는 우연히 발견하게 된 워스롭이 어릴 때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그런 워스롭의 모습을 본다. 헨리는 워스롭이 자신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를 전보다 더욱 잘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 머리 위에 우뚝 서서 성인의 권위를 휘두르며 잔뜩 주눅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 나는 작고 어린 외로운 소년을 보고 있었다.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불쌍한 소년, 아버지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며 편지를 쓰던 어린 소년. 그러나 그 애정에 대한 보답으로 아비가 보내온 것은 거부라는 치욕감뿐이었다. 편지는 뜯어 보지도 않은 채 낡은 트렁크 속으로 던져져 잊혔다. 이 얼마나 이상하고 비극하고 운명의 아이러니인가! 우리는 종종 긴 세월이 흐른 뒤에 아무 잘못도 없는 이들에게 복수를 꾀하곤 한다. 과거에 우리를 괴롭힌 이들과 똑같은 죄악을 반복하면서, 그렇게 나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끝없이 보존하고 영속시키는 것이다. 그의 부친은 그의 간청을 묵살했고, 그래서 그는 나의 간청을 묵살했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가장 기묘한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바로 그였다.(p. 137)


 워스롭도 겉으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소설이 후반으로 나아가며 더욱 많이 드러내게 된다.


  바로 이런 식의 연대가 실은 릭 얀시가 작품을 통해 정말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이주자들의 존재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말이다. 겨우 인간의 모습을 찾았던 이주자들이 어느새 점점 '안트로포퐈기'가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들이 우리와 공존해야 할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들은 더욱 빨리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린 '안트로포퐈기'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안트로포퐈기가 되어버린 그들에게 우리 역시 인간이 아니라 그저 잡아먹어야 할 먹이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먼저 인정해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역시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리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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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첩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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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는 흔히 의자 뺏기 놀이에 비유되고는 한다. 각자가 자신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를 밀어내려고 다투는 것과 같다고. 물론 그 놀이 보다야 현실의  다툼이 훨씬 격렬하긴 하지만 말이다. 비정규직이 만연한 지금에 내일도 모레도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모두가 바라는 꿈이기도 하다. 그런 시대에 갑자기 내가 있을 자리가 없어진다는 현실만큼 공포스러운 것도 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이가 중년 이상이라고 한다면 더 그렇다. 그 나이란 이제 의자를 다시 마련하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니까. 엉덩이가 많이 무거운데, 무겁고 싶고 무거웠으면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한다는, 그 변화의 강요가 부담이요 불안으로 밀려드는 게 마치 꼭 임박한 젠트리피케이션 속 세입자와 다를 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중년이요, 한 번쯤 그들에게 꼭 찾아온다는 우울의 요체가 아닐까 싶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이번에 나온 이언 랜킨의 '검은 수첩'이 바로 거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검은 수첩'은 타탄 느와르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이언 랜캔의 대표작인 존 리버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제목의 '검은 수첩'은 원래 헨리 8세가 엔 마리와의 결혼 때문에 영국 내 카톨릭을 압박하던 시절, 헨리 8세에 동조했던 수도사들이 수도원의 비리를 몰래 적었던 일종의 장부였다. 그것을 통해 비리 척결이란 명분으로 헨리 8세가 수도원을 정당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 이후, 잘못이나 비리 같은 것을 비밀리에 기록한 것을 두고 'BLACK BOOK'이라 불렀다. 이 같은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소설의 제목이 이언 랜킨의 존 리버스 시리즈 제목이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중의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단골집 카페 주차장에서 느닷없이 뒤통수를 가격 당하여 쓰러진 브라이언 홈스가 남긴 '검은 수첩'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소재이긴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그렇게 젠트리피케이션이 넘쳐 나는데 '블랙북'의 원래 역할을 상기해 보면 그 역시 수도원을 젠트리피케이션 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검은 수첩'이 지닌 중의적 의미 그대로 젠트리피케이션 소설 이다.

 다시 말해, 밀려난 자들의 이야기.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야심한 밤을 틈타 악취가 진동하는 시신 두 구를 밴으로 운반하는 두 명의 사내가 있다. 바다에 접한 절벽에 차를 세우고 시체를 바다로 버리는데 순찰차가 멈춰선다. 경관 하나가 손전등을 들고 다가온다. 시체 버리는 것을 목격한 것은 아니다. 다만 농무가 너무 심해 혹시 무슨 문제가 있어 이 곳에 차를 세운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절한 경관에게 찾아온 것은 느닷없는 습격과 죽음. 사람의 목숨이 쉽게 버려지는 그 곳에는 이제 절망만이 가득하다는 듯 마치 희망 혹은 구원의 상징과도 같았던 경관이 들고 있는 손전등의 빛은 그의 죽음과 함께 꺼져 버린다. 그와 동시에 존 리버스 역시 자기 자리에서 끝도 없이 밀려난다. 마약 중독자였던 동생이 갱생하겠다면서 리버스의 공간 속으로 들어오고, 당시 삶의 유일한 낙이었던 안마 시술소에서 우연히 만난 옛 동료와 회포를 나누느라 연인 페이션스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바람에 그녀의 집에서도 쫓겨난다.(이 소설은 영국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는데, 드라마 역시 이 소설의 핵심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듯, 존 리버스가 페이션스 집에서 쫓겨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드라마의 이야기는 리버스가 맡게 되는 사건까지 포함하여 소설과 전혀 다르다. 이야기가 완전히 바뀌면서도 존 리버스가 페이션스에게 내쫓겨 지금은 남에게 세를 내 준, 원래 자기 집에서 사는 설정만은 그대로 살아 남았는데 그래서 더욱 드라마 역시 '검은 수첩'의 핵심을 밀려난 자의 이야기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TV 시리즈 속 리버스 경위의 모습. 켄 스콧이 맡았다.

(혹시 영화 '호빗'에서 기다란 흰 수염을 하고 있던 호빗이 생각나시는지? 그가 바로 켄 스콧이다.)

 1기와 2기의 리버스를 맡은 배우가 다른데, 1기는 예전 영화 미이라 3부작에서 웃음을 주로 맡았던 조 해너가 했었다. 


 경찰서 내 상황도 사생활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를 마뜩찮게 여기는 경찰들이 그를 밀어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안팎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존 리버스는 무엇보다 혼자서 조용히 독서하는 시간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간도 안녕이다. 자신의 집은 동생과 세든 대학생들의 이런저런 소동으로 소란스럽고 그 어디서도 휴식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그가 자신의 자리에서 완벽하게 젠트리피케이션 당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존 리버스만 그런 게 아니라서 이 소설을 더욱 젠트리피케이션 소설로 보게 만든다. 일단 검은 수첩의 원래 소유자이자 리버스의 부하인 브라이언 홈스는 아내와의 별거로 더욱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던 하트브레이크 카페 주차장에서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구타를 당한다. 소설 초반에 등장해 리버스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동생조차 마약을 끊고 갱생하기 위해 리버스의 집에 머무르는데 거기서 오히려 심한 폭행을 당하고 다리에 거꾸로 매달리기까지 한다. 홈즈가 구타를 당했던 '하트브레이크 카페' 주인인 에디 링컨은 또 어떤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이었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꿈을 실현한, 그래서 그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도 있는 카페를 마련했는데 그 가게를 버리고 달아나야 할 상황에 직면한다. 존 리버스의 조력자가 되는 앤디 스틸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떠날 수 밖에 없어 에든버러로 왔으며 소아성애자로 캐나다로 도피했던 앤드류 맥페일 역시 거기서 살지 못하고 다시 에든버러로 돌아온다. 사실 이언 랜킨은 리버스 시리즈 첫 작품부터 '에든버러'가 관광객들을 위한 도시가 되었다며 툴툴거렸는데, 이렇게 보자면 그 관광객들의 의미가 다소 달라지는 셈이다. 원래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밀려난 자들이라는 것으로 말이다. 에든버러는 아마도 그런 자들이 마지막으로 깃들 수 있는 곳, 그처럼 최후의 희망 같은 장소였는지 모른다. 그 희망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런데 그 황혼의 마지막 빛과도 같은 희망조차 사라져 버렸다. 소설 초반에 꺼져버린 손전등이 의미하듯이 말이다. 에든버러는 이제 그런 장소가 될 수 없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소설의 주요 미스터리가 되는 예전에 화재로 사라진 호텔의 이름은 '센트럴'이다. 과거, 에든버러의 중심이 될만큼 훌륭한 호텔이었던 그 곳은 어느샌가 도박과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리고 결국엔 알 수 없는 화재로 전소되어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밀려난 자들로 가득한 소설 속 에든버러의 모습은 도박과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린 센트럴 호텔의 모습과 유사해 보인다. 혹여 이언 랜킨은 에든버러의 과거와 미래를 센트럴 호텔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더욱 존 리버스의 숙적 캐퍼티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아닐런 지. '당신들이 알고 있던 에든버러는 이제 없어. 당신들이 원하는 안식 따윈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의미로.

 등장인물 모두가 유일한 안식처를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처럼.


 그러므로 존 리버스가 검은 수첩의 진실을 추적하는 것은 삶의 두 번째 기회 같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과거의 에든버러가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는지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소설 앞에는 작가의 말이 있는데 거기서 이언 랜킨은 '검은 수첩'이 미국 여행 도중 집필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전혀 일본 소설 같지 않은 작품을 쓰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들이 외국인의 입장에서 진짜 일본이라는 것은 뭘까 생각해보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한 바 있다. 이처럼 외국에서 자신의 모국을 생각하면 보다 객관적이고 그만큼 본질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듯 하다. 이언 랜킨도 에든버러에 대해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바로 그 과정을 녹여낸 것이 '검은 수첩'이라고 한다면 너무 무리한 상상인 걸까?

 

 여하튼 이런 면에서 어쩌면 시리즈 사상 가장 절망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에 왜 이렇게 유머가 넘치는 걸까? 언어 유희인 농담이 많이 나온다. 지금 에든버러 사람이라면 '아재 개그'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그것도 그리 적절하지 않는 타이밍에. 문득 니체의 말이 생각났다. '유머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데, 인간만이 유머를 가지고 있는 까닭은 지구 상에서 가장 슬픈 동물이기 때문이다. 가장 슬프기 때문에 웃음을 발명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 사실 이언 랜킨이 열심히 이 소설을 썼던 92년은 영국 역사상 최악의 해 중 하나였다. 투기꾼 조지 소로스의 공격에 영국 경제가 어이없이 무너진 '검은 수요일'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캐퍼티의 전면화가 실은 조지 소로스를 빗대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한 개인에게 휘청거릴 정도로 너무나 약해져버린 공동체. 그것은 분명 예전 에븐버러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실 92년 이 때는 과거부터 강렬했던 스코틀랜드 분리주의 여론이 아주 약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무려 76%의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이대로 영국에 복속되어 있어도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도 센트럴 호텔의 소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듯이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와 독립에 대해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소설은 어쩌면 그런 무관심과 방관을 건드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든버러로 다시 돌아온 앤드류 멕페이는 리버스 경위말고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으며 '검은 수첩'의 사건 또한 존 리버스만 관심 갖기 때문이다. 상관들은 내내 다른 '머니백' 작전에만 집중하라고 리버스 경위를 닦달한다. 그리고 그런 무관심과 방관은 자기에게 피해만 오지 않으면 괜찮다는 이기심의 소산이다. 검은 수첩 사건의 진실이 오래도록 은폐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마지막의 놀라운 반전 또한 그 때문이었듯이.


 이렇게 소설은 아주 재밌는 이야기이지만 비판의 가시들을 은밀히 지니고 있다. 누군가 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둔 압정처럼 뜻하지 않은 순간에 찔려서 이제는 그런 무관심과 방관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느끼도록. 그래서 말인데, 존 리버스가 페이션스(Patience Aitken)에게 쫓겨나는 것의 진실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런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인내(patience)는 다했다!'


 '너무 늦기 전에 올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이 소설에 짙게 서려 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다간 다만 빼앗길 뿐이며 나를 버리고 모두를 위해 나설 때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주제를 줄기로 하여 말이다. 내 자리에 대한 불안이 여전하고 적폐 청산이 시대적 사명이 된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리 먼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 읽어보시라고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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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남자
박성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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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해도 안되는 남자. 팔리지 않는 소설가. 그가 바로 소설의 주인공 최대국이다. 이름은 대국이지만, 현실은 먹다 남긴 복국보다 못한 신세다. 재산은 사기로 날렸고 아내에겐 이혼 당했다. 그는 오늘도 자살할 자리를 찾아다닌다.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오늘 저녁에 아버지가 총을 맞고 중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주인공은 시큰둥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도 자신을 살갑게 대한 적이 없었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다운 모습조차 보인 일이 없었다. 자신이 망한 인생 팔할은 아버지 책임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왜 상관을 할 것인가? 어차피 자신도 죽을 작정인데.


 그런데 남자가 뜻밖의 제안을 한다. 아버지의 수첩을 찾아오면 3억을 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예쁜 딸, 이제는 다른 남자가 아버지가 되어버린 딸에게 아버지 노릇 제대로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었던 대국은 아버지가 비밀리에 감춰둔 수첩을 찾아 나선다. 이 이야기와 병행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38년 전 과거의 이야기로 실은 대국의 아버지의 이야기다. 그의 이름은 월출. 그는 놀랍게도 남파 간첩이다. 제목의 '제 3의 남자'란 바로 월출을 가리킨다. 그는 비록 남파 간첩이긴 해도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아니 속할 수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국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북에 남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위험한 임무를 여럿 수행했으나 그의 삶은 여전히 불안하고 한없이 고독하다. 간첩에게 보통 사람의 인연이란 사치이자 시한 폭탄 같은 것. 언제 그것에 발목을 잡힐지 모르고 또 언제 그들이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할 지 모른다. 월출은 눅눅한 세월의 먼지 가득한 작은 책방에서 자폐의 삶을 보낸다. 하지만 우연한 만남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홀연히 자신의 삶 안으로 들어선 여성. 그 여자, 해경. 월출은 마음을 접으려 하나 뜻대로 되지 않고 결국 그녀와 연인이 된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시작한 것에 대한 형벌이었던걸까? 사랑은 그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그것은 대국의 삶마저 휘청거리게 만든다.




 '제3의 남자'는 '아무리 오래된 과거라 해도 우리의 현재가 결코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마도 소설의 주역들을 부자 관계로 묶인 것은 과거와 현재가 혈연만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현재 대국이 지닌 상처의 근본은 과거에 있었다. 현재 그가 알고 있는 것 대부분도 진실은 아니었다. 월출이 남파 간첩으로 거짓된 정체성 속에서 살았던 것 그대로 대국 역시 따지고 보면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대국이 찾는 '검은 수첩'은 단적으로 '과거를 모르는 모두가 거짓된 정체성의 존재들'이란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검은 수첩'은 진실된 정체성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제3의 남자'는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으면 어떤 비극이 일어나고 반복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5공 시절 고문기술자로 악명이 높았던 이근안을 연상시키는 존재가 등장한다. 비극의 배후요, 만악의 근원이다. 이런 자가 그 오랜 세월 변함없이 활개를 칠 수 있었던 것도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잘못된 과거에 아무 관심이 없었던 우리 자신 때문이기도 하다. 적폐의 탄생은 탐욕 때문이지만, 지속과 반복은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 탓이다. 대국은 그런 우리들을 반영하는 존재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리 망가진 진짜 이유를 모른다. 그러면서 괜히 남탓만 한다. 우리의 시선도 비슷하지 않을까? 진실된 정체성이 기록된 '검은 수첩'의 작성자인 아버지, 월출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진짜 역사를 상징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대국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잘못된 과거라면 더더욱 관심과 참여로 바르게 청산하여야 비정상의 사회에게서 받는 피로와 통증이 가셔질 것이다. 적폐 청산은 가슴을 짓누르는 돌덩이를 치우는 작업이다. 내가 제대로 숨 쉬고 살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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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1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11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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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덫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원해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태어난 순간의 육체와 환경 또한 내 선택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처음 눈을 뜨는 그 순간, 내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었고 내게 허락된 것은 오직 지금 주어진 모든 것에 적응해야 한다는 강요밖에 없었으니, 우연히 덫을 밟아버린 그 순간에 발목이 단단히 붙잡혀 운명이 고정된 불쌍한 토끼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래도 살아왔다. 비록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덫의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였으나, 그 유예의 시간이나마 최선을 다해 의미롭게 채워보려 애썼다. 그나마 따뜻한 봄날의 숲속에서 뜯어먹을 풀들이 지천으로 널린 곳에서 덫에 걸린 이들은 그래도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밟은 덫은 하필이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눈밖에 없는, 매섭게 추운 겨울의 황량한 벌판이었다. 먹을 것은커녕 의지할만한 무엇도 없었다. 그런 자에게 삶은 목에 걸린 올가미로 느껴진다. 내 의지로 주도하는 것보다 억지로 끌려가야 할 일이 많은 삶. 그렇지 않아도 ‘헬조선’, ‘오포세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지 오래인 지금. 애당초 그리 폭이 넓지 않은 올가미를 목에 두르고 태어난 나 같은 사람들은 하루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죄어오는 올가미에서 날마다 질식의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도선우의 소설, ‘스파링’의 주인공 장태주의 독백에 공감하게 된 것은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질식의 공포를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서 비로소 질식의 공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진정한 원천을 확인했는데 그것이 바로 덫이었다. 물론 덫은 하나의 비유다. 그것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편입하게 된 타인의 질서를 나타낸다. 내 뜻과 상관없이 나를 이물(異物)로 만드는 그런 질서다. 그것은 내가 그 질서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내 의견과 이해를 용납하지 않으며 오로지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배제될 것인가만 허용하기에 더욱 덫을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속과 배제를 가르는 기준이 단 하나, 바로 나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타인의 질서는 나의 주체성을 온전히 죽여야만 나를 진정으로 편입시킨다. 그 때라야 나는 더이상 이물(異物)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러하니, 탈주 아니면 죽음만이 남아있는 덫만큼 그런 질서의 정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덫이 장태주에게 질식의 공포를 안긴 원천이었으며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이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여고생의 사생아로 그것도 화장실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척박한 곳의 덫에 걸려버렸다고 할 수 있는 장태주는 그런 점에서 나와 유사했고 그랬기에 갈수록 강고하고 교묘한 덫을 만나 벌어지는 그의 투쟁과 패배의 이야기는 내게 보다 살갑게 다가왔다. 그래, 세상에는 수 많은 덫이 있다. 내 포기와 방관을 강요하고 회유하는 덫들. 자라면서 보다 넓은 사회로 나아갈수록 처음엔 선명했던 그 덫들이 점점 더 교묘하게 은폐되거나 작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지 않을수록 더 강하게 내 발목을 붙잡는다는 것도.


 장태주가 만나는 덫들도 그랬다. 그는 크게 모두 세 개의 덫을 만난다. 초등학생이 되어 만나는 오재호, 중학생 때 만나는 재훈 그리고 프로 복서로 성공한 뒤 만나게 되는 한기영, 이렇게다. 처음의 덫은 오재호라는 한 개인의 모습과 장태주가 소중하게 기르는 새 ‘알리’를 죽이는 폭력으로 단순하고 선명하게 장태주 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장태주는 맞서 싸울 수 있었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어 맞닥뜨린 재훈의 덫은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조직이었고 게다가 폭력마저 구조적으로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태주는 속절없이 희생자가 되어 버렸다. 그는 자신이 재훈에게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모른다. 주체성을 포기하라는 달콤한 유혹을 거부해버린 그는 강고한 타인의 질서에 의해 조용하고 은밀하게 배제된 것이다. 결국 그는 소년원으로 가게 되고 거기서 만난 담임의 ‘타인의 질서에 강요되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의 질서를 만들어라’라는 말에 감화되어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학교와 보육원을 떠나 자신을 가장 잘 증명할 수 있는 프로 복서의 길로 들어선다. 재훈까지는 그래도 장태주가 싸워야 할 상대가 명확했다. 하지만 프로 복서로 성공한 뒤에 만난 한기영의 덫은 너무나도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어 대적해야 할 상대가 과연 누구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형체 없는 상대를 향해 어디로 어떻게 주먹을 뻗어야 할 지조차 모른 채, 그는 가중되는 혼란과 고독 속에서 끝내 자기 파멸의 길을 선택한다. 어쩌면 이것은 패배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덫에서 잘 빠져나오더라도 언제나 더 강하고 간교한 덫이 날 사로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 요소가 과연 그럴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결말의 장태주 기분이다. 파멸의 정점이랄 수 있는 방어전 패배의 기자회견 장에서 그는 부재(不在)를 본다.


 빛이 모두 소진되었고 어둠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 자리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 나는 해가 진 그늘 속에 홀로 핀 해바라기처럼, 빛이 사라진 곳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어느 곳을 봐야할 지 알지 못했다. 어느 곳을 바라봐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p. 355)


 이 부재(不在)로 인한 무지(無知)는 장태주에게 과연 비극적인 것일까? 얼른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소설의 처음이 바로 그 부재를 목격한 다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소설을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말에서 이제 어디를 봐야할 지 모르게 된 장태주가 다음과 같은 담임의 권고를 따라 자신이 진정 어디를 봐야할 지 알기 위해 지금까지의 자기 인생을 차분히 되짚어 생각해 보는, 그렇게 일종의 복기(復棋)의 과정이라고.


 “때론 생각이라는 걸 안 하고 살면 그게 제일 편한 것 같지만, 또 막상 자기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고 살면 명확히 제 세계를 구축하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휩쓸리게 돼. 문제는 그들이 세운 질서가 네가 원하는 질서와 다를 수도 있다는 거야. 너한테 무조건 불리하고, 너한테 무조건 억울한. 이해가 돼?” (…) “그걸 알고 뒤늦게 상황을 바꿔보려고 해도 그땐 쉽지 않아. 처음에 잘 생각해서 행동했을 때보다 적어도 만 배 이상은 힘이 들겠지.”(p. 178)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 끝에서 독서를 끝내지 말고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와 읽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결말의 장태주가 단순히 패배한 것은 아니며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겐 더 다행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담임도 생각을 강조했지만, 덫이 갈수록 은폐되고 교묘하게 작동하는 주된 이유는 당하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못하게 하는데 있다. 타인의 질서에게 있어 주체성의 발현이자 의지를 창출하고 행동까지 이르게 만드는 한 개인의 생각은 위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우리는 재훈의 조직은 구성원 모두가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고 한기영의 관리 또한 장태주가 제대로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구성원들과 장태주 모두 무엇이 정말 자신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채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타인의 말을 순순히 납득해 버린다. 장태주의 주먹은 자기 주체성의 표현이었으며 타자의 질서에 대한 사유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무책임과 방관 속에 진정한 자신을 포기하려는 작태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이다. 덫에서 빠져나오려는 토끼의 강렬한 몸부림과도 같은.


 하지만 복서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장태주는 그만 그 화려함과 달콤함에 도취되어 비슷한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재훈과 같은 길을 걷고 만다. 강력한 힘과 돈으로 자신이 질서의 중심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면 생각이란 게 없어도 원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커다란 패착이었다. 패착이었다는 것은 그가 그렇게 질서의 중심으로 나아갈수록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들인 아라, 담임, 누나 그리고 할아버지가 점차 사라진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거꾸로 힘이나 재력이 아니라 사유야말로 덫을 푸는 열쇠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에겐 타인의 질서와 결별이 있어야 했다. 결연한 단절을 통해 자신으로 온전히 돌아와야 했다. 취생몽사(醉生夢死)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머리로 또렷이 생각하기 위해. 소설 후반에 자기 파멸을 초래한 모든 폭행과 기벽들은 그런 단절을 위한 몸짓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 앞에 모든 것이 텅 비어버린 그 순간, 나는 감히 태주가 홀가분한 행복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랬기 때문에 비로소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는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게 만드는, 자신이 정녕 어디를 봐야하고 무엇을 붙잡아야 할 지 알게 만드는 그런 깨달음을.


 남들이 나보다 먼저 나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도록 방치하는 것은 종종 그 자체로 위험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꾸만 내가 모르던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만들어지고 또하나의 나로 자리잡히게 되면 결국, 길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내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급기야 나조차 내가 누구인지 헷갈릴 수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서서히 나를 잠식하고, 그러다보면 기어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내가, 정작 진정한 내 모습이기를 바랐던 나를 온전히 삼켜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p. 11)


 두 번 읽게 된 이 말은 내게도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 역시 세번 째 덫에 걸린 태주와 상황과 그리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는데 나는 이 캄캄하고, 그 어둠조차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한 미래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고 내가 안심하고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는 더욱 더 작아져만 갔다. 세상에 대한 구토와 세상이 내리누르는 육신과 영혼의 통증을 낮과 밤처럼 오고가는 일상. 분노하는 것에도, 이해하는 것에도, 타협하는 것마저 이미 지쳐버렸다. 쌓여가는 울화, 차오르는 우울, 번져가는 무기력 속에서 몽유병 환자와도 같이 그저 관성과 타성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맞다. 나는 사각의 링에 내던져진, 그러나 그로기 직전의 선수였다. 하지만 상태는 태주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나는 태주보다 좋은 동체 시력도 없고 펀치도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은연중 이런 습성에 길들여 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태주처럼 문제와 맞써 싸우며 정면 돌파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덜 힘들고 귀찮은 길만을 찾아갔던 것이다. 타인의 질서에 대한 갑갑증을 누구보다 심하게 느꼈지만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게도 단 한 번도 그것과 단절하여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려고는 하지 않고 오히려 타인의 질서에 보다 더 잘 융화되도록 애쓰기만 했던 나였다. 나는 태주의 말에 따르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이기를 바랐던 나를 온전히 삼켜버린’ 상태였다. 태주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진실된 나의 초상을 똑똑히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비록 패배가 예정된 결말이었을지라도 왜 단 한 번도 당당하게 주먹을 날려볼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 목에 걸린 올가미가 적다는 것도 알고 내가 약하다는 것도 알기에 더 커져버린 불안과 공포 때문이었다. 나는 승부의 결과가 이미 조작되어 있는 사각의 링에 오른 선수와 마찬가지였다.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인용한 말에 꽤 둔중한 울림을 느꼈고 이런 깨달음을 얻도록 만든 태주의 패배가 실은 구원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간절히 믿고 싶었다. 사유야말로 내 발목을 붙잡은 덫을 여는 열쇠라는 사실은 내게 지금 가진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는 위안과 희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태주의 복기(復棋)는 내게 크게 두 가지를 주었다. 하나는 현상(現象)된 물리적인 외양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는 경고였고 다른 하나는 제 아무리 강고하고 간교한 덫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유는 결국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사실 그 덫이 그토록 강력하게 된 것은, 소설 속 담임의 말마따나 바로 나 자신의 나약과 방관 그리고 무책임을 거름으로 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라면서 말이다.


 이로써 내 상황을 좀 더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덫이라는 물리적인 실체에 너무 좌지우지되었다는 것과 그렇게 현상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제대로 된 성찰없이 살다보니 그만 사는대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미셀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자기 관리와 계발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관점에 따라 늘 모자르고 부족하기 마련인 개인의 모습을 오로지 결점으로 인식케 하여 제 쪽에서 먼저 사회의 부단한 요구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맞추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한 바 있다. 나도 이와 똑같았다. 그들의 질서를 깊이 내면화하여 살다보니 그들의 시각으로만 나를 보게 되었고 그 기준에 잘 부합하지 않는 내 모습에서 더욱 더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달리 보면 얼마든지 긍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태주역시 패배의 경험을 통해 타인의 삶에 대한 일면적(一面的)이었던 시각을 다면적(多面的)으로 변화시킨다. 내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이리라. 불안과 공포는 일면적(一面的)인 시야일 때 더욱 증식하는 법이니까. 물론 다면적(多面的)인 시야는 외양과 현상에 굴하지 않는 부단한 사유만이 가져다 줄 수 있다. 사유란 송곳과 같아서 모든 이의 개체성(個體性)을 지우고 동일한 관점과 사고를 가지도록 만드는 덫의 장막(帳幕)에 맞서 거기에 다양한 구멍을 뚫고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시야를 갖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게 나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달리 바라볼 여백을 갖게 만들 것이며 내가 정말 두려워하던 것들도 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인식과 함께 반대로 거기에서 내 삶에 유용한 것마저 찾아내게 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덫 또한 나 자신을 시험할 단련의 계기로 여기게 이끌 수도 있다.


 문득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스파링’으로 되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스파링’은 실전과 같은 연습 경기를 뜻한다. 아무리 실전처럼 치뤄져도, 실전은 아닌 것이다. 소설에서 스파링은 한 번 나온다. 그런데도 제목은 ‘스파링’이다. 아마도 이것은 작가가 지금의 태주에게 ‘넌 아직 실전을 치르지 않았어. 지금까진 모두 연습 경기일 뿐이야. 모든 것을 깨우친 지금이야말로 실전이니, 열심히 해 봐!’하고 보내는 위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내게도 해당된다. 나마저 이 소설을 다 읽고난 지금 제목에서, 지금까지 환영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을 오로지 실체로만 생각하여 지레 겁먹고 피하기에 급급했던 나와 작별하고 이제라도 제대로 한 번 맞서 보라는 작가의 응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올가미는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다. 두려움에 주눅이 들어 싸움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비겁한 나를 정당화시키려 만들어낸 환영일지도 모른다. 굴레는 보고자 하는 눈에서만 존재하는 것. 사유의 펀치는 휘두르는 것만큼 굴레를 지우고 나의 자유와 가능성을 확장시킬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성복 시인도 자신의 시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마음은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으며 아무도 그에게 고삐를 맬 수 없다’고. 지금 이 순간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부단히 계속될 사유의 훈련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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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나와 아무래도 나란히 놓고 비교하게 되는 윤성희의 '웃는동안'과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 두 소설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모두 버거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윤성희의 '웃는 동안'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물이 되려하고,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에 나오는 사람들은 동물이 되려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현대화가 진전될 수록 자기 반성과 성찰이 가능한, 즉 인간과 같은 '대자적 존재'는 욕망의 발현과 실현에 있어 즉각적인 실천이 가능한 '즉자적 존재'가 되고싶어 하는 경향이 더욱 짙어진다고 말한 바 있다. 한 마디로 퇴행의 욕망이 증식한다는 것인데 두 작품은 그런 사르트르의 말이 맞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듯 하다. 그러나 이런 퇴행을 단순한 바람, 다시 말해 삶이 너무 복잡하고 피곤해서 그저 단순하고 쉽게 살고 싶은 마음에 가지게 된 소망 같은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즉자적 존재로의 퇴행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현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장애가 되어 우리 자신을 압박하여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쥐를 몰아가듯 했기 때문에, 그렇게 낭떠러지 가장 자리로 내몰린 결과라는 것이다. 고무공을 손으로 억지로 누르면, 고무공은 압력에 완강히 저항하며 제 모양을 유지하려 버티다가 그것이 안되면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버둥댄다. 그 버둥대는 육체가 향하고 있는 곳이 퇴행인 것이다.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이야 말로 이것을 적나라하게 이것을 보여 준다. 소설은 동물원에서 동물 탈을 쓰고 관람객 앞에서 정말 동물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진짜 동물은 관리와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보다 값싼 비용으로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대치한 것인데, 이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의 가치가 동물 보다 더 추락해버린 것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주인공 역시 고릴라 탈을 쓰고 고릴라 우리 안에서 고릴라처럼 행동하는데,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구조 조정 당하고, 집에서 놀면서 마늘을 까거나 인형 눈알 붙이는 부업을 전전한 끝에 거기까지 내몰린 것이었다. 그렇게 동물이 되는 것은 사회라는 고양이가 쥐인 주인공을 막다른 골목까지 내 몬 끝에 다다른 종착지였고,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동물적인 능력만을 체력 테스트를 통해 증명하고는 동물이 되었다.(동물원에서 동물로 일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무원 시험보다 더 어렵고 엄격한 체력 테스트에 합격해야 동물로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굿바이 동물원'은 퇴행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이며, 이들은 그 퇴행의 압박 속에서 오직 동물이 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참으로 아이러니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한다. 


 동물원에 있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 구실 같은 건 안 해도 돼. 솔직히 이 나라에서 사람 구실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냐고. 난 거의 없다고 봐. 하지만 동물원은 달라.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동물원이야. 웃기지? 내가 그랬잖아. 사는 게 코미디라고. 자, 한잔해. 어때, 여기 죽여주지? (p. 214)


 한 편, 퇴행의 욕망은 원인을 가지고 있는 발현이기에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그러한 욕망을 양산하는 사회가 진정 어떠한 민낯을 가지고 있는지 오롯이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들이 동물로 일하는 동물원은 단순히 노동의 현장만이 아니라 사회의 진실한 모습이기도 하다. 사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동물원인 것이다. 사람을 포기하고 오로지 동물처럼 살아야 간신히 버틸 수 있는 동물원. 소설은 그것을 설득력있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다보면 저절로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 사회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툭튀'한 것은 아니니, 분명 어딘가의 것을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우리는 그 모델을 잘 알고 있다. 바로 근대가 창출한 서양 문명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 근대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근대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한다면, 한 마디로 인간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왜나하면 중세까지 종교의 그늘 속에서 귀족과 성직자의 재산 수호와 증식을 위한 농노의 의미 밖에는 가지지 못했던 보통의 인간들이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들 역시도 지배자들과 똑같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고귀한 존재이며 자신 속에 잠재된 가능성을 이성을 통해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에 빗대어서 다시 말해 본다면, 근대란 동물원에서 동물로 살던 인간을 그 울타리의 문을 열고 이제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방시켜 준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실을 먹을 수 있었던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타고난 피가 아닌 실력이 주가 되었기에 이제는 귀족 혈통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산업 자본가만 근대의 햇살로 영근 과실을 마음껏 섭취했을 뿐, 그들을 제외한 대부분 서민들의 처지란 중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산업혁명 초기, 면직 산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자 영국은 경작지를 목축지로 점점 더 많이 바꾸는 인클로저 운동을 시작했고 그로인해 다수의 농민들은 경작지를 잃고 살던 곳에서 도시로 쫓겨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했다. 그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긴 노동 시간과 그에 비해선 턱없이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말이다. 9세 미만의 아이들 조차 어른들 못지 않게 공장에서 12시간 이상을 일했다. 그래서 엥겔스는 이런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이들만은 살인적인 노동 조건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 '공장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만큼 사람들의 삶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다만 귀족의 농노에서 공장의 노예로 소속이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귀에 근대가 외친 '천부인권'은 한낱 공염불에 불과했다. 소설의 주인공 '김과장'(소설에 주인공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김과장'으로만 불릴 뿐이다. 주인공이 누구든지 가리킬 수 있는 김과장으로만 불린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상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그가 쓰기만 하면 그걸 쓰는 사람이 누구든지 똑같은 고릴라가 되는 탈을 쓰고 고릴라가 된다. 이것은 그대로 익명의 사람에서 익명의 동물로 전이되는 것과 같다. 그는 사회에서도, 동물원에서도 사회가 강제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한(고릴라 역시 주인공이 선택한 동물은 아니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결국 이 사실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또 동물원에서 동물로 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일하는 가짜 세렝게티가 아니라 정말 동물이 되어 살 수 있는 진짜 세렝게티를 염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곳은 정체성을 강요하는 철책이 없는, 오로지 자기가 선택한, 자신이 정립한 정체성만으로 살 수 있는 광할한 자유의 영토이다.)이 그랬듯이, 겨우 귀족의 동물원을 나와 곧장 자본의 동물원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수백년이 흐른 지금의 상황 역시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말이다. 중세 때, 사람들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기준은 이렇게 단순했다. 지금도 똑같다. 오로지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돈을 벌 수 없는 이들은 이제 사람 이하의 존재, 사물이 되거나 동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사람으로 남아있으려는 안간힘은 사실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벌려는 안간힘에 다름아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안간힘이라는 것이 더 처연하고 아프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돈이라는 것에 그 정도로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이 우스꽝스럽기짝이 없는 현실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웃는다. 그러고보니 퇴행을 보여주는 윤성희의 '웃는 동안'과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 모두 웃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웃음이 진짜 웃음인 것은 아니다. 보다 정확히는 '헛웃음'에 가깝다. 예전에 한참 유행한 개그인 최불암 시리즈를 들었을 때와 똑같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는 웃음. 아니,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저 웃음만 나오는데, 그렇게 웃는 자신이 또 어이가 없어서 웃게 되는 웃음. 바로 그런 웃음이다. 그저 그렇게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비웃음 같은 것. 한 마디로 '자조(自嘲)'.

 

 내 생각에 '자조'는 더욱 단단한 철창으로 우리를 가두고 오로지 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강요하는 지금 시대를 견뎌가는 하나의 방법이 된 것 같다. 조금 무리한 근거일지도 모르겠는데, 모든 TV 프로그램에서 예능이 대세를 이룬다는 사실이 '자조'가 돈 때문에 사람으로 살기 정말 힘든 이 시대에 그 때문에 더 활활 타오르기만 하는 우리의 광기를 참고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니체의 격언을 광범위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격언은 이러하다.

 '인간만이 웃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장 슬픈 동물이라 웃음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엔 반드시 따라붙는 부록 같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연민(憐憫)이다. 어쩌면 이 말은 틀렸을 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보내는 연민이 오히려 비웃음이란 형태로 나타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는 '굿바이 동물원'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행위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는 것'이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운다. 마늘을 까면서도 울고, 본드를 흡입하면서도 운다. 그렇게 울면서,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할 때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화장실을 찾았다가 모든 칸이 다 우는 남자들로 가득 차서 그냥 돌아나와야 했었던 때를 떠올린다. 우는 것은 그만이 아니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에게 울음은 마치 기본 사양처럼 장착되어 있다. 돈이라는 콧두레에 끌려가는 소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것은 그들 모두가 똑같은지라, 하나같이 소처럼 긴 목울음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는 것은 등장인물만이 아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우리 독자 역시 읽다가 얼핏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이 겪은 일이 꼭 그들만의 것은 아니기에, 읽는 이도 얼마든지 이미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겪을 수 있는 일이기에, 동병상련이 피워내는 물안개가 마음을 자욱하게 휩싸는 것이다. 그러다 마음 한 구석에서 시큰한 통증도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아프다.


 웃음은 견디기 위해서라지만 울음으로 집약되는 연민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소설은 퇴행을 다룬다. 퇴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참담하여 헛웃음이 난다. 때로는 한번 길게 내쉬는 한숨이 고달픈 현실을 달콤한 노래보다 더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듯이, 이런 헛웃음 또한 버틸 힘을 준다. 하지만 웃음, 그것밖에 없다면 소설은 독자에게 살아가려면 그저 자신을 자조하면서 잠시 현실을 잊는 것밖에 없다는 말만 들려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바로 이 눈물로 대변되는 연민으로 인해 우리는 그 보다 더 진정한 모습의 버틸 힘을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래, 이 소설엔 자조와 연민이 있다.


 '자조(自嘲)'가 오늘을 위한 것이라면 연민은 내일을 위한 것이다. 소설에서 연민은 오늘의 비극을 그치게 할 대안으로 기능한다. 어쩌면 작가 역시 자조가 가진 한계를 이미 깨달아 연민을 다시 소설에 누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조의 한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로든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조를 통해 힘든 오늘을 견디더라도 그 효과는 오직 자신에게 한정된다. 자조는 내몰림 끝에 나온 것이었다. 그 내몰림은 혼자라 자신을 압박해 오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막다른 골목에서 진정 빠져나오고 싶다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퇴행을 강요하는 강도를 약화시켜야 한다. 그러러면 함께 변화를 도모할 타인이 필요하고, 그렇게 되려면 타인과 이어져야 한다. 바로 그 연결, 매개의 역할을 연민이 한다.


 연민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남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건 바로 우리가 겪은 슬픔 때문이라고 말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와는 삶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간이 다른 동물들 보다 더 많이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것도 아마 니체의 말마따나 가장 슬픈 동물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슬픔은 가장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공감을 쉽게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나와 같은 슬픔을 겪고 있는 타인을 보면서 그 상황에 처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그래서 지금 타인의 처지를 쉽게 이해하게 되고 그 상황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그것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힘들지 잘 알고 있는 나는 저절로 그를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고 위로를 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연민의 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일한 경험이 불러 일으키는 공감의 확장. 그리고 그 공감을 통해 서로가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연대가 이뤄진다. 소설에 나오는 '마운틴 고릴라들의 모임' 그대로 말이다.


 주인공과 송과장의 관계처럼, 사람으로 있을 때는 이어질 수 없었던 관계들이 동물이 되어서는 이뤄진다. 그들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울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회에 내몰린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었고, 그런 경험 때문에 같이 내몰린 자의 눈물에 쉽게 공감하고 응답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진실된 교감은 오로지 그들이 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서로에 대한 연민이 진솔한 소통과 두터운 연대를 이뤄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조를 넘어 연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보도록 한다. 연민을 통한 이해와 배려가 비록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이 가짜 세렝게티 동물원에 갇혀 있을 지라도 영혼만은 창살을 빠져나와 저 무한의 하늘을 날아다니며 어디에 있는 타인이든 이어지게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강태익 작가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뭣이 중한데? 공간이 그토록 중요해? 이 육체가 창살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이 그렇게 대단히 차이나냐?"고.

 

 작가는 물론 아니라고 대답한다. 공간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정말 우리에게 자유가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와 같이 느낄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유는 바로 타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몸은 비록 가둘 수 있을지라도 마음은 절대 가두지 못할 것이라 한다. 동물 탈을 아무리 써도 동물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그 안의 나를 사람으로 봐주는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작가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고릴라 탈을 쓰고 행동할 때, 관람객들이 그를 진짜 고릴라로 알고 하는 행동의 묘사를 통해 거꾸로 드러낸다. 결국 우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를 쓰고 동물원인 이 곳을 빠져나가려 하기 보다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배려를 통해 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이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랬기에 소설에서 주인공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굳이 진짜 세렝게티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 곳까지 찾아간 이들 역시 진짜 동물처럼 살게 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다. 멀리서도 자신을 여전히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던 덕분에.


 물론 이렇게 되려면 타인과의 연대를 가능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연민의 이랑을 마음 밭에 무던히도 많이 갈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한다. 남들에게 자주 연민을 느끼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우리의 어깨를 다독인다. 연민 그리고 슬픔이 오히려 당신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이다. 보다 더 사람답게 되기 위해 우리는 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설 막바지의 만딩고처럼 이 사회에 당당하게 '굿바이 동물원' 할 수 있게 만드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강태익 작가의 진심어린 조언이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은 지금, 난 그 말을 깊이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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