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첩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는 흔히 의자 뺏기 놀이에 비유되고는 한다. 각자가 자신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를 밀어내려고 다투는 것과 같다고. 물론 그 놀이 보다야 현실의  다툼이 훨씬 격렬하긴 하지만 말이다. 비정규직이 만연한 지금에 내일도 모레도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모두가 바라는 꿈이기도 하다. 그런 시대에 갑자기 내가 있을 자리가 없어진다는 현실만큼 공포스러운 것도 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이가 중년 이상이라고 한다면 더 그렇다. 그 나이란 이제 의자를 다시 마련하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니까. 엉덩이가 많이 무거운데, 무겁고 싶고 무거웠으면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한다는, 그 변화의 강요가 부담이요 불안으로 밀려드는 게 마치 꼭 임박한 젠트리피케이션 속 세입자와 다를 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중년이요, 한 번쯤 그들에게 꼭 찾아온다는 우울의 요체가 아닐까 싶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이번에 나온 이언 랜킨의 '검은 수첩'이 바로 거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검은 수첩'은 타탄 느와르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이언 랜캔의 대표작인 존 리버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제목의 '검은 수첩'은 원래 헨리 8세가 엔 마리와의 결혼 때문에 영국 내 카톨릭을 압박하던 시절, 헨리 8세에 동조했던 수도사들이 수도원의 비리를 몰래 적었던 일종의 장부였다. 그것을 통해 비리 척결이란 명분으로 헨리 8세가 수도원을 정당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 이후, 잘못이나 비리 같은 것을 비밀리에 기록한 것을 두고 'BLACK BOOK'이라 불렀다. 이 같은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소설의 제목이 이언 랜킨의 존 리버스 시리즈 제목이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중의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단골집 카페 주차장에서 느닷없이 뒤통수를 가격 당하여 쓰러진 브라이언 홈스가 남긴 '검은 수첩'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소재이긴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그렇게 젠트리피케이션이 넘쳐 나는데 '블랙북'의 원래 역할을 상기해 보면 그 역시 수도원을 젠트리피케이션 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말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검은 수첩'이 지닌 중의적 의미 그대로 젠트리피케이션 소설 이다.

 다시 말해, 밀려난 자들의 이야기.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야심한 밤을 틈타 악취가 진동하는 시신 두 구를 밴으로 운반하는 두 명의 사내가 있다. 바다에 접한 절벽에 차를 세우고 시체를 바다로 버리는데 순찰차가 멈춰선다. 경관 하나가 손전등을 들고 다가온다. 시체 버리는 것을 목격한 것은 아니다. 다만 농무가 너무 심해 혹시 무슨 문제가 있어 이 곳에 차를 세운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절한 경관에게 찾아온 것은 느닷없는 습격과 죽음. 사람의 목숨이 쉽게 버려지는 그 곳에는 이제 절망만이 가득하다는 듯 마치 희망 혹은 구원의 상징과도 같았던 경관이 들고 있는 손전등의 빛은 그의 죽음과 함께 꺼져 버린다. 그와 동시에 존 리버스 역시 자기 자리에서 끝도 없이 밀려난다. 마약 중독자였던 동생이 갱생하겠다면서 리버스의 공간 속으로 들어오고, 당시 삶의 유일한 낙이었던 안마 시술소에서 우연히 만난 옛 동료와 회포를 나누느라 연인 페이션스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바람에 그녀의 집에서도 쫓겨난다.(이 소설은 영국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는데, 드라마 역시 이 소설의 핵심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듯, 존 리버스가 페이션스 집에서 쫓겨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드라마의 이야기는 리버스가 맡게 되는 사건까지 포함하여 소설과 전혀 다르다. 이야기가 완전히 바뀌면서도 존 리버스가 페이션스에게 내쫓겨 지금은 남에게 세를 내 준, 원래 자기 집에서 사는 설정만은 그대로 살아 남았는데 그래서 더욱 드라마 역시 '검은 수첩'의 핵심을 밀려난 자의 이야기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TV 시리즈 속 리버스 경위의 모습. 켄 스콧이 맡았다.

(혹시 영화 '호빗'에서 기다란 흰 수염을 하고 있던 호빗이 생각나시는지? 그가 바로 켄 스콧이다.)

 1기와 2기의 리버스를 맡은 배우가 다른데, 1기는 예전 영화 미이라 3부작에서 웃음을 주로 맡았던 조 해너가 했었다. 


 경찰서 내 상황도 사생활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를 마뜩찮게 여기는 경찰들이 그를 밀어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안팎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존 리버스는 무엇보다 혼자서 조용히 독서하는 시간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간도 안녕이다. 자신의 집은 동생과 세든 대학생들의 이런저런 소동으로 소란스럽고 그 어디서도 휴식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그가 자신의 자리에서 완벽하게 젠트리피케이션 당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존 리버스만 그런 게 아니라서 이 소설을 더욱 젠트리피케이션 소설로 보게 만든다. 일단 검은 수첩의 원래 소유자이자 리버스의 부하인 브라이언 홈스는 아내와의 별거로 더욱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던 하트브레이크 카페 주차장에서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구타를 당한다. 소설 초반에 등장해 리버스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동생조차 마약을 끊고 갱생하기 위해 리버스의 집에 머무르는데 거기서 오히려 심한 폭행을 당하고 다리에 거꾸로 매달리기까지 한다. 홈즈가 구타를 당했던 '하트브레이크 카페' 주인인 에디 링컨은 또 어떤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팬이었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꿈을 실현한, 그래서 그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도 있는 카페를 마련했는데 그 가게를 버리고 달아나야 할 상황에 직면한다. 존 리버스의 조력자가 되는 앤디 스틸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떠날 수 밖에 없어 에든버러로 왔으며 소아성애자로 캐나다로 도피했던 앤드류 맥페일 역시 거기서 살지 못하고 다시 에든버러로 돌아온다. 사실 이언 랜킨은 리버스 시리즈 첫 작품부터 '에든버러'가 관광객들을 위한 도시가 되었다며 툴툴거렸는데, 이렇게 보자면 그 관광객들의 의미가 다소 달라지는 셈이다. 원래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밀려난 자들이라는 것으로 말이다. 에든버러는 아마도 그런 자들이 마지막으로 깃들 수 있는 곳, 그처럼 최후의 희망 같은 장소였는지 모른다. 그 희망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런데 그 황혼의 마지막 빛과도 같은 희망조차 사라져 버렸다. 소설 초반에 꺼져버린 손전등이 의미하듯이 말이다. 에든버러는 이제 그런 장소가 될 수 없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소설의 주요 미스터리가 되는 예전에 화재로 사라진 호텔의 이름은 '센트럴'이다. 과거, 에든버러의 중심이 될만큼 훌륭한 호텔이었던 그 곳은 어느샌가 도박과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리고 결국엔 알 수 없는 화재로 전소되어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밀려난 자들로 가득한 소설 속 에든버러의 모습은 도박과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린 센트럴 호텔의 모습과 유사해 보인다. 혹여 이언 랜킨은 에든버러의 과거와 미래를 센트럴 호텔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더욱 존 리버스의 숙적 캐퍼티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아닐런 지. '당신들이 알고 있던 에든버러는 이제 없어. 당신들이 원하는 안식 따윈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의미로.

 등장인물 모두가 유일한 안식처를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처럼.


 그러므로 존 리버스가 검은 수첩의 진실을 추적하는 것은 삶의 두 번째 기회 같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과거의 에든버러가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는지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소설 앞에는 작가의 말이 있는데 거기서 이언 랜킨은 '검은 수첩'이 미국 여행 도중 집필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전혀 일본 소설 같지 않은 작품을 쓰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들이 외국인의 입장에서 진짜 일본이라는 것은 뭘까 생각해보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한 바 있다. 이처럼 외국에서 자신의 모국을 생각하면 보다 객관적이고 그만큼 본질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듯 하다. 이언 랜킨도 에든버러에 대해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바로 그 과정을 녹여낸 것이 '검은 수첩'이라고 한다면 너무 무리한 상상인 걸까?

 

 여하튼 이런 면에서 어쩌면 시리즈 사상 가장 절망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에 왜 이렇게 유머가 넘치는 걸까? 언어 유희인 농담이 많이 나온다. 지금 에든버러 사람이라면 '아재 개그'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그것도 그리 적절하지 않는 타이밍에. 문득 니체의 말이 생각났다. '유머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데, 인간만이 유머를 가지고 있는 까닭은 지구 상에서 가장 슬픈 동물이기 때문이다. 가장 슬프기 때문에 웃음을 발명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 사실 이언 랜킨이 열심히 이 소설을 썼던 92년은 영국 역사상 최악의 해 중 하나였다. 투기꾼 조지 소로스의 공격에 영국 경제가 어이없이 무너진 '검은 수요일'이 일어났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캐퍼티의 전면화가 실은 조지 소로스를 빗대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한 개인에게 휘청거릴 정도로 너무나 약해져버린 공동체. 그것은 분명 예전 에븐버러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실 92년 이 때는 과거부터 강렬했던 스코틀랜드 분리주의 여론이 아주 약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무려 76%의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이대로 영국에 복속되어 있어도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도 센트럴 호텔의 소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듯이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와 독립에 대해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소설은 어쩌면 그런 무관심과 방관을 건드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든버러로 다시 돌아온 앤드류 멕페이는 리버스 경위말고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으며 '검은 수첩'의 사건 또한 존 리버스만 관심 갖기 때문이다. 상관들은 내내 다른 '머니백' 작전에만 집중하라고 리버스 경위를 닦달한다. 그리고 그런 무관심과 방관은 자기에게 피해만 오지 않으면 괜찮다는 이기심의 소산이다. 검은 수첩 사건의 진실이 오래도록 은폐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마지막의 놀라운 반전 또한 그 때문이었듯이.


 이렇게 소설은 아주 재밌는 이야기이지만 비판의 가시들을 은밀히 지니고 있다. 누군가 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둔 압정처럼 뜻하지 않은 순간에 찔려서 이제는 그런 무관심과 방관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느끼도록. 그래서 말인데, 존 리버스가 페이션스(Patience Aitken)에게 쫓겨나는 것의 진실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런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인내(patience)는 다했다!'


 '너무 늦기 전에 올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이 소설에 짙게 서려 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다간 다만 빼앗길 뿐이며 나를 버리고 모두를 위해 나설 때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주제를 줄기로 하여 말이다. 내 자리에 대한 불안이 여전하고 적폐 청산이 시대적 사명이 된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리 먼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 읽어보시라고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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