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트러몰로지스트 1 - 괴물학자와 제자
릭 얀시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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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침공'으로 우리나라에도 이제 제법 이름을 알린 미국 작가 릭 얀시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찾아왔다.

 '몬스트러몰로지스트(Monstrumologist)'가 바로 그 장본인. 얼른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괴물학자'가 되겠다. 제목 그대로 한 괴물학자와 열 두살 나이의 조수가 주인공인 19세기의 미국을 무대로 한 이야기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였던 전작과는 전혀 다른 크리쳐 물이다. '페니 드레드풀'이란 미드가 있는데, 이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취향 저격인 작품이었다. '페니 드레드풀'처럼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으스스한 공포물을 참 좋아하는데, '몬스트러몰로지스트'는 그런 내 취향을 정확하게 만족시켜주었으니까 말이다. 정말 손에 들자마자 끝까지 정신없이 읽었던 것 같다. 무더운 여름밤을 잊기에 제 격이지 싶다.



 소설은 실제 릭 얀시가 등장하여 한 요양원의 원장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릭 얀시는 원장에게서 누군가가 쓴 노트 열세 권을 받게 된다. 그것을 쓴 사람은 '윌리엄 제임스 헨리'라는 사람으로 자신이 1876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누구도 믿지 않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람의 신분을 증명할만한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물론 친척도, 태어난 고향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알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 노트로 조사를 좀 해 달라고 릭 얀시에게 노인이 직접 쓴 공책들을 준 것이었다. 직접 봐도 되었을텐데, 굳이 소설가 릭 얀시를 부른 것은 노인이 12살 때 겪었다고 노트에 기록한 이야기들이 전혀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가라면 일반인보다 좀 더 잘 정보들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의뢰하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 노트에 적힌 이야기가 '몬스트러몰로지스트' 본편이다. 이런 구성은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이나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소설이 나오던 시기에는 흔한 것이었다. 이처럼 그 때의 장르 소설은 주로 누가 남긴 수기 혹은 목격담 같은 것으로 소개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 헨리' 이름 자체에세도 릭 얀시의 농담이 느껴진다. 심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윌리엄 제임스와 작가로 이름이 드높은 헨리 제임스, 그렇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형제의 이름을 하나로 합쳐 놓은 것이니까 말이다.


 본편으로 넘어가면, 윌리엄 제임스 헨리가 12살의 나이로 등장한다. 그는 부모를 모두 다 잃고, 아버지가 살아 생전 충실히 모시던 괴물학자 펠리노어 워스롭의 조수로 지내고 있다. 하루는 도굴꾼 에라스무스 그레이라는 노인이 찾아온다. 자신이 무덤을 도굴하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며 가져온 것이다. 그레이란 노인이 탁자에 놓은 것은 두 구의 시체였다. 하나는 10대의 어린 소녀였고 다른 하나는 성인 남자의 시체였다. 성인 남자는 마치 엄마가 자식을 껴안듯이 어린 소녀를 칭칭 감고 있었는데 하나가 정말 이상했다. 머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녀의 얼굴은 반쪽이 사라져 있었다. 무언가에게 이빨로 물어뜯긴 것이었다. 괴물학자 워스롭은 남자가 소녀를 잡아먹고 있었다고 말한다. 헨리는 의문을 가진다. 머리가 없는데 어떻게 잡아먹는단 말이지? 그 의문은 곧 풀린다. 남자에겐 입이 있었다. 바로 배가 입이었다. 남자가 소녀를 감싸듯 칭칭 감고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배로 소녀를 먹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헨리가 남자로 생각했던 것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보는 괴물이었다. 워스롭은 헨리에게 이름을 알려준다. '안트로포퐈기'라고. 한없이 잔인하고 사람을 잡아 먹는...



 그런데 헨리 못지않게 워스롭 또한 충격에 빠진다. 안트로포퐈기는 미국에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 남쪽 바다에서만 서식한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올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에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언제 처음 여기에 왔는지도 중요했다. 왜냐하면 안트로포퐈기가 자궁이 있는 자리에 뇌가 있어 번식이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두 마리 정도는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 여기로 왔는지 알아야 어느 정도의 숫자가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안트로포퐈기는 무리를 이루며 산다. 본거지를 찾아내 박멸하지 않으면 워스롭과 헨리가 사는 뉴예루살렘은 엄청난 위기에 처할 것이다. 워스롭은 자신과 똑같이 괴물학자였던 아버지의 기록에서 바너 선장이라는 인물을 찾아낸다. 무려 20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사람인데, 알고 보니 그가 바로 안트로포퐈기를 미국에 싣고 온 자였다. 그것도 위스롭의 아버지의 의뢰로.


 그 사실은 워스롭에게 정말 커다란 충격을 준다. 아버지는 왜 이토록 위험한 존재를 일부로 미국으로 가져온 것일까? 그 의문을 제대로 풀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안트로포퐈기가 처음 발견된 공동 묘지 근처 교회의 목사관에서 어린 자녀 네 명을 포함한 일가족이 안트로포퐈기에게 처참하게 살육된 것이다. 이대로 사태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게 된 워스롭은 자신과 똑같은 괴물학자이자 안트로포퐈기 토벌에 일가견이 있는 존 컨스를 부른다. 그러나 그는 안트로포퐈기를 상대하는 능력은 탁월해도 인간성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 자신의 목적만 중요하지 타인의 목숨은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친구 워롭스가 아끼는 헨리의 목숨이라 해도.


 이야기는 그렇게 안트로포퐈기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것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거기서 드러난 진실 앞에서 워롭스는 마침내 의문을 풀게 된다. 그것도 충격 속에서...


 '안트로포퐈기'는 다른 땅에서 흘러든 존재로, 그렇게 이주자들을 비유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인간과 전혀 다른 신체 구조와 인간을 잡아먹는 그들의 문화는 신체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낯설 수밖에 없는 이주자들의 모습을 많이 과장한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서식하는 땅으로 먼저 가 어떤 목적을 갖고 배에 태워 데려왔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흑인 노예'의 면모도 갖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 이주자들이 예측과 통제를 벗어났을 때 갖게 되는 두려움이 바로 이 소설에 선연하게 드리워진 공포가 아닐까 싶다.



 통제와 예측을 벗어난 이주자들을 상징하는 안트로포퐈기를 대하는 소설의 태도는 인물을 중심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존 컨스처럼 무조건 제거하고 보자는 식이다. 다른 하나는 워스롭처럼 그럴수록 더욱 알려고 애쓰자는 식이다. 물론 릭 얀시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후자다. 그랬기에 소설의 주인공을 괴물에 대해 공포라는 비합리적 감정이 아니라 관찰과 검증이라는 합리적 태도로 다가가는 '괴물학자'로 삼았을 것이다. 아예 소설에서는 워스롭이 헨리에게 존 컨스에게 절대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까지 한다. 여기서 작가가 왜 워스롭과 헨리 모두가 비슷한 처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드러난다. 헨리는 부모를 잃었다. 그는 아주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워스롭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어렸을 때,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애정을 받아본 적 없는 아주 외로운 소년이었던 것이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사에서 늘 혼자 지내야만 했던 워스롭은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만이 가장 커다란 소원이었으나 괴물 연구에 지나치게 빠져버린 그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늘 아픔과 자신이 못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자책에 빠져 있어야 했다. 존 컨스에게조차 워스롭이 괴물학자가 되어 이토록 열성을 다해 일하는 까닭이 실은 아버지의 인정을 그렇게라도 해서 받아보려는 것 아니냐는 빈정거림을 당할 정도로. 헨리는 우연히 발견하게 된 워스롭이 어릴 때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그런 워스롭의 모습을 본다. 헨리는 워스롭이 자신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를 전보다 더욱 잘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 머리 위에 우뚝 서서 성인의 권위를 휘두르며 잔뜩 주눅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 나는 작고 어린 외로운 소년을 보고 있었다.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불쌍한 소년, 아버지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며 편지를 쓰던 어린 소년. 그러나 그 애정에 대한 보답으로 아비가 보내온 것은 거부라는 치욕감뿐이었다. 편지는 뜯어 보지도 않은 채 낡은 트렁크 속으로 던져져 잊혔다. 이 얼마나 이상하고 비극하고 운명의 아이러니인가! 우리는 종종 긴 세월이 흐른 뒤에 아무 잘못도 없는 이들에게 복수를 꾀하곤 한다. 과거에 우리를 괴롭힌 이들과 똑같은 죄악을 반복하면서, 그렇게 나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끝없이 보존하고 영속시키는 것이다. 그의 부친은 그의 간청을 묵살했고, 그래서 그는 나의 간청을 묵살했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가장 기묘한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바로 그였다.(p. 137)


 워스롭도 겉으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소설이 후반으로 나아가며 더욱 많이 드러내게 된다.


  바로 이런 식의 연대가 실은 릭 얀시가 작품을 통해 정말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이주자들의 존재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말이다. 겨우 인간의 모습을 찾았던 이주자들이 어느새 점점 '안트로포퐈기'가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들이 우리와 공존해야 할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들은 더욱 빨리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린 '안트로포퐈기'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안트로포퐈기가 되어버린 그들에게 우리 역시 인간이 아니라 그저 잡아먹어야 할 먹이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먼저 인정해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역시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리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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