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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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나와 아무래도 나란히 놓고 비교하게 되는 윤성희의 '웃는동안'과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 두 소설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모두 버거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윤성희의 '웃는 동안'에 나오는 인물들은 사물이 되려하고,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에 나오는 사람들은 동물이 되려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현대화가 진전될 수록 자기 반성과 성찰이 가능한, 즉 인간과 같은 '대자적 존재'는 욕망의 발현과 실현에 있어 즉각적인 실천이 가능한 '즉자적 존재'가 되고싶어 하는 경향이 더욱 짙어진다고 말한 바 있다. 한 마디로 퇴행의 욕망이 증식한다는 것인데 두 작품은 그런 사르트르의 말이 맞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듯 하다. 그러나 이런 퇴행을 단순한 바람, 다시 말해 삶이 너무 복잡하고 피곤해서 그저 단순하고 쉽게 살고 싶은 마음에 가지게 된 소망 같은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즉자적 존재로의 퇴행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현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장애가 되어 우리 자신을 압박하여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쥐를 몰아가듯 했기 때문에, 그렇게 낭떠러지 가장 자리로 내몰린 결과라는 것이다. 고무공을 손으로 억지로 누르면, 고무공은 압력에 완강히 저항하며 제 모양을 유지하려 버티다가 그것이 안되면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버둥댄다. 그 버둥대는 육체가 향하고 있는 곳이 퇴행인 것이다.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이야 말로 이것을 적나라하게 이것을 보여 준다. 소설은 동물원에서 동물 탈을 쓰고 관람객 앞에서 정말 동물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진짜 동물은 관리와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보다 값싼 비용으로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대치한 것인데, 이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의 가치가 동물 보다 더 추락해버린 것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주인공 역시 고릴라 탈을 쓰고 고릴라 우리 안에서 고릴라처럼 행동하는데,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구조 조정 당하고, 집에서 놀면서 마늘을 까거나 인형 눈알 붙이는 부업을 전전한 끝에 거기까지 내몰린 것이었다. 그렇게 동물이 되는 것은 사회라는 고양이가 쥐인 주인공을 막다른 골목까지 내 몬 끝에 다다른 종착지였고,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동물적인 능력만을 체력 테스트를 통해 증명하고는 동물이 되었다.(동물원에서 동물로 일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무원 시험보다 더 어렵고 엄격한 체력 테스트에 합격해야 동물로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굿바이 동물원'은 퇴행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이며, 이들은 그 퇴행의 압박 속에서 오직 동물이 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참으로 아이러니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한다. 


 동물원에 있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 구실 같은 건 안 해도 돼. 솔직히 이 나라에서 사람 구실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냐고. 난 거의 없다고 봐. 하지만 동물원은 달라.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동물원이야. 웃기지? 내가 그랬잖아. 사는 게 코미디라고. 자, 한잔해. 어때, 여기 죽여주지? (p. 214)


 한 편, 퇴행의 욕망은 원인을 가지고 있는 발현이기에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그러한 욕망을 양산하는 사회가 진정 어떠한 민낯을 가지고 있는지 오롯이 비쳐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들이 동물로 일하는 동물원은 단순히 노동의 현장만이 아니라 사회의 진실한 모습이기도 하다. 사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동물원인 것이다. 사람을 포기하고 오로지 동물처럼 살아야 간신히 버틸 수 있는 동물원. 소설은 그것을 설득력있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다보면 저절로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 사회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툭튀'한 것은 아니니, 분명 어딘가의 것을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우리는 그 모델을 잘 알고 있다. 바로 근대가 창출한 서양 문명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 근대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근대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한다면, 한 마디로 인간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왜나하면 중세까지 종교의 그늘 속에서 귀족과 성직자의 재산 수호와 증식을 위한 농노의 의미 밖에는 가지지 못했던 보통의 인간들이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들 역시도 지배자들과 똑같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고귀한 존재이며 자신 속에 잠재된 가능성을 이성을 통해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에 빗대어서 다시 말해 본다면, 근대란 동물원에서 동물로 살던 인간을 그 울타리의 문을 열고 이제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방시켜 준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실을 먹을 수 있었던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타고난 피가 아닌 실력이 주가 되었기에 이제는 귀족 혈통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산업 자본가만 근대의 햇살로 영근 과실을 마음껏 섭취했을 뿐, 그들을 제외한 대부분 서민들의 처지란 중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산업혁명 초기, 면직 산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자 영국은 경작지를 목축지로 점점 더 많이 바꾸는 인클로저 운동을 시작했고 그로인해 다수의 농민들은 경작지를 잃고 살던 곳에서 도시로 쫓겨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했다. 그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긴 노동 시간과 그에 비해선 턱없이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말이다. 9세 미만의 아이들 조차 어른들 못지 않게 공장에서 12시간 이상을 일했다. 그래서 엥겔스는 이런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이들만은 살인적인 노동 조건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 '공장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만큼 사람들의 삶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다만 귀족의 농노에서 공장의 노예로 소속이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귀에 근대가 외친 '천부인권'은 한낱 공염불에 불과했다. 소설의 주인공 '김과장'(소설에 주인공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김과장'으로만 불릴 뿐이다. 주인공이 누구든지 가리킬 수 있는 김과장으로만 불린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상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그가 쓰기만 하면 그걸 쓰는 사람이 누구든지 똑같은 고릴라가 되는 탈을 쓰고 고릴라가 된다. 이것은 그대로 익명의 사람에서 익명의 동물로 전이되는 것과 같다. 그는 사회에서도, 동물원에서도 사회가 강제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한(고릴라 역시 주인공이 선택한 동물은 아니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결국 이 사실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또 동물원에서 동물로 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일하는 가짜 세렝게티가 아니라 정말 동물이 되어 살 수 있는 진짜 세렝게티를 염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곳은 정체성을 강요하는 철책이 없는, 오로지 자기가 선택한, 자신이 정립한 정체성만으로 살 수 있는 광할한 자유의 영토이다.)이 그랬듯이, 겨우 귀족의 동물원을 나와 곧장 자본의 동물원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수백년이 흐른 지금의 상황 역시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말이다. 중세 때, 사람들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기준은 이렇게 단순했다. 지금도 똑같다. 오로지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돈을 벌 수 없는 이들은 이제 사람 이하의 존재, 사물이 되거나 동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사람으로 남아있으려는 안간힘은 사실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벌려는 안간힘에 다름아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안간힘이라는 것이 더 처연하고 아프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돈이라는 것에 그 정도로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이 우스꽝스럽기짝이 없는 현실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웃는다. 그러고보니 퇴행을 보여주는 윤성희의 '웃는 동안'과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 모두 웃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웃음이 진짜 웃음인 것은 아니다. 보다 정확히는 '헛웃음'에 가깝다. 예전에 한참 유행한 개그인 최불암 시리즈를 들었을 때와 똑같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는 웃음. 아니,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저 웃음만 나오는데, 그렇게 웃는 자신이 또 어이가 없어서 웃게 되는 웃음. 바로 그런 웃음이다. 그저 그렇게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비웃음 같은 것. 한 마디로 '자조(自嘲)'.

 

 내 생각에 '자조'는 더욱 단단한 철창으로 우리를 가두고 오로지 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강요하는 지금 시대를 견뎌가는 하나의 방법이 된 것 같다. 조금 무리한 근거일지도 모르겠는데, 모든 TV 프로그램에서 예능이 대세를 이룬다는 사실이 '자조'가 돈 때문에 사람으로 살기 정말 힘든 이 시대에 그 때문에 더 활활 타오르기만 하는 우리의 광기를 참고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니체의 격언을 광범위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격언은 이러하다.

 '인간만이 웃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장 슬픈 동물이라 웃음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엔 반드시 따라붙는 부록 같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연민(憐憫)이다. 어쩌면 이 말은 틀렸을 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보내는 연민이 오히려 비웃음이란 형태로 나타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는 '굿바이 동물원'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행위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는 것'이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운다. 마늘을 까면서도 울고, 본드를 흡입하면서도 운다. 그렇게 울면서,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할 때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화장실을 찾았다가 모든 칸이 다 우는 남자들로 가득 차서 그냥 돌아나와야 했었던 때를 떠올린다. 우는 것은 그만이 아니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에게 울음은 마치 기본 사양처럼 장착되어 있다. 돈이라는 콧두레에 끌려가는 소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것은 그들 모두가 똑같은지라, 하나같이 소처럼 긴 목울음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는 것은 등장인물만이 아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우리 독자 역시 읽다가 얼핏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이 겪은 일이 꼭 그들만의 것은 아니기에, 읽는 이도 얼마든지 이미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겪을 수 있는 일이기에, 동병상련이 피워내는 물안개가 마음을 자욱하게 휩싸는 것이다. 그러다 마음 한 구석에서 시큰한 통증도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아프다.


 웃음은 견디기 위해서라지만 울음으로 집약되는 연민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소설은 퇴행을 다룬다. 퇴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참담하여 헛웃음이 난다. 때로는 한번 길게 내쉬는 한숨이 고달픈 현실을 달콤한 노래보다 더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듯이, 이런 헛웃음 또한 버틸 힘을 준다. 하지만 웃음, 그것밖에 없다면 소설은 독자에게 살아가려면 그저 자신을 자조하면서 잠시 현실을 잊는 것밖에 없다는 말만 들려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바로 이 눈물로 대변되는 연민으로 인해 우리는 그 보다 더 진정한 모습의 버틸 힘을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래, 이 소설엔 자조와 연민이 있다.


 '자조(自嘲)'가 오늘을 위한 것이라면 연민은 내일을 위한 것이다. 소설에서 연민은 오늘의 비극을 그치게 할 대안으로 기능한다. 어쩌면 작가 역시 자조가 가진 한계를 이미 깨달아 연민을 다시 소설에 누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조의 한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로든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조를 통해 힘든 오늘을 견디더라도 그 효과는 오직 자신에게 한정된다. 자조는 내몰림 끝에 나온 것이었다. 그 내몰림은 혼자라 자신을 압박해 오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막다른 골목에서 진정 빠져나오고 싶다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퇴행을 강요하는 강도를 약화시켜야 한다. 그러러면 함께 변화를 도모할 타인이 필요하고, 그렇게 되려면 타인과 이어져야 한다. 바로 그 연결, 매개의 역할을 연민이 한다.


 연민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남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건 바로 우리가 겪은 슬픔 때문이라고 말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와는 삶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간이 다른 동물들 보다 더 많이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것도 아마 니체의 말마따나 가장 슬픈 동물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슬픔은 가장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공감을 쉽게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나와 같은 슬픔을 겪고 있는 타인을 보면서 그 상황에 처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그래서 지금 타인의 처지를 쉽게 이해하게 되고 그 상황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그것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힘들지 잘 알고 있는 나는 저절로 그를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고 위로를 주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연민의 작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일한 경험이 불러 일으키는 공감의 확장. 그리고 그 공감을 통해 서로가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연대가 이뤄진다. 소설에 나오는 '마운틴 고릴라들의 모임' 그대로 말이다.


 주인공과 송과장의 관계처럼, 사람으로 있을 때는 이어질 수 없었던 관계들이 동물이 되어서는 이뤄진다. 그들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울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회에 내몰린 자신의 처지 때문에 울었고, 그런 경험 때문에 같이 내몰린 자의 눈물에 쉽게 공감하고 응답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진실된 교감은 오로지 그들이 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서로에 대한 연민이 진솔한 소통과 두터운 연대를 이뤄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조를 넘어 연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보도록 한다. 연민을 통한 이해와 배려가 비록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이 가짜 세렝게티 동물원에 갇혀 있을 지라도 영혼만은 창살을 빠져나와 저 무한의 하늘을 날아다니며 어디에 있는 타인이든 이어지게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강태익 작가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뭣이 중한데? 공간이 그토록 중요해? 이 육체가 창살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이 그렇게 대단히 차이나냐?"고.

 

 작가는 물론 아니라고 대답한다. 공간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정말 우리에게 자유가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와 같이 느낄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유는 바로 타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몸은 비록 가둘 수 있을지라도 마음은 절대 가두지 못할 것이라 한다. 동물 탈을 아무리 써도 동물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그 안의 나를 사람으로 봐주는 타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작가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고릴라 탈을 쓰고 행동할 때, 관람객들이 그를 진짜 고릴라로 알고 하는 행동의 묘사를 통해 거꾸로 드러낸다. 결국 우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기를 쓰고 동물원인 이 곳을 빠져나가려 하기 보다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배려를 통해 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이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뜻이다. 그랬기에 소설에서 주인공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굳이 진짜 세렝게티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 곳까지 찾아간 이들 역시 진짜 동물처럼 살게 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다. 멀리서도 자신을 여전히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던 덕분에.


 물론 이렇게 되려면 타인과의 연대를 가능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연민의 이랑을 마음 밭에 무던히도 많이 갈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한다. 남들에게 자주 연민을 느끼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우리의 어깨를 다독인다. 연민 그리고 슬픔이 오히려 당신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이다. 보다 더 사람답게 되기 위해 우리는 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설 막바지의 만딩고처럼 이 사회에 당당하게 '굿바이 동물원' 할 수 있게 만드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강태익 작가의 진심어린 조언이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은 지금, 난 그 말을 깊이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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