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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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덫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원해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태어난 순간의 육체와 환경 또한 내 선택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처음 눈을 뜨는 그 순간, 내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었고 내게 허락된 것은 오직 지금 주어진 모든 것에 적응해야 한다는 강요밖에 없었으니, 우연히 덫을 밟아버린 그 순간에 발목이 단단히 붙잡혀 운명이 고정된 불쌍한 토끼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래도 살아왔다. 비록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덫의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였으나, 그 유예의 시간이나마 최선을 다해 의미롭게 채워보려 애썼다. 그나마 따뜻한 봄날의 숲속에서 뜯어먹을 풀들이 지천으로 널린 곳에서 덫에 걸린 이들은 그래도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밟은 덫은 하필이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눈밖에 없는, 매섭게 추운 겨울의 황량한 벌판이었다. 먹을 것은커녕 의지할만한 무엇도 없었다. 그런 자에게 삶은 목에 걸린 올가미로 느껴진다. 내 의지로 주도하는 것보다 억지로 끌려가야 할 일이 많은 삶. 그렇지 않아도 ‘헬조선’, ‘오포세대’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지 오래인 지금. 애당초 그리 폭이 넓지 않은 올가미를 목에 두르고 태어난 나 같은 사람들은 하루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죄어오는 올가미에서 날마다 질식의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도선우의 소설, ‘스파링’의 주인공 장태주의 독백에 공감하게 된 것은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질식의 공포를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서 비로소 질식의 공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진정한 원천을 확인했는데 그것이 바로 덫이었다. 물론 덫은 하나의 비유다. 그것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편입하게 된 타인의 질서를 나타낸다. 내 뜻과 상관없이 나를 이물(異物)로 만드는 그런 질서다. 그것은 내가 그 질서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내 의견과 이해를 용납하지 않으며 오로지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배제될 것인가만 허용하기에 더욱 덫을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속과 배제를 가르는 기준이 단 하나, 바로 나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타인의 질서는 나의 주체성을 온전히 죽여야만 나를 진정으로 편입시킨다. 그 때라야 나는 더이상 이물(異物)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러하니, 탈주 아니면 죽음만이 남아있는 덫만큼 그런 질서의 정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덫이 장태주에게 질식의 공포를 안긴 원천이었으며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이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여고생의 사생아로 그것도 화장실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척박한 곳의 덫에 걸려버렸다고 할 수 있는 장태주는 그런 점에서 나와 유사했고 그랬기에 갈수록 강고하고 교묘한 덫을 만나 벌어지는 그의 투쟁과 패배의 이야기는 내게 보다 살갑게 다가왔다. 그래, 세상에는 수 많은 덫이 있다. 내 포기와 방관을 강요하고 회유하는 덫들. 자라면서 보다 넓은 사회로 나아갈수록 처음엔 선명했던 그 덫들이 점점 더 교묘하게 은폐되거나 작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지 않을수록 더 강하게 내 발목을 붙잡는다는 것도.


 장태주가 만나는 덫들도 그랬다. 그는 크게 모두 세 개의 덫을 만난다. 초등학생이 되어 만나는 오재호, 중학생 때 만나는 재훈 그리고 프로 복서로 성공한 뒤 만나게 되는 한기영, 이렇게다. 처음의 덫은 오재호라는 한 개인의 모습과 장태주가 소중하게 기르는 새 ‘알리’를 죽이는 폭력으로 단순하고 선명하게 장태주 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장태주는 맞서 싸울 수 있었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어 맞닥뜨린 재훈의 덫은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조직이었고 게다가 폭력마저 구조적으로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태주는 속절없이 희생자가 되어 버렸다. 그는 자신이 재훈에게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모른다. 주체성을 포기하라는 달콤한 유혹을 거부해버린 그는 강고한 타인의 질서에 의해 조용하고 은밀하게 배제된 것이다. 결국 그는 소년원으로 가게 되고 거기서 만난 담임의 ‘타인의 질서에 강요되지 않으려면 먼저 자신의 질서를 만들어라’라는 말에 감화되어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학교와 보육원을 떠나 자신을 가장 잘 증명할 수 있는 프로 복서의 길로 들어선다. 재훈까지는 그래도 장태주가 싸워야 할 상대가 명확했다. 하지만 프로 복서로 성공한 뒤에 만난 한기영의 덫은 너무나도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어 대적해야 할 상대가 과연 누구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형체 없는 상대를 향해 어디로 어떻게 주먹을 뻗어야 할 지조차 모른 채, 그는 가중되는 혼란과 고독 속에서 끝내 자기 파멸의 길을 선택한다. 어쩌면 이것은 패배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덫에서 잘 빠져나오더라도 언제나 더 강하고 간교한 덫이 날 사로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 요소가 과연 그럴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결말의 장태주 기분이다. 파멸의 정점이랄 수 있는 방어전 패배의 기자회견 장에서 그는 부재(不在)를 본다.


 빛이 모두 소진되었고 어둠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 자리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 나는 해가 진 그늘 속에 홀로 핀 해바라기처럼, 빛이 사라진 곳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어느 곳을 봐야할 지 알지 못했다. 어느 곳을 바라봐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p. 355)


 이 부재(不在)로 인한 무지(無知)는 장태주에게 과연 비극적인 것일까? 얼른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소설의 처음이 바로 그 부재를 목격한 다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소설을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말에서 이제 어디를 봐야할 지 모르게 된 장태주가 다음과 같은 담임의 권고를 따라 자신이 진정 어디를 봐야할 지 알기 위해 지금까지의 자기 인생을 차분히 되짚어 생각해 보는, 그렇게 일종의 복기(復棋)의 과정이라고.


 “때론 생각이라는 걸 안 하고 살면 그게 제일 편한 것 같지만, 또 막상 자기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고 살면 명확히 제 세계를 구축하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휩쓸리게 돼. 문제는 그들이 세운 질서가 네가 원하는 질서와 다를 수도 있다는 거야. 너한테 무조건 불리하고, 너한테 무조건 억울한. 이해가 돼?” (…) “그걸 알고 뒤늦게 상황을 바꿔보려고 해도 그땐 쉽지 않아. 처음에 잘 생각해서 행동했을 때보다 적어도 만 배 이상은 힘이 들겠지.”(p. 178)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 끝에서 독서를 끝내지 말고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와 읽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결말의 장태주가 단순히 패배한 것은 아니며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겐 더 다행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담임도 생각을 강조했지만, 덫이 갈수록 은폐되고 교묘하게 작동하는 주된 이유는 당하는 이로 하여금 생각을 못하게 하는데 있다. 타인의 질서에게 있어 주체성의 발현이자 의지를 창출하고 행동까지 이르게 만드는 한 개인의 생각은 위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우리는 재훈의 조직은 구성원 모두가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고 한기영의 관리 또한 장태주가 제대로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구성원들과 장태주 모두 무엇이 정말 자신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채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타인의 말을 순순히 납득해 버린다. 장태주의 주먹은 자기 주체성의 표현이었으며 타자의 질서에 대한 사유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무책임과 방관 속에 진정한 자신을 포기하려는 작태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이다. 덫에서 빠져나오려는 토끼의 강렬한 몸부림과도 같은.


 하지만 복서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장태주는 그만 그 화려함과 달콤함에 도취되어 비슷한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재훈과 같은 길을 걷고 만다. 강력한 힘과 돈으로 자신이 질서의 중심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면 생각이란 게 없어도 원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커다란 패착이었다. 패착이었다는 것은 그가 그렇게 질서의 중심으로 나아갈수록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들인 아라, 담임, 누나 그리고 할아버지가 점차 사라진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거꾸로 힘이나 재력이 아니라 사유야말로 덫을 푸는 열쇠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에겐 타인의 질서와 결별이 있어야 했다. 결연한 단절을 통해 자신으로 온전히 돌아와야 했다. 취생몽사(醉生夢死)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의 머리로 또렷이 생각하기 위해. 소설 후반에 자기 파멸을 초래한 모든 폭행과 기벽들은 그런 단절을 위한 몸짓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 앞에 모든 것이 텅 비어버린 그 순간, 나는 감히 태주가 홀가분한 행복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랬기 때문에 비로소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는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게 만드는, 자신이 정녕 어디를 봐야하고 무엇을 붙잡아야 할 지 알게 만드는 그런 깨달음을.


 남들이 나보다 먼저 나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도록 방치하는 것은 종종 그 자체로 위험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꾸만 내가 모르던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만들어지고 또하나의 나로 자리잡히게 되면 결국, 길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내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급기야 나조차 내가 누구인지 헷갈릴 수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서서히 나를 잠식하고, 그러다보면 기어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내가, 정작 진정한 내 모습이기를 바랐던 나를 온전히 삼켜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p. 11)


 두 번 읽게 된 이 말은 내게도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 역시 세번 째 덫에 걸린 태주와 상황과 그리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는데 나는 이 캄캄하고, 그 어둠조차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한 미래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고 내가 안심하고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는 더욱 더 작아져만 갔다. 세상에 대한 구토와 세상이 내리누르는 육신과 영혼의 통증을 낮과 밤처럼 오고가는 일상. 분노하는 것에도, 이해하는 것에도, 타협하는 것마저 이미 지쳐버렸다. 쌓여가는 울화, 차오르는 우울, 번져가는 무기력 속에서 몽유병 환자와도 같이 그저 관성과 타성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맞다. 나는 사각의 링에 내던져진, 그러나 그로기 직전의 선수였다. 하지만 상태는 태주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나는 태주보다 좋은 동체 시력도 없고 펀치도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은연중 이런 습성에 길들여 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태주처럼 문제와 맞써 싸우며 정면 돌파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덜 힘들고 귀찮은 길만을 찾아갔던 것이다. 타인의 질서에 대한 갑갑증을 누구보다 심하게 느꼈지만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게도 단 한 번도 그것과 단절하여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려고는 하지 않고 오히려 타인의 질서에 보다 더 잘 융화되도록 애쓰기만 했던 나였다. 나는 태주의 말에 따르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이기를 바랐던 나를 온전히 삼켜버린’ 상태였다. 태주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진실된 나의 초상을 똑똑히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비록 패배가 예정된 결말이었을지라도 왜 단 한 번도 당당하게 주먹을 날려볼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 목에 걸린 올가미가 적다는 것도 알고 내가 약하다는 것도 알기에 더 커져버린 불안과 공포 때문이었다. 나는 승부의 결과가 이미 조작되어 있는 사각의 링에 오른 선수와 마찬가지였다.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인용한 말에 꽤 둔중한 울림을 느꼈고 이런 깨달음을 얻도록 만든 태주의 패배가 실은 구원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간절히 믿고 싶었다. 사유야말로 내 발목을 붙잡은 덫을 여는 열쇠라는 사실은 내게 지금 가진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는 위안과 희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태주의 복기(復棋)는 내게 크게 두 가지를 주었다. 하나는 현상(現象)된 물리적인 외양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는 경고였고 다른 하나는 제 아무리 강고하고 간교한 덫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유는 결국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사실 그 덫이 그토록 강력하게 된 것은, 소설 속 담임의 말마따나 바로 나 자신의 나약과 방관 그리고 무책임을 거름으로 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라면서 말이다.


 이로써 내 상황을 좀 더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덫이라는 물리적인 실체에 너무 좌지우지되었다는 것과 그렇게 현상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제대로 된 성찰없이 살다보니 그만 사는대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미셀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자기 관리와 계발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관점에 따라 늘 모자르고 부족하기 마련인 개인의 모습을 오로지 결점으로 인식케 하여 제 쪽에서 먼저 사회의 부단한 요구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맞추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한 바 있다. 나도 이와 똑같았다. 그들의 질서를 깊이 내면화하여 살다보니 그들의 시각으로만 나를 보게 되었고 그 기준에 잘 부합하지 않는 내 모습에서 더욱 더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달리 보면 얼마든지 긍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태주역시 패배의 경험을 통해 타인의 삶에 대한 일면적(一面的)이었던 시각을 다면적(多面的)으로 변화시킨다. 내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이리라. 불안과 공포는 일면적(一面的)인 시야일 때 더욱 증식하는 법이니까. 물론 다면적(多面的)인 시야는 외양과 현상에 굴하지 않는 부단한 사유만이 가져다 줄 수 있다. 사유란 송곳과 같아서 모든 이의 개체성(個體性)을 지우고 동일한 관점과 사고를 가지도록 만드는 덫의 장막(帳幕)에 맞서 거기에 다양한 구멍을 뚫고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시야를 갖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게 나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달리 바라볼 여백을 갖게 만들 것이며 내가 정말 두려워하던 것들도 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인식과 함께 반대로 거기에서 내 삶에 유용한 것마저 찾아내게 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덫 또한 나 자신을 시험할 단련의 계기로 여기게 이끌 수도 있다.


 문득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스파링’으로 되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스파링’은 실전과 같은 연습 경기를 뜻한다. 아무리 실전처럼 치뤄져도, 실전은 아닌 것이다. 소설에서 스파링은 한 번 나온다. 그런데도 제목은 ‘스파링’이다. 아마도 이것은 작가가 지금의 태주에게 ‘넌 아직 실전을 치르지 않았어. 지금까진 모두 연습 경기일 뿐이야. 모든 것을 깨우친 지금이야말로 실전이니, 열심히 해 봐!’하고 보내는 위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내게도 해당된다. 나마저 이 소설을 다 읽고난 지금 제목에서, 지금까지 환영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을 오로지 실체로만 생각하여 지레 겁먹고 피하기에 급급했던 나와 작별하고 이제라도 제대로 한 번 맞서 보라는 작가의 응원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올가미는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다. 두려움에 주눅이 들어 싸움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비겁한 나를 정당화시키려 만들어낸 환영일지도 모른다. 굴레는 보고자 하는 눈에서만 존재하는 것. 사유의 펀치는 휘두르는 것만큼 굴레를 지우고 나의 자유와 가능성을 확장시킬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성복 시인도 자신의 시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마음은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으며 아무도 그에게 고삐를 맬 수 없다’고. 지금 이 순간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 부단히 계속될 사유의 훈련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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