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후퇴 - 불신과 공포, 분노와 적개심에 사로잡힌 시대의 길찾기
지그문트 바우만.슬라보예 지젝.아르준 아파두라이 외 지음, 박지영 외 옮김 / 살림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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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는 후퇴하고 있다. 누군가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과거의 것들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세계화를 찬양한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이주민을 막으려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그기 바쁘다. 자신의 이익을 조금 손해 보더라도 인류 전체의 공영을 위해 힘을 쓰던 국가들은 이제 빠르게 그런 움직임을 걷어들이고 자신의 주머니가 얼마나 채워져 있는지만 신경쓰고 있다. 양극화가 도래했고 빈익빈 부익부가 흑사병처럼 거세게 퍼져나가고 있으며 인종주의가 부활하고 외국인 혐오가 증가하며 가부장주의가 활개를 친다. 시대적으로 한 물 간 것들이라 여겼던 것들이 무덤에서 부활하여 어느새 우리 옆가지 찾아와 버린 것이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당선은 이러한 거대한 후퇴를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가 되었다. 브렉시트는 유럽 연합으로 대표되는 세계화에 대한 거부였고 트럼프 당선은 포퓰리즘의 복권이었다. 그 두 사건을 많은 이들이 충격 속에 받아들였고 도대체 이 시대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궁금해 했다.


 이런 우리의 의문과 불안을 알고 전 세계의 유명한 지식인들이 나섰다. '거대한 후퇴'는 세계적 석학들의 지금 시대에 대한 진단이자 이러한 난국을 파국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안의 제시로 가득한 책이다. 



 제목의 '거대한 후퇴'는 칼 폴라니의 유명한 책인 '거대한 전환'에서 따온 것이다. '후퇴'란 말은 사회 발전과 진보로부터 멀어지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쓴 것이다. 올리버 나흐트바이란 학자는 이를 두고 '퇴행하는 현대화'라 부르기도 했다. 칼 폴라니는 놀랍게도 오늘 날의 이 후퇴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시장경제사회가 되면 분명히 거기에 대해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라 내다봤었다. 모든 것이 시장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에 반대하여 국가가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바라게 되고 그리하여 국가 주도의 복지 국가로 변해가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즉, 어떤 하나가 지배적인 상황이 되면 필연적으로 대항 운동이 일어나는데, 알고 보면 그 대항운동이란 사실 반동 운동으로 방어적으로 과거로 회귀 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국가 주도의 복지 국가도 당연히 반동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신자유주의다. 복지국가의 전반적인 축소와 사회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모든 국가적 개입에 대한 공격을 기조로 하는.


 이런 신자유주의가 우리 시대를 지배한 것도 오래되었다. 자연히 이제 거기에 대한 대항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2011년에 일어난 월가 점령이 대표적이다. 지난 겨울 우리나라의 촛불 집회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탄생도 세계적으로 보자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 기대어 오로지 제 배만 채울 줄 알았던 체제의 기득권 세력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의 썰물 속에 깨끗이 쓸려가야 할 적폐세력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무덤에 있어야 할 존재들을 좀비처럼 불러내게 된 것은 이전과 다르게 변화가 담아야 할 규모는 전 세계적으로 커졌는데, 아직 그 규모에 걸맞는 이념과 규범 체제를 마련하지 못한 데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은 전 세계적 규모의 일종의 아나키 상태라 할 만하다. 시대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려주는 좌표가 아직 미비하다 보니 기억 속에 늘 미화되기 마련인 과거의 것들이 과장, 왜곡 되어 정말 좋은 것으로 착각하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귀의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브렉시트요, 트럼프 당선이었다.


 그렇다고 힐러리 클린턴이 대안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더 끔찍한 선택일 수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유명한 페미니스트 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사실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무엇보다 페미니즘이나 인종 차별 반대주의 그리고 성소수자 운동 처럼 현재 신사회운동의 주류가 월가와 실리콘 밸리 그리고 헐리우드와 연합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런 식으로 인지 자본주의 즉 금융 세력과 손을 잡는 바람에 이러한 운동들이 오히려 사회 보장을 후퇴시키고 제조업과 중산층의 삶을 파괴해 온 정책들이 마련되고 집행되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그런 움직임을 진보 신자유주의라 부르고 클린턴과 오바마 정부로 구현되었다고 본다. 클린터과 오바마는 금융 세력과 손잡고 노동자의 생활 여건을 지속적으로 악화시켰다. 노조를 약하게 만들었고 실질 임금을 하락시켰으며 일자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맞벌이 가정이 증가하도록 이끌었다. 서브 프라임 사태에도 불구하고 금융 세력들이 조금도 상처입지 아니하고 계속 주머니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클린턴과 오바마의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흔히 진보라 불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착취를 교묘하고 은밀하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빼앗아 간 몫도, 노동자와 빈민의 삶이 무너진 정도도 그들이 더 컸다.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바로 그런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자신의 몫을 마구 앗아가기만 하고 조금도 돌려주려 하지 않는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였다. 힐러리 클린턴은 그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트럼프로 돌아섰던 것이다.


 페미니즘과 월 가는 힐러리 클린턴을 중심으로 완벽하게 담합한 유유상종 무리였다.(p. 87)


그들이 여성, 소수자 그리고 동성애자 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 노동자, 빈민들이 느끼는 삶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그런 운동들이 점점 부상하자 마치 사회가 꽤나 달라진 것처럼 포장되고 정작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받아야 할 관심조차 받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사회가 그 운동들에 주목하는 것은 자신이 받아야 할 관심을 가로채 버린 것과 같았다. 지금 미국 민중들이 보여주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적의는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의 중장년 여성들이 힐러리 클린턴 보다 트럼프를 더 많이 지지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현재도, 노후도 갈수록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여성 지위 향상 보다 경제적 지위 향상이 더 먼저였던 것이다.


 이 책에 있는 모든 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대안은 바로 이것이다. 진정한 좌익의 부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맑스의 계급 해방을 따르던 거대한 좌익은 무너졌다. 아무도 이제 계급 해방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석학들은 이제 거기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이념 아래에서 개별 운동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전체 운동의 맥락을 헤아리며 정말 필요한 목표를 향해 연대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맑스의 논문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를 너무 빠르게 바꾸려고 했다. 이제 세계를 자기비판으로 재해석하고 우리의 책임을 검토할 때가 되었다.(지젝, p. 360)


 그러고 보니 샌더스 선거 유세 때 흑인 여성들이 샌더스의 연단을 점거해 샌더스를 몰아내고 오로지 자신들의 목소리만 쏟아내던 광경이 생각난다. 샌더스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인 많은 이들이 그들을 비난했으나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흑인이고 여성인 점을 내세워 사람들이 '정치적 올바름'이 없다고 공격했다. 이런 식의 분리, 차이가 곧 적대가 되는 흐름을 막는 것이다. 시대의 거대한 후퇴는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그랬듯이 사람들에게 보다 본질적인 가치, 정의와 평등 그리고 공정에 관심을 갖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움직임을 이끌어 낼 것이다. 너무 낙관적인 전망인가? 그런데 지젝 역시 그런 전망을 갖는다. 그는 마오쩌뚱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며 글을 끝맺는다.


 하늘 아래 거대한 무질서가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다.(p.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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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01 0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라고 할까 그런 건 앞으로 가다가 뒤로 다시 돌아가기도 한다더군요 지금이 뒤로 가는 땐가 싶은 생각이 조금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 해도 예전 것이 정말 좋은지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 안 좋았기에 바뀌기도 했는데... 옛날 일이기에 좋게 여기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릴 때는 좋았는데,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감상에 빠지지 않아야 할 텐데...


희선

오드득 2017-08-10 19:37   좋아요 1 | URL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라는 말씀에 저 역시 동의해요. 아마 기성 세대들이 박정희 시대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것도 그와 연장선상에 있을 거예요. 프로이트는 이런 것을 두고 퇴행이라고 부르더군요.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이 클수록 어린 시절 처럼 자신이 아무 걱정 없이 보호받을 수 있었던 과거가 대비되어 더욱 좋은 것으로 부각되고 현실의 고난을 무시하거나 거기서 달아나기 위해 미화된 과거에 스스로 취한다고 말이죠. 퇴행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과거든, 현재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는 게 보다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천 명의 눈 속에는 천 개의 세상이 있다 - 세상을 보는 각도가 조금 다른 그들
가오밍 지음, 이현아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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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두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하지만 

가슴속에는 모두 다른 마음

 각자 걸어가고 있는거야

 아무런 말없이 어디로 가는가

함께 있지만 외로운 사람들


- N.EX.T '도시인' 중에서

 범죄 소설을 즐겨 읽는다.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독서는 아니라고, 딴엔 인간 이해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라고 은근히 정당화 시키고 있다. 살면서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중엔 내가 가진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런 줄 알았는데 실은 저런 인간인 게 밝혀지는 반전을 선사한 이들도 다수였다. 사람은 양파껍질과도 같이 이 정도면 제법 다 파악했겠거니 싶다가도 또 전혀 새로운 유형이 나타나 내 입을 떡 벌리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러니 알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한 보다 많은 유형의 인간을 만나고 싶었다. 범죄 소설은 거기에 제법 유용했다.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갖가지 형태의 인간들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소시오패스, 싸이코패스 까지도. 거기다 범죄를 매개로 한 것이라,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음험한 성격이나 욕망이 적나라하게 발현되기 마련이라서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중국인이다. 이름은 가오밍.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저 사람에 관심이 많아서, 저마다 얼마나 다른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 그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나와는 다르게, 픽션이 아니라 실제의 사람들을. 그것도 평범한 이들이 아니라 마음에 커다란 병이 있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을. 누가 원한 것도 아닌데, 자신만의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시간 여유가 생기는 대로 족족 중국 전역의 정신병원과 공안부 및 유관기관들을 찾아가 그들을 인터뷰했다. 이번에 나온 '천 명의 눈 속에는 천 개의 세상이 산다'는 바로 그 기록이다. 한 아마추어가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위해 집념과 끈기로 이루어낸 산물이다.



 여기에는 그렇게 만난 36명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그것을 모두 6장에 나눠 담았다. 사람들이 정말 다양하다. 우리가 흔히 다중인격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남들이 귀신에게 씌었다고 할 정도로 다른 사람을 똑같이 모방하는 여자도 있으며 매리 셀리의 소설에 나오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죽은 자를 되살리겠다며 시체를 반복적으로 훔치는 남자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는 이런 경우 흔히 그들이 어떤 망상이나 우연히 갖게 된 충동 때문에 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고 나름 꽤나 논리 정연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위도 그들의 입장에선 해야 할 이유가 충분한 합리적인 행위였다. 저자는 자신의 판단은 가급적 접어둔 채로 그들의 육성 고백을 최대한 담아낸다. 그것도 자신에 대해서 차분하게 충분히 설명하기 때문에 읽으면서 이들이 예외가 아니라 그저 나와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받아들이는 태도가 좀 다른 보통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니 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점차 납득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육체에 갇혀 있다. 나는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세계를 이렇게 보고 있지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내가 그들의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내가 보는 그대로 그들도 보고 있겠거니 추정할 뿐이다. 그 추정을 살면서 배운 온갖 지식을 근거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진실로 과연 그럴까? 혹시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자신이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인공 지능이 만든 가상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별안간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실은 타인들에게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다. 나만 그럴까? 많은 이들이 한 번은 나처럼 남도 나와 같은 세상을 보고 있는지 궁금증을 가지지 않았을까? 타인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어 불안도 느껴보지 않았을까? 헤겔에 따르면 우리에겐 본래적으로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한다. 인정 욕구가 하나의 본성처럼 자리잡은 것은 어쩌면 내 인식이 철저하게 내 육체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과 불안함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정이란 이름으로 타인에게로 끊임없이 가 닿으려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을 남도 같이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이 책도 저자의 그런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타인은 어떻게 세계를 보고 있을까? 과연 그들도 나처럼 보고 있을까?' 이 질문에 보다 확실한 대답을 얻고자 그는 평범한 시야에서 가장 벗어나 있는 이들의 시선까지 알려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외로움이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어떻게 하든 결국 '나' 혼자구나 하는 생각. 마주 보는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 것도, 이런 상념을 일으키는 것도 오직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 분명 천 명의 눈 속엔 천 개의 세상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것이 천 개의 외로움으로 보인다.


 우리는 저마다 끝까지 외로운 존재들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타인에 대해 조금은 관대해질 수 있지 않을까? 동병상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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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 버티고 시리즈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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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을 읽으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다.

 만약 당신이 그 불가능에 속한다면, 적어도 두 가지 경우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첫째 너무 모범생으로 살아왔거나 둘째 정의감이 매우 투철하거나. 왜냐하면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주된 매력은 반영웅을 그리는 데 있고, 그것을 잘 소화할 수 있어야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만일 재미를 느끼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 걷잡을 수 없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반영웅, 안티 히어로를 그리는 데 뛰어난 작가. 거기에 한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를 보여주는 작가. 그런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내가 그리면 누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악도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지 잘 보여주마!' 하고 쓴 작품이 바로 '액스'다.



 제목은 도끼를 뜻하는 '액스'이지만, 소설에 도끼가 나오진 않는다.

 책 뒷 표지에 실린 박찬욱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액스'는 박찬욱 감독이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작품에다 그가 늘 영화로 만들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참고로 '액스'는 'Z'로 유명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에 의해 2005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바가 있다.)) 직장에서 해고 당할 때, '도끼질 당했다'고 하는 영어 표현에서 기인한 제목이라고 한다. 맞다. 이 소설은 구조조정으로 인한 정리해고 된 실업자가 주인공이다. 이름은 버크 데보레. 그는 23년 동안이나 일한 제지회사에서 하루 아침에 정리 해고를 당했다. 느닷업는 도끼 날에 목이 휙 날아간 것이다.


 지위 혹은 신분을 가리키는 영어 'status'는 '서다'라는 뜻의 라틴어 'statum'에서 유래했다. 즉 사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해야 사람들 앞에 제대로 설 수 있다는 것이 단어 자체에 아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사에서 해고당한 버크는 이제 설 수 있는 두 다리가 없는 셈이다. 2년간 열심히 구직 활동을 했으나 돌아온 것은 차디찬 거절 뿐이었고 쪼들리는 가계에다 아들은 원하는 것을 사주지 못하자 절도에 손까지 댄다. 현재도 미래도 암울할 뿐이다. 이대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버크는 중대 결심을 한다.

 자신이 재취업 하는데 방해가 될만한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기로.


 그는 잠재적 경쟁자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직종의 취업 광고를 거짓으로 신문에 낸다. 그래야 이력서를 자신이 받아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자신에게 해가 될 경쟁자들을 선별하여 이력서에 나와 있는 개인 정보를 사용해 그들을 찾아가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은 계획한 대로 착착 진행되어 그는 결국 여섯 명의 경쟁자들을 골라내기에 이른다. 이들이 타겟이다. 그는 고인이 된 아버지가 남긴 유품에서 우연히 발견한, 무려 50년 동안이나 사용하지 않았던 루거 권총으로 미국 각지에 있는 그들을 하나 하나 찾아가서 죽이기로 한다. 제지 회사에서 일을 하며 누구보다 특수 용지에 관한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했던 그는 이제 이것이 그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추호도 실패를 용납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성공시켜야만 하는 프로젝트. 오직 그것만 중요할 뿐이다. 알지도 못하는 얼굴에 다짜고짜 권총을 쏘고 설령 머리의 절반이 날아간 데도 그에겐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시간만이 중요할 뿐이다. 이것은 합격 날짜가 정해진, 기한이 있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세상엔 살인 동기가 허다하게 있겠지만 '액스'의 주인공 만큼이나 기상천외하고 그래서 또 어이없는 동기가 과연 또 있을까 싶다. 하지만 읽으면서 그 어이 없음이 왠지 모르게 점점 공감으로 변해가니 이것이 또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저력이다. 노조가 파업할 때마다 흔히 보게 되는 문구가 하나 있다. '해고는 살인이다!', 바로 이것이다. 소설은 정말 해고는 살인과 다름 없다는 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은 처음 만날 때 꼭 '무슨 일 하세요?' 하고 묻곤 한다. 그가 사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은연 중에 캐내려는 것이다. 처음으로 물어볼 만큼 거기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크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내 자아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차지하는 자리를 통해 세상이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나 역시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뼈져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가진 공포 중에 쓸모 없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커다란 공포는 없다. 소설은 그 공포를 충실히 재현한다. 그래서 그 압도적인 공포에 눌려 허우적거리다 보면 그런 선택도 할 수 있겠구나 어느 정도 납득하게 된다. 버크의 이런 말이 그것을 거든다.


 그들이 앗아 간 건 내 인생입니다. 내가 아니고요. 그들은 내게서 융자를 갚을 능력, 아이들을 돌볼 능력, 아내와 좋은 시간을 보낼 여유를 앗아 갔습니다. 직장은 직장일 뿐입니다. 직장은 내가 아니라고요, 퀸란 씨. 지난 5개월 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압니까? 한때 서로 의지하며 친하게 지내 온 동료들이었습니다. 나랑 같이 해고된 수백 명의 직원 말이죠. 우린 항상 그 신뢰를 앞세워 함께 싸워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내 적이 됐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카운슬러들은 절대 이런 얘길 하지 않죠. 우리가 더 이상 동료가 아니라는 것. 더 이상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p. 252 ~ 253)


 해고를 당하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사회가 철저히 숨기고 있던 이 진실을 볼에 얼음을 대듯 선명히 깨닫는다. 지금과 같은 고도 경쟁 체제에서는 모두가 모두의 적이라는 것을. 공교롭게도 이 소설은 1997년에 나왔다. 우리가 한창 IMF를 겪고 있을 무렵이다. 날마다 여기저기서 대량의 정리해고가 쏟아지던 IMF 시절. 소설 속 버크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그런 현실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데 더 큰 비극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아무런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더 이기적이 되었을 뿐. 바로 그런 욕망이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괴물이 설치게 만들었다. 알고보면 버크의 진화형들을. 납득도 가고 악행을 통해 점점 더 강해지는 그를 보면 매력도 느끼지만 결코 지지할 수는 없는 것은 버크의 그 길에, 그가 다다르게 될 종착역에 이명박과 박근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버크의 길을 완전히 내칠 수도 없는 것이, 그가 취한 한 가지 삶의 태도는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바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의지한다는 것. 버크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누누이 자신에게 말한다. 이 시궁창에서 벗어나게 해 줄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라고! 자신이 이런 진흙탕에 빠지게 된 것은 내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기댔기 때문이라고.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반영웅을 자주 그리는 것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 만들어 준 삶에 무턱대고 안주하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가길 원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프론티어 정신. 반영웅은 바로 그런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위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순전한 자기에의 의지, 여기까지는 지지할 수 있을 듯하다. 정말 자신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일조차 태연하게 남에게 맡겨 버리는 이들이 많으므로. 그렇게 정말 고쳐야 할 사회 문제에 대해 무임승차 하려는 이들이 아직도 잔뜩 있는 세상이므로.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 그래야 하는가? 그것이 지나쳐 타인을 그저 수단으로만 삼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기에 대해선 나는 오리무중이다. 고민 거리로 남겨둘 수밖에.


 그냥 재밌게 읽을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해고와 실직을 늘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머리에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서 저도 모르게 감정이 깊이 실리고 현재와 미래의 나를 생각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냉정한 분석 보다 내가 이렇게 되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그래서 내겐 이보다 더 무서운 게 없는 공포 소설이기도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목에 해고의 도끼날이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읽는다면 누구에게나 정녕 소름 돋는, 서늘한 소설이지 아닐까? 무더운 여름밤에 딱 읽기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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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7-25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 주말에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액스> 정말 대단하더군요.

딱 20년 된 소설인데도 작금의 상황과 어떻게 이
렇게 맞아 떨어지는지...

오드득 2017-07-25 11:54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이야기로 읽힌다는 데 더 큰 비극이 있는 것 같습니다. ㅠ ㅠ
모임 분들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참으로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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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나라 스위스에 갇힌 현대판 안나 카레니나





여성의 삶과 내면을 다룬 강렬한 소설 『하우스프라우』 출간


미국의 작가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데뷔 소설 『하우스프라우』가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시인으로만 활동했던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이며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작품이기도 하다. 제목인 <하우스프라우Hausfrau>는 독일어로 가정주부, 기혼 여성을 뜻한다. 주인공은 스위스인과 결혼해 그곳에서 사는 미국인 안나이다. 우울과 외로움 속에서 안나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파국으로 빠져드는 한 여성의 삶과 내면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현대판 안나 카레니나>로 독자와 평론가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상당히 높은 수위의 성행위 장면 역시 눈에 띄는 특징이지만, 문학성과 화제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출간 즉시 10여 개 언어로 번역 계약이 이루어졌고, 독일 ․ 프랑스 ․ 이탈리아 등 전 세계 15개국에서 출간되었다. 데뷔 소설로서 흔한 일은 아니다. 단순히 불륜이 소재라서, 또는 노골적이고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라 대담한 성(性) 묘사에 섬세한 심리 묘사가 어우러졌기에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절묘한 사건들의 배치, 영어와 독일어 단어들을 이용한 세련된 언어유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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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겉으로는 완벽하게 보이지만 실은 내부에 점점 차오르는 소외와 공허에 대한 느낌 때문에 자신의 삶에 뭔가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많이 읽었는데, 이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하우스프라우'도 그런 이야기 같네요. 제목에 일부러 독일어를 쓴 것은 아무래도 주인공 여성이 삶의 새로운 변화를 위해 시도한 게 독일어를 배우는 것이라 이를 나타내기 위해서겠죠.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지은 바에 자신을 맞춰 살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건 곧 세상의 언어에 자신만의 언어를 빼앗기는 것이기도 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시도를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 한 것 같네요. 과연 그녀는 자유와 해방의 언어를 되찾을 수 있을지, 그 여정을 함께 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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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1
한수산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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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적인 역사일수록 단단히 기억에 새겨두어야 한다. 망각은 언제나 비극의 반복을 부르기 때문이다. '군함도(하시마 섬)'. 지하 1.000m까지 내려간 갱도는 해저보다 더 깊은 곳이었기에 언제나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또한 여건상 통로의 위 아래가 아주 좁을 수밖에 없어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채굴을 해야했다. 그래서 현지 일본에서도 막장 중의 막장으로 불렸고 당연히 갖은 인명 사고가 뒤따랐다. 태평양 전쟁 말기 노동력이 부족하자 일본은 조선인 남자들을 강제 징용하여 끌고 갔다. 처음엔 돈을 벌게 해 준다고 꼬드겼지만 나중엔 그런 것조차 없이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그렇게 강제로 군함도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마주한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갱도와 최소 12시간에서 최대 16시간에 이르는 탄광에서의 노동이었다. 그것도 몸에 걸친 곳이라고는 고무줄 속옷 하나에 머리에 쓴 헬멧 뿐이었으며 식사라고 주어지는 보통 비료로 사용되는 콩기름을 짜고난 찌꺼기로 만든 주먹밥을 먹으며 하루를 버텨야 했다. '군함도'는 일본의 식민지 역사상 가장 참혹한 강제 노동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선 잊혀진 기억이었다. 그러나 최근 나온 한 소설이 그것을 발굴하고 있다. 바로 한수산 작가의 '군함도'이다.



 원래 이 소설은 2003년에 '까마귀'란 제목으로 나왔었다. 그 때가 처음이었다. '군함도'의 비극이 대중들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그런데 이 '군함도'가 지닌 아픈 역사의 상처를 작가가 우리들에게 알릴 수 있었던 것도 '전두환의 군부 독재'라는 어둡고 아픈 우리네 역사 때문이었다.


 한수산. 그는 원래 70년대부터 잘 나가던 작가였다. 전두환이 군부 독재를 하던 1981년. 그는 한 신문에 '욕망의 거리'라는 소설을 1년째 연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설 중 어떤 인물이 전두환을 암시한다는 것과 군복 입은 이들을 비하했다는 단 두 가지 이유로 그는 당시 집필을 하고 있던 제주도에서 갑자기 보안사에 끌려가 갖은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그렇게 당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당시 연재를 한 신문사의 담당 기자들까지 모조리 연행되어 작가와 똑같이 심한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이 때 시인 박정만도 한수산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끌려갔는데 역시나 온갖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박정만 시인은 그 때의 고통으로 늘 괴로워했으며 매일 소주 두 명을 마셔야만 겨우 잠들 수 있었다고 한다. 때로 이유없이 사라지는 일도 잦았는데 그러다 결국 전두환이 전 세계에 자신의 위세를 떨치려 개최한 서울올림픽이 폐막하던 날, 화장실 변기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수산 작가의 필화 사건은 독재 권력이 얼마나 개인의 삶을 쉽게 그리고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로 한수산 작가 역시 끝내 그 때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여 88년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 버린다. 그는 일본에 한 4년 정도 머물렀는데 바로 거기서 일제 식민지 시절, 실제 '군함도'에 강제 징용되었다가 나가사키 원폭 투하 때 피폭까지 된('군함도'는 '나가사끼' 인근에 있다.) 재일동포들을 만났고 바로 그들의 육성 고백을 통해 '군함도'에 대해 알게 된다. 당시는 '군함도'에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이 당한 아픔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때라 작가는 그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꼭 세상에 알릴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그는 93년, '군함도'에 대한 집필을 시작했고 10여 년만에 '까마귀'란 제목의 장편 소설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리고 다시 7년이 지난 현재, 그 '까마귀'를 다시 전부 개작하여 두 권의 책으로 내었으니, 그것이 바로 '군함도'이다.


 소설은 '군함도'가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지옥이며 죽음의 땅인지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이대로는 죽겠다 싶어서 탈출을 감행하는 조선인들이 있고 그 중 하나였던 태복은 도중에 체포되어 다시 군함도로 끌려와 모진 고문을 받다 고문하던 일본인 사이또오를 살해한다. 한 마디로 '군함도', 그 곳은 화해와 공존이 불가능한 곳이라는 암시다. 그것은 군함도만이 아니라 조선도 마찬가지다. 뒤어이 등장하는 지상과 서형은 서로 사랑해서 혼인한 부부다. 하지만 곧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 지상의 아버지는 친일파로 가진 재산도 꽤나 많은 이였는데, 그런 그 역시 일본의 강제 징용을 피해갈 수 없어 장남을 대신하여 둘째 지상을 징용에 보내기로 한다. 지상은 아버지의 친일이 민족에게 큰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 죄값을 자신이 강제 징용을 당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치를까 하여 기꺼이 응한다. 원래 지상의 아버지는 군수에게 돈을 써서 지상을 보다 편한 보직으로 보낼 심산이었으나 그렇게 뒷돈을 준 보람도 없이 지상은 결국 군함도로 오게 된다. 이렇게 하여 군함도의 실상이 펼쳐진다.  가혹한 노동 환경과 늘 당하는 죽음의 위협 그리고 일본인들의 갖은 폭행과 억압 속에서 하루하루가 늘 지옥이었던 지상은 뜻이 맞는 조선인들과 탈출을 결심하고 1권의 끝에서 조선인 여자 금화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탈출에 금화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곧 들통나 그녀는 일본인들에게 잡혀가고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죽게 된다. 한 편, 지상과 함께 탈출을 모의했고 금화에게 마음까지 준 우석은 탈출에 실패하고 섬에 남게 되는데 그러다 금화의 죽음을 알고 복수를 맹세한다. 얼마 가지 않아 일본의 폭압에 대한 조선 징용자들의 인내는 임계점에 이르고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들이 퍼져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모처럼 벌인 거대한 저항은 이전부터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던 일본과 내통하는 조선인들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예전부터 군함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극과 그것에 대한 저항이나 탈출마저 초연해 있던 명국을 더욱 회의에 젖게 한다.


 한편, 군함도에서 무사히 탈출한 지상은 운좋게 한 일본인 노인의 도움으로 나가사키 항구에 이제 막 조선에서 징용되어 온 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는다. 그는 조선에서도 '상록회'에 소속되어 조선의 계몽을 위한 교육에 힘썼는데, 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제국의 첨병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을 하고 있다. 이 지상의 삶은 한 역사를 살아가는 삶을 다룰 때 한수산의 시선이 좀 더 어디에 가 닿는지 느끼게 한다. 특히나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한 경우, 그것에 대해 오늘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어떤 선험적 잣대를 가지고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삶 안으로 들어가서 바로 그들의 눈으로 그들이 한 선택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소설은 우리의 기대와 어긋나는 면이 좀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군함도에서 모처럼 일어난 봉기가 실패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솔직히 한국 독자로서 이 장면은 뭔가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는 장면이었는데, 소설은 그런 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소설의 성공을 바란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결정이라 바로 그런 면에서 작가의 신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이미 인기 소설을 여럿 발표한 그가 어떻게 써야 독자들이 좋아할 것인지 정도는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실망을 줄 지도 모를 구도를 택했다는 것은 작가 자신이 소설 '군함도'의 사명을 상업적 성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묻혀진 비극적 역사의 온전한 복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 어떤 문학적 과장이나 왜곡 없이 있었던 혹은 있음직한 사실 그것만의 재현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왜 맥락에 맞지 않는 대사들이 뜬금없이 튀어 나오는 지도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현실은 이야기처럼 매끄럽지 않고 다양한 군상들은 저마다 다른 말을 하니까 말이다. 역사적 현장의 진실된 재현과 그것을 통한 독자의 생생한 체험. 바로 이것이 저자가 부여한 '군함도'의 사명이며, 소설은 그것을 훌륭히 완수했다고 보여진다. 어쨌든 '군함도'가 어떤 곳이었으며, 반드시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비극의 장소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나가사키에서 일하게 된 지상은 결국 원폭 투하까지 경험한다. 그러나 '군함도' 보다 더한 지옥의 현장에서도 그는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여기엔 아마도 역사의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아직 고향에 오지 못한 상태라 볼 수 있는 '군함도'의 비극적 역사를 이 소설을 통하여 비로소 환향할 수 있게 하려는 작가의 비원(悲願)이 서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 역시 한동안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적이 있었던 지라 그 귀향의 염원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으리라. 부디 그 바람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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