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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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쥬'라는 게 원래가 자신의 창작적 혈통이 어디에 있는지 밝히려는 것임과 동시에 일종의 작품 창작의 동지적 선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문학에서도 '오마쥬'라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역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입니다. 둘 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테마로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두고  오스카 와일드 자신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쓰는데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두 작품은 시기적으로도 비슷합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1886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1891년에 나왔죠. 이렇게 두 작품은 공히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인들이 겪었던 정신적 혼란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 역시 19세기의 유럽을 휩쓴 격변의 물결을 피해나갈 수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자본주의의 발달로 귀족사회는 점증하는 신흥 부르조아지들에게 위협을 받고 있었고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시작된 자유주의의 바람 또한 중세 이래로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는 사회체제를 마구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드보르작은 귀족사회가 거의 없다시피하고 한창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있는 미국을 보면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감하고 '신세계 교향곡'을 지었고, 귀족들의 문화적 취향을 대변하던 낭만주의는 척박한 노동과 빈곤한 삶의 질곡을 담아내고 있는 사실주의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겠죠.

바로 그러한 정신적 혼란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작가들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오스카 와일드 였다고 생각됩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킬박사와 하이드'
 

   
  나는 생각했다. 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로 담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그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느낄 것이며, 더 이상 이질적인 악마가 행하는 불명예 탓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는 지킬이 하이드로 변신할 수 있는 약을 먹으려 결심하면서 한 생각입니다. 지킬은 이렇게 그 약을 먹음으로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두 존재로 인한 갈등과 번민에서 해방되려 합니다. 왜냐하면 지킬은 본래 쾌락을 탐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고결한 척 해야했기 때문에 그러한 본성과 행동의 괴리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주 자신의 본성을 따르고 싶지만 남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눈들 때문에 억지로 참아야했고 그로 인해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이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언이 양심의 가책은 모두 '초상화'에 떠 넘긴 채, 쾌락을 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플라톤의 대화 중에 '사람들이 왜 도덕적이 되느냐?'에 '기게스의 반지'가 나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기게스의 반지'는 약지에 끼고 돌리면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신기한 반지입니다. 플라톤과 대화하는 상대방은 바로 이 '기게스의 반지'를 예로 들며 사람들이 도덕적이 되는 것은 바로 남들의 시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남들이 자신을 보지 못하면 그 누구도 도덕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킬' 역시 그러합니다. 그가 그의 추한 본성을 억누르고 사는 것은 모두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모습의 '하이드'를 만들었던 것이죠. 사실, 이러한 '기게스의 반지' 논리는 나중에 H.G 웰즈에게 문자 그대로 중요한 주제로서 쓰여지게 됩니다. 그 작품이 바로 '투명인간'이죠.

 스티븐슨과 웰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게스의 반지' 논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에서 중요했던 것은 타인의 시선이었죠. 그건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이 초상'에서도 똑같습니다. 바질은 도리언에 대한 온갖 추한 소문이 돌고 있음을 알고 도리언을 찾아 옵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언의 얼굴을 본 순간 그 모든 추한 소문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일을 하면 아무리 감추려해도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인데 도리언의 얼굴은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순수했기 때문이죠.

 

 이 시선, 남들로 부터 오는 시선이 그들 모두에게는 중요했습니다. 그걸 이른바 '명예'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렇게 그 시선들은 '신사다움'을 보는 것이고 그건 그가 '얼마나 매너를 지키느냐?'하는 것을 판별하는 시선에 다름아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남들로 부터 오는 시선은 그 매너, 사교 예절 등등을 수립한 '서양 문명'으로 부터 오는 시선이었습니다.

 로베르토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그런데 이 문명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로베르토 엘리아스에 따르면 이 문명은 자연발생적이 아닙니다. 문명이라는 말은 1760년 미라보란 사람이 가장 먼저 썼습니다. 그렇게 그건 근대의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은 로베르토 엘리아스에 따르면 중세의 '궁정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문명의 출발은 이렇습니다.

 중세 당시 왕들은 많은 영주를 거느리고 있는 체제였습니다. 왕은 그 많은 영주를 주로 토지를 나눠줌으로서 지배했는데 아시다시피, 귀족이 많아지면 나눠줄 수 있는 땅은 점점 적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왕은 언제까지고 땅을 통해 귀족들을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이 만들어낸 귀족 지배 방법이 바로 매너(예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매너(예절)이란 왕과 귀족 각자가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거기에 맞는 격식, 예절들을 만들고 교화시킴으로서 스스로 자기 자리의 본분을 지키도록 해 나가도록 만든 일종의 프로그램이었던 것이죠. 이 프로그램은 성공했고 격식과 예절을 지키는 것은 이제 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는지 그 신분을 알려주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리잡자 마자 신흥부르조아지들은 혈통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었던 귀족과의 차이를 이 격식과 예절을 흉내냄으로서 상상적으로 따라잡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렇게 격식과 예절이 주는 '신분적 기호' 덕분에 그건 유럽 전 사회 전 계층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것들은 그 기원과 상관없이 문화가 되고 미라보에 의해 '문명'으로 선언되는 것이죠.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이라는 것은 바로 로베르토 엘리아스가 보았던 것 처럼 '권력 유지를 위한 지배 기술'이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엔 자연 억압 효과가 들어가게 됩니다. 게다가 그것은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죠. 그러니 사람들은 '매너'라는 것이 곧 자신을 나타내는 잣대이므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거기에 맞출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고 자연, 외부로 부터 강요된 문명이라는 것에 맞춰 자신의 본성을 죽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오스카 와일드, 웰즈가 '기게스의 반지'를 통해서 피하고 싶었던 거대한 문명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새삼 그들이 그 거대한 문명의 시선이 바로 자신을 억압하는 시선임을 깨달은 것은 바로 19세기에 몰아닥친 격변 때문이었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오스카 와일드가 그 이중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그것을 수직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킬은 자주 그의 하이드를 '저급한 존재'라고 말을 하는데 여기에 나타나듯이 그는 하이드를 자신보다 덜 발달한, 아직 진화론적으로 미숙한 그런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수 동물... 말하자면 서양 문명이 자신에게 맞지않는 것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 처럼 그렇게 여기고 있지요. 여기서 지킬이 아직
그 거대한 문명적 시선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는 수평적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건 단적으로 서문에 드러납니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리얼리즘에 대한 19세기의 반감은 캘리번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길길이 날뛰는 것과 같다.
 낭만주의에 대한 19세기의 반감은 캘리번이 비친 얼굴을 보지 못해 화가나서 미친듯이 날뛰는 것과 같다


 여기서 캘리번은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괴물을 말합니다. 그는 프로스페로에 의해 길들여지는 야수이기도 하죠.

 오스카 와일드가 일부러 캘리번을 언급한 것은 스티븐슨의 '하이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스티븐슨이 하이드의 비문명성을 저급한 것으로 보았던 것을 비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오스카 와일드는 아예 인간의 본성이 비문명적인 것이며 이중성이란 바로 '어디서 바라보느냐?'란 시각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리얼리즘과 낭만주의가 삶과 예술을 다르게 바라보듯이 말이죠. 

 아무튼, 오스카 와일드는 스티븐슨이 애써 다른 존재로까지 만들어서 감추고 지우려 했던 문명화되지 못한 본성들을 당당히 존재의 본성으로 선언합니다. 모든 존재는 캘리번이고 문명적이라는 것은 그에 덮어씌우는 외피에 불과하다고...

 말하자면 그는 더이상 '기게스의 반지'가 필요없는 사람입니다.

 같은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도덕적 삶은 예술가가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러나 예술의 도덕성은 불완전한 매개 수단을 어떻게 완벽하게 사용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는 더이상 문명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개인의 삶 뿐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예술과 삶의 관계로 집약됩니다. 그렇게 리얼리즘과 낭만주의의 관계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중요한 테마를 이루게 됩니다. 사실 여기서 사조의 명칭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리얼리즘은 그냥 '현실적인 삶', 낭만주의는 그냥 '예술'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이 예술은 '도리언'으로 '삶'은 바로 도리언의 초상화로 형상화됩니다. 그렇게 '도리언의 초상화'는 근본적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짊어져야 하는 책무, '양심'에서 떠오르듯 윤리...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단적으로 말해 윤리라고 해도 좋겠죠. 하지만 이것은 문명적인 것을 넘어선 것으로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타인에 대한 '원초적 배려'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자유로운 예술(서문에도 나와있듯 '어떤 예술가도 윤리적인 동정심을 지니지 않는다'가 그걸 말하고 있죠)과 거기에 책임을 지우려는 윤리적인 삶과의 투쟁입니다.

 사실 이건 오스카 와일드가 하나의 우화로서도 얘기한 바가 있지요.

 그게 바로 우리들이 잘 아는 '행복한 왕자'입니다.

 잘 아시는대로, 모든 사람들이 경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예술적으로 완벽한 그 왕자는 타인들의 삶을 신경쓰게 되고 그렇게 윤리적인 선행을 베푼 나머지 모든 예술적 환영을 망가뜨리고 퇴락한 존재로 돌변해 버립니다.

 여기에 오스카 와일드가 바라보는 예술과 윤리의 관계가 아주 집약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에게 '윤리'라는 것은 예술과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윤리는 예술을 좀먹는 것이며 결국 윤리적이 된다는 것은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대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반복됩니다. 결말도 그렇지만 특히 도리언이 그토록 매혹되었던 시빌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절교를 선언하는 장면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도리언이 시빌과 절교를 선언하게 되었던 것은 시빌이 도리언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삶의 진정성을 깨닫고 자신이 하고 있는 연기가 단지 환영에 불과한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빌은 예술적 환영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어 줄 연기를 도리언이 보는 앞에서 마치 그것이 가상에 불과한 것임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려는 듯 일부러 엉성하게 만들어 버리죠. 행복한 왕자가 자신의 눈부신 금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듯이...  그렇게 행복한 왕자가 사람들에게 버려졌듯이,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시빌 역시 도리언에게 버림받게 되는 것이죠. 

 이제 결말을 지어야겠네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오스카 와일드는 시대적 격변에 의해 균열이 벌어진 틈 사이로 문명의 억압적 시선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달랐습니다. 스티븐슨은 자신도 모르게 알게된 그 비문명적인 것을 감추기 바빴고, 오스카 와일드는 비웃으며 그걸 가볍게 벗겨버리고는 비문명적인 것을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고 자기 갈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했습니다. 예술과 윤리의 문제에... 

 그렇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예술이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가?' 혹은 '윤리가 예술에게 지울수 있는 책무는 어디  까지인가?"하는 질문에 오스카 와일드 스스로가 치열하게 해답을 찾아보는 사유의 과정의 산물이라 정의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문명적 시선'을 벗어난 인간은 과연 어디 까지 다다를 수 있는 것인가의 과정이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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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 The Yellow Se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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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의 나홍진 감독의 두 번째 장편 '황해'를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자리 운이 없어서 앞에서 보는 바람에 두시간 넘게 길게 목을 빼고 보느라
아직도 목이 살살 아파오네요.


아무튼, '황해'란 바로 서해를 말합니다. 그 서해를 중국은 황해라 부르는데 국제에서 통용되는 이름은 바로 이 이름이죠. 주인공은 '구남(하정우)'이라고 연변에 사는 조선족. 그는 한국에 돈 벌러간 아내에게서 오래도록 소식이 없자 그 아내를 찾기 위해 거액의 수수료를 빚까지 얻어가며 노력했지만 결국 찾지는 못하고 그만 거액의 빚더미에 깔려 벌어들이는 몇 푼 안되는 돈을 족족 양아치들에게 상납해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그것을 한 방에 해결하고자 늘 마작판을 기웃거리지만 그나마도 있는 돈을 다 털릴 뿐입니다.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인 것이죠. 그런 그에게 같은 조선족 면가(김윤식)가 한국에 가서 사람 하나 죽이고 오면 그 빚을 탕감해 주겠다면서 한국으로 가서 아내도 찾고 해서 새출발하라고 제안을 해 옵니다. 아무데서도 탈출구를 찾지못했던 구남은 결국 면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한국으로 밀항, 자신의 타켓을 처리할 방법을 강구하면서 틈틈히 아내도 찾아나섭니다.

 



 

 줄거리 소개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간략하게 소개된 줄거리에서도 드러났듯이 여기서 황해란 바로 파라다이스로 가는 통로를 의미합니다. 구남은 새로운 희망의 빛을 찾아서 거기를 건넜죠.
그런데 황해를 건너 찾아온 바로 이 곳은 과연 그에게 파라다이스였을까요?
흥미롭게도 영화의 처음 부분에 구남의 나래이션이 나옵니다. 그건 구남이 어릴 때 보았던 광견병에 걸린 개에 대한 추억입니다. 그 개는 광견병에 걸린 나머지 자기가 물 수 있는 모든 것을 죽였고 그래서 동네 사람들에게 쫓겼지만 결국은 잡히지 않았는데 어느날 자신 앞에 홀연히 나타나더니 죽었다고... 그리고 그 개가 죽고난 뒤 광견병이 마을 전체를 휩쓸었다고...

 이 나래이션은 그야말로 황해의 모든 이야기를 집약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얘기했던 개처럼 구남은 그렇게 새로운 희망의 빛을 찾아 건너온 이 곳에서 마구 쫓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듯이 한국은 파라다이스가 아니니까요.

물론 이것은 적나라한 현실이지만, 나홍진 감독의 전작과도 어느정도 연속성이 있습니다. '추격자'의 결론에서 이어지는 부분이니까요. '추격자'는 결국 무슨 얘기였을까요? 그것은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지금의 한국에 다시 예수가 재림한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재림한 예수는 처음에 내려온 예수와는 많이 달랐죠. 네, 그 예수가 바로 하정우가 분한 살인마였습니다. 그렇게 밤으로 가득한 한국이란 사회에 다시 내려온 예수는 살인으로 복음을 전하고 시체로서 신도를 삼고 스스로 죽음의 겟세마네 동산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내려온 예수가 유다에게 결국은 죽음을 당하듯, 새로운 교리를 따르지 않는 신도, 처음에 내려온 예수가 설파한 '사랑'을 믿는 신도에게 죽임을 당하는 거죠. 유다도 사실 처음 예수 이전의 유대교 교리를 충실히 따랐던 바리새파였으니까요. 결말에서 살인마 하정우가 괜히 옆구리에 찔리는 게 아니죠. 그게 바로 김윤식이 가하는 룽기누스의 창이었습니다. 아무튼 제가 '추격자'를 보고 놀랐던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절망의 깊이도 느낄 수 있었죠. 어쩌면 이 감독이 죽이되든 밥이되든 이 한 편으로 모든 걸 폭발시켜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어쨌든 나홍진 감독은 지금의 이 한국을 도저히 믿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전혀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살인마 예수가 종말을 불러와야 할 만큼 이 나라는 오로지 어둠 뿐입니다. 그건 오히려 역설적으로 환한 대낮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하정우에게 살해당하는 서영희에서 완성되죠. 그렇게 이 나라는 살인마 하정우에 의해서 멸망해야할 정당성을 갖게 됩니다. '추격자'의 결말은 조금 희망차 보여도 그건 그냥 속절없는 희망일 뿐입니다. 도시에 거대하게 내려앉은 어둠으로 영화 '추격자'는 끝이 나니까요. 

 그렇게 조금의 구원도 없는 세상... 이 지금 황해를 건너온 자들이 목도하는 세계입니다.
이번 영화에서 한국은 그래서 완전히 협잡과 배신 그리고 야수들이 활개치는 땅이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히 새겨두었던 한국의 근대적 모습은 잘 나오지 않습니다. 나홍진은 마치 그동안의 발달을 생략해버린 듯이 찍었습니다. 연변과 한국이 그리 다르지 않고 70년대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이 다르지 않습니다. 영원히 문명적 성숙이 배제된 세계...
도처에 널린 빈집이며 폐허들... 도끼질과 칼부림이 가득한 세상...
그렇게 구남의 나래이션 대로 광견병이 모조리 휩쓸고 있는 세상...
두 시간 넘는 러닝타임 내내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마치, '네가 살고 있는 한국이란 곳이 얼마나 처참한 곳인지 두 눈 뜨고 똑바로 보라구!'하는 것 같습니다.
 

- 세세한 분석은 아무래도 보지 못한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하지 못하겠네요. 그냥 영화를 본 전체적인 감상만 이렇게 적어두어 봅니다. -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은 아마도 제작기일에 쫓긴듯 시나리오를 충실히 숙성시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후반의 헐거워지는 부분을 액션으로 땜질하는 듯한 느낌이 좀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여주는 액션 장면들이 나무랄데 없었으니(우, 정말 도끼질과 칼부림은 리얼했어요. 김윤식이 정말 후덜덜하게 나오더군요.) 어느정도 보상이 되기는 하는데 그래도 폭발력이 없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때문에 하정우의 후반이 이상해졌습니다. 정작 주인공이 이렇다 할 클라이막스없이 조금은 맥없게 결말을 맞게되는 것 같군요.

 하정우와 김윤식 두 분 모두 연기가 기본 이상이 되시는 분들인지라 당연히 아주 실감나게 연기를 하셨는데 정말 장면 장면을 보니 고생을 참 많이 했겠더군요. 더구나 하정우씨는 그 추운 겨울산의 정상까지 오르고....

 

  개인적으로 눈에 띄었던 분은 바로 이 분! 조성하씨인데... 하정우 김윤식과 트로이카가 될 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눈여겨 봐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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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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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크로스비'로 가는 길 

 회의론자로도 유명한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귀납법'을 두고 그것은 인간이 하루하루를 생존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었으니 내일도 있을 것이라는 이 단순한 논리는 정말은 내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그 막연한 두려움을 과거의 사실을 통해 애써 잊어보려는 작위적 환상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마치 이러한 흄의 말을 방증이라도 하듯, 후일 버트란드 러셀은 귀납법이 가진 오류를 이렇게 말한다. '어제도 먹이를 주었고 오늘도 먹이를 주었다고 해서 닭은 내일도 주인이 먹이를 줄 것이라 기대하겠지만 내일은 주인이 그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지도 모른다' 

 인생은 변화무상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우리는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 내일 일을 전혀 모르는 우리에겐 삶이란 문은 계속 불확실성으로 열려있다. 톨스토이의 우화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신의 물음에 그것은 바로 '미래를 아는 능력'이라고!

 삶에 내재된 미래의 불확실성은 인간에게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도록 만든다. 문제는 그 유한성을 직면했을 때의 반응이다. 그것은 스페인의 철학자 우나무노의 말마따나 유한성의 자각이 무한성의 동경을 낳아 그렇게 종교적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론 네델란드의 철학자 반 퍼슨의 말처럼 오히려 그 무한성을 애써 잊도록 만들수도 있다. '오컴의 면도날'과도 같이 불가해한 것은 그저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2009년의 퓰리처 수상작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 또한 삶의 불확실성을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득 드는 의문이 있다. 이런 삶의 불확실성이란 우리네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삶의 불확실성이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시키는 건 바로 그 불가해함에 있다. 앞서 톨스토이의 우화에서 나타나듯이 그것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한성'과 연결되기도 한다. 철학자들은 일찌기 이 무한성에 대해 사유했었다. 하이데거에 이르러서는 그 '무한성'이 바로 '타자'라는 존재 자체가 된다. 즉, 우리가 내일 내가 어떻게 될 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앞에 나타나는 타자에 대해서도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타자란 마주한 우리에게 있어 완전히 불가해한 영역 속에 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 역시 '타자의 얼굴'이야 말로 우리를 무한성에게로 인도하는 체험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말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가 늘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의 얼굴이란 그거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있어 유한성을 자각시키는 무한성의 체험이 된다. 그들의 얼굴은 우리에게 우리의 세계란 것이 그저 하나의 단일한 개체에 불과한 것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 환기 속에서 우리는 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단순하게 말해서 두 가지 반응중의 하나를 하게 된다. 즉, 나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타자를 받아들이게 되거나 아니면 타자를 무시하여 내 세계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다.   

 바로, 이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도 그와 같은 것을 담고 있다. 아마도 이 소설이 단순히 주인공의 이름인 이유도 어쩌면 그것을 강조해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소설은 한 개인의 내면에 집중해 그녀가 수없이 마주치는 타자와의 순간들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변해가는 지를 보여주려 한다.  리뷰란 일종의 '복기'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텍스트라는 물리적 경계 안에서 작가가 걸어간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작가가 이리저리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깔아 놓은 사유의 편린들을 찾아다니며 헤아려 보는 것 말이다. 그렇게 나도 그저 따라가 보려 한다. 그려면서 되도록 작가가 우리들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을 충실히 재현하려 한다.


 2. 스트라우트가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여기, 올리브 키터리지가 있다. 

 키터리지는 오랜 교편 생활을 뒤로하고 이제는 은퇴하여 여유롭게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조금 독선적인 성격으로, 남의 말을 들으려 하거나 남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하지 않는다. 오랜 교사 생활에서 늘 아이들을 판단해 왔던 경험 탓에 사람들을 만나면 습관적으로 한 눈에 파악하려든다. 그래서 어쩐지 그 시선이 차갑게 느껴지고 주눅마저 들게 한다. 그녀의 성격, 그녀가 타인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보여지듯, 그녀는 인생이 늘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그만큼 항구적이라고 여긴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면서 누구에게나 늘 미소를 지어보이는 남편 헨리처럼 말이다. 아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녀에게 하필이면 '수학교사'라는 직업을 주었던 것도 그러한 올리브의 인생관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올리브 키터리지를 가장 먼저 얘기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 바로 그녀의 이름이라서가 아니라 사실은 이 소설 전부가 바로 올리브 키터리지의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녀의 남편 헨리로 부터 시작해서 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속마음들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 모든 이야기들에게서 어떤 연속성이 느껴진다. 앞에서 일어났던 일을 뒤에서 받아서는 다시 또 다음으로 넘겨주는, 뭐랄까 마치 바톤을 주고 받는 릴레이 경주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의 연쇄 작용들은 사실 올리브 키터리지의 변화와 상응하고 있다. 그렇게 이 소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올리브 키터리지가 어떻게 변화를 맞아들이게 되었는가에 그 초점을 맞추면서 진행된다.

 

  2 - 1 : '약국'과 '밀물'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남편 헨리가 중심이 되는 '약국'으로 부터 시작해 올리브가 변화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강'으로 끝난다. 헨리가 처음에 나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하나는 헨리와 올리브가 살고 있는 해안가의 마을 '크로스비'의 성격을 미리 알려주기 위함이다. 헨리는 마치 그 마을 '크로스비'를 인격화한 모습과도 같다. '크로스비'는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육지와 바다의 이미지는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이미지이다. 나중에 상세히 말하겠지만 여기서는 그저 육지는 고정적인 삶의 모습을,  바다는 '타자'와도 같이 어떤 불가해한 것이며, 그렇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하는 이미지라는 정도로만 얘기해 두자. 그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은 언제나 그 두 가지가 끊임없이 교차하거나 서로 싸우고 있다는 걸 뜻한다. 해안가의 모래사장이 늘 밀물과 썰물이 넘나드는 것 처럼.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해안가 마을 크로스비에 사는 주민들 또한 늘 마음 한 구석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대표적으로 약국에 새로이 들어온 종업원 데니즈 때문에 불현듯 불륜의 유혹에 시달리는 헨리와 뒤늦게 깨달은 데이즈에 대한 사랑으로 갈등하는 하먼이다. 데니즈와 데이즈. 이 두 여자는 이름도 비슷하지만 둘 다 모두 헨리와 하먼에게 그들이 걸어온 시간속에 쌓아왔던 안정된 세계로 부터 벗어나 새로이 낯선 변화속으로 뛰어들기를 갈망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도 같다. 하지만 '경계에 서 있는 마을'답게 그들이 쉽게 그러지 못하도록 붙잡고 육지로 이끄는 중력이 있다. 그것은 세월이며 그 세월동안 차곡차곡 가꾸어 온 삶이며, 그 삶을 같이 꾸려온 '동반자'이다. 헨리에겐 올리브가, 하먼에겐 보니가 마치 깃대 처럼 그들을 매어 붙든다. 그렇게 헨리와 하먼은 간절히 바다를 꿈꾸지만 그들의 염원은 깃대에 매달린 깃발처럼 그저 한 곳에서 나부낄 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 된다. 

 여기서 굳이 헨리와 하먼을 인용하는 까닭은 결국 이 둘의 에피소드는 일종의 반복이며 사실은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헨리와 데니즈의 관계는  '굶주림'에서의 하먼과 데이지의 관계로 반복된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변화에 직면한다. 남은 건 그들의 선택 뿐이다. 거기에 한 사람의 죽음이 끼어든다. 그것도 같다. 여기서 타인의 죽음은 영원히 이대로일 것 같았던 삶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고정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더욱 더 확실한 계기로 작용한다. 이 계기들은 주인공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이기 위해 의도된 장치들이다.(의도는 이미 반복에 개입되어 있으니까, 이 장치들 또한 의도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하먼은 데이지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개심술 수술 뒤에 살아서 깨어날지 죽어서 깨어날지 모른다고 말했던 머크 루핀을 떠올린다. 여기서 보듯, 하먼으로 하여금 그 변화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삶의 불확실성이었다. 하지만 같은 걸 깨달았던 헨리는 그렇지 못했다. 너무 늙어버렸다는 자조적인 변명을 해대면서 데니즈에 대한 미련으로 조금씩 흔들리긴 하지만 결국 '올리브'란 깃대에 매어달리는 인생을 택해버리고 만다. 헨리가 그야말로 크로스비를 인격화한 인물이라고 본다면 이 선택은 왠지 수긍이 간다. 크로스비는 아주 유래가 깊은 마을로 그 기나긴 세월동안 이렇다 할 변화없이 그저 세월속에 웅크려 왔었던 마을이니까. 그렇게 오래도록 늘 바다를 동경하면서도 그 동경을 속으로 삭이면서 버텨왔던 마을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헨리가 안주하기를 선택하는 순간 스트라우트가 깔아놓은 또 하나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올리브 키터리지다. 우리는 헨리의 눈을 통해 올리브 키터리지의 단단한 인간성을 본다. 유악한 헨리의 눈인지라 그 단단함은 더욱 강조되어 나타난다. 그녀는 헨리가 속한 소우주의 중심이었고 어마어마한 인력으로 헨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력은 사실 헨리 자신의 어머니로 부터 그대로 이어져온 인력이다. 올리브는 자신의 시어머니 플린을 싫어하지만 사실 우리가 보기에 플린과 올리브는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람들도 헨리가 올리브와 같이 사는 건 자신의 어머니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 오래도록 길들여져 버린 인력 탓에 헨리는 갈망을 속으로 삭이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약국'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또 하나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등대처럼 높고 강인한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 이어져온... 하지만 이제 작가는 이 단단한 올리브 키터리지의 자아를 서서히 깨뜨려 갈 것이다. 

 마치 그런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두 번째의 단편 제목이 '밀물'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바로 여기서 앞에 '크로스비'의 마을을 설명하면서 단순하게 얘기했던 바다가 가지는 이미지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소설에서 바다가 전면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이것 밖에 없다. 여기서 오래도록 고향을 떠났다가 자살을 결심하고 다시 고향을 찾아온 케빈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올리브 키터리지를 만나게 되고 그들은 각자의 부모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물려받은 유전적 성향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다. '유전적으로 결정되어졌다'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똑같이 고정불변의 삶이라는 심연에 갇혀있는 존재들이다. 앞서 헨리 역시도 그가 떠나지 못했던 건 사실은 '어머니의 우주'였음이 드러났다. 어쩌면 케빈은 그렇게 헨리의 또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유전이라는 감옥에 갇혀 아무 변화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케빈이 끝내 다다른 종착역은 자살이었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케빈과 올리브는 바다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눈다. 자살의 결심은 삶이라는 육지의 끝에 서 있다는 것으로 해석 할수도 있으리라. 기이하게도 올리브 역시도 계속 자살한 아버지를 얘기한다. '약국'에서 보던 올리브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라 독자들이 의아하게 여길 정도로 생경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그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바다를 바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작가가 보여주는 바다의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 어떤 변화이다. 그리고 제목인 '밀물'에서 드러나듯이 그러한 바다가 몰려옴은 바로 '변화를 받아들임' 것임을 보여준다. 가장 고정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두 인물이 바다 앞에서 죽음을 읊조리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작가가 바다를 묘사하는 방식 역시 주목을 끈다. 그녀는 바다를 소용돌이 치는 아주 변화무상한 모습으로 묘사한다. 바다는 그렇게 한점의 고정적인 모습도 가지지 않는 곳으로 그려진다. 더구나 그런 변화무상한 모습은 케빈이 구하게 되는 패티가 입고 있는 치마의 휘몰아치는 모습으로 까지 강조된다. 그렇게 케빈은 결국 패티를 구하게 된다. 그가 힘차게 잡고 있는 패티의 팔뚝은 바로 밀물처럼 밀려드는 변화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하는 듯 하다. 그리고 작가는 아울러 패티의 팔이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는 것으로 케빈이 결코 자살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앞의 두 에피소드를 일부러 길게 얘기한 것은 이 두 에피소드가 올리브 키터리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삶에 있어서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변화를 상징하는 바다의 이미지이다. 이건 이 소설에서 일종의 기초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기초 작업을 다진 다음, 이제 본격적으로 올리브 키터리지의 그 단단했던 삶이 어떻게 허물어지고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2 - 2 : '피아노 연주자'에서 '다른 길' 까지 

 '피아노 연주자'에서 안젤라 오미라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현재의 삶과 유사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 만큼이나, 그녀가 연주하는 래퍼토리 만큼이나 그녀의 삶은 완벽한 하나의 경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런데 결말에 가서 그녀가 느닷없이 뺨을 맞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뒤이은 '작은 기쁨'에서 올리브 키터리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앤'을 며느리로 맞게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영원히 자신의 품에서 있을 줄만 알았던 크리스토퍼가 어느날 자신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앤'과 결혼한다는 것은 오미라가 뺨을 맞는 충격과 맞먹었을 것이다. 이건 그녀가 오미라처럼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던 그녀의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오미라는 다시 그 경계안에 안주하지만 올리브 키터리지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앤'의 물건을 훔쳐가는 것으로 변화를 일으킨다. 이게 시작이다. 올리브의 훔치는 행위 즉, 일종의 범죄는 이 소설에서 올리브가 둘러쓰고 있는 단단한 삶의 외피에 균열을 일으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범죄'에 내포된 의미 그대로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질서를 유린하고 넘나드는 것이 바로 범죄의 본질 이니까. 여기서 시작된 균열의 조짐은 훨씬 뒤의 에피소드인 '불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다음에 헨리의 또 다른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하먼이 등장하는 '굶주림'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헨리와 올리브가 결정적으로 (정신적으로)갈라지게 되는'다른 길'이 등장한다. 

 여기서, 이 에피소드들이 분명한 의도하에 배치되었음이 드러난다. 작가는 앞의 두 에피소드로 기초 공사를 끝낸 다음, '피아노 연주자'에서 '다른 길'까지, 올리브의 세계가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차례대로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바다의 이미지를 주목해야 한다. 바다는 '굶주림'에서 또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굶주림'은 마리나 카페에서 시작한다. 바닷가에 위치한 카페이자 '밀물'에서 케빈이 변화를 받아들였던 바로 그 곳이다. '굶주림'의 시작이 바로 마리나 카페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바로 그곳에서 그 역시 자신의 삶에 변화를 받아들이게 될 커플을 만나게 된다. 그가 애정을 가지게 되는 데이즈가 사는 곳 역시 바닷가에 위치한 '휴가용' 별장(얼마나 세심한 설정인가)이다. 이렇게 바다가 전면으로 나서면서 하먼 역시 케빈처럼 헨리와는 다르게 변화를 받아들인다. 이러한 바다의 이미지가 가진 의미는 뒤이은 '다른 길'에서 헨리와 올리브가 결정적으로 서로로 부터 떨어져 나가는 곳이 바로 하필이면 '바다 위'라는 것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이만큼 이르면 우리는 작가가 의도한 바다의 이미지를 무시하기가 정말 어려워지게 된다. 그렇게 바다는 변화를 의미하고 바다를 마주한 사람들은 그 변화를 받아들인다. 헨리 역시 바다 위에서 올리브와 결별하지 않는가! 그렇게 바다 위에서 올리브 역시도 이제 지금의 세계가 예전과는 달라져 버렸다는 것을 절감한다. 크리스토퍼는 자신에게서 멀리 떠나가 버렸고 헨리 역시 이제는 멀어져 버렸다. 그 바다 위에서 올리브는 "내 할머니라고 해서 내가 꼭 당신을 사랑하란 법은 없잖아요."라고 했던 한 아이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2 - 3 : '겨울 음악회' 부터 '불안' 까지 

  '겨울음악회' 부터 '불안'까지 이제 그녀는 아주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마치 늪에서 헤어나려면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봐야 한다는 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다른 길'에서 올리브가 느끼는 헨리와 이제는 결별했음에 대한 예감은 '겨울 음악회'에서 제인의 남편 '밥'의 외도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밥의 외도로 의심되어지는 장소가 '마이애미'에서 드러나듯이 밥 역시 헨리처럼 바다를 통해 변화를 마주한 것이 암시된다. 밥이 그러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은 '음악당 지붕이 언제 무너질 지 모른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삶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었다. 제인은 밥의 고백을 듣고도 그의 곁에 머물러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건 헨리와 완전히 떨어져 버렸음을 예감한 뒤의 올리브 마음을 간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살 날이 머지 않았는데 책망하느라 흘려보내기 싫기 때문이라고 제인은 그렇게 한 이유를 밝힌다. 헨리와 밥의 고백은 그녀들의 삶에 변화의 계기를 줄 수 있었지만 그녀들은 이제 그러기엔 너무도 늙어버렸음을 탓하며 자신의 껍질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 짧은 여생 동안 남은 건 서로 밖에 없다고 자위하며... 그런데 그것은 '약국'에서 헨리가 데니즈를 포기했었던 바로 그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겨울이야기'에서 헨리가 했던 것을 올리브로 하여금 반복하게 만든다. 그렇게 헨리가 데니즈가 포기하며 걸었던 길을 올리브도 똑같이 걷도록 만든다. 물론 의도적이다. 그렇게 포기했었던 헨리는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고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된 것이다. 헨리의 결심을 올리브가 반복했다는 것은 올리브 역시 헨리와 비슷한 길을 걸을 것이라 암시한다. 그렇게 뒤이어 '튤립'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튤립'은 소설에서 가장 육지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올리브가 가꾸는 정원의 '튤립'은 더욱 더 육지적인 그렇게 '고정적인 삶'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 가장 육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제목의 에피소드가 시작되는 곳이 인상적이다. 자녀의 범죄 때문에 자신의 집에 고립되어 살고 있는 라킨 부부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야먈로 육지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 고립된 라킨 부부는 올리브의 현재 모습이기도 하다. 심지어 라킨 부부는 한 집에서 일층과 이층으로 서로 따로 떨어져 지내고 있는 형편이다. 이 에피소드 내내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홀로 고립된 올리브이다. 헨리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지낸다. 육지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단편이 보여주고 있는 게 오로지 고립이란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거기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자기 보다 더 고립된 라킨 부부에서 위안 받으려다 오히려 조롱까지 당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작가는 '강위에 뿌연 안개가 걸려 있어 물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고 묘사한다. 변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순간 그녀는 가장 고립된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거기에서 그녀가 듣게되는 건 욕 뿐이었다. 물로 상징된 변화의 이미지와 육지로 상징된 고립의 이미지가 선명히 대조를 이루며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 뒤의 에피소드의 제목인 '여행바구니' 처럼 희망을 가지려 애쓴다. 그리고 희망은 두번째 결혼으로 뉴욕으로 이사한 아들의 부름으로 나타난다. 올리브는 희망에 차서 뉴욕으로 떠난다.(떠남은 그 이전 에피소드인 '병속의 배'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결국 배는 아무 곳으로 떠나지 못했다. 거기에서 드러나듯이 이는 뒤이은 '불안'에서 올리브의 여행이 아무런 결과를 얻게되지 못하리란 걸 암시한다.) 하지만 결국 올리브가 마주하게 된 것은 '여행바구니'가 그저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했듯이 아들과의 완전한 결별 뿐이다. 그녀는 이제 절감한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불안'의 끝장면이 떠나려는 '공항'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이제 그녀에게 떠나는 것 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 떠남일까? 단순히 크로스비... 그녀의 삶이 온전히 있을 수 있었던 그 곳으로? 아니다. 작가는 여기서 그 떠남이 바로 그러한 그녀의 삶에서 떠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삶으로의 떠남'이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보안요원의 말을 과감히 무시하는 일종의 '공무집행방해'라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여준다. 

 

 2 - 4 : '범죄자' 와 '강' 

 그리고 이 범죄의 단초는 이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엄격한 도덕적 질서를 강요받아오던 레베카가 처음으로 물건을 도둑질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의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범죄자'란 규정된 사회적 질서를 가로지르는 자를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경계를 넘나듬이고 올리브가 '불안'의 끝에서 했던 것도 바로 이 넘나듬이었다. 레베카는 이제 그것을 확장시킨다. 이 단편의 말미에 레베카의 집이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우리는 여기서 '불안'에서 끊임없이 올리브를 괴롭히던 소리를 떠올린다.)로 가득차는 것은 바로 이제 올리브와 레베카가 단단히 서 있던 육지가 완전히 유린되고 있음을 상징한다.(레베카의 과거 역시 올리브의 세계 만큼이나 고정적이고 획일적이었음을 우리는 그녀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 

 뒤이어 이 소설의 마지막 에피소드 '강' 이 나타난다. 소설에서 물의 이미지를 차용한 두 번째의 제목이다. '밀물'에서 자살까지 각오했던 케빈이 다시 '패티'라는 변화를 받아들였듯이, 밑바닥까지 떨어져버린 올리브,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않았음을 깨달아버린 올리브가 이제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리라는 것이 제목에서 부터 감지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규칙적으로 바닷가 산책로를 따라 달리기를 한다. 헨리도 떠나고 없는 지금 그녀는 여전히 혼자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매일 바다를 마주하고 달리고 있다. 산책로, 달리기, 바다... 이 에피소드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게 인상적이다. 그것은 그녀가 이제 세상과 자신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바로 그 산책로에서 그녀와 인연이 될 잭 케니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올리브는 하게 된다. 일찌기 경멸해 왔었고 거기다 산책로에서 구해준 것을 인연으로 데이트 비슷한 자리에서 알게 된 바 대로, 자신이 정말 싫어하는 부시에게 표를 던진 공화당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브는 그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변화가 전혀 낯설지 않다. 앞서 얘기한 대로 작가가 아주 공을 들여 세심하게 올리브가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차근차근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불안'의 에피소드가 아닐까 한다. 그녀는 아들의 집에서 세입자로 인해 한때 자신 역시 어떤 변화를 받아들이려 했었던 과거를 떠올린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과거의 기억으로 부터 이어지는 소리를 매일 들으며 그녀는 괴로워한다. 여기서 어쩐지 헤세의 '데미안'에서 그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아브락사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렇게 그 소리는 기억의 환기이자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일종의 신탁 같은 것으로 보인다. '불안'에서 '범죄자' 그리고 '강'으로 연결되는 에피소드는 보기에 따라 어쩌면 그리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강'에서 나타나는 올리브의 변화가 그저 속절없이 늙어감에 대한 일종의 타협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불안'에서 끊임없이 울려나오는 이 '소리'는  그 때부터 이미 올리브가 변화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임을 미리 감지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강'에서의 그 변화가 타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올리브 스스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만든다. '범죄자'에서 레베카가 자신의 의지로 가출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해 놓은 장치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3.  또 다른 시작 

 '강'에서 변한 올리브 키터리지의 모습 처럼 그렇게 자신의 단단하고도 완고한 껍질을 깨고 변화를 받아들이듯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작가가 타자의 얼굴로 체현되는 무한성에의 체험을 통해 자신을 열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달리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우기 주제를 위해 일련의 의도를 가지고 세심하게 아로 새긴 암시와 상징들은 이 소설 전체가 구조적으로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든다. 

 사실 지금까지 이렇게 에피소드들을  하나 하나 자세히 분석해 왔던 것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뚜렷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얼마나 체계적으로 그것을 아주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엮었는지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것에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미지수이다. 아무튼, 내가 이런 식으로 리뷰를 쓰게 된 것은 어떤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많이 읽었지만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공감의 깊이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에 대한 상찬은 많은데도 막상 이 소설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으로 세밀하게 연출되어 있는지, 그 하나 하나의 에피소드들에 담긴 설정, 묘사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쓰여졌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글은 보이지 않았다. 읽어 보면 스트라우트가 이 소설을 꽤 공을 들여 세공했다는 게 느껴지는데 거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내가 느낀 작가가 기울인 노력의 흔적들을 찾아 밝혀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오직 영화에만 왜 하필이면 굳이 저렇게 장면을 찍었을까 궁금증이 있으랴? 문학도 영화처럼 결국은 작가의 연출이고 보면 왜 작가가 그렇게 설정이나 연출을 했는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 문학은 그래도 세세히 일러주는 평론이라도 있을 수 있지만 외국소설의 경우에는 그나마도 없는 형편인지라 아마도 이런 리뷰만이 소설을 읽다가 생긴 궁금점들을 유일하게 해소할 수 있는 통로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리뷰를 썼다. 혹시나 소설을 읽고 '좋다. 훌륭하다. 하지만 왜 좋고 훌륭한지는 모르겠다.'라고 의문이 들었던 사람들 중에서 서정적인 감상으로만 그치지 않고 나처럼 뭔가 세세한 짚어보기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서... 그렇게 이 리뷰를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더욱 더 자세한 논의를 위한 대화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대화'라는 건 타인을 받아들이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그렇게 대화를 통해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올리브 키터리지'로 부터 느꼈던 것을 내면화하는 복기의 과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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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레이지 - Outrag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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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레이지를 보면서 떠오른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조직과 인간' 

이것은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의 오렌지'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간되어졌을 때 붙여진 제목이었습니다. 아마도 스탠리 큐브릭의 동명 영화가 상영금지되었기 때문에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없어서 그런 제목을 붙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정말 이 말 만큼 이 영화의 핵심을 보여주는 말은 없다고 생각되더군요.

처음 영화는 이제 부터 이야기의 중심이 될 야쿠자 조직이 얼마나 강고한 조직인가 부터 보여줍니다. 그것도 부하 - 중간 보스 - 최고 보스 이렇게 계급을 구분해서 차례 차례 말이죠. 

이것은 서열이 확실한 조직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서열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지극히 계산적으로 화면속의 담는 공간을 차차 줄여나갑니다. 부하들이 있는 텅 빈 공간에서
중간 보스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장면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것은 바로 최고 권력자 보스 한
사람의 클로즈 업... 이렇게 말이죠. 이것은 관객에게 지금 이 조직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
를 자연스럽게 알려주기 위함이죠. 

뒤이어 열을 지어 도로를 다니는 벤츠의 행렬은 바로 그 조직의 강고함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그렇게 한 대의 벤츠가 화면에 꽉 차 있을 때 '아웃레이지'란 제목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뒤이어 보스의 근심 - 중간보스 하나가 자신의 조직에 속하지 않는 보스와 어울려서 걱정이라고 오른팔에게 말하는 장면 - 이 나옵니다. 오른팔은 그 둘이 의형제라서 그런가보다고 대답하죠. 

관객에게 견고한 조직을 먼저 보여주었던 것이 바로 이 배신의 정도가 어느정도 의미가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 거기에 또 의형제라는 게 끼어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아주 익숙한 장르적 컨벤션을 발견하게되고 때문에 이 영화가 좀 진부한 주제를 다루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되죠.

아무튼, 마치 댓구를 이루듯 강고한 '조직'과 '배신, 의형제'라는 아주 인간적인 동기들이
나란히 등장하게 되는데 다케시는 바로 뒤이어 보스의 말을 통해 이 둘이 어떤 관계임을
바로 보여줍니다. 보스는 이렇게 말하죠. "아무리 의형제라도 조직을 위해선 용납할 수 없다."고 바로 여기서 이 둘의 관계가 상호 대치적인 관계, 그러니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시키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게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기타노 다케시는 조직과 인간의 이러한 상호 대치적인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구조적으로 장면들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한 장면 한 장면 무심하게 지나가는 듯 하면서도 은밀하게 배여든 계산은 바로 이 조직과 인간의 대립 관계가 이 영화의 핵심적 테마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의 전체 줄거리는 이렇게 통제하려는 조직과 어떻게든 그 조직을 뚫고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인간의 대립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너무도 익히 보아왔던 장르적컨벤션에 불과합니다. 진부한 이야기의 지루한 동어 반복에 불과한 이야기에 이토록 기타노 다케시가 공을 들였단 말인가 하고 의아해질 무렵 바로 여기서 다케시의 장르적 비틈이 일어납니다.

종종 익숙한 장르적 컨벤션에서 배신은 의형제라는 보다 더 고귀한 도덕적 가치로 인해 관객에게 정당화되곤 했었죠. 하지만 아웃레이지에서는 다릅니다. 다케시는 의형제를 순진하게 믿었던 관객들을 비웃습니다. 그렇게 의형제라는 게 사실은  그 중간 보스가 이익을 모두 가로채기 위해 상대편을 이용하기 위한 가장에 지나지 않았고 앞서 나왔던 조직의 안위를 염려했던 보스 역시도 사실은 그 중간보스의 수입을 가로채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줌으로서 말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다케시의 냉소를 봅니다.

그리고 그 냉소와 더불어 이렇게 말합니다.
'조직이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내세우는 '조직의 논리'라는 것이 사실은 '그 조직의 최고 위치에 있는 자' 개인의 이익 추구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종종 타인의 협력을 구하거나 이용하기 위해 내세우는 일종의 휴머니즘적 논리도 사실은 자신의 주머니를 보다 배불리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은,
기타노 다케시의 냉소가 이제는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가 다케시의 새로운 한걸음을 위한 전환점이진 않을까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사실 보다보면 '소나티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고 보스가 중간 보스의 영업권을 차지하기 위해 죽음으로 내몬다는 내용은 바로 소나티네와 똑같죠. 그 밖에도 많은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는 소나티네의 변주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유희'의 장면은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이미 '키쿠지로의 여름'에서 변주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곁가지로 말합니다만, 소나티네는 그 이후의 모든 작품, 그러니까 '브라더'까지 이어지는 모든 작품의 일종의 원형이 되는 작품으로 저에겐 여겨집니다. (물론 소나티네는 3X4-10월 에서 나왔습니다만...)

그런데 이 영화(아웃레이지) 이전의 작품들은 모두 개인의 내면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뭐랄까 '도대체 이 삶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 할까요.
영화가 자주 선택의 기로에 선 다케시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이유도 아마 그런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 '아웃레이지'에서는 그 질문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정말 얼마나 막되먹은 세상인가!'하는 새삼스러운 회한이 있습니다. 다케시가 영화에서 자주 장르적 컨벤션을 비틀어 보여주는 것도 그만큼 달라진 세상에 대해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의형제가 사실은 협잡이고 조직의 안위를 걱정하는 보스는 사실 자기 배 채울 일 밖에 생각하지 않고 손가락을 갖다 바치는 사죄는 조롱에 지나지 않고 윗분들 모르게 커미션을 떼먹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말이죠...


빙 돌아왔습니다만, 다시 본 얘기로 돌아가서...
이 영화의 핵심은 조직과 인간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애초부터 조직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개인의 이익 추구를 가리기 위한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한 아프리카 국가의 '대사관'이 '비밀 카지노'로 운영되는 이야기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죠. 사실 대사관 에피소드는 영화에 그렇게 필요불가결한 부분이 아닙니다. 아마도 분명히 다케시는 영화의 주제를 위해 일부러 대사관을 넣었을 것입니다. 대사관으로 상징되는 국가라는 외피속에 있는 것이 바로 '카지노'라는 지극히 개인의 이익 추구의 장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아프리카의 대사가 개인적인 이익 추구에만 전념했던 중간 보스를 삽으로 파묻는 장면은
아마도 다케시가 '조직의 이익' 운운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가장 뼈있는 냉소일 것입니다.
다케시의 진언대로 조직 자체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합니다.
있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이익 추구 뿐이지요.
 
하지만 순진하게 '조직의 이익'이라는 거짓말에 속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무라'와 그 부하들, 그리고 '다케시'와 그 부하들 입니다. 그들이 모두 죽는 것은 바로 이 거짓말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무라는 살아남습니다만,) 그들이 처벌받은 것이 오로지 조직의 이념 같은 것을 순진하게 믿고 따랐기 때문이란 건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조직의 이념'이란 '것은 보스에 대한 충성', '의리' 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사실은 보스의 이익 추구에 자발적으로 헌신토록 만드려는 도구 같은 것이죠.
'기무라와 그 부하들'과 '다케시와 그 부하들'의 유사성은 기무라 부하 하나가 달아나다 기차안에서 죽는 장면이 다케시의 부하 '미즈노'의 죽는 장면으로 반복된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모두 죽기전에 내연의 여자를 찾았고, 가는 도중에 살해되죠. 다케시는 이걸 일부러 반복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걸 반복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그 둘이 사실은 동일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죠. 이 때문에 결말 부분 다케시는 바로 기무라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결국 순진하게 믿었던 이들은 모두 죽고 오로지 약삭빠른 놈만 살아남습니다.
조직의 이익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들은 모조리 버리고 오로지 개인적 이익 추구에만 전념했던 사람들만 말이죠. 세상은 이제 그런 사람들만 살아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그런 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것으로 끝이나죠.

'아웃레이지'는 세상으로 향한 다케시의 첫 시선으로 보여집니다.
그 시선 속에서 그는 차가운 웃음을 짓습니다. 허탈한 체념이 짙게 배인 그런 웃음을 말이죠.
그는 이 영화에 그 시선 속에 들어온 세상의 참모습을 담고자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꾸며도 가득한 것은 오로지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 뿐이라는 그런 진실을 말이죠...

듣기에 2부가 또 나온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세상의 현상태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이 영화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그 뒤의 얘기는 무엇일까요? 혹시 그런 세상을 모조리 깨부수는 어떤 상상적 복수는 아닐까 감히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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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렌델 펭귄클래식 53
존 가드너 지음, 김전유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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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렌델은 매혹적입니다..
 하지만 난해합니다..
 씌여진 문장 하나하나는 마치 동 터오는 아침 햇살을 흠뻑 머금은
 이슬 처럼 영롱하건만, 전체를 놓고보면 그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쩐지 온통 수수께끼로 가득찬 암호문을 받아든 셜록 홈즈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렌델은 마치 사이렌의 노래소리와도 같아서
 스스로 미로일 것 알면서도 기꺼이 그 곳에서 헤메이게 만드는군요.
 그것도 열정적으로...

 문득 정신을 차리면, 난 가드너가 촘촘히 짜 놓은 거미줄 같은
 그렌델이라는 '미로'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여러 개의 출구로 보이는 듯한 길들이 각각 자신만의 가능성을 가지고
 저의 앞에 유혹적으로 열려있더군요

 저는 얼른 걸음을 떼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칫 하다가는 영원히 의미를 잃고
 헤매이게 될 것을 알기에...
 그 엄습하는 두려움 으로 테세우스를 미궁 속에서 건져내었던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습니다.

 여러 번 서성이는 걸음 속에서 불현듯 어둔 밤, 등대불에 우연히 포착된 어선과도 같이
 그런 실 같은 것을 잡았음을 느꼈습니다.
 이제 저는 걸음을 뗍니다. 그것이 이 미로속에서 날 빠져나가게 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내가 잡은 아리아드네의 실은 바로 '시(詩)'입니다.
 그렌델로 하여금 매혹시켜버렸던 셰이퍼가 읊조리던 바로 그 '시'...
 
 그런데 시란 무엇입니까?
 저는 여기서 하이데거를 떠올립니다. 하이데거는 시를 '진리의 현현'이라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지었고 존재란 참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존재는 존재자들에게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데, 그 존재가 유일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동일성을 지향하는 존재자들 너머 오로지 타자의 영역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데 그렇게 '시'라는 것 역시 절대적으로 타자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죠.
 시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아서 유한한 의미망으로 가둬둘 수 없기 때문이죠.
 완전히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미끌어지듯 빠져나가는 작은 물고기 같은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소설 그렌델에서 그의 어미가 '물고기를 조심하라'고 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는 것. 마치 고운 모래처럼 손에 쥐면 쥘 수록 빠져나가는 것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특성을 동일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바로 이 시의 특징 때문에 오로지
 존재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나중의 철학자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를테면 레비나스와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사람들이죠.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특히 이런 시의 기능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죠.(빈곤한 기억력 탓에 정확성을 담보하기는 어렵습니다.)
 '시란 정체성을 동일화시키려는 외부의 강요로 부터 벗어나려는 언어적 투쟁이다.'라고...

 저는 바로 이것이 그렌델을 매혹시켰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렌델은 인간의 기준에서 타자입니다.
 그건 존재론적으로 결정된 것이라 숙명적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압니다. 그건 인간과 교감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고 그래서 그건 그에게 유혹이 됩니다.
 그렌델은 고독합니다. 어미와 함께 자신의 종족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입니다.
 고독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권태.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인간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겐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구요.  농구 골대가 너무 높으면 아무도 공을 던지지 않지만
 낮으면 누구나 던져보려는 유혹을 가지듯이 그건 엄청난 유혹이죠.
 하지만 그도 압니다. 그가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을...
 그리고 숙명적으로 결정되어진 것을 영원히 바꾸지 못하리라는 것도...

 그래서 그는 서성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그에겐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 있어 완벽히 타자인 용의 세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 세계이죠.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완벽히 구분됩니다. 용의 세계는 동굴로 표상되고 인간 세계는
 연회장으로 표상됩니다. 동굴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고 연회장은 더불어 같이 있는
 공간이죠.
 용은 모든 걸 체념하고 자신만의 동굴에 기거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너 자신을 고립시키고 너만의 정체성 속에 머물러라. 그렇게 널 인간에게
 있어 완벽하게 타자의 영역에 두고 너 자신을 불가해한 것으로 만들어라'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용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로 구별되는 이 경계는 자신만의 주체성과
 타자와 동일하려는 욕구 사이의 경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렌델에게 이것이 양자택일적으로 선택이 강요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용의 말이 이것을 잘 대변해주고 있죠.
 "가치있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지켜라."라고
 그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우연일 수 밖에 없으니 너무 타자들에게
 연연해하지 말라고 설득합니다.
 물론 그렌델은 이 용의 말이 이성적으로 납득됩니다. 하지만 늦었습니다.
 그는 셰이퍼의 '시'를 이미 들어버렸으니까요.

 셰이퍼의 시를 듣고 그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그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자는 세상을 바꿔놓았고, 과거를 그 그 두껍고도 비틀어진
  뿌리까지 송두리째 들어내어 변화시켰다.'라고...

 저는 여기서 그렌델이 바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했던 시의 힘을 느꼈다고
 생각했습니다. 외부로 부터 양자택일적으로 강요되어지는 선택으로 부터 스스로를
 미끌어지게 하고 탈주시키는 그 힘을...
 양 자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또 모두에게 속할수도 있는 그리고 그 둘을 오히려
 초월할 수도 있는 그런 힘을 말이죠...

 그래서, 그렌델은 이제 스스로 시를 씁니다.
 셰이퍼가 하프를 켜며 그의 입을 통해 시를 말하듯이...
 그렌델은 그 자신의 이빨과 손으로 사지를 찟고 낭자한 선혈을 내뿜는
 잔혹의 시를 쓰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렌델의 인간 사냥은 일종의 인간이라는 타자와의 소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셰이퍼의 시에 오르내리게 됨으로서
 인간의 역사에 편입되게 되는 것이죠.

 이 기이한 교감 방식...
 제 생각엔 이것이야 말로 가드너의 '그렌델'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매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 그렌델이 셰이퍼의 죽음 이후 속절없이 최후를 맞이하는가가
 이해됩니다. 바로, 셰이퍼로 상징되어지는 '시'가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셰이퍼의 최후를 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시대의 종말이다.
  이제 다시 우리는 혼자다. 버림받은 채로...'

 시가 있음으로 해서 그렌델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타자들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셰이퍼의 죽음과
 더불어 시는 소멸했고 그는 인간에게 있어 완벽한 타자로만 남게되죠.
 물론 시가 사라진 이상 그는 더이상 하이데거가 말하는 영원히 불가해한 존재인
 타자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인간에게 포획된 타자이고 따라서 그는 동일화의
 욕구를 가진 존재자들에게 살해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자가 된 것입니다.
 존재자들은 동일화시키지 못하는 대상은 그냥 소멸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가 가진 '아리아드네의 실'입니다.
 시를 통해 그렌델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게 얼마나 설득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 출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렌델은 어마어마한 미로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 숨겨져있는 무궁무진함... 걸을 수록 새롭게 변화하는 그 의미들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또 다른 가느다란 실을 찾아 헤메이게 될 것만 같은 예감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도 말했듯이 좋은 텍스트는 언제나 여러 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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