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의 감옥
우라가 가즈히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우라다 가즈히로. 처음 만나보는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다. 놀랍게도 데뷔를 20살에 했다. 그것도 메피스토 상을 받아서. 역대 최연소란다. 물론 이런 사실이 작품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저렇게 어린 나이에 화려한 수상 경력까지 등에 업고서 등장했다면 아무래도 작품에 관심이 가게 된다. 더구나 그의 작품으론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장본인이 바로 '수면의 감옥'이다. 200페이지가 안되는 분량의 장편이다. 제목만으로는 내용이 얼른 짐작되지 않으실 분들이 계실 것 같다. 그 분들을 위하여 먼저 줄거리를 잠깐 소개해 본다면, 일단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다. 거기서 이제 막 연인이 된 나와 아야코는 아야코 집에 있는 지하실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계단에서 함께 굴러 떨어진다. 나는 다행히 별 상처를 입지 않았으나 아야코는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나, 우라가(주인공의 이름이 작가 이름과 같다.)는 '투명한 유리 너머에서 신생아처럼 조용히 숨을 쉬는' 아야코를 극진히 돌보지만 결국 그녀는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고 그렇게 우라가와 아야코는 미처 사랑의 달콤한 맛을 알기도 전에 씁쓸함만 그득 안고서 이별 아닌 이별을 한다.

 

 그리고 5년 후. 우라가는 바라던 대로 미스터리 작가가 되어 있다. 작가가 된 과정이나 되고 난 후의 모습이 실제 우라가 가스히로와 비슷하다. 그의 영화와 음악 취향, 그리고 CD와 LP를 수집하는 취미 모두 고스란히 작중 인물인 우라가에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현실성을 좀 더 가진다. 작가가 실제 출연하고 있는 것과 같으니까. 어쨌든, 그에겐 두 명의 친구가 있다. 하나는 요시노, 다른 하나는 기타자와. 이 둘은 우라가와 아야코에게 사고가 일어난 날, 그 집에 같이 있었다. 전날 과하게 마신 술로 우라가와 아야코에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들은 '자고 있었다'고 경찰에게 진술했다. 즉 그들도 누가 우라가와 아야코를 계단에서 떠밀었는지 모른다. 요시노와 기타자와는 우라가와 달리 아직 사회에 뿌리를 확실히 내리지 못했다. 둘다 프리터로 일하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 모두에게 아야코의 오빠로 부터 연락이 온다. '아야코의 물건을 정리하려 하는데, 아야코의 유일한 친구들인 너희가 와서 도와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우라가와 요시노 그리고 기타자와는 유달리 여동생에게 헌신했던 오빠에게  아야코가 그런 사고를 당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고 해서 아야코의 집으로 간다. 오빠는 그들을 지하실로 데려간다. 사건이 있던 날, 아야코가 우라가에게 보여주려 했던 바로 그 곳이다. 놀랍게도 그 곳은 핵폭발도 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방공호였다. 우라가 일행이 방공호로 들어가자, 오빠는 재빨리 빠져나와 그들을 방공호에 가둬 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야코를 만든 진범이 너희 가운데 있으니, 자백해라. 아니면 누구라도 알려달라. 그러면 풀어준다. 아니면 절대 거기서 나올 수 없다.'


 동시에 별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기서의 중심은 사에코라는 여성이다. 최근 그녀는 남자친구 히로시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것도 히로시가 자신의 친구와 눈이 맞는 바람에. 단번에 김건모의 노래 '잘못된 만남' 속 주인공이 되어버린 그녀는 히로시가 끝끝내 자신을 거부하자 복수를 하려든다. 요즘 인터넷을 통해 만난 사라코가 그러도록 부추겼다. 그녀는 자신이 고등학교 때 신이치란 친구의 집에 초대되어 갔다가 다섯 남자에게 윤간을 당했던 일을 고백하면서 사에코에게 교환 살인을 제안한다. 자신이 히로시를 죽여줄테니까 대신 사에코는 신이치를 죽여달라는 것이다. 사에코는 신이치에게 분노하는 마음도 있어 결국 수락한다. 그리고 갑자기 걸려온 친구의 전화로 히로시가 누군가에게 떠밀려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라코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에코는 자신도 신이치를 죽일 준비를 한다.


 이 둘은 얼른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엔 하나로 모인다. 과연 아야코를 그렇게 만든 범인은 누구일까? 사라코와 사에코의 교환 살인은 성공할까? 이런 궁금증으로 페이지를 넘기던 독자는 마지막에서 놀랄만한 반전을 경험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앞으로 가서 읽게 될 것이다.


 우라다 가즈히로의 '수면의 감옥'은 너무 더워서, 뇌수마저 바닥을 길 것만 같은 이런 때에 읽으면 좋을 작품이다. 일단 길이가 짧고, 두 개의 이야기가 병행하는 데다 반전도 여럿 장착되어 있지만 정작 이야기의 마당이 되는 구성 자체가 간단하여 집중력을 그다지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트릭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어쩌면 빨리 알아차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몰입을 방해하지는 않으니, 이게 또 우라가 가즈히로의 저력이랄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우라가 가즈히로의 저력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장르의 재활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딱 한 작품, 그것도 겨우 23세에 쓴 작품을 가지고 저력의 정체 운운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엄청 무리한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처 감행해 본다.)


 서툰 비유를 들자면 '냉장고를 부탁해'의 미스터리 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냉장고를 부탁해'는 타인의 냉장고에 이미 보관되어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자기 뜻대로 조리하여 하나의 음식을 만드는 것이 포인트다. 우라가도 똑같다. 장르 팬들에겐 이미 익숙한 장르의 재료들을 싹싹 가져와서는 자기 식대로 조합하여 색다른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냉장고를 부탁해'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작품의 질과 재미를 결정하는 것은 조리사의 솜씨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우라가는 꽤 솜씨 좋은 조리사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재료들을 재활용 하기에 이야기 자체는 그리 신선하다고 할 수 없다. '수면의 감옥'도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인데'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주는 뒷맛이 워낙 깔끔해 신선도를 높인다. 한 입 크게 베어물 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클래식 세트 - 전3권 더 클래식 시리즈
문학수 지음 / 돌베개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옛사랑이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하루는 베란다에 있는 벽장 정리를 했다. 그러다 이사 올 때 나중에 정리하겠다고 넣어두고는 지금까지 내내 잊어버리고 있었던, 클래식 CD가 빼곡하게 담긴 박스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넣어둔 것이 벌써 3년 전이다. 한 때는 누군가의 말처럼 하루라도 안 들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을 정도로 좋아했었는데, 어쩌다 3년이 되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되어버린 것일까? 케이스에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관심도, 열정도 그리고 사랑도 다 유통기한이란 것이 있다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그러나 기한이 있다고 해서 다 소진되는 것도 아니었다. CD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면서 그걸 깨달았다. 아주 어렵게 구해서 너무나 기뻤던 CD들이 있었고 이제는 만나볼 수 없는 이가 선물해 준 CD가 있었으며, 가장 힘들었던 때에 정처없이 떠났던 여행지의 한 가게에서 구매한 CD들도 있었다. CD에 얽혀 있는 그런 기억들이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마들렌처럼, CD를 보자마자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랬다. 어떤 것이든 그냥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관심이든, 열정이든 그리고 사랑이든 내가 쏟은 그만큼 그것은 확실히 남아있었다. 다만 나설 때가 아니기에,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든 자신을 불러줄 날을 기다리며. 그러니 이렇게 재회의 순간이 찾아오자, 내가 언제 잤냐는 듯이 부리나케 나와서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안아줄 수 있었겠지. 나는 그런 순간을 경험하고 있었고 그래서 CD 하나하나가 거기에 투영된 과거의 나와 만나게 하는 타임머신 같았다. 기억만이 아니었다. CD를 플레이 하면 그 선율이 가장 명징하게 나를 찾아왔던 순간의 내 감정과 생각마저 환기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랜만에 재회한 클래식을 다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를 보면 첫사랑과 아주 오랜만에 재회한 남자가 과거보다 더 열렬히 사랑하게 되는 일이 있는데 지금 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재회의 여파로 결국 난 세 권의 책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바로 현재 경향신문에서 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문학수 기자가 쓴  '더 클래식'이란 시리즈를 말이다.

 흔히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을 한다. 내가 경험해 보니, 클래식만큼 이 말이 잘 들어맞는 곳도 또 없는 것 같다. 단순히 듣는 것과 곡에 관련된 이런저런 정보와 사연들을 알고 듣는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작곡가가 어떤 시대적 상황 아래서 어떤 마음으로 곡을 썼으며 곡의 전개 방식 같은 것을 알고 들으면 모르고 들었을 때보다 훨씬 이해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질 뿐만 아니라 선율 또한 뇌리에 오래 남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작곡, 그 여자 작사'란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휴 그랜트와 드류 베리모어가 주인공 커플인데, 남자는 작곡가이고 여자는 작사가이다. 작곡가인 남자가 노래 가사를 무시하는 투로 말하자, 여자가 이렇게 항변한다.

 '선율이 처음 만난 누군가에게 끌리는 것과 같다면 가사는 그들이 대화를 하는 것과 같지. 가사는 그 만남에 그들만의 스토리를 주고 마법처럼 그들의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어줘.'
 
 클래식도 마찬가지다. 감상의 진정한 목적이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알고 들을 때라야 곡은 진짜 내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율을 그냥 듣기만 하는 것은 잎새 위를 흐르는 이슬과 같다.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을 잠시 감각할 수 있겠지만 내게 오래 머물지 못한다. 나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것은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걸 머물게 하고 나아가선 마음 속에 단단히 정박시킬 수 있는 것. 그 닻이 바로 곡에 대한 지식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나는 듣는 것만으로는 그치지 않고 거기에 대해 알려줄 책도 같이 찾았다. 그런 내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문학수 기자의 '더 클래식'이었던 것이다.

 나는 원래 이제는 고인이 되신 안동림 교수의 '이 한 장의 명반'이란 책으로 클래식에 입문했다. 사실 소장한 CD들 다수도 거기서 추천한 음반들이었다. 그 책을 다시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주가도, 음반도 너무 오래된 시절의 것이라 지금 다시 읽기에는 아무래도 세월의 격차가 컸다. 좀 더 시대를 따라잡은, 보다 업데이트 된 지식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더 클래식'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일단 외관이 날 사로잡았다. 마침 '더 클래식' 시리즈가 세 권으로 완결 되었는데, 그것을 기념하여 출판사에서 특별히 한정판 박스 세트를 내놓은 것이다. 외관이 클래식답게 중후했다. 겉면에 작곡가들의 이름을 새긴 글자체도 어딘가 서양의 고서(古書)를 연상시켜서 좋았다. 나는 이런 시각적인 것에 무척 약하다. 남들이 팔랑귀라고 한다면 나는 팔랑눈인 것이다. 사이렌의 노래 소리에 홀린 오디세우스와도 같이 외관이라는 미끼를 덥석 물어 버린 나는 이 책이 내 요구에 부응하는 책인지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풍문으로 들어보니, 내가 원하는 책 같았다. 하여, 좀 부담 되는 거금이었지만 아끼지 않고 바로 구입했다.

 그렇게 우리는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더 클래식 세트 한정판 박스의 외관.
항상 박스 세트 살 때 걱정되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박스가 약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다행히 박스는 튼튼해 잘 구겨질 것 같지 않았다. 부피도 두툼해서 소장할 맛이 제법 났다.

 표지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실 분들을 위하여 옆으로 펼쳐 전면을 담아 본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작곡가들의 이름이 이렇게 앞과 뒤로 새겨진 디자인이다.

  어느 정도 소장할 맛이 나는가를 확인시키기 위해 이번엔 세워서 펼쳐 보았다.
중앙 아래의 '101'이란 숫자가 보이는데  '더 클래식' 시리즈가 소개하는 곡이 모두 101곡인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하나 아쉬운 것은, 가죽 느낌이 나는 색을 입혔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더 고풍스럽고 소장할 맛이 나지 않았을까? 

 열면 이렇게 '더 클래식' 세 권과 책에 소개된 음반만 따로 모아 놓아서 음반 찾기에 편한 '더 클래식 추천 음반' 소책자가 함께 들어있다. 이 소책자는 '더 클래식 세트'를 구입하면 사은품으로도 받을 수 있는데, 나는 모르고 사은품으로 소책자를 주문했다. 이렇게 나처럼 두 권을 가지게 된 분들도 있을 것이다.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요즘 LP 재발매가 활발하게 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클래식이 가장 전성기였던 때가 그래도 LP 시절인지라 거기에 대한 향수를 나타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책 내용에 무척 어울리는 디자인이다. LP의 라벨을 책에서 소개하는 시대의 음악 분위기에 맞게 색깔을 달리한 것도 좋다.
 이렇게 나란히 놓아 보니, 언뜻 신호등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그것도 노렸으려나~^^

  뭔가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넣고 싶어 빈약한 머리를 총동원하여 낸 아이디어에 따라 CD를 배경으로 찍어 보았다.
이 사진을 찍은 것은 책을 다 읽고 난 뒤로, 책 아래의 CD들 하나하나가 내게 다 각별한 의미를 남긴 것처럼, 이 책도 이제 아주 각별해질 것 같다. 아마도 클래식을 벗하는 동안 내내 자주 들춰 보지 않을까 싶다.

 자, 외모는 실컷 감상했으니, 이제는 그 내면을 살필 차례다.
 과연, 나는 미끼에 현혹 당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원했던 바로 그 존재를 제대로 만난 것일까?

 인내심이 부족한 당신을 위하여 얼른 대답한다면, 후자다. 그렇다. 나는 내가 찾았던 책을 딱 만난 것이다. 
 그래도 리뷰랍시고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내 주관적인 기준에만 맞춰 이 책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리뷰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래도 타인의 공감을 얻을 때다. 그러니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책에 대해 말해 본다.

 보통 사람들에게 클래식의 위상이란 철학과 거의 비슷하다. 한 마디로 철학처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것이다. 다가가기엔 난해와 지루함의 허들이 너무 높은 탓이다. 그래서 철학을 너무나 사랑하여, 거기서 향유하는 행복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나눠주려고 대중화를 지향하는 이들은 되도록 쉽고 재밌게 철학을 설명하려 든다. 클래식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독자에 대한 배려'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수 기자의 '더 클래식'은 그런 배려가 넘치는 책이다.

 일단 책의 편집부터가 그러하다.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는 101곡을 소개하고 있는데, 각 곡을 한 챕터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말이다.

 101곡의 노래가 모두 위 사진처럼 시작하는데 색깔도, 밑의 그림도 다 다르다. 이렇게 시각적으로까지 모든 곡을 별개의 장으로 구분하여 그만큼 찾기 쉽고 기억하기 편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안동림의 '이 한 장의 명반'에 실린 사진이나 그림들은 대부분 흑백이라 시각적인 쾌감이 별로 없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런 것도 주려한 노력이 역력하게 느껴진다.( 옆의 CD는 이 꼭지에서 추천한 음반.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68년 녹음이다.)


 이렇게 작곡가의 사진(사진은 슈만이다.)과 곡에 관련된 그림들(아래)까지 큰 도판으로 삽입하여 더욱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많던데, 작가가 특별히 좋아하는 화가라 그런 것일까?(아래의 CD는 슈만의 '시인의 노래'에서 추천한 분덜리히의 음반.)
 

  이 그림이 실린 곳은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인데, 참 궁금했던 곡이었지만 정작 안동림의 '이 한 장의 명반'에는 소개되지 않아 많이 아쉬웠었다. 그런데 '더 클래식'엔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서 참 반가웠다. '더 클래식'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거기다 설명만 있었던 게 아니라 저자는 '이 곡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가사의 의미를 마음 속으로 따라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독일 레퀴엠의 노래 가사마저 다 번역해 실어 두었다. 마침 사진 아래에 있는 오토 클렘페레의 '독일 레퀴엠' 음반을 가지고 있어 번역한 가사를 옆에 두고서 음악을 감상해 보았다. 역시 모르고 들었을 때보다 곡에 투영된 정서들을 훨씬 더 살갑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만이 아니고 슈베르트, 슈만 그리고 말러에서도 그랬다. 노래가 나오면 번역한 가사를 적어 두었다. 이런 식으로 책은 독자들이 되도록 클래식과 쉽게 친해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물론 이런 경향은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곡의 설명에선 더욱 현저하다.

 클래식의 초심자나 문외한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한 어조로 쉽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여기서 안동림 교수의 '이 한 장의 명반'과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굳이 안동림의 '이 한 장의 명반'을 예로 든 것은, 지금까지 가장 대표적인 클래식 가이드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곡을 먼저 소개하고 마지막에 추천 음반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더 클래식'의 형식과 유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겹치는 곡들도 물론 많다. 그런 이유로 얼른 안동림 교수의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을 또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게 될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좀 더 최신의 지식을 얻고 싶어서 이 책을 구했지만(이제와 말하지만 '더 클래식'은 그런 내 요구에 부응했다. 무엇보다 추천 음반인데, 최근의 녹음까지 다 섭렵해서 좋은 음반을 소개해 놓아 마침 최근엔 어떤 좋은 음반들이 있나 궁금했던 마음을 풀어주었다. 국내에서 구입 가능한 음반 위주로 추천한 것도 이 책을 더욱 마음에 들게 했다.), 그렇지 않을 분들도 많으실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안동림 교수의 책과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에 대해 말해 보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책만이 가진 가치가 더 한층 잘 부각되지 않을까 한다.


 일단 안동림 교수의 '이 한 장의 명반'은 곡의 소개로 직접 뛰어든다. 그러니까 작가에 대한 설명과 그 작가가 어떻게 이런 곡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것보다 곡 자체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클래식'은 같은 곡이더라도 원근법으로 접근한다.


 먼저 가장 넓은 범위의 시대적 상황을 훑은 다음, 보다 범위를 좁혀서 작곡가의 생애를 더듬고 그리고 마침내 곡 자체로 다가간다. 그래서 곡에 대한 설명만 들을 때보다 훨씬 더 입체적으로 그 곡을 이해하게 만든다. 물론 그 곡이 태어난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되므로 곡을 더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3권의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가 대표적이다. 안동림 교수의 책에선 이 곡을 쓰게 된 말러의 상황이 잠깐만 언급되고 노래 소개에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반면 문학수 기자는 '말러가 쓴 교향곡 상당수가 그 음악적인 씨앗은 노래에 있다'고 하면서 그가 노래에 몰두하게 된 배경을 작가의 삶을 통하여 먼저 독자에게 상세하게 알려주려 한다. 그것을 통해 독자는 말러가 일찍부터 가난과 폭력 그리고 비극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노래가 바로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며 말러 개인의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노래 속에 은밀히 깃들었던 말러 자신의 초상이 독자 눈 앞에 서서히 드러나는 것과도 같다. 이제 음악은 말러의 발화가 되고, 독자의 감상은 대화가 되어간다. 음악이 독자의 피부 가까이 와 닿을 수밖에 없다. 노래의 가사가 선율에 스토리를 부여하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대화를 통해 음악과 청자 둘의 관계를 확실히 맺듯이, 문학수 기자가 소개한 말러의 생애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설명 방식은 세 권 모두에 걸쳐 지속적으로 투영되어 있는 신념의 소산이기도 하다. 그는 음악이 결코 그것을 만든 사람과 또 그것을 둘러싼 사회와 별개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과 개인 그리고 사회는 상호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이 음악 자체에 대한 소개 보다는 그것을 만들고 낳아버린 사람과 사회에 대한 설명을 보다 많은 비중으로 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독자는 음악만 보았을 때는 보지 못했던 면을 주시하게 되고, 덕분에 음악에 대한 이해도 좀 더 범주를 넓혀서 입체적으로 하게 된다. 무엇보다 음악을 단순한 추상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도 현실적인 삶의 희노애락과 구체적인 욕망과 이상까지 투영된.


 이런 이유로 설사 나처럼 '이 한 장의 명반'을 읽었더라도 이 책을 만나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곡을 전혀 다르게 볼 수 있게도 하고, 거기서 접해보지 못했던 곡에 대한 사연을 여기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물론 클래식을 즐겨 듣는 사람에겐 이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같은 곡도 저마다 다른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다양한 버전(version)으로 감상하는데는 이미 익숙하니까 말이다. '이 한 장의 명반'과 '더 클래식'도 그렇게 읽으면 될 것 같다.


 결국 이 책은 몸(형식)과 마음(내용)을 다하여 클래식이 어렵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을 클래식과의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고, 몰랐던 매력을 보고 알게 하여 독자 쪽에서 먼저 다가가도록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문외한과 초심자만 만족시키는 책은 아니다. 내가 그랬듯이 어느 정도 클래식과 친숙한 사람들도 이 책에 녹아든 곡이 탄생한 시대의 상황이나 작곡가의 삶을 통해 설령 아주 익숙한 곡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문외한과 초심자 그리고 기성의 팬들 모두를 두루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클래식'은 클래식 가이드로서는 감히 최고의 책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예전에 '이 한 장의 명반'이 클래식 가이드로써 차지했던 위상과 역할을 이제 '더 클래식'이 물려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서양에서 상품 이름이나 제목에 '더(THE)'를 붙일 때는, 동종의 상품이나 작품에 비추어서 더 뛰어날 자신이 있을 때다. 내 생각엔 충분히 그럴만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칼리의 노래 버티고 시리즈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페리온'과 '일리움' 시리즈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작가 댄 시먼스는 가장 좋아하는 SF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내 이름은 콘라드'나 '신들의 사회'의 로저 젤라즈니처럼 신화와 과학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뒤섞는 게 그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데뷔작 '칼리의 노래'는 뜻밖에도 공포 소설이다. '칼리'는 잘 알다시피 인도 신화에 나오는 존재다. 그녀는 파괴신 시바의 아내로 살인을 즐기기 때문에 인도 신화에서 가장 무서운 신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은 그런 칼리를 떠 받드는 것으로 알려진 인도의 도시 캘커타를 중심으로 하여 칼리와 관련된 아주 무섭고 참혹한 이야기를 담는다.


사진은 20주년 기념판의 표지. 칼리와 그녀를 비밀리에 숭배하는 도시 캘커타를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1985년에 나왔다. 시기를 일부러 언급하는 것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있어, 소설이 쓰인 시대의 상황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 때의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70년대 후반에 흐르고 있던 데탕트를 백지화 시켜버렸다. 미국은 소련에게 50년대에 그랬듯이 다시 강경 대응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위해 군비를 증강시켰다. 그렇게 미국과 소련은 신냉전시대로 접어들었다. 레이건은 그렇게 되길 원했다. 그래야 미국이 자유 세계의 리더로 군림하고 자기 아래에 있는 나라들이 아무런 찍소리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련이 다시 자유세계의 주적으로 떠오르면 힘이 부족한 나라들은 미국의 입김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 마디로 레이건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같은 굳건한 위계 질서로 이루어진 국제사회를 원한 것이다. 물론 그 최상층은 미국이 차지하고 말이다. 그런데 레이건의 소망은 나라 외부에만 그치지 않고 나라 내부로도 향했다. 국민들 사이에도 그런 위계 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부유층 감세가 주 목적인 레이거노믹스를 단행했다. 그는 규제를 완화했고 고용과 복지에 들어가는 정부 지출도 대폭 축소했다.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졌고, 있는 자는 점점 더 살기 좋아졌고, 없는 자는 날이 갈수록 사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들 사이에 절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의 질서가 점차 만들어져 갔다. 인도의 카스트 계급과도 같이.


 이것이 또한 레이건이 신냉전체제를 원했던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신냉전체제가 되면 외부의 갈등이 내부의 갈등 보다 더 커져서 국민들의 눈은 자연히 그 쪽으로 쏠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처지가 점점 열악하게 되어도 관심을 갖거나 저항하는 것이 적어지기 마련이다. 그들에겐 자유 세계의 리더 국가의 국민이라는 프라이드가 있고, 그들의 부족한 재화는 막강한 군사력을 통해 강요한 불공정 무역으로 다른 나라들에게서 충당될 테니까 말이다. 레이건의 모든 정책은 가장 상위에 있는 오직 하나의 존재를 위해서만 시행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캘커타가 오로지 가장 위에 있는 칼리를 위해 존재한 것과 똑같이.



 '칼리의 노래'는 바로 그런 시대를 은유하고 있다. 시먼스가 하필이면 인도를 소설의 배경으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상위에 군림하는 살인의 신 칼리를 통해 현재 미국이 만들고 있는 시대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의 결말에 이르면 선명하게 부각된다. 때로는 별다른 소개 없이 무작정 이야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더 좋은 소설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칼리의 노래'가 그러하다. 처음엔 평이하게 흐르다가, 느닷없이 당신의 모골을 송연히 만드는 장면을 만날 것이며, 시먼스가 이런 기괴한 상상력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이야기를 만날 것이다. 이야기가 워낙 몰입도가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읽은 보람을 충분히 가지겠지만, '칼리의 노래' 내면엔 점점 암흑으로 치닫고 있는 당대에 대한 우려와 고민이 깊이 서려 있다. 시먼스는 타자와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함부로 우열을 가리고 그것을 통해 타자를 배척하는 곳은 어디나 공포와 살인으로 가득찬 칼리의 노래가 울려퍼질 것이라 예언한다. 그 예언은 지금 맞아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단지 혐오한다는 이유만으로 죄없는 사람을 공격하고 살인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 칼리의 노래를 멈추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시먼스는 그것을 배려와 용서라고 말한다. 그런 마음은 무엇보다 주인공의 아내 암리타에게서 재현된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고향인 인도로 돌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카스트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 여인 하나가 잔디 깎는 일을 하다가 감전 당하는 것을 발견한다. 여인 주위에 많은 인도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여인이 쓰러진 것을 보고도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는다. 불가촉천민이기 때문이다. 여인을 도와주었던 것은 오직 암리타 뿐이었다. 오로지 여인을 도와야한다는 생각에 암리타가 앞뒤 따지지 않고 나선 덕분에 여인을 살릴 수 있었다. 이런 암리타의 고백은 불가촉천민이 당하는 고통이 세계 보편이라고 말하는 캘커타 부유층 인사에 반하여 나왔다. 암리타는 보편이라고 해서 용납되는 고통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렇게 밝힌 것이다.


 사실 '칼리의 노래'는 세익스피어의 '태풍(템페스트)'와 유사하다.


 '태풍'은 난파 중인 배로 시작한다. 불안과 죽음의 공포가 가득한 세상이다. 그렇기에 그 배는 칼리의 노래에 현혹된 캘커타라고 해도 무방하다. 거기서는 누구나 제 목숨을 보전하려 애쓸 뿐, 아무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은 그저 남의 불행일 뿐이다. 그런 '태풍'의 세계에 구원을 가져 오는 것은 프로스페로의 딸 '미란다'다. 미란다는 난파 중인 배의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마치 자신이 당하는 양 공감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는 타인의 아픔을 보면서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이었으나 결국 그런 그녀의 마음이 복수심에 지배되어 오직 자신을 이렇게 만든 적들을 파멸시킬 궁리만 하고 있었던 아버지 프로스페로를 감명시켜, 심판과 멸망으로 끝나버릴 뻔 했던 세계마저 구하게 된다. '칼리의 노래'에서 암리타가 하는 일을 미란다가 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 난파 중인 배를 미란다가 애통해하며 보고 있다.


  그렇다면 소설의 주인공이자 암리타의 남편인 루잭은 '태풍'의 칼리반이라 할 수 있다.

 칼리번은 프로스페로의 하인이지만 속으론 항상 프로스페로에게 반항하면서 언제든 그의 질서를 전복시키고 말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마치 루잭이 그런 칼리번인 것을 암시하듯이, 이미 칼리의 세상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하는 다스에게 루잭은 이렇게 말한다.


 "반항도 일종의 희망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p. 264)


 보는 방향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존재가 바로 칼리반이다. 칼리반과 미란다 그리고 프로스페로는 이렇게 하나의 유사 가족 형태를 취하고 있다. 미란다는 프로스페로의 친딸이나 칼리반은 아니다. 이런 미란다와 칼리번이 '칼리의 노래'에선 암리타와 루잭 부부로 재현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칼리의 노래'는 '태풍'과 유사한 면이 있으며 '태풍'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칼리의 노래'에 담겨진 진심이 더욱 잘 드러난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 칼리의 노래에 반하여 자신의 신념을 당당히 밝힌 유일한 인물에게 '암리타'라는 이름을 준 것도 의미심장하다. '암리타'는 인도 신화에서 신들이 마시는 음료의 이름이다. 그 음료를 마시면 불사(不死)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칼리도 자신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기 위해 익사한 시신을 되살린다.


 다시 말해 소설엔 두 개의 불사(不死)가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는 타자의 고통을 배려하는 측은지심이 가져오는 불사(不死)이고, 다른 하나는 레이건이 원했던 것처럼 오로지 타인의 파괴를 통해 나의 것만 영속시키는 불사(不死)이다. 어떤 것이 진정한 불사(不死)일까? 그 답은 소설을 읽으면 자연히 알게 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나 무더운 여름입니다. 원래 손에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라 그렇지 않아도 여름엔 책 읽기가 힘든데, 이제는 살인적인 무더위마저 가세해 책 읽기가 여간 어렵지 않네요. 덕분에 한동안 손놓고 있었던 영화를 보게 되는군요. 주말엔 소장한 DVD로 호금전의 '소오강호'를 봤습니다.

  최가박당으로 유명한 허관걸이 '소오강호'의 주인공 영호충 역을 맡았었죠.

   

 

  영화는 1990년에 나왔습니다. 당시 무협영화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호금전이 오래만에 일선에 복귀해 홍콩 뉴웨이브의 기수 서극과 함께 만든 영화입니다. 김용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만든 것으로, 영화로 만든 것은 78년의 왕우가 주연한 영화에 이어 두 번째라는 군요.

 

 

 호금전과 서극의 만남은 당시의 영화 팬들을 몹시도 흥분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신구세대의 거장들이 힘을 합하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겠죠. 하지만 삼국지에서 주유가 제갈 공명을 두고 '어찌 하늘이 이 주유를 천하에 태어나게 놓고도 또 제갈 공명을 태어나게 한 것인가?'라고 한탄했듯이 역시나 자신의 세계가 확고하고 뛰어난 두 사람이 힘을 합치기는 어려운 일인지 호금전은 연출 방향을 두고 서극과 불화를 일으키다 결국 중도하차하고 맙니다. 당시의 호금전은 '협녀'에서 해왔던 대로 경극과도 같은 동선과 군무와 같은 무예의 합을 그리는 식으로 아날로그 방식에 충실할 것을 주장했지만 서극은 '접변'이나 '천녀유혼'에서 그랬듯이 미국에서 세례를 받은 특수효과를 더욱 많이 쓰려고 하였기에 일어난 불화였죠.


 그래서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연출이 앞과 뒤가 다릅니다. 그건 전반부의 좌냉선과 영호충 일행이 풍랑당의 배에서 벌이는 무예 장면과 후반에 대내동창과 악불군이 벌이는 무예 장면만 비교해 봐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서극은 이 영화의 감독으로 '호금전'의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원래 호금전이 이 영화에 참여한 것은 평소 호금전을 존경한 서극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이었죠. 결국 중도 하차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존경의 의미에서, 그리고 또한 그가 감독으로서 영화에서 이루어 놓은 부분이 적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것 같습니다.


 이런 화면 구도는 그야말로 호금전의 것이죠.

 

 영화는 무상함에 대한 것입니다.

 힘과 권력에 대한 무상함, 정파와 사파를 나누는 것의 무상함 같은 것들을 말이죠. 제목의 '소오강호'는 영화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대내동창의 앞잡이 좌냉선의 추적을 피해 영호충 일행이 우연히 숨어든 배에서 만나게 되는 일월신교의 신도 노귀('강시선생'으로 유명한 임정영이 연기했습니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셨죠.)와 풍랑당 당주 노곡('천녀유혼'의 은둔 고수를 연기했던 '우마'가 분했습니다. 이 분도 폐암으로 타계하셨군요.)이, 한 사람은 정파(풍랑당)로 또 한 사람은 사파(일월신교)로 서로 다른 쪽에 서 있었지만 그래도 30년간의 우정은 변치 않았고 그러면서도 그 우정을 숨겨야 했던 스스로의 처지에 대해 도대체 이러한 이념 따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의 취지로 지은 노래를 이르는 것입니다. 이들의 관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소오강호'는 실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중국과 홍콩에 대한 것입니다. 영화가 추구하는 무상함은 중국과 홍콩이 취하고 있는 다름과 반목의 무상함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사실 영화의 주제는 바로 그 노래 가사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특히나 풍랑당의 교주 노곡이 그 후임자에게 하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풍랑이 없으면 강호를 이룰 수 없고  

  은원이 없으면 영웅호걸이 나오지 않는 법이네...

  그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잊지말게..."

 

 생각해보면 정파와 사파로 이리저리 사람을 나누는 것은 모두, 나중에 풍청양이 이야기하듯이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이고 결국 그 권력욕의 본질엔, 후반에 장학우가 분했던 구양전이 그러하듯이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등이 그러한 힘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낳게 하는 것이죠. 영화에서 가장 커다란 악역인 대내동창도 사실은 규화보전이 강탈 당했다는 사실이 들통나 정적들이 모함으로 자신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그리 맹렬한 추격에 나선 것이었구요. 


 본질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풍랑당 당주 노곡은 그러한 두려움을 기꺼이 껴안아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두려움이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임을 잊지말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 노귀와 노곡의 이야기가 정파와 사파로 나누는, 그렇게 사람을 이런 저런 외부의 것으로 나누는 짓의 헛됨을 보여준다면 영호충이 추격을 당하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풍청양의 이야기는 힘과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독고구검'이라는 강호 제일의 무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사는데 영호충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합니다.

 

  "강한 무공을 가지더라도 소인배들이 가족을 가지고 위협하면 무력해질 수 밖에 없는 일이네. 인간의 감정 앞에선 무공은 힘을 발하지 못하는 법이지. 그래서 나는 강호를 떠났네. 가족도 떠났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러한 풍청양의 고백은 영화 초반 규화보전을 훔쳤다고 의심받는 임진남의 집을 대내동창이 좌냉선을 앞세워 습격했을 때, 임진남 앞에서 아내의 두 눈과 혀를 잘라버리는 데도 무력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모습을 이미 관객들이 보았기 때문에 더욱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힘을 쫓지 말고, 이름만큼 허망한 것도 없으니 명예도 쫓지 말며,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을 쫓으라고 말하는 것이 꽤나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절기 '독고구검'을 영호충에게 전수해 줍니다. 영호충이 자신에게 전수한 검법이 무엇인지 묻자, 풍청양은 그건 '독고구검'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 패배에서 나온 검법이라네."

 

  강호에서 가장 강한 무공인 '독고구검'은 풍청양이 숱한 패배에서 얻었던 교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검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앞서 노곡이 말했던 '풍랑이 없으면 강호를 이룰 수 없고, 은원이 없으면 영웅 호걸이 나오지 않는다.'란 말과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기고 지는,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소오강호' 노래의 가사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오직 하늘만이 알 뿐이니.'

 

 즉 진정한 승자와 패자는 오로지 하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순간의 승자와 패자로 모든 것을 이겼다, 졌다로 구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승패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거대한 삶이라는 시간 앞에서 새벽 첫 햇살에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이슬과도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정파와 사파로 이리저리 사람을 나누는 것도,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힘과 권력을 쫓는 일도 말이죠. 결국 영호충의 스승, 악불군은 제자까지 죽여가면서 '규화보전'이라는 힘과 권력을 얻으려다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딸에게마저 버림을 받고 말죠. 그가 마지막에 찢어 하늘에 날려보내는 피에 물든 '소오강호' 악보는 피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깨우치게 된 무상함의 은유인지도 모릅니다.

 

 소오강호는 김용의 원작에 그리 충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야기는 재미있고 무예의 연출도 멋집니다. 하지만 더욱 좋은 것은 이런 식의 삶에 대한 통찰입니다. 이러한 통찰들이 관객들의 주목을 끌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뜻 스쳐가듯 묘사되어서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때?' 하는 식으로 그리 강요하듯 제시되지 않는 까닭에 더욱 마음에 듭니다.

 

 


 











제가 소장한 것은 검색되지 않는군요. 할 수 없이 블루레이를 링크합니다 ㅠ 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전설의 확인이었다.

 59년에 나온 이 영화는 97년에 나온 타이타닉에 의해 기록이 깨어질 때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아카데미 영화제 12개 부문에 수상 후보로 오른(그 중에서 11개 부문을 수상했다.) 유일한 영화로 영화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그리고 이 기록은 2003년,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에 의해 다시 한 번 깨어졌다.) 아직 못 읽었는데도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아주 많이 읽은 것처럼 생각되는 책이 있듯이, 영화에도 그런 게 있다. 내게는 ‘벤허’가 그랬다. 일 때문에 나이 드신 분들과 이런저런 술자리를 가질 때가 많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꼭 ‘벤허’를 보았냐고 물었다. ‘아직…’이라고 대답하면, ‘허, 그 명작을 아직 못 봤다고, 당장 보게나. 내 인생의 영화야.’ 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거기다 TV에서 하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볼라치면, 참 자주 보이던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 그렇게 귀에 익고, 눈에 익었기에 ‘벤허’는 내게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느껴지던 영화였다. 어떤 분은 ‘이제 봐도, 진정한 벤허의 매력은 못 느끼지. 벤허는 반드시 커다란 화면으로 봐야, 영화가 가진 스펙터클을 제대로 느낄 수 있거든.’이란 말도 하셔서, 내 인생에 벤허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영영 오지 않겠구나 여겼는데, 웬걸 그런 기회가 불현듯 찾아왔다. ‘벤허’가 극장에서 재개봉된 것이다.


 

 알고보니 재개봉이 처음도 아니었다. 62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봉된 뒤로 72년, 88년, 97년, 2007년 등 10년을 주기로 꾸준하게 재개봉되어 왔었다. 이번의 재개봉도 그 주기에 속해 있었다. 이렇게나 꾸준하게 재개봉된 것만 봐도 많은 어르신들이 당신 인생의 영화로 꼽는 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내겐 모처럼 찾아온 소중한 기회.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 누리기로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말 좋은 영화는 시대를 초월해 늘 똑같은 평가를 가지도록 한다는 것을. 단언컨대, 좋은 영화였다. 상영 시간이 길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원래 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들은 다 길었으니까. 그런데도 이야기에 푹 잠겨서 보았다. 

 

 전차 경주 장면은 지금봐도 정말 압권이었다. 너무나 실감나고 박진감이 넘쳤기에, 그 때는 정말 CG 기술도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이렇게 찍을 수 있었는지 그 촬영 과정이 몹시도 궁금할 정도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장면에만 들어간 제작비가 100만 달러라고 했다. 그리고 동원된 엑스트라만 해도 만 오천 명. 물론 경기장도 이탈리아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 실제로 세워진 것이었다. 전차도 모두 18 개가 제작되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중 반만 실제 경주 장면에 사용되었다. 영화를 보면, 단 번에 찍은 것 같은데, 무려 5주에 걸쳐 찍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5주 동안 찍은 것이, 마치 하루에 컷 없이 찍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할 수 있는지. 왜 이 영화가 아카데미 편집상을 탔는지 납득하는 순간이었다.

 


 제작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영화의 총 제작비는 천 오백 구십만 달러라고 한다. 제작 연도가 50년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천문학적인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실로 엄청난 규모의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것을 다 제외하고 출연한 인원만 보더라도, 대사가 있는 인물만 350명이고 엑스트라는 5만명에 이르니까 말이다. 이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몇몇 영화 비평가들은 ‘벤허’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수익은 7배 가까이 났다. ‘벤허’는 무려 7천 4백 7십만 달러를 벌여들여 당시 파산 직전이었던 MGM을 기사회생시켰다. 이만한 규모의 영화를 감독이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물론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는 영화 제작의 전반적인 통제가 감독 보다는 프로듀서에 더 많이 이뤄진다고 하지만, 이 만한 규모에다 장시간 상영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흥행면에서나 비평적인 면에서나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것은 분명 감독의 역량이다.) 그걸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해낸 것이다.

 

 윌리엄 와일러는 1902년에 태어났다. 스위스 알자스 출신이나, 그 때는 독일 영토였다. 그리고 와일러는 유태인이었다. 그는 1923년에 미국 헐리우드로 건너갔지만, 2차 대전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 지는 이걸로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그는 공군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그 전쟁의 경험과 귀환한 뒤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영화사에 길이남을 최고 걸작, ‘우리 생애 최고의 해’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얼마나 대단한 지를 알려면 폴 오스터의 ‘선셋 파크’를 읽어보면 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6)


 그는 성공한 삶보다 실패와 전락한 삶을 그릴 때 훨씬 더 뛰어났는데, 그것은 그 역시 인생의 부침(浮沈)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가 헐리우드에서 초기 경력을 쌓을 때, 그는 “쓸모 없는 와일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화 ‘벤허’에서 과거의 화려한 삶에서 추락한 벤허의 좌절과 고통이 실감났던 것도, 그런 인생의 그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는 대립 보다는 평화를, 갈등 보다는 화해를 강조했던 감독이었다. 유태인으로서, 독일의 만행까지 목격한 그로서는 더욱 반전(反戰)이 신념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우리 생애 최고의 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경향은 오드리 햅번의 매력을 미국에 최초로 알린 ‘로마의 휴일’에서도, ‘우정어린 설복’과 ‘벤허’ 바로 전에 만들어진 ‘빅 컨츄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우정어린 설복 (1956)


빅 컨츄리 (1958)

 

 물론 ‘벤허’는 남북 전쟁 당시 장교로 복무한 루 윌리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바로 전작 ‘빅 컨츄리’와도 설정이 유사하다. ‘빅 컨츄리’는 농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을 둘러싸고 두 가문이 갈등을 일으키는 영화였다. ‘벤허’도 메살라와 벤허의 갈등 구도다. 이런 ‘벤허’의 설정은 사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과 상당히 닮아있다. '벤허'의 이야기를 단순히 말하자면,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가 자기보다 못한 친구가 그것을 질투하여 음모에 빠뜨리는 바람에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러다가 마치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아주 우연한 인연으로 기사 회생하여 다시 친구에게 복수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다. 하지만 루 윌리스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발현된 용서가 ‘벤허’를 ‘몬테 크리스토 백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만든다.

 

 ‘벤허’를 쓴 루 윌리스는 원래 무신론자였다. 그는 남북 전쟁을 몸소 경험했고 전쟁의 참화를 통해 신은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현재 미국이 떠받들고 있는 예수가 실은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려 했다. 그는 자기가 모을 수 있는 한 최대치로 예수의 자료를 모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실제 예수가 복음을 전파했다는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이스라엘까지 몇 차례나 실제로 답사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는 예수가 실존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신은 있다고 믿게 되었고, 그런 회심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벤허’였던 것이다. 즉 소설 ‘벤허’에서 ‘벤허’는 루 윌리스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통해 얻게 된 믿음을 바탕으로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도 구원은 도래할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상대방을 용서하고 사랑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소설로 보여주었다. 윌리엄 와일러도 이것을 강조한다. ‘우정어린 설복’은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반전을 부르짓는 영화이며, ‘빅 컨츄리’는 현재 미국의 기원이라는 서부 개척 시대로 돌아가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영화다(.이 영화에서 윌리엄 와일러와 맺은 인연으로 찰턴 헤스턴은 ‘벤허’의 주연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윌리엄 와일러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내내 반전 그리고 용서와 화해를 말해왔다. 왜 그는 이렇게 줄기차게 이런 말을 해온 것일까? 그것은 이 영화들이 만들어졌던 시대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바로 냉전시대였다는 것이다.

 

 때는 소련과 미국이 가열차게 서로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던 시기였다. 곳곳에서 분쟁이, 핵무기 실험이 이어졌다. 언제 또 다시 3차 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알게 모르게 만연해 있었다. 그래서 유태인으로서, 전쟁이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의 밑바닥을 체험한 윌리엄 와일러는 서로에게 증오만 부추기는 냉전 시대가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통해 내내 반전과 용서 그리고 화해를 부르짖어 왔던 것이다.

 물론 ‘벤허’도 마찬가지다.(그것이 너무도 잘 드러나 있었기에, 카톨릭을 신봉하는 바티칸마저 헐리우드 영화로써는 유일하게 진정한 종교 영화라고 인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신념, 용서와 화해를 통한 평화에 대한 절박한 간구가 영화에 투영되어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인생 영화로 꼽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제서야 본 내게도 이 영화는, 그것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그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다시금 세상은 냉전의 그 때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니스에서 어린이를 비롯하여 수 십명의 사망자를 낸 트럭 테러나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갈등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비록 10년 주기로 우리들 앞에 찾아오는 ‘벤허’이지만 지금 우리 앞에 도착한 것이 그저 우연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벤허’가 강조했던 용서와 화해가 정말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와일러가 영화에 담았던 진심이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어, 사람의 삶이 무분별한 증오로 위협받지 않으며 조금은 더 평화의 시대로 다가가길 희망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