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의 노래 버티고 시리즈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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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페리온'과 '일리움' 시리즈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작가 댄 시먼스는 가장 좋아하는 SF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내 이름은 콘라드'나 '신들의 사회'의 로저 젤라즈니처럼 신화와 과학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뒤섞는 게 그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데뷔작 '칼리의 노래'는 뜻밖에도 공포 소설이다. '칼리'는 잘 알다시피 인도 신화에 나오는 존재다. 그녀는 파괴신 시바의 아내로 살인을 즐기기 때문에 인도 신화에서 가장 무서운 신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은 그런 칼리를 떠 받드는 것으로 알려진 인도의 도시 캘커타를 중심으로 하여 칼리와 관련된 아주 무섭고 참혹한 이야기를 담는다.


사진은 20주년 기념판의 표지. 칼리와 그녀를 비밀리에 숭배하는 도시 캘커타를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1985년에 나왔다. 시기를 일부러 언급하는 것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있어, 소설이 쓰인 시대의 상황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 때의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70년대 후반에 흐르고 있던 데탕트를 백지화 시켜버렸다. 미국은 소련에게 50년대에 그랬듯이 다시 강경 대응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위해 군비를 증강시켰다. 그렇게 미국과 소련은 신냉전시대로 접어들었다. 레이건은 그렇게 되길 원했다. 그래야 미국이 자유 세계의 리더로 군림하고 자기 아래에 있는 나라들이 아무런 찍소리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련이 다시 자유세계의 주적으로 떠오르면 힘이 부족한 나라들은 미국의 입김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 마디로 레이건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같은 굳건한 위계 질서로 이루어진 국제사회를 원한 것이다. 물론 그 최상층은 미국이 차지하고 말이다. 그런데 레이건의 소망은 나라 외부에만 그치지 않고 나라 내부로도 향했다. 국민들 사이에도 그런 위계 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부유층 감세가 주 목적인 레이거노믹스를 단행했다. 그는 규제를 완화했고 고용과 복지에 들어가는 정부 지출도 대폭 축소했다.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졌고, 있는 자는 점점 더 살기 좋아졌고, 없는 자는 날이 갈수록 사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들 사이에 절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의 질서가 점차 만들어져 갔다. 인도의 카스트 계급과도 같이.


 이것이 또한 레이건이 신냉전체제를 원했던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신냉전체제가 되면 외부의 갈등이 내부의 갈등 보다 더 커져서 국민들의 눈은 자연히 그 쪽으로 쏠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처지가 점점 열악하게 되어도 관심을 갖거나 저항하는 것이 적어지기 마련이다. 그들에겐 자유 세계의 리더 국가의 국민이라는 프라이드가 있고, 그들의 부족한 재화는 막강한 군사력을 통해 강요한 불공정 무역으로 다른 나라들에게서 충당될 테니까 말이다. 레이건의 모든 정책은 가장 상위에 있는 오직 하나의 존재를 위해서만 시행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캘커타가 오로지 가장 위에 있는 칼리를 위해 존재한 것과 똑같이.



 '칼리의 노래'는 바로 그런 시대를 은유하고 있다. 시먼스가 하필이면 인도를 소설의 배경으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상위에 군림하는 살인의 신 칼리를 통해 현재 미국이 만들고 있는 시대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의 결말에 이르면 선명하게 부각된다. 때로는 별다른 소개 없이 무작정 이야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더 좋은 소설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칼리의 노래'가 그러하다. 처음엔 평이하게 흐르다가, 느닷없이 당신의 모골을 송연히 만드는 장면을 만날 것이며, 시먼스가 이런 기괴한 상상력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이야기를 만날 것이다. 이야기가 워낙 몰입도가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읽은 보람을 충분히 가지겠지만, '칼리의 노래' 내면엔 점점 암흑으로 치닫고 있는 당대에 대한 우려와 고민이 깊이 서려 있다. 시먼스는 타자와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함부로 우열을 가리고 그것을 통해 타자를 배척하는 곳은 어디나 공포와 살인으로 가득찬 칼리의 노래가 울려퍼질 것이라 예언한다. 그 예언은 지금 맞아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단지 혐오한다는 이유만으로 죄없는 사람을 공격하고 살인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 칼리의 노래를 멈추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시먼스는 그것을 배려와 용서라고 말한다. 그런 마음은 무엇보다 주인공의 아내 암리타에게서 재현된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고향인 인도로 돌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카스트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 여인 하나가 잔디 깎는 일을 하다가 감전 당하는 것을 발견한다. 여인 주위에 많은 인도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여인이 쓰러진 것을 보고도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는다. 불가촉천민이기 때문이다. 여인을 도와주었던 것은 오직 암리타 뿐이었다. 오로지 여인을 도와야한다는 생각에 암리타가 앞뒤 따지지 않고 나선 덕분에 여인을 살릴 수 있었다. 이런 암리타의 고백은 불가촉천민이 당하는 고통이 세계 보편이라고 말하는 캘커타 부유층 인사에 반하여 나왔다. 암리타는 보편이라고 해서 용납되는 고통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렇게 밝힌 것이다.


 사실 '칼리의 노래'는 세익스피어의 '태풍(템페스트)'와 유사하다.


 '태풍'은 난파 중인 배로 시작한다. 불안과 죽음의 공포가 가득한 세상이다. 그렇기에 그 배는 칼리의 노래에 현혹된 캘커타라고 해도 무방하다. 거기서는 누구나 제 목숨을 보전하려 애쓸 뿐, 아무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은 그저 남의 불행일 뿐이다. 그런 '태풍'의 세계에 구원을 가져 오는 것은 프로스페로의 딸 '미란다'다. 미란다는 난파 중인 배의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마치 자신이 당하는 양 공감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는 타인의 아픔을 보면서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이었으나 결국 그런 그녀의 마음이 복수심에 지배되어 오직 자신을 이렇게 만든 적들을 파멸시킬 궁리만 하고 있었던 아버지 프로스페로를 감명시켜, 심판과 멸망으로 끝나버릴 뻔 했던 세계마저 구하게 된다. '칼리의 노래'에서 암리타가 하는 일을 미란다가 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 난파 중인 배를 미란다가 애통해하며 보고 있다.


  그렇다면 소설의 주인공이자 암리타의 남편인 루잭은 '태풍'의 칼리반이라 할 수 있다.

 칼리번은 프로스페로의 하인이지만 속으론 항상 프로스페로에게 반항하면서 언제든 그의 질서를 전복시키고 말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마치 루잭이 그런 칼리번인 것을 암시하듯이, 이미 칼리의 세상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하는 다스에게 루잭은 이렇게 말한다.


 "반항도 일종의 희망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p. 264)


 보는 방향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존재가 바로 칼리반이다. 칼리반과 미란다 그리고 프로스페로는 이렇게 하나의 유사 가족 형태를 취하고 있다. 미란다는 프로스페로의 친딸이나 칼리반은 아니다. 이런 미란다와 칼리번이 '칼리의 노래'에선 암리타와 루잭 부부로 재현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칼리의 노래'는 '태풍'과 유사한 면이 있으며 '태풍'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칼리의 노래'에 담겨진 진심이 더욱 잘 드러난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 칼리의 노래에 반하여 자신의 신념을 당당히 밝힌 유일한 인물에게 '암리타'라는 이름을 준 것도 의미심장하다. '암리타'는 인도 신화에서 신들이 마시는 음료의 이름이다. 그 음료를 마시면 불사(不死)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칼리도 자신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기 위해 익사한 시신을 되살린다.


 다시 말해 소설엔 두 개의 불사(不死)가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는 타자의 고통을 배려하는 측은지심이 가져오는 불사(不死)이고, 다른 하나는 레이건이 원했던 것처럼 오로지 타인의 파괴를 통해 나의 것만 영속시키는 불사(不死)이다. 어떤 것이 진정한 불사(不死)일까? 그 답은 소설을 읽으면 자연히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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