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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의 감옥
우라가 가즈히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우라다 가즈히로. 처음 만나보는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다. 놀랍게도 데뷔를 20살에 했다. 그것도 메피스토 상을 받아서. 역대 최연소란다. 물론 이런 사실이 작품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저렇게 어린 나이에 화려한 수상 경력까지 등에 업고서 등장했다면 아무래도 작품에 관심이 가게 된다. 더구나 그의 작품으론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장본인이 바로 '수면의 감옥'이다. 200페이지가 안되는 분량의 장편이다. 제목만으로는 내용이 얼른 짐작되지 않으실 분들이 계실 것 같다. 그 분들을 위하여 먼저 줄거리를 잠깐 소개해 본다면, 일단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다. 거기서 이제 막 연인이 된 나와 아야코는 아야코 집에 있는 지하실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계단에서 함께 굴러 떨어진다. 나는 다행히 별 상처를 입지 않았으나 아야코는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나, 우라가(주인공의 이름이 작가 이름과 같다.)는 '투명한 유리 너머에서 신생아처럼 조용히 숨을 쉬는' 아야코를 극진히 돌보지만 결국 그녀는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고 그렇게 우라가와 아야코는 미처 사랑의 달콤한 맛을 알기도 전에 씁쓸함만 그득 안고서 이별 아닌 이별을 한다.
그리고 5년 후. 우라가는 바라던 대로 미스터리 작가가 되어 있다. 작가가 된 과정이나 되고 난 후의 모습이 실제 우라가 가스히로와 비슷하다. 그의 영화와 음악 취향, 그리고 CD와 LP를 수집하는 취미 모두 고스란히 작중 인물인 우라가에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현실성을 좀 더 가진다. 작가가 실제 출연하고 있는 것과 같으니까. 어쨌든, 그에겐 두 명의 친구가 있다. 하나는 요시노, 다른 하나는 기타자와. 이 둘은 우라가와 아야코에게 사고가 일어난 날, 그 집에 같이 있었다. 전날 과하게 마신 술로 우라가와 아야코에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들은 '자고 있었다'고 경찰에게 진술했다. 즉 그들도 누가 우라가와 아야코를 계단에서 떠밀었는지 모른다. 요시노와 기타자와는 우라가와 달리 아직 사회에 뿌리를 확실히 내리지 못했다. 둘다 프리터로 일하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 모두에게 아야코의 오빠로 부터 연락이 온다. '아야코의 물건을 정리하려 하는데, 아야코의 유일한 친구들인 너희가 와서 도와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우라가와 요시노 그리고 기타자와는 유달리 여동생에게 헌신했던 오빠에게 아야코가 그런 사고를 당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고 해서 아야코의 집으로 간다. 오빠는 그들을 지하실로 데려간다. 사건이 있던 날, 아야코가 우라가에게 보여주려 했던 바로 그 곳이다. 놀랍게도 그 곳은 핵폭발도 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방공호였다. 우라가 일행이 방공호로 들어가자, 오빠는 재빨리 빠져나와 그들을 방공호에 가둬 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야코를 만든 진범이 너희 가운데 있으니, 자백해라. 아니면 누구라도 알려달라. 그러면 풀어준다. 아니면 절대 거기서 나올 수 없다.'
동시에 별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기서의 중심은 사에코라는 여성이다. 최근 그녀는 남자친구 히로시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것도 히로시가 자신의 친구와 눈이 맞는 바람에. 단번에 김건모의 노래 '잘못된 만남' 속 주인공이 되어버린 그녀는 히로시가 끝끝내 자신을 거부하자 복수를 하려든다. 요즘 인터넷을 통해 만난 사라코가 그러도록 부추겼다. 그녀는 자신이 고등학교 때 신이치란 친구의 집에 초대되어 갔다가 다섯 남자에게 윤간을 당했던 일을 고백하면서 사에코에게 교환 살인을 제안한다. 자신이 히로시를 죽여줄테니까 대신 사에코는 신이치를 죽여달라는 것이다. 사에코는 신이치에게 분노하는 마음도 있어 결국 수락한다. 그리고 갑자기 걸려온 친구의 전화로 히로시가 누군가에게 떠밀려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라코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에코는 자신도 신이치를 죽일 준비를 한다.
이 둘은 얼른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엔 하나로 모인다. 과연 아야코를 그렇게 만든 범인은 누구일까? 사라코와 사에코의 교환 살인은 성공할까? 이런 궁금증으로 페이지를 넘기던 독자는 마지막에서 놀랄만한 반전을 경험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앞으로 가서 읽게 될 것이다.
우라다 가즈히로의 '수면의 감옥'은 너무 더워서, 뇌수마저 바닥을 길 것만 같은 이런 때에 읽으면 좋을 작품이다. 일단 길이가 짧고, 두 개의 이야기가 병행하는 데다 반전도 여럿 장착되어 있지만 정작 이야기의 마당이 되는 구성 자체가 간단하여 집중력을 그다지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트릭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어쩌면 빨리 알아차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몰입을 방해하지는 않으니, 이게 또 우라가 가즈히로의 저력이랄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우라가 가즈히로의 저력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장르의 재활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딱 한 작품, 그것도 겨우 23세에 쓴 작품을 가지고 저력의 정체 운운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엄청 무리한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처 감행해 본다.)
서툰 비유를 들자면 '냉장고를 부탁해'의 미스터리 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냉장고를 부탁해'는 타인의 냉장고에 이미 보관되어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자기 뜻대로 조리하여 하나의 음식을 만드는 것이 포인트다. 우라가도 똑같다. 장르 팬들에겐 이미 익숙한 장르의 재료들을 싹싹 가져와서는 자기 식대로 조합하여 색다른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냉장고를 부탁해'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작품의 질과 재미를 결정하는 것은 조리사의 솜씨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우라가는 꽤 솜씨 좋은 조리사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재료들을 재활용 하기에 이야기 자체는 그리 신선하다고 할 수 없다. '수면의 감옥'도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인데'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주는 뒷맛이 워낙 깔끔해 신선도를 높인다. 한 입 크게 베어물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