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일상에 지칠  때마다 우리는 종종 여행을 꿈꾼다. 그럴 때 길은 우리들에게 자유와 해방 그 자체로 보인다. 하지만 길이 그렇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에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집이 없다면 길은 전혀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고 만다. 내 앞에 놓여 있는 길 전부가 불안을 야기하고 공포를 빚어내는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상 위에 맘 편히 깃들 수 있는 집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지금도 사력을 다하는지 모른다.


 프랑스의 여성 작가 델핀 드 비강이 2007년에 발표하여 그 해 프랑스의 서점 대상과 르노드 상을 동시에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있는 공쿠르 상 후보까지도 올랐던 ‘길 위의 소녀’는 바로 그런 집을 잃어버린 두 소녀에 대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녀들의 이름은 노(no)와 루(lou). 노는 집없이 길거리를 헤매는 노숙자다. 하지만 루는 비록 가족간의 유대가 헐겁긴 하지만 그래도 집이라는 울타리 속에 있다. 그러나 잘 따져 보면, 둘 모두 사실상 집이 없는 존재다. 


'길 위의 소녀'는 영화(Zabou Breitman 감독)로 만들어져 2010년에 개봉되었다.

영화 포스터에서 키 큰 소녀가 노이고, 작은 쪽이 루이다.


 집은 문학에서 소속과 안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다. 바로 이런 집을 노와 루, 모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녀들의 내면엔 모두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안주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를테면 루는 이렇게 생각한다.


 살아오는 내내, 나는 어디에 있든지 언제나 바깥에 있었다. 난 항상 이미지나 대화의 바깥으로 동떨어지고 어긋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말이나 소리를 나 혼자만 듣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잘만 듣는 말을 나만 액자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리창 저편에서 못 듣는 것 같았다.(p. 17)


 그런 고로, 노와 루 모두는 실상 ‘길 위의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들과 똑같이 길 위에 서게 된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바로 '뤼카'란 소년이다. 루는 천재 소녀로 2년 월반을 했다. 반면 뤼카는 좀처럼 학교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해 2년 유급을 했다. 성적은 바닥이고 걸핏하면 선생님께 반항하여 교실에서 쫓겨나기 일쑤다. 하지만 루는 오히려 그런 뤼카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다. 루가 노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과 똑같이 뤼카도 자신만큼이나 바깥에 있는,  그렇게 길 위의 존재란 걸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정말 그랬다. 뤼카에게도 노와 루와 똑같이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는 집은 없었다. 그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는 브라질로 떠나 버렸고, 엄마는 새 애인과 같이 지내느라 집에 오지 않았다. 뤼카도 노와 루처럼 엄마가 부재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공통점 하나가 눈에 띈다. 노와 루 그리고 뤼카 모두에게 엄마가 없다는 것. 집처럼 강한 소속감과 안정을 뜻하는 상징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엄마다. 모성은 자식과 혈연으로 연결되고 자식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으로 품 안의 자식에게 영원한 소속과 안정을 느끼게 한다. 이는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었기에 경험으로도 잘 알고 있는 바다. 그러나 소설에선 이런 엄마가 부재(不在)한다. 존재하는 것은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엄마 뿐이다. 사실 노와 루가 길 위에 서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자의가 아니었다. 그 보다는 자신과 무관한 가혹한 운명으로 인해 내몰린 결과였다. 전적인 타의의 소산. 그렇게 길 위로 내몬 장본인이 바로 엄마였다.


 는 엄마가 여러 사내에게 강간 당하는 바람에 태어났다. 그런 노는 엄마에게 있어 자신이 당한 끔찍한 비극을 상기시키는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이름처럼 ‘NO’하고 거부당할 숙명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기워져 있었던 것이다. 노의 엄마는 과거의 아픔에 정면으로 맞서기 보다 그저 덮고 회피하려고 들었다. 당연하게도 그 비극의 구현체라고 할 만한 노 또한 기피했다. 


 그런데 이런 엄마의 모습이 의 엄마에게도 똑같이 반복된다. 루의 엄마 역시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오랫동안 간절히 원했고 간신히 가지게 된 아이, 그러니까 루의 동생 타이스가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그만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 죽음으로 인해 루의 엄마는 모든 삶의 의욕을 잃었고 식물처럼 지냈다. 엄마는 루도 멀리했다. 루가 잃어버린 자식 타이스를 떠올리도록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픔을 관통하여 새로운 삶의 의지로 극복하기(아마도 그것은 루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했을 것이다.) 보다는 외면하기만 했다. 그 바람에 루는 엄마에게서 밀려났고, 실제로 4년 동안이나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그리고 여전히 집에서 아무런 온기를 느낄 수 없는 루는 집을 그저 기계적으로 가족을 연기하는 생기 없는 연극 공간으로 여길 뿐이다. 이렇게 노와 루가 노숙의 운명에 거하게 된 것은 엄마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뤼카도 마찬가지였다.


 델핀 드 비강은 이런 엄마의 모습을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그린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를 통해 비강이 들려주고 싶은 것이 '단순히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변해야 구원이 있다'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이는 소설이 좀 더 근원적인 부분에 대해 말하려 하기 위함이다. 바로 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노와 루 그리고 뤼카 모두 원래 집이 없었던 게 아니라는 점이 이목을 끈다. 그들이 길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은 오로지 집이 더이상 집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자신의 탓이 아니었고, 그 어떤 전조나 예고 또한 없었다. 그들 모두는 문자 그대로 느닷없이 노숙의 운명으로 내던져졌다. 아마도 이런 사실, 즉 우리는 언제든 운명의 돌연한 변화로 정주(定住)를 잃고 유랑의 삶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소설이 모성을 그렇게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한다. 집보다 더 영원한 소속과 안정의 상징인 모성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집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믿음은 더욱 동요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 동요로 생긴 균열을 통해서 비강은 우리에게 '진정한 집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집이 그토록 쉽게 우리가 바라는 집의 의미를 잃을 수 있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래도 집을 추구해야 한다면 이제 그 집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바로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샘솟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강은 여기에 대해서도 마치 소설에서 마랭 선생이 루의 조사에 도움이 되도록 노숙자의 자료 같은 것을 건네주듯 장면들을 할애하여 우리로 하여금 성찰을 좀 더 제대로 다듬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두 개로, 소설 후반부에서 집중적으로 묘사된다.


 하나는 노가 루의 집에서 살게되는 장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노가 결국은 루의 집에서 나와 뤼카의 집에서 살게 되는 장면이다. 집은, 밤마다 편히 잠들 곳을 찾기 위해 이거리 저거리를 헤매어야만 하는 노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사실 노에게 집은 집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집이 있다면, 그 집에서 늘 자신을 따스하게 맞아줄 가족이 있다면 노는 타인에게 자신이 그저 더럽고 불결한 노숙자가 아니라 진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이상 카페에 혼자 들어갔다가 점원에게 내쫓길까 봐, 루를 기다렸다가 함께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그 존중과 당당함이야말로 노가 정말 원했던 것이었고, 노는 집이 그런 걸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루의 집에서 처음 확인했다. 루의 가족들이 노를 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는 루의 집에서 참된 안정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노숙자일 때보다 더 작게 말했고, 행동거지를 조심했다. 노에게 루의 집은 거리보다 더 자유롭지 못한 공간이었다. 결국 그녀는 홀로 느끼는 숨막힘 때문에 루의 집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노가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부모라는 존재의 권위와 그것이 부여하는 질서 때문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모두가 대등한, 권위도 없고 질서도 부재한 공간이라면 노에게 진정한 집이 될 수 있을까? 마치 그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비강은 실제 그런 공간에 노를 거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뤼카의 집이다. 뤼카의 집엔 부모가 없다. 거기서는 뭘하든 자유다. 노와 루는 뤼카의 집에서 자유의 대기를 마음껏 활공한다.



 하지만 그조차 노에게 진정한 집이 되어주지 않는다. 자유 분방과 무책임은 결국 갈등을 부르고 짧은 시간 동안 유토피아 같았던 뤼카의 집은 붕괴된다. 노는 계속해서 실패한다. 그녀를 도와주려는 루의 노력도 마찬가지다. 둘은 끝내 헤어지기까지 한다.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노와 함께 할 것이라던 루의 결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왜 이러는 것일까? 비강은 왜 노와 루에게 이처럼 계속된 좌절과 불안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나는 이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몇 번이나 책을 반복해서 뒤적이고 오래도록 곱씹어 생각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되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당한 아픔과 처한 불안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애쓰는데, 실은 근본적인 태도에 있어서는 그들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그 구원을 외부에서 얻으려고만 하지 자신이 변화하여 자기 쪽에서 먼저 구원을 주는 존재가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루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노와 함께 있으려 하는 것은 그녀가 루 자신과 너무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루는 노에게 엄마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한 자신을 투사한다. 노에게서 루는 세상과 잘 섞일 수 없고, 어디서든 관심과 사랑을 얻지 못하는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본것이다. 따라서 루의 노에 대한 애정은 나르시즘(narcissism적이라 할 만하다. 뤼카에 대한 애정도 근본적인 면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노가 자신이 거할 수 있는 집을 찾듯이, 루는 자신이 믿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모두 한결같이 외부의 것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려 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그녀들의 부모가 잘 보여준 바 있다. 노의 엄마도, 루의 엄마도 노와 루만큼이나 스스로 변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바깥 세계가 먼저 변하여 자신에게 구원이 빛이 비쳐오길 원했다. 그래서 정작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바로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밀어내기만 했다. 뤼카 엄마도 뤼카와 새 남자 친구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뤼카를 집에 홀로 내버려 둔다. 노의 엄마가, 루의 엄마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변하려는 노력을 조금이나마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노와 루가 겪었던 삶의 고통도 많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알고보면 노가 실패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 역시 자신이 먼저 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가 루의 가족을 온전히 믿고 그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다면 그녀가 루의 집을 떠나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타인을 믿기 보다, 세상 앞에서 몹시 왜소한 자신의 존재만 부각해서 되새겼다. 루의 집에서 너무나 조심스러워진 그녀의 말투와 행동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불결한 존재인지라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어렵다는 사실만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모처럼 다가온 사랑의 손길마저 제 쪽에서 먼저 걷어찬 결과만 만들고 만 것이다. 노의 엄마와 루의 엄마가 자신의 비극과 아픔에만 골몰한 나머지 그만 자신과 닮은 꼴의 비극만 양산해 버린 것과 똑같이.


 이로써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평안히 거할 수 있는 진정한 집은 바깥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먼저 타인에 대한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내가 바라는 집은 도래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충만한 집에 머무르길 원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있는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줘야 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그토록 찾는 구원은 저 바깥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중국 작가 노신의 말마따나, 원래 어딘가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먼저 걸어 나갔기에 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비강은 루의 삶에서 노를 홀연히 사라지게 했을 것이다. 루가 다른 누구에 기대서가 아니라 스스로 온전한 주체가 되어 혼자 힘으로 세상 앞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말이다.



 루는 IQ 160의 천재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자신의 존재감은 160g도 안된다. 그녀는 계속 자신을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긴다.


 난 말이다. 성장할 수 없다. 모습을 바꿀 수도 없다. 난 너무 작다. 아주 작은 모습 그대로다. 어쩌면 모두들 모르는 척하는 이 비밀을 내가 알고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에 대한 비밀을 내가 알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p. 111)


 그런 면에서 루는 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게 왜소한 자신 앞에 세계는 너무나 거대하다. 감히 앞으로 나서는 것조차 두렵다. 루는 지식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거대한 세계에 맞서는 자신만의 방법이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온갖 정보를 모으며 분류하고 체계화 한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불가해하여 두렵기만한 세계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하면 좀 더 당당해지고 편해질 줄 알았다. 세상과 좀 더 잘 섞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게 되고 더 소심하게 된다. 키스조차 혀를 먼저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할지 알지 못해 그녀는 사랑 앞에서 뒷걸음질친다. 루는 자신이 이렇게 되길 원했다.


 난 말이다. 오히려 내가 다른 곳에 있으면 좋겠다. 쭉 뻗은 직선을 따라서 세상들이 서로 소통하고 서로 겹치는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 윤곽선들이 서로 투과되는 곳, 삶이 아무 단절 없이 쭉 이어지는 곳, 만사가 불현듯 이유없이 멈춰버리지 않는 곳, 중요한 순간들이 닥칠 때에는 사용설명서도 딸려서 나오는 곳으로.(p. 86 ~ 87)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집요하게 추구한 지식들은 그것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소통은 자주 단절되었고, 윤곽선들은 투과되지 못했다. 바깥의 지식을 집적하기만 했을뿐, 그것이 자신의 변화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이 아니라, 있는 그 자리에서 변화를 만들어내야 했다. 키스를 할 때 혀를 먼저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하는지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면 된다. 이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처럼.


 그 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품었던 허다한 질문들 중에서, 키스 할 때 혀를 돌리는 방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p. 300)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이 먼저 타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루, '자신에게 빠져 있는 것'(p. 87)이었다. 그리고 그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바로 자신을 허무는 작업이었다. 노를 처음 만날 때도 그랬고, 뤼카를 처음 만날 때도 그랬다. 언제나 루가 아니라 노와 뤼카가 먼저 루에게 다가왔었다. 그래서 결말에 가서 사랑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사랑은 지식으로 습득될 수 없다. 그것은 수영과 똑같이 자신의 전부를 오롯이 내던지고, 그 과정을 몸소 겪어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렇게 사랑은 오랜 과정에 걸쳐 경험과 성찰 속에서 천천히 여물어 가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그러면서 자신을 덜어내고 허물며 희생하는 행위를 동반한다. 사랑은 온전히 타인 중심이 될 때 완성된다. 사랑이 여정이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먼저 내려놓는다는 의미에서 이야말로 사랑의 비유로 합당할지 모른다. 길은 어딘가로 다가가기 위한 여정이고, 무엇보다 내가 먼저 움직여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러고 보면, 사실 길과 집의 구분은 별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어디든 사랑이 있으면 길은 집이 될 수 있고, 또 사랑이 없으면 어떤 집이든 길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이 키스를 통해 루와 뤼카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수많은 집을 전전해 왔으나 어디든 자신의 진정한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진정한 집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자신들의 사랑으로. 그런데 그 사랑의 확인은 길 위에서 이뤄진다. 이런 연출로 우리는 보다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집이냐, 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지금 자리잡은 것이 사랑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읽으면서 노와 루의 이야기에 많이 공감했다. 내 처지도 툭 까놓고 곰곰이 따져 보면 그녀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오는 루의 엄마 말대로, '인생은 원래 부당하고, 여기에 덧붙일 말은 하나도 없다'(p. 117)고 단정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 엄마와 똑같이 이런 삶을 가져다 준 뭔가를 원망하고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너무나 많고,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p. 93)이라며 무기력하게 많은 날들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문제는 내가 오로지 내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루처럼 진정 뭔가 빠져 있는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더 불안했고, 더 두려웠으며 또한 더 무기력했다는 것을. 지금부터라도 결여 되었던 그것을 채워나가려 한다. 누구에게서 온기를 얻으려 하기 보다 내가 먼저 그의 온기가 되어주는, 차마 입 밖에 내뱉기 부끄럽지만 그래도, 사랑이라는 것을.


- 인용한 사진들은 모두 영화 속 장면이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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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의 미래, 중년파산 - 열심히 일하고도 버림받는 하류중년 보고서
아마미야 가린 외 지음, 류두진 옮김, 오찬호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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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오정이 현실화된 지 오래다. 퇴직할 정년의 나이는 참 많이도 빨라졌는데, 막상 퇴직하면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부분은 별 다른 기술을 요구하지 않고 창업이 쉽다는 이유로, 또 목만 잘 잡으면 수입이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치킨집의 '블랙홀'로 빠져 든다. 하지만 알토란 같은 퇴직금만 날리고 가게를 접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되면 파산이라는 말이 남 일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노년 파산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노년 파산을 넘어 중년 파산의 시대다. 실제로 그렇다. 도표가 증명한다. 2015년, 1월부터 2월까지 서울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연령별 파산 현황이다.


  

 이른바 중년이라 할 만한 나이대의 파산이 무려 65.4%나 된다. 실태가 이러하니 어떻게 중년 파산이라는 말이 마냥 허무맹랑하다고 할 수 있을까? 노년 파산이라는 말은 우리가 겪는 것을 정확히 10년 앞서 경험한다는 일본에서 나온 말이다. 중년 파산도 그렇다. 그것은 지금 일본에서 현격하게 가시화되고 있다. 이번에 나온 아카기 도모히로를 포함한 다섯 명의 일본 자유기고가 쓴 '98%의 미래, 중년 파산'은 바로 그것을 다루고 있다.


 일본은 1994년부터 2005년까지 아주 극심한 경제 침체를 겪었다. 흔히들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이다. IMF가 터졌을 때의 우리나라와 똑같이 그 때 갓 대학을 졸업한 이들에게 취직이란 하늘의 별 달기보다 더 어려웠다. '취업 빙하기'란 말이 유행어처럼 번졌다. 이제 그 빙하기 때 구직활동을 했던 이들이 40대가 되었다. 중년이 된 것이다. 일본에서 그들은 '잃어버린 세대'(단카이 주니어 세대가 여기에 해당된다.)라 불린다. 앞 세대(단카이 세대)와 다르게 경제 부흥에 따른 달콤한 과실을 전혀 맛보지 못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취업이 어려웠던 그들 대부분은 비정규직이 되었다. 그런데 한 번 비정규직이 되면 결코 정규직이 될 수 없었다. 이 책의 2장은 이런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들의 대담으로 이뤄졌는데, 그 중 다음과 같은 말은 왜 일본에서 '중년 파산'이 현실적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아마미야 : 흔히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말하는데,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20세부터 40세까지 20년 동안 취직을 하거나 업무를 익히거나 결혼, 출산을 합니다. 말하자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20년인데, 단카이 주니어 세대는 그것을 빼앗긴 셈이지요. 제가 조합원으로 속해 있는 '프리터 전반노동조합'은 비정규직 노동자 이외에도 실업자, 저소득자, 위킹푸어 같이 고용 형태를 불문하고 폭넓게 가입할 수 있는 독립계 노동조합입니다. 이곳에서 8년 동안 함께 운동을 해왔던 조합원들은 전부 30대 후반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 중에 누구 한 사람도 결혼한 이가 없었고 아이도 없었지요.


 가야노 : 조합원 중에 정직원이 된 사람은 있습니까?


 아마미야 :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없었어요. 정직원으로 일했던 사람이 8년 사이에 실직해서 지금은 생활보호를 받고 있다든지 하는 반대의 경우라면 수도 없이 많지만요. (p. 77 ~ 78)


 그들에게 더이상 삶이 나아질 가망은 없다. 현상유지만 되어도 다행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일본 역시 출산율이 줄어들고 있다. 자꾸만 늘어나는 노년층으로 인한 부담이 사회에 가중될 수밖에 없다. 반목과 증오도 덩달아 커지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가 쓸 수 있는 재화엔 한계가 있고, 경제 불황과 노년층의 증가로 갈수록 세수가 줄어들게 되면 사회로부터 그동안 받았던 혜택을 줄어들며, 그 줄어든 원인을 남들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즉, 저 외국인 노동자 때문에 내가 받을 임금이 적어졌어, 혹은 복지 혜택이 줄어들었어 하는 것과 비슷하게.


 이런 식으로 '중년 파산'의 징후는 왜 극우로 치닫고 있는 아베 정권을 일본 국민들이 지지하는가에 대한 것 역시도 알게 해 준다. 우리나라의 일베와 마찬가지로 일본에도 '재특회'라고 해서 극우를 표방하는 넷우익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다. 처음엔 이런 넷우익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회적 소외와 불만 계층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왠걸 어디든 있을 법한 주부나 멀쩡한 회사의 정직원들마저 많이 가입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무엇이 안정적이고 평범한 그들에게 중국과 한국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심을 부추기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 경제적인 불안감이 자리한다. 그러니까 '일본 최고다!'하는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인들 때문에 내가 쓸 수 있는 경제의 파이가 적어진다는 박탈감이 증오의 근본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불안이 타인에 대한 적대와 증오를 부추긴다. 사실 우리나라의 일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 가뜩이나 많이 늘어난 혐오 문제도 이번 정부에 들어와 더욱 나빠진 경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도 암울한데 미래의 전망마저 보이지 않으면 타인을 포용할만한 여유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한정 줄어들기 마련이다. 혐오를 지양하고 모두가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선플 운동 같은 걸 할게 아니라,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경제적 자본을 늘려주면 된다. 최저 임금을 현실화 하고, 부자 증세를 통한 세수 확충으로 고용과 복지 혜택을 증대하여 현재와 미래를 불안 속에 걱정하면서 맞이하지 않게만 하여도 지금의 혐오와 증오는 많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지금 사회가 너무 가진 자 위주로 되어, 98%의 사람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을 못 받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한없이 한 쪽으로 기울어진 소득 불평등의 운동장을 얼른 균형을 이루도록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중년 파산'은 결코 남의 나라 일도, 시간적으로 멀리 있는 일도 아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비정규직의 비율이 50%가 넘었다. 언제 성큼 닥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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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4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5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콜라스 볼커 이야기 - 유전체 의학의 불씨를 당기다
마크 존슨.케이틀린 갤러 지음, 금창원 외 옮김, 서정선 감수 / Mid(엠아이디)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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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유전체 의학이 차세대 의학의 주류 트랜드로 떠오르고 있다. 이 의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환자 맞춤형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나 암환자의 경우, 환자가 가진 유전자에 따라 양상도 여러가지이고, 치료 방법도 달라진다는 것이 확인되었기에, 유전체 의학은 더욱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물론 여기엔 외부 요인, 즉 DNA 염기 서열 분석 기술의 발달로 유전체 분석의 정확도와 속도 그리고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양은 비약적으로 상승한 반면 들어가는 비용은 격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53년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처음으로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한 이후로, 유전자는 인간의 생명과 존재가 가진 신비를 풀 열쇠로 간주되어 많은 학자들이 인간의 유전자를 해독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그러다 1977년, 영국과 미국 학자들에 의해 유전자 해독법이 처음으로 고안되었고 1990년, 마침내 정부 주도로 인간이 가진 모든 유전자의 지도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3년이 흐른, 2003년, 드디어 32억개로 이루어진 한 인간의 전체 게놈이 완성된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첫번째 인간 게놈 해독을 위해 걸린 시간은 7년이었고, 수 백 대의 분석 기계들이 동원되어야했으며, 여기에 들어간 총 비용만 해도 무려 27억 달러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고 많은 기계를 동원할 필요도 없다. 비용 역시 천 달러 정도로 분석 가능하도록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유전체 의학은 특히나 스마트 환경과 맞물려 한층 더 각광받고 있다.


 앞으로 더 분석 기술이 발달하고, 비용이 저렴해지면 스마트 폰의 앱만으로도 한 인간의 유전자 분석이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분석된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의 진단을 받을 필요 없이 앱 자체가 질병의 관리와 치료 방법을 내놓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손 안의 의사'도 불가능 하지 않다. 하지만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되었을 때조차 이런 유전체 의학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많이 없었다. 한 인간의 유전자 분석이 실제 치료에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 오늘날과 같은 유전체 의학의 부흥을 가져온 것은 한 소년 때문이었다.



 그 소년의 이름이 바로 니콜라스 볼커다.


 그에겐 병이 있었다. 스테이크를 너무나 좋아하는 아이지만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음식을 먹기만 하면 '소년의 내장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작은 연필 막대 같은 구멍이 생겼기 때문이다.'(p.23) 2년 동안 많은 의사들이 달려들어 소년의 병을 연구했지만 발병의 정확한 이유도, 치료 방법도 찾을 수 없었다. 갖은 방법을 다 써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닉의 병은 흡사 인간 의학에 절대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존재로 보였다. 닉의 담당의 메이어는 닉의 질병이 마치 용과 같다고 생각했다.


 '병은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 파괴적이었다. 자신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었더라면 그런 질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것 같았다. 자신의 모든 의학 기술을 동원해 용을 겨우 달래서 일시적인 수면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물을 퍼내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배가 계속 떠 있게 할수는 있지만 물이 어디서 새고 있는지 밝혀낸 것은 아니었다. (p. 151)


 그런 닉은 혈액 주사를 통해 직접 영양분을 공급 받으며 하루하루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기에 마지막 방법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유전자 분석이었다. 메이어는 닉이 가진 유전자의 결함으로 생겨난 병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쨌든 그가 시도해 볼 수 있는 최후의 복안이었다. 그래서 메이어는 당시 최고의 유전체 서열 해독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하워드 제이콥에게 도움을 구한다. 그 때만 해도 유전체 서열 해독 기술이 실제 의학에 사용될 수 있는지 확실치 않았었다. 제이콥은 의사가 아니었다. 그저 생리학을 전공하고 쥐를 가지고 유전자 서열 해독을 연구하는 과학자였다. 하지만 제이콥은 닉의 엄마 애밀린이 블로그에 쓴 일기를 읽고, 자신 역시 두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닉과 부모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여 결국 닉의 유전체 서열을 분석하기로 결정한다. 그에겐 워디란 직원이 있었다. 그녀는 원래 시애틀생명의학연구소에 있다가 일년 전, 면접에서 제이콥이 2014년부터 아픈 아이들의 DNA 염기 해독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 말에 감명 받아 제이콥이 있는 위스콘신 의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닉의 해독은 원래 계획 보다 5년이나 앞당겨진 것이었지만 제이콥과 함께 과감히 뛰어들었다.


제이콥은 워디에게 때가 왔다고 얘기했다. 의사들의 손발을 들게 한 치명적인 질병에 고통받은 끝에, 오직 게놈 해독만이 운명을 바꿔줄 수 있는 환자가 눈앞에 있다.(p. 164)


  워디에겐 희망이 있었다. 닉이 가진 병의 초기 증상은 근본적으로 너무 낯설고 불가사의하며 위협적이라 분명 유전적인 것이 원인으로 보였다. 그리고 만일 정말 그렇다면 반드시 닉의 30억개 유전체 서열에 무언가 나타나게 되리라 믿었다. 그녀는 표준 게놈 서열과 닉의 게놈 서열을 비교했다. 표준 게놈이란 '무엇이 정상적인 사람의 게놈인지 그 기준을 알려주고, 질병을 가진 사람의 게놈과 비교하여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p. 168)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범 답안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표준 게놈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고작 28명의 게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28명 모두가 알려진 희귀 질환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를 위한 출발점은 되었다. 그러나 이런 표준 게놈이 있다고 해도 어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인간이 가진 DNA는 모두 32억개. 이것들을 소수의 사람이 소수의 도구들만 가지고 전부 분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워디는 인간 행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가 있는 엑솜(exome)에 집중했다. 이 엑솜은 전체 게놈 중 1.2%에 지나지 않기에 분석하기에 훨씬 유용하다. 더구나 '상당수 유전 질환이 단백질 문제에 있었기 때문에 닉의 병 역시 엑솜의 어떤 부위에서 기인'(p. 172)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티스푼 정도의 혈액에서 닉이 가진 병의 탐색이 시작되었다. 그 혈액은 DNA로 축소되고,  DNA는 엑손(exon), 액손은 염기 서열의 구성 문자인 A(아데닌),C(사이토신),G(구아닌),T(티아민)로 환원되었다. 하지만 모든 걸 기계가 하지 않았다. 유전자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기본 단위인 백혈구의 핵을 뚫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직접 해야 했다. 그렇게 분석되었다. 물론 그 과정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2009년 10월, 닉의 유전자는 다섯 번째로 해독되었고, 그 결과 16,000개에서 32개로 변이 유전자의 후보를 좁힐 수 있었다. 그것들을 대상으로 워디와 동료들이 직접 개발한 분석 프로그램인 '카르페 노보'를 사용한 끝에, 결국 병을 일으킨 유전자를 찾아내었다. 범인은 바로 XIAP였다.


 XIAP에 문제가 생기면 면역체계가 좋은 균과 나쁜 균을 구분하는 능력에 이상이 생겼다. XIAP의 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면 XIAP 단백질 생산이 줄었다. 닉의 백혈구는 필요한 XIAP 단백질의 60%만 가지고 일하고 있었다. 닉의 몸 속에서 일어난 대혼란은 32억개의 DNA 염기서열 중 단 하나의 염기가 잘못된 염기로 치환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잘못된 염기를 바로 잡아야했다. 그러자면 골수 이식밖에 없었다. 결국 닉은 골수이식을 받게 되었고, 생명과 건강한 삶을 되찾았다.


 이렇게 니콜라스 볼커는 당시까지만 해도 반신반의의 대상이었던 거대 게놈 프로젝트과 의학의 연결을 현실적으로 확인시켜 준 계기였다. 이 치료의 성공으로 오늘날과 같은 스포트라이트가 유전체 의학에 비로소 비춰졌던 것이다. '니콜라스 볼커 이야기'는 이 과정을 굉장히 상세하고 충실하게 담고 있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니콜라스 볼커의 병을 씨줄로 하여 유전체 의학의 등장과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날줄로 잘 누벼놓았기 때문에 유전체 의학의 전모마저 잘 살벼볼 수 있게 해 준다. 유전체 의학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셨던 분들이라면 정말 좋은 안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곧 입시철이다. 지금 중3들은 과학고 지원으로 한창 바쁠 때다. 그러고 보니, 요즘 과학고에선 아예 모집 공고를 낼 때부터 의대 갈 학생들을 지원하지 말라고 직접 써 둔다고 한다. 의대 진학을 위해 과학고를 이용하는 학생이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전체 의학이 지금의 의학 패러다임을 많이 바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유전체 의학이 상용화되면 의사에 대한 수요는 지금보다 훨씬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 나오는 자동 수술 기계도 정녕 꿈만은 아닌 것 같으니. 그러므로 기술로 대체 가능한 의사가 되기 보다는 그 기술 자체를 만들어내는 분야에 뛰어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진다. 미래의 직업은 보다 더 많이 알 때, 더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다. 학생이라면 교과서만이 아니라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자신의 삶을 위해서도 더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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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레플리카 S & M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7
모리 히로시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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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카와와 모에 시리즈의 일곱번 째 작품, '여름의 레플리카'는 여섯번 째 작품, '환혹의 죽음과 용도'와 한 쌍이다. '환혹의 죽음과 용도'를 처음 읽었을 때 기겁했었다. 1장에서 갑자기 3장으로 건너 뛴 것이다. '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누락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보지 않고 건너 뛰어 버린 앞에 있는 차례를 살펴 보았다. 그러고는 더 놀랐다. 차례엔 1, 3, 5, 7장 이렇게 홀수장만 있었던 것이다. '이거 뭐야? 이것도 트릭인가?'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싶어 서둘러 검색해 보았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트릭은 아니었다. 작가의 원래 의도였다.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사건을 담으려 했던 것이었다. 즉 두 권이 한 쌍이었다. 그래서 그 절반이 되는 '환혹의 죽음과 용도'가 정확히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부러 홀수장으로 채워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짝수장으로만 채워진 또 한 권은?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사이카와와 모에 시리즈의 일곱번째 작품, '여름의 레플리카'다.



 제목에서 이미 '환혹'과 더불어 한 쌍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레플리카'는 복제라는 뜻이니까. 제목은 '환혹'의 그 여름이 다시 한 번 반복된다는 뜻인 것이다. 사실 여름은 사이카와 모에가 사건을 가장 많이 겪는 계절이기도 하다. 작가도 그것을 의식했던 듯, 이 작품 말미에 사이카와에게 이런 말을 읊게 한다.


 "올여름도 참 힘들었어. 정말 매년 매년..."

 "예, 정신없는 여름이었네요." (p. 459)


 모에의 말대로 올여름은 정말 정신없는 여름이었을 것이다. '환혹'과 '레플리카' 별개로 벌어진 두 개의 사건을 모두 추리해야 했으니. 그러나 여기서 사이카와와 모에의 등장 분량은 다른 작품에 비해 적다. 대부분은 '환혹'에서 모에의 여고 동창이자 절친으로 오랜만에 모에와 만났다가 더 오랜만에 고향으로 내려 간다며 모에와 헤어진 뒤,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내내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던 도모에가 맡는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팔묘촌'과 비슷한 형식이라 생각하면 얼추 맞을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도모에는 2년 만에 친가를 방문한다. 도모에의 아버지는 현의원으로 지방의 유력 정치인이다. 친아버지는 아니고 새아버지다. 어릴 때 엄마와 재혼했고 언니 사나에와 함께 도모에는 그의 딸이 되었다. 위로 전처가 낳은 모토키라는 오빠가 하나 있다. 그는 앞을 보진 못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한 때 유명했던 시인이었다. 한 때라는 것은 지금은 시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바깥 활동 자체가 아예 없다. 3년 전 여름에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에 그는 자기 방에서 갇혀있다시피 한 삶을 살고 있다. 도모에가 친가로 가는 걸 꺼려 하는 이유도 오빠 때문이다. 그런데 모처럼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다. 있는 것은 가정부와 방에 칩거한 오빠 뿐. 결국 혼자 집에서 밤을 보낸 도모에는 아침을 먹으려 내려갔다가 혼비백산할만한 일을 겪는다. 어떤 남자가 총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엄마의 수집품으로 거실 벽에 걸려 있던 가면을 쓰고서. 그는 말한다. 도모에의 가족들도 모두 납치되었으며 몸값을 받을 때까지 너도 협조해줘야겠다고.


 이 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돈을 노린 납치 사건인 줄 알았는데 사건이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버린다. 집 금고에 있던 현금 5백만을 들고 가족들이 억류된 산장으로 갔는데, 원래 부모님과 언니를 납치했던 범인 둘이 모두 시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모에와 같이 갔던 범인은 그것을 보자마자 쓰고 있던 가면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돈을 들고 혼자 도주해 버린다. 그렇게 가족들은 모두 무사하게 되었지만 도대체 누가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산장에 있던 범인들이 도모에 집에 있는 범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 때가 9시 10분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사망 추정 시각이 9시 30분 전후인 것이다. 그러므로 11시가 되어야 산장에 도착했던 도모에 집에 있던 범인은 절대 범인이 될 수 없었다. 그러면 서로 쏜 것일까? 시체에 난 탄흔이 각각 달랐으므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시체를 차 안으로 옮겼다는 게 확인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장에 제 3의 범인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과 별도로 또 다른 일이 도모에의 집에서 벌어져 있었다. 오빠 모토키가 사라진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오빠가 스스로 3층에서 걸어 내려와 집을 나갈 수는 없으니 분명 누군가와 같이 갔거나 납치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제 3의 범인이 납치한 것일까? 아니면 모토키가 제 3의 범인인 것일까? 어느 것도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의 진상도 진범도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기만 한다.


 작가 모리 히로시 스스로 이 작품을 이색적이라고 밝혔듯이, '여름의 레플리카'는 여러 면에서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다르게 보인다. 일단 트릭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건이 계속 벌어져 이지적인 추리에 비중을 더 많이 할애할 수밖에 없었던 전작들과 달리 수수께끼 풀이의 대상인 사건은 하나로 축소된 반면 (情)적인 부분은 그것과 반비례하여 꽤 늘어났다는 점이다. 사이카와의 명쾌한 해결을 기대했던 이들에겐 이 점이 좀 아쉬운 점으로 다가올 수 있을듯 하다. 사이카와는 진정한 해결의 순간마저 모에에게 양보하고 있으니까.


 각설하고, 이 작품 역시 '환혹'과 마찬가지로 '본다는 것'을 꾸준히 천착하고 있다. 가면과 실명인 모토시가 나온 것은 그 때문이다. 특히나 가면의 의미는 '환혹'의 마술과 같다. 마술이 사람들이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시야를 일그러지게 만드는 환혹의 도구이듯, 가면 역시 그러한 것이다. 가면은 눈의 한계를 드러낸다. 보면서도 볼 수 없게 만든다.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고, 기억이 그러하며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진실조차 그러하다. 내가 그렇게 가면을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진실을 보고 있다고 확신하거나 고집하게 되면 비극은 계속 레플리카 될 뿐이다. 모에의 고모 무쓰코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대로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의 집약이라 볼 수 있다.


 "잘 들어. 세상을 좀 더 넓게 봐야 해. 주변을 더 살펴봐야 해. 시간이라든가, 사회라든가, 상식이라든가. 요컨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네 시야가 참 좁다는 거야." (p. 357)


 이와 비슷한 말을 모에는 사이카와에게서도 이렇게 또 듣는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봤다는 이야기일 뿐이야. 그러니 그게 올바르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 난 그걸 확인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비로소 보이는 이치가 있는 법이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p. 399)


 이 주제를 인격적으로 구현한 것이 모토키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모든 것을 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것도 외양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소설은 모에가 모토키를 처음 만난 장면에서 그것을 나타낸다. 그는 모에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며 즉흥적으로 시를 하나 짓는다. 그 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언어로 담아낸다. 모에는 그에게 묻는다. "본다고 말씀하셨죠. 왜 본다는 단어를 쓰셨죠?" 

 그러자 모토키는 이렇게 대답한다.

 "보이니까요." (p. 25)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 정말 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결코 주관적 환영은 아니라고 말이다. 현상학은 우리가 아무리 객관적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해도 신체가 있는 이상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취지의 철학이었다. 현상학자들 중에서 특히 본다는 것에 천착했던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은 사실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인해 거꾸로 보여지는 것이라 했다. 예를 들어 램블란트의 '야경꾼' 그림의 손이 아래의 그림자 때문에 우리가 손으로 볼 수 있듯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주변에 있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때, 그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얽힘 혹은 그 매듭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봄은 그 전체를 헤아리는 것, 혹은 그 전체에 나를 온전히 맡길 때 가능해진다. 모토키가 모에의 얼굴을 손으로 온전히 더듬어 파악하는 것 그대로. 이렇게 보자면 이 소설이 '환혹'과 짝을 이루면서 왜 하필이면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이유도 분명해진다. 이성은 사고 하는 대상과 거리두기를 통해 작동하지만, 감정은 거리두기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불현듯 쓰나미처럼 덮쳐와 나를 그 속에 함몰시켜 버린다.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대로 나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과 같다. 이러한 타자로의 전적인 내던짐. 그것이 감정이 하는 역할이고, 메를로 퐁티가 말했던 진정한 시야의 열림이기도 하다. 모리 히로시가 과연 이런 것까지 상정하고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접점은 꽤나 흥미로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아무튼, 이 소설은 꼭 '환혹'과 같이 읽어야 하며 그것도 '환혹' 다음에 읽어야 한다. 이 순서로 읽으면 분명 범인을 파악하기가 꽤나 힘들 것이다. 난 모리 히로시가 그것도 염두에 두고 썼을 것이라 본다. 순전히 억측일 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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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브렌다 - 본성 대 양육 논쟁의 전환점이 된 일란성쌍둥이에 관한 기록
존 콜라핀토 지음, 이은선 옮김 / 알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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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하나의 성이 '섹슈얼리티'와 '젠더'로 나뉘어져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된 건,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기 기든스가 쓴 '현대 사회학'이란 책에서였다. 대학 신입생 때였는데, 전공은 아니지만 사회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사회학 전공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 책을 가장 많이 본다 하여 읽게 된 책이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인간의 성(sex) 을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자연적인 '섹슈얼리티(sexuality)'와 한 개인이 사회화되면서 가지게 되는 인위적인 '젠더(gender)'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나누게 된 가장 대표적인 계기로 기든스가 말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여기서 소개할 존 콜라핀토의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데이비드 라이머 케이스'이다.



 데이비드 라이머는 1965년 8월 22일, 예정일을 4주 앞두고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부모는 둘에게 브루스와 브라이언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생후 7개월로 접어 들었을 때, 두 아이 모두 소변 할 때마다 칭얼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의 성기를 살펴보니, 포피가 성기 끝 부분을 막아 소변 보는 걸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병원에서 포경 수술로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고 하여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수술은 말처럼 그리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브루스의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가 전류로 절단 부분을 지져서 봉합하는 기구('보비 소작기'라고 한다.)를 썼는데, 의사의 실수인지 아니면 기계의 고장인지 그만 브루스의 성기가 타버린 것이다. 아이는 평생 성적 불능이 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부부에게 머니 박사라는 사람이 연락을 해왔다. 그는 존스홉킨스대학의 저명한 의학 교수였다. 특히 성 심리학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데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음양 환자들이 총계를 놓고 보았을 때, 남성이건 여성이건 성 행태와 성 지향성을 본능적으로 타고나지는 않는다.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은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이론이 있지만, 반음양 환자들을 관찰한 결과 알 수 있듯이, 심리학적으로 볼 때 출생 당시 중립적이었던 섹슈얼리티는 성장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성적인 쪽으로 혹은 여성적인 쪽으로 차별화되기 시작한다."(p. 59)


 그래서 부부에게 브루스를 성전환시키고 아예 여자로 기를 것을 제안했다. 결국 부부는 머니 박사의 뜻을 따랐고, 브루스는 브렌다로 자라게 되었다. 하지만 머니 박사가 순수하게 브루스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겐 야심이 있었다. 자신이 적극 주장하고 있는 '후천적 성 형성론'이 진리인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같은 성을 가진 일란성쌍둥이는 좋은 표본이었다. 그렇게 태어나 인위적으로 한 쪽은 남자로, 다른 한 쪽은 여자로 만들고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자라게 된다면 그것만큼 자신의 이론을 강력하게 증명하는 것도 또 없었다. 브루스의 소식을 들었을 때, 머니 박사는 쾌재를 불렀다. 그가 먼저 브루수의 부모에게 연락하여 당장 존스홉킨스대학으로 데려오라고 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브루스는 정말 브렌다로 자라났다. 아이는 아무 거리낌없이 여자 옷을 입었고 여자처럼 행동했으며 생일 선물도 브라이언은 기차를 골랐는데 자신은 인형을 골랐다. 브렌다는 성이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 증거가 되었다. 삽시간에 이 사실이 전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그래서 사회학의 가장 대표적인 개론서라 할 수 있는 기든스의 책에까지 실리게 되었다. 머니 박사의 명성까지 한없이 높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브루스와 브렌다에 관한 모든 것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그 뒤, 브렌다가 된 브루스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니 그렇게 알려지기 전이라도 브루스가 진실로 브렌다의 삶을 받아들였는지, 그 정확한 내막과 소식이 알려진 바 없었다. 그러다 우리는 1997년에 화와이대학의 생물학자와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한 정신과 의사가 발표한 논문에서 아주 놀랄만한 사실을 알게 된다. 브루스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강제된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에 계속 반발해 왔으며 결국 열 네살 때 다시 남성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논문은 머니 박사의 실험은 실패라고 단정했다. 우리가 진실로 알고 있었던 '쌍둥이 케이스'는 '공상 의학 게임'일 뿐이라고. 그 논문이 발표되자마자 이 책의 작가 존 클라핀토는 직접 당사자를 찾아갔다. 현재 그는 논문에서 말한 그대로 남자 청년이 되어 있었고 이름도 브렌다에서 데이비드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는 브렌다의 삶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내렸다.


 "세뇌 당한 거나 다름 없어요.(p. 11) 


 브렌다는 가장 유명한 아이 중 하나였다. '젠더'라는 개념이 자리 잡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례의 장본인인 만큼 누구나 브렌다를 알았다. 하지만 그는 가장 알려지지 않은 존재이기도 했다. 아무도 그렇게 살아가는 그의 내면을 알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이상한 나라에 사는 것과 같았던 그의 실존, 그 내면에 자리한 고통은 누구의 관심도 끌 수 없었다. 그는 그냥 머니 박사가 만든 브렌다란 껍데기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저자 존 클라핀토는 그 껍질을 깨고, 데이비드가 되기까지의 진정한 알맹이의 삶을 보여주려 한다. 숨김없이, 남김없이. 그리고 우리는 똑똑히 보게 된다. 제아무리 객관적이라 자부하는 과학이라 해도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잘못도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또 그런 과학이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처참하게 유린할 수 있는지. 문득 칼 포퍼가 말한, 과학에 있어 진정한 객관적 지식의 의미가 생각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 및 과학적 객관성은 과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객관적'이고자 하는 개인적 노력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학자들의 우호적-적대적 협동에서 유래하는 것이다.('열린 사회의 적들' 중에서.)


 머니 박사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과학자들이 집단적으로 '브렌다 케이스'를 검증했다면, 브렌다의 고통은 훨씬 빨리 줄어들지 않았을까? 피해자가 비단 브렌다만은 아니었기에 더욱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그 뒤로도 많은 이들이 이 '브렌다 케이스' 때문에 머니 박사와 그의 이론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전환을 당하고 강제적으로 규정 당한 성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 그들은 폭력의 희생양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한 사람의 정체성을 남이 멋대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폭력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성 정체성적으로 단 두 개의 삶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한 인간의 삶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 우리는 이 책에서 똑똑히 볼 수 있다. 머니 박사가 남성 아니면 여성의 삶밖에 없다는 고정 관념에서 탈피만 할 수 있어서도 브렌다와 같은 많은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여기서 아무래도 쥬디스 버틀러의 수행적 정체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정체성이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행동을 통해 부단히 형성된다고 말했다. 식물처럼 남성이나 여성으로 대지에 고정되어 그렇게만 자라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광활한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바람처럼 어디에나 깃들 수 있는 것이며 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 브렌다에게 여성의 삶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설령 성기를 잃어버렸다 한들,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삶의 과정을 배려하며 그만이 가진 가능성이 발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오늘의 데이비드가 훨씬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사람의 성은 신비롭다.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는 그걸 결코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더하여, 한 사람을 대한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넌지시 알려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늘 세심하게 살피고 진중하게 헤아려야 한다는 것을 은연 중에 깨닫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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