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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레플리카 ㅣ S & M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7
모리 히로시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사이카와와 모에 시리즈의 일곱번 째 작품, '여름의 레플리카'는 여섯번 째 작품, '환혹의 죽음과 용도'와 한 쌍이다. '환혹의 죽음과 용도'를 처음 읽었을 때 기겁했었다. 1장에서 갑자기 3장으로 건너 뛴 것이다. '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누락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보지 않고 건너 뛰어 버린 앞에 있는 차례를 살펴 보았다. 그러고는 더 놀랐다. 차례엔 1, 3, 5, 7장 이렇게 홀수장만 있었던 것이다. '이거 뭐야? 이것도 트릭인가?'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싶어 서둘러 검색해 보았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트릭은 아니었다. 작가의 원래 의도였다.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사건을 담으려 했던 것이었다. 즉 두 권이 한 쌍이었다. 그래서 그 절반이 되는 '환혹의 죽음과 용도'가 정확히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부러 홀수장으로 채워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짝수장으로만 채워진 또 한 권은?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사이카와와 모에 시리즈의 일곱번째 작품, '여름의 레플리카'다.
제목에서 이미 '환혹'과 더불어 한 쌍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레플리카'는 복제라는 뜻이니까. 제목은 '환혹'의 그 여름이 다시 한 번 반복된다는 뜻인 것이다. 사실 여름은 사이카와 모에가 사건을 가장 많이 겪는 계절이기도 하다. 작가도 그것을 의식했던 듯, 이 작품 말미에 사이카와에게 이런 말을 읊게 한다.
"올여름도 참 힘들었어. 정말 매년 매년..."
"예, 정신없는 여름이었네요." (p. 459)
모에의 말대로 올여름은 정말 정신없는 여름이었을 것이다. '환혹'과 '레플리카' 별개로 벌어진 두 개의 사건을 모두 추리해야 했으니. 그러나 여기서 사이카와와 모에의 등장 분량은 다른 작품에 비해 적다. 대부분은 '환혹'에서 모에의 여고 동창이자 절친으로 오랜만에 모에와 만났다가 더 오랜만에 고향으로 내려 간다며 모에와 헤어진 뒤,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내내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던 도모에가 맡는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팔묘촌'과 비슷한 형식이라 생각하면 얼추 맞을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도모에는 2년 만에 친가를 방문한다. 도모에의 아버지는 현의원으로 지방의 유력 정치인이다. 친아버지는 아니고 새아버지다. 어릴 때 엄마와 재혼했고 언니 사나에와 함께 도모에는 그의 딸이 되었다. 위로 전처가 낳은 모토키라는 오빠가 하나 있다. 그는 앞을 보진 못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한 때 유명했던 시인이었다. 한 때라는 것은 지금은 시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바깥 활동 자체가 아예 없다. 3년 전 여름에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에 그는 자기 방에서 갇혀있다시피 한 삶을 살고 있다. 도모에가 친가로 가는 걸 꺼려 하는 이유도 오빠 때문이다. 그런데 모처럼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다. 있는 것은 가정부와 방에 칩거한 오빠 뿐. 결국 혼자 집에서 밤을 보낸 도모에는 아침을 먹으려 내려갔다가 혼비백산할만한 일을 겪는다. 어떤 남자가 총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엄마의 수집품으로 거실 벽에 걸려 있던 가면을 쓰고서. 그는 말한다. 도모에의 가족들도 모두 납치되었으며 몸값을 받을 때까지 너도 협조해줘야겠다고.
이 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돈을 노린 납치 사건인 줄 알았는데 사건이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버린다. 집 금고에 있던 현금 5백만을 들고 가족들이 억류된 산장으로 갔는데, 원래 부모님과 언니를 납치했던 범인 둘이 모두 시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모에와 같이 갔던 범인은 그것을 보자마자 쓰고 있던 가면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돈을 들고 혼자 도주해 버린다. 그렇게 가족들은 모두 무사하게 되었지만 도대체 누가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산장에 있던 범인들이 도모에 집에 있는 범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 때가 9시 10분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사망 추정 시각이 9시 30분 전후인 것이다. 그러므로 11시가 되어야 산장에 도착했던 도모에 집에 있던 범인은 절대 범인이 될 수 없었다. 그러면 서로 쏜 것일까? 시체에 난 탄흔이 각각 달랐으므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시체를 차 안으로 옮겼다는 게 확인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장에 제 3의 범인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과 별도로 또 다른 일이 도모에의 집에서 벌어져 있었다. 오빠 모토키가 사라진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오빠가 스스로 3층에서 걸어 내려와 집을 나갈 수는 없으니 분명 누군가와 같이 갔거나 납치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제 3의 범인이 납치한 것일까? 아니면 모토키가 제 3의 범인인 것일까? 어느 것도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의 진상도 진범도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기만 한다.
작가 모리 히로시 스스로 이 작품을 이색적이라고 밝혔듯이, '여름의 레플리카'는 여러 면에서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다르게 보인다. 일단 트릭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건이 계속 벌어져 이지적인 추리에 비중을 더 많이 할애할 수밖에 없었던 전작들과 달리 수수께끼 풀이의 대상인 사건은 하나로 축소된 반면 정(情)적인 부분은 그것과 반비례하여 꽤 늘어났다는 점이다. 사이카와의 명쾌한 해결을 기대했던 이들에겐 이 점이 좀 아쉬운 점으로 다가올 수 있을듯 하다. 사이카와는 진정한 해결의 순간마저 모에에게 양보하고 있으니까.
각설하고, 이 작품 역시 '환혹'과 마찬가지로 '본다는 것'을 꾸준히 천착하고 있다. 가면과 실명인 모토시가 나온 것은 그 때문이다. 특히나 가면의 의미는 '환혹'의 마술과 같다. 마술이 사람들이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시야를 일그러지게 만드는 환혹의 도구이듯, 가면 역시 그러한 것이다. 가면은 눈의 한계를 드러낸다. 보면서도 볼 수 없게 만든다.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고, 기억이 그러하며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진실조차 그러하다. 내가 그렇게 가면을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진실을 보고 있다고 확신하거나 고집하게 되면 비극은 계속 레플리카 될 뿐이다. 모에의 고모 무쓰코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대로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의 집약이라 볼 수 있다.
"잘 들어. 세상을 좀 더 넓게 봐야 해. 주변을 더 살펴봐야 해. 시간이라든가, 사회라든가, 상식이라든가. 요컨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네 시야가 참 좁다는 거야." (p. 357)
이와 비슷한 말을 모에는 사이카와에게서도 이렇게 또 듣는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봤다는 이야기일 뿐이야. 그러니 그게 올바르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 난 그걸 확인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비로소 보이는 이치가 있는 법이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p. 399)
이 주제를 인격적으로 구현한 것이 모토키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모든 것을 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것도 외양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소설은 모에가 모토키를 처음 만난 장면에서 그것을 나타낸다. 그는 모에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며 즉흥적으로 시를 하나 짓는다. 그 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언어로 담아낸다. 모에는 그에게 묻는다. "본다고 말씀하셨죠. 왜 본다는 단어를 쓰셨죠?"
그러자 모토키는 이렇게 대답한다.
"보이니까요." (p. 25)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 정말 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결코 주관적 환영은 아니라고 말이다. 현상학은 우리가 아무리 객관적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해도 신체가 있는 이상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취지의 철학이었다. 현상학자들 중에서 특히 본다는 것에 천착했던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은 사실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인해 거꾸로 보여지는 것이라 했다. 예를 들어 램블란트의 '야경꾼' 그림의 손이 아래의 그림자 때문에 우리가 손으로 볼 수 있듯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주변에 있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때, 그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얽힘 혹은 그 매듭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봄은 그 전체를 헤아리는 것, 혹은 그 전체에 나를 온전히 맡길 때 가능해진다. 모토키가 모에의 얼굴을 손으로 온전히 더듬어 파악하는 것 그대로. 이렇게 보자면 이 소설이 '환혹'과 짝을 이루면서 왜 하필이면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이유도 분명해진다. 이성은 사고 하는 대상과 거리두기를 통해 작동하지만, 감정은 거리두기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불현듯 쓰나미처럼 덮쳐와 나를 그 속에 함몰시켜 버린다.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대로 나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과 같다. 이러한 타자로의 전적인 내던짐. 그것이 감정이 하는 역할이고, 메를로 퐁티가 말했던 진정한 시야의 열림이기도 하다. 모리 히로시가 과연 이런 것까지 상정하고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접점은 꽤나 흥미로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아무튼, 이 소설은 꼭 '환혹'과 같이 읽어야 하며 그것도 '환혹' 다음에 읽어야 한다. 이 순서로 읽으면 분명 범인을 파악하기가 꽤나 힘들 것이다. 난 모리 히로시가 그것도 염두에 두고 썼을 것이라 본다. 순전히 억측일 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