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일상에 지칠  때마다 우리는 종종 여행을 꿈꾼다. 그럴 때 길은 우리들에게 자유와 해방 그 자체로 보인다. 하지만 길이 그렇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에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집이 없다면 길은 전혀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고 만다. 내 앞에 놓여 있는 길 전부가 불안을 야기하고 공포를 빚어내는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상 위에 맘 편히 깃들 수 있는 집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지금도 사력을 다하는지 모른다.


 프랑스의 여성 작가 델핀 드 비강이 2007년에 발표하여 그 해 프랑스의 서점 대상과 르노드 상을 동시에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있는 공쿠르 상 후보까지도 올랐던 ‘길 위의 소녀’는 바로 그런 집을 잃어버린 두 소녀에 대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녀들의 이름은 노(no)와 루(lou). 노는 집없이 길거리를 헤매는 노숙자다. 하지만 루는 비록 가족간의 유대가 헐겁긴 하지만 그래도 집이라는 울타리 속에 있다. 그러나 잘 따져 보면, 둘 모두 사실상 집이 없는 존재다. 


'길 위의 소녀'는 영화(Zabou Breitman 감독)로 만들어져 2010년에 개봉되었다.

영화 포스터에서 키 큰 소녀가 노이고, 작은 쪽이 루이다.


 집은 문학에서 소속과 안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다. 바로 이런 집을 노와 루, 모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녀들의 내면엔 모두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안주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를테면 루는 이렇게 생각한다.


 살아오는 내내, 나는 어디에 있든지 언제나 바깥에 있었다. 난 항상 이미지나 대화의 바깥으로 동떨어지고 어긋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말이나 소리를 나 혼자만 듣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잘만 듣는 말을 나만 액자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리창 저편에서 못 듣는 것 같았다.(p. 17)


 그런 고로, 노와 루 모두는 실상 ‘길 위의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들과 똑같이 길 위에 서게 된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바로 '뤼카'란 소년이다. 루는 천재 소녀로 2년 월반을 했다. 반면 뤼카는 좀처럼 학교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해 2년 유급을 했다. 성적은 바닥이고 걸핏하면 선생님께 반항하여 교실에서 쫓겨나기 일쑤다. 하지만 루는 오히려 그런 뤼카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다. 루가 노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과 똑같이 뤼카도 자신만큼이나 바깥에 있는,  그렇게 길 위의 존재란 걸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정말 그랬다. 뤼카에게도 노와 루와 똑같이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는 집은 없었다. 그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는 브라질로 떠나 버렸고, 엄마는 새 애인과 같이 지내느라 집에 오지 않았다. 뤼카도 노와 루처럼 엄마가 부재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공통점 하나가 눈에 띈다. 노와 루 그리고 뤼카 모두에게 엄마가 없다는 것. 집처럼 강한 소속감과 안정을 뜻하는 상징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엄마다. 모성은 자식과 혈연으로 연결되고 자식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으로 품 안의 자식에게 영원한 소속과 안정을 느끼게 한다. 이는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었기에 경험으로도 잘 알고 있는 바다. 그러나 소설에선 이런 엄마가 부재(不在)한다. 존재하는 것은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엄마 뿐이다. 사실 노와 루가 길 위에 서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자의가 아니었다. 그 보다는 자신과 무관한 가혹한 운명으로 인해 내몰린 결과였다. 전적인 타의의 소산. 그렇게 길 위로 내몬 장본인이 바로 엄마였다.


 는 엄마가 여러 사내에게 강간 당하는 바람에 태어났다. 그런 노는 엄마에게 있어 자신이 당한 끔찍한 비극을 상기시키는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이름처럼 ‘NO’하고 거부당할 숙명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기워져 있었던 것이다. 노의 엄마는 과거의 아픔에 정면으로 맞서기 보다 그저 덮고 회피하려고 들었다. 당연하게도 그 비극의 구현체라고 할 만한 노 또한 기피했다. 


 그런데 이런 엄마의 모습이 의 엄마에게도 똑같이 반복된다. 루의 엄마 역시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오랫동안 간절히 원했고 간신히 가지게 된 아이, 그러니까 루의 동생 타이스가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그만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 죽음으로 인해 루의 엄마는 모든 삶의 의욕을 잃었고 식물처럼 지냈다. 엄마는 루도 멀리했다. 루가 잃어버린 자식 타이스를 떠올리도록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픔을 관통하여 새로운 삶의 의지로 극복하기(아마도 그것은 루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했을 것이다.) 보다는 외면하기만 했다. 그 바람에 루는 엄마에게서 밀려났고, 실제로 4년 동안이나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그리고 여전히 집에서 아무런 온기를 느낄 수 없는 루는 집을 그저 기계적으로 가족을 연기하는 생기 없는 연극 공간으로 여길 뿐이다. 이렇게 노와 루가 노숙의 운명에 거하게 된 것은 엄마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뤼카도 마찬가지였다.


 델핀 드 비강은 이런 엄마의 모습을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그린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를 통해 비강이 들려주고 싶은 것이 '단순히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변해야 구원이 있다'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이는 소설이 좀 더 근원적인 부분에 대해 말하려 하기 위함이다. 바로 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노와 루 그리고 뤼카 모두 원래 집이 없었던 게 아니라는 점이 이목을 끈다. 그들이 길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은 오로지 집이 더이상 집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자신의 탓이 아니었고, 그 어떤 전조나 예고 또한 없었다. 그들 모두는 문자 그대로 느닷없이 노숙의 운명으로 내던져졌다. 아마도 이런 사실, 즉 우리는 언제든 운명의 돌연한 변화로 정주(定住)를 잃고 유랑의 삶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소설이 모성을 그렇게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한다. 집보다 더 영원한 소속과 안정의 상징인 모성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집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믿음은 더욱 동요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 동요로 생긴 균열을 통해서 비강은 우리에게 '진정한 집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집이 그토록 쉽게 우리가 바라는 집의 의미를 잃을 수 있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래도 집을 추구해야 한다면 이제 그 집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바로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샘솟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강은 여기에 대해서도 마치 소설에서 마랭 선생이 루의 조사에 도움이 되도록 노숙자의 자료 같은 것을 건네주듯 장면들을 할애하여 우리로 하여금 성찰을 좀 더 제대로 다듬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두 개로, 소설 후반부에서 집중적으로 묘사된다.


 하나는 노가 루의 집에서 살게되는 장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노가 결국은 루의 집에서 나와 뤼카의 집에서 살게 되는 장면이다. 집은, 밤마다 편히 잠들 곳을 찾기 위해 이거리 저거리를 헤매어야만 하는 노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사실 노에게 집은 집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집이 있다면, 그 집에서 늘 자신을 따스하게 맞아줄 가족이 있다면 노는 타인에게 자신이 그저 더럽고 불결한 노숙자가 아니라 진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이상 카페에 혼자 들어갔다가 점원에게 내쫓길까 봐, 루를 기다렸다가 함께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그 존중과 당당함이야말로 노가 정말 원했던 것이었고, 노는 집이 그런 걸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루의 집에서 처음 확인했다. 루의 가족들이 노를 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는 루의 집에서 참된 안정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노숙자일 때보다 더 작게 말했고, 행동거지를 조심했다. 노에게 루의 집은 거리보다 더 자유롭지 못한 공간이었다. 결국 그녀는 홀로 느끼는 숨막힘 때문에 루의 집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노가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부모라는 존재의 권위와 그것이 부여하는 질서 때문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모두가 대등한, 권위도 없고 질서도 부재한 공간이라면 노에게 진정한 집이 될 수 있을까? 마치 그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비강은 실제 그런 공간에 노를 거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뤼카의 집이다. 뤼카의 집엔 부모가 없다. 거기서는 뭘하든 자유다. 노와 루는 뤼카의 집에서 자유의 대기를 마음껏 활공한다.



 하지만 그조차 노에게 진정한 집이 되어주지 않는다. 자유 분방과 무책임은 결국 갈등을 부르고 짧은 시간 동안 유토피아 같았던 뤼카의 집은 붕괴된다. 노는 계속해서 실패한다. 그녀를 도와주려는 루의 노력도 마찬가지다. 둘은 끝내 헤어지기까지 한다.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노와 함께 할 것이라던 루의 결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왜 이러는 것일까? 비강은 왜 노와 루에게 이처럼 계속된 좌절과 불안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나는 이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몇 번이나 책을 반복해서 뒤적이고 오래도록 곱씹어 생각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되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당한 아픔과 처한 불안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애쓰는데, 실은 근본적인 태도에 있어서는 그들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그 구원을 외부에서 얻으려고만 하지 자신이 변화하여 자기 쪽에서 먼저 구원을 주는 존재가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루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노와 함께 있으려 하는 것은 그녀가 루 자신과 너무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루는 노에게 엄마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한 자신을 투사한다. 노에게서 루는 세상과 잘 섞일 수 없고, 어디서든 관심과 사랑을 얻지 못하는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본것이다. 따라서 루의 노에 대한 애정은 나르시즘(narcissism적이라 할 만하다. 뤼카에 대한 애정도 근본적인 면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노가 자신이 거할 수 있는 집을 찾듯이, 루는 자신이 믿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모두 한결같이 외부의 것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려 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그녀들의 부모가 잘 보여준 바 있다. 노의 엄마도, 루의 엄마도 노와 루만큼이나 스스로 변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바깥 세계가 먼저 변하여 자신에게 구원이 빛이 비쳐오길 원했다. 그래서 정작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바로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밀어내기만 했다. 뤼카 엄마도 뤼카와 새 남자 친구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뤼카를 집에 홀로 내버려 둔다. 노의 엄마가, 루의 엄마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변하려는 노력을 조금이나마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노와 루가 겪었던 삶의 고통도 많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알고보면 노가 실패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 역시 자신이 먼저 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가 루의 가족을 온전히 믿고 그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다면 그녀가 루의 집을 떠나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타인을 믿기 보다, 세상 앞에서 몹시 왜소한 자신의 존재만 부각해서 되새겼다. 루의 집에서 너무나 조심스러워진 그녀의 말투와 행동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불결한 존재인지라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어렵다는 사실만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모처럼 다가온 사랑의 손길마저 제 쪽에서 먼저 걷어찬 결과만 만들고 만 것이다. 노의 엄마와 루의 엄마가 자신의 비극과 아픔에만 골몰한 나머지 그만 자신과 닮은 꼴의 비극만 양산해 버린 것과 똑같이.


 이로써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평안히 거할 수 있는 진정한 집은 바깥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먼저 타인에 대한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내가 바라는 집은 도래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충만한 집에 머무르길 원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있는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줘야 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그토록 찾는 구원은 저 바깥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중국 작가 노신의 말마따나, 원래 어딘가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먼저 걸어 나갔기에 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비강은 루의 삶에서 노를 홀연히 사라지게 했을 것이다. 루가 다른 누구에 기대서가 아니라 스스로 온전한 주체가 되어 혼자 힘으로 세상 앞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말이다.



 루는 IQ 160의 천재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자신의 존재감은 160g도 안된다. 그녀는 계속 자신을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긴다.


 난 말이다. 성장할 수 없다. 모습을 바꿀 수도 없다. 난 너무 작다. 아주 작은 모습 그대로다. 어쩌면 모두들 모르는 척하는 이 비밀을 내가 알고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에 대한 비밀을 내가 알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p. 111)


 그런 면에서 루는 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게 왜소한 자신 앞에 세계는 너무나 거대하다. 감히 앞으로 나서는 것조차 두렵다. 루는 지식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거대한 세계에 맞서는 자신만의 방법이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온갖 정보를 모으며 분류하고 체계화 한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불가해하여 두렵기만한 세계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하면 좀 더 당당해지고 편해질 줄 알았다. 세상과 좀 더 잘 섞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게 되고 더 소심하게 된다. 키스조차 혀를 먼저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할지 알지 못해 그녀는 사랑 앞에서 뒷걸음질친다. 루는 자신이 이렇게 되길 원했다.


 난 말이다. 오히려 내가 다른 곳에 있으면 좋겠다. 쭉 뻗은 직선을 따라서 세상들이 서로 소통하고 서로 겹치는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 윤곽선들이 서로 투과되는 곳, 삶이 아무 단절 없이 쭉 이어지는 곳, 만사가 불현듯 이유없이 멈춰버리지 않는 곳, 중요한 순간들이 닥칠 때에는 사용설명서도 딸려서 나오는 곳으로.(p. 86 ~ 87)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집요하게 추구한 지식들은 그것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소통은 자주 단절되었고, 윤곽선들은 투과되지 못했다. 바깥의 지식을 집적하기만 했을뿐, 그것이 자신의 변화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이 아니라, 있는 그 자리에서 변화를 만들어내야 했다. 키스를 할 때 혀를 먼저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하는지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면 된다. 이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처럼.


 그 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품었던 허다한 질문들 중에서, 키스 할 때 혀를 돌리는 방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p. 300)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이 먼저 타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루, '자신에게 빠져 있는 것'(p. 87)이었다. 그리고 그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바로 자신을 허무는 작업이었다. 노를 처음 만날 때도 그랬고, 뤼카를 처음 만날 때도 그랬다. 언제나 루가 아니라 노와 뤼카가 먼저 루에게 다가왔었다. 그래서 결말에 가서 사랑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사랑은 지식으로 습득될 수 없다. 그것은 수영과 똑같이 자신의 전부를 오롯이 내던지고, 그 과정을 몸소 겪어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렇게 사랑은 오랜 과정에 걸쳐 경험과 성찰 속에서 천천히 여물어 가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그러면서 자신을 덜어내고 허물며 희생하는 행위를 동반한다. 사랑은 온전히 타인 중심이 될 때 완성된다. 사랑이 여정이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먼저 내려놓는다는 의미에서 이야말로 사랑의 비유로 합당할지 모른다. 길은 어딘가로 다가가기 위한 여정이고, 무엇보다 내가 먼저 움직여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러고 보면, 사실 길과 집의 구분은 별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어디든 사랑이 있으면 길은 집이 될 수 있고, 또 사랑이 없으면 어떤 집이든 길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이 키스를 통해 루와 뤼카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수많은 집을 전전해 왔으나 어디든 자신의 진정한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진정한 집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자신들의 사랑으로. 그런데 그 사랑의 확인은 길 위에서 이뤄진다. 이런 연출로 우리는 보다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집이냐, 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지금 자리잡은 것이 사랑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읽으면서 노와 루의 이야기에 많이 공감했다. 내 처지도 툭 까놓고 곰곰이 따져 보면 그녀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오는 루의 엄마 말대로, '인생은 원래 부당하고, 여기에 덧붙일 말은 하나도 없다'(p. 117)고 단정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 엄마와 똑같이 이런 삶을 가져다 준 뭔가를 원망하고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너무나 많고,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p. 93)이라며 무기력하게 많은 날들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문제는 내가 오로지 내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루처럼 진정 뭔가 빠져 있는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더 불안했고, 더 두려웠으며 또한 더 무기력했다는 것을. 지금부터라도 결여 되었던 그것을 채워나가려 한다. 누구에게서 온기를 얻으려 하기 보다 내가 먼저 그의 온기가 되어주는, 차마 입 밖에 내뱉기 부끄럽지만 그래도, 사랑이라는 것을.


- 인용한 사진들은 모두 영화 속 장면이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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