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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원숭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9
J. D. 바커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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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작년 내가 읽은 최고의 스릴러는 A.J 핀의 '우먼 인 윈도'였다.

 이 작품은 정말 내게 명불허전을 실감하도록 만들었다. 재밌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게 조금도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난 정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이 소설을 단번에 흡입해 버렸다. 무려 619페이지에 이르는 두터운 이 작품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가는 열차 안에서 다 읽어버렸을 정도로. 이 책을 출간한 비채는 제대로 홈런을 날려버렸다. 그런데 지금 또 비채가 홈런을 날렸다. 다시 말해 '우먼 인 윈도'에 버금가는 흡인력을 자랑하는 작품이 또 다시 비채에서 발간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J. D. 바커 '네 번째 원숭이'다.





 형사 샘(원래는 새뮤얼) 포터는 동료 내쉬 형사의 연락을 받고 사건 현장을 찾아간다. 누가 갑자기 달리는 버스 앞으로 뛰어들어 치여 사망했다는 것이다. 누가봐도 자살이 명백한 사건에 왜 자신을 불렀는지 영문을 모를 무렵, 내쉬가 포터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게 만드는 말을 한다. 그가 검은 리본이 묶인 작고 하얀 상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당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미국의 시카고는 흔히 '네 머리 원숭이 킬러'라 불리는 연쇄살인마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었다.


 에머리 역시 네 마리 원숭이 킬러에 대해 잘 알았다. 시카고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도 그럴 것이다. 그가 연쇄살인범이라서가 아니라, 희생자를 죽이기 전에 고문한 다음 신체의 일부를 가족에게 우편으로 보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귀, 다음에는... (p. 109)


 샘 포터는 지난 5년 동안 네 마리 원숭이 킬러(줄여서 '4MK'라고 부르기도 한다.)가 놓아 둔 상자를 21개나 보았다. 희생자 한 명 당, 처음에는 귀 다음에는 눈 그리고 마지막으로 혀가 담긴 상자를 보내니까 총 7명이 킬러에게 살해된 것이다. 그만한 인원이 죽었는데도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오직 상자만 남길 뿐, 그 외 증거는 완벽하게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자를 가진 채, 버스로 뛰어 든 남자가 그 킬러였을까? 상자에 담긴 귀는 그가 자신의 죽음까지 감행하면서 초대한 마지막 살인 게임이었을까? 그렇다면 이 귀는 누구의 것인가? 샘 포터의 내면에서 이런 의문이 일어나는 가운데 죽은 남자의 소지품에서 한 권의 노트가 발견된다. 네 마리 원숭이 킬러가 자신이 살아 온 내력을 적은 기록을. 소설은 그 노트의 발견과 동시에 두 개의 내용으로 병행하며 전개된다. 하나는 4MK를 디뒤쫓는 수사반들의 이야기로, 다른 하나는 노트에 나와 있는 4MK의 고백으로.


 한 편, 귀의 주인공은 곧 밝혀진다. 상자에 수신인 주소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차기 시카고 시장으로 유력한 사회 지도층 인사 아서 탤벗. 샘 포터 일행은 그와 가족을 찾아갔다가 그의 딸 에머리가 범인에 의해 납치되었음을 알게 된다. 상자 속 귀는 그 에머리의 귀였던 것이다. 죽은 자가 진범일까? 정말 진범이라면 귀만 자르고 자살을 결행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런데 만일 다른 자가 범인이라면 에머리의 눈과 혀가 배달되기 전에 구해야만 한다. 샘 포터가 지휘하는 수사반은 죽은 남자의 진실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에머리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한 편, 노트 속 4MK의 고백은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무시무시한 사실을 털어놓고 있었는데...



 이런 소개로 책을 읽으며 설정에 대해 내가 느낀 것이 얼마나 전해질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내게는 정말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설정이었다. 4MK의 범죄 방식은 물론 노트 속 그 가족의 과거 또한 날 완전히 사로잡았다. 혹시나 궁금하실 분이 계실까 싶어서 하는 말인데, '네 마리 원숭이'는 일본 닛코의 도쇼구 신사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그 신사의 입구에는 원숭이 상 세 개가 있는데 첫 번째 원숭이는 귀를 가리고 있고 두 번째 원숭이는 눈을 가리고 있으며 세 번째 원숭이는 입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각각 악은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는 뜻이라고.



 실제 도쇼구 신사의 원숭이는 이 셋 밖에 없지만 미국엔 네 번째 원숭이가 있으며 그건 악을 행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알려진 바 있는데, 소설은 그걸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킬러가 스스로 네 마리 원숭이라고 한 것은 그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악행을 저지하는 것이라 그러한데, 5년 전 그의 첫 살인이 그랬듯이 4MK는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간 범죄자를 찾아내 처단한다. 그런데 범죄자 자신을 처단하는 게 아니라 그의 가족을 납치하여 귀와 눈 그리고 혀를 자른 다음 살해한다. 그가 타인의 소중한 존재에게 커다란 아픔을 입혔으니, 그 역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 한다는 논리다. 역시나 아서 탤벗 또한 무고한 사람은 아니다. 그가 행한 죄의 대가로 숨겨둔 자식인 에머리가 납치된 것이다. 그는 과연 어떤 죄악을 저질렀는가? 그건 4MK가 쓴 노트에서 밝혀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샘 포터가 주역이 되는 수사 이야기와 4MK가 기록한 노트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읽으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겠지만 그 어떤 이야기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블랙홀에 붙잡힌 빛처럼 이야기가 뿜어내는 중력에 마냥 끌려갈 뿐이다. 특히 4MK가 쓴 노트의 기록은 압도적이다. 선정적인 설정과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반전 속에서 끝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동안 허다한 스릴러를 만났지만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 식상함만 느꼈다면 '네 번째 원숭이'를 꼭 한 번 만나보셨으면 좋겠다. 잃어버렸던 스릴러의 재미를 여기서 찾아낼 지도 모른다. 너무나 재미있게 읽은만큼 소설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지만 그렇게 하면 본의 아니게 스포일러도 밝힐 것 같고 여러 모로 처음 만나 읽어보면서 느끼게 되는 재미를 망칠 것 같아서 그만두련다. 그냥 이 소설의 존재를 모르실 분들을 위하여 '여기 정말 재밌는 소설이 나왔으니 꼭 한 번 만나보시라!'는 의미 정도의 리뷰로 여겨주었으면 좋겠다. 에필로그를 보니, 아무래도 속편이 나올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걸 하루빨리 보게 되기만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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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회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6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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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나오키>로 유명한 일본 작가 이케이도 준. 그의 새로운 소설이 최근 출간되었다. 제목은 '일곱개의 회의'.

내가 이케이도 준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한자와 나오키>란 일본 드라마 때문이었다. 일본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드라마라고 하길래 호기심으로 시청했다가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드라마의 원작이 되는 소설까지 읽어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 소설을 쓴 작가가 바로 이케이도 준이었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한자와 나오키'에는 살인처럼 독자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 범죄나 거대한 음모 같은 게 나오지 않는다. 전개 되는 건 회사란 조직 사회 내부의 치열한 암투다. 권력을 손에 쥐고 불공정한 일을 획책하는 상사가 있고 자신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거기에 맞서 자신만의 정의를 관철시키는 부하 직원이 있다. 그 대결이 작품을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간다. 연쇄 살인이나 전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음모가 진행되는 작품에 비해 다소 심심하게 여겨지는 소재지만 그런데도 <한자와 나오키>는 그런 소설 이상으로 재밌다. 한 번 손에 들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쉽사리 놓을 수 없게 된다. '왜 그런 몰입력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그건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마주하는 상황들이 현재 자본주의 속 회사라는 조직 내에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크거나 작거나 하는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리 다를 것 없는.


 이번에 나온 '일곱개의 회의'도 그러하다. 

 오로지 성과를 얼마나 낼 수 있느냐가 전부인 회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했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가 여기서 펼쳐지는 것이다. 먼저 그 드라마가 어떤 것인지 대략 소개하자면 이러하다. 무대는 당연히 회사다. 대기업인 '소닉'의 자회사 중 하나로 주로 주택 설비와 관련된 물품들을 제조, 판매한다. 규모는 중견 급. 그런데 이 회사애서 직원들에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누구보다 높은 성과를 내어서 회사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영업1과 과장 사카도가 회사에서 가장 한량으로 성과도 없고 언제 짤려도 이상할 것 없는 잠귀신 핫카구에게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 당했는데, 당연히 일도 안 하고 늘 자기 바쁜 핫카구가 짤릴 것이라 다들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사카도가 징계를 넘어 해고까지 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직원들에겐 그야말로 경천동지할만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내막에 대해선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사카도와 입사동기로 늘 그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하라시마는 최근 사카도의 뒤를 이어 그의 자리로 부임하게 되면서 비로소 이유를 알게 된다. 그것도 잠귀신 핫카구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이유를 듣는 건 간단해. 하지만 그렇게 하면 넌 한 가지 중요한 권리를 포기하게 되는데, 그래도 상관없어?'(p. 48)





 '일곱개의 회의'는 이처럼 직장 내 괴롭힘 고발 사건으로 촉발된 미스터리를 주된 축으로 하여 진행된다. 이케이도 준은 2화에서 그 사건의 전모를 하나씩 차츰 밝혀나가는데, 장차 그 사건은 회사의 존립마저 좌지우지 하는 커다란 규모로 확장한다. 파급 효과는 회사의 도산과 직원의 전원 실업이라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것을 가져온 방아쇠는 실로 사소했다. 성과를 내기 위해 한 번 눈 감고 불법의 유혹에 넘어 간 것이 자신 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를 헤어나올 수 없는 위기에 빠뜨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악마의 유혹은 소설 내에서 단 한 사람만 받는 게 아니다. 그 사건이 수면으로 부상할 때마다 진실을 바깥에 밝혀야 할 책임을 지게 되는 이들 모두가 동등하게 받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연쇄 과정 중, 누군가가 성과 보다 책임을 먼저 생각했다면, 자신 보다 타인을 먼저 돌볼 줄 알았다면 해악의 규모가 그 정도로 증가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진실을 알게 된 자 대부분이 그러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 올 위험과 불이익만 생각했기에 회사에 속한 모두의 삶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일곱개의 회의'는 8화에 걸쳐 이러한 과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그것도 회사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현실감 넘치는 묘사로 말이다. 덕분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케이도 준은 단순히 사건의 경과만 나열하지 않는다. 소설 속 인물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의 과거를 통해 그가 어떤 인생 경로를 걸어왔는지 밝혀 그 인물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도록 이끈다. 순전히 욕심이 많거나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약함을 너무 크게 부풀렸고 그것이 안겨준 두려움에 굴복한 것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런에 이런 인물상은 그저 소설 속에만 등장하지 않는다. 회사 속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어쩌면 자기 곁에서 혹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는 모습인 것이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또는 회사에서 인정받고자 높은 성과를 낼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은 적이 있지 않았던가? 더러는 이것이 불공정한 처사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하면 하청 업체가 아주 힘들게 될 거라는 걸 아는데도 모른 척 눈 감고 밀고나가 버린 적이 있지 않았던가? 잠귀신 핫카구의 일갈대로 회사의 영혼을 판 사람이지 않았던가?


 그런 우리에게 이 소설은 핫카구의 말을 빌려 이렇게 힐난한다.


 "영혼을 판 남자의 말로가 고작 이거냐."(p. 325)


 '일곱개의 회의'는 이런 일갈에 나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재밌지만 읽다보면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자문하도록 만든다. 나 또한 영혼을 판 사람은 아니었는지, 나는 얼마나 내 영혼을 잘 지키고 있는지 하는 것들을.


 그런데 그 일갈은 우리 개인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개인을 넘어 일본 사회 전체에 보내는 지탄이라고 본다. 최근 코로나 사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 양상은 더욱 일본이라는 나라가 정상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감염의 확산을 막아야 할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정부와는 달리, 스스로 나서서 책임을 지려하기 보다는 사태의 진실을 감추거나 그 책임을 남에게 떠맡기는 듯한 처사를 점점 더 많이 목도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일본에서 코로나가 얼마나 커다란 규모로 확산될 것인지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일곱개의 회의'에서 주축이 되었던 사건의 전개 양상과 너무나 흡사하다. 소설 속 책임 있는 자들이 은폐와 방관으로 일관하다 호미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가래로도 못 막아 파멸이라는 철퇴를 맞았듯이 지금의 일본의 관료들 또한 그러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 속 비극은 나사라는 아주 작은 부품이 가져온 것이었다. 조직에서 개인은 종종 나사에 비유된다. 나사가 맡은 자리에서 제 역할을 잘 해야만 기계 전체가 제 모습을 잘 유지하고 돌아가듯 조직 내 개인 또한 그러하다는 뜻이리라. 이는 소설이 잘 보여준 것처럼 거대한 조직의 운명도 나라는 아주 작은 나사에 달려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소설 속 사건도, 현재 일본의 모습도 나사가 자기가 짊어져야 했던 책임을 제대로 했더라면 보다 긍정적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책임이란 조직이 원하는 성과가 아니라 보다 고귀한 윤리적 가치를 실현하는 결단을 뜻한다. 그것이 바로 핫카구가 강조하는 영혼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영혼을 지킬 때, 그 영혼의 목소리에 따르는 결단을 내리고 실천할 때 나사는 더이상 단순한 하나의 부품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속한 거대한 조직의 운명마저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 이처럼 보다 고귀한 윤리적 가치를 따르는 건 자신의 품격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회사의 평가는 최하였지만 유일하게 자신의 영혼을 팔지 않았던 잠귀신 핫카구가 그 누구보다 거대한 존재감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일곱개의 회의'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책임을 지는 행위가 어떻게 자신 또한 구원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제목처럼 회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나 자신과의 회의를. 영혼을 단단히 지킬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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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낸시 (스티커 포함)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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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그녀가  삶에 들어왔다누군가 키우는  더는 감당할  없었는지 상자에 넣어 두고  고양이들  하나였다그녀의 눈을 들여다  순간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서 고민 끝에 삶을 동행하게 되었다그렇게 6년이 지났다처음엔 꼭꼭 숨어서 하루에 얼굴   보기도 힘들었던 그녀였다그녀 덕분에 좁은  집에도 숨을 곳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다책장에 꽂힌  위에서  작은 몸을 어떻게든 끼워 잠든  발견했을 때는 처음엔 너무 귀여워서 기절하는  알았고 다음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서로의 거리가 줄어드는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그녀가 야속했다그러다 추운 겨울 문득 깨어났는데 그녀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자기 몸을 밀착시킨  곤히 잠든  보고 어마어마한 감동의 물결에 젖은 적도 있었다 그녀가  곁에서 집사들 사이에선 흔히 ‘골골송이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제목마냥 이렇게 가족이 되는구나 하고




 새삼스레 그녀와 동반한 삶을 반추하게    권의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한국인 작가 엘렌  고양이 낸시  소환자였다버려진 어린 고양이가  가족에게 거둬져 길러지게 된다는 독특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을 뼈대로 하고 있는  작품은 내가 그녀와 처음 만나 가족이 되는 과정과도 유사하여 더욱 깊이 빠져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와 그녀의 동거는 낸시와 더거씨 가족처럼 순탄하진 않았다앞서도 말했듯 그녀는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고 값비싼 이어폰 줄을  개나 잘라먹거나 아끼는 책마다 발톱으로 무자비하게 스크래치  놓는  이런저런 사고도 참 많이 쳤다이유없이 밤마다 현관 앞에서 심하게 울어서 근심과 짜증 속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잠을 설치게 만든 일 많았고 여행을  때면대신 돌봐  사람이 없을 경우  원하는만큼 있지 못하고 일정을 많이 앞당겨 돌아와야했다그녀와 같이 있어서 즐겁고 행복했던 것만큼이나 불편하고 피곤한 것도 많았다는 뜻이다내가 보기에 작품  고양이 낸시는 오빠가 엉터리로 매어  옷의 리본도 오빠의 정성을 생각해서 고쳐 매어주려는 아빠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매어  것이라 괜찮다고 대답하고 자신도 학교 연극에서 공주 역할을 하고 싶지만 우연히  친구 아가사가 공주가 되고 싶다고 그린 그림을 보고선 기꺼이  마음을 접고 다른 역할을 하겠다고 먼저 자원할 정도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참으로 커다란 착한 고양이다그러나 나의 그녀는 그렇지 않다 마디로 말해 정반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낸시 ‘이건 그냥 동화에 불과해!’라고 하면서 중도에 포기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얘기를 넘어서 고양이가 상징하는 ‘낯선 타자 공존하는 법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쥐에게 고양이가 그렇듯이자신과 완전히 다르고  다름으로 불안을 넘어 위협마저 느낄  있는 이들과의 공존은 현재 점점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이건  반대의 흐름이  세계적으로  거세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타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기반으로 탄생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의 아베 정권 또한  배척에 의존하여 자신의 가냘픈 명줄을 이어가는 형편이며 중국 또한 최근 홍콩 시위가  보여주듯자신의 뜻대로 따라와주지 않으면 같은 민족에게조차 서슴없이 강한 억압을 행사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영국의 브렉시트작금의 유럽 국가들에서 두드러지는 우경화 경향 역시 이와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대부분 거꾸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목소리였다많은 이들이 타자에게서 그런  경험한 탓에 자연스럽게 발생한 경향이 아니라 소수의 누군가가 타자의 다름과 그것이 주는 해악을 특별히 강조하고 그걸 지속적으로 전파해서 출현한 마디로 인위적인 형성이었다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해 적대와 혐오를 쏟아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이 욕하는 대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었다오직 누군가가 특정 의도에 따라 유포한 글과 말에 기반한 간접 경험밖에 없었다. 작품에서 가장 낸시를 힘들게 만들었던 헥터 삼촌이 책의 내용에 근거하여 낸시를 마을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행동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작품에서 책은 자주 등장한다

 더거씨가 낸시를 처음 받아들였을  무엇을 먹여야 할지 몰라 백과사전에 나오는 고양이 항목을 살펴보기도 하고 낸시가 다닌  마을 학교에서 친구들이 우연히 책에서 고양이에 대한 부분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헥터 또 낸시를 추방하기 위해 아버지를 설득할  고양이가 위험하다고 말한 책을  권이나 갖다 보인다 생각에 이건 단순한 연출 아니다. 이는 우리에게 낯선 타자를 헤아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을 보여주기 위해 삽입된 것 같다.  생쥐가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코끼리 권위자라고 소개한 사람이 지금 만지고 있는  엉덩이라고 말하자 무턱대고 '그래, 이건 엉덩이야!'하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를 제대로 접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오직 어디서 전해 들은 정보로만 가지고 쉽사리 그를 판단해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책은 내가 직접 살펴보지도 않고 누군가 보여주는 것만 보면서 그걸 전부로 여겨버리는, 우리도 일상 속에서 흔히 표출하는 습성의 상징인 것이다.


 이것이 왜 위험한가?

 그걸 작가는 고양이에 대한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 상반된 두 가지 태도를 재현함으로써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헥터로, 그는 상대를 오로지 책의 내용에 따라 판별한다. 반면 낸시를 보살피게 되는 더거씨나 그의 동료들, 낸시의 오빠 쥐 지미나 학교 친구 쥐들은 책에서 고양이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낸시를 직접 보고 경험한 바에 따라서만 판단한다. 이는 단순히 간접 경험과 직접 경험의 차이와 어느 것이 더 적절한가만 보여주는 게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왜 어떤 이들은 간접 경험한 것만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걸 충분하다고 여기는가에 대한 이유까지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헥터는 '고양이 낸시' 중에서 '낸시' 보다 '고양이'라는 사실을 더 중시했다. 그의 눈에 낸시라는 고유한 개체성을 사라지고 없었다. 존재하는 건 오직 고양이라는 일반적인 범주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달랐다. 더거씨와 지미, 그리고 학교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 눈에 낸시는 고양이가 아니라 그저 낸시였다. 자신과 일상을 함께 하는 가운데 직접 체험을 통해 인식한 개별적이며 고유한 존재로서의 낸시만 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헥터가 아무리 낸시가 위험하다고 하여도 설득되지 않았다. 헥터가 고양이라는 대답을 기대하며 낸시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내어놓는 대답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낸시라는, 독립적이며 고유한 개체성의 지표인 이름부터 말하며 나아가 우리는 다음 대사에서 낸시를 무엇보다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관계 속의 존재로만 인지하고 있다는 또한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오로지 낸시로만 보고 있었기에 고양이라는 일반적 범주가 지니고 있는 특성 같은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책이 고양이에 대해 써 놓은 것은, 그것이 아무리 자신에게 위험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오랜 시간에 걸쳐 친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체험 앞에서 아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는 위와 같은 장면에서 가장 극적으로 연출된다. 낸시의 오빠 지미가 고양이 낸시를 위해 아예 책에 있는 고양이 항목을 찢어 먹어버리는 것이다. 이만큼 간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것이 중요하다는 작가의 의도가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남이 규정한 말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느낀 끝에 도달한 마음의 소리를 따르는 것. 바로 이것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정말 필요하며 소중하다는 것을 '고양이 낸시'는 이렇게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헥터는 자신만이 낸시의 진실을 보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낸시를 직접 겪어보고는 깨닫게 된다. 낸시라는 타자의 진실을 가장 잘못 보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자신이란 걸.



 헥터의 자성을 통해 독자인 우리 역시 깨닫게 된다. 하나의 타자를 바라볼 때, 독립적이며 고유한 존재로써의 그를 보지 않고 흔히들 자주 넣곤 하는 인종이라든지, 성별이라든지, 계급이라든지, 국가라든지, 이념이라든지 하는 일반적인 범주에만 집어넣고 바라보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타자와 관련하여 갈등을 유발하고 차별과 배척을 가져오는 건 대부분 타자를 그 개인 자체로 보지 않고 일반적 범주에만 의거하여 보는 탓이다. 그러고 보니 아주 어릴 때 '톰과 제리'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던 게 기억난다. '톰과 제리' 역시 고양이와 쥐가 나오나 그 관계는 '고양이 낸시'와 정반대이다. 



  고양이 톰은 생쥐 제리를 못 잡아먹어서 늘 안달이고 제리는 그런 톰을 피해다니느라 바쁘다. 톰에게 제리는 그저 쥐라는 일반적 범주일 뿐이고 제리에게 톰 역시도 그저 고양이라는 일반적 범주일 뿐인 것이다. 그런 톰과 제리의 세계는 폭력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고양이 낸시'가 재현하는 세상과 얼마나 다른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타자에 대한 적대와 혐오가 표출되는 요즘은 그야말로 '톰과 제리'의 세상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세상 속에서 오늘 차별과 적대를 당하고 있는 이가 결코 자신에게 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듯, 우리 역시 언제든 어느 누군가에 의해 멋대로 규정 당하여 차별과 배척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위험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코로나 사태 때문에 오직 중국과 가까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호주의 기숙사에서 쫓겨난 이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한 사람을 그가 속한 조건이 아니라 직접 부대끼며 그 자체로 보고 헤아릴 것을 강조하는  '고양이 낸시'는 그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소중한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직접 체험과 그 독립적이며 고유한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헥터의 이야기를 작품의 후반부라 할 수 있는 3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시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고양이를 쥐의 가족이나 친구로 설정하는 건 모험이다. 현실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양이와 쥐가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독자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느냐가 이 작품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것에 크게 성공하고 있는데, 그건 1부와 2부 내내 낸시와 쥐 마을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를 얼마나 잘 만들어나가는지 충실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언제나 타자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그들의 모습을 본다. 그 관계에서 깊이 느껴지는 따스함 속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범주의 고양이와 쥐가 형성하는 현실 속 관계는 어느새 잊어버리고 쥐 마을 사람들이 낸시를 고양이가 아니라 나의 가족이자 이웃이며 친구인 낸시로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히 그럴만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정은 단지 몇 장면의 나열만 가지곤 절대 일궈낼 수 없다. 그렇기에 작가는 작품의 절반이나 할애하면서 그들의 관계를 재현한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지미가 헥터에게 했던 아래의 말에서 감정의 울림을 느끼고 헥터의 눈에 왜 눈물이 어리며 자신이 낸시를 완전히 잘못 보고 있었다는 고백을 하는 것까지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된다.



 변화는 헥터에게만 찾아오는 게 아니라 독자인 우리에게도 다가온다. 우리 역시 일반적 범주에 따른 고정된 정체성으로만 바라보았던 고양이와 쥐에 대한 눈이 어느덧 달라졌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작품을 통해 직접 체험했듯이, 타자를 직접 경험하며 온전히 그것만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관계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절감한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며 시간을 들여 그를 직접 경험하려는 의지를 가지기 보다는 미리 주입된 편견에 따라 먼저 거부부터 하도록 이끄는 마음을 경계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내가 '고양이 낸시'를 읽으면서 그녀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린 것은 당연했던 것 같다. 그녀와 겪었던 그 모든 시간의 과정이 이 작품에서 강조하는 직접 경험하며 알아가는 여정 자체였으니까 말이다. 늘 그녀가 뭔가를 요구할 때마다 싫다,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나 조금이라도 침울하게 있는 걸 보면 혹시 아파서 그런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드는 것도 다 그런 시간이 영글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의 그녀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일반적 범주의 고양이가 아니라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그녀가 되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 그의 입장에서 헤아리는 것도, 배려하는 것도 그렇게 커다란 의지를 들여야 하는 일이 아니다. 고양이 낸시에서 고양이를 뚝 떼어내고 '낸시'로만 바라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다시 한 번 몸소 부대끼며 함께 축적한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오로지 그 시간의 척도로 타인을 바라보는 것만이 그를 가늠하는 진실한 잣대인 것도 체득한다. 이는 앞서 누누이 말했던 대로 '고양이 낸시'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목소리이기도 하다. 불행한 내 삶에 원망할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사랑하고 책임지는 것보다 무시하고 싫어하며 증오하는 게 쉽고 편하다는 이유로, 아니면 그저 내게 유익이 된다는 이유로 불화와 혐오 그리고 적대에 쉽게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처럼 톰과 제리의 세상이 가속화 되는 상황 속에서 '고양이 낸시'는 더욱 더 널리 울려야 할 목소리라고 생각된다. 부디 많은 이들이 귀 기울여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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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의 문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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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흑인 여성 작가 N.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3부작은 SF 소설계의 전설이다. 하나도 따기 힘든 SF 소설 최고 권위의 상을 3부작 모두가 해마다 나란히 수상했기 때문이다. 휴고상 역사상 최초다. 201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작년 초에 우리나라에도 발간되면서 비교적 빨리 우리에게 소개된 편이다.

 그리고 작년 12월.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오벨리스크의 문'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부서진 대지'는 꼭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벨리스크의 문'에 관심이 생겼다면 무엇보다 첫째 권인 '다섯 번째 계절'부터 읽으실 것을 당부드린다.





 배경은 지구. 하지만 아주 먼 미래다. 

 거기는 지금 다섯 번째 계절이다. 변화무상한 사계절은 이제 없다. 있는 것은 다만 황폐와 삭막의 계절 뿐이다. 그것도 영원히. 지구는 모종의 이유로 망해버렸다. 생존한 인류는 현재 세 부류로 구성되어 있다. 망하기 전 인류는 대지 보다 하늘을 더 숭배했으나, 이젠 아니다. 이 세계는 철저하게 대지 중심이다. 땅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 자연히 땅의 움직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땅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것의 에너지로 땅의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오로진'이라 부른다. 아무나 오로진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타고나야 한다. 그러나 오로진의 통제되지 않는 능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오로진을 괴물 취급 한다. 작품의 주인공인 에쑨의 남편이 그랬다. 그는 아들이 오로진인 걸 알자 딸이 보는 앞에서 무참히 죽여버린다. 남편 지자는 딸 나쑨 역시 오로진인 걸 알고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나쑨을 데리고 마을을 떠난다. 삽시간에 소중한 아들을 잃고 딸까지 빼앗긴 에쑨 또한 딸을 찾아 마을을 떠나게 된다. '부서진 대지'의 대장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번 '오벨리스크의 문'은 지자가 나쑨을 데리고 떠난 장면에서 시작한다. 나쑨이 에쑨과 함께 이번 소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소설은 에쑨과 나쑨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에쑨은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한 번 지구에 '다섯 번째 계절'을 일으켰으며 과거 스승이자 연인인 알라배스터와 함께 있다. 그녀는 알라배스터에게서 지구를 예전처럼 되돌리려면 자신의 능력으로 오벨리스크들을 조종하여 지구에서 벗어나버린 '달'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한다.('다섯 번째 계절'의 마지막에 달이 왜 나왔는지 여기서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달이 사라져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달을 전설의 존재 쯤으로 여기고 있다.) 그와 함께 알라배스터는 지구가 어쩌다 이런 상황에 빠졌는지, 그가 왜 다시 한 번 '다섯 번째 계절'을 일으켰으며 에쑨이 하루빨리 오벨리스크 통제 능력을 가져야 하는지 또한 말해준다. 그건 바로 '스톤 이터'들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돌로 되어버린 육체 때문에 죽지 않고 있어서 감정을 가지지 않게 된 그들의 일부가 지구에 자신과 다른 종족이 존재하는 것을 더이상 용납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편, 나쑨은 여행 도중 우연히 늘 괴물로만 취급되던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그걸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쳐주는 이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전작에서 오로진들을 찾아 수도로 데려가던 샤파다. 아주 모처럼 괴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 나쑨은 샤파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가까이에 있는 오벨리스크에서 힘을 끌어내 그걸 증폭시켜 사용하는 걸 열심히 수행한다. 그러다 그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를 돌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걸 시작으로 나쑨에게도 점점 더 큰 비극이 닥쳐온다. 아버지 지자가 조산술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자 나쑨을 그녀의 오빠처럼 죽이려 했던 것이다. 나쑨은 공동체에 하나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편입하기 위해 능력을 연마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거기서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한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다섯 번째 계절'에서 선명하게 드러내었던 공존과 차별의 주제를 다시 한 번 부각하면서 규모를 더 확장시켰다. 달의 부재는 현재의 지구가 하나만 존재하는 독재의 공간임을 의미한다. 자신과 비슷한 부류만 존재할 것을 허락하는 스톤 이터들은 그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라 할 것이다. 알라배스터가 달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구를 다시금 공존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고 그 차이를 존중하며 배려할 수 있는 세상. 오크림이 자신의 능력 때문에 괴물이 아니라 그저 다른 이웃 중 하나로 여겨지는 세상. 오로진으로 차별을 많이 받은 알라배스터였기에 그런 꿈을 꾸었을 것이다. 에쑨도 다르지 않다. 그가 싫어하는 알라배스커의 말을 결국 따르게 되는 건 전작에서 우연히 만나 이제는 소중한 동료가 된 스톤 이터 호야의 존재 때문이다. 자신이 스톤 이터이면서도 자신과 전혀 다른 오로진 에쓘을 도와주려 애쓰는 호야를 보면서 그녀는 왜 같은 것 하나가 아니라 저마다 다른 이들 모두가 공존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알라배스터는 그렇게 달을 데려오는 힘을 '마법'이라 말한다. 마법 역시 과학에 밀려 사라진 힘. 그런 의미에서 마법은 달과 유사한 상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주류에 가리거나 억압되어 이면에 머물게 된 것들을 에쑨은 다시 불러오려 한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바로 그런 이면을 여는 문이다. 영원히.


 '오벨리스크의 문'은 공존과 조화라는 사회적 메세지로 충만하다. 최근 미국과 이란 사태에서 보듯,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차별과 적대가 횡행하는 요즘엔 정말 필요한 메세지가 아닐 수 없다. 인종과 성별 그리고 계급에 따른 차별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 이해하려는 몸짓보다 경멸과 거부의 몸짓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움직임 끝에 뭐가 있는지는 바로 어제 일어난 비극이 잘 보여주었다. 이란이 자신의 영공 가까이 날아온 민간 여객기를 미군의 보복 공격인 줄 알고 격추시켜 버리지 않았던가?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 먼저였다면 희생되지 않았을 목숨들이었다. 차별과 배척 또한 얼마나 많은, 있을 필요가 없었던 아픔들을 많이 만들어내었던가? 그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해주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오벨리스크의 문'은 에쑨과 나쑨의 여정을 통해 그걸 섬세하게 세공하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이 더 많아지는 SF, '오벨리스크의 문'. 작품의 가치도 가치이지만, 오늘날 같은 상황에서 더욱 읽어야 할 작품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3부작의 마지막 작품도 얼른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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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1-1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부작으로 썼는데 그게 다 상을 받았군요 이어졌다 해도 어떤 건 따로 봐도 괜찮지만, 이건 첫번째부터 차례대로 봐야겠습니다 앞에 이야기를 모르고 이걸 보면 뭐지, 하겠군요 아들과 딸이 오로진이라면 두 사람에서 한사람이 오로진이라는 건데... 에쑨이 그런 듯하네요 자기 자식까지 죽이다니...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을 보는 거 처음이 아니기는 하네요 자기 자식한테 다른 힘이 있으면 두려워하는 부모 다른 데서 보기도 했군요

다르다고 무서워하기보다 함께 살 방법을 찾는 게 더 좋을 듯합니다 지금은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차별뿐 아니라 동, 식물을 생각하지 않는 일도 일어나죠 이제는 한 지역 한 나라가 아닌 지구를 다 생각해야겠습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