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죽이다 데이브 거니 시리즈 3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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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거니는 세상에서 딱 두 사람 밖에 없다. 공교롭게도 하나는 정말 싫어하고 다른 하나는 정말 좋아한다.

 전자의 거니는 현재 생사를 확실히 모른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그의 모습을 본 것은 그가 성매매 한 것을 몰래 촬영한 동영상이었다. 진짜 끝까지 더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는 작자였다. 후자의 거니는 전자의 거니가 준 상처를 치유해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지리산 공기도 포장하여 만 8천원에 판다고 하던데, 그처럼 현실의 갑갑함을 덜어주는 숨통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는 현실의 존재가 아니다. 픽션의 존재다. 풀 네임은 데이브 거니. 뉴욕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형사였다. 많은 이들이 살아있는 전설로 여기는 존재. 그러나 지금은 40대에 돌연 일선에서 물러난 뒤 초야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미국의 스릴러 작가, 존 버든 유일하게 쓰고 있는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그의 나이가 그렇기도 하지만 확실히 데이브 거니는 중년의 남자에게 특별히 더 살갑게 다가올 캐릭터다. 그가 중년의 위기와 거기서 비롯된 우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남들에게 잘 보여주지는 않으나 그는 눈물이 참 많은 남자다. 가족들이 자기도 잊어버린 생일을 챙겨줄 때, 어느새 장성해 버린 아들의 모습에서 그가 어렸을 때 자신이 해준 게 거의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을 때, 나날이 커져가는 자신의 무력감을 느낄 때,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자신의 자존심이 어느 순간 한없이 처량하게 생각될 때, 그는 눈물을 쏟는다. 그는 결코 통과하기 쉽지 않은 구부러진 길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누구에게나 그 나이라면 한 번은 찾아오는 그런 길을. 2012년에 나온 데이브 거니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기꺼이 죽이다'는 바로 그런 시간을 통과한다. 그에게 '착한 양치기 사건'을 의뢰한 킴의 말마따나 '사랑, 상실 고통'의 시간을...



 거니는 2주 전 세 개의 총탄이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일을 당했다. '악녀를 위한 밤'에서의 일이다. 첫 번째 총알이 손목을 관통했다. 그 후, 그는 내내 이명을 듣는다. 그것은 신호였다. 자신이 더이상 사람들의 경탄과 찬사를 받는 '슈퍼캅'이 아니며 그렇게 능력있기는 커녕 자신의 삶을 제대로 꾸려가지도 못한다는 신호. 이명은 이야기 속 네델란드 소년이 들었던 것처럼, 자신의 삶이라는 둑에서 줄줄 새어 나오고 있는 물소리였다. 곧 둑이 무너지고 삶은 파국이 되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조짐. 그것은 귀만이 아니라 손의 통증으로도 나타난다. 마치 '너는 예전의 너가 아니야. 넌 이미 내리막 길에 올라탔어.'라고 줄기차게 속삭이는 것처럼.


 중년의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아침에 마주하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에게서 듣는 그 말을. 처음엔 어깨를 으쓱하며 '뭐, 어쩌겠어' 하는 정도로 떨칠 수 있지만 시간이 흘러도 계속 반복되면 쉽사리 떼어낼 수 없는 점성과 무게를 갖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견디기 어려운 시점이 닥쳐오고 억울한 마음이 북받쳐서 차라리 모든 걸 끝장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악마를 깨우고픈 유혹을 받는다. 얼마 전 작고한 죠엘 슈마허 감독의 이름을 널리 알린 영화 '폴링 다운'의 마이클 더글라스가 분한 백인 중년이 잘 보여주듯이.


 

 이 영화에 비추어 보자면 중년의 위기를 잘 극복하는 것은 언제 뛰쳐나올지 모를 내면의 악마를 잘 재우는 일이기도 하다.  존 버든도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공교롭게도 '기꺼이 죽이다'의 원래 제목은 'LET THE DEVIL SLEEP'이다. '악마를 재워라'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말은 거니가 킴의 집 지하실에서 범인에게 듣게 되는 말이지만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소설에 이 악마와 마주하는 이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도 세 명이나! 


 물론 하나는 앞서도 말했듯 데이브 거니다. 다른 하나는 '착한 양치기'를 추적하다 인생을 통째로 말아먹고 거니처럼 은둔해 살고 있는 전직 형사 맥스. 마지막으로 범인이다. 거니의 악마는 먹이를 노리는 악어처럼 눈만 수면 위로 떠오른 상태지만, 맥스의 악마는 이미 한 번 부상해 그것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범인은 벌써 악마에게 먹혀버렸다. 이런 식으로 놓고 보면 거니를 중심으로 맥스와 범인이 하나의 일련된 흐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어쩌면 작가는 독자에게 맥스와 범인을 거니에 대한 하나의 가설적 인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만일 그것이 옳다면 그것은 어떤 가설인가? 그것은 거니에게 만일 아내 매들린이 없었다면, 혹은 아들 카일이 없었다면, 그리고 친구 잭 하드니가 없었다면 거니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설이다. 맥스와 범인은 거니만큼 똑똑하고 냉철한 존재였다. 한 가지만 떼어 놓고 보면 거니와 맥스 그리고 범인은 그리 다를 게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거니는 얼마든지 맥스 혹은 더 나쁘게는 범인의 자리에 거할 수 있었다. 딱 하나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가족과 친구다. 자신의 불안과 상처를 쉽게 드러낼 수 있고 그 번민과 고통을 자신보다 더 잘 헤아려서 보듬어주는 존재들. 그것이 있었기에 거니는 비틀거리면서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굳센 의지로 악마를 다스리고 인간의 삶을 지켜갈 수 있었다. '기꺼이 죽이다'는 바로 그런 것을 알려 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에게 무엇이 더 크게 소중해지는 것인가에 대해. 하여 갈수록 노쇠에 대한 우울과 자존감 결여로 쉽게 뛰쳐나오는 악마를 단단히 결박할 수 있도록. 적어도 돈 몇 푼에 적폐세력에 영혼을 팔고 태극기를 흔들며 '공주님' 운운하는 노인이 되지 않는 길을.


 바로 그런 여정을 '기꺼이 죽이다'는 공들여 세공하고 있다. 544페이지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으로. 이야기는 모두 세 파트로 나뉘어져, 첫 부분은 거니가 예전에 알았던 기자의 딸이 진행 중인, '착한 양치기 무작위 연쇄 살인 사건'의 희생자 유가족을 다루는 '살인의 고아들'에 참여하여 과거의 그 사건을 알아간다는 이야기고, 두 번째 부분은 미제로 끝난 그 사건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미심쩍은 부분을 거니가 발견하고 그로인해 범인에게 위협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며, 마지막 부분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는 거니의 추적으로 위기를 느낀 범인이 유가족을 거듭 살해하는 범죄를 다시 저지르고 그것을 막기 위해 범인을 잡을 함정을 판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엔 약점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사건과 관계된 미스터리다. 여기의 진실은 식상함을 줄 수 있다. 이미 애거서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과 브라운 신부의 '이상한 발걸음 소리'를 비롯하여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오리지널은 아니다. 그런 트릭은 이미 구약 때 다윗이 우리야 장군에게 썼던 것이니까.(스포일러가 되기에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른 약점은 풀어나가고 있는 미스터리에 비해 이야기의 분량이 다소 많다는 것이다. 그 여정이 너무 세밀하게 나와있어 어쩌면 군더더기가 많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약점들을 존 버든이 몰랐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전작들에서 그가 얼마나 이야기를 치밀하게 구성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 와서 다소 식상한 미스터리에다 구성이 느슨해 진 것엔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거니가 현재형으로 보여주는 중년의 우울과 도사린 악마를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란 주제와 관련해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그건 어쩌면 독자들에게 거기나 쫓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거니를 더 주목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겠느냐고 대답하고 싶다. 다시 말해 군더더기로 느껴질 만큼 촘촘히 새겨나간 거니의 심리가 이 소설이 진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며 '착한 양치기'는 그저 '슬램 덩크'의 유명한 대사처럼 거드는 왼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실 이 소설에 와서야 거니는 비로소 슈퍼캅의 잔영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간이 된 것 같다. 그만큼 그 영혼 안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더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점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캐릭터를 베개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전까진 베갯잇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제서야 인간다운 면모를 지닌 솜털이 꽉 채워져선 비로소 누워볼만한 베개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치밀한 관찰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추리에 이제 인간미까지 지니게 된 이 캐릭터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된다. 2012년 작품이 이제 나왔으니 다소 늦은 셈인데, 2014년에 나온 '피터팬은 죽어야 한다'는 부디 빨리 나오길 바란다. 제목에서 이미 또 다른 중년의 고민이 펼쳐질 것이 엿보이는 지라('피터팬 증후군'은 중년에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이 아니었던가? 프로이트 말에 따르면 유아로의 퇴행은 삶이 힘겹고 자신에 대한 신뢰가 낮아질수록 늘어난다고 한다.)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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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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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장판사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소설집 '악마의 증명'이 출간되었다.

 악마의 증명. 그것은 원래 중세에서 토지 소유권 입증과 관련하여 사용되던 일종의 법률 용어로, 악마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쉬우나(존재하는 것을 데려오기만 하면 되니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려우므로(모든 경우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증명해야 하므로) 이처럼 부재보다 존재를 증명하는 자가 입증의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장편은 아니고 단편집으로 표제작 '악마의 증명'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가장 처음에 나온 '악마의 증명'은 원래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 미스터리 단편선'의 게재 되었던 것으로 당시 여자 국선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의 한 에피소드가 먼저 출간된 이 단편의 설정과 유사하여 표절 논란이 일어나 본의 아니게 유명세를 탔다. 사실 표절 욕구를 일으킬만큼 아이디어가 꽤 좋은 단편인데, 외모로는 얼른 구분되지 않는 일란성 쌍둥이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문제는 범죄를 저지른 쌍둥이 하나가 자신이 일란성 쌍둥이인 것을 이용해 한 번 판결이 내려진 사건에 대해선 두 번 재판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으로 완전범죄를 꾀한다는 것인데 이 같은 범인의 전략을 검사가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것을 볼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법정물이다. 검사가 이미 무죄 판결을 받은 범인을 다시 법정에 세워 유죄를 받도록 입증해야 하므로 그런 검사의 입장에서 '악마의 증명'이란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역시 부장 판사 출신 작가답게 재판 과정의 묘사가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래서 얻게 되는 덤도 있다. 바로 최근 박근혜 뇌물 수수 재판에서 일어난, 증인으로 불려 나온 삼성 임원진들이 법정에서의 증언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 일 말이다. 많은 이들이 왜 그러는지 궁금 할텐데 바로 그 이유를 이 단편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주인공 격인 검사가 재판을 거듭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검찰 조서가 아니라 법정에서의 진술이 재판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것. 그래서 증언을 거부해 버리면 검찰 조서가 무용지물이 되어 아예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 증인으로 나온 삼성 임원진도 이와 똑같은 이유로 함구하는 것이다. 이재용을 위해서. 이것을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 그것이 검찰의 과제가 될 것인데 부디 단편 속 호연정 검사처럼 이재용 변호인단을 제대로 물먹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단편집 '악마의 증명'은 미스터리만 있지 않고 판타지와 미스터리가 섞여 있는데(문장의 경제를 위해 판타지라고 했지만 단순한 판타지는 아니고 타임 루프나 공포 같은 것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이성에 호소하는 미스터리와 달리 감성에 호소하는 환상성이 가미된 단편들이기에 편의상 판타지라 명명했다.) 판타지 하나가 나오면 미스터리 하나가 나오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글의 꿈', '외딴집에서', '시간의 뫼비우스' 그리고 '죽음이 갈라 놓을 때'는 판타지고 '악마의 증명', '선택', '구석의 노인' 그리고 '킬러퀸의 킬러'는 미스터리다. 또 하나의 특징이 더 있다면 여기엔 도진기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진구'와 '고진'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스탠드 얼론'만 있다는 것이다.


 그간 작가의 많은 작품을 읽어왔지만 미스터리 쪽만 접했었기에 그가 다른 장르의 작품들을 썼는 줄은 몰랐는데 이번 단편집으로 만나게 되어 그의 작품 세계를 더욱 폭넓게 접해볼 수 있었다. 단편집 마지막엔 작가의 말이 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미스터리 쪽은 작가의 프로페셔널한 면이, 판타지 쪽은 프로페셔널한 면에 가려져 있었던 개인의 취향이 발현된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이 단편집을 통해 작가 도진기가 아닌 개인 도진기도 만나볼 수 있다고나 할까? 특히 '시간의 뫼비우스'는 자전적인 게 한껏 깃들어 있어 더욱 개인으로서의 그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쯤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가 하고 묻는다면, 역시 미스터리 한 쪽이 다른 쪽 보다 낫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선택'이다. '악마의 증명'에서 활약했던 호연정 검사가 다시 활약하는데, 인간미 넘치는 주인공이 현재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대표 적폐 세력인 검사로 계속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랬다고 나는 믿고 싶은데 아무튼 이번에는 변호사가 되어서 경찰이 이미 자살로 종결한 빗길 교통 사고를 죽은 피해자 어머니의 의뢰로 재수사 한다. 읽다보면 문득 기시 유스케의 '유리망치'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설정 같은 것을 따왔다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한 가지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 들고 계속 나타나는 반대 증거 앞에서 이전의 전제를 번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지라 그렇다. 경찰의 판단이 무리가 없을 만큼 자살이 확실한 정황 속에서 주인공이 찾아내는 반대의 진실이 꽤나 인상적이다. 그건 경찰이 결코 보지 못했고 또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곳을 호연정 변호사가 시선을 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인데, 이 단편과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빌려 온 할머니 탐정이 나오는 '구석의 노인(에마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에 대한 오마쥬로 보인다.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은 흥미를 끄는 사건의 재판이 벌어지는 법정에 나가 재판을 구경하는 게 취미인데, 이 소설의 할머니도 그렇기 때문이다.)'과 연결하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자의 시선을 어디로 이끄는지 드러난다. 바로 '사람'이란 것 말이다. 물리적 단서만 놓고보면 여지 없이 혼란스럽고 그릇된 결론이 도출되지만, 그 중심에 사람을 놓아두고 보면 모든 게 다 매끄럽게 정리되는 것이다. 호연정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정의를 가져오려는 법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분명하게 나타낸다.


 감정 없는 사실만을 불쑥 쌓듯 쌓아올린 거죠. 가드레일을 부수고 달려나간 자동차, 창밖으로 나와 동맥이 잘린 운전자의 왼손, 추락의 흔적, 메스와 지문, 이런 것들이 의미 없이 요철만 맞게 조합한, '사람'이 빠진 결론이에요'(p. 118)


 그리고 '구석의 노인'에 나오는 김옥선 할머니는 잘못된 판결이 나자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찬다.


 '사람'을 모르니 저런 판결이 나지...(p. 175)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바로 법인데, 정작 법에서 사람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이제 우리나라 사법 현실의 적나라한 진실을 정의하는 말이 되었다. 그 말이 처음 나왔던 때는 무려 1988년이었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우리나라 한 켠엔 그 올림픽을 결코 웃으며 바라볼 수 없었던 많은 이들이 존재했다. 외국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계동을 비롯한 서울 각지에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거처를 철거 당해야 했던 가난한 이들이. 쇠파이프와 불도저에 속절없이 밀려나가야 했던 그들의 눈물과 피를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았다. 법도 팔짱을 낀채 모른 척 했다. 이후 내내 그런 모습이다. 봐야 할 사람은 보지 않고 안 봐도 좋을 사람은 당사자가 바라는 것보다 더 깊이 본다.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에 따라 그 헤아림의 깊이가 결정되기에 그렇다. 정유라가 두 번이나 영장 기각을 받은 것처럼. 이 소설집에 담긴 호소, 법이 정말 보호해야 할 사람을 보라는 것, 그것은 원래 법이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아마 제목도 바로 그런 뜻에서 붙인 것은 아니었을까?

 '악마의 증명'으로 입증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것,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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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도시 Z
데이비드 그랜 지음, 박지영 옮김 / 홍익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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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존. 과학 기술이 이처럼 발달한 오늘날에도 그 곳이 여전히 미지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인류가 그렇게 내버려둔 건 아니다. 오랫동안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학자들이 아마존을 완전히 파악하려 노력했지만 인간의 탐구심은 아마존을 겹겹이 싸고 있는 무성한 밀림을 뚫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토록 인간에게 적대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는 아마존에 과연 문명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토양은 곡물이 자랄 수 없을 만큼 척박하고 치명적인 질병을 불러오는 각종 동식물이 지천에 있으며 인간의 생명을 가차없이 위협하는 육식동물마저 즐비한 아마존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문명을 이룩할 정도로 정착할 수 있었겠느냐는 얘기다. '리바이어던'으로 유명한 토머스 홉스는 아마존에 대해 아예 이렇게 단정해버리기도 했다.


 그곳엔 예술도, 학문도,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최악은 끝없는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다.


 당시만 해도 문명의 성립 여부에 대해서는 환경 결정론이 우세했다. 어떤 문명이 태어나고 번성하려면 환경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금지된 것에 매혹되기 마련이고 주류 입장에 반기를 들고 싶은 충동 역시 생기기 마련이다. 환경 결정론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자신의 꿈과 명성을 위해 문명 불가의 대지로 낙인 찍힌 아마존으로 기꺼이 뛰어들었다. 정말로 많은 이들이 영국이 제국이었던 시절부터 아마존을 탐험하러 떠났다. 거기에 있다는, 아마존에도 문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증거가 될 전설의 '잃어버린 도시 Z'를 찾아서 말이다. 그러나 도시는 발견되지 않았다. 탐험에 성공한 이들보다 실패한 이들이 훨씬 많았고 끝내 아마존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19세기 가장 유명한 탐험가 '퍼시 H 포셋'도 그 중 하나였다. 아니, 그는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자였다. 솔직히 그는 가장 성공이 점쳐지던 탐험가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사건이기도 하다.



  때는 1864년. 당시 라틴 아메리카가 잦은 국경 분쟁을 겪고 있었다.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등 국경을 맞대고 있던 국가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검은 금'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은 자원인 '고무' 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아마존은 고무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었고 많은 나라들은 아마존 주변으로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검은 금의 유전과도 같은 아마존을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게 위해 싸우고 있던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수요가 많은 자원이라면 무조건 제 주머니 안에 넣어야 하는 영국이 이것을 가만 내버려 둘 리 없다. 영국은 얼른 분쟁의 원인이 되는 국경을 명확히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아마존에 대한 정보를 상세하게 파악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면 발로 답사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 떠올랐던 사람이 모로코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단신으로 놀라운 활약을 보여준 자신의 정부 스파이이기도 한 유명 탐험가 '퍼시 H 포셋'이었다. 영국 정부는 그를 당장 아마존으로 보냈고, 그는 영국이 부여한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했다. 그렇게 한 번 아마존을 무사히 관통한 그였기에 '잃어버린 도시 Z'를 찾아가는 이번의 탐험 역시 성공할 것이라 내다보는 것은 당연하달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명성이 워낙에 높았기에 아마존에서의 그의 실종은 탐험 역사에서 전설로 남았다. 많은 사람들이 포셋의 생사 여부를 알기 위해 아마존을 찾아 떠났고 원주민에게 죽었다거나 거기에 정착하여 아들을 낳았다거나 하는 온갖 풍문들이 나돌았다. 물론 여전히 그의 최후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전혀 없다.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 관심이 많고 주로 그런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미국 여러 유명 잡지에 전문적으로 기고하고 있는 데이비드 그랜은 2004년, 역사적으로 미스터리한 죽음들을 추적하다 '잃어버린 도시 Z'를 찾아 떠났다가 실종되어 버린 퍼시 해리슨 포셋에 대한 글을 만나게 되었다. 그 글에 매혹된 그는 포셋처럼 정말 아마존에 고대 문명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자기가 직접 포셋의 발자취를 따라 아마존을 탐험할 생각을 한다. 그는 결코 탐험가도 아니고 탐험은 커녕 사냥이나 등산조차 좋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잃어버린 도시 Z'는 바로 그렇게 하여 탄생된 책이다. 이 책에는 그가 어떻게 포셋의 발자국을 따라 나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와 아마존과 포셋의 여정 그리고 실종 후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까지 충실히 담겨져 있다.



 소년 시절, 잡지에 간간히 소개되던 탐험 이야기에 매료 당한 바 있거나 아직도 그 때의 로망을 잊지 못하여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나 로버트 E 하워드의 '솔로몬 케인' 혹은 헨리 라이더 해거드의 '솔로몬 왕의 광산'을 뒤적이는 사람들과 아마존 그리고 포셋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이들에겐 아주 즐겁고 흥미로운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아마존에 대한 자세한 정보나 당시 많은 이들이 공포를 느꼈던 아마존 정글 속 식인종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정말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거기서 아마존에도 문명이 있었다는 게 밝혀지는 것이다. 더 놀라웠던 것은 그 문명의 흔적이 사람의 발길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그런 곳에 있었던 곳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분명 '잃어버린 도시 Z'를 찾아 떠났던 많은 이들이 수없이 거쳐갔을 거기, 그런데도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이 문명의 흔적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건 바로 굳어진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는 서양의 문명 관습에 너무나 길들어져 있어서 그것과 전혀 다른 자연 환경의 아마존이 서양 문명과 완전히 다른 형태로 문명을 만들었을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그저 서양 문명과 닮은 꼴의 건조물을 찾으려 했기에 늘 다니던 길목에 버젓이 있었던 흔적조차 쉬이 놓쳐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유럽인과 아마존 사람들의 태생적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유럽은 비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살기 때문에 건축물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수직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마존을 비롯한 남미 대륙은 땅이 넓기 때문에 건축물을 굳이 높이 쌓을 필요가 없습니다. 중국의 고대 건축물이 하나같이 수평적 형태인 이유도 남미의 그것과 동일합니다.(p. 313)


 두말 할 것도 없이 적폐의 생각이 만들어낸 사각이었다. 비단 아마존이나 문명만이 아니라 이런 일이 바로 우리 삶에도 비일비재할 것이라 본다. 무조건 옛 것에 집착하고 나만이 옳다는 생각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정작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 조차 어이없이 놓쳐버리는 일이.


 

  이번에 나온 '잃어버린 도시 Z'는 사실 두 번째의 발간이다. 이렇게 책이 다시 나온 것은 이 책을 원작으로 하여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만든 영화가 곧 개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리틀 오뎃사'로 데뷔했는데 그 때부터 내내 한 개인이 낯선 공동체에 적응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2013년에 나온 전작 '이민자'가 대표적이다. '잃어버린 도시 Z' 또한 서양 문명에 깊숙이 침윤된 자가 그의 눈에 한없이 낯선 아마존에 섞여드는 과정이니 그레이가 늘 해왔던 것의 연장선 상에 있는 셈이다. 4년 동안 자신의 작업에 대한 그의 생각이 또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영화가 기대된다. 찰리 허냄이 맡아 연기한 포셋은 원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닥터 스트레인지'를 찍느라 하차하는 바람에 찰리 허냄에게 돌아갔다. 포셋과의 싱크로율은 컴버배치가 높기 때문에 그가 주연을 하지 못한 건 좀 아쉽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그렇게 좋은 영화도 아니었기에 더 커지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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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의 사람들
발레리아 루이셀리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무릇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무게를 지닌다. 무게는 중력의 반향이다. 존재는 중력의 자장 안에서 실존을 이룬다. 유령은 둥둥 떠다닌다. 그들에겐 무게가 없다. 중력의 자장을 벗어나 있다. 유령은 무중력의 존재다. 실수가 아닌 허수의 존재다. 실용주의에 물든 우리들은 실존이 아닌 이런 존재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유령은 그저 우리에게 불안과 공포만 가져다 줄 뿐, 실제 사는 데는 아무 도움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죽음을 인식시키고 영원히 살 것만 같은 우리들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으며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엄연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때문이다. 근대의 역사란 죽음을 생활에서 몰아내는 역사였다. 중세엔 묘지들이 마을의 중심인 교회 옆에 있었지만, 근대가 되면서 죽음을 연상시키는 묘지들은 쉽게 찾아갈 수 없는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공동묘지가 그렇듯이. 중세는 '메멘토 모리'가 유행어였고 삶은 죽음을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었지만, 근대 이후 죽음은 오로지 피해야만 할 것이 되었고 느닷없는 종결로 황망한 아픔만 가져다 줄 뿐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의 잔영인 유령도 그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햄릿의 유령과 7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괴담인 아미타빌의 유령은 얼마나 다른가? 아미타빌 유령은 오직 선별과 배쳑을 통해 형성된 근대 생활 방식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햄릿의 유령은 체제가 은폐한 진실을 알려주는 진실의 목소리였으나 아미타빌의 유령은 그저 충격과 공포만 있는 괴물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다시금 햄릿의 유령으로 돌아가려는 작품이 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독창적이고 지적이며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평가받는 멕시코 여성 작가 발레리아 루이셀리가 처음으로 쓴 장편, '무중력의 사람들'이다. 마치 작가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여성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편집자다. 그녀가 다니는 출판사는 아주 영세한 규모로 잘 알려지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를 발굴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한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매일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케케묵은 먼지 가득한 장서들을 뒤진다. 망각이라는 지층 저 아래 묻혀버린 작가라는 존재들 사이를 떠돌아다닌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도서관이란 묘지나 다름없다. 그는 늘 덧없이 사라져간 삶들과 가까이 있고 때문에 유령은 친숙한 존재다. 아니, 그녀 스스로 죽음을 바라고 있다. 아무런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없는 그녀에게 자신의 실존이란 그저 뜻없이 배회하고 있는 유령인 것만 같아서 차라리 이럴거면 완전한 종지부를 찍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멕시코 태생의 무명 시인 오웬이 살았다는 건물 옥상에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죽은 나무'에 마음이 꽂혀서는 몰래 집으로 가져오기까지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그녀의 염원을 나타낸다.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의 상사 화이트에게서 시인 에즈라 파운드 일화를 듣는다. 지하철에서 얼마 전 죽은 친구의 유령을 우연히 보게 된 그는 별안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삶의 절대적인 허무를 절감하는데, 그렇게 자기 발 밑으로 벌어진 공허의 싱크홀 위에서 그는 거기로 빠지지 않기 위해 시를 쓰는 것으로 버틴다. 바로 그것이 그녀에게 영감을 주어, 썰물의 해변에 서 있는 것과도 같이 발 아래로 쓸려가는 모래처럼 차츰 붕괴되어가는 자신의 삶을 글쓰기로 지탱할 생각을 한다. 그녀는 오웬이란 유령에 대해 쓰고 그것이 자기 삶에 남긴 여파를 기록한다. 그 과정의 채록이 바로 '무중력의 사람들' 전체 이야기다. 유령이 저 바깥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령이 중심이고 삶이 그것을 기점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그렇지만 이 소설은 우리에게 익숙한 스타일로 전개되지 않는다.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며 많고도 얼른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이야기로 산포된다. 주인공의 실제 삶과 허구의 이야기가 경계없이 뒤섞이며 주인공의 실제 경험 또한 과연 진실인지 아니면 꾸며낸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어느 것이 실제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 가늠하는 기준은 작중 인물이 실존의 무게를 지닐 때다. 작가는 독자에게 그 무게를 느끼게 하기 위해 등장인물이 우리처럼 땅을 단단히 발로 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여러 설정을 한다. 개인의 역사를 만들고 땀내가 느껴질만큼 그의 일상을 세부적으로 형성한다. 이 소설엔 그런 게 느슨하거나 아예 없다. 뚜렷한 상황 설명 없이 그저 목소리로만 남아 다른 이야기 중간에 삽입된다. 마치 유령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출현하는 것처럼. 실존을 이루는 배경은 점점 사라지고 우리는 어느새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목소리만이 전부인 세계에 처하게 된다. 유령들의 영토로.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유배인 것은 아니다. 주인공이 글쓰기를 통해 그런 세상을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란 주체가 되는 행위이다. 삶 속에서 우리의 주체란 온전히 우리가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규격으로 만들어 놓은 주체란 옷에 우리의 몸을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일상에서 느끼는 우리의 답답함과 목마름은 바로 거기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은 아니라는 것에서 말이다. 그런데 글쓰기는 온전한 나로 있게 한다. 남이 규정한 내가 아닌, 나 스스로 고유한 나를 정립하는 여정이 된다. 그래서 소설에서 글을 통해 창조된 유령들의 대지는 비로소 그녀가 진정한 주체로 주권자가 되는 국가라고 해야 하리라. 중력이라는 외부가 부여한 실존이 아니라, 자신이 실존을 부여하며 그로 인해 의미와 진리가 형성되는 게토. 소설의 세계는 그렇게 일변한다. 이를 통해 발레리아 루이셀리는 햄릿의 유령처럼 유령이 불안과 공포의 징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재단하고 규정하는 체제가 숨긴 진실을 드러내고 그것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만드는 새로운 목소리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충실히 재현한다. 허구가 그저 무용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 숨결이 되고 진짜 자신이 될 수 있는 거름이라는 것을 말이다. 문득 우리가 소설을 즐겨 읽게 되는 것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이야기가 주는 재미의 탐닉이 아니라 유령과 허구에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기에.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허구의 이야기가 쾌락의 대상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산에 오를 때마다 실존의 잔영이지만 온전히 내 것은 아닌 메아리를 만들고 듣는 것을 즐겨하는 것과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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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 스토리콜렉터 55
도로시 길먼 지음, 송섬별 옮김 / 북로드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미국 뉴저지 출신으로 현재는 코지 미스터리계 대모로 평가받는 도로시 길먼의 대표 시리즈인 '폴리팩스 부인'을 이제서야 읽어 보았다. 시리즈 첫 작품은 아니고 이번에 나온 세 번째 작품이다. 제목은 '폴리팩스 부인과 여덟개의 여권'. 도로시 길먼은 43세부터 77세까지 무려 35년 동안 14권의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를 썼다. 이혼으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그녀가 자신의 인생이 점점 쓸모없어지는 것 같아서 그러지 않으려고 뭔가 자기 삶에 대한 응원 같은 것으로 쓴 이 시리즈는 작가만큼이나 남편과 사별한 뒤 자식도 다 떠나보내고 홀로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던 할머니가 뜻하지 않게 CIA의 스파이로 활약하며 인생의 전성기를 보낸다는 이야기다. 뭐랄까? 비유하자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과 이언 플레밍의 '007'의 콜라보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존 르 카레 식의 어두운 스파이 물을 좋아해서 코지 미스터리 분위기의 스파이라고 하니 그닥 끌리지 않았고 거기다 할머니가 스파이로 활약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나 싶어서 엄청 유명한 시리즈인 줄은 알지만 스킵해버렸는데 견물생심이라고 세 번째 작품까지 나온 것을 보니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발간된 지 몇 십년이 지난(이번에 나온 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이 출간된 연도는 세상에 1971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계속 나오는가 문득 궁금해져 속는 셈 치고 읽어버렸다.


 그런데 왠걸... 꽤 재밌었다. 선우용녀에 빙의라도 된 듯 '뭐야 뭐야' 하면서 이야기에 거침없이 빠져들어 갔다. 폴리팩스 부인은 멕시코와 이스탄불에서의 스파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현재는 원래 사는 곳인 뉴브런스윅(이곳은 저자의 고향이기도 하다.)에서 스파이가 되기 전에 자신의 주력 분야였던 원예에 충실하고 있다. 현재 그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프로젝트는 손가락선인방의 꽃을 밤에 피우는 것. 소설은 그것의 성공과 함께 시작한다. 폴리팩스가 성공의 기쁨에 젖어있을 무렵, CIA의 카스테어스와 비숍은 불가리아에 파견되었던 정보원 쉽코프에게서 이상한 정황을 보고 받는다. 누군가 불가리아에서 비밀리에 정탐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쉽코프에게 다가와 그가 지금 불가리아 비밀경찰(이 때 불가리아는 사회주의 국가였다.)에 노출되었으니 이러이러한 경로로 빠져나가라고 하면서 만일 무사히 미국까지 가게 되거든 자신의 동료들이 불가리아를 탈출할 수 있도록 여권 여덟 개를 만들어 갖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 반신반의했던 쉽코프는 집에 갔다가 비밀경찰들이 있는 것을 보고 한번 더 속는셈 치고 그가 말해준 경로로 찾아간다. 그런데 정말 불가리아를 무사히 빠져나왔던 것이다. 그 사실을 들은 카스테어스와 비숍은 불가리아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것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거기 있는 쉽코프를 도와준 이들과의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여덟 개의 여권을 갖다주려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과연 누구에게 그 일을 맡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일이 잘못되면 불가리아와 미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경색될 수도 있다. 되도록 정보원 티가 나지 않는 인물이 필요하다. 결국 카스테어스는 비숍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폴리팩스에게 다시 한 번 일을 맡긴다. 여덟 개의 여권을 그것을 위해 특별하게 제작한 모자에 숨겨 불가리아에 갖다 주도록.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 있는 릴라 호텔. 폴리팩스 부인이 묵게 되는 바로 그 호텔이다. 실제 있는 곳이다.

 혹시 여기 가게 되신다면 폴리팩스 부인을 생각하며 한 번 묵어보시길...


 처음엔 그렇게 단순한 임무였다. 그래서 카스테어스도 폴리 팩스 부인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다 그렇듯 카스테어스의 예측 대로 흐르지 않는다. 불가리아로 가기 위해 바꿔 탈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던 베오그란데 공항에서 일은 터졌다. 폴리 팩스 부인은 거기서 우연히 배낭 여행 중이던 일단의 미국인 청년들을 만났는데, 절대 불가리아로 가지 않겠다던 필립이란 청년이 불가리아에 왔고 그만 간첩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필립과 같이 있던 데비란 아가씨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폴리팩스 부인은 자신의 임무와는 별개로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는 필립의 고초를 자기라도 나서서 해결해주려 한다. 그런데 그 일이 그만 불가리아의 비밀경찰까지 얽혀서는 폴리팩스 부인이 상상한 것 이상의 재난을 가져 온다. 무려 세 번이나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는 것도 모자라 끝내 불가리아 역사상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했다는 감옥까지 잠입하도록 만든다. 바야흐로 카스테어스와 비숍은 다시 한 번 속쓰림을 달랠 위장약을 연거푸 들이켜야 할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속표지의 모습이다. 소설에 나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표지에 신경을 많이 썼다. 전작을 못봐서 전작도 이런 표지인지 모르겠다. 이런 표지라면 다 소장하고 싶다.(나는 의외로 이런 외관에 약하다. 으음...) 아무래도 작품의 연식이 연식인지라 장르소설의 빈티지적 취향을 자극하는데(옛날 장르소설을 즐겨 읽으시는 분들이라면 이 느낌을 아실듯), 그런 작품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지 표지도 거기에 맞춰 빈티지스럽다. 마음에 든다.


 처음엔 폴리팩스 부인이 받은 미션이 별 것 아니라서 '할머니 스파이가 다 그렇지 뭐' 하고 흥미가 한풀 꺾였었는데(그래도 내처 읽었던 것은 폴리팩스 부인과 그녀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고 있는 카스테어스와 비숍이 빚어내는 케미 때문이었다. 분명 폴리팩스 부인의 상관인 그들이 폴리팩스 부인이 엄마, 그들이 자식으로 유사 모자 관계를 보여주어 흥미로웠다. 이런 것이 전반부터 느껴질 정도로 소설의 캐릭터 형성이 참 좋다. 특히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폴리팩스 부인과 동행하게 되는 데비와 정체불명의 불가리아 협력자 찬코의 캐릭터 묘사가 뛰어나다. 데비가 자신도 언젠가 폴리팩스 부인이 찬코에게 받았던 것처럼 남자에게서 그런 시선을 받고 싶다고 고백할 정도로 폴리팩스 부인과 찬코가 나누는 우정은 소설에서 가장 감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불가리아에 도착하고 나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지라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결말이 날까 궁금하여 증기기관차 화로에 석탄을 마구 던져넣듯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냥 푹 빠져서 재미만을 추구한다면 분명 만족스런 독서가 될만한 작품이다. 왜 이 시리즈가 인기 있는지 제대로 체감했다고나 할까.


 소설에서 폴리팩스 부인과 데비가 지나쳐 갔던 시프카 패스(Shipka Pass). 아시다시피 불가리아는 1396년부터 187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876년 4월, 불가리아인들은 수백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에 대해 터키인들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응답했는데 결국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학살당했다. 시프카 패스는 그 때 가장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학살당한 장소로 이름 높다. 무려 2만 8천명의 사람이 터키인들에게 무참히 도륙되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8명에 불과했다. 불가리아는 자신의 가장 아픈 역사를 이렇게 기념하고 있다. 폴리팩스 부인은 이곳을 지나가며 그런 사정을 데비에게 설명한다. 이런 역사는 나중에 필립의 비극과 오버랩 되면서 묘한 반향을 일으킨다. 과거의 피해자가 현재의 가해자가 되는 이러한 아이러니는 어떠한 연유로 생겨나는 것인가 하고.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내게는 이 이야기가 깊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최근에 일어난 한 비극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바로 북한에서 1년 넘게 억류되어 있다가 혼수상태로 미국에 송환되자마자 사망한 웜비어 말이다. 그는 여러모로 소설 속에서 간첩 혐의로 불가리아 비밀경찰에게 억류당하는 필립과 비슷하다. 일단 나이가 그렇고 풀려나자마자 심장마비로 죽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물론 여기엔 불가리아 비밀경찰을 장악한 이그나토프의 음모가 서려있다. 명확하게 혼수상태와 사인이 판명나지 않는 웜비어에게도 어떤 음모가 깃들어있는지 모를 일이다.) 무려 56년 전의 소설에 바로 오늘날 일어난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놀랍기도 하고 소설 속 세계와 현실 세계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한 편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똑같은 비극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을 보면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에 깊은 회의가 든다. 사실 폴리팩스 부인이 필립의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국 대사관을 비롯하여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필립의 생사와 안전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정부와 언론이 그러했듯이. 만일 폴리팩스 부인마저 모르쇠했다면 필립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최후를 맞았을 것이며 그 죽음을 통해 권력을 영원히 쥐려고 했던 이는 자기 소망을 이루었을 것이다. 어쩌면 무모하고 누군가에겐 귀찮기만한 그녀의 관심이었지만 그 하나가 많은 이들에게 삶의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주고 불가리아 또한 올바르게 통치할 계기를 마련해준 것을 보면 진정한 역사의 발전이란 이렇게 비록 우리처럼 작은 자라 하더라도 그 어떤 약자에게 닥친 비극도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바로 나의 일인 것처럼 관심을 갖고 실제 뭔가 실행하는 자들 덕분에 이뤄지는 것 같다.

 뭐, 이런 거창한 이야기는 사족에 불과하다. 캐릭터의 매력과 재미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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