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 마일 밀리언셀러 클럽 85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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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자정리'라고 했던가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성 사립탐정 캐릭터가 바로 앤지 제나로인데 그녀가 나오는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제나로' 시리즈가 '문라이트 마일'을 끝으로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작품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설마 했더랬죠. '진짜 종결이긴 하겠어? 아이돌들이 흔히 그러듯이 다시 돌아오기 위한 잠정 은퇴겠지, 뭐!' 이런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죠. 어쩌면 헤어지기 싫은 마음이 억지로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든 것인지도 모르죠. 이대로 영영 앤지 제나로와 이별이라니... 이런 생각만으로도 왠지 울적해지는군요.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더니 읽어보니 이럴수가! 데니스 루헤인은 정말로 이 시리즈를 종결지어 버렸습니다. 다시 시작될 여지는 조금도(!) 주지 않고 말이죠. 어떤 단호함마저 엿보입니다. 자기 인생에는 사립탐정 말고 다른 길은 없다며 내내 그 한 길로만 걸어왔던 켄지가 사립탐정으로서의 자신을 상징하는 존재인 45구경 콜트를 강물에 던져버리니까요. '공무도하가'에서도 나오듯이 물은 죽음을, 그렇게 영원한 이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거기서 죽음으로 헤어진 님을 그리며 여인이 '공무도하'를 부르듯이 켄지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다시는 이 짓 안 해. 마이크 콜레트가 화물회사 일자리를 제안했어. 그 일을 맡을 생각이야."(p. 372)

 

  말하자면, 이건 독자에게는 확인사살 혹은 셜록 홈즈처럼 독자들이 아무리 요청해도 부활시키지 않겠다는 굳센 다짐 같은 것이죠. 아아, 그렇게 님은 떠나갔습니다. 


  물론 앤지도 말이죠. 연인과의 이별과 마찬가지로 헤어짐 뒤에 남는 건 미련 그리고 의문입니다. 의문 역시 미련이 위장된 모습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떠나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묻게 됩니다. 아니,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가?'하고 말이죠. 켄지와 앤지도 예외는 아닙니다. 궁금증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왜 떠나야 하는 것일까?' 그러게요, 데니스 루헤인은 왜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를 이렇게 종결시켜 버린 것일까요?


 사실 저에게 있어 모든 리뷰란 스스로가 품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바둑 기사가 대국을 둔 후에 자신이 둔 수를 차례로 복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탐정에게 던져진 밀실의 시체와도 같이 책은 마주한 수수께끼이며 리뷰란 그 풀이인 것이죠. 솔직히 말해 탐정의 풀이가 진실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자신의 추리에 끼워 맞추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듯, 탐정이 찾아낸 진리 역시 그저 수사(修辭)에 불과합니다. 탐정은 답안지의 정답을 말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을 납득시킬만한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죠. 리뷰 역시 그와 같다고 봅니다. 원 뜻이 아니라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


 이 리뷰 또한 그렇습니다. 데니스 루헤인이 던져준 사립탐정을 홀로 말을 타고 석양 속으로 아스라히 사라져 가는 카우보이와도 같이 저 편의 망각 속으로 보내버린 수수께끼에 대해 왜 그래야 했던 것인지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려는 몸짓인 것이죠.


 그럼, 한 번 '문라이트 마일'와 함께 헤아림의 론도를 시작해 보실까요?

그만큼 경쾌하지 않고 그저 지루할지도 모르겠지만서도...


 시작은 역시 '왜 켄지는 사립탐정을 그만두는 것인가?"가 될 것 같네요.

 일단 거기에 대한 켄지의 말은 이렇습니다.

 

 "당신, 알아? 이 일을 시작할 땐 정말 끔찍한 짓거리만 아니면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 (...) 아냐, 그게 아니었어. 그 보다 사소한 일들이 더 힘들었던 거야. 정말로 괴로운 건 백만 달러에 사람들이 서로 못할 짓을 하기 때문이 아니었어. 불과 10달러에도 그런다는 사실이지. 이제 더 이상 누구누구 여편네가 바람을 피우든 말든 관심 없어. 남편도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이더라고. 그리고 보험회사들? 난 놈들을 도와 한 놈팡이의 목 부상이 가짜라는 사실을 밝혀냈어. 그런데 불경기가 오니까 마을 절반의 보상금을 깍잖아."(p. 372 ~ 373)

 

 아시겠지요? 여기엔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켄지의 절망이 있습니다. 진실을 밝혀낸들 그게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죠. 더 이상 죄악으로 부터 깨끗한 자도 없고 개인의 사소한 비행은 밝혀낼 수 있을지언정 거대 기업의 구조적인 악 앞에선 무력하기만 하니까요. 이제 더이상 사립탐정이 추적하는 범죄자들은 '트릭스터'들이 아닙니다. 슈퍼 히어로에게 있어 슈퍼 빌란과도 같이 그것 하나만 제압하면 사회는 순식간에 잃어버렸던 질서를 회복하고 다시금 안정을 구가하는 건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건 순진한 생각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트릭스터야말로 일종의 눈가림일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 자체가 잘못되었는데 그러한 진실이 드러나면 대중들이 사회 자체의 전복을 염원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구조적 하자를 은폐하기 위하여 대신 슬쩍 들이미는 희생양 말이죠. 확실히 트릭스터는 그러한 존재였죠. 중국의 산해경에 나오는 온갖 기이한 괴물들과 중세시대의 마녀들이 그러했듯이.


 켄지는 비로소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립탐정을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인 'PRIVATE EYE'처럼 언제나 'PRIVATE'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사립탐정은 무력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켄지는 이제야 그 진실에 눈을 뜬 것입니다. 사실은 너무나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켄지가 깨닫게 된 상황이란 이미 전작인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랬습니다. 그 때도 데니스 루헤인은 켄지에게 똑같은 것을 선사했습니다. 사립탐정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도록 말이죠. 하지만 젊어서일까요? 켄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계는 이미 달라져 있는데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젊음이 흔히 가지는 약간의 오만에 기대어 세상이야 어쨌든 자신의 신념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여겼었죠. 그렇지만 착각이었습니다. 휘지 않는 대나무는 결국 부러지게 마련입니다. 그와 똑같이 켄지도 그 착각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 지를 아주 뼈아프게 알게 됩니다. 물론 그 착각을 나무랄수는 없습니다. 그 착각을 가져온 켄지의 신념이란 사립탐정물에서 고고하게 이어져온 사립탐정의 전통과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그건 여반장으로 바뀌는 세상의 선악과 가치 속에서 그래도 자기만큼은 흔들리지 않겠다는 몸부림이요, 모두가 이해득실을 쫓아 이합집산을 이루지만 그래도 자신만은 옳다고 생각되는 바를 쫓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립탐정이 백열전구라면 그 신념은 필라멘트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빛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것. 그것이 사명이었고 또한 구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시대는 가버렸습니다. 트릭스터들을 잡는 것만으로 질서를 복구할 수 있는 시대는 가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문라이트 마일'은 2010년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책이 쓰여지고 있었던 지난 2년간의 미국은 아시다시피 대공황 이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도래한 경제 위기는 결코 한 개인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는 일이었죠. 노엄 촘스키가 단적으로 그건 '지난 30년간 집요하게 추진된 금융 자유화가 적지않은 원인이다.'라고 말했듯이 소수 금융 지배 계급의 입김으로 좌우되는 기형적인 미국 자본주의 구조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한 명의 악덕 금융업자가 아닌 그런 금융업자가 활개치도록 방기하고 잘못을 저질러도 그 책임을 묻지 않는 미국이라는 사회 자체가 이미 거대한 하나의 사회악으로써 사립탐정 켄지 앞에 군림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문라이트 마일'은 그들이 숨겨왔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는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의 트릭스터만 잡으면 된다라는 순진한 믿음을 고수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러한 순진한 믿음을 독자에게 가지도록 한다면 데니스 루헤인 역시 트릭스터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오디이푸스가 정해진 운명대로 걸어갔듯이 켄지의 은퇴 역시도 필연적인 귀결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끝을 내버린 것이죠. 켄지에게 가장 트라우마가 되었던 '가라 아이야 가라'를 다시금 소환하면서. '문라이트 마일'은 98년에 나온 '가라 아이야 가라'의 속편입니다. 작품상으로도, 실제 시간으로도 똑같이 12년이 흐른 것이죠. 그런데 왜 데니스 루헤인은 켄지의 은퇴를 위해 하필이면 '가라 아이야 가라'를 가져왔을까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라이트 마일'이 실제 미국이 처한 상황의 반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은 '가라 아이야 가라' 역시 그 반영이었습니다. 사실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는 '가라 아이야 가라'부터 그 이야기의 지평이 사회적 차원으로 넓혀진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결정적 계기를 낳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라 아이야 가라'가 결국은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임을 본다면 그 답은 바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바로 한창 위태롭게 전개되고 있던 미국의 중동 정책이라는 것이 말이죠. 90년대에 들어와 냉전 시대가 종언을 고하게 되자 세계에서 가장 패권 국가가 된 미국은 그 다음 타겟으로 중동 지역을 삼았었죠. 이라크가 대표적인 목표였습니다. 지금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듯이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정치 공세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온갖 빌미로 UN까지 동원해가면서 엄청난 회수의 사찰도 이루어졌습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된 미국은 막강한 힘을 아낌없이 휘둘렀습니다. 개입은 설령 그 나라에 내정간섭이 되더라도 자유 세계의 리더인 미국에게 당연한 사명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신념을 고집했고 단 한 번도 그러한 행보에 대해선 성찰해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무반성적이고 과도한 개입은 9.11의 비극을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의 미국은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고 고집하고 되돌아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립탐정과 참 많이 닮아보입니다. 어쩌면 이 사실을 데니스 루헤인도 깨달았을지 모릅니다. '가라 아이야 가라'가 지금까지의 노선에서 벗어나게 된 건 그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리하여 개입하여 자신의 신념만 고집한다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묻는 이 소설이 결정적으로 켄지에게 트라우마를 가지도록 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켄지와 똑같았던 당대의 미국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로.

 켄지는 그 선택으로 선령한 이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결국 사랑하는 연인 앤지와도 헤어졌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고립과 자책 뿐이었습니다. 이건 미국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9.11으로 실현된.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뒤이어 나온 작품인 '비를 바라는 기도'가 그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가라 아이야 가라'와 연속성이 있습니다. 똑같이 독선적 개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죠. 특히나 여기서의 주된 범죄자가 그러합니다. 그는 남의 인생에 멋대로 개입해 자기 뜻대로 조정하고 결국엔 완전히 파멸시키는 걸 쾌락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쾌락만 제외한다면 켄지와 닮았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의 범죄자는 켄지의 또 다른 분신이다!'라고. '문라이트 마일'에서  다시금 소환되는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유괴된 아이였던 아만다의 지금 삶을 보면 이 말은 너무나 정확하게 보입니다. 그 때 켄지가 조금만 자신의 신념을 굽히고 남의 말에 귀기울였던들 아만다의 삶은 지금과 분명 180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 켄지가 추적하고 싸웠던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의 자신. 그건 트라우마가 된 과거와의 대면이었고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복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리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데니스 루헤인이 켄지에게 선사한 구원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아만다라는 트라우마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켄지에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이란 그야말로 '비를 바라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데니스 루헤인은 그 구원의 도래를 위한 기우제를 켄지를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그는 과거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범죄자를 보면서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가 보아야 할 곳과 버려야 할 것들을. '비를 바라는 기도'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타는 갈증을 적셔줄 찬 비를 맞을 수 있는가에 대한.


 그렇게 배웠습니다. 깨달았습니다. 자신만 옳다는 신념을 버려야 함을. 그래서 앤지와 만나 가족도 이루었습니다. 가족을 가진다는 건 켄지가 이제 그렇게 변했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나마 켄지는 사립탐정으로서의 자신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조차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한껏 드러낸 금융 위기가 쓰나미처럼 몰려왔기 때문이죠. 그 거대한 구조적 모순 앞에서 한 명의 트릭스터를 상대할 수 밖에 없는 사립탐정은 무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켄지에게 남은 건 냉정한 인식이었습니다. 이제 미국엔 더이상 사립탐정이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제목의 '문라이트 마일'은 롤링스톤즈가 71년에 발표한 'STICKY FINGERS' 앨범 B면 마지막 곡으로 실린 'MOONLIGHT MILE'에서 따온 것입니다. 'MOONLIGHT MILE'은 바로 이 부분에서 나오죠.


 I am just living to be lying by your side

But I'm just about a moonlight mile on down the road...


 가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라이트 마일이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떠밀려 왔음을 의미합니다.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길입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합니다. 정확히 켄지가 이 소설에서 걷고 있는 길 그대로죠.



[가지고 있는 'STICKY FINGERS' 초판 LP를 배경으로 한 번 찍어봤습니다. 사실 'STICKY FINGERS' 커버는 LP 커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커버중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커버는 앤디 워홀이 디자인했는데 원래 커버 자체도 진짜 남자 바지로 착각할만 하지만 아예 커버 바깥에, 혹시나 몰라서 책으로 살짝 가려놨는데, 실제 내리고 올릴 수 있는 지퍼까지 달려 있어서 더욱 진짜 바지처럼 보이는 커버입니다. 거기다 지퍼를 내리면 그 사이로 남자 팬티까지 비쳐보여 더 외설스럽죠. 워홀다운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무장한 커버입니다.] 


 사실 이 제목은 '비를 바라는 기도'의 프롤로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 프롤로그는 주로 켄지의 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거기서 켄지는 '문라이트 마일'을 자동차로 달리고 있죠. 처음에 켄지가 가족을 이루었고 자식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들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프롤로그에서 켄지는 다섯 살 나이의 아들과 함께 달리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아니더군요. 딸이었습니다. 그 변화가 왠지 예사롭지 않더군요. 설마 데니스 루헤인이 건망증이 심해 자신이 뭐라고 썼는지 잊어버렸을 리는 없을테니까요. 왜 아들이 아니라 딸일까? 그러자 그 꿈속의 질주 마지막에 켄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운전해야 한다. 차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기름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배도 고프지 않으리라. 차 안은 따뜻하고 내겐 아들도 있다. 이제 아들은 안전하다. 나도 안전하다. 나는 계속 운전을 할 것이며 지치지 않을 것이다. 멈추지도 않으리라. ('비를 바라는 기도' P. 11)


 굉장히 비장한 어조입니다. 지치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고 죽을때까지 자신의 길을 간다는 말은 어쩌면 타협하지 않을 사립탐정의 신념을 나타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그는 차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자동차 실내라는 그 협소한 공간이 아예 폐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더욱 분명해집니다. 켄지의 꿈은 전통적인 사립탐정의 모습을 은유한 것임을. 켄지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들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타인을 지키기 위해 사립탐정은 그렇게 달려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아들은 그저 지켜야 할 존재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사실 아들은 아만다를 뜻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계속 운전하는 동안 아들이 안전해질 것이라는 믿음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선택해버린 아만다의 삶이 자신이 바랐던 대로 앞으로도 계속 안전하게 지켜지기를 원한다면 지금보다 더 충실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이었죠. 이것이 켄지 개인적으로는 '비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이러니 어조가 비장해지 것도 무리는 아닐테죠. 그랬습니다. 그래야 했습니다. 어딘가 있는 진실을 찾아 거짓과 환영이 얼른 잘 구분되지 않는 달빛 어스름한 길 위를 헤메일 수 밖에 없는 사립탐정은 자신을 혼돈으로 이끄는 온갓 사이렌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아야 했습니다. 스스로를 유폐시켜 냉정한 관찰자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더쉴 해미트와 로스 맥도널드까지 대대로 고수해온 그리고 지켜가야할 사립탐정의 신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신앙은 더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지키기위해서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길이 달라졌으니까요. 누군가를 지키길 원한다면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길을 버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계속 고집한다면 원래 바랐던 대로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기는 커녕 거기서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문라이트 마일'을 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는 원래 있던 것을 내어놓아야 하듯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도 놓아야 합니다. '비를 바라는 기도'는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켄지는 변해야했고, 하여 꿈속의 아들은 현실에선 딸이 된 것이겠죠. 그리고 이 소설 '문라이트 마일'에서 이제는 장기 한 알이 아니라 판을 모조리 뒤엎고 재배치하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그동안 당연시 여겨온 사립탐정의 존재마저 버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립탐정의 종언은 이렇게 찾아왔던 것입니다.


 좀 더 무리하게 말하는 걸 허락하신다면, 이건 미국에 대한 제안이기도 합니다.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과감히 포기하라!'고 그는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늘 말하는 것처럼 국민을 정말 안전하게 지키기를 바란다면 곪아 터진 환부를 헛된 희망의 링겔만을 꽂은 채 방치하지 말고 과감히 도려내라고 주문하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2010년에 찾아온 미국의 금융위기는 2008년 때 그 환부를 제대로 도려내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더욱 거대해진 구조적 모순 앞에서 사립탐정은 이제 그 적실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문라이트 마일'에서 켄지는 끊임없이 자신의 무기력을 술회합니다. 그러면서 확인합니다. 이제 자신의 시대는 완전히 지나가버리고 자기 보다 훨씬 머리 좋고 비정한 존재들의 시대가 와버렸다는 것을. 그것도 거기 대량으로 쌓여있는 블루레이나 아이패드가 종이책들을 대체해버린 것 만큼이나 빠르게 말이죠. 하여 데니스 루헤인은 과감히 사립탐정을 떠나 보냅니다. 지키기 위해서 놓아야 한다는 걸 몸소 실천한 것이죠. 아마도 그는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싸우고 그 대안을 가져올 새로운 세력을 구상하여 다시금 찾아올 것 같습니다. 그 단초가 바로 2012년에 나온 '리브 바이 나이트'이지 않을까 감히 추정해 봅니다.

 아무튼 저 역시 똑같은 마음으로 앤지를 떠나 보내렵니다.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려드리렵니다. 혹시 아셨나요? 사실 이렇게 쓴 것은 이제 앤지와 결별해야 하는 제 마음을 스스로 납득시키고 위로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렇게 나름 이별 의식이었다는 걸. 

 

 그러보니 롤링스톤즈의 앤지(Angie)란 노래가 생각나네요.

사실 이 리뷰를 쓰면서 듣고 또 들었습니다만 혹시 데니스 루헤인이 앤지라는 이름을 정말 이 노래에서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각설하고, 이제 떠나는 앤지에게 이 노래 가사 하나를 인용해 그대로 들려주고 싶네요. 가사 때문에 질투 많은 켄지가 제 멱살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헤어지는 마당에 몸사릴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With no loving in our souls

And no money in our coats

You can't say we're satisfied

But Angie, I still love you, baby

 

Everywhere I look I see your eyes

There ain't a woman that comes close to you

Come on baby dry your eyes

But Angie, Angie

Ain't it good to be alive?

 

 앤지, 고마워요.

 당신이 있어서 세상이 그래도 조금은 살만했어요.

 이건 정말이에요.

 

... see you Angie sometime, some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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