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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계절 ㅣ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평점 :
예전부터 꽤 좋다는 입소문을 많이 들었던 N.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시리즈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그 첫 권인 '다섯 번째 계절'이 마침내 우리나라에도 출간된 것이다.
SF 판타지에 속한다고 봐야 할 이 소설은 아마도 지구의 아주 먼 미래가 아닐까 생각되는 '고요' 대지를 배경으로 세 여성의 삶을 담는다. 이 '고요' 대지는 원래는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었던 대륙들이 지각 변동 때문에 어느덧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변동의 여파는 아직도 남아 현재 고요 대지는 늘 불안정한 지각 상태로 거주민들에게 불안을 계속 안겨주고 있는 참이다. 그래서 이들은 무엇보다 땅을 중심에 놓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로 인해 그들이 쓰는 많은 언어들이 땅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땅의 움직임을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조산술'이라는 아주 특별한 기술이 존재한다. 물론 이 기술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로진'이라는 불리는, 그런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이들만 '조산술'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이 조산술을 이롭게 다루려면 높은 수준의 정신 통제력을 필요로 하기에 그런 자제력이 많이 없다고 생각되는 어린 오로진들은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고요' 대지의 각 마을(소설에선 '향'이라 불린다.)에선 오로진 아이가 발견되면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없애거나 추방한다. 부모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서 자신의 자식이 오로진인 걸 알게 되면 아이를 매매하는 자에게 넘기기 일쑤다. '고요'대지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제국의 수도 '유메네스'엔 이런 아이들을 모아 조산술을 제대로 쓸 수 있는 '펄크럼 오로진'으로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 존재한다. 그런 일(어린 오르진들을 유메네스로 데려가는 일)을 도맡아 하는 자들은 '수호자'로 불린다.
이러한 설정을 깔고 있는 '다섯 번째 계절'은 종말의 태동으로 시작한다.
한 남자와 스톤 이터('천사' 같은 존재로 생각하면 쉬울 듯하다. 수호 천사 같은 이미지니까.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 밑에서 솟아나는데, 역시 모든 게 대지가 중심인 '고요' 대지에 어울리는 설정이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 돌을 먹으며 땅속을 공기 속처럼 마음대로 활보한다. 그리고 소설 처음에 등장한 스톤 이터가 그러하듯이 대지를 커다랗게 요동치게 만들 수 있다. 소설 처음에 등장하는 남자의 정체는 마지막에 가서 밝혀진다.)가 유메네스를 붕괴시킨 것이다. 그 뒤, 우리는 에쑨, 다마야, 시엔이란 이름의 세 여성의 삶을 번갈아 보게 된다. 에쑨은 어머니로 최근 자기 아들이 오로진이라는 게 밝혀져 그 사실을 안 그녀의 남편 지자가 아이를 죽인 비극을 겪었다. '오로진'이라면 무조건 적대와 배척만 일삼는 마을 사람들에게 거센 증오를 느끼지만 사실은 자신이 그 죽음에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데 그건 바로 자신이 오로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고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자책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남편 지자가 이번엔 자신의 딸 나쑨을 데리고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버린 것이다. 에쑨은 딸을 구하기 위해 지자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그러다 또 하나의 스톤 이터인,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호야'를 만난다. 뒤이어 등장하는 다마야 또한 집을 떠나게 된다. 오로진이라는 게 밝혀져 마을에 더이상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는 아동매매자가 자기를 데려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자신을 찾아온 것은 유메네스로 데려가려는 '수호자', 샤파였다. 다마야는 유메네스로 가서 펄크럼 오로진이 되는 교육을 받는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건 시엔이다. 그녀는 펄크럼 오로지이지만 아직 반지가 없는 하급자다.(펄크럼 오로진은 반지의 개수로 상급자와 하급자로 나뉜다.) 그녀는 열 개의 반지를 지닌 상급자 오로진 남자를 찾아간다. 최근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아직 능숙하게 조산술을 쓸 수 없는 그녀에게 한 남자 감독관을 붙여준 탓이다. 그녀는 그 남자 오리진, '알라베스터와 함께 유메네스를 떠난다.
이것으로 이제 이 세 여성의 공통점이 드러난 것 같다.
모두가 오로진이라는 것 그리고 다들 길을 떠난다는 것. 두 말할 것도 없이 오로진은 이종적 존재다. 작가 제미신이 아프리카계 흑인이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이종성은 그대로 그녀가 가진 흑인의 인종적 정체성이 강하게 투영된 것이라 하겠다. 오로진이 평생 겪는 배척과 적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어느 정도 존중을 받으려면 그들이 부여한 교육을 거쳐야만 하는 것도 그대로 백인 중심 사회인 미국에서 흑인이 겪는 경로와 일치한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여성으로 우리 사회의 흑인 여성이 그러하듯이 인종과 성별에 따른 이중 차별을 받고 있다. 이러한 여성이 가지는 열악한 상황은 에쑨이 남편이 아들을 무참히 죽여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나 펄크럼 오로진인 시엔이 오로지 번식을 위해 사랑도 없는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고요의 대지는 그 이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차별과 억압이 들끓는 곳이었던 거다. 그 고요 대지에 군림하는 자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 어떻게 하면 고요의 대지를 이름대로 고요하게 만드는가다. 땅 아래에 존재하는 저항과 변화의 움직임을 억누르는 것. 이건 그대로 그들이 차별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받는 차별에 순종하도록 그들의 입을 막고 자유를 위한 몸짓을 결박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정한 자리에 모두가 가만히 앉아 자신들이 정한 운명을 오롯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설정들이 '다섯 번째 계절'을 그저 흔한 SF 판타지로 보지 않게 한다. 여기엔 인종과 성별에 대한 이중 차별이 횡행하는 지금 사회에 대한 뭉근한 비판이 서려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가진 또 하나의 공통점인, '길 위에 존재'라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다들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물론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길을 떠난다는 건 거의 보편적 설정이긴 하다. 하지만 그 여정의 의미가 '다섯 번째 계절'에서 더욱 두드려져 보이는 건, 설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땅, 대지라는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땅하면 얼른 떠오르는 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고정적인 이미지다. 이렇게 모든 게 제자리에 들러붙은 그 곳에서 세 여성들은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떠남이 더욱 대비되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대지란 또 어떤 곳인가? 바로 가이아 여신을 뜻하는 곳으로 여성의 영역이자 여성의 상징이었다. 스톤이터란 천사와 비슷한 존재조차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오듯, 하늘이 아니라 땅을 중심으로 했다는 것에서 이 소설이 흔히 말하는 여성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하지만 굳이 여성주의에 국한해 이 소설을 볼 필요는 없다. 사실 그것을 넘어 차별을 받는, 모든 존재들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원래 그런 여성의 영토였던 것이 지금은 남성들에게 지배되어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고요의 대지를 그리 불안에 떨게 만드는 '흔들'(소설에서 지진을 가리키는 말이다.)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사실 세 여성의 여정 또한 이런 '흔들'을 너무 닮았다. 그 떠남으로 인해 그녀들 모두 새로운 사람과 경험으로써 유메네스가 부여한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렇게 확고한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작가가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하고 끌어나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 온다. 그런만큼 설정이나 구성 상의 빈틈은 없으며 모든 게 유기적으로 잘 짜여져 있다. 그래서 나중에 만나는 반전 또한 놀라운 것이다.(사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그 전에 먼저 알아차렸겠지만.) 그런 면에서 나는 주로 이 작품이 가진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걸 제쳐두고서라도 이야기가 여간 흥미롭지 않기 때문에 무척 재밌는 작품이다. 역시 입소문 대로 오랜만에 아주 기대가 되는 작품을 만난 것 같다. 반전과 함께 또 다른 떡밥 하나가 던져졌는데, 그것 역시 오랫동안 여성의 상징인 존재라 그것과 관련된 뒷 얘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 이어 다시 한 번 휴고상을 수상한,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오벨리스크 관문'이 어서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벌써부터 현기증이 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