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리랜드 5 -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
캐서린 M. 밸런트 지음, 아나 후안 그림, 김승욱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2009년 네뷸라 수상작(네뷸라 상 중에는 'Andre Norton Award'라고 해서 영 어덜트를 대상으로 한 과학 소설과 판타지 소설에 주는 상이 있는데 '페어리랜드'는 바로 그 상을 수상했습니다.)이기도 한 캐서린 M 밸런트의 '페어리랜드'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 드디어 나왔네요.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라는 부제를 달고 말이죠. 2011년, 클라우드 펀딩의 일환으로 온라인에서 연재되었던 이 소설이 5년이 지나 드디어 완결된 것입니다. 캐서린 M 밸런트는 이 소설을 시작할 때 이미 '페어리랜드'가 다섯 권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결국 그 약속을 지키고 말았네요.


 저자 자신이 고백했듯이, 원래 이 소설은 별 기대없이 시작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지금은 이 셉템버(9월)라는 열 두살 꼬마의 요정 나라 여행기가 오랜 시간 이어졌을 뿐만아니라 다섯 권 모두 멀리 있는 우리나라마저 번역 소개될 정도로 커다란 인기와 좋은 평가를 얻었으니 아무래도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다섯번째 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페어리랜드'와 만났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권만으르도 왜 '페어리랜드'가 그만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지 좀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일단 굉장이 독특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판타지 소설을 읽어보셨더라도 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페어리랜드' 같은 소설은 절대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흔히 판타지 소설은 현실 세계에 일어날 법 하지 않은 일들이 가능한 세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정의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 '페어리랜드'는 진정한 판타지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엔 정말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소금 한 알갱이 보다도 더 안 나오거든요. 당신의 상상으로 현실의 모든 것을 마음껏 변화시켜 보세요.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모조리 그려 보세요. 그런 세계가 바로 '페어리랜드'입니다. 한 마디로 'ALL THAT FANTASY!'인 것이죠. 그래서 저 역시 그랬습니다만, 처음엔 좀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의 문장마저 현실에선 물과 기름처럼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들이 간단히 섞이고 카멜레온처럼 변화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따라 잡는데 애를 좀 먹게 되더군요. 그러나 차츰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페어리랜드'의 스타일에 점차 적응하고 보니 무척 매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매혹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제 언어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겠군요. 여기엔 뭔가 자유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정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자유를 꿈꿉니다만 그것을 실현하긴 어렵죠. 살다 보면 살기 위해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일에 얽매이기 마련이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 자체가 알고보면 그런 중력의 산물이죠. 거기에 진정한 나는 없습니다. 오직 사회화를 통해 사회와 불화를 일으키지 않고 동화될 수 있도록 사회가 형성한 정체성의 '나'가 있을 뿐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이죠. 라캉이 왜 이렇게 말했나 하면 그는 생각 자체를 언어의 산물로 보았는데 그 언어라는 게 진정한 자아를 사회의 식민지로 만드는 대표적인 존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아닌 것이죠.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지게 되는 욕망 역시 이러한 언어의 연장선 상에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욕망하기 보다는 남들이 다들 좋아하는 것을 욕망하게 된다고 라캉은 말했습니다. 지금의 우리를 지배하는 많은 돈, 좋은 집, 커다란 차, 어여쁜 이성에 대한 욕망은 사실 우리 스스로 형성한 고유의 욕망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사회에 잘 순응하도록 사회가 주입한 욕망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사회가 자아를 끌어당기는 힘, 그것을 저는 중력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중력에, 우리가 피로를 느끼면서도 기꺼이 끌려가는 것은 많은 것들이 그 중력을 정당화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살면서 흔히 만나게 되는 온갖 학문이 그러하죠.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등등. 이처럼 학문으로 촘촘하게 만들어진 그물망까지 가세하고 있으니 우리는 더욱 사회가 가하는 중력을 진리라 여기고 행여나 거기서 달아날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한채 진정한 나가 아니라 남과 닮은 나가 되기 위해 오늘도 기를 쓰고 더 잘 돌아가는 사회의 톱니바퀴로 있는 것입니다.


 '페어리랜드'는 바로 그 중력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선사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게 가능하기 때문이죠. 이성이 만든 규칙 따위 여기서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며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여도 자연 법칙이 되고 절대 명제가 되며 실정법이 되기 때문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자유 분방하다는 건 아닙니다. 여기의 이야기는 명확한 주제에 따라 일관된 흐름을 엄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 주된 줄기는 부제에 나왔든 '경주(race)'입니다. 셉템버는 여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도전하는 많은 존재들과 경주를 해야 하죠. 이 경주조차 제멋대로입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있는 경로도 없고 내가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알 도리도 없으며 내가 가진 탈것에 기대기도 어렵고 경주를 주관하는 심판이 내키는 대로 경주자의 자리를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이토록 자유분방한 경주에서 셉템버가 승리하는 길을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페어리랜드'의 심장을 찾는 것. 이제는 왜 부제에 '심장'이 있는지 아시겠죠? 심장과 경주. 이것이 바로 이번 책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경주를 하면서 셉템버가 거쳐가는 곳이 의미심장해요. 셉템버는 도서관이나 바다 등을 지나가게 되는데,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빼앗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서관을 다스리는 그리니치라는 놋쇠 공은 이런 말을 하죠.


 시간은 모두 못됐어. 가져가기만 하고 돌려주지는 않으니까.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 하는 때는 쏜살같이 흐르고 쏜살같이 흘렀으면 싶을 때는 굼뱅이처럼 기어가지. 시간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 뚱하니 흘러가. 수천 번 방향을 꺾어도 되련만. 일단 시간이 가져간 건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어.(p. 165)


 그리고 원래 바다 요정인 세터데이(나중에 셉템버의 연인이 되는 소년이죠.)는 자신의 할머니 바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할머니가 항상 따뜻한 물살이나 상냥한 고래 같은 건 아니야. 나이가 아주 많아서 자기만의 방식이 굳어져 있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집을 관리하지. 바다는 모든 걸 쌓아두기만 하거든. 파도가 가 닿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훔쳐 와. 그리고 동전 하나라도 다시 내놓는 법이 없지.(p. 209)


 시간과 바다. 이렇게 둘은 가지기만 하고 내주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둘 모두 다른 것을 끌어당기기만 할 뿐, 자유롭게 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중력과 닮아있는 것입니다. 셉템버는 그런 곳을 횡단하며 심장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 심장이란 존재가 참 특이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일상 속에서 생각하는 그런 심장은 아닙니다. 여기서 심장은 태초의 모습을 뜻합니다. 소설 속 거대한 도서관은 원래 작은 오두막이었습니다. 작은 오두막이 거대한 도서관을 꿈꿨기에 그런 도서관이 된 것이죠. 그 도서관의 심장은 오두막입니다. '페어리랜드'의 심장 역시 태초의 페어리랜드의 모습인 것이죠. 이것은 그대로 사회화 되기 전의 개인이 원래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체성과 닮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셉템버는 현실 사회처럼 중력을 발산하는 존재들이 은폐한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 다니는 것이죠. 이러니 제가 라캉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죠. '페어리랜드'를 두고 철학 동화라고 평가하기도 하던데, 이것으로 저도 그 말을 납득했습니다.


 여지없이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엔 융합의 움직임 또한 있습니다. 여기서의 자유는 이분법적 사고에서의 자유이기도 합니다.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천방지축과 진지함, 미성숙과 성숙, 실제와 환상, 책임과 방종이 쉽사리 구분되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하나를 내세우기 위해 다른 하나를 버리는 일 따위, 이 소설에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경주에 임하는 셉템버의 상황에서 드러납니다. 셉템버는 한 편으로 여왕이 되어 자신이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철부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지만 한 편으로는 왕관이 주는 책임의 무게에서 자유롭고도 싶습니다. 그 왕관의 무게가 무거워질 때면 셉템버는 자신이 떠나온 현실 세계의 집을 그리워 합니다. 그런데 그 집으로 쉽게 돌아갈 길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결투에서 지는 것입니다. 각자 다른 세계에서 경주를 하는 경주자들이 어쩌다 만나게 되면 무조건 결투해야 하는 게 경주 규칙인데, 그 결투에서 지면 자신이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이 정말 그립다면 셉템버는 결투에서 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심장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왜 그러는 걸까요? 그런데 이 상황이 굉장히 아이러니 합니다. 페어리랜드는 자유이고, 현실 세계는 의무입니다. 원래 셉템버가 현실 세계를 떠나올 때 세계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참전하고 있었죠. 그만큼 현실 세계는 중압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셉템버를 '페어리랜드'로 데려온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바람이 가지는 의미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페어리랜드와 현실이 가지는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현재의 셉템버에게 '페어리랜드'는 의무이고, 현실 세계는 자유입니다. 이 작품에선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를 소설은 세터데이와 셉템버의 관계를 통해 넌지시 일러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확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우리 삶 자체가 무한한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삶의 속성이 천변만화(千變萬化)이기에 우리는 고정된 의미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고 이분법적 사고에 얽매일 필요도 없으며 완전히 다른 타자와의 융합에 있어서도 거리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태도를 하나로 뭉뚱그려 말한다면 아마도 자유가 되겠죠.. 자유, 그건 무엇보다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까요. '페어리랜드', 그 곳은 세터데이에게 시간이 그러하듯이 자유의 대지입니다. 펼쳐보시면 산에서 맞는 아침의 안개처럼 오롯이 들어찬 자유의 운무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동화적인 외양을 가지고 있지만 한 켠엔 깊은 철학적 사유도 슬쩍 감춰둔 작품이었습니다. 덕분에 어릴 때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하듯 읽을수도 있더군요. 찾아냈을 때의 기쁨도 아울러. 특히 환상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께, 정말로 독특한 환상 소설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페어리랜드'를 살짝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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