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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구병모 작가의 중심은 '몸'이다.
체제 혹은 관계로 인해 가중되는 모든 부하(load)는 신체적 고통으로 곧바로 전이된다. 그 고통으로 야기되는 예민한 감각이 문장의 기본적인 결을 이룬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약자만을 골라 내리누르고 있는 점철된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해 선명한 날을 세우도록 만든다. 구병모 작가는 개인적으로 근래에 읽어본 작가들중 가장 정직하고 또한 강하다고 생각된다. 상처 바라보기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꿋꿋하게 응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상처를 드러냄에 있어서도 중도에 멈추지 않고 집요할 정도로 모조리 까발려 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상처를 이처럼 끝까지 파헤치는 것은 강하지 않으면 하기가 어렵다. 강함은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하기에 강한 것이다. '고의는 아니지만'은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는 시선을 보여준다. 나는 구병모 작가와는 이 '고의는 아니지만'으로 처음 만났지만 이런 까닭으로 지금 내게 있어서는 가장 매력적인 작가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표지에는 단촐하게 소설이라고만 나와 있으나 사실은 소설집인 이 '고의는 아니지만'은 다 마음에 드는데 딱 하나가 아쉽다. 바로 수록된 작품의 순서이다. 소설집은 2009년 부터 현재까지 발표되거나 미발표된 작품들로 묶여져 있는데 어떤 기준으로 순서가 그렇게 정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왕이면 시간순으로 배열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작품을 읽어보니 작가가 작품마다 그 때의 사회와 분명히 서로 조응하고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의는 아니지만'은 비유하자면 일종의 투쟁기이다. 그 시간의 지층마다 상처로 절망으로 작가를 익사시키려 했던 사회에 굴하지 않고 저항과 희망으로 열심히 자맥질해 온 기록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그의 호흡이었고 문학은 그의 무기였다. 더 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그는 더 크게 헤엄쳤고 그렇게 이 소설집은 헤엄친 거리만큼 더욱 넓고 깊어진 성찰의 여정과도 같다.
이건 작품을 시간순으로 배열해 보면 바로 드러난다.
2009년에 발표된 '재봉틀 여인'과 '곤충도감'을 개인 차원의 얘기로, 뒤이은 2010년에 발표된 '마치... 같은 이야기'나 '타자의 탄생'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사회' 자체에 대한 얘기로, 그 후 2011년에 발표된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는 '그런 사회 속에서의 개인으로 살아가는 나'에 대한 얘기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월이 흐를수록 그 시야는 넒어지고 있다. 이건 물론 단순히 바라보는 지점들이 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는 쪽으로 옮겨간다는 정도의 의미는 아니다.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사회가 숨기고 있었던 진실에 대한 분명한 자각 끝에 옮겨가는 이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시야가 넓어지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결과인 것이며 그 깨달음이란 다름아닌 사회가 은폐한 진실을 다시 찾아옴으로 이루어진다.
소설의 여정은 그 되잧아오는 진실들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과 같다. 사회로 부터 익사당하지 않고 저항하려는 자아 역시 그 되찾은 진실에 양육되어 무럭무럭 자란다. 몸의 비만은 자아의 비만이다. 그리고 굴하지 않는 의지의 비만이다.
가장 먼저 발표된 '재봉틀 여인'과 '곤충도감'을 일단 들여다보자.
이 두 이야기는 모두 개인과 개인이 만나는 관계는 어느 한 쪽이 절멸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재봉틀 여인'에서 사회가 가하는 구조적 폭력을 피하기 위해 보다 무리없이 섞일 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선을 잘 꿰메두고 있었던 소년은 결국 원하는대로 그 사회와 하나가 되려는 결정적인 순간 갑작스럽게 결별을 당하고 만다. '곤충도감'의 주인공 남녀는 서로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만 한 쪽이 파열해 버린다. 이렇게 모든 관계는 하나가 되려는 순간 어느 한 쪽이 파국적 결말을 맞아버린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설은 분명 그 원인이 개인에게 있다고 하지 않는다. 바로 사회 자체가 그 파국의 원흉임을 드러낸다.
어떻게? '재봉틀 여인'의 소년을 보자. 그가 그렇게 감정선을 꿰매야 했던 것은 선생님의 폭력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어른들의 사회 그 자체를 대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소설의 첫문장에서 작가는 일부러 '어른들의 관용어'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어른과 아이의 언어적 대조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의 편가름이며 그렇게 소설 속 개인들이 단순히 개인들이 아닌 그 속한 무리의 대표로 보게 만드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선생님의 폭력을 어른 일반의 폭력으로 치환시킨다. 그 치환을 통해 선생님의 자리는 라캉식으로 말하면 우리 사회 질서를 그 근저에서 구조화시키고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의 자리로 이동한다. 선생님의 폭력은 소설 속 교장과 선생님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가 속한 사회적 소통의 진실한 단면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또한 대상이 아이들이기 때문에 양육이다. 그들은 길러진다. 가르치는 어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소통하도록! 폭력이다. 폭력은 일방적이다. 거기에 대화의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려와 이해의 차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가하는 자의 일방적 명령과 강요가 있을 뿐이다. 한 쪽은 말하는 입만 있고 듣는 쪽은 오로지 귀만 있는 관계. '재봉틀 여인'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소년은 폭력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그저 재봉틀로 기울 수 밖에 없다. 소년은 점점 진정한 자신의 신체를 잃어가고 어른의 폭력에 길들어진 변형된 신체가 된다. 그러면 소설에서 과연 재봉틀 여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소설에서의 개인이 프로이트적 오디이푸스 삼각형에서 한 꼭지점을 맡고 있는 인물들의 상징으로 유형화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 재봉틀 여인은 물론 어머니를 표상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로 부터 폭력을 당한 아들에게 위안은 늘 어머니 몫이었다. 그녀는 어루만져주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역할을 했다. 거기서 연고로 상처가 봉합되었듯이 재봉틀 여인은 소년의 상처를 재봉틀로 봉합한다. 재봉틀 여인이 바로 어머니의 상징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여기서 소설의 진실이 나타난다.
이 소설은 얼핏 환상 소설의 외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진실은 한 가정내에서 자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사회적 소통의 진실된 단면이기도 한 폭력을 말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일차적 사회화 임무를 맡고 있는 가정의 원형적 모습이 바로 이와 같은 폭력 유전의 핵심적 공간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서의 폭력은 어디까지나 소통, 즉 의사 교류의 유형으로써의 폭력이다. 가정에서 아들은 흔히 아버지의 권위로 상징되곤 하는 사회 질서를 준수할 것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폭력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있지 않나?'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물론 어머니는 아들을 보호하고 위안을 준다. 하지만 그 위안은 어떤 위안인가? 어떤 치유인가? 그것은 그저 일시적인 유예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위안과 치유가 아버지의 폭력이 재차 반복되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한다. 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 자식으로 해야 할 도리, 혹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참아라는 등의. 그런 식으로 어머니는 아버지 질서의 전복을 꿈구는 아들의 기를 죽여 놓는다. 일방적 폭력의 강요로 존속하는 가정의 생명을 그런 식으로 연장한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파트너인 것이다. 경찰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나쁜 경찰과 좋은 경찰로 이루어진 파트너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안과 치유는 어디에도 없다. 다른 대안도 없다. 일방적으로 강요된 방식 속에서 그저 또 하나의 아버지로 되어 버리는 것 말고는.
아들은 자신의 자아를 잃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작가가 이 소설에서 고발하는 하나의 원형으로써의 가정이 가진 진실이다. 아들의 진정한 자아와 아버지의 질서는 양립 불가다. 아버지의 복제가 되는 것 말고는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감정을 잃어버린다. 더이상 자신의 감정으로 무엇을 느껴볼 수가 없다. 이만큼 자신의 순수 자아를 상실해버렸다는 걸 잘 나타내주는 게 또 어디있을까? '재봉틀 여인'은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양립 불가능한 이유가 애초부터 가정 자체에 뿌리박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가정은 또한 사회의 일차적 사회화 기관이다. 그렇다면 사회 자체가 오로지 그 폭력적 소통 말고는 다른 방법은 모르기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소년 소녀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자아를 희생당한다. 이러한 희생을 막고 그들을 이러한 일방적 폭력으로 부터 해방할 길은 없을까? 그것이 바로 뒤이은 작품 '곤충도감'의 화두이다.
소설의 남자는 사회로부터 비밀리에 레이저로 곤충을 주입받는다. 이 곤충이 바로 소년 소녀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된, 순수 자아를 상실하게 만드는 사회 질서를 의미하고 있음은 달리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의 문제는 분리불가능성이다. 이식된 존재를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하나의 것에 오래도록 길들여지게 되면 과연 그것이 내 천성인지 아니면 단순히 길들여진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아이들도 그렇다. 일방적으로 오래도록 가치관을 주입받으면 어느 것이 진짜 자신의 판단이고 어느 것이 강제로 이식된 가치관인지 가려내기가 어렵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특별히 '아비투스'라 말했다. 사회화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이게 된 사회적 관습들이 마치 내 본성처럼 달라붙어 또 하나의 신체처럼 떼어내기 어렵게 된다는 이야기다. 아비투스가 되어버린 신체로 부터 해방되는 길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사회 관습이 켜켜이 코드화되어버린 신체 자체를 절멸시켜 버리는 것. 그 뿐이다. 폭발, 파열. 과연 이 말 그대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의 신체는 산탄총을 맞은 수박처럼 파열해 버린다.
그런데 그 상황이 흥미롭다. 하필이면 그가 파열하던 순간이 성관계를 나누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남녀 사이의 일대일 성관계야 말로 개인의 주체성이 가장 명확히 형성되는 순간이라 한다. 즉 한껏 고양된 남자의 주체성이 외부의 것으로 철저히 이식되고 변형된 아비투스적 신체를 깡그리 날려버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파열되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같이 있던 여자는 죽음이 아니라 남자가 해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두 작품에서 작가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공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의 구조적 폭력이다. 타자와의 대화,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들어설 수 없는 공간으로써의 사회. 두 작품은 그 형상을 드러낸 것과 같다. 이제 관측은 좀 더 깊은 곳을 향한다. 그 다음 작품에서 시점이 사회 자체에게로 옮겨가는 것은 작가에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소설집에는 가장 첫머리에 나오나 2010년의 작품인 '마치... 같은 이야기'는 사실은 지금 한국 사회를 그대로 드러내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오로지 실용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유법이 금지되고 오로지 직설법만 통용되는 소설 속 공간은 MB 시절 표현의 자유 침해의 대표적 사례로 떠들석했던 '쥐벽서' 사건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G20 포스터에 쥐를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형사기소까지 되어버렸던 사건을 그 그림을 그렸던 강사는 단적으로 상상력과 권력과의 싸움으로 정의내린 바 있다. 바로 이 상상력과 권력이 이루는 대항관계가 그렇지 않아도 '마치.. 같은 이야기'의 핵심이다.
상상력은 소통의 차원을, 권력은 일방적 강요의 차원을 의미한다. '재봉틀 여인'에서 드러났듯이 아버지에게 체화된 사회의 권력은 그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만 상대편이 반응하길 원한다. 그것이 권력이며 소통의 거부란 권력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는 주인공 시인이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마치'라는 비유법적 공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카페와 권력자가 움틀고 있는 직설법적 공간의 상징인 시청과의 대비적 묘사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마치'의 공간은 여러 사물들이 이리저리 뒤섞인 곳인 반면 시청은 반듯하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구획된 공간이지 않았던가? 이러한 뒤섞임이 소통을 의미하고 반듯한 구획이 권력을 의미한다는 것은 일부러 다시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작가는 '쥐벽서' 사건이 하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2010년 현재의 권력에 의한 소통 부재의 한국을 소설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뒤이은 '타자의 탄생' 역시 마찬가지다.
이 소설 또한 당시에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가져왔다. 소설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구명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는 남자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고공크레인에서 홀로 농성을 벌였던 김진숙씨를 상징하고 있다. 어떻게 달리 볼 수가 없다. 소설 속 남자가 그랬듯이 김진숙시가 그 고공크레인에 구멍에 빠진 남자처럼 갇혀 있었던 이유도 권력이 소통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마치... 같은 이야기'가 소통 부재를 가져오는 사회의 일방적 권력을 드러낸다면 '타자의 탄생'은 그 권력이 이제 어떤 비극을 낳게 되는지 보여준다. 그게 바로 구멍이다. 김진숙씨나 소설 속 남자 처럼 개인들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가두는 '구멍'이 권력에 의해 사회 곳곳에 마구 생격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구멍들이 생겨나는 것에는 어떤 이유도 정해진 규칙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권력의 필요에 따라 홀연히 생겨나서 개인을 가두고 고립시키며 밥벌이를 빼앗아 버린다. 고립과 생존 위기를 한달음에 가져오는 구멍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일방적 선택에 따라 무작위적으로 생겨나므로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 누구나 김진숙씨가, 혹은 소설 속 구멍 속에 빠진 남자가 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바로 지금이 말이다. 구멍에 빠진 남자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긴다. '구멍은 어디에나 있다'고.
보다 심층으로 내려가 만나는 사회의 진실은 바로 이것이었다. 권력이 원하면 누구나 구멍에 빠질 수 있는 곳이라는 것. 거기에는 어떤 이유도 어떤 규칙도 없어서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그 누구도 언제든 구멍에 빠질 수 있는 잠재적 희생자라는 것. 바로 이것이었다. 마치 동굴 깊숙한 곳에서 회중전등을 비춘 것과도 같이 문학이란 빛 안에서 거대한 벽화처럼 나타난 진실이었다.
그 거대한 벽화는 이제 우리의 실존을 바라보게 한다. 잠재적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를. 그러므로 뒤이은 소설들, 즉 2011년에 발표된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가 '나' 자체를 화두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 자신이 잠재적 희생자라는 사실은 무엇보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 혹은 언젠가 받게 될 위험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회로 인한 것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그게 바로 2010년에 발표된 '어떤 자장가'이다.
마치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그 일상의 묘사라든가 심리적 묘사가 세세한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정말 카프카적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카프카도 이 작품 속 여인 처럼 글을 쓰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방해가 되었던 존재인 '일상'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게 바로 '모든 일상적인 일'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카프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던 글은 쓰는 시간 동안 오로지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칠 수 있었던 글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글은 좀처럼 쓸 수 없었다. 사사건건 일상적인 일들이 글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런 글들에 대한 카프카의 혐오가 얼마나 컸던지 그는 아예 유언으로 자신이 모든 글들을 불살라버리라 할 정도였다. 그 카프카처럼 '어떤 자장가'에서의 여인도 글쓰기에 방해되는 모든 일상적인 일들을 싫어한다. 작품 속에서 방해가 되는 그러한 일상적인 일들은 특히나 그녀의 아이로 상징된다. 소설에서 여인은 종종 아이를 세탁기에 넣거나 오븐에 넣거나 냉장고에 넣어버리는 일을 반복적으로 상상하곤 하는데 이는 그녀가 얼마나 방해가 되는 일상적인 일들을 제거하고 싶은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힘겨움을 낳게 한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그건 바로 사회다. 국가다. 정부가 저출산을 우려하며 아이 낳을 것을 종용하기만 하고 정작 더욱 중요한 육아에 대한 부담은 전혀 줄여 줄 생각을 안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난한 이들은 생존이 절박한지라 일 때문에 육아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데 정부는 복지 제도 확충에 대한 소홀함으로 이마저도 부담을 나눠지려 하지 않는다. 하는 것만 보면 정부는 아이를 마치 화초나 농작물로만 생각하는 듯 하다. 그저 물이나 뿌려주고 빛만 비춰주면 대충 자라게 되는 그런 정도로만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잡초처럼?
여인의 고통은 정부의 그러한 무관심 때문이며 그녀의 신음은 아이를 기르는 엄마와 가난한 가정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오로지 일방 소통만 존재하는 정부의 구조적 폭력 때문이다. 개인이 고통과 신음에서 해방되는 길은 그러므로 단 하나다. 그 구조적 폭력을 제대로 응시하고 분쇄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뒤이은 '고의는 아니었지만'과 '조장기'이다.
'고의는 아니었지만'는 제목 그대로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 고의가 아닐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난다. 개인이 아니라 계급적으로 구분된 사회 구조 자체가 그 고통의 진짜 원인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오는 유치원 교사 F가 그리도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하필이면 계급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장기'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유치원 교사가 되고 싶은 그녀는 현재 등록금을 낼 수 없어 휴학을 하고 있는 처지이다. 그녀는 매일 하루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내몰리게 된 건 결코 그녀가 게을러서도,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노력파이고 성실하다. 하지만 국가는 폭우 피해를 받은 주인공의 가정을 구제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고 그녀는 타고난 외모 탓에 취업이 어렵다. 이렇게 그녀가 이다지도 절박한 상황에 내 몰린 건 개인의 탓이 아니었다. 진짜 원흉은 어려움을 만난 국민들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는 국가, 외모로 고용을 결정하는 것처럼 취업에 있어 부조리한 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고치려 들지 않는 정부에 있었다. 두 소설 모두에게 있어서 이런 식으로 개인의 곤경과 고통은 바로 이미 구축된 사회 구조 자체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2010년의 작품들이 '하나'의 대상으로써 사회의 모습만을 표출했다면 2011년의 작품들은 실제 사회가 어떤 식으로 곤경과 고통을 재생산하고 있는지 그 내부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와서 작가가 그 내ㅜ에서 이루어지는 구조적 폭력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것은 이전의 작품 '타자의 탄생'에서 갇혔던 남자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자기가 갇힌 이유를 헤아려보기 위함이다.
즉 구멍은 왜 만들어지는 것인가? 바로 그 이유를 추적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는 사회가 그 구멍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계급적으로 가장 약한 자들을 잡아먹기 위해서라는 걸 보여준다. 거기서 사회는 마치 공양을 받는 괴담속 괴물과 같다. 그 괴물이 강물에 던져지는 처녀들을 잡아먹음으로 존속하듯 사회도 그렇게 가장 약한 자들을 희생양삼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존재인 사회에게 구멍이란 그러므로 필수적인 존재이다. 개미핥기가 함정을 파고 그 속에 빠진 개미를 먹듯이 사회 역시 약한자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구멍이 필요한 것이다. 구멍이 그런 용도로 만들어지는 한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영원히 잠재적 희생자란 신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에서 약한 자들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며 우리는 늘 뒤쳐지거나 앞에 있거나 둘 중 하나에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뒤에서 맹렬히 달려오고 있는 매머드에게 짓밟히지 않기 위해 같은 방향으로만 뛰고 있는 원시인들과 같다. 그것도 영원히 종착지가 없는. '고의가 아니지만'에서 유치원 교사 F의 죽음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유일하게 계급적 무리를 이루지 않아서, 즉 가장 약한 존재가 되는 바람에 결국 죽임을 당한다. '조장기'의 주인공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는 스스로 열심히 살고 있으므로 절대 새들에게 쪼아 먹힐리 없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그런 노력의 보람도 없이 가장 헐벗은 처지로 몰리게 되고 그렇게 계급적으로 가장 약한 자가 된 그녀는 새들에게 살점을 뜯어먹힐 운명에 처한다. 뒤쳐지면 죽는다. 이것이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저주받은 운명이다.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는 이렇게 말한다. 그저 남들보다 좀 더 빨리 뛰는 것으로 하루의 생명을 보장받는 게 유일한 우리의 대안이라고! 외면하고 싶은가? 그럴 수 없다. 그러지 못하도록 작가는 이 모든 소설적 여정에 촘촘히 진실을 박아놓았던 것이다. 외면할 수 없도록 보이는 모든 방향에다가. 그래서 진실은 잔혹한 것이다. 시한부 생명을 선고하는 의사가 그러하듯이.
이 소설은 그 진실을 목격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난 작가가 더없이 정직하고 강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어떤 일말의 대안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혀 주지 않기에 더더욱. 이는 두 작품 모두 죽음의 묘사에서 두드러진다. 작가는 그 죽음을 묘사하는데 있어 미묘하게 해방의 순간으로도 읽힐 수 있도록 했다. 어떻게 읽으면 주인공들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밟히거나 그렇지 않거나 레이스'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이는 마치 오로지 죽음만이 이 현저한 사회의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유일한 탈출구라고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만큼 절망적이라고 말이다. 그걸 정직하게 대면하라고 한다. 피하지도 말고 핑계대지도 말고 살아가는 세상의 진실을 똑바로 보라고 말한다. 때문에 이 소설집을 읽고났을 때 섬뜩함부터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언제 어느 때 사회가 문득 내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 고의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군요. 개인적 감정은 없어요.
그냥 이제 당신이 갇힐 차례가 다가온 것일 뿐..."
진실은 이러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말자. 작가가 한 줌의 절망을 위하여 그 오랜 시간을 자맥질해 온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아마도 그 진실된 목적은 진정한 시작에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보다 제대로 된 대안의 구축은 언제나 사태의 진실을 제대로 응시했을 때라야 가능하다. 진실에 대한 정직한 응시가 보다 올바른 구원을 가져온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응시이며 때문에 보다 제대로 된 구원을 향한 그 진정한 첫발인 것이다. 예로부터 건물을 제대로 세우려면 말뚝부터 제대로 박아야 했다. 깊이 잘 박을수록 건물은 더 오래 버틴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란 쉽지가 않다. 말뚝을 깊이 박으면 박을수록 육체는 힘들고 그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이다. 이 소설집의 고통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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