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번영 - 비판적 경제 입문서
다니엘 코엔 지음, 이성재.정세은 옮김 / 글항아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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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악의 번영'을 보면서 제목만 보고는 2007위기에도 불구하고 브레이크 없이 계속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갖고 상당히 강렬한 붉은 색의 표지를 가진 책으로 들어갔다(흰색 표지를 벗기면 안쪽은 붉은 색이다.) 그런데 읽어갈수록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바를 갈피 잡기가 힘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인류의 대서사시를 들추는 것 같기도 했고 제러드 다이아몬드처럼 환경 파괴에 의한 문명 붕괴를 경고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책 본연의 목적에 맞게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 읽어보니 이 모든 걸 다룬책이란 생각이다. 그런데 저자가 좀 갈팡질팡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가 분명치 않았는데 읽으며 잡으려 했던 책의 주제를 나름대로 정리했다. 


1.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정주가 농업보다 앞선다는건 최근 연구가 밝혀낸 정설로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그래도 농업이 인류역사상 매우 중요한 혁신이었던 것은 분명한데 신석기에 일어난 이 혁명은 1년에 평균 5km정도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풍요와 저장식량의 등장으로 왕이나 귀족, 성직자, 전사 같은 게으른 계급이 등장했다. 문명은 빠르게 퍼져나가 아나톨리아의 대장장이는 기원전 3500년경 청동을 기원전 1000년경엔 철을 제작했다. 관리들은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에서 문자를 중국에선 기원전 1300 경 문자를 만들어냈다. 기원전 13-11세기 경 항아리, 투구, 방패, 갑옷등을 제작하는 청동제련법이 넓은 지역에서 실용적 기술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후 기술발전은 산업혁명이전까지 정체한다. 로마는 실용주의로 널리 알려져있지만 실상 기술발전이 매우 느렸다. 이전의 기술을 사회적으로 잘 활용했을 뿐이다. 이는 노예때문인데 기원전 225년경 60만이던 노예는 1세기 말엔 전 로마제국 인구의 무려 35%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노예는 그 수가 많아 가격도 쌌다. 노예가 일상적으로 보급되니 농촌의 소농은 붕괴되었다. 이들이 갈곳은 직업군인뿐이었고 그들이 직업군인이 되어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으로 또 다른 노예가 보급되어 다시 소농이 붕괴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결국 로마는 노동을 사회적, 지적으로 정교화하지 못한체 노예제에 끈질기게 의존함으로써 생산의 공간을 회복할수 없는 주변으로 밀려나 붕괴한다. 

 로마이후 10세기 유럽은 엉망이었다. 북부에선 바이킹, 남부와 동부에선 이슬람과, 헝가리 침략자들, 그리고 중부에서는 강도에 대한 공포로 교역이 마비된 매우 폐쇄적인 상태였다. 당시 유럽은 농촌일색에 도시가 없었다. 영주는 모든 폭력을 독점했으며 잉여생산물을 획득했는데 교역이 없어 자신이 거둔 수취물인 소고기와 와인을 소비하느라 매번 영지를 돌아다녀야했다. 

 11-13세기가 되자 농업생산성이 향상되며 중세의 준자급자족적 경제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농기구가 늘고 개량되었다. 삽, 가래, 쟁기가 철로 만들어지고 쇠스랑이 나타나고 말의 목에거난 마구와 물레방아가 확산한다. 그 결과 경작지와 인구가 모두 증가하였다. 도시는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는데 고대의 도시가 로마처럼 소비의 중심지라면 이 시기의 도시는 장인으로 가득 찬 생산의 중심지였다. 

 노동에 대한 관점도 변화했다. 노동은 과거 신이 내린 형벌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14세기 경에 이르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중대한 죄이며 정신적 수치라는 생각이 퍼져나갔다. 아직 육체노동을 멸시하긴 했지만 적어도 정신노동이라면 중시되었다. 

 유럽은 12-18세기 크게 발전하는데 이는 유럽의 지리적 요인과 관련한다. 로마제국 이후 유럽은 하나의 제국이 되지 못한다. 알프스, 피레네산맥, 영국해협은 자연적 장벽으로 새로운 유럽제국의 탄생을 방해하였고 여기에 의지한 영국, 프랑스, 스페인은 일찍이 안정되었다. 하지만 이런 장벽을 갖추지 못한 중부의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러시아등은 근대까지 내내 흔들렸다. 유럽은 유라시아의 변방으로 세계를 휩쓴 몽골의 침략에서도 무사할수 있었다. 

 11-13세기경 화폐가 발달하며 중세영주의 권력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중세 유럽의 봉신들은 영주에 공물을 바쳐야 했는데 영주는 40일간 봉신을 휘하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화폐경제발달로 조세를 현물에서 현금으로 바꾸어 납부하자 영주는 40일의 한계에서 벗어나 정규군을 보유하기 시작했다. 영주는 영국의 궁수, 스위스의 창병, 제노바의 쇠뇌사수를 고용하기 시작했으며 무기의 발달로 중세 봉건적 성격의 전쟁이 사라진다. 화포가 등장하여 영주의 성채는 단독으로 보호받기 힘들어졌으며 강한 영주가 왕이되고 영주들은 왕에 의탁할수 밖에 없게 된다. 페스트는 영주에게 날려진 또 하나의 직격탄이었다. 인구의 1/3이 절멸하여 노동의 가치는 귀해졌고 영주는 농노들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토지이탈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영주의 몰락과 잦은 전쟁으로 유럽은 폭력이 만연했다. 종교전쟁과 30년 전쟁은 그 정점이었다. 급격한 내부변화로 새로운 규제 원리가 필요해졌고 그 중 하나가 의회였다. 14세기부터 프랑스의 삼부회의, 스페인의 코르테스, 영국의 팔리아먼트가 나타났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국가의 재정적 요구에 맞서는 일을 했다. 영국은 대헌장으로 왕은 의회의 승인없이 세금인상을 할수 없게 되었고 이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 왕국의 재정을 의회의 감독아래 놓는 것은 왕국에도 결국 좋은 일이었다. 이로써 은행가들은 위험이 줄자 안심하고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영국은 낮은 이자율로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영국은 낮은 금리로 군사비를 조달할 수 있었던 반면 프랑스를 그렇지 못해 경제가 파탄나 루이 16세의 운명을 달리하게 만들었다. 

 또 다른 내부변화 원리는 국가민족이라는 새로운 정치모델이었다. 이는 도시국가와 제국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2. 산업화로 맬서스의 덫에서 벗어난 인류

 농업생산은 수확 체감의 법칙을 따른다. 그래서 산업화 이전 높은 사망률은 축복이었다. 부양인구수를 줄였기 때문이다. 멜서스의 섹계에서 노동은 큰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농업이 수확체감하기 때문이다. 실제 수렵채집인의 2시간 정도의 노동은 농업생산자의 10시간 정도 노동과 맞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면 모든건 바뀐다. 오래 인류의 덫이었던 멜서스의 세계가 끝난 것이다. 

 농업시대에 인간과 토지는 상보적이었다. 인간의 노동을 투입할수록 농업생산물은 체감했지만 토지가 공급되면 어느 정도 많아졌다. 수확체감의 근본적 문제는 토지가 노동인구의 증가에 따라 같이 증가하는게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농업은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다르다. 기계는 계속 공급이 증가할수 있었고 노동의 증가에 걸맞출수 있었다. 따라서 산업사회에서 인구의 증가는 충분히 부양이 가능하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조업은 농업과 달리 규모수익 불면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1인당 소득도 인구증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하며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물론 노동자 1인이 작동하는 기계에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제조업도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지만 기술개발이 이를 극복해낸다. 기술개발로 노동자 1인이 움직이는 기계수를 늘리거나 한 대의 기계가 노동자 1인과 생산하는 양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때문이다. 더 많아진 인구는 선순환을 낳았다. 인구가 많아질수록 더 많은 아이디어와 기술이 창조되고 소득도 늘어 소비시장도 커졌기 때문이다. 


3.풍요로운 그러나 불안한 체제

 교역이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은 역사적 거짓말이다. 1차대전은 역사상 가장 교역이 활발해 상호의존도가 가장 높아져 누구도 전쟁이 일어나면 손해를 보기에 일어나기 어렵다고 주장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교역은 오히려 전쟁을 앞당긴다. 교역으로 한 나라는 기존에 확보하기 어렵던 재화를 비축할수 있게 되고 국력이 강해져 호전적이 될 수 있다. 1차대전 당시 독일은 그러한 나라였다.

 패전후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강제로 세우게 되고 보통선거 도입과 완전비례대표등을 도입한다. 하지만 강압적 체제였기에 정당성을 얻기 어려웠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좌파와 우파에게 모두 비난받는다. 1차대전 이후 독일은 급격한 도시화로 계급이 불안정했으면서 도덕적으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귀족계급이 많은 특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종교적으로 분열되어 사회가 매우 혼란했다. 거기에 전쟁부채를 갚으로고 프랑스 벨기에 군대가 루르를 점령하고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통화를 남발해 초인플레가 발생한다.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새화폐인 렌덴마르크화를 도입해 안정되지만 기다리는건 1929년 경제위기였다. 극좌 극우정당이 세력을 얻기 시작하고 독일인들이 선택한 것은 나치였다. 

 미국에서는 1929년 10월 29일의 검은 화요일후 한달만에 주가가 무려 85% 폭락한다. 산업생산은 3년만에 절반으로 줄고, 인구의 25%가 실업상태가 된다. 자동차, 세탁기, 가구 같은 내구재 소비가 크게 감소했고 건설주문도 급감한다. 1차대전중 연합국의 식량 지원을 위해 당시 미국은 경작지가 크게 늘어난 상태였는데 경기 후퇴로 인한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해 농업종사자의 소득은 무려 70%나 감소한다. '분노의 포도'는 이런 배경하에 나온 소설이다. 1929년의 우기는 국제무역이 붕괴하지 않았다면 충격이 덜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교역은 1929년 이후 1933년까지 무려 1/3으러 줄어든다. 1929년의 위기는 사실 국제통화위기였다. 국제자본은 늘 그렇듯 취약해보이는 지역부터 자본을 거두어들였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폴란드, 독일은행이 차례로 파산했다. 영국, 프랑스 정도가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간신히 버틸수 있었다. 

 셰이의 법칙은 공급은 자기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케인스는 이 위기를 맞아 소비의 증대를 주장했다. 고용과는 무관한 소비 증가가 경제의 승수효과를 일으켜 위기를 타파한다는 것이다. 케인즈 주의를 숭상한 2차대전 이후는 자본주의 진영에서 영광의 30년이었다. 선두주자인 미국은 느리게 성장한 반면 추격자인 유럽국가들과 일본은 빠르게 성장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선진국의 수준을 따라 잡는 것은 빠른 반면 따라잡으면 이후 스스로 길을 잡아 생산력을 증가시켜야 하므로 성장이 필연적으로 느려지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 들어 OPEC의 석유가격 인상으로 위기가 찾아온다. 케인즈 주의에 의하면 경기후퇴와 인플레이션은 동시에 일어날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동시에 일어났고 케인즈주의자들은 소비를 증대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공급이었다. 단기적 유가상승과 장기적 생산성의 저하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응해 1980년대부터 금융자유화로 일컬어지는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자들이 힘을 얻기 시작한다. 그들에 의하면 모든 문제는 효율을 가로막는 정부와 복지국가였다. 이때부터 일어난 금융자유화와 신자유주의는 2007 경제위기와 지금의 빈부격차를 일으키게 된다.


4.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3가지 악

 우선 폭력이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폭력적 존재로 진화했다. 포식을 위해서 성경쟁을 위해서 그리고 농업혁명이후 집단 및 국가가 형성되면서부터는 사회문화적으로 그것이 공진화했을 것이다. 즉, 폭력인 인류역사상 늘 대비해야했고 행사해야 했던 것이다. 폭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적인 폭력과 공적인 폭력, 그리고 상상의 폭력이다. 유럽은 16-17세기 종교전쟁이라는 살육, 30년 전쟁이라는 광기이후에야 폭력이 간신히 수그러들었다. 이후 국가만이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할수 있다는 인식이 확립되었다. 19세기 들어 이런 공적폭력이 줄어들자 부부간의 폭력 같은 사적 영역에서의 폭력이 오히려 증가하였다. 남성 사이 폭력이 줄면서 여성이나 아이를 향한 폭력이 만연했다. 공적 폭력이 가정으로 이동한 것이다. 1880년대 들어서야 어린 소녀에 대한 강간, 근친상간, 미성년자 학대에 대한 고발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졌다. 

 공적 폭력과 사적 폭력이 모두 잦아 들자 상상의 폭력이 시작된다. 공적 영역은 물론 사적 영역에 다핸 폭력이 엄격이 규제되기 시작한 18-19세기 들어 유럽에서는 공포과 폭력 소설이 크게 유행한다. 이런 소설이나 매체를 통해 유럽인들은 도시에서의 범죄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위험한 계급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폭력이 줄어듬에 따라 폭력은 더더욱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폭력과 범죄를 다루는 엽기 소설을 읽는 것은 이러한 고통을 떨쳐내고 즐기기 위한 수단이되었다. 이는 현대로도 이어져 평화로운 국가일수록 공포영화와 엽기소설, 잔혹컨텐츠가 만연한다. 9.11테러는 물질적 폭력이었지만 선진세계 대부분 사람들에게 미디어로 전해진 상상의 폭력에 가깝다.

 현대 세계에 폭력의 세 가지 종류는 언제든 폭발 직전이다. 오늘날 투치족이나 보스니아인, 구자라타의 이슬람 교도에 대한 폭력은 과거 유럽 종교전쟁 수준의 폭력이다. 거기에 상호증오에 의한 국가간 합법적 폭력 가능성도 여전하다. 인도와 파키스탄, 동중국해에서의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그렇다. 미국과 중국은 또 어떤가.

 두 번째 악은 환경 파괴다. 오이스타인 달은 사회주의는 시장이 경제적 진실을 말하게 허용하지 않아 무너졌고 자본주의는 시장이 생태적 진실을 말하게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문명의 붕괴에서 네 가지 실수로 재앙이 일어난다고 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예측 못하는 실수,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못하는 실수, 문제를 인식해도 이를 해결할 의지를 천명하지 못하는 실수, 마지막은 문제해결 의지를 천명하지만 실제 실천은 하지 못하는 실수다. 인류는 이중 세 번째에 해당한다. 

 인류는 곧 90억에 달하게 되고 이는 인류가 지구로부터 갉아낼 부가 6배나 증가함을 의미한다. 18세기까지 인류는 주로 태양에너지에 의존했고, 사육하던 동물은 척추동물의 겨우 0.1%였지만 지금은 무려 95%에 달한다. 화석연료와 삼림파괴로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산업화 초기 280ppm에서 지금은 388ppm 12세기 말에는 560ppm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지구 한계를 명백히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을 어렵게 한다. 

 물도 중요한 문제다. 최근 큰 강들은 건기에 바다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수위가 급격히 줄고 있다. 갠지스, 나일강이 이미 그러하다. 만약 나일강의 수단과 에디오피아가 물 사용량을 늘린다면 이집트와의 갈등이 불보듯 뻔하다. 터키와 이라크가 건설한 댐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의 델타 삼각지대 90%를 파괴했다. 2050년까지 태어날 30억의 새로운 인구는 향후 지하수층이 무분별하게 개발된 나라에서 태어나야 한다. 중국은 물부족이 심각하다. 중국 밀의 절반, 옥수수의 1/3을 생산하는 북부평원의 지하수는 이미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 인도와 중국의 관개용지에서의 농업생산량은 과거의 7-80%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대도시들은 용수가 줄어드는 강 유역에 위치한다. 멕시코시티, 카이로, 베이징이 그렇다. 

 쓰레기의 양도 엄청나다. 성장은 산업생산성을 계속 증가시키고 이로 인해 재화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단축된다. 그 결과 제품 가격은 하락한다. 하지만 생산되는 재화량은 감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격이 낮아짐에 따라 쉽게 쓰고 버리는 경제가 성장한다. 재화의 가격이 그 재화가 일으키는 환경비용보다 낮아지게 되며 도시 밖에 쓰레기를 버리는 비용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마지막 악은 저성장과 불평등이다. 1980년대 시작한 자유화는 2차대전 이후 질서인 포디즘과 복지국가, 케인스주의를 해체하여 상호협력의 세계를 파괴했다. 포디즘에 의해 대규모로 조직된 기업들은 비효율을 이름으로 1980년대 해체되었고 많은 부분을 외주화한다. 베버리지에 의해 촉진된 복지체제도 영광의 30년 이후 성장이 둔화되며 어려움에 빠졌다. 케인즈 주의도 신자유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영광의 30년 이후 패러다임은 바뀌었지만 선진사회를 지배한 것은 저성장이었다. 저성장에서 사람들은 불행하다. 사람의 행복에서 소득은 큰 요인이다. 연구결과 소득은 행복의 절반 가량을 좌우하고 가족관계, 건강등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하지만 소득이 3배로 늘어난 시점에도 소득의 증가는 행복을 크게 증가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최상위 부유층은 상당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부를 통해 느끼는 행복은 매우 효과가 짧고 상대적임을 의미한다. 즉, 고성장사회에서 사람들은 빠르게 들어오는 소득을 통해 자신이 바라보던 계층에 다가가거나 진입했음을 느끼며 행복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저성장 사회에서는 이것이 사라지므로 소득 증가에 따른 행복을 느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즉, 소득이 늘어나는 체감 속도가 중요한 것이다.

 1980년대 주주들은 다시 주도권을 잡았다. 2차대전 이후 기준인 노동조직 유형인 노동자의 경력 관리방식, 사회정책, 노동조합은 재검토의 대상이었다. 새로운 주주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규범은 기업의 전문지식과 핵심업무에 집중하는 것이고 경영자의 보수는 이를 위해 기업의 이윤과 연동되었다. 나머지 업무는 모두 외주화하였다. 외주화 서비스 업체를 서로 경쟁을 시작했고 점차 노동자 없는 기업이 나타났으며 세계화는 이를 가속화하였다. 

 중앙은행의 규제를 받지 않는 그림자 금융체제도 탄생한다. 이들은 이미 2007위기전 전통은행체제와 비슷한 경제규모를 달성한다. 이들은 자신의 대차대조표에 등장하지 않는 전대미문의 구조화 투자회사를 만든다. 이를 통해 건정성 규제를 회피하고 은행들은 자기자본을 하나 동원하지 않고 대출을 받아 고수익 상품에 투자했다. 대출을 해주는 대신 대출을 증권화했고 모두가 본연의 업무에서 벗어나 돈이 되는 같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경제위기였다. 

 최근의 정보화는 주주자본주의와 금융자유주의에 의해 불평등을 더욱 가속화한다. 정보는 디지털코드로 즉 상징 혹은 분자의 형태를 띨때 그것을 담을 물질적 형태보다 그 내용을 구상하는데 더 많은 비용이 들게 된다. 영화나 잘만든 게임이나 소프트웨어 혹은 메타버스를 생각하면 그렇다. 이런 류들은 일단 첫 재화를 생산하고 나면 두 번째 이후를 생산하는데는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 즉, 잉여가치의 원천이 전통 자본주의처럼 노동자가 노동시간을 투입하는 것이 아닌 구상으로 이동하게 된다.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력을 가진 노동자는 더 이상 잉여가치의 원천이 아니므로 기업으로부터 착취의 도구인 노동자조차 되지 못하고 외주화의 대상정도로 전락한다. 불행히도 이는 제조업에도 적용된다. 프랑스의 르노는 1950년대만 해도 전체차량의 80%를 스스로 생산했고 관련 지원 직종도 모두 직접 고용했지만 지금은 신제품 구상과 브랜드 홍보만 한다. 20%의 차량만 직접 제작하고 나머진 외주화한다. 

 이런 인터넷, 소셜미디어, 플랫폼, 사물인터넷이 가져오는 신경제에선 노동의 가치가 이렇게 폄훼되고 과거처럼 오히려 부귀와 명성이 관심사다. 비물질적 생산은 투여된 노동 시간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게 보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이런 비물질적 생산은 규모 수익 체증의 법칙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신경제에선 진입장벽이 매우 낮음에도 생산자가 더욱 큰 시장을 장악할 수록 제품 구상에 들어간 비용을 빨리 회수하여 더큰 돈을 벌어 격차를 벌리므로 독점적이 된다. 플랫폼과 소셜 네트워크를 지배하는 아마존이나 네이버, 구글등을 보면 딱 그렇다. 누구나 그들의 시장에 진입할 수 있지만 그 거대한 선점효과를 당해낼 수 없다. 


 악의 번영을 보며 세 가지 악은 따로 노는게 아니라 모두 상호연계되어 공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저성장에 빠지고 빈부격차가 심해지며 사람들은 잠재되 있던 3가지 폭력을 더욱 쉽게 폭발시킬수 있게 되었고, 경제성장은 지구를 오염시킨다. 책의 내용은 하나의 귀결고 깔끔하게 이어지지 않아 리뷰를 작성하며 나름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보았다. 프랑스 저자의 책인데 명료함을 부족했지만 세계사의 자본주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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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8-06 16: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
8월 건강 잘 챙기세요 ^ㅅ^

닷슈 2021-08-06 21: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스콧님은 두 개 하셨더군요. ㅋ. 부럽습니다.

mini74 2021-08-06 16: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축하드립니다 *^^*

닷슈 2021-08-06 21:5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미니님도 당선 축하드려요.

그레이스 2021-08-06 17: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닷슈 2021-08-06 21:5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도 축하드려요.

초딩 2021-08-06 17: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닷슈 2021-08-06 21:5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초딩님도 축하드리고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재미나 보이는군요.

이하라 2021-08-06 18: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닷슈 2021-08-06 22:0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8-06 18: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닷슈 2021-08-06 22:0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1-08-06 20: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당선 축하드려요^^

닷슈 2021-08-06 22:00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역시 축하드리고 일본인 이야기는 저도 관심이 많은 책입니다.
 
수업 방해 - 교사와 학생이 함께 풀어 가는 행복 솔루션
한스 페터 놀팅 지음, 같이교육연구회 옮김 / 테크빌교육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교사 양성기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 다음이 어떻게 가르치냐이고 가장 마지막이 학급경영이다. 그렇다보니 교사 역시 이 세 가지 중 학급경영에 가장 어려움을 겪는다. 배운적이 없고 이론적 토대 역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학생들이 혹은 교사가 어떤 이유로든 수업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행위를 수업방해로 정의한다. 수업방해는 3종류가 있는데 능동적 수업방해, 수동적 수업방해, 학생간의 상호작용 방해다. 능동적 수업방해는 떠들거나 소리지르고 돌아다니는등의 행위고 수동적 수업방해는 수업시간에 기대되는 행동의 부족으로 준비물을 안갖고 오거나 과제를 해오지 않거나 학습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행위들이다. 학생간 상호작용 방해는 일종의 무질서 상태로 서로 적대감을 갖고 협력하지 않거나 특정인을 따돌리는 행위다. 

 이런 수업방해의 원인은 크게 3가지다. 우선 기관으로서의 학교다. 학교는 강제적 교육기관으로 학교와 교사가 정한 수업 방법과 목표가 대부분 학생의 희망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근원적으로 수업방해가 일어난다. 다음은 학생으로 학생 개개인의 성향이나 처한 상황, 사회적 구조문제들이 수업방해를 한다. 마지막은 교사의 태도로 교사가 학습을 진행함에 있어 수업을 원활히 진행하지 못하는 것이 수업방해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의외이면서도 당연하게 이 세 가지중 수업방해를 가장 크게 일으키는 원인은 교사의 태도다. 

 따라서 교사의 입장에서 수업방해를 줄이는 방법은 4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장악력과 중복 전략이다. 장악력은 학급전체를 주시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고 중복전략은 동시에 2가지 사건에 주목하는 것이다. 한 학생은 격려하면서 다른 학생은 동시에 훈육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순조롭고 탄력적인 수업진행이다. 다양한 수업활동사이의 전환, 수업지연, 집중을 방해하는 수업과 상관없는 내용의 제거, 작은 잘못에 대한 쓸데없는 설교하지 않기 등이다. 세 번째는 집단의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집단 동원력은 넓은 범위의 학생을 집중하게 하는 것이며 책임 원칙은 넓은 범위의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제어하는 것이다. 꼼꼼한 검사하기나 불시적 검사 등이 이 두가지를 올려준다. 마지막은 피로의 방지다. 학생은 신체상태에 따라 졸음이나 지루함을 느끼는데 주제를 전환할때 적절한 자극, 변화, 도전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책은 이 정도 내용을 골자로 중후반부부터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실행하는지에 대해서 꼼꼼히 서술한다. 볼만하긴 한데 앞에 서술한 것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교사라면 교육학 일반지식으로 알만한 것들이어서 좀 흥미가 떨어졌다. 수업방해라는 것을 상기한다는 면서에 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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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덧 2021년도 절반이 지나갔다. 나이가 들수록 해와 달, 하루가 단순해지고 그래서 무던하게 이것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돌아보면 긴듯 하지만 날짜를 헤아려보면 벌써란 말이 나온다. 그래서인지 한 해가 확실히 지났음을 증명하는 지표인 내 올해 나이를 제대로 말하는 것과 올해를 제대로 쓰는 것이 날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다. 어렸을 적, 젊을 땐 1월이나 2월이면 가능했지만 올해는 충격적이게도 3-4월까지 나이와 해를 잘못 헤아리고 있었다. 늙은 것일까 세월이 빨리 가는 것일까.

 상반기에는 48권의 책을 읽었다. 작년보다 줄었다. 


교육(16권) : 블렌디드, 우리반 연극 수업 어떻게 할까? 로컬이 미래다. 구글클래스룸수업, 고학년을 위한 교육 연극 수업 이야기, 구글 클래스룸 수업 레시피, 온작품을 만났다 낭독극이 피었다. 사시사철생태놀이, 교육자치시대의 인사제도혁신, AI 교육혁명, 최고의 교실, 블렌디드 러닝 온라인 수업도구 싹스리, 잠자는 거인을 깨워라, 학습자주도성 미래교육의 거대한 착각, 학교자치스쿨퍼실리테이션, 수업방해


예술건축(8권) : 1페이지 미술365,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공간 혁신, 학교공간 이렇게 바꿨어요, 우리가 학교를 바꿨어요. 함께 만드는 학교 공간 이야기, 클림트,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뭉크


경영투자(1권) : 나는 배당투자로 한달에 두번 월급을 받는다.


경제(1권) : 부의 대이동


과학(7권) : 진화심리학 핸드북 1-2권, 유감스러운 생물 수컷, 울트라 소셜, 바디, 공감의 배신, 노화의 종말


역사(6권) : 가루 전쟁, 인삼의 세계사, 12전환점으로 본 제2차 세계대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동남중국해 힘과 힘이 맞서다, 한중일의 갈림길 나가사키


인문(5권) : 나는 말하듯이 쓴다. 아리스토텔레스, 작가수업, 청춘의 독서,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문학(1권) : 니클의 소년들


지리(2권) : 풍운의 도시 난징, 각자 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사회(2권) : 인구의 힘, 갈등도시


10. 로컬이 미래다

교육의 흐름은 보편성에서 다양성 개별성으로 흐르고 있다. 이 중 다양성과 개별성과 관련하여 지역교육과정을 꼽을 수 있으며 그것을 다룬 마을교육공동체에 관련한 책이다. 교사와 학교의 전문성 그리고 더불어 지역과 도시의 양극화를 모두 해결할 유일한 방안이 아닐듯 싶다. 그래야 지역이 살아남고 지역에 직장이 생겨나며 지역을 살릴 인재도 교육을 통해 지역 맞춤으로 양성이 가능하다.



9. 풍운의 도시 난징

도시 아카이브 시리지의 첫 권으로 베이징을 지은 작가 신경란이 쓴 책이다. 저자가 중국에 오래 머문 만큼 전문적 식견이 느껴지는 책이다. 난징 역시 베이징처럼 중국의 여러 왕조가 수도로 삼은 도시이며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고려시대 원의 요청으로 최영이 고려군을 이끌고 원정을 갔던 지역이다. 현대사에 이르면 태평천국군운동, 난징대학살이 일어나며 딤성이 유래한 도시다. 



8. 바디

인간에 대해 알려진 거의 모든 것을 서술한 책이다. 정말 거의 모든 것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빌 브라이슨과 그의 책이다. 뼈, 감각, 피부, 기관, 미생물에 이르는 인체에 여러가기 과학적 서술이 잘 드러나있으며 놀랍게도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인체의 여러 부분도 많이 나타난다. 인간이라면 물질적 자기 이해를 위해 읽어야 한다고 본다.



7. 갈등도시

대서울(서울과 서울의 영향을 받는 인근지역, 혹은 과거 서울거주자가 머무는 서울 인근지역)에 대한 문헌학자 김시덕의 책이다. 서울은 많은 변화를 겪은 지역으로 조선의 한양, 일제의 경성, 대한민국의 서울, 그리고 서울 토박이와 문중세력, 도시화 이후 과거에서 올라와 살게된 세력, 그리고 개발이익을 위해 들어온 세력등 이런 지리적 인구적 변화가 중첩적으로 복잡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으로 서울엔 수많은 갈등이 지속되고 개발의 이름으로 과거의 흔적은 좀 처럼 보존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런걸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드러내고 사진으로 남기며 의미를 부여한다. 정말 의미있는 작업이다. 서울이 고향이면서도 고향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남겨지는 것이 없이 꾸준히 변화하며 무엇보다도 이런 복잡성으로 정체성 자체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6. 다시 보는 5만년의 역사

내가 전형적으로 좋아하는 지금의 우리가 있기 까지의 삶은 엮은 책이다. 비슷한 류의 책을 가끔 보아서 큰 감흥은 없었지만 군데군데 모르는 틈을 채워넣기엔 매우 적합했다. 아리아인이 페르시아와 인도로 향하면서 서로의 신앙이 갈라진 점이나 불교가 대승과 소승으로 갈라진 점에 대한 설명이 재밌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문화가 온대가 아닌 열대에서 발생했으며 그로 인해 다루기 불가능한 물에 대한 의존으로 문명이 자주 흥망성쇠하고 지속성이 있을 수 없다는 점도 괜찮은 통찰이었다.

현대가 좀 약한게 이 책의 약점.


5.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병자호란은 한국의 전쟁사에서 가장 크고 어이없게 무너진 전쟁이었다. 아픈 전쟁이다 보니 조명이 잘 안되었는데 저자는 당시 사료를 바탕으로 무려 30만까지 뻥튀기 되는 청의 병력을 3-4만 수준으로 잘 정리하고 당시 조선의 방어전략과 청의 공격전략의 비교를 통해 조선이 쉽게 무너질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잘 설명한다. 그리고 청이 우위에 있음에도 다소 조선에 유리한 조선으로 빠르게 퇴각한 이유로 천연두를 들었다. 그럴듯 하다.


4. 공감의 배신

최근 대세인 공감의 도덕을 비판하고 대안으로 다시 이성에 의한 도덕을 제시한다. 공감을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분류하고 이중 다른 사람의 고통에 이입하는 정서적 공감을 비판한다. 정서적 공감은 공감자를 우울하게 만들고 정신적으로 파괴하며 무엇보다도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여 사회적 효율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저자는 이성적 도덕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한다. 이타성 중심의 공감 도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좋았는데 이성에 대한 도덕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이성도덕에 대한 연구도 정작 잘 보여주지 못하는게 역시 책의 약점이다. 


3. 12전환점으로 본 세계 제2차대전

2차대전의 12중요 전환점을 짚어낸 책이다. 2차대전은 유럽전선 영국과 특히, 소련의 저항과 전과, 희생이 가장 결정적이었음에도 미국중심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 책을 보며 프랑스가 전력이 강했음에도 쉽게 무너진 이유, 나치의 영국 공습이 실패한 이유와 그래서 도입한 유보트 작전, 소련의 반격과 희생, 미국의 태평양전쟁등에 대해 매우 잘 알 수 있다. 



2. 노화의 종말

인간에겐 두 가지 유전자가 있다. 환경이 좋지 않을 때 번식을 멈추는 관리자, 그리고 번식을 멈추는 유전자를 끄고 켜는 역할과 동시에 유전자를 수선하는 유전자다. 인간의 노화는 사실 이 중 두번째 유전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일어난다. 스트레스와 음식, 여러가지 요인으로 수선이 잦아지며 생존에 집중하는 유전기능이 멈추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요인으로 각 신체부위가 기능을 상실해가는 것이 노화이며 어느 한곳이 완전 멈추어 총체적 기능 상실로 이어지는게 죽음이다. 따라서 책은 생존회로의 가동을 위해 열량제한, 육식제한, 강도 높은 운동과 같은 적절한 스트레스, 그리고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메트로포민이나 NMN, 레스베라트롤등의 복용을 권장한다.


1. 진화심리학 핸드북1-2권 세트

 인간 심리 진화의 모든 것을 총망라했다. 음식의 섭취, 면역, 길찾기, 풍경, 사냥에 대한 심리와, 위험회피, 다른 인간의 위협에 대한 적응, 성경쟁, 신체매력, 부모의 양육투자, 가족제도, 겨루기 경쟁등을 1권에서 다룬다. 2권에서는 사회문화에 초점을 맞춰 공공정책, 지배와 종속, 평판, 의례, 인지편향, 종교, 정치에 대해서 다룬다. 각 책이 1천 페이지가 넘어 읽기 쉽지 않지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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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6-30 14: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벌써 6월의 마지막날. 정말 부지런히 읽으신건 같은데요 *^** 축하드립니다 ~~

닷슈 2021-06-30 16:35   좋아요 2 | URL
50권 이상이 목푠데 좀 아쉽습니다. 감사합니다.

붕붕툐툐 2021-06-30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시는군요!! 상반기 넘 잘하셨어요! 후반기도 달려보아요^^

닷슈 2021-07-01 09: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교육을 너무 많이보고 문학을 너무 안봤네요
 
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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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뭉크하면 역시 절규가 떠오른다. 하지만 뭉크가 노르웨이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절규의 판본이 여러개라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것 같다. 그리고 이 절규는 소더비 미술품 경매에서 1억 1992만 달러에 팔려 당시론 최고가였다. 뭉크의 작품은 도난에도 많이 시달렸는데 작품 대부분이 오슬로 시 소유고, 살아생전 주목 받던 것에 비해 다시 조명받는데 시간이 좀 걸렸기 때문이다.

 뭉크가 태어난 노르웨이는 겨울은 무척 어둡고 춥고 눈으로 뒤덮여 흑과 백의 무채색풍경이다. 하지만 여름은 짧고 강렬하며 온 세상의 것들이 에너지가 넘친다. 이런 극단적 계절변화 그리고 어려서부터 뒤틀린 그의 감정은 강렬한 색채의 그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뭉크는 다섯살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어린시절 쭉 같이 놀던 누이가 뭉크가 13세때 역시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뭉크의 아버지는 종교에 매달려 안그래도 힘든 뭉크의 유년을 옥죄였다. 어린시절 그는 매우 병약해 천식에 류마티스성 고열을 앓았고 이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어 가정학습을 하는 바람에 친구하나 없었다. 더군다나 뭉크의 집안은 가난하지만 유명한 집안인지라 노동자계층의 거주지에 살면서도 부르주아라서 이웃과의 친분 및 교류도 없었다. 

 그런 뭉크가 세상에 나온건 20살이 다되어서였다. 아버진 뭉크를 1880년 크리스티아니아 공학대학에 보내지만 뭉크는 1년만에 그만두고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뭉크는 1884년 화가 프리츠 타우로브가 운영하는 야외 아카데미에 참석해 타우로브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경제적 지원을 얻고 선진미술을 보고 올 수 있게 된다. 1885년 뭉크는 만국박람회를 경험하고 선진미술체험을 통해, 예술적으로 성장하고 자유롭고 다채로운 붓질을 시도하며 노르웨이 화단의 지배적인 화풍인 인상주의와 사실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1885년에서 1927년까지 무려 40년의 기간 동안 뭉크는 '아픈 아이' 그림을 반복해서 그린다. 여러버전의 판화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이 작품의 모티브를 아무래도 누이 소피의 죽음이다. 뭉크는 그 죽음의 충격을 도달하고픈 예술의 경지까지 계속 끌어올린듯 하다. 뭉크는 먼친척뻘인 다그니 율을 만나게 되는데 뭉크는 남자들이 한 아름다운 여인을 향해 무수한 손을 뻗는 작품인 '손들' 그리고 '마돈나'를 율을 모델라 그려낸다. 뭉크의 마돈나는 기존의 성모마리아의 성스러운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 관능적이면서도 붉은 아우라를 표현해, 성스러우면서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성모를 표현한다. 마돈나의 석판 버전엔 정자와 태아가 그려진 프레임이 있는 것도 특징이다. 

 다르니 율 이후 뭉크는 여인 툴라와 약혼하지만 그녀의 결혼 요구에 지쳐 뭉크는 지쳐간다. 둘은 싸우다 뭉크의 실수로 총이 격발되어 뭉크는 왼손을 다치게 된다. 주손이 아니었지만 이후 뭉크는 특유의 신경증으로 다시는 그림을 못그리게 될 거라는 강박에 시달린다. 이 소동으로 그리 집착하던 툴라가 떠나가 황당한 나머지 뭉크는 신경증이 더욱 심해진다. 

 뭉크는 고향 노르웨이에선 신진화가로 크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독일에선 꽃을 피운다. 당시 독일은 철학과 문학에선 독보적이었지만 예술분야에선 이렇다할 인재가 없었다. 1871년 이후 통일과 산업혁명으로 인구가 급성장하며 사회 분위기가 역동적으로 바뀌며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는 분위기였다. 뭉크는 이런 분위기에서 베를린 화가 협회의 상설 전시장인 빌헬름 거리의 건축가의 집에서 첫 독일 전시회를 개최한다. 하지만 보수적이던 베를린 화가 협회장 안톤 폰 베르너는 뭉크를 맹 비난했고, 프랑스에 적대적이던 당시 분위기도 뭉크의 인상주의적 그림에 좋지 못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악명도 유명세인지라 뭉크는 이일로 독일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뭉크는 돈을 벌기 위해 직접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만 금전적으로 크게 이득을 얻진 못한다. 하지만 더욱 유명해져, 덴마크 코펜하겐, 독일 블레슬라우, 드레스덴, 뮌헨에서 전시회 요청이 쇄도한다. 당시 30대의 뭉크는 베를린 중심거리인 운터 덴 린덴에서 전시회를 하며 처음으로 그림 5점을 엮어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당시만 해도 연작에 대한 개념은 없던 시절이어서 이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뭉크는 베를린에서 스칸디나비아 출신들이 주로 모이던 검은 새끼 돼지 주점을 자주 찾는다. 입구에 걸린 아르메니아산 와인 주머니가 검은 새끼 돼지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뭉크는 화가임에도 회화보다는 문학에 많이 심취해 있었고 실제로 많은 글을 남기기도 한다. 검은 새끼 돼지의 멤버들은 문학과 예술과 연관하여 새로운 사상, 상징주의와 데가당트미학, 최신의 과학적 발견, 이국적인 방식이나 현상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럼에도 뭉크는 이들 일파가 과도하게 급진적이거나 퇴폐적으로 흐르면 다소 거리를 두어 인근의 카페 바우어를 찾곤 했다. 검은 새끼 돼지들의 멤버가 하나둘 떠나가며 쇠퇴하자 뭉크는 1896년 파리로 이동한다. 

 파리유학에서 뭉크는 그림은 살아 숨쉬고, 느끼고, 아파하며, 사랑하고,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야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뭉크는 '사랑' 연작처럼 그림 개개보다는 이들을 함께 묶어서 본다면 주제 전달을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1918년 10월 뭉크는 블롬크비스트 갤러리에서 회화 30점, 약 70점의 스케치와 수채화를 포함한 인생역작인 '생의 프리즈'를 선보이게 된다. 프리즈는 건물 내부나 와부의 벽 윗부분의 그림이나 부조조각이 일렬로 연결된 띠 모양의 장식이다. 생의 프리즈는 작품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 전시되느냐에 따라 변화되고 조정될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뭉크 시기 화가는 그림에 담을 모티브나, 주제, 화풍만을 고민했지 그림을 어떻게 보여주고 전시할 것인지에 대한 고려는 없는 시기였다. 뭉크는 전시기획과 디자인을 고민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던 셈이다. 

 1930년대 뭉크는 오른쪽 눈 혈관이 터지는 병에 걸려 한동안 거의 실명상태로 지내게 된다. 1939년 2차대전이 터지자 나치의 노르웨이 침공이 예상되었지만 피신할 생각을 하지 않던 뭉크는 나치지배하에서 농수산부의 명령으로 농사를 짓게 된다. 뭉크는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감을 맛본다. 그리고 일전 나치가 자신의 그림을 퇴폐 미술전에서 전시한 것을 경험했던 지라 자신의 모든 그림들이 처분될 것을 우려하게 된다. 뭉크는 1940년 자신의 작품을 모두 오슬로시에 기부하게 된다. 그리고 1944년 나치의 패망을 목격하지 못하고 80세로 사망한다. 

 뭉크의 그림을 보면 같은 주제를 여러번 다르게 그려내며 분위기를 다르게 하고 좀더 완성시키려고 하는 노력에서 경지에 다가가려 했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연작의 개념도 재미있고 실제로 생의 프리즈는 매번 다르게 전시된다. 당시의 생의 프리즈와 지금의 생의 프리즈 전시는 구성이 다르다. 거기에 노르웨이의 변화무쌍한 자연이 준 강렬한 색감과 표현,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으로 평생 지속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알고 싶은 마음, 그리고 풀리지 않는 여성 관계는 그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된다. 절규 이외에도 뭉크의 많은 작품을 알 수 있어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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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의 갈림길, 나가사키 지성인들의 도시 아카이브 2
서현섭 지음 / 보고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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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카시 하면 짬뽕과 원폭이 떠오른다. 상당히 상반된 이미지인데 실제 나가사키 역사도 그렇다. 나가사키는 일본 큐슈의 서남쪽에 있는 도시로 지리적으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류쿠, 동남아시아 쪽을 향하고 있다. 자연히 일본 교역과 무역의 중심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지역이다. 상하이까지는 850km 부산까지는 49.5km 거리다. 인구는 140만정도인데 면적이나 인구 모두 일본 전체의 1%정도에 해당한다. 다만 평지가 적고 해안선은 무척 길다. 


1. 나카사키의 교역 

나가사키를 처음 찾은 서양인들은 대항해시대를 가장 먼저 연 포르투갈인이다. 나가사키 북서쪽에는 히라도라는 섬이 있는데 14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본거지였다. 그러던 것을 15세기 포르투갈이 먼저 들어와 1561년 히라도에 상관을 개설한다. 포르투갈은 1543년 조총을 전수하고 상관을 설치하여 히라도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활발히 교역한다. 하지만 막부는 카톨릭 포교 행위를 침략 전단계 행위로 인지하고 금교정책을 강화한다. 이에 따라 1624년 스페인선의 내항이 금지되고 상관도 폐쇄된다. 포르투갈 역시 기항지가 나가사키로 병합되고 더 좁혀져 1634년 신축한 인공섬 데지마로 축소된다. 1639년엔 포르투갈의 내항도 금지되는데 그들의 뒤를 이은게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 스페인과 경쟁하며 막부측에 카톨릭의 포교와 침략을 이야기하였고 이것이 먹힌 셈이다. 

 1609년 막부는 동인도회사에 네덜란드 배는 일본의 어느 항구에도 입항해도 좋다는 허가장을 발부한다. 히라도 상관이 개설되고 네덜란드는 여기서 식량을 얻고 일본 용병을 동남아로 송출하기 까지 한다. 막부는 나가사키유력 상인 25명에게 공사비를 각출하여 부채꼴 모양의 데지마를 조성하였는데 네덜란드 만큼은 종파적으로 무해하고(신교이다) 통상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 특혜 대우하였다. 데지마의 연간임대료는 포르투갈은 은80관에 달했는데 네덜란드는 55관으로 매우 저렴했다. 막부는 데지마 상관에 가족단위의 이주를 불허하여 상관장인 카피탄을 비롯해 회계, 상주원, 창고관리원등이 모두 남자였다. 데지마 상관의 책임자인 카피탄은 에도산푸라 하여 에도를 방문해 쇼군을 알현하는 특혜가 있었다. 그들은 무역허가의 대가로 예물을 헌상했는데 의외로 안경이 매우 인기였다고 한다. 

 1642년 나가사키 일대에 흩어진 유곽을 정리하여 현재의 마루야마로 이전한다. 에도 막부시대에는 에도의 요사와라, 교토의 시마바라, 나가사키의 마루야마가 일본의 3대 유곽이었다. 나가사키 마루야마의 명성은 전국적이었는데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유일한 유곽인데다가 쇼군의 직할령인 나가사키출신만 그 적을 올릴수 있어서 였다. 1690년 마루야마의 황금기에는 유녀수가 무려 1443명이었고 네덜란드인을 상대로는 그 가격을 일본인, 중국인보다 3배를 더 받았다. 유녀들은 데지마로 출장 및 체류가 가능했으며 임신하게 되면 사내아이는 중절하게 여자아이인 경우는 출산했다. 다만 막부의 쇄국령이 본격화한 1636년에는 혼혈아와 서양인 첩 유녀들이 모두 마카오와 자카르타로 추방된다.

 나가사키는 서양인들의 무대였던 것 같지만 사실 17세기만 해도 중국인이 주인공이였다. 당대 최구의 경제대국과의 교역이고 지리적으로 인접하다보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1562년 중국상선이 나가사키에 최초 내항하는데 임진년 이후 갈등으로 10년간 교역이 중단된다. 1610년 중국인 선주 주성여가 막부로붜 거래허가서인 슈인장을 받아 일본각지에서 무역을 하고 1639년 포르투갈의 내항이 금지된 후에는 중국상선이 사실상 나가사키 경제를 좌우하게 된다. 1688년이면 나가사키 입항 중국배는 무려 200척에 달했고 인구 5-6만 나가사키인중 1만 가량이 활보하는 중국인이었다. 중국인이 크게 늘어나며 자연 문제도 생겨나 이들을 수용할 도진야시키가 생겨난다. 1689년 건설했으며 수가 많은 만큼 9400평으로 데지마의 두배크기였다. 1732년이면 도진야시키 방문 유녀가 2만 4644명에 달한다. 중국에 대한 교역은 일본 당국이 향후 의도적으로 줄이는데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생사를 주로 수입하고 금과 은을 수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16세기 초반 조선으로부터 회련법을 배워 순도 높은 은을 전세계로 많이 수출했지만 이즈음이면 크게 고갈되어 국내 통화로 사용할 양의 확보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2. 나가사키에 퍼진 난학과 문화

1774년 타헤르 아나토미아라는 네덜란드 해부학서가 해체신서라는 이름으로 번역된다. 일본최초의 서양의학서인데 이 때 한의학에는 없는 신경, 연골, 동맥, 처녀막등의 단어가 생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 난학이 퍼지니 당연히 외국어에 대한 학습 필요성이 생겨났는ㄴ데 그래서 사전이 편찬된다. 포르투갈어 사전은 직즉 있었지만 네덜란드어 사전은 네덜란드가 일본에 미친 영향에 비해 매우 늦게 편찬되었는데 1854년에 이르러서야 사전 루프 하루마가 출현한다. 1808년 페이튼 호 사건으로 일본은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영어공부에도 매진하게 된다.

 스페인 포르투갈 선교사는 16세기말 나가사키에 남만과자 카스텔라를 전파한다. 설탕, 밀가루, 계란을 혼합한 카스텔라는 처음엔 쇼군이나 상위층만 즐기는 귀중품이었지만 에도시대 중엽엔 서민들도 즐길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정작 포르투갈엔 카스텔라라는 빵이 없는데 포르투갈인들이 스페인 카스텔라 지역의 빵이라는 표현을 일본인들이 카스텔라로 오해해 명명된듯 하다. 1624년 개업한 후쿠사야가 나가사티 카스텔라의 원조 가게다.

 덴푸라도 카톨릭신자들에게서 전파되었다. 카톨릭 신자들은 사순절에 부활절을 앞두고 단식, 절식, 육식을 금하는데 생선 프라이는 가능했다. 이 생선 튀김이 콰르투 템포라스이고 이것이 덴푸라로 변형된다. 이전에 일본엔 튀김요리가 없었지만 아무 생선이나 저렴하고 가볍에 튀겨 즐길수 있어 인기가 상당해졌다. 

 네덜란드 의사 지볼트는 일본 의학의 선구자다. 그는 군의관 자격으로 나가사키에 도착해 데지마 상관에서 매주 3회 서양의학, 과학을 배우고자 하는 통역들과 의사들을 가르쳤다. 강의와 실습을 병행하고 천연두 백신 접종, 백내장수술등을 시연했다. 지볼트는 훌륭한 식물표본, 논문 작성자에게 전문서나 현미경을 선물했고, 과정을 마친 학생에겐 네덜란드어로 작성한 서양의학 수료증을 수여했다. 당대엔 최고 권위의 의사면허인 셈이었다. 지볼트는 일본 최초의 의료사숙 나루타키주쿠를 개설하고 주1회 강의와 시술을 하여 천하의 영재가 몰려들었다. 놀랍게도 수강료와 진료비가 없었으며 가난한 자에겐 식사까지 무료제공하였다. 안과, 산부인과, 의과등 여러분야의 의사, 천문학자 150명이 배출되어 일본 전역에 선진 의료기술과 과학지식이 전파되었다. 지볼트는 일본에 있으면서 입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 일본식물지, 일본동물지를 출간하여 유럽에서 일본 권위자로 명성을 얻기도 한다. 


3.기리시탄

 일본 카톨릭과 그 신자를 일본에선 기리시탄이라 한다. 1549년 동방의 사도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상륙한 것이 카톨릭의 첫 일본 전래이다. 일본에 온 선교사들은 곧 일본인이 영주에 절대 충성함을 알게되고 타겟을 영주로 바꾸게 된다. 이에 1563년 나가사키와 시가의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가 개종하게 되고 지역을 예수회에 기진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다른 영주의 침략을 방어하고 무역 관세 수입을 얻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실제 일본의 다른 영주들은 외세와의 교역에만 관심이 있었지 기리시탄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다노부나가는 경쟁세력인 불교세력을 탄압하고자 기리시탄을 공인하였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히데요시는 처음엔 기리시탄에 관용적이었지만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다. 하지만 그때만해도 남만 무역은 장려되었고, 포교도 어느 정도 묵인하에 이루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열자 1605년 20만, 1615년 50만의 기리시탄 신자가 생겨난다. 기리시탄의 교리는 주종관계와 상하질서를 거부하고 할복과 일부다처제를 부인해 일본 지배층의 질서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막부는 평등사상으로 인한 민중봉기 및 일부 경제적 이득을 노린 영주와 기리시틴 세력과의 결탁 가능성으로 인해 1614년에 금교령을 내리고 1635년까지 30만이 순교한다. 기리시탄의 시련은 1893년 금교령이 해제되고서야 풀린다. 

 1637년 나가사키 인근 시마바라에서 난이 일어난다. 시마바라와 아사쿠사에서 영주의 학정과 카톨릭 신교에 대한 박해에 항거한 반란으로 농민과 카톨릭 주축이었다. 사마바라, 아사쿠사는 기리시탄 다이묘인 아리마씨와 고니시씨의 영지로 주민 대다수가 카톨릭이었다. 하지만 기리시탄 임산부 고문치사 사건과 건축세, 선반세, 창문세, 출산세등 영주의 학정으로 백성들이 무장봉기한다. 막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규슈전 지역의 번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네덜란드 히라도 상관까지 지원을 요청해 그들에게 반란군을 향해 포격하게 한다. 막부는 10만 병력으로 하라성을 점령해 3만 반군을 모두 학살한다. 이후 막부는 네덜란드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게되고 반란을 야기한 시마바라 영주와 아사쿠사 영주를 처벌한다. 시마바라 영주 가쓰이에는 막부역사상 유일하게 할복자살이 아닌 참수를 당한다.  

 2010년 나가사키 나카마치 성당에서 이문희 대주교와 나가사키 대교구장 다카미 미쓰아키 대주교가 성로렌조 성당 설립 4백주년 공동 미사를 집전했다. 성로렌조 성당은 임진왜란때 큐수로 끌려온 조선인이 1610년 세운 성당이다. 당시 조선인 무려 1300이 세례를 받고 나가사키에 스페인 순교자 로렌조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하는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1614년 막부의 포교금지령으로 성당이 4년만에 파괴되고 만다.


4. 개항

 도쿠가와 막부는 개국 이후 해상 방어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2척의 군함을 발주한다. 1855년 이 군함을 운용할 해군 양성을 위해 나가사키 해군전습소가 개설된다. 네덜란드의 빌렘3세는 증기선 솜빙호를 쇼군에 증정하고 일본은 이를 관광호로 개명하요 해군전용전습소로 사용한다. 1857년에도에 쓰키지군함조련소가 신설되며 해군전습소는 사라진다.

 일본의 에노모토는 일본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데 그는 유학하여 피셸링 교수에게 해상국제법을 익히고 이를 일일히 번역하여 만국해율전서라는 제목으로 제본한다. 그는 프랑스, 영국을 방문하여 제철소, 병기공장을 시찰하고 1864년 발발한 덴마크, 프로에센, 오스트리아 전쟁도 참관한다. 귀국후 막부의 해군 부총재가 되지만 막부와 유신정부간의 보신전쟁에서 패해 8대의 함대로 탈출하여 홋카이도의 하코다테를 점령하여 3천병사와 항전한다. 전세가 기울자 에노모토는 적장 구로다에 만군해율전서를 맡기고 이를 본 구로다는 에노모트의 깊은 식견과 해상법에 대한 전문성에 감탄한다. 결국 에노모토는 3년간 복역 후 특사로 풀려나 1874년 주 러시아 공사가 된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을 하고 조선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권력 정치의 감각을 익힌 하나부사 요시모토를 조선으로 전출할 것을 건의한다. 

 글로버는 영국인으로 일본에 글로버 상회를 설립한다. 일본에 차수출을 하는 한 편, 사쓰마번, 조슈번의 요청으로 화약, 총기류, 함선류등을 상하이에서 수입을 주선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죽음의 상인이란 별칭도 얻는다. 글로버는 1865년 나가사키 오구라 해안에 일본최초의 철도를 부설하고 상하이에서 수입한 증기기관차1대를 주행하여 주목을 받는다. 글로버의 개항기 역할을 독보적이어서 일본 최초의 선박수리소, 다카시마 탄광 개설 자원, 일본 최초의 등대건설, 일본 최초의 조폐기 수입을 그가 수행한다. 글로버는 일본 개화기 중요인사들의 해외 유학을 도왔으며 막부의 붕괴를 예감하고 반군쪽을 지원한다. 다만 1868년 도마 후시미 전투에서 글로버는 반군에 최신 철포와 화기를 팔았는데 내전의 후유증으로 메이지정부로부터 1년간 대금을 받지 못해 상회가 파산하고 만다. 글로버는 파산후에 미쓰비시의 지원으로 부사장 역할을 하였고 1885년 일본 맥주제조회사를 설립하는데 이게 지금의 기린 맥주다. 글로버는 1908년 메이지 유신에 대한 기여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급 훈장을 수여하게 된다. 

 한편 이시기 나가사키에는 중국 푸저우 출신의 가난한 유학생이 다수였다. 중국인 크리스천 천핑순이 값이 싸면서도 푸짐한 영양만점의 중국식 우동을 개발하였고 이것이 짬뽕의 시작이 되었다. 짬뽕은 모든 것을 섞었다는 뜻과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샤뽕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짬뽕 면은 밀면에 탄산나트륨이 주성분인 도아쿠를 섞어 먼들며 이로 인해 밀면이 잘 변질되지 않고 짬뽕면 특유의 맛을 내게 된다. 


5.원폭과 평화

 원래 2차대전 중 제2원폭 목표지는 후쿠오카현의 고쿠라였다. 하지만 구름과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로 방향을 선회해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하한다. 24만 시민 중 7만 4천이 죽고, 7만 5천이 부상당했으며 2만 7천 조선인중 1만이 사망한다. 나가사키에는 조선소에서 전함과 어뢰를 제작하였는데 이 때문에 폭격의 타겟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88년 나가사키 시의회에서 공산당 시마타 보쿠의원과 모로시마 히로시 시장의 질의 응답중 시장이 천황이 전쟁중지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오키나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참극이 있었다고 발언하였다. 지방의 일이었지만 이것이 석간신문과 TV 뉴스에 방영되어 항의가 빗발한다. 하지만 건강한 시민사회세력도 있어 시장은 지지서명도 일일 1만 4천을 얻고 최종적으로는 38만명의 지지서명을 받기도 한다. 한편 우익단체는 시장을 위협하였는데 1990년 다지리 가즈미가 시장에게 총격을 가한다. 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모토시마 시장은 살아남는다.

 그는 사회적 약자인 재일 조선인, 중국인에 큰 관심을 가졌고, 조선인 원폭 위령비도 평화 공원 밖에 있던 것을 1979년 공원안으로 이전한다. 

 오카마사하루는 목사이자 나가사키 의원이고 나가사키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운영했다. 그는 일본 정부의 가해자 배상책임 문제를 거론하고 조선인 원폭 피해실태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원폭과 조선인 전 6집을 간행한다. 1979년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건립하였고 하시마에서 1925년에서 1945년 사이 사망한 조선인 1222명에 대한 사망진단서를 찾아내 이들 대부분이 위험한 작업장에 배치되어 압사, 질식사, 폭사했음을 밝혀 이를 원폭과 조선인 4집에 기록했다. 마사하루 목사는 말년에 일본 가해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재일 한국인 차별 철폐, 정부 보상 실현을 위한 자료관 설립에 심혈을 기울이다 사망한다. 

 군함도에서는 조선인이 1939년부터 집단 연행되었는데 조선인은 지하 1천미터 이상 온도 40도 이상의 환경에서 근무하였다. 군함도에서는 1925년에서 1945년까지 1295명이 사망하였는데 일본인은 겨우 58명 조선인 1222명 중국인 포로 15명이었다. 

 전후 조선인 징용공 200명은 귀향선을 타고 조선으로 향했는데 태풍으로 배가 긴급회항하다 나가사키 해안의 계보단이 이를 막아 난파되어 무려 160명이 수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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