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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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뭉크하면 역시 절규가 떠오른다. 하지만 뭉크가 노르웨이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절규의 판본이 여러개라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것 같다. 그리고 이 절규는 소더비 미술품 경매에서 1억 1992만 달러에 팔려 당시론 최고가였다. 뭉크의 작품은 도난에도 많이 시달렸는데 작품 대부분이 오슬로 시 소유고, 살아생전 주목 받던 것에 비해 다시 조명받는데 시간이 좀 걸렸기 때문이다.

 뭉크가 태어난 노르웨이는 겨울은 무척 어둡고 춥고 눈으로 뒤덮여 흑과 백의 무채색풍경이다. 하지만 여름은 짧고 강렬하며 온 세상의 것들이 에너지가 넘친다. 이런 극단적 계절변화 그리고 어려서부터 뒤틀린 그의 감정은 강렬한 색채의 그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뭉크는 다섯살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어린시절 쭉 같이 놀던 누이가 뭉크가 13세때 역시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뭉크의 아버지는 종교에 매달려 안그래도 힘든 뭉크의 유년을 옥죄였다. 어린시절 그는 매우 병약해 천식에 류마티스성 고열을 앓았고 이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어 가정학습을 하는 바람에 친구하나 없었다. 더군다나 뭉크의 집안은 가난하지만 유명한 집안인지라 노동자계층의 거주지에 살면서도 부르주아라서 이웃과의 친분 및 교류도 없었다. 

 그런 뭉크가 세상에 나온건 20살이 다되어서였다. 아버진 뭉크를 1880년 크리스티아니아 공학대학에 보내지만 뭉크는 1년만에 그만두고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뭉크는 1884년 화가 프리츠 타우로브가 운영하는 야외 아카데미에 참석해 타우로브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경제적 지원을 얻고 선진미술을 보고 올 수 있게 된다. 1885년 뭉크는 만국박람회를 경험하고 선진미술체험을 통해, 예술적으로 성장하고 자유롭고 다채로운 붓질을 시도하며 노르웨이 화단의 지배적인 화풍인 인상주의와 사실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1885년에서 1927년까지 무려 40년의 기간 동안 뭉크는 '아픈 아이' 그림을 반복해서 그린다. 여러버전의 판화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이 작품의 모티브를 아무래도 누이 소피의 죽음이다. 뭉크는 그 죽음의 충격을 도달하고픈 예술의 경지까지 계속 끌어올린듯 하다. 뭉크는 먼친척뻘인 다그니 율을 만나게 되는데 뭉크는 남자들이 한 아름다운 여인을 향해 무수한 손을 뻗는 작품인 '손들' 그리고 '마돈나'를 율을 모델라 그려낸다. 뭉크의 마돈나는 기존의 성모마리아의 성스러운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 관능적이면서도 붉은 아우라를 표현해, 성스러우면서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성모를 표현한다. 마돈나의 석판 버전엔 정자와 태아가 그려진 프레임이 있는 것도 특징이다. 

 다르니 율 이후 뭉크는 여인 툴라와 약혼하지만 그녀의 결혼 요구에 지쳐 뭉크는 지쳐간다. 둘은 싸우다 뭉크의 실수로 총이 격발되어 뭉크는 왼손을 다치게 된다. 주손이 아니었지만 이후 뭉크는 특유의 신경증으로 다시는 그림을 못그리게 될 거라는 강박에 시달린다. 이 소동으로 그리 집착하던 툴라가 떠나가 황당한 나머지 뭉크는 신경증이 더욱 심해진다. 

 뭉크는 고향 노르웨이에선 신진화가로 크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독일에선 꽃을 피운다. 당시 독일은 철학과 문학에선 독보적이었지만 예술분야에선 이렇다할 인재가 없었다. 1871년 이후 통일과 산업혁명으로 인구가 급성장하며 사회 분위기가 역동적으로 바뀌며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는 분위기였다. 뭉크는 이런 분위기에서 베를린 화가 협회의 상설 전시장인 빌헬름 거리의 건축가의 집에서 첫 독일 전시회를 개최한다. 하지만 보수적이던 베를린 화가 협회장 안톤 폰 베르너는 뭉크를 맹 비난했고, 프랑스에 적대적이던 당시 분위기도 뭉크의 인상주의적 그림에 좋지 못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악명도 유명세인지라 뭉크는 이일로 독일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뭉크는 돈을 벌기 위해 직접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만 금전적으로 크게 이득을 얻진 못한다. 하지만 더욱 유명해져, 덴마크 코펜하겐, 독일 블레슬라우, 드레스덴, 뮌헨에서 전시회 요청이 쇄도한다. 당시 30대의 뭉크는 베를린 중심거리인 운터 덴 린덴에서 전시회를 하며 처음으로 그림 5점을 엮어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당시만 해도 연작에 대한 개념은 없던 시절이어서 이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뭉크는 베를린에서 스칸디나비아 출신들이 주로 모이던 검은 새끼 돼지 주점을 자주 찾는다. 입구에 걸린 아르메니아산 와인 주머니가 검은 새끼 돼지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뭉크는 화가임에도 회화보다는 문학에 많이 심취해 있었고 실제로 많은 글을 남기기도 한다. 검은 새끼 돼지의 멤버들은 문학과 예술과 연관하여 새로운 사상, 상징주의와 데가당트미학, 최신의 과학적 발견, 이국적인 방식이나 현상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럼에도 뭉크는 이들 일파가 과도하게 급진적이거나 퇴폐적으로 흐르면 다소 거리를 두어 인근의 카페 바우어를 찾곤 했다. 검은 새끼 돼지들의 멤버가 하나둘 떠나가며 쇠퇴하자 뭉크는 1896년 파리로 이동한다. 

 파리유학에서 뭉크는 그림은 살아 숨쉬고, 느끼고, 아파하며, 사랑하고,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야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뭉크는 '사랑' 연작처럼 그림 개개보다는 이들을 함께 묶어서 본다면 주제 전달을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1918년 10월 뭉크는 블롬크비스트 갤러리에서 회화 30점, 약 70점의 스케치와 수채화를 포함한 인생역작인 '생의 프리즈'를 선보이게 된다. 프리즈는 건물 내부나 와부의 벽 윗부분의 그림이나 부조조각이 일렬로 연결된 띠 모양의 장식이다. 생의 프리즈는 작품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 전시되느냐에 따라 변화되고 조정될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뭉크 시기 화가는 그림에 담을 모티브나, 주제, 화풍만을 고민했지 그림을 어떻게 보여주고 전시할 것인지에 대한 고려는 없는 시기였다. 뭉크는 전시기획과 디자인을 고민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던 셈이다. 

 1930년대 뭉크는 오른쪽 눈 혈관이 터지는 병에 걸려 한동안 거의 실명상태로 지내게 된다. 1939년 2차대전이 터지자 나치의 노르웨이 침공이 예상되었지만 피신할 생각을 하지 않던 뭉크는 나치지배하에서 농수산부의 명령으로 농사를 짓게 된다. 뭉크는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감을 맛본다. 그리고 일전 나치가 자신의 그림을 퇴폐 미술전에서 전시한 것을 경험했던 지라 자신의 모든 그림들이 처분될 것을 우려하게 된다. 뭉크는 1940년 자신의 작품을 모두 오슬로시에 기부하게 된다. 그리고 1944년 나치의 패망을 목격하지 못하고 80세로 사망한다. 

 뭉크의 그림을 보면 같은 주제를 여러번 다르게 그려내며 분위기를 다르게 하고 좀더 완성시키려고 하는 노력에서 경지에 다가가려 했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연작의 개념도 재미있고 실제로 생의 프리즈는 매번 다르게 전시된다. 당시의 생의 프리즈와 지금의 생의 프리즈 전시는 구성이 다르다. 거기에 노르웨이의 변화무쌍한 자연이 준 강렬한 색감과 표현,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으로 평생 지속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알고 싶은 마음, 그리고 풀리지 않는 여성 관계는 그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된다. 절규 이외에도 뭉크의 많은 작품을 알 수 있어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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