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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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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저자도 말하지만 연식이 좀 있는 분들께 고고학 하면 떠오르는 건 단연 인디아나 존스다. 여러 영화와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의 진로에 영향을 강하게 준듯, 인디아나 존스도 여러 사람들 고고학의 길로 안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고고학은 무척 영화와 다르다. 하루종일 흙바닥에 앉아 모기나 추위 및 더위, 야생동물과 씨름하며 생활한다. 야전생활과 다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걸 파내는 거도 아니다. 대부분의 고고학적 발견은 보물찾기와는 다른 것이다.

 실제 인디아나존스처럼 다른 나라에 자기 맘대로 가서 여러 사람 때려패고 죽이며, 보물을 탈취하는 것은 범죄행위에 다름아니다. 제국주의적 시각이 매우 강하게 반영된 영화인데 그래도 사람들의 모험욕을 자극하는 맛이 있긴하다.

 책은 고고학적 지식과 고고학자가 현장에서 느끼는 마음을 잘 버무렸다. 읽기 쉽고 재밌다. 물론 고고학 지식을 많이 기대한 사람에겐 다소 아쉬울수 있겠다. 들어가보자.

 

1. 죽음

 인간은 스스로 유한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죽음을 자각하며 두려워한다. 모든것이 사라질 죽음만을 인식한다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리 없다. 죽음의 극복방안으로 고대인들은 무덤을 만들어냈다. 죽은자와 그 영혼의 불멸함을 거대한 건축물인 무덤을 곧이 만들어 기념함으로써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덤은 부활과도 강력히 연결된다. 부장품을 넣는 것도 그런 것이고 양식도 그런면이 있다. 한국의 독무덤은 주로 어린아이를 묻었는데 항이라가 자궁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곧 부활을 기원하는 것이다. 시베리아에서는 통나무관이 발견되는데 나무가 하늘로 자라는 것처럼 죽은 사람 역시 하늘로 올라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아이의 경우는 독무덤처럼 나무의 공동안에 묻었으며 자리가 모자라면 더 파내기도 했다. 또한 죽은 사람의 관을 마치 열마처럼 나무에 매달기도 했다.

 사람이 죽으면 임사체험이란걸 하는 경우가 있는데 동서양을 통틀어 공통적으로 나비를 보는 경험이 나타난다. 이 체험에 문화가 기저작용을 한다면 나비는 죽음과 관련하여 동서양에 상징하는 바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나비는 애벌레어서 번데기를 거쳐 다시태어나는 느낌을 주는 생명체이므로 죽은 사람과 나비는 제법 잘 어울리는 것이 된다. 고대 요동지역의 홍산문화에서는 옥룡형태로 있던 애벌레와 나비 문양의 옥기를 무덤에 묻어 이 같은 생각을 반영하기도 했다.

 유라시아 전역에서는 제사 후 그릇을 깨는 풍습이 있어 공통적으로 무덤 주변에서 다량의 깨진 토기가 발견된다. 이는 저승과 이승을 반대로 생각하는 것으로 이승에서 깨지거나 부서진 것이 저승에선 제대로 된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행동들이다.

 조개무덤인 패총은 쓰레기장이다. 조개만 남아 있어 조개 무덤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고대인들이 조개만 따로 버릴리 없다. 패총은 종합생활쓰레기장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패총에선 옷가지나 생선뼈등 다양한 생활물건이 발견된다. 이는 조개껍질이 알칼리를 띠어 다른 것들도 잘 보존해준 역할이 크다. 패총은 여러가지 의미를 던져주는데 우선 당시의 해안선이다. 패총 인근은 당시 해안선인데 지금기준으로 생각하면 놀라운 경우가 많다. 다음은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 습관이고 조개껍데기를 통해 당대의 기후를 추정할 수 있다.

 

2. 먹을 거리와 약재, 샤면, 의술

 보리는 동아시아에서 이모작 작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근동이 원산지다. 식량으로 적합치 않아 동아시아에서는 멀리 했던 작물인데 어인일인지 5천년전 중국에서 맥주가 발견되었다. 이는 당시 동서교류가 생각보다 활발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맥주가 그대로 왔을리는 없고 보리와 맥주제조법이 왔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인삼은 중국에 알려지고 약효능을 인정받은게 후한대다. 인삼은 고구려, 백제가 주로 중국에 진상하는 상품으로 과거부터 매우 귀했다. 이유는 웬일인지 만주의 산악지대에서 자라는 것만이 효능이 우수했으며 말려 장기간 보존하는 방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발해는 영토를 상당히 동북쪽으로 뻗어나갔는데 이 쓸모없는 동토를 개척한데는 아무래도 인삼과 모피 같은 사치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견해가 타당하다.

 한국은 농경문화권임에도 소를 도살하고 잡아먹는 조리법이 상당히 발달했다. 먹는 부위도 매우 다양한데 이는 소고기의 부족때문이란 설이 있다. 조선후기로 접어들며 신분세탁 및 위조로 양반계층이 많아졌고 이들의 고기 수요로 인해 소고기가 부족해 다양한 부위를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북방민족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고문에 따르면 소고기는 사슴고기를 다루는 것과 매우 유사한데 유목민들은 사슴고기를 잡고 처리하며 피부터 뿔까지 거의 모든 부위를 먹는다. 이들이 고려후기부터 조선에 편입되며 백정계층이 되고 조리법과 처리법을 소에도 적용해서 조리법이 다양해졌다는게 두번 째 설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는 침술이 매우 발달했다. 침술이 먼저 발달한 곳은 두만강 유역으로 중국에서도 침술을 배우러 이지역으로 갈 정도였다.  이 지역이 침술이 발달한 이유는 혹독한 기후와 관련이 있다. 이 지역은 매우 한랭하여 사람들은 겨울철이면 집에서 화로가에 머물고 심지어 화장실도 실내에 있었다. 이와 같은 불결한 환경에서는 피부병이 생기기 쉽상이었고 종기를 바늘로 째는 치료법이 발달한 계기가 되었다.

 고대의 암각화를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샤면의 모습은 머리가 버섯모양이다. 이는 당시 샤면들이 신을 만나는 가정에서 환각작용을 하는 독버섯을 복용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다양한 버섯의 효과를 알고 있었고 샤먼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상당한 부작용과 모험을 감내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나 기독교의 성인들의 머리 뒤 아우라는 이 버섯의 변형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3. 고고학과 정치, 전쟁

전쟁은 여러 인간의 사회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고고학도 예외가 아니다. 1차대전에서의 참호를 건설하고 이용하는 방법은 고고학에 그대로 적용되어 유물의 발굴에 이용되었다. 또한 당대엔 처음으로 비행기가 전투에 이용되었는데 조종사들은 공중을 선회하며 땅을 살피다 우연히 튀어나오가나 인공적으로 생긴 부위를 발견하게 된다. 평소엔 눈에 띄지 않던 그 지역은 고대의 유적이 있떤 지역이었다. 돌이 있거나 땅이 다져저 다른 지역보다 농작물이나 풀이 약간 덜 자라 공중에선 눈에 띄었던 것이다.

 전투를 하며 촬영한 수만장의 사진은 이런 식으로 유적지를 발견하는데 전후에 이용된다. 항공고고학의 탄생이었다. 제국주의에도 고고학은 어용된다. 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적을 찾거나 발굴해 도적질을 하고 자신들의 침략에 이용했다.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마민족설을 제창했다. 일본의 초기 한반도 도래인을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이 무찌르고 지금의 일본을 세웠다는 설이다. 이 설을 주창해 그 증거를 찾아 침략을 과거 영토를 회복하는 것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다. 이 의도는 한반도에서 황금유물이 발견되며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주목을 받자 다행히 방향이 선회되었다.

 인간이 가장 마지막에 정착하는 섬 나라들은 아무래도 고대문화가 늦는 경향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헌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고고학적 사기를 꽤한 시도가 동서양에 있었다. 먼저 영국의 필트다운인이다. 19세기말 영국의 찰스도슨은 유인원과 인간의 뼈를 조합해 고지능의 원시인류를 영국에서 만들어낸다. 당시는 독일에서 네안데르탈이 발견되고 프랑스에서 아비뇽벽화가 발견되는등 인류의 시원이 영국의 경쟁국가에서 발견되고 있던 실정. 이에 뒤질수 없던 영국이 이런 가짜촌극을 지어낸 것이다. 찰스도슨은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이 모든걸 행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마도 영국고고학계가 집단적으로 눈을 감고 암묵적 지원을 한걸려 여겨지는데 이 희대의 사기극을 무려 50년이나 지속되어 1950년대에야 재공론화되어 종지부를 찍는다.

 동양은 일본이다. 무려 1990년대에 일본의 후지무라 신이치가 범인이다. 이 사람은 유물을 무려 10년이나 조작했는데 그의 학력이 고졸에 불과하다. 영국처럼 나라 전체의 고고학계가 공범이란 생각이 강하게 드는 부분이다. 그는 직접 뗀석기 유물을 제작해 파묻고 신마냥 기적처럼 발굴하는 기적을 일으켜 신의손이라 불렸는데 일본 구석기의 역사를 무려 70만년전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를 의심한 일본 마이니치 신문가자가 몰카를 통해 후지무라가 직접 유적을 조작하는 모습을 포착해 이 희대의 사기극 역시 종지부를 찍게된다. 최근에 일어난 일이고 이것이 일본 극우집단에 이론적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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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상을 바꾼 다섯가지 상품이야기 :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그리고 석유 -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그리고 석유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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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욕에 대한 생물의 욕심은 끝이 없다. 애초에 우린 채워지지 않는 그릇인게 분명한데, 특히 인간에게는 생존을 위한 의식주 욕구와 더불어 사회적 위치를 과시하여 번식과 생존을 더 유리하게 하는 과시욕이 있기에 사치품에 대한 욕망도 상당하다. 이 책이 다루는 상품은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석유다. 모두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지만 이중 생존에 필수품은 소금 하나뿐이다. 물론 석유도 이젠 생존 필수품에 가깝긴하다. 하지만 나머지 모피, 보석, 향신료는 그렇지 않다. 

 필수품이건 사치품이건 이들은 강한 인간의 욕망을 불러왔고, 이 욕망은 자원의 회소성과 지역적 편중성으로 더욱 배가되었다. 구하기 힘든 만큼 더욱 과시가 쉽고, 비쌌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사람들이 목숨걸고 피를 부를 만큼 이를 얻기 위해 별짓을 다했기 때문이다. 다섯가지 필수품이 만들어간 사람들의 역사를 살펴보자.

 

1. 소금

 지금은 지천에 널린게 소금이며 나트륨과다로 문제가 되지만 사실 소금은 생존에 필수품이다. 농경이전엔 육식을 많이 하여 육류의 소금기를 먹었기에 소금은 필수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농경으로 육식이 크게 줄자 소금은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 되었다. 즉, 소금의 교역은 농경의 역사와 함께한다는 셈이다.

 현재는 바닷물을 가두어 점차 농도를 올려가며 최종적으로 소금을 얻는 천일제염업이 있지만 과거엔 그런 방법이없었다. 또한 알았다 하더라도 천일 제염업은 강한 바람과 햇살, 드넓은 갯벌을 필요로 하기에 애초에 할수 있는 장소도 드물다. 동아시아에서도 한중일중 한국만이 가능하다.  

 어쨌든 그렇기에 문명의 발달은 소금과 함께했다. 세계 4대문명은 모두 강 하류에서 시작하는데 여기엔 물과 식량과 더불어 소금을 구하기 쉽다는 이점이 작용한다. 동아시아의 홍산문명은 큰 강을 기고 있지 않음에도 염수와 염호를 인근에 갖고 있었기에 발흥이 가능했다고 저자는 본다.

 소금으로 교역을 시작한 것은 우선 유럽의 페니키아인들이다. 그들은 나라의 뒷쪽으로는 높다란 레바논 산맥이 자리하고 자신들의 평야는 협소하여 애초에 바다로 진출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들은 이집트의 소금호수에서 조염을 가져와 이를 물에 놀이고 끓여 최초로 정제염을 만들었다. 유럽의 지중해는 워낙 깊은 바다에 해안이 대부분 절벽이기에 소금생산지가 무척 적었다. 페니키아는 이런 소금의 회소성으로 유럽 각지를 누비며 부강해졌다.

 다음 타자는 베네치아였다. 원래 베네토 지역에 거주하던 이들은 무시무시한 훈족이 쳐들어오자 살기위해 고려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바다로 도망가는 것이었는데 마침 앞바다 갯벌에 섬이 있어 그리로 도망갔고 그렇게 훈족을 피할수 있었다. 무사히 도망쳤다라는 이탈리아 말에서 베네치아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위치가 비잔틴과 슬라브세계, 서방세계와 이슬람세계, 알프스의 여러 협로와 수로를 통해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로 연결되는 천혜의 중계지역이다. 이런 위치를 통해 자신들의 앞바다에서 천일제염업으로 소금을 생산했고 이를 팔았다.

 소금으로 흥한 마지막은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청어산업으로 흥했는데 한 어부가 청어를 쉽게 손질하는 칼을 발명한다. 이 칼로 청어의 손질이 매우 빨라졌고, 보관을 위해 소금이 필요해졌다. 과거엔 어선의 어업시간과 반경이 짧았는데 물고기를 잡아서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모두 썩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어를 잡은후 바로 내장을 손질하고 소금에 절이면 무려 1년이상 보관이 가능했다. 이로 인해 어선들의 조업시간과 활동반경은 매우 넓어졌고, 어획량도 급증한다.

 네덜란드 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바다 정제염을 대거 확보하고 이를 한번 더 정제하여 소금의 질을 엄청나게 올렸다. 그들은 분업화도 시도하여 청어 손질에 각 단계가 있었고 이를 통해 균질품을 생산할수 있어 청어가 매우 인기가 좋았다.

 

2. 모피

 모피는 가죽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옷이다. 쥐부터, 비버, 담비, 사슴, 곰, 너구리등 털이 많은 동물의 가죽을 주로 칭하는데 이 모피는 해당동물의 절명과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의 영토확장을 불러왔다.

 모피는 털가죽동물이 있는 모든곳에서 교역대상이었지만 러시아서 우선 흥했다. 러시아는 1581년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후 이반 4세가 모피교역을 목적으로 코사크 용병에 의한 동진을 시작했다. 당시 시베리아에는 고작 인구 20만에 120여개의 부족만이 존재하여 이렇다할 장애물이 없었다. 경제적 동인과 장애물이 없음이 함께 작용하여 하루에 100km2 이라는 놀라운 속도로 동진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무려 100여년간의 남획으로 시베리아에서 모피가 더이상 구하기 어려워지자 러시아는 남진하여 중국의 모피를 노리게 된다. 이에 청이 긴장하여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 나선정벌이다. 임란과 병란 이후 국방을 강화한 조선은 5천이상의 조총병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이 이 때 활약한다. 화력이 당시 러시아군을 앞서 조선은 이들을 쉽게 격멸하였고 당시 러시아인들은 조선인들의 모자를 보고 머리가 큰 녀석들이 무섭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남에서 좌절한 러시아의 모피 욕심은 동으로 이어져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로 향한다. 거기서도 모피가 아작나자 다음은 물개와 바다사자의 차례가 된다.

 모피러시는 미국에서도 이어졌다. 17세기 러시아의 모피가 바닥나자 북미지역이 새로운 공급처로 자리한다. 북미에는 비버가 많았기에 동부의 넓은 숲지역에서 비버사냥이 이어졌고, 인디언들과 네덜란드인들이 교역을 했다. 비버 남획은 심각하여 1720년까지 무려 2백만 마리의 비버가 사라졌고 18세기의 기록을 보면 한 해에 평균 비버 26만 너구리 23만 여우 2만 곰 2만5천등 50만 마리가 넘는 털가죽 동물이 사냥당했다. 특히, 비버는 잡기가 무척 쉬우면 반면 번식력이 낮기에 금방사라지고 만다.

 모피가 동부에서 사라지자 골드러시 마냥 서부러 사람들은 향한다. 서부의 산맥 너머에 모피가 많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하지만 모피가 생각보다 많지 않자 역시 러시아처럼 해달과 바다표범 사냥에 나섰다.

 모피사냥을 현재도 진행중이다. 덴마크는 연간 1200만 마리의 밍크를 사육하며 중국은 1800만 마리에 달한다. 캐나다에서는 한해 털가죽과 오메가 3등을 위해 30여만 마리의 바다표범을 사냥하며 털이 희고 복슬복슬한 새끼의 경우는 사냥꾼이 가죽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산채로 잡아 껍질을 벗긴다고 한다.  

 모피는 아시아에서도 인기였다. 과거 고조선은 모피 무역의 중심지였다. 철기나 청동기 이전엔 모피를 가공할 만한 도구가 마뜩지 않았는데 고조선 인근에서 나는 흑요석이 아주 적합했다. 하지만 흑요석은 화산활동이 강하게 일어난 곳에서만 있었던 것이기에 무척 희귀했고 이로 인해 고조선은 모피와 흑요석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모피 교역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시대까진 잘 이어지지만 북방을 상실한 고려 이후로는 수입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모피  수입국이 되었으며 이 사치품을 확보하기 위해 매년 막대한 부를 손실하게 되었다. 반면 모피교역을 장악한 이 지역의 야인들이 성장하여 강한 나라들을 세우고 우리와 중국을 위협하게 되었다.

 

3. 보석

보석의 역사는 유대인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본디 보석은 금이나 은에 비해 값어치가 없었는데 모래가루를 이용해 연마하던 것을 유대인들이 물레를 이용한 연마기술을 개발한 후 광채가 살아나자 가치가 폭등한다. 유대인들은 개방적이던 이베리아 반도에 많이 거주하였는데 스페인의 레콩키스타 달성후 추방령이 갑작스레 내려진다. 그들에겐 불과 3개월의 시간이 주어졌는데 당시 스페인 인구의 무려 6.5%가 유대인이었다.

 항상 쫓겨나고 핍박받은 유대이었기에 그들은 언제나 터전을 떠날 준비를 갖추는 습관이 있었다, 바로 재산을 적당히 분할하는 것이었는데 3분의 1은 현금 3분의 1은 보석 3분의 1은 기타 식이었다. 이런 식의 재산분할이 포트폴리오의 유래다. 보석은 그중에서도 환금이 용이하고 이동이 편해 선호대상이었다.

 유대인들은 개종하거나 가까운 포르투갈이나 북아프리카 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으로 이주한다. 이때부터 벨기에 앤트워프가 보석 산업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한다. 보석중 최고는 다이아몬드인데 희귀하던 이것이 19세기 남아공에서 대규모 광산이 발견된다. 당시 남아공 일대는 네덜란드 출신의 보어인이 자리잡고 있었고, 영국은 다이아몬드를 노려 무려 45만의 군대를 파견한다. 당시 보어인은 인구 50만정도의 병력은 최대 고작7만수준으로 영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영국은 보어전쟁을 일으켜 21만을 수용소에 강제수용하여 2만이 숨졌고 그들의 집과 토지를 강탈했다.

 이런 영국의 무도한 짓거리를 영국의 학자 존 앳킨스 홉슨은 목도하고 돌아와 책을 쓴다. 제국주의는 국가내의 부유층이 사치를 위해 정부의 통치를 강탈해서 외국의 몸에 빨판을 박아 그들의 부를 빼내려고 제국을 팽창시키는 기생적인 사회과정이란 내용을 담은 제국주의론이다. 이 책에서 후진국의 경제가 선진국에 종속된다는 종속이론이 발전하였고, 이는 레닌 이론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학자는 영국에선 인정받지 못했지만 세계대전가지 예언했다고 하니 대단할 따름이다.

 다이아몬드 하면 극악무도한 드비어스 사가 생각난다. 드비어스사 이름의 유래는 의외로 창립자가 아닌 남아공의 가난한 농부이다. 이 형제는 다이아 광산을 판면서 그 대가로 회사이름에 자신들의 이름이 쓰이기를 요구했다니 그것이 유래다. 드비어스는 유대인들의 회사로 이들이 악명이 높은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고가의 독점 정책을 장기간 펼쳤으며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익을 생산지 및 원산지와 전혀 나누지 않고 오히려 그 지역에 피를 부르는 정책만 감행했다는 점이다.

 드비어스는 초기 회장인 세실로즈가 남아공 정계에 진출해 총독이 되면서 법과 정책을 자기 회사에 유리하게 집행하며 힘을 키워간다. 그들은 이를 이용하여 다이아 광산을 독점하고 병합해갔다. 세실 로즈 사후엔 오펜하이머가 회사를 이어받았다. 그는 회사의 막강한 위치를 이용하여 공급을 조절하고 가격 조작으로 약한 경쟁사를 파산위기에 몰아넣은 후  헐값에 강탈하는 수법을 즐겨 사용했다. 대공황은 그에게 기회여서 위기에 몰린 다이아 광산을 매입했고 싼 값에 나오는 전세계 다이아를 헐값에 매집했다. 이후 견고해진 독점적 위치를 이용 고가로 다이아몬드를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비어스의 공급체계는 생산자-드비어스-사이드홀더-소매상으로 이어진다. 드비어스는 유리한 위치를 이용 10캐럿에 고작 15달러의 가격으로 다이아몬드를 생산자로부터 공급받는다. 드비어스는 놀랍게도 판매자를 자신들이 지정하는데 이들이 사이드홀더다. 사이드 홀더로 지정되어 드비어서로부터 다이아를 살수 있게 되면 엄청난 이익을 얻으므로 사이드 홀더는 드비어스에게 아주 비싸게 다이아를 구매한 후 이를 더욱 비싸게 소매상으로 넘기며 소매상은 이를 더욱 비싸게 소비자에 판매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15달러짜리 10캐럿 다이아는 무려 12만 5천달러에 이르게 된다. 과정마다 10배이상의 폭리를 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러시아와 결탁한 레비에프의 등장으로 드비어스의 위치는 예전만 못하다. 한때 그들의 사이드 홀더중 하나에 불과했던 레비에프는 러시아의 다이아 광산을 이용 공급을 시작했다. 그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접근해 아프리카 생산지에서 원석 가공을 제안하여 그들에게 일자리와 부를 나눠주겠다고 접근하여 호응을 얻어 시장을 잠식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최근엔 다이아매장이 아닌 인터넷을 통한 구매 등 공급처가 다양화 되면서 다이아 가격은 다소 하락하는 추세라고 한다.

 

4. 향신료

염장은 식품의 보존에 그만이었지만 배부른 유럽의 중세귀족들은 계속된 염장식품에 싫증이났다. 그들은 신선한 스테이크를 선호했는데 향신료를 뿌려 맛과 고기 비린내를 제거하고 보관도 오래가는 스테이크를 좋아했다. 문제는 향신료가 열대성 작물이라 유럽에선 전혀 재배가 안된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몽골제국의 붕괴로 안정적인 교역루트가 이슬람에 막히자 유럽의 향신료 가격은 폭등한다. 이 경제적 요인은 대서양에 인접했으며 이제 막 통일에 성공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모험을 감행하게 한다. 이들은 향신료의 주산지인 인도로 향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포르투갈은 동으로 스페인은 서로 향했다는 점이다. 아메리카의 존재를 몰랐기에 이 승부를 포르투갈의 승리로 끝난다. 동남아와 인도 일부를 차지한 포르트갈은 중국남부 까지 진출했으며 해적소탕을 미끼로 건 포르투갈의 제안에 중국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포르투갈은 요즘 회자되는 이란의 호르모즈 해협인근을 차지했는데 이로 인해 무역풍에 구애받지 않고 거래가 가능해져 거래의 회전수를 획기적으로 높여 막대한 이익을 누릴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은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이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영국은 인도를 위주로 교역했는데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만들고 아시아 요역을 주도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막대한 권한을 이회사에 부여했는데 해상교역권, 식민지 개척 및 관리권, 관리임명권, 전쟁선포권, 치외법권등 사실상 국가나 마찬가지의 권한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동인도회사는 빠른 타이밍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단과 행동이 가능했다.

 영국은 인도에서는 모직물을 중국에선 차를 교역했다. 차는 녹차, 우롱차, 홍차로 분류되는데 차 잎을 따 온도, 습도, 시간을 잘 맞추면 차 잎이 효소가 산화작용으로 발효되어 검게변하는데 이것이 홍차다. 반쯤 발효되면 우롱차가 된다. 영국인이 차를 즐기게 된 것은 과거 냉장고가 없이 차를 배로 운반하다보니 더운 열대에서 차 잎이 자연히 홍차가 되어서 그렇다. 영국 출신으로 홍차를 즐기던 미국인들은 보스턴 차사건 이후 커피로 돌아섰는데 그래서 아직도 영국은 차문화가 미국은 커피문화가 발달했다.

 

5. 석유

 첨단 산업이 발흥하고 4차산업혁명시대를 눈앞에 두며 석유는 과거의 산업 느낌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2011년 기준 세계 5대 기업중 4개가 정유회사이며 이들의 순이익은 매출의 무려 10%이상일정도로 석유의 위력은 아직 건재하며 지배적인게 사실이다.

 석유는 1855년 조지 미쉘이 석유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성분분석을 의뢰하며 발흥한다. 보고서 결과 석유는 다양한 물질로 분류가 가능함이 밝혀졌고, 값싼 공정으로 당시 고래 기름을 활용하던 램프에 사용할 기름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보였다. 이후 불과 15년뒤 사용처가 아직 불분명한 석유에 사람들이 몰려 무려 75개의 유정이 개발된다. 검은 러시의 시작이었다.

 고래가 남획되어 개체수가 줄자 석유는 더욱 중요해졌다. 램프는 생활필수품이 되었는데 석탄을 활용하는 방법도 고래 기름을 대체할 수 있었다. 석탄을 증류하여 조명용 가스를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발 우려와 가스관이 필요해 가정용으론 사용이 힘든 점든 애로사항이 많았다. 하지만 석유에서 나온 등유는 폭발위험과 가스관, 소음이 모두 발생하지 않았다.

 초기엔 지금은 오히려 가치가 낮은 등유만이 석유의 증류과정에서 필요했다. 나머지 휘발유나 경유, 찌꺼기는 모두 버려졌다. 특히 휘발유는 불이 너무 쉽게 붙고 폭발위험이 높아 처치곤란의 위험물질이었다.

 석유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록펠러다. 록펠러는 발상이 남들과 달라 유정개발보다는 석유의 정유와 운송이 돈이 된다고 보았다. 그는 정유량이 매일 달라 운송에 애를 먹던 철도회사에 일정량을 운송하는 조건으로 싼 가격에 계약을 체결해 경쟁자들을 운송비에서 압도했다.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다른 회사들을 인수합병하기 시작했고, 독점적 지위를 구축한다. 그는 독점에 대한 생각도 남들과 달라 독점이 시작되면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지면 양질의 제품을 균질하면서도 싼 가격에 공급할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의 회사 이름은 이런 철학을 반영하듯 스탠더드 오일이었고 가격도 독점적 지위 구축후 80%가 내려갔다. 물론 이윤은 그가 다 먹지만 말이다.

 록펠러는 석유가 당시 위스키나 포도주 통에 담겨 운반되어 이송중 휘발되거나 새는 경우가 만았던 것을 최초로 철제탱크를 개발하여 운송하는 생각도 해냈다.

 이렇게 새로운 연료로 등장한 석유를 모든 나라가 반긴 것은 아니었다. 석탄과 다르게 석유는 지역적 편중성이 컸다. 그러다 보니 수입을 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지금도 그렇지만 안정적인 교역로가 필요했다. 또한 영국이나 독일 같이 석탄이 풍부한 국가는 자국에 관련 산업과 일자리가 많이 구축되었기에 석유로의 전환이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석탄을 사용한 증기선은 무려 10km에서 적의 눈에 띄는등 문제가 많았기에 결국 영국과 독일도 석유로의 전환을 피하지 못한다.

 잘나가던 스탠더드 오일은 반트러스트법에 의거 1911년 무려 34개사로 강제분할된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세력을 규합해 미국에는 엑슨과 모빌, 쉐브론, 텍사코, 걸프등의 정유사가 힘을 키웠고, 영국엔 BP, 로열 더치쉘이 있었다. 이 7개의 회사를 세븐시스터즈라고 하며 이들은 1975년 OPEC가 등장하기 전가지 세계 석유의 공급을 독점하며 균일 가격에 석유를 공급하며 큰 이윤을 누려왔다.

 

-오일쇼크음모론

1970년대 제4차 중동전쟁으로 발발한 오일쇼크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경제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은 마이너스로 치달았는데 한국의 마이너스 경제성장은 이 시기와 아이엠에프시기, 서브프라임모기지론사태 시기 이 세시기 뿐이다. 하여튼 당시 미국은 재정적자와 달러와의 가치 하락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미국은 유가상승이 절실했는데 유가가 상승하며 석유의 결제화폐인 달러의 수요가 늘어나고 이를 통해 달러가치 상승과 재정적자의 감소 두마리 토끼를 한방에 잡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영국 역시 유가상승이 필요했다. 당시 영국은 북해유전을 발견했는데 시추 비용이 만만치 않아 당시의 유가로는 채산성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은 3배정도 유가 상승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세븐시스터즈의 비밀회동이 그해 5월에 열렸는데 공교롭게도 불과 5개월후 제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세계는 미증유의 오일쇼크에 빠졌고, 유가는 그들의 기대 이상인 4배로 상승한다. 유가의 상승으로 미국과 영국, 세븐시스터즈는 노래를 불렀지만 다른 나라들은 막대한 재정적자와 물가상승에 시달리게 된다. 이 사건으로 빈국에서 부국으로 부가 대거이동했는데 경제위기는 항상 이런식으로 진행된다.

 

-아프간 침공

미국은 석유산유국이지만 소비량이 워낙 많아 세계패권의 유지를 위해 석유공급이 늘 필요했다. 중동다음으로 전략적으로 미국에 중요한 지역은 그래서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가 된다. 이 지역의 유전은 싱싱한 새로 발견한 유전이었고 해저시추임에도 채산성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스피해에는 무려 2천억 배럴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배럴당 100달러로 계산해도 무려 20조 달러가 되는 금액이다. 이를 미국이 놓칠리 없는데 문제는 이 지역에 다양한 나라가 얽혔다는 것이다.

 카스피해 주변엔 이란,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카자흐, 우즈벡, 타지키스탄이 있다. 이 지역엔 미국의 적인 러시아, 중국이 인접해서 카스피해의 석유를 이들이 차지할 우려가 있었다. 미국으로선 어떻게든 카스피해의 석유를 인도양쪽으로 끌어오는게 필요했으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국가가 아프간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초기 탈레반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그들과 협상한다. 하지만 탈레반의 조건을 수용하기 어려웠던 미국은 협상 결렬후 우리가 다 아는 거짓 명분으로 아프간을 침공한다.

 

- 이라크와 이란

두차례나 전쟁을 치루고 지도자인 사담후세인 마저 제거한 미국은 지금으로선 믿기 어렵지만 오래도록 이라크와 친했다. 이는 이라크를 완충지대로 삼아 이란의 위협으로부터 석유공급선을 안정화시키고 우방 이스라엘의 안보확보를 위함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한다. 하지만 전쟁후, 사담이 중동의 패자를 노리며 쿠웨이트를 침공해 석유공급선을 위협하자 전쟁을 개시한다. 이 전쟁은 한번 더 이어지게 되는데 이땐 사담이 감히 석유의 결제를 달러화에서 유로화로 바꾼 것에서 야기된다. 결국 미국은 한번의 전쟁을 더 치루고 사담을 제거한다.

 2차대전후 영국은 이란의 민주정권인 모사데크 정권의 석유국유화로 인해 갈등한다. 미국와 영국은 모사데크와 갈등관계였던 팔레비2세를 지원해 백색혁명으로 이란에 친미국가를 세운다.하지만 이란 전통세력의 반발이 계속되어 팔레비 왕조는 고작 20년후 이슬람혁명으로 전복된다.

 

-셰일가스

셰일가스는 수직으로 석유층을 파내려고 수평으로 강한 수압으로 지층을 분쇄하여 석유를 채취하는 방식이다. 과거 채산성이 없던 것이 기술이 개발되거 유가가 상승하며 경제력이 생겨났다. 미국은 셰일가스의 등장으로 최대의 석유수입국에서 더욱 막강한 산유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셰일가스로 무려 400만 배럴의 자체 수요를 충당하게 되었는데 이는 OPEC에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갑작스런 400만 배럴의 수출감소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OPEC의 단합은 붕괴되고 2010년대에 끊임없이 오르던 유가는 하락세로 돌아서게 된다. 셰일가스는 오일쇼크 못지 않은 이득을 미국에 챙겨주었는데 우선 정적인 러시아와 베네주엘라가 몰락한다. 남미의 반미 세력의 중심이 차베스의 베네주엘라는 차베스의 사망과 유가폭락후 지금의 파탄에 이르렀으며 승승장구하던 러시아의 경제사정도 상당히 나빠지게 된다.

 반면 미국은 수입의 대체로 가격경쟁력이 살아나 제조업이 살아나게 되고, 달러 강세가 시작되었으며 민간소비가 진작되어 최상위 선진국임에도 무려 3%대의 경제성장률을 유가하락후 수년간 유지하게 되었다. 저유가는 한국에도 호재였다. 달러가 강세로 돌아서며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화 약세의 불리한 정황이 호전되었고, 수출경쟁력이 강화되었으며 저금리가 유지되어 인플레이션 통제가 가능했다. 또한 수출경쟁력 강화와 유가수입으로 인한 적자가 대폭 개선되어 큰 폭의 흑자를 수년간 기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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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가토 요코 지음, 윤현명 외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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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0여년전 우리의 역사는 굴종과 아픔, 아쉬움이 가득찬 역사였다. 절대적 피해자로서 우리는 그 역사를 기억하며 절대적 가해자로서 당시 일본을 규정한다. 더군다나 일본은 당시 식민지로서 전쟁에 강제 동원되었던 우리나 중국 등의 아시아 주변국들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인식은 지나치게 부족하다. 반면 스스로가 전쟁을 일으킨 자임에도 피해자로서의 인식은 어이없게 과대해 더욱 우리와 아시아 각국의 공분을 사고 있다.

 그런 그들이 메이지 유신서부터 2차대전의 패망까지 어떠한 길을 선택했는지를 비추어주는게 이번에 본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이다. 일본인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절대적 가해자로밖엔 그들을 인식할 수 없는 한국과 한국인인 나에게 재밌고 신선한 책이었다. 그리고 물론 신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선택이 그럴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와 피동적 입장이라는 이야기엔 절대 공감하거나 이해해주긴 어렵다.

 이건 남이 나를 칠것 같기에 먼저 공격했다라거나 내가 먼저 저놈을 꼬봉으로 삼지 않으면 다른 놈이 꼬봉으로 삼을게 뻔하기에 내가 먼저 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인정해주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책은 청일전쟁시기부터 시작한다. 1876년 우리는 강화도에서 일본에 의해 역사상 최초로 불평등조약을 맺고 개항했기에 당시부터 그들이 무척 강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보단 모든면에서 개화에서 월등했지만 일본은 여러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에 허덕이고 있었고 아직도 중국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능력에 자신이 없는 국가였다.

 또한 메이지 유신은 이루어졌으나 사쓰마 번과 조슈번간에 내전에 가까운 다툼이 있었고, 주요 인사들도 이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암살되는등 사회적으로도 다소 혼란했다. 서구열강에게도 아직은 인정받지 못해 무역아니 불평등조약을 통한 착취의 대상이거나 중국과 러시아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이를 지정학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부류일 뿐이었다.

  당시 일본의 지배층은 오스트리아 슈타인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는데 슈타인은 이익선과 주권선이란 개념을 주창했다. 주권선은 한 나라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말하는 것이며 이익선은 보다 폭넓은 것으로 나라의 존망과 관련한 외국의 상태를 의미했다. 당시 일본에게 이익선은 조선이었다. 일본의 세력들은 당시 제정 러시아가 극동으로 진출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를 완성하면 만주와 한반도가 사실상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들어오게 되고 러시아가 장악한 한반도의 원산항을 해군기지로 삼으면 다음은 자신들의 순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일본에게 선택은 두가지 였다. 조선을 누구도 차지 할 수 없는 방패막이로서 중립국화하거나 자신들이 차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러시아는 한반도에 세력을 미칠 상황은 아니었고, 이에 일본은 청과 대치한다. 청은 과거 화이질서에 속한 조선이나 베트남등에 군사적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시대가 급변하며 정책이 군사적으로 바뀐다. 청은 조선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보내 이를 제압했고, 그 수장인 대원군마저 데려가는 강수를 보인다. 이로 인해 조선내 일본 세력이 급격히 수축하자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일본은 무리수를 둔다. 조선조정은 어리석게도 동학을 진압할 힘이 없자 청에 파병을 요청했고, 일본은 조선에 군을 보낼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규모 병력을 파병한다. 뒤늦게 조선조정이 동학군과 화약을 맺었음에도 양국은 충돌했고,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다.

 일본은 이 승리로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여러개항장, 타이완, 펑후제도, 요동반도를 얻지만 일본의 영향력이 중국에 지나치게 확대되는걸 염려한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의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빼앗기고 만다.

 이로 인해 일본내에서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은 커지게 되었으며 일본은 배상금을 군비확장에 이용하게 된다. 반면 조선과 청에서는 말한마디로 일본을 굴복시키는 러시아를 보며 일본의 견제를 위해 러시아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중국은 러시아의 만주지역 철도 건설에 적극협조하였고, 조선은 정권차원에서 친러성향이 두드러진다. 그 결과 일본은 조선에 을미사변을 일으켜 일국의 황비를 암살하는 초유의 테러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일본은 열강의 하나인 러시아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러시아의 요구는 일본에 좌절을 안겨주었고, 이는 선제공격으로 이어지는 개전결심을 불러온다. 일본은 러시아로 인해 당시 만주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싶었다. 러시아 역시 한반도 보다는 만주에 관심이 많았다. 둘의 입장은 이렇게 이해되는듯 했지만 러시아는 대한해협을 비롯한 일본의 주요 해협에 대한 통과권과 한반도 이북에 대한 중립화를 요구했다. 이는 당시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과 영국의 협조, 그리고 새삼 러시아의 위협을 느낀 중국의 중립화로 일본은 전쟁을 결심한다. 일본은 중국과는 다른 러시와의 전쟁으로 더 큰 피해를 보는 승리를 거둔다. 이로 인한 자신감도 상승하고 지위도 올라갔으나 러시아는 중국과는 달랐다. 재정적 손실이 컸던 일본은 청의 경우처럼 배상금과 전승국으로서의 요구를기대했으나 러시아의 짜르는 가볍게 이를 묵살한다. 러시아를 무력적으로 침공하거나 위협할 능력이 없는 일본으로선 요구를 더 지속할 수 없었다.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본 승전이었다.

 그리고 10여년후 세계1차대전이 발발한다. 일본에겐 호기였다. 일본은 유럽의 열강에 전쟁물자를 팔아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모했고, 독일에 선전포고해 남양군도와 산둥반도의 조차지와 철도권, 만주지역의 철도권을 얻는다. 물론 이조차 쉽진 않았다. 중국내로 지나치게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우려한 영국이 일본의 참전에 많은 제한을 걸었고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일본내에선 미국과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생겨난다.

 1차대전을 정리한 파리강화회의에선 더한 일이 일어난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전승국임에도 미국과 영국인 일본이 중국내에서 권익을 누리는 것에 강한 비판을 한다. 또한 강화외의중 한국에서 일어난 삼일운동이 널리 알려지며 일본의 가혹한 식민통치가 세계적으로 비판받는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일본은 강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해양세력인 영국이 극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일본에 잠재적인 적국으로 느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만주사변이다. 일본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내전이후 희안하게도 정치세력과 군사세력이 하나로 일치하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해 이후로 군사세력이 정치세력으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는데 이게 결국은 2차대전까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군부는 정치세력의 판단을 무시하고 독단적이고 무모하게 움직이기 일쑤였다.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하극상은 물론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이나 상관을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만주사변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전체의 판단이라기보다는 만주 관동군 일부의 판단이었다. 물론 그들은 3년이상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철도를 폭파한후 중국군의 소행으로 조작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들만의 판단이고 나머지가 이를 따르지 않았다면 지속을 불가능했다. 군부의 상관들은 이들의 하극상을 묵인하거나 협조했고, 당대의 조사에 따르면 도쿄대학의 학생들 상당수가 전쟁에 동의했다.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수준이나 윤리성이 그정도였다. 이는 야당이나 좌파세력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전쟁에 반대하던 그들은 여론의 절대다수가 전쟁에 동의하자 전쟁엔 찬성하되 전쟁 참여인력의 직장이나 자위를 보장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만주사변의 승리로 만주국이 성립하며 이는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고삐가 풀린 일본의 군부세력은 중일전쟁도 일으킨다. 재정러시아에서 소비에트로 변한 소련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고, 미국이 태평양으로 세력을 본격적으로 뻗기전에 동아시아의 패권을 완성한 속셈이었다. 거기에 중국을 얕보기도 했다. 만주사변에서 그들이 보여준 저항이 형편없었고,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에, 국민당 자체에서도 반군세력이 있어 자중지란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군부는 중국의 광대한 영토에도 중심경제지역을 빼았아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것 같다. 하지만 장제스는 주요 핵심지역을 모두 상실하면서도 지휘권을 잃지 않고 장기투쟁했으며 국공합작이 한계가 많았지만 이루어졌다. 또한 일본을 견제하는 독일과 미국, 영국의 지원이 이루어졌고, 홍콩그리고 여기가 봉쇄된 이후엔 버마나 베트남을 이용한 지원이 이루어지며 중일전쟁은 장기화한다.

 이 상황에서 유럽에 2차대전이 터진다. 1차대전때처럼 일본의 정치세력들은 초기에 이를 관망한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독일이 빠르게 유럽을 장악하고 미국은 관망하며, 러시아는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어 사실상 저항세력이 영국만 남게되자. 일본의 생각을 달라진다. 이 기회에 영국 프랑스등의 식민지를 차지하고 자급자족적 총력전이 가능한 대동아공영권을 완성할 욕심을 갖게 된 것이다. 전력에 대한 판단 착오도 한몫을 한다. 당시 일본은 수십년간에 전쟁으로 항상 국력대비 군사력이 최대화 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그럼에도 전쟁에 수동적이고 고립적이던 미국의 군사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국의 잠재력을 우습게 본 것이다.

 거기에초기 기습으로 영국과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격멸하고 그들이 전열을 다듬는 사이 태평양 지역을 석권하고 방어전을 펼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미, 영과 태평양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협상이 가능핟고 생각했다. 애초에 완전히 이길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과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직접 침공이 어렵고 당시 일본의 국력으론 어림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으로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공격한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미국은 일본의 공격에 무방비였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태평양 지역에서의 선제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진주만은 깊지 않은 바다였는데 수심이 12미터였다. 당시 공격기가 함대를 공격하는 방법은 비행하여 폭탄을 선상에 떨어뜨리거나 원거리서 어뢰를 투하하는 방법이었다. 전자는 함대의 강한 포격과 기관총소사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으며 어뢰는 수심 500m정도에서 서서히 올라와 함대를 공격하는 형식에어서 수심이 얕고 함대가 모여있는 진주만은 이 같은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고 미국은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조종사들은 중일전쟁으로 단련된 이들이었다. 진주만의 환경을 고려해 3달간의 연습으로 12m 수심에 어뢰를 투하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진주만의 태평양함대는 격멸된다. 이는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뽑은 겪으로 정신을 차린 미국은 막강한 국력과 자급자족이 가능한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서의 전쟁을 수행해간다. 미국이 총력전에 돌입하자 그들의 생산력은 일본의 수십배에 달하기 시작했으며 전쟁막바지의 양국의 전력차는 무려 20배에 달하게 된다.

 100년전 일본은 전쟁국가나 다름없었다. 현대 미국이 그러한 것처럼 일본은 지역의 패권을 얻기 위해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2차대전을 차례로 일으키거나 참전하며 거의 10년에 한번 전쟁을 수행했다. 책에 등장한 것처럼 그들은 피해를 얻거나 당하기 전에 선공하여 피해를 막는 식으로 식민지를 확장하거나 전쟁을 수행하였고, 그래서인지 가해자로서의 인식이 매우 미약했다.(물론 책의 저자는 아니다. 그는 을미사변과 삼일운동, 제암리사건, 관동대지진을 모두 잘 인정한다.) 문제는 이 같은 시각이 현대일본에도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웃과의 협력과 연대를 통한 지역의 평화보다는 지역을 장악하거나 넘어서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지역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어떤 분야든 탈아시아를 외치는 것이 그러한 생각의 대표적 표상이라 생각한다. 이런 이웃과 평화와 연대에 기초한 지역의 안정성을 추구해나가는 것. 매우 힘든 우리의 과제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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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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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이 몰랐다이지만 난 사실 저자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요즘 kbs에서 도올아인오방간다라는 프로를 몇번 본적이 있다. 역사에 대해서 도올이 강연하고 제법 대가 쎄고 말잘하는 유아인이 듣기도 하고 받아치기도 하고, 청중의 반응과 의견도 듣는다. 그리고 좀 뜨거워지면 오방신이란 요상한 복장의 가수가 희안하게 국악을 하며 다른 방향으로 더 뜨겁게 무대를 달군다.

 도올 김용옥은 유명한 분이다. 우리 사회에서 강연을 하고 주목받은지 어언 20여년이다. 노출이 많았던 사람인데 이명박근혜 9년에는 여러 입바른 분들처럼 잠잠했다. 제법 유명한 분인데도 강연하나 책하나 보질 않았다. 이 책은 정말 우연히 잡았다. 표지가 눈에 띈게 다다.

 책은 꾸짖음과 현대사에 대한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나온다.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자행되었고, 그게 청산되지 못해고 알지도 못해, 아직도 그 잘못을 저지르고 이득을 본 후예들이 득세하며 혹세무민한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잘못된 이름들도 많이 낳았다. 제주4.3사건, 여순사건등이다. 이들은 사건이라기 보다는 민중항쟁으로 불러야 마땅하는게 도올의 주장이다. 그리고 수긍하게 된다.

 모든 것의 시작은 사실 나라가 일제에 먹히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36년이나 계속되어 더 오래갈 것 같은 일제강점기가 갑작스레 끝나며 일은 전개된다. 일제로부터의 갑작스런 해방은 좋은 것이어야 했으나 많은 문제를 불러왔다. 우선 그것이 독립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북쪽엔 소련이 남쪽엔 미국이 들어온다. 특히 미국은 점령군의 개념을 갖고 적대적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은 알다시피 많은 문제를 낳았다.

 그리고 해방이 우리의 주체적 역량에 의해 생긴게 아니라 얻어졌다는 것이다. 건국 100년을 맞아 수많은 독립투사의 행적이 언론에 도배되고 있으며 그 업적은 폄훼할 만한 것이 아니나 일제를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해방이 주제적이지 않았기에 이후의 나라세우기도 주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해방은 권력의 공백도 불러왔다. 공백의 진공은 주변의 새로운 권력을 불러왔고. 이 과정은 전쟁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은 해방에서 주도적인 이념적 주체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여러 세력에 의해 다양한 이념적 갈등이 양태되었다.

 도올은 몽양 여운형을 높게 평가한다. 그는 3.1운동이후 그를 회유하려는 일제의 심장부로 불려가나, 이를 거부하지 않고 그곳으로가 일본을 꾸짖고 평화를 주장한다. 그리고 한계는 있었겠지만 해방때까지 국내에 남아 해방이후 즉각적으로 사태에 대응할 세력으로 남게된다. 그는 일본의 패전 1-2년전 일본의 동경이 공습받는 것을 목도한 후 일제의 패전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독립을 준비한다. 그리고 일제도 이를 직감해 패전과 동시에 한국의 정권을 여운형에게 넘기려 하였으며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고 각지에 건준과 더불어 인민위원회가 생겨난다. 하지만 이들은 통일적인 조직이 아니었고 연계망도 약했다.

 임정세력은 아쉬웠다. 항상 자금난에 시달렸던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귀국이 늦었다. 거기에 정부세력임을 주장해 미국으로 부터 입국을 거부당한다. 대톨령이라고 주장했다 귀국을 거부당하자 즉각 입장을 철회한 이승만과의 차이였다. 김일성과 이승만은 어찌보면 공백을 차지할 만한 인물들이 아님에도 미국과 소련의 입맛과 정세를 파악해 그들에게 실세로 점찍힌다.

 임시정부의 김구는 여운형과도 협력하지 않았다. 도올은 김구의 날카롭지 못한 정세판단과 뻣뻣함을 비판하고 여운형의 경우도 실세인 미국을 파악하지 못하고 인공을 세운 것을 비판한다. 인공보다는 준비세력정도로 물러서 그들과 타협하는 것이 현실적이었다는 것이다.

 반탁과 신탁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김구를 비롯한 민족세력은 동아일보의 잘못된 기사가 나오자 즉각 강한 반탁세력이 된다. 하지만 도올은 모스크바 3상회의를 보면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서러 나누기보다는 동남아시아의 태국처럼 독립시켜 중간지대로 놓으려는 생각이 처음에 많았음을 주장한다. 실제로 소련은 어땠을지 모르나 미국은 한국의 정부 성립이후 공산세력과 맞닿는 지역이에도 군대를 철수시켜 한국전쟁의 원인을 다소 제공했다. 때문에 민족세력이 3-5년정도에 불과햇을 신탁통치를 받아들이지 못한 악수를 둔것을 분단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또한 이 실수는 친일세력에 기사회생의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 정당의 조상은 한국민주당, 즉 한민당으로 해방이후 숨을 죽이고 있다 반탁운동을 기회 삼아 성립한다. 이들은 대지주에 친일파, 기독교를 믿는 보수 세력으로 혼란한 해방정국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반 반탁운동을 통해 민족세력과 합세하고 정통성이 없어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그래서 독재정권으로점철된 우리의 초기 헌법에서도 대한민국 정부가 임정을 계승한다고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반탁운동을 통해 민중의 지지도 어느정도 얻어낸다.

 이승만은 이들의 세력을 등에 없는데 이승만의 지지도는 낮았으며 정통성도 없었다. 그래서 때린 본보기가 제주다. 제주 4.3의 시작은 광주민주화 운동처럼 어처구니 없다. 말을 탄 경찰이 아이를 다치게 하고도 이렇다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이에 분개한 도민들은 총으로 사격하여 숨지게 한 것이다. 당시 경찰은 상당히 친일 세력이었고 사법권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나라가 성립하지 않아 군대가 아닌 경비대가 있어 무장수준도 거의 군대수준이었다. 이는 일제의 경찰 무단통치에서 모두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작은 사건을 경찰은 사과하지 않고 문제를 키워나간다. 육지에서 군대가 더 동원되었으며 일부 양심적인 지휘관에 의한 화해시도는 무식한 미군지휘관에 의해 무시당한다. 그 결과 당시 도민 30만 중 무려 3만여명이 학살당한다. 여순사건도 마찬가지다. 여수지역은 오래전부터 제주지역 사람들이 자주 뭍으로 나가며 진출하는 지역으로 제주와 관련이 깊은 곳이었다. 지역 사정이 이러하니 제주로의 토벌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승만 정권과 미국은 여수와 순천 지역의 반란군을 토벌한다며 민간인 학살에 참여한다.

 이 두 민중항쟁으로 이승만을 많은 것을 얻는다. 숙군을 단행하여 군대내에 있던 합리적 민족 진영이나 좌파세력을 속아내고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세력이나 친일파를 주세력으로 삼았다. 거기에 공포정치로 남한 지역 내에서 지배권을 확립했으며 주민들의 이동을 제한하는 유숙계같은 비민주적 제도를 시행하여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눈엣사기 같았던 여운형, 김구등을 차례로 제거하여 정적을 몰아내고 독재의 기반을 마련한다.

 이후 그가 행한 국가보안법의 설립이나 수십만을 죽인 보도연맹사건, 그리고 한국전쟁당시의 민간인 학살과 한국전쟁 그자체, 10여년간의 독재를 생각한다면 당시의 역사는 두고두고 아쉽다.

 책을 다 보니 도올은 원래 서양학을 전공하였고, 성경이나 기독교 연구가 전공이었다. 그런 그가 근현대사의 선구주자처럼 활약하게 된 것은 시대의 요청때문이었다. 원래 언어학자이지만 비판론자가 된 미국의 촘스키같다. 그는 언제든지 원래의 전공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같다. 벌써 70이 넘은 고령이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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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1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9-03-24 14:10   좋아요 1 | URL
저도 현대사책은 많이 보았지만 자꾸 잊고 그래서 더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도올이 권력에 순응했는지는 잘모르겠네요. 하지만 이사람도 지난 9년간은 방송빈도가 현저히 줄었던 걸로 보았을대 그리 협력하진 않은 듯 합니다.

2019-03-24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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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역사가 제법 길기도 하지만, 우리완 다르게 상당히 많은 수와 왕조들이 자주 명멸해갔다. 한국에선 통일왕조가, 혹은 분열상황에서도 서로 간의 균형이 500년 정도는 가는 반면 중국은 그 기간이 이삼백년 정도로  한국의 절반 수준이다. 여기엔 아무래도 이렇다할 지리적 방어선이 없는 기름진 중원을 침탈해오는 유목세력들의 꾸준함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장성도 만들었을 것이다. 별 쓸모는 없었지만.

 이 책은 그렇게 많은 왕조가 명멸한 중국의 여섯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도 여러 왕조가 도읍으로 삼은 도시가 있듯, 중국도 역시 그러하다. 여섯개의 도시는 장안, 뤄양, 카이펑, 항저우, 난징, 베이징이다.

 

1. 장안

 장안은 한자 뜻 그대로 길게 오래도록 평안한 곳이라는 의미이다. 왕조가 오래도록 평화롭게 지속되는 염원이 담겼다 할 수 있다. 장안은 중국인들이 중원이라고 일컫는 황하 중상류 지역에 위치하며 이곳은 강으로 둘러쌓여 교통의 요지이면서 방어가 유리하고 여러곳으로 접근하기 쉬운 천혜의 장소이다. 그래서인지 중국 초기 국가들과 문명은 여기서 발생했으며 그래서인지 역대왕조가 가장 많이 도읍한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고대국가인 하, 상, 주, 전국시대의 진, 한, 수, 당이 모두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장안성의 전성기는 아무래도 국제적 성격이 강했던 전성기 당의 수도로서의 장안이다. 워낙 대단해 발해와 일본의 왕조가 장안을 본따 그들의 수도를 건설했다. 전성기 장안의 인구는 무려 백만에 달했으며 크기는 동서로 9.7km 남북으로는 8.5km의 장방형으로 당시 서양 최고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의 무려 7배에 달하는 크기였다.

 장안에는 방이라는 폐쇄공간이 있었는데 이것들이 108개가 장안성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시의 가운데는 황제가 다니는 주작대로가 있었으며 주작대로를 기점으로 동시와 서시로 나뉘었다. 도성의 동서남북에는 각각 3개의 문이 있었는데 천지인을 뜻했다. 도성내부에는 방 사이로 9개의 길이 있었는데 고래로 중국은 우리가 전토를 팔도로 나누는 것처럼 땅을 구주로 나누는 전통이 있었으며 이는 그를 의미한다. 거기에 방은 13줄로 배열되었는데 이는 12달과 윤달을 의미하며, 황성 남쪽에 있던 4개의 방은 4계절을 의미한다. 이처럼 장안은 중국 전체와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는 표현하려는듯 철학적으로 완벽한 도시였다.

 하지만 문제도 많았다. 일단 도시가 너무 폐쇄적이었다. 장안은 상당한 크기였지만 웅장한 성벽에 둘러쌓여 도시와 확장에 문제가 많았다. 또한 장안 내부의 방들도 폐쇄적이었다. 성도 아니면서 각 방들은 높은 담장에 둘러쌓여있었다. 밤이면 각 방은 문을 닫고 도시경비대가 순찰을 돌았다.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동시엔 고관대작과 귀족이 거주하는 반면 서시는 외국상인들와 평민들이 살았다. 공간적으로 분리된 셈이다. 이로 인해 당의 장안에는 대부분의 백성이 세들어 살았으며 당의 국운이 기울었을 댄 가난함이 이루말하기 힘들정도였다고 한다.

 

2. 뤄양

우리가 낙양으로 알고 있는 도시다. 한자로 양은 강의 북쪽을 의미하므로 뤄양은 낙하의 북쪽에 있는 도시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한양도 한강의 북쪽이란 뜻이다. 뤄양은 동주, 후한, 조위, 서진, 북위, 수, 당, 후량, 후당의 아홉왕조가 도읍한 곳으로 장안 만큼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위용을 자랑한다.

 뤄양은 장안에 비해 뚜렷한 장점이 있었는데 장안이 기후가 건조해 농사가 잘 되지 않아 식량수급에 문제가 많았던 반면 뤄양은 식량 공급이 매우 원활했다는 점이다. 이는 기후탓도 있지만 좀더 하류에 위치하고 낙하의 존재로 조운에 매우 유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수나라때 대운하가 건설된 이후로는 뤄양은 조운의 중심지로 사용되어 매우 많은 곡식창고가 건설되었다.

 

3. 카이펑

 카이펑은 후량, 후진, 후한, 후주, 송이 도읍한 도시다. 카이펑은 장안이나 뤄양에 비해선 좀 덜알려진 편인데 아무래도 중국 왕조중 군사적인 면에서 가장 맥을 못춘 송왕조의 도읍이어서가 아닌가 싶다. 카이펑은 주변 지세가 낮고, 주변에 이렇다할 산 하나 없어 방어에 매우 취약했다. 하지만 이를 만회할 만한 장점이 있었는데 바로 드넓은 평지와 더불어 주변 수로가 도시에 촘촘히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중국의 왕조들은 카이펑 인근에 인공운하인 변하를 건설하고 황하와 회하를 연결하는 수상교통의 요지를 건설했다.

 카이펑은 주변하천이 많고 지세가 낮아 교통엔 유리했지만 이로 인해 수공을 자주당했다. 카이펑은 점령한 적들은 대부분 변하를 막아 물을 모아 터뜨리는 형태로 카이펑을 침수시켜 점령하는 방법을 자주 택했다. 역설적으로 이는 방어에도 사용된 적이 있는데 중일전쟁시절 일본군의 진군을 막기위해 변하주변의 제방을 국민들군이 터뜨린적이 있다고 한다.

 카이펑은 수도로 삼은 송을 세운것은 조광윤이다. 그는 조선의 이성계가 고려의 장수였던 것처럼 후주의 신하였다. 후주의 7살황제 공제가 다스리던 시절 갑자기 북방의 요가 후주를 침입한단 소문이 들렸고 이에 절도사 조광윤은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다. 원정중 천막에서 잠든 조광윤이 일어나자 자신의 몸엔 어느새 황포가 덮여있었고, 주변 사람들은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이에 조광윤은 천명을 깨닫고 회군하여 왕위를 찬탈한다. 우리의 위화도 회군과 참 많이 비슷하다.

 조광윤은 북벌을 하기 보다는 보다 쉬운 남쪽의 왕조들을 먼저 정벌하였으며 사대부를 중시하였다. 조선과 많이 비슷한 점인데 조선의 성리학의 토대인 주자학인 송대에 발전하였기 때문인듯 하다. 그래서인지 송의 황궁은 중국의 매우 화려한 다른 궁에 비해 매우 적은 규모였다. 또한 송은 백성을 위한 복지제도가 발전하고, 상업이 발전하는등 현대적 관점에서 상당히 선진적인 국가를 건설했다. 당의 장안과는 다르게 폐쇄적인 방도 없었으며 야간 통금도 없었다. 하지만 북벌을 결국 해내지 못한 점과 문치주의로 군사력이 약해 결국 금에 의해 남으로 쫓겨나 남송이 되며 원의 쿠빌라이에 멸망당하고 만다.

 나라의 근본인 같은 성리학이어서인지 백성을 위하는 민본정치를 이념으로 삼고, 집권층이 사대부로 검약하고 군사력도 약해 외침에 크게 당했다는 점에서 송과 조선은 상당히 비슷했다.

 

4. 항저우와 난징

 항저우는 금에 카이펑을 잃은 송이 도읍한 곳이다. 유명한 중국음식인 동파육이 기원한 곳이고 상당히 유명한 자연환경과 문화가 가득했다. 책을 읽다보니 중국의 지배자들은 강남의 높은 문화수준와 생산력, 자연환경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정작 이곳은 도읍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북방왕조의 침입에 의해 마지 못해 도망간 경우거나 왕조자체가 이곳에서 창업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아무래도 문화의 중심과 한족의 정통성이 중원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였다.

 난징은 베이징과 더불어 '경'을 유지하는 곳이다. 북경과 남경인 것이다. 오와 동진, 송, 제, 양, 진의 육조가 도읍하였다. 특히, 난징은 명의 초기 수도였는데 명을 세운 주원장이 수도로 삼았다. 주원장의 본명은 주중팔이었는데 주살안다는 의미의 주와 원나라의 원을 써서 원을 멸하는 인물이라는 뜻을 가진 주원장으로 개명하였고 이를 이루어낸다.

 주원장은 난징에 도성을 쌓고 13개의 문을 만들었는데 남쪽은 남두육성을 본따 북쪽은 북두칠성을 따라 만들었다. 남두육성은 삶은 관장하고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삶전체를 관장한다는 뜻으로 도시를 만든듯 하다.

 난징은 매우 좋은 도시였지만 중국전체를 다스리기엔 무리가 있는 도시였다. 이에 주원장은 다른 지역으로 천도하고자 했지만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한다. 명은 지금의 북경으로 천도하는데 이는 주원장의 아들 주체가 왕위를 찬탈하였고, 연왕이었던 주체가 자신의 근거지로 수도를 옮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체는 조선의 이방원과 상당히 유사하다. 서열도 각각 넷째와 다섯째이며, 엄청난 견제를 받았으며 동생으로부터 나라를 빼았았다는 점도 같다. 이런 주체를 견제하기 위해 주원장은 공신세력을 엄청나게 숙청하였는데 이로 인해 정작 황태손을 지킬 세력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5. 베이징

 지금의 중국 수도인 베이징은 명, 원, 청등 가장 최근이면서도 굴직한 왕조들이 도읍한 곳이다. 그리고 명을 제외한다면 주로 유목 정복왕조가 도읍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엔 이유가 있는데 베이징은 바로 남쪽의 농경과 북쪽의 유목의 점이지대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을 따라 중국의 만리장성은 15인치 등우선과 거의 일치한다. 15인지는 연간 강수량 381mm로 농경의 한계지대이다.

 따라서 베이징은 유목민족이 자신의 정체성은 유지하면서 농경민족인 한족은 지배관리하는 최적이자 한계지역이 된다. 베이징은 대부분의 도읍이 장방형인것과는 다르게 요철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베이징이 발전하면서 남부지역의 인구가 늘자 외성을 더 크게 축조하게 되었는데 남쪽부터 시작하여 그 쪽은 크게 짓고 도중에 비용이 모자로 역지로 연결하다보니 남쪽만 커졌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은 중국인에게는 하나의 큰 상징이자 자부심이며 한계이다. 그만큼 역설적인 곳인데 진시황이 처음 축조한 이유가 통일된 중국을 하나라 묶고 정립한 세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며 더불어 북방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장성은 그후로 계속 중국의 확장과 고립 및 공포와 폐쇄성의 양면을 갖는다. 장성은 수세시엔 방어와 폐쇄의 역할을 공세시엔 확장의 그 지역의 식민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공세인 요즘은 장성을 함부로 한반도 북쪽까지 연장하려는 속셈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책에 기대한 건 중국의 여섯도읍지와 수도로서의 지리적 이점등을 알고 싶어서였지만 사실 이 부분은 책의 일부이고 대부분이 역사적 문화적, 관련 인물 내용들이다. 중국의 역사를 좀더 알게 된 면도 있지만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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