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 우리 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정형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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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역사, 특히 상고사에는 이상한 부분이 있다. 바로 기원전 2333년 건국한 고조선과 그 이후 삼국시대까지의 연결고리다. 고조선은 2천년 정도로 그 역사가 매우 긴데, 하나의 정치 단일체가 이렇게 긴 기간 이어지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그럼에도 건국 후 1500년간 이렇다 할 역사적 서술 없이 이어지다 중국 춘추시대 연나라와의 충돌, 그리고 기자조선, 한씨조선, 위만조선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언급되다 통일 왕조인 중국 한나라와의 갈등으로 멸망한다. 그리고 고조선 아래쪽, 한반도 한강 이남 지역에는 진이라는 연맹체에 가까운 나라가 있었다. 이들도 고조선의 멸망과 비슷한 시기에 사라진다.

 이후 고조선에 있던 지역엔 고구려, 부여, 숙신, 옥저, 동예 등이 들어서고, 아래 쪽엔 삼한이 있다가 이후 백제, 신라, 가야가 들어서며 삼국시대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역사 학계의 일부학자들은 기원전 2333년에 세워진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실제로는 기원전10세기 정도로 비정하는 경우도 많다. 그때서야 객관적 증거라 볼 수 있는 중국의 역사기록에 조선이 확실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중국의 사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 고려 중기에야 만들어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구려는 유기, 백제는 서기, 신라는 국사를 편찬했다. 또한 멸망한 조선도 역사서를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은 자신들의 뿌리이자, 전 시대인 상고사를 자세히 서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남아있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어쩔수 없이 불완전하게도 남이 우리를 서술한 것으로 우리의 상고사 퍼즐을 맞춰야만 한다. 

 그런데 이는 문제가 많다. 다른 나라인 중국은 우리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고 기록을 했으며, 자신들의 입장에서 왜곡해서 기록하기도 하고, 같은 지역, 같은 민족, 같은 국가더라도 시기에 따라 명칭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중국은 다른 나라의 말을 자신들의 한자로 음차해서 기술해버려 더 혼란을 주기도 한다. 실제로 중국은 영어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예수 그리스도로 음차해 버리고, 네덜란드를 뜻하는 홀란드도 화란으로 음차해 버린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지만 만약 세계가 멸망하고 지금의 기록이 전무한 상황에서 먼 훗날의 후손들이 이것을 보고 둘을 등치시킬 수 있을지 심히 의문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감안해서 상고사의 퍼즐을 맞춰야 하기에 여기에는 반드시 실증적인 자세로 임하기는 어렵다. 다소의 합리적인 상상과 개연성으로 퍼즐을 맞춰나가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기록만으로 역사를 보면 서로 상반되는 기록도 많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우리만 갖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 기록은 상실되거나 아예 기록이 없는 경우도 많기에 다른 나라들도 이런 상상과 퍼즐 맞추기식 역사연구를 진행한다. 

 책은 한반도를 진인의 땅이라고 주장한다. 즉, 진인이 우리의 민족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직계 조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상한 대목이다. 한국을 뜻하는 즉, 우리 역사상 조상들이 칭한 국가나 민족의 호칭은 고조선과 조선이 사용한 '조선', 고구려와 고려가 사용한 '고려', 그리고 삼국이 자신들을 뜻한다고 여기기도 했고, 삼국시대 이전에 한강 이남에 있었던 '한'이 대표적이다. 어디에도 진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진'이란 국호나 호칭은 역사상 여러번 있었다. 우선 언급한 고조선 시대 한강 이남을 차지했던 '진', 그리고 고조선이 있었을 시기 주변에 있었던 '진번', 삼한 시대의 '진한' , 마지막으로 대조영이 발해를 세우고 사용한 첫 국호인 '진'이다. 때문에 '진'이란 명칭도 우리 역사와 무관치 않고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중국의 기록과 최근의 고고학 연구, 다양한 문헌,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총망라하여 자신의 합리적 개연성과 상상력을 동원해 한국의 상고사를 복원해나간다.


1.공공족과 단군 숙신

  먼저 진인의 조상을 다루는데 그들은 지금 중국 황하문명에 자리한 '공공족'이다. 물론 공공족도 이주민이다. 세계 4대 문명 중 황하 문명은 시기상 다른 문명보다 그 발원이 늦은 편이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펴져나가 지금의 서남아시아와 유럽을 채우고 아시아로 향했다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공공족이 서남아시아 지역쪽인 메소포타미아의 수시아나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천산산맥을 너머 중원으로 들어왔다고 비정한다. 이들을 기원전 5천-3천년 경 중국의 앙소문화의 주인공인데 앙소문화의 채색토기와 수시아나의 채색토기의 유사성, 농사의 신이나, 물의 정령등이 채색토기에 같이 등장하는 것을 그 증거로 본다.

 공공족은 상징문양이 있는데 가운데 工있는 공자는 하늘과 땅을 막대기로 연결한 것으로 신단수다. 그리고 좌측에는 태양이 있고 오른쪽에는 뱀이 있다. 공공족은 태양을 숭배한 것으로 보이는데 뱀은 태양의 햇살이 대지로 침투하는 것으로 여겨 생명의 근원이자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지금의 랴오하 강, 즉 요하에는 동북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명이 공공족 이전부터 존재했다. 오랫동안 중국은 중국 문명의 시작은 황하유역으로 여겼지만 요하에서 더 수천년 더 오래된 문명이 발생함에 따라 자신들의 문명의 기원을 이미 이쪽으로 태세전환한 상태다.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농경이 아닌 유목이 더 적합한 이 지역에 고도의 신석기 농경 문화가 있었던 것은 당시 기온이 지금보다 무려 1.5-2도 정도 높아 이 지역이 오히려 중원보다 농경에 더 적합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문화를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신석기 후기 요하 상류와 대릉하 상륭의 문화로 기원전 4500-3천년 경이며 제5의 문명발상지로 여겨진다. 홍산은 적봉시 동북방의 붉은 산을 의미한다. 여기서 거대한 제단, 여신묘, 돌무지 무덤 등 초기 국가단계 수준으로 여겨질만한 문물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여신묘를 보면 다양한 동물 석상이 있는데 가운데 곰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곰을 숭배하는 부족이 이 지역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후기 홍산문화는 중원의 앙소문화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차차 융합한다. 홍산문화 지역의 이주민 중 일부가 내려와 중원인근에 자리한다.저자는 그것을 염제와 황제의 무리로 파악한다. 이들은 처음엔 공공과 공존하지만 차차 세력을 키우고 황제가 치우와의 탁록대전에서 승리하게 되자 황제계가 중원을 차지하게 되고 공공족은 동북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공공족은 중국의 오랜 사서인 사기, 서경, 순자, 열자, 회남자, 산해경 등에 언급되는데 모두 적대적 세력으로 기술된다. 

 저자는 이 선진적 농경기술을 가진 공공족을 단군 신화의 환웅 집단으로 파악한다. 이들이 앞선 농경 기술을 바탕으로 홍산문화권의 곰부족과 연합하게 되고 그래서 생겨난 정치체제가 고조선이 되는 것이다. 

 중국은 황제계가 더 앞섰던 홍산문화권에서 발원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황제를 곰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황제계는 여신묘에 새의 석상도 있었는데 곰보다는 이쪽과 더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만약 황제계 역시 곰과 관련이 있는 집단이었다면 중국과 한국은 상고사의 먼 같은 조상에서 기원한 셈이 된다. 

 기록에서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중국의 요임금 즉위 시절로 비정한다. 송나라의 자치통감은 이 시기를 무진년으로 비정하고, 제왕세기에서는 갑진설로 비정하는데, 조선초 서거정이 동국통감에서 갑진설을 따랐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단군 원년을 요임금의 원년을 요25년인 무진년으로 잡아서 단군 조선의 원년을 기원전 2333년으로 정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중국의 기록에는 주변에서 이렇게 강력한 정치체였을 조선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 하지만 중국의 사서에는 요순 시기에 숙신과의 교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저자는 조선을 숙신으로 파악한다. 숙신과 조선 모두 주신을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다른 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청의 흠정만주원류고는 숙신의 본음을 주신이라고 기록한다. 그래서 저자는 지금의 고조선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요서의 홍산문화 지역에 숙신이 있었던 것으로 기술한다. 


2. 후조선과 진국

 조선은 천년 이상을 존속하다가 중국의 상나라 무임금 시기에 멸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저자는 이유를 두 가지로 파악한다. 첫번째는 정치적 원인이다. 중국은 중원에 강력한 통일왕조가 전성기를 맞이하면 거의 반드시 주변 민족을 정복하거나 복속한다. 상나라 무임금 시기 나라가 강성했는데 이 시기 주변 민족에 대한 대대적 정벌을 단행했고 이들은 상에 밀려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흉노의 공격이 게르만을 밀어내고 그것이 로마 멸망의 원인이 된 것처럼 이들 역시 조선의 근거지로 밀려들게 되었다. 이것에 멸망의 대외적 원인이다.

 다른 하나는 환경적 요인으로 급격한 기온의 저하다. 농업지역이었던 이 지역의 기온이 유목에 적합한 지역이 되었고 이는 조선의 쇠퇴로 이어졌다.

 단군 숙신의 기존 주민들은 새로운 유목민들에게 밀려나서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들을 진인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 지역에서 고인돌 문화를 창안한다. 이 지역에 고인돌이 무척이나 많고 고조선의 대표적 표지인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 집중 지역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다. 기존 단군숙신이 있던 요서는 유목민의 터전으로 무려 164년 간 공백지로 남는다.

 그리고 기원전 1046년 상이 망하고 주가 등장하자 상의 주민 일부가 동북으로 이주하고 기존의 요서 진인 집단과 같이 조선을 계승한다. 이것을 저자는 기자 조선으로 파악한다. 초기 기자조선은 과거 단군 숙신과 비교할 때 매우 미약한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주변의 연나라와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 세력으로 성장해나갔고 대릉하 중류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그리고 춘추시대 중국 북경 남쪽지역에 '한'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한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는데 그 지도자들이 기자조선으로 들어와 정권을 장악한 조선이 한씨 조선이 된다. 저자는 이 한씨는 중국의 화하족이 아니며 독자적 족속으로 파악한다. 또한 한씨의 조상을 공공족으로 파악한다. 과거 공공족이 동북으로 밀려나며 대개의 세력은 단군숙신의 일원이 되지만 그 이남에 남아있던 세력이 있었고 이들이 한의 중심세력이 된 것이다. 

 한씨 조선은 매우 강성해져 중국 춘추 시대의 연과 대등한 세를 자랑할 정도로 강성해진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연의 장수 진개는 대대적으로 요서의 한씨 조선을 공략한다. 기록에 의하면 2천리 정도의 땅을 빼앗긴 것으로 나오는데 저자는 요서의 조선에게서 천리, 그리고 그 동쪽에 있었던 요동의 진번에게서 천리를 빼앗은 것으로 파악한다. 세력이 약화한 한씨 조선은 요서를 상실하고 대동강 유역의 한반도 서북부쪽으로 중심을 이전한다. 또한 많은 유민이 한강 이남으로 이주한다. 한씨 조선은 훗날 중국에 통일 황조 한나라가 성립하고 한이 건국초기 북방의  흉노에 고전하며 세력이 약화하자 요동 일대까지 영토를 수복한다.

 마지막으로 조선을 차지한 것은 위만이다. 한씨 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은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한반도 이남으로 대거 이주한다. 한반도 한강 이남 지역엔 원래 단군 숙신 멸망 이후 들어진 유민인 단군숙신 진인과 한씨 조선이 진개의 공격으로 영토를 크게 상실하자 이남한 한씨 조선 진인이 있었다. 이들은 소국의 연합체인 진국을 성립시킨다. 

 훗날 진국이 멸망하고 나서 이들을 계승한 삼한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사용하는 한이라는 명칭이 바로 한씨 조선에서 비롯한 것이다. 


3. 진번과 변한

 한민족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진인은 저자에 의하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사나에서 온 것이다. 한민족에는 진인과 더불어 또 다른 원형의 축인 부여인이 있다. 부여는 만주 북부의 국가로 위만 조선 멸망 후 성립한다. 그리고 부여 아래에 건국한 강력한 고구려도 부여계이며, 한강 지역의 차지하며 강력하게 성장한 백제 역시 왕족의 성씨가 부여이고, 성왕 시절 남부여로 국호를 개칭할 만큼 확신한 부여계다.

 저자는 이 부여계의 조상을 프리기아인으로 파악한다. 프리기아인은 역시 공공족처럼 천산산맥을 넘어온 족속이지만 시기는 공공족보다 수천년 뒤이다. 이들은 난하 하류에 정착한다. 중국의 기록에는 이들이 정착한 지역을 그래서 이지나 영지, 불령지로 기록한다. 불령지가 프리기아인은 음차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이 지역을 발해로 부르고 현재도 발해만으로 부르는데 프리기아인의 프리를 부리나 발로 음차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발해만은 프리기아인이 사는 바다 지역 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여인 역시 프리기아인이 된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공격으로 프리기아인은 북과 동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북으로 이주한 이들은 요서 지역에 고리국을 세우고 고리국의 동명이 남하하여 부여를 건국한다. 그리고 동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지금의 요동반도에 자리잡고 기존의 단군숙신의 진인들과 같이 국가를 건설하는데 그것이 진번이다. 저자는 진번을 진인과 부여인의 연합으로 생각한다. 

 언급한 것처럼 요서 지역에 강성한 한씨 조선이 있을 때, 요동엔 진번이 있었는데, 연나라 진개의 공격으로 양국이 천리 씩 땅을 빼앗기자 조선은 한반도 서북부로 이동하고, 더 동쪽에 있던 진번은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진번의 위치가 기록상 오락가락 한 것이다. 또한 이 경천동지할 공격으로 한씨 조선이 그러했던 것처럼 진번의 주민들도 상당수가 한반도로 남하하게 되는데 이 지역이 나중에 가야가 성립하는 변한 지역이다. 

 즉, 한반도에는 상고사에서 3차례의 이주 물결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단군 숙신이 멸망한 후,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로 이주한 진인이다. 두 번째는 한씨 조선과 진번이 연나라 진개의 공격으로 그 중심지를 잃고 대거 동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발생한 대규모 유민들이 내려 온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부여계 변한이다. 프리기아인이 북으로 이주하면서 부여를 세웠는데 이들의 집단이 차례로 남하하며 기존의 진인을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를 세우며 남하한 것이다. 


4. 삼국의 성립과 삼한 일통

 삼국은 진인이 바탕이 되었음에도 그 지배 및 건국세력이 변한, 즉, 프리기아인에서 기원했기에 고조선 계승의식이 희박하다. 그래서 신화 자체가 다르다. 단군신화는 천신 환웅이 하늘에서 신단수를 타고 강림해 신정을 펼치는 구조다. 하지만 부여의 건국 신화인 동명신화는 태양의 광명이 신성한 여인의 몸에 내려 잉태하는 형태다. 고구려 주몽도 비슷하며, 백제의 온조는 신과 다름 없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이기에 별도의 건국신화가 없다.  

 삼국 중 신라가 진인을 계승한 흔적이 가장 강하다. 신라는 진인을 가장 강력하게 뜻하는 진한에서 성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위만조선 말기 상 벼슬에 있던 역계경은 왕과 의견이 대립하자 무려 2천호를 데리고 남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한반도 이남에는 진국이 있었는데 견제로 인해 이들의 중심지에는 안착하지 못하고 역계경의 세력이 소백산맥 동쪽으로 이주하여 진한을 형성하고 신라 건국 세력인 사로 6촌의 중심이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는 진국이 멸망하면서 내려온 세력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가 진인의 계승 흔적이 가장 강한 것이다.

 신라는 특이하게도 왕족의 성씨가 세 개인데 박, 석, 김씨이다. 이는 사실상 지배층이 교체된 것으로 나라가 바뀐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다. 석씨 왕은 몇 되지 않지만 신라는 내물왕 시절부터 김씨의 독주체제가 완성된다. 시조는 김알지인데 신라의 김씨 왕족은 천산 주변의 사카 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신라 김씨 왕족의 무덤이 사카 양식과 매우 유사하고, 금관의 황금 양식, 황금 애호 성향 금관 입식의 사슴뿔이 모두 매우 비슷하다. 샤카인은 프리기아인의 일족인데 그래서 신라는 결국 진한 사로국에서 변한 신라로 바뀐 셈이 된다. 

 이러한 사실상의 재건국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시조를 여전히 박혁거세로 유지하고 박씨 일족의 왕족 지위를 유지하는데 이는 진인이 나라의 주축이며 김씨 자신들이 과거 박씨들의 왕비를 계속 배출했던 알영계 였기에 사실상 한 집안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의 교과서는 삼한의 위치를 한반도 이남으만 비정하며 이는 후조선과 남쪽의 진국이 있었던 남북국 시기에 남쪽의 진국에 한씨 일족이 들어서며 삼한을 만들었기에 일면 사실이기도 하다. 중국이 이 삼한이 마한은 백제, 변한은 가야, 진한은 신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고구려를 한국사에서 배제하고 한국의 역사상 삼국 시대를 이 세개 나라의 역사로 파악한다. 고구려를 삼한에서 배제한 것이다. 또한 한국사의 착각은 진한의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자신들와 지리적 혈맥상으로도 큰 상관이 없어보이는 고려를 일방적으로 계승한다고 칭하면서 일어난 것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한의 용어가 잉태된 한씨 조선은 요서 지역과 만주, 한반도 서북부를 아우르는 강국이었고, 한반도의 삼한과 이후 고조선 지역에 태동한 국가들은 이들의 후예다. 중국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있었는데 수서 권6을 보면 수양제는 고구려 침공을 삼한 숙청이라 표현하였고 당고종대 문관사림은 고구려를 삼한 지역으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신라 최치원도 고구려를 마한, 백제를 변한, 신라를 진한으로 표현하였다. 즉, 삼한 일통과 삼한이 한반도 이남의 비좁은 지역을 비정한게 아니라 더 넓은 강역과 나라들로 파악해야한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한반도와 대한민국의 한민족의 원형은 단군 숙신계인 진인을 바탕으로 같은 공공족의 후예인 한씨 조선의 진인들과 프리기아인의 후예인 변한인 계열이 세운 나라들이 합쳐진 것이다. 즉, 크게 세 갈래다. 진인은 중원의 공공족에서 시작하여 요서지역에 단군 숙신을 세우고 멸망 후 요동과 서북한 지역으로 이주했고, 한반도 이남에 진국을 세우게 된다. 또 다른 갈래는 한씨 조선의 진인으로 공공족의 일부가 북경 남쪽 지역에 머무르다 춘추시대 한을 세우게 되고 이들이 멸망하자 요서 지역의 기자조선을 대체해 한씨 조선을 세우게 된다. 이 한씨 조선이 연에게 공격받자 그 유민이 한반도 이남으로 대거 이주하여 진국의 주민이 되고, 준왕 역시 남하하여 진국의 일원이 된다. 마지막 한갈래는 부여인으로 프리기아인이 동으로 이주하여 진번을 세우고, 북으로 이주한 이들은 고리-부여-고구려-백제를 진인과 연합하여 세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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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고려사 1~5 세트 - 전5권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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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칭하는 단어는 세계다, 조선과 삼한, 고려다. 조선은 고조선과 조선이, 삼한은 고조선 아래의 진이 마한, 변한, 진한으로 분화하며 생겼고, 고려는 고구려와 고려가 쓴 국호다. 그래서 북에 위치한 북한은 조선을 국호, 남에 위치한 한국은 한을 국호로 쓰고 있다. 나는 나중에 통일이 된다면 영문명이기도 하고 현대 둘 다 쓰고 있지 않은 고려가 새 국가의 국호로 적합하다 생각한다. 더불어 그 수도였던 개성도 꽤 괜찮은 후보지로 여긴다.

 박시백 작가는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일제강점도 그렸고, 마지막으로 그린 것이 고려다. 나중에 삼국시대나, 남북국시대도 언젠가는 그려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고려사는 조선왕조실록만큼의 기록이 없기에 국가의 유지시기는 조선과 비슷하나 짧게 그려진다. 딱 5권이다. 

 책을 읽으며 전체적으로 든 고려사에 대한 느낌을 주제별로 정리해본다.


1. 지배계층

 신라 말 각지의 유력자인 호족이 득세했고, 이를 바탕으로 후삼국이 성립한다. 왕건도 그 중 하나였고, 왕건은 정복한 지역도 많았지만 신라와 견훤을 비롯하여 각지의 귀부 및 항복해온 호족이 많았다. 그래서 고려 초기의 지배 세력은 당연히 호족이 된다.

 하지만 광종이후 과거가 시행되며 소위 능력을 가진 자들도 등용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음서를 통한 가문의 지배력이 보존되었기에 호족은 곧 중앙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 귀족으로 성격이 바뀐다. 

 고려는 무관이 3품인 상장군까지만 도달할 수 있었기에 당연히 문신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3성의 최고 자리를 모두 문관이 꿰차니 당연하다. 그러면서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고 이는 고려 의종때의 무신 정변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거의 100년간 무신 정권이 이어진다. 사실상 고려는 이 시기 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신 정권은 원과의 전쟁 중 계속 유지되다 원 간섭이 끝나고 최충헌-최우-최항으로 이어지다 최의 시절 허무하게 무너진다.

 이후는 원 간섭기다. 원에 붙어 먹는 세력들이 득세했다. 공민왕 시절 성균관이 다시 부활하고 신진사대부가 등장한다. 이들이 조선의 개국 세력이 된다.


2. 왕권

 고려의 왕권은 개국초부터 취약했다. 왕건이 호족 연합 세력으로 통일을 하다보니 과다하게 결혼을 많이 하였고 그 아들들이 각자의 외가 세력에 따라 강성함을 유지했다. 고려의 승계원칙은 장자 우선이니 여의치 않다면 형제 상속도 공식이었다. 이런 원칙이니 고려는 조선과 다르게 부자승계에 못지 않게 형제승계도 상당하다.

 2대 왕 혜종은 장자이고 왕건 죽음 당시 장성한 자라 즉위했으나 외가가 미약하여 힘이 없었다. 사실상 쿠데타로 제거된 것으로 보이며 동생인 정종과 광종이 차례로 즉위한다. 광종은 피의 숙청과 정치적 개혁, 중국계의 적극적 등용, 노비안검법, 과거로 호족을 크게 약화시키고 강한 왕권을 잠시 확립한다. 성종은 이를 더욱 안정화하였고 왕국은 안정을 찾는듯 했으나 요의 침공으로 휘둘린다.

 요의 침공을 막아내자 비로소 왕권은 안정되고 고려의 태평성대가 열린다. 문제는 의종이었다. 이 놀고 먹기 좋아하는 임금은 즉위 24년간 나라를 말아먹는다. 무신 관리를 하지 못해 무신 정변으로 이어졌고 이후의 고려 왕들은 사실상 모두 허수아비다.

 무신정권 시절엔 최씨들의 눈치를 봐야했으며 최씨가 제거되자 이제는 원의 눈치를 봐야했다. 원이 들어서자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직접 원황실에 입조하였는데 원의 강성함으로 인해 고려왕은 마시 원의 신하처럼 언제든지 인을 빼앗기고 파직되었다. 그러다보니 전왕과 현재 왕이 서로 교차되는 일도 허다했다. 중국의 책봉을 받았지만 사실상 내부적으로 사용하던 황제에 준하던 칭호들도 보다 왕수준으로 격하된다.

 원이 끝나고 공민왕이 왕권을 바로 잡고자 했으나 내부 개혁을 하기엔 외침이 너무 잦았다. 그렇게 나라를 결단난다.


3. 전쟁

 고려는 이름 처럼 개국초기 고구려의 영토 회복이 목적이었다. 버려져있던 평양, 즉 서경을 다시 준공했고 제2의 도시 수준으로 키워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개국초만 해도 발해가 망하고 중국도 5대가 화북에 준동하며 많은 세력들이 귀부해왔다. 그 짧은 시기를 노려야 했지만 내부가 혼란스러워 그러지 못했고 곧 강성한 요가 등장한다.

 고려는 고구려 계승의지와 태조의 유훈때문인지 강성한 거란을 무시하고 잘 대처하지 못한다. 강경일변의 정책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3차까지의 침입이 이어졌으나 아직은 강성하여 이를 모두 막아낸다. 이후 요에 친조하고 그들의 연호를 쓰면서 외교는 잘 이뤄진다.

 여진와 요사이의 공백지에 거주하며 고려에 귀부하기도 하고 약탈을 일삼기도 했다. 요와의 관계가 정리되자 이들을 대거 토벌한다. 먼저 여진 추진 300여명을 불러 잔치를 벌여 방심시킨후 척살하고 본격 대군으로 공략한다. 점령지마다 9성을 쌓았는데 그러다보니 대군이 흩어지고 아직 영토가 완전하지 않아 여진의 공격에 시달린다. 결국 힘들게 확보한 영토를 여진이 충성을 맹세해오자 넘겨버린다. 이후 여진은 요를 정벌하고 금을 세우고 화북을 차지해 송을 남송으로 만들어버린다. 다행히 고려는 여진과는 화친을 잘 맺으려 하였고 여진도 고구려, 발해와의 인연, 지배자가 고려계라는 특성으로 인해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

 무신정변이 나고 몽골이 쳐들어온다. 처음엔 양국이 힘을 합쳐 거란과 여진의 잔존 세력을 토벌하며 우호를 다졌지만 원이 곧 본색을 드러내 고려를 침공한다. 고려는 무신들의 준동으로 국력이 쇠진했고, 원은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거란과의 전쟁때와는 다르게 크게 고전한다. 무신정권은 무책임하게도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고자 강화로 천도한다. 백성들은 원의 결사하전 했으나 원의 살육에 노출되었다. 원은 저항하면 모두 죽인다. 수십년의 항쟁으로 백성들은 지치고 나중엔 원에 적극 항복하는 경우도 많아진다. 조정을 믿어봐야 소용이 없었다. 조정의 구원을 기다리고 오래 항쟁해도 지원이 없어 결국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학습했다. 

 공민왕 시절 고려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원의 잔존세력과 명의 건국 세력인 홍건적이 수십만 규모로 침투했고, 왜구도 수만 단위로 쳐들어왔다. 여기에 각지엔 반란도 많았다. 


4. 불교

 고려하면 불교다. 고려는 불교를 중시하고 호국불교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수많은 사찰을 건설했다. 당시 승려와 불교는 정치집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자가 승려가 되는 경우도 많았고 유력자의 아들이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찰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이들이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교 사찰은 현실에서 백성들을 대상으로 많은 재산을 획득하고 빼앗는 경우도 있었으며 여러모로 권력과 결탁해 현실 정치에 개입하였다. 이런 불교의 폐단을 조선 사대부가 지목하고 싹을 잘라버리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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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발굽 아래의 세계사 - 말은 어떻게 인류의 역사가 되었는가
윌리엄 T. 테일러 지음, 김승완 옮김 / 사람in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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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신석기 시대 자신들의 모습을 영구히 바꿀 몇 가지 시도를 한다. 농경과 가축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때 길들인 가축들 중 일부는 식량자원으로 지금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소, 닭, 돼지, 양, 염소 등이 그러하다. 반면 말의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승마나 경마, 일부 목장주들에게만 말은 의미가 있다. 반면, 일반인들은 일상생활에서 말을 거의 보지 못하고, 영향력도 전혀 느끼질 못한다. 하지만 과거 말은 식량, 운송, 전쟁, 정치, 지정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 문명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책 '말발굽 아래의 세계사'는 바로 이런 내용을 다룬다.


1.말의 진화

 공룡의 대멸종 이후, 포유류의 세상이 시작되며 최초의 새벽말이 등장한다. 이것의 크기는 키 30cm 정도로 매우 작았다. 당시 이 새벽말은 발가락이 뒷 다리 3개, 앞다리 4개였다. 하지만 지금 현대말은 발가락이 1개, 코뿔소는 3개, 맥은 뒷다리 발가락 3개, 앞다리 발가락 4개다. 

 대멸종 이후 풀은 광범위하게 번성한다. 풀은 건조하고 배수가 잘 안되는 환경에서 살아가며. 실리카 함량이 높고 억새서, 동물 입장에서는 나뭇잎에 비해 씹거나 소화가 어려웠다. 풀은 원래 열대식물이었으나 대멸종으로 발생한 생태적 공백을 차지해 지구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초식동물은 당연히 풀을 먹기 시작한다. 하지만 풀로 충분한 열량을 얻으려면 소화가 잘 안되기에 매우 방대한 양을 섭취해야 했고, 소화에도 특별한 능력이 요구되었다. 특히, 풀은 거칠어 그 자체가 동물의 치아를 마모시켰고, 땅에 붙어 있어 먹는 과정에서 흙과 모래도 다량 먹게 되어 이에 대한 처리도 필요했다. 그리고 풀이 자라는 초원은 나무로 둘러싸인 곳과는 전혀 다르게 초식동물 자체가 완전히 노출되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풀의 등장은 원시말의 진화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말은 우선 치아를 강화한다. 핀서처럼 생긴 앞니가 풀을 줄기에서 잘라내고 어금니와 앞어금니 6개가 한 줄로 늘어선 뺨이 발달해 여기서 식물이 갈리고 으깨지며 보호막이 부서져 흡수된다. 원시말 집단인 말아과에서 힙소돈트가 발생했는데 이들은 치관이 긴 치아형태가 발달했다. 힙소돈트는 이솜선 위 아래에 숨겨진 이빨의 추가 부분이 있어 치아가 마모되어도 이를 나중에 쓸수 있다. 

 그리고 말은 위가 1개다. 반추동물은 억센 풀을 소화하기 위해 위가 4개다. 여기서 풀을 소화, 발효하고 다시 씹어 소화시킨다. 말은 1개의 위지만 맹장에서 미생물군 유전체가 풀을 소화한다. 다만 위가 4개나 되는 반추동물보다는 소화효율이 떨어지기에 말은 풀을 더 많이 먹어야 한다. 무려 하루에 체중의 2.5%를 먹어야 한다.

 그래서 말은 하루 종을 풀과 수원을 찾기 위한 지구력이 필요했다. 동시에 개활지 초원에서 포식자를 피하기 위한 속력도 필요했다. 말의 길고 강한 다리, 탁월한 근육, 독특한 인대구조는 모두 이를 위해 진화한다. 그리고 빠른 출발과 속력 유지를 위해 발가락 3-4개가 하나인 발굽으로 변형한다. 

 포식자의 공격을 피하려면 빠른 속력도 필수이나 수적 우위도 중요하다. 그래서 말속에 속하는 동물은 집단 사회구조를 갖는다. 말은 암컷과 그 새끼 무리, 또는 수컷과 그를 따르는 다수의 암컷으로 집단을 이룬다. 말은 안정적, 장기적, 복합적인 사회적 관계로 인해 높은 지능과 독특한 의사소통능력을 갖고 있다. 말은 다른 말 집단의 의사소통을 엿듣는 것도 가능하고, 복잡한 학습과 암기, 개념 형성 능력이 있다. 


2. 말의 확산과 가축화

 현존하는 말은 400만년 전 북미에서 갈라져 나왔다. 유럽인들이 미대륙에 도착했을 때 말이 없었던 상태였기에 말의 원산지가 북미라는 점은 의외의 면이다. 말의 한 갈래는 카발라인 말로 현대의 길들인 말과 유사계통이며, 다른 하나는 얼룩말과 야생당나귀와 당나귀의 계통이다. 플라이스토세의 첫 빙기에 양 집단이 베링육교를 거쳐 아시아로 들어온다. 200만년 전에는 아프리카로도 진출했다. 당시는 춥고 건조하여 다른 동식물에겐 불리한 환경이었으나 말은 이 기후가 초원확산에 적합하여 전성시대를 맞는다. 그래서 플라이스토세 후기가 되면 말은 호주와 남극에 제외한 세계 전역으로 확산한다. 

 초기 얼룩말은 사바나에 잘 적응했고, 야생당나귀는 아프라키와 유라시아의 중간 위도에, 말은 아시아와 유럽 고위도 초원과 삼림에 잘 적응했다. 초기 인류에게 말은 식량자원이었다. 말의 척추와 뇌, 혀, 골수까지 섭취했다. 그리고 말의 골반뼈와 다른 뼈는 무른 망치 제작에 사용되었다. 무른 망치는 무뎌진 돌칼을 날카롭게 만드는 도구였다. 그리고 말의 가죽은 옷이나 물건, 의류에 소재였다. 초기 인류는 말의 속도를 제한하기 위해 물가의 골짜기, 계단지형, 얕은 물길로 몰아서 사냥했다.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어 퇴로를 막고 집단학살하는게 방법이었다. 

 주요 식량이었기에 구석기인들은 뼈, 돌, 상아 등 거의 모든 도구에 말을 그리고, 새기고, 조각했다. 그림속의 말은 짝짓기, 배변, 달리고, 사냥당하는 등 다양한 모습이다. 그림에는 회갈색과 흰색이 섞인 패턴의 말이 가장 많았는데 이들은 프로제발스키말이다. 말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해서 유럽 구석기 예술 4700점 중 말이 전체 이미지의 1/3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런데 2만년전부터 기온이 상승한다. 고대 말의 개체 수를 감당한 광대한 초원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따뜻한 기후와 생태계 변화로 매머드, 낙타, 등소, 말등의 대형 초식동물이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이들에 의존하던 검치호랑이와 다아어울프등도 타격을 입는다. 결국 이들은 홀로세 초기 수백년간 멸종한다. 북미의 야생 말들은 먹이와 서식지의 감소로 인해 크기가 줄어들게 된다. 

 유라시아에서도 말의 개체수가 급감한다. 그래서 인간의 식단과 고고학 유적에서도 말의 등장 빈도는 크게 줄어든다. 개가 이 시기에 길들여지는데 아마도 늑대 역시 대형초식동물의 급갑으로 먹이가 줄자 인간의 서식지 인근의 먹이 찌꺼기를 찾다 접촉 빈도가 올라가서 인간에게 길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개는 1만 6천년 정도에 길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인간은 정착하며 양, 소, 염소 등 대형초식동물을 잡아서 길들인다. 

 암나야 문화는 카스피해 북졲과 동유럽 서아시아에 걸친 넓은 초원지대에 분포했다. 기원전 4천년 암나야 문화에서 해체된 바퀴달린 수레와 길들인 동물의 흔적이 나온다. 하지만 이 문화에서도 말을 길들인 증거나 나오지 않는다. 

 기원전 4천년기 말엽 유라시아 서부에서 고대 농민들은 생활과 농업 노동에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적 혁신을 이룬다. 바로 동물이 끄는 수레다. 처음에는 수레를 끈 동물은 소였다. 수레는 이후 광범위하게 퍼져나간다. 수레는 무거운 사람, 상품의 장거리 운송에 효율적이었다. 초기 수레는 통짜바퀴 4개의 무거운 것이었다. 풀은 넉넉하지만 경작지가 부족해 늘 이동이 중요했던 스텝 유목민에게 수레는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도구였다. 이들은 수레를 이용해서 수백년간 4000km를 넘게 이동하여 내륙 아시아 몽골까지 이동한다. 하지만 우차는 느리고 짧은 시간 이동거리에 제약이 컸다. 그래서 초기 스텝 유목민들은 더 습한 북쪽 지역과 풀이 넉넉한 산림초원 변두리에서 어지간하면 이탈할 수 없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당나귀를 운송수단으로 길들인다. 당나귀는 동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으로 확산한다. 당나귀는 소보다는 힘이 약하지만 여러마리를 사용하면 소보다 빨랐다. 그리고 당나귀는 사막에 강했다. 소보다 물을 적게 소비하고, 고온에서도 잘 견딘다. 

 고대 근동에서는 말이 아니라 당나귀와 오나거를 운송용으로 사용한다. 당나귀와 오나거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탈 것이 이들에게 맞게 변화한다. 소에게 씌우는 멍에는 멍에 안장으로 네바퀴는 두 바퀴로 핸들과 탑승자 1인이 않을 수 있는 일종의 자전거 안장이 추가된다. 굴레나 재갈의 발명 이전이라 소처럼 코와 입에 고리를 걸어 제어했다. 

 잘 길들여진 최초의 말은 흑해와 그 인근 동유럽, 아나톨리아 지역의 야생 카발라인 분류군이다. 시기는 기원전 2900-2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당나귀와 오나거는 유용했지만 따뜻한 사막 지역에 살아서 추운 지역에 부적합했다. 그래서 이들이 끄는 수레는 흑해 북쪽으로는 확산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에 주목한 것이다. 하지만 말의 길들임은 쉽지 않았다. 지난 50만년간 말에게 인간은 주요 포식자로 제1의 경계대상이라 인간이 조금만 접근해도 투쟁 도피 반응이 엄청났을 것이다. 그래서 말에 직접 타는 것을 말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유발해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다만 수레를 끄는 경우는 사람이 뒤쪽에 멀리 떨어져있기에 말에게 공포감을 덜 유발했다. 그리고 말은 무리 짓는 동물이기에 같이 있으면 안정되는 효과도 있었다.  

 말이 이 지역에서 수레를 끌기 시작하자 수레는 다시 변화한다. 신타시타 문화에서는 입술-고리를 대체하는 굴레와 재갈을 발명했다. 제어의 정밀도가 크게 올라갔다 .또한 바퀴살이 개발되었는데 이로 인해 수레의 고속안정성도 개선된다. 말수레의 이동성 개선으로 스텝 유목민은 이동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말은 이동수단이자 식량, 마유를 제공했다. 그리고 발굽으로 주변 얼음을 깨서 유목민이 끌고 다니는 가축들이 겨울에도 풀을 먹을 수 있게 했다. 유목민은 이런 말 수레로 인해 시베리아, 카자흐,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진출하게 된다. 


3. 전차와 말타기의 등장

 기원전 제2천넌기에 스텝 지역에서 전차가 탄생한다. 전투용은 아니었고 가볍고 빠른 실용적 탈 것으로 수레를 경량화한 것에 가깝다. 전차는 기원전 2000년부터 고작 2-3백년 만에 유라시아로 확산한다. 

 말과 전차 기술은 군사력에 이점을 제공했다. 기원전 17세기 히타이트는 근동에서 최초로 전차를 사용한다. 전차로 적의 도시를 포위하여 고립하고 빠르게 이동하며 투사체를 발사했으며 부대를 빠르게 운송할 수도 있었다. 힉소스인은 기원전 18-17세기 북쪽에서 내려와 이집트를 침략한다. 이들은 아프리카 북부 지역의 길들여진 말과 전차를 도입했다. 

 말은 스텝에서는 대량 사육이 가능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아니었다. 이런 말의 생태학적 지위가 기후에 따른 지역의 지정학적 차이를 낳게 된다. 말은 대부분의 농경 및 정착 지역에서 기후상 사육이 어려워 희소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부와 사회적 위신, 군사력의 표상이 된다. 

 한편 전차는 높은 속력을 내기 위해 후방 차축으로 변경된다. 말에 대한 신뢰가 커지면서 오나거와 당나귀의 이용은 감소한다. 근동에서는 말과 당나귀의 잡종인 노새가 인기를 얻는다. 그리고 근동은 말을 키우기 어려운 자연환경이지만 말의 중요성이 워낙 대단하여 대규모로 사육하고 관리하는 것에 무척 힘을 쓰기 시작한다. 

 말과 전차는 몽골고원으로도 전파된다. 카라수크 문화는 길들인 말을 운송에 사용했다. 몽골 최초의 말 문화인 사슴돌-헤렉수스 지구가 등장한다. 이 문화는 사람을 닮은 형태로 조각한 신돌이나 돌기둥인 사슴돌을 젲가했다. 이 사슴돌에는 하늘을 나는 사슴 이미지가 장식되었다. 이 지역의 말은 DOM2 계통의 초기 분파다. 신타시타의 길들인 말과 관련한다. 사슴돌-헤렉수스 말들의 두개골의 코 부분은 운송으로 인한 변형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들은 처음엔 말을 운송에 쓰나 곧 말타기를 시작한다. 

 말타기는 장거리 이동을 수월히 하고, 변두리 쪽의 환경을 활용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말의 사육과 마유의 이용을 늘리고, 부를 축적 가능하게 하여 부의 불평등도 촉진했다. 말타기는 중국의 상왕조로도 전파된다. 상에 들어온 말과 전차는 큰 인기를 끌었다. 상의 전차는 바퀴살을 비롯하여 한개읜 견인 막대와 중심 차축이 있고, 멍에를 말의 목에 맞춰주는 멍에 안장을 사용했다. 상은 청동이 있었음에도 유기물 굴레 마우스 피스를 사용했다. 이는 스텝도 같은 방식이었다. 

 상나라의 북쪽 지역은 스텝과의 교역 및 말 사육에 이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것이 힘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기원전 11세기 중엽 스텝 출신의 제후국 서주가 상을 무너뜨리고 장안을 수도로 삼아 주를 건국한다. 중국에서는 이 후 수백년간 북쪽 변두리가 정치적, 군사적 힘을 주도한다.

 전차는 유용했지만 부서지기 쉬웠고, 유지 보수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전차는 1대에 최소 2기의 말이 필요했다. 그래서 말 공급은 꾸준히 부족했다. 기원전 제2천년기에 말 제어 방식이 변화한다. 뽀죡한 볼피스가 있는 재갈은 단순한 코걸이 보다 말을 효과적으로 제어했다. 마부는 고삐로 말을 제어하고 방향을 전환했다. 말타기가 본격화하자 말도 개량된다. 말의 공격성을 줄였고, 말의 척추부위에 사람의 하중이 실리기에 척추 부위의 강화도 이어졌다. 

 금속재갈은 개량되어 고삐를 당기면 재갈이 말의 입속 민감한 부위를 자극해 마부에 의한 섬세한 조작이 가능해졌다. 기원전 제1천년기 새로운 굴레 기술이 아시아 깊은 곳 까지 전파한다. 처음으로 기병대를 직접묘사한 유적은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 벽화다. 말 두마리와 마부둘이 짝을 이루었는데 한 명이 두 마리 말을 제어하고 다른 한명이 공격을 담당했다. 당시 안장이나 등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DOM2계통의 말은 다부지고 힘이 강했으나 효과적인 기마술에는 부적합했다. 그래서 향후 능력가 지구력, 속력, 심지어 외모에도 초점을 두어 개량을 한다. 키가 큰 말에 대한 선호도 급증하여 기원전 제1천년기 내륙 아시아에서는 말의 키가 1.5m달하게 된다. 말로 인해 기마 유목민은 분쟁, 질병, 생태 파괴의 위기에서 신속한 이탈이 가능해진다. 이들은 전쟁에서 패배해도 사실상 농경 제국과는 달리 멸망하지 않는다. 넓은 초원지대로 이탈하면 되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초원 세력의 이탈이 큰 변화를 낳는다. 기원전 8세기 스텝에서의 압박으로 흑해와 카스피해로 이탈한 킴메르인이 아나톨리아 동부를 점령한다. 기원전 5세기에는 스키타이인이 흑해에 등장한다. 중앙아시에에서는 페르시아-타클라마칸 사막의 넑은 지역에 말을 타는 사카인이 등장한다. 

 기원전 700-400년 사이 초기 안장이 등장한다. 파지리크 문화에서였다. 기원전 제1천년기 효과적인 마구와 활과 화살, 가벼운 방패와 도끼로 무장하고 가벼운 비늘 갑옷을 입은 치명적 집단이었다. 말의 이런 중요성으로 인해 내륙 아시아의 비옥한 말 서식지를 통제하는 것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해진다. 고대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등 제국의 확장은 동유럽, 중앙아시아 초원의 말과 그 말에 기반한 상업, 통신 시스템 덕분이었다. 기마를 일찍 수용한 아시리아를 중동 대부분을 점령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내륙 아시아 정복전 트라키아부터 접수한다. 이 지역은 유라시아 스텝 벨트의 서쪽 끝으로 제국에 말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중국도 적어도 기원전 4세기면 기마를 수용하여 활용한다. 중국은 견융의 침략으로 주가 쪼개져 춘추전국시대를 맞는다. 서쪽에 위치한 진과 조는 이들 국가중 기마를 활용한다. 스텝과 인접했고 북방과도 인접해 기마병의 침입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진은 대규모 기병을 규합하여 정복전쟁으로 전국을 통일한다. 그리고 오르도스의 기마유목민도 격퇴한다. 여기서 밀려난 유목민은 조직적으로 세력을 규합하는데 이들이 흉노다. 

 진은 흉노를 막기 위해 장성을 건설한다. 흉노는 강성해져 오선과 월지를 축출하고 전략적으로 유용한 하서주랑과 타림분지를 차지한다. 이들은 동아시아의 교역과 여행을 통제했고 물자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사막 한가운데 도시를 건설한다. 흉노는 동서양의 방대한 지역을 연결하여 코스모폴리탄적 성격을 갖게 도니다. 중앙아시아, 세비리아, 중국에서 대규모 인구가 유입된다. 흉노는 청동, 철로 만든 고품질의 재갈을 제작하고 안장을 단단한 목재로 내부 지지대를 갖추어 제작해 말의 처축 압박을 위로 분산하고 말과 마부의 신체적 긴장감은 낮추고, 안정성은 높였다.

 흉노가 말 서식지 대부분을 차지하자 중원은 말이 부족해진다. 중원은 말 사육에 적합하지 않아 말을 키우기도 어려웠고, 키운 말도 스텝에 비해 체격과 힘이 부족했다. 중국은 장성으로 유목민을 방어했지만 이는 양질의 말이 넘어오는 것도 막아버렸다. 한의 무제는 장건을 시켜 말을 찾게 한다. 그는 페르가나 분지에 도착해 한혈마를 발견한다. 무제는 이들의 확보를 위해 두 차례 대규모 원정을 하지만 50마리 정도 획득에 그친다. 

 히말라야의 가혹한 환경에서는 힘이 강하고 좋은 말이 자라났다. 중국은 흉노와 적대적이어서 말을 얻기 어려웠고 티베트 고원에 접근해 말을 교역한다. 티베트와 중국 남부의 저지대, 갠지스 삼각주가 연결되어 육상교육을 하는 차마고도가 이렇게 생겨난다. 

 일반적으로 초기 등자의 혁신은 한구과 중국에서 일어나다. 최초의 등자 같은 것이 3-4세기 일부 고분에 등장한다. 등자가 한쪽만 있던 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안정성보다는 탑승보조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안장은 4세기에서 5세기 발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늘한 기후는 유목문명과 농경 문명에 상반된 효과를 가져온다. 기후가 서늘해지면 농경 문명은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여 위기를 맞는다. 반면 초원은 증발량이 적어져 초원이 습해져 오히려 풀이 많아져 유목생산량이 많아진다. 그래서 지구가 서늘해지거나 소빙기를 맞이하면 농경은 위기를 유목문명은 강성해졌다.  

 스텝의 제국들은 강성해져 농경 문명을 점령하고 제국이 커지면 그 관리를 위해 문자를 도입한다. 선비와 거란은 한자를 수용했고, 몽골은 여러 문자를 차용했다. 원은 수도 카라코룸에서 중앙아시아, 카스피해, 볼가까지 연결하는 공식 우편 제도를 확립한다. 이 도로망은 6만km이상이고 4만 4천 마리 이사으이 말과 양, 썰매가가 이용되었다. 도로 주요 구간에 1400개 이상의 얌이라는 공식 역참을 두고 40-50km간격으로 배치했다. 각 얌은 허가증을 소지한 여행자에게 음식과 쉴곳, 새 말을 제공했다. 원은 지폐도 발행하였고 내륙의 교통, 여행, 통신을 보호했다. 몽골은 전쟁에선 무자비했지만 유목민의 관대한 문화로 다양한 배경과 종교가 공존했다. 

 최초의 길들여진 말은 털과 피부가 두텁고, 색이 짙어 따뜻한 기후에 부적합했다. 말을 사막동물보다 더위를 못 견기도 물을 많이 먹어 아프리카에서는 물이 풍부한 지중해와 나일강 유역만 진출했다. 말은 북아프리카로는 확산했으나 오랜 기간 사하라 이남으로는 확산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말을 사막 기후에 맞게 적응한다. 털이 짧아지고 콧구멍이 넓어지고 꼬리 위치가 변해 더위에 적응한 것이다. 말은 단봉 낙타와 같이 이용디었다. 말이 주로 짐을 책임지고 낙타는 말이 먹을 물을 담당했다. 

 사하라 이남의 사헬은 초원 지역으로 말 서식에 적합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 결국 말이 도입되고 아프리카 서부의 가나왕국, 니제르 중부의 가오, 차드호와 트리폴리를 잇는 경로의 카넴등 사하라를 통제하는 이들이 말의 수혜를 입는다. 13세기 초 말리 제국이 1만 마리가 넘는 기병대를 편성했고, 16세기는 송가이 제국, 17-18세기는 오요 제국이 말로 인해 전성기를 맞이한다. 

 말은 사헬을 넘어서 더 남으로는 진출하지 못한다. 습한 환경에서 말은 새끼를 적게 낳고 새끼 사망률도 증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체체파리나 각종 질병, 기생충을 견디지 못했다. 

 동아시아에서는 한나라가 쇠퇴하자 스텝의 영향력이 강해지며 말문화가 한반도로 밀려든다. 고구려가 이를 수용하고 강성해져 5세기에 내몽골과 만주, 한반도 일부를 통치한다. 그리고 말이 이시기에 일본으로 전파된다. 

 아시아의 스텝세력은 유럽으로 진출한다. 4세기 훈족과 7세기 아바르인의 침공으로 게르만이 대거 이동한다. 유럽의 바이킹은 배로 유명하지만 그들도 말을 잘 이용했다. 


4. 다시 미대륙으로 돌아간 말

 14세기 소빙기가 되자 소빙기에 몽골의 침입, 흑사병의 여파로 쇠퇴한 유럽은 활로로 바다를 찾는다. 미대륙이 발견되고, 스페인 사람들은 히스파니올라 섬에 말을 도입한다. 그 섬은 이렇다할 포식자가 없고, 원주민과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섬의 자연이 파괴되어 초원 상태로 말에 적합했다. 말은 카리브제도에서 번성해 남미로 운반된다. 말과 노새는 바다와 그 경계지역에서 교역상품을 운송했고 초기 도로도 개척한다. 

 1519년 코르테스는 말 16마리와 히스파니올라의 말을 도우언해 기마대를 편성해 아즈텍을 공격한다. 원주민은 초기 말을 보고 매우 놀랐지만 곧 적응하여 말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스페인은 원주민에게 말이 가지 않게 통제했지만 그것은 느슨해 곧 말은 멕시코를 거쳐서 미국 대평원에 진출한다. 대평원의 원주민들은 스페인 말 장비를 도입하고 자기들만의 마구도 개발한다. 말로 인해 이들의 생활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데 말을 사냥과, 전투, 의례등에 적극활용한 것이다. 북미에서 말은 번성하여 수천만 마리로 불어났고 이를 이용해 원주민은 유럽 제국과 맞서는 전투력을 보유하게 된다.

 말은 남미로도 향했는데 스페인은 안데스 원주민 을 정복했고 말은 그들에게도 퍼진다. 스페인은 초기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정착하나 마을이 전멸해 말이 아르헨티나 평원으로 퍼져나간다. 원주민은 말에 적응해 역시 북미처럼 사냥과 의례, 전투에 활용한다. 

 말은 19세기가 되면 세계 전역에 퍼지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 영국에서 최초의 여객 철도가 건설된다. 철도는 화물 및 장거리 운송을 획기적으로 개선한다. 하지만 말은 여전히 이용되었는데 철도 역 중간중간을 잇는 운송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서부로 확장하며 원주민과 갈등을 빚는다. 1876년 미 기병대는 리틀빅혼 전투에서 원주민에 대패한다. 철도의 개선으로 초원에 이주민이 대량 유입되자 이들은 초원에 울타리를 치고 원주민의 식량은 들소를 일부러 대량학살한다. 원주민은 식량이 고갈되고 유럽인과의 접촉이 잦아져 감염병에 시달린다. 그리고 미국은 원주민 약화를 위해 초원에 산재한 수많은 말을 도살한다. 결국 이런 압박에 못이긴 원주민은 미국과 굴욕적인 협상을 맺게 되고 억압이 일상화한 보호구역에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자동차가 발명되자 말의 운명은 빠르게 바귄다. 1880년만 해도 뉴욕에 말은 무려 15만 마리였다. 사실상 자동차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말의 변만 하루 130-180만kg이 나왔고 소변만 1만 5천리터에 달했다. 말은 빠르게 자동차로 대체된다. 말은 운송수단 뿐만 아니라 전투용으로써의 가치도 상실한다. 기관총이 나오기 시작하며 기병대는 그 전투력을 상실한다. 

 이처럼 말의 가치가 상실되자 북미의 야생말을 소의 방목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간주되어 대규모 도살 대상이 된다. 그래서 미국의 말은 수천만 마리에서 1차대전 무렵에는 겨우 수백만 마리로 줄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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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와 훈 -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
김현진 지음, 최하늘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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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흉노란? 

 흉노는 대개 야만족, 그리고 초지의 유목민, 침략자, 내륙아시아 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편견이다. 흉노가 있었던 내륙아시아란 중앙아시아, 러시아 서부와 동부와 북부를 아우르고 몽골과 내몽골, 지금의 중국 서북부의 광대한 지역이다. 기후도 단지 초지가 아니다. 이렇게 영역이 광대하니 기후도 사막, 극한, 온대림, 침엽수림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기후가 다양하니 거주민도 농경민, 목축민, 도시민, 수렵민으로 다양하다. 민족도 그러하다. 동북아시아인, 이란계, 인도계, 동유럽계, 게르만계가 모두 흉노에 나타난다.

 흉노는 잦은 교역과 이주를 했기에 수많은 언어와 민족, 종교가 다층적일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지리적으로 유라시아의 모든 지역에 접한 만큼 다른 지역 태생과 다르게 모든 종교와 사상의 중심지에 방문하고 접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종교와 사상 역시 다양하고 관용적이었다. 

 유라시아의 초원 유목민은 초지를 따라 돌아다니기에 명확한 영토관념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은 고정된 초지를 오가며 생활하는데 비교적 확실한 영토관념을 갖고 있었다. 정치체제 역시 통념과 다르게 엄격했다. 

 흉노의 정치체제의 정점은 선우다. 하지만 실제 행정업무는 골드후가 담당했다. 그리고 지방관으로 좌현왕과 우현왕을 두었는데 좌현왕은 동부의 통치자, 우현왕은 서부의 통치자였다. 이중 흉노는 전통적으로 동부를 중시했기에 선우의 후계자를 좌현왕으로 삼았다. 또한 그 아래에 4개의 지방관직을 두었다. 서쪽에 우도기왕과 우도지왕 동쪽에 좌도기왕과 좌도지왕이다. 이들 역시 선우의 아들 내지는 형제였다. 이들 왕의 밑에는 육각왕이라는 최고 귀족이 존재했고 그 아래에는 24만기라는 제국내 최고 지방 총독이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토착관리가 존재했는데 이들은 사실상 말단 지방의 행정관이자 세금징수관 역할을 하였다. 

 

2. 흉노와 중국

 흉노의 선우 묵특은 반란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집권한다. 그리고 반대 가족과 귀족을 모두 숙청한다. 그는 동의 동호와 서의 월지를 격파하고 30만 대군을 양성한다. 기원전 200년 중국은 통일한 한 고조는 강력한 위협인 흉노에 도전했지만 백등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한은 사실상 오랜 기간 흉노의 조공국으로 전락한다. 묵특은 한 문제 시기 신장을 정복하고 카자흐 일대의 26국을 정복하는 등 위세가 대단하여 한 문제 역시 조공을 지속할 수 밖에 없었다. 

 중의 한제국은 BC134년부터 무려 70년간 흉노에 조공한다. 그러다 한 무제 때에 이르러 흉노가 정치적 혼란에 이르자 반격한다. 군신 선우가 죽자 그의 동생 이지사가 정통 후계자인 좌현왕 어단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어단은 한나라에 항복하고 한 무제를 여세를 몰아 묵특 선우에게 1세기 전에 빼앗긴 오르도스 지방을 탈환한다. 그리고 수많은 흉노의 부왕들이 이지사에 반발해 한에 투항한다. 

 그럼에도 흉노는 아직 강성하여 한과 1세기 가량 일진일퇴를 벌인다. 서기 60년 한은 흉노를 격파해 타림분지를 장악한다. 흉노의 패배는 복속부족인 오손과 오환의 이탈을 불러왔다. 흉노는 잦은 패배와 내부 반란으로 흔들렸고 그러자 백년간 선우가 8명이나 등장하는 대혼란기에 빠진다. 흉노는 묵특시기에 거대화하여 남북으로 분리되었는데 혼란기에 북의 질지와 남의 호한야 선우가 살아남았고 이중 호한야가 한나라에 항복해 봉신이 되고 많다. 그리고 호한야는 한과 연합해 질지를 격파한다. 

 하지만 한의 혼란기가 오고 외척인 왕망이 일시적으로 한을 멸하고 신을 건국하는 혼란기가 오자 흉노는 주변 부족을 다시 복속하고 영토를 회복한다. 하지만 남과 북의 분리가 항구화한다. 그리고 남흉노는 중국의 동맹화하고 만다. 그리고 선비족이 등장한다. 선비는 중국과 동맹을 맺고 흉노를 침공한다. 서기 87년 한, 선비 연합군은 흉노 선우를 살해한다. 그러자 55개 흉노 부락이 한에 투앟한다. 서기 89년 한의 두헌이 몽골고원에서 다시 선우를 격파하고 흉노 귀족과 병사 1만 3천을 죽이자 무려 20만의 흉노인이 한에 투항한다. 이후 2세기간 힘을 잃은 흉노는 튀르크, 강거, 선비, 오손에 포위되는 형국이 되고 만다. 

 흉노를 격파한 선비는 흉노와 다르게 제국을 형성하지 못한다. 남흉노는 선비와 오환 중국에 끼인 상태였다. 삼국시대 위의 조조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남흉노의 선우를 낙양에 인질로 삼고 우현왕으로 하여금 흉노를 다스리고 남흉노를 5부로 나누어 중국인이 흉노를 다스리게 했다. 이는 흉노에 매우 굴욕적 처사였다. 

 이후 조씨의 위나라가 멸망하고 진이 들어선다 서기 292년 진에 내전이 일어나자 흉노가 반발한다. 그들은 304년 유연의 통치아래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유연은 자신이 흉노와 중국의 통치자라 주장하며 308년 중화황제로 즉위하며 5호 16국 시대를 연다. 이후 유총이 311년 낙양을 점령하고 진 회제를 회계공으로 격하시킨다.316년 흉노는 장안마저 점령하고 면제도 사로 잡아 회평후로 격하시킨다. 그리고 두 전직 황제는 결국 처형된다. 나머지 진황가는 장강으로 도망쳐 망명국가인 동진을 건국한다. 이로써 중국은 서부는 전량이 통제, 북동부는 선비가 통제, 나머지는 모두 흉노가 통제하는 형국이 이른다. 

 북중국을 통일한 유총은 318년 죽는다. 흉노는 지배층이 다시 분열하여 유총의 아들 유환이 장인인 군준이 살해당한다. 하지만 유요가 군준을 제거하고 유요는 국호를 한에서 조로 변경한다. 하지만 갈부의 석륵이 이탈하여 후조를 세운다. 석륵과 유요의 대결에서 석륵이 승리하고 그는 야만적 통치를 일삼아 한인을 탄압한다. 이후 한인 염민이 권력을 장악하여 갈인 20만을 대량 학살하고 350년 대위를 건국해 흉노시대를 종결한다. 351년 모용씨의 선비국가 전연과 저의 국가 전진이 북중국의 옛 흉노땅을 차지한다. 


2. 중앙아시아의 흉노

 남흉노는 중국의 복속된 후 오히려 시기를 잘타 북중국을 장악하지만 북흉노는 선비에 패한다. 하지만 그들은 절멸되진 않았다. 이들은 알타이 지방에 살아남아 중앙아시아로 진출한다. 중앙아시아엔 쿠샨이 있었다. 구샨은 사산조페르시아의 속신으로 쿠샨샤로 불리며 존속하다 4세기 훈의 침입을 받는다. 4세기가 되자 알타이와 우랄 산맥 사이의 모든 국가와 부족이 훈에 정복된다.

 용어가 자연스레 흉노에서 훈으로 바뀌었는데 중앙아시아의 훈은 흉노에서 유래했다. 결정적 증거는 흉노의 도구인 훈식 청동솥이다. 

 중앙아시아의 에프탈 왕조는 스스로를 훈이라 칭했다. 하얀색은 유목민에게 서쪽을 의미하기에 흉노에게 중앙아시아는 서쪽이고 그래서 중앙아시아의 훈은 백훈이라 불리기도 한다. 에프탈 훈은 페르시아와 공통의 적 키다라를 물리친다. 그리고 에프탈은 이후 페르시아를 침공해 그들이 차지한 키다라 영토를 모두 빼앗고 페르시아를 속국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에프탈은 사실상 중앙아시아 일대의 모든 백훈계 집단의 지배자가 된다. 

 페르시아는 484-550년까지 훈제국에 연공을 상납한다. 에프탈 훈은 페르시아를 복속하고 동으로 확장해 영토가 페르시아, 카슈미르, 쿠챠, 캬슈카르, 호탄에 이른다. 5세기 후반에는 간다라와 인도북서부를 지배하기까지 한다. 6세기 중반 에프탈 훈은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로 동으로는 신장, 남은 인도 중부, 북은 카자흐 초원, 서는 동로마에 이른다. 

 그러다 6세기 중반 돌궐이 나타난다. 에프탈 훈은 유연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유연이 돌궐에 멸망한다. 에프탈에 복속되어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는 돌궐과 연합하고 양자에 끼인 에프탈 훈은 결국 페르시아의 후스라우 1세에 항복한다. 에프탈 붕괴 후 돌궐과 사산페르시아는 충돌하고 그 공백에서 다양한 백훈계 집단이 등장한다. 백훈은 높은 수준의 문화를 자랑했다. 이들은 종교적 다원주의를 지향했고 높은 문화수준과 세계주의를 보였으며 아프간의 바미얀 석굴은 백훈 시대의 작품이다. 


3. 유럽의 훈

 훈과 조우하기 전 유럽의 게르만은 매우 기초적 수준의 정치 사회체제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게르만은 강력한 무력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하고 정치적 통합이 이뤄지지 않아 로마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고트인은 4-5세기 백년간 훈의 지배를 받고 중앙아시아 초원의 문화 및 전통의 영향을 받아 로마에 큰 위협이 되었다. 게르만 역시 훈의 영향을 받고나서야 로마를 위협할 만한 공성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훈은 유럽에 진출해 가장 강력한 알란 세력을 먼저 흡수한다. 훈이 확장하자 테르빙기 고트가 다음 목표였다. 루마니아에 훈이 이르자 로마는 위협을 느끼고 테르빙기 고트를 구원하려 하였지만 훈에 패배한다. 로마식 군제는 초원의 새로운 전술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내륙아시아의 초원군은 강한 기마술과 영국 장국보다 사거리가 2배인 합성궁을 이용한 강력한 궁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훈의 승리로 다뉴브 강 일대의 훈의 통치가 확립되자 이 지역 게르만의 로마로의 이주가 촉발된다. 훈은 겨우 10년 만에 헝가리 서부에서 볼가강 유역을 지배하고 안정화한다. 훈은 370-380년 점령지를 안정시키고 395년 확장하여 캅카스를 따라 사산조 페르시아와 로마를 공격한다. 

 유럽의 훈은 동아시아의 흉노가 점차 동진한 것이기에 그들과 매우 유사한 정치체제를 가졌다. 442-447년 사이 유럽 훈의 아틸라는 형을 암살하고 최고자리를 찬탈한다. 447년 아틸라는 동로마를 침공하여 발칸반도의 70개 도시를 함락한다. 이때 발칸은 철저히 파괴되어 5세가 말까지 사실상 황폐화되어 버려진다. 수도가 위협받은 동로마는 일시불로 금8100 로마파운드(2648kg)을 일시불로 상납하고 막대한 포로 몸값도 지불한다. 그리고 로마는 베오그라드에서 불가리아 스미슈토르까지의 동서500km 남북은 다뉴브가에서 150-200km에 달하는 상당한 영토를 훈에 강탈당한다. 

 훈은 동로마는 지속적으로 괴롭혔으나 서로마의 아예티우르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440년대 중반 아예티우르는 훈의 지원을 통해 갈리아를 통제하던 중 라인 강 연안의 프랑크 내부까지 손을 뻗치다. 사실 갈리아에 대한 양자의 입장은 달랐다. 아예티우르는 훈의 힘을 빌려 자신이 갈리아의 프랑크를 통제한다 생각했고, 훈은 훈대로 아예티우르를 이용해 자신들이 갈리아를 통제한다 생각했다. 그러던 중 아예티우르가 선을 넘은 것이다. 아예티우르와 훈은 갈리아에 서로 다른 왕위 계승자를 지원하며 공조체계가 붕괴하다. 

 양자는 전쟁을 벌이고 로마의 기록은 이를 로마의 승리로 남겼다. 하지만 사실상 훈의 승리로 보인다. 452년 아틸라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아예티우르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이 그 방증이다. 갈리아에서 패퇴한 국가가 중심지를 침공하는데 수수방관한다는게 말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로마는 갈리아에서 중국의 한과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처럼 연공을 바치고 훈을 물린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승리로 기록한 것이다. 

 아틸라 사후 훈은 내전에 돌입한다. 아틸라가 무리하게 정권을 찬탈한 후폭풍이었고 그가 급사했기에 이렇다할 후사를 제대로 만들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위 내내 아틸라는 그의 정치적 기반은 서부 출신 귀족을 내세웠고 그가 죽자 동부 귀족들이 반발을 했다. 훈은 아틸라 사후 내전에도 사라지지 않고 460년대에로 로마를 압박했다. 하지만 뎅기지흐의 실패로 467-469년 훈은 해체한다. 

 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 대장 오도아케르는 훈계일 가능성이 높다. 오도아케르의 아버지인 에테크는 게르만계 어원이 아니다. 이는 튀르크, 몽골계 어원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 이름은 훈울푸스인데 이는 훈 늑대라는 뜻이다. 중앙아시아 즉, 튀르크, 몽골 문화권에서 늑대는 토템이자 신화적 조상으로 숭배된다. 

 유럽에 남긴 가장 큰 훈의 유산은 무엇보다 프랑크 왕국이다.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계 왕국으로 훈과는 민족적 거리가 있지만 게르만은 훈의 유럽 진출시기 수백년간 훈의 침략을 가장 먼저 받고 그들의 용병으로 편입되는 등 가장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을 차지할 만한 정치체제와 군사력을 훈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실상의 계승자에 가깝다. 프랑크 왕국은 유럽을 차지한 후 놀랍게도 대왕이 왕국을 분할해 주요 영지를 형제와 사촌에 분배했다. 클로비스 1세는 왕국을 4개로 분할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영역을 4개로 분할하는 것을 바로 동아시아때부터 기원한 흉노의 정치적 전통이다. 실제 5세기 초반에 이베리아를 점령한 알란도 영토를 4개로 나누었다. 그들은 흉노에 가장 먼저 흡수된 유럽 집단이었다. 그리고 흉노는 4개의 영역을 지배하는 지방의 왕들 아래 강력한 지방 군사귀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영지를 받아 기득권을 유지하였는데 이것이 중세 유럽의 봉건영주다. 중세시대 유럽의 중무장 기사는 귀족 계급과 동의어였다. 중세 기마 엘리트는 마상 사냥을 즐겼다. 사냥, 궁수, 매부리기 등의 취미를 즐겼는데 이는 로마시대에는 전혀없는 유럽 본연의 것이 아닌 초원의 문화다. 즉, 게르만이 흉노 지배귀족집단의 문화와 풍습을 이어 받은 것이다. 그리고 초원인들은 당연히 육식을 즐겼는데 이도 물려받아 중세의 유럽 귀족들은 강한 육식성향이 있었다. 훈식의 강한 예의 범절과 궁정의례 또한 강한 상무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흉노, 훈은 매우 강한 군사력을 가졌기에 중국에서도, 중앙아시아에서도, 유럽에서도 중심국가인 한과, 페르시아, 로마를 사실상 정벌하여 차지할 만한 충분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흉노와 훈 이후에 등장하는 내륙 아시아에 기반한 국가들은 그러한 행위를 한다. 하지만 훈은 그러지 않았다. 훈은 사실상 농경 국가의 정복을 통한 무리한 확장보다는 그들에게 조공을 강제해 부를 착취하고 교역을 통해 부를 얻고, 힘을 유지하며 주변을 복속하여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제국을 가장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안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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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역사 - 당신이 몰랐던 동유럽의 대국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와타나베 가츠요시 지음, 서민교.정애영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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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에 대해 떠오르는 것은 독특한 흰색과 적색 두 줄무늬 국기와,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바웬사, 2002 월드컵 한국의 역사적 첫 승 상대, 최근 한국의 주요 무기 수출국이라는 점이다. 

 폴란드는 이미 유럽연합과 나토의 가맹국이며 유럽연합에 많은 노동력을 수출하고 있다. 면적은 31만km2이고 인구는 3784만으로 면적에 비해서는 다소 적은 편이다. 다만 이 인구의 절반 이상이 35세 이하여서 경제 잠재성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발등이 불이 떨어진 상태로 가성비 좋은 한국산 무기를 마구 사들이는 등 국방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그럴만도 한 것이 폴란드의 역사는 곧 외국의 침략과 그것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동부유럽의 드넓은 평원에 위치한다. 이렇다할 자연 장애물이 전혀 없기에 외세로 진출하기도 좋지만 의지할만한 방어수단도 전무하다. 여기에 서쪽에는 독일, 동쪽에는 러시아가 자리한다. 양강에 끼인 셈이며 실제 폴란드는 역사상 이들이 흥기하면 바로 어려운 형국에 처했다.  

 폴란드의 역사는 대충 10세기 정도에 시작한다. 카지미에시 3세가 왕국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리투아니아와 연합하여 한 때 대 제국을 이루었다. 러시아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빌뉴스, 우크라이나 키예프도 그들의 영토였다. 하지만 프로이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대제국으로 일어서면서 사정이 바뀐다. 이전 스웨덴 과의 경쟁도 국력을 소진시켰다. 

 결국 폴란드는 1772년 러시아에 항복한다. 그리고 1차 폴란드 분할이 이뤄지는데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이 땅을 나눠가졌고 가장 큰 지분은 러시아 몫이었다. 폴란드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에 영향을 받아 1788-1792년 4년 국회를 개최한다. 중세귀족인 아우구스트와 슐라흐타의 권한을 제한하고, 시민의 토지소유와 고위 관직 진출을 가능하게 했지만 농민에 대한 권한을 보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폴란드 내의 기득권층이 당연히 이 법안에 반대하고 러시아의 군사개입을 요구하여 4년 국회는 좌절된다. 그리고 이는 어이없게도 1793년 2차 분할로 이어진다. 이번엔 오스트리아가 빠지고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폴란드를 분할한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하자 1809년 바르샤바 공국이 탄생한다. 바르샤바 공국은 나폴레옹에 충성하여 그의 러시아 원정에 무려 10만의 병력을 파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나폴레옹이 패배하여 공국은 소멸한다. 그리고 폴란드의 일부영토에서 러시아 황제를 통치자로 하는 폴란드 왕국이 들어선다. 

 폴란드는 프랑스 7월 혁명을 틈타 독립을 다시 선언하고 11월에 봉기하나 결국 러시아에 패퇴한다. 러시아는 살벌한 보복정책을 벌여 주모자를 처형, 유배시키고 영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대학을 폐쇠한다. 이 때의 탄압으로 무려 1만명의 폴란드인이 해외로 망명한다. 1861년 다시 이 11월 봉기를 기념하는 데모가 바르샤바에서 열렸으나 러시아의 봉기로 5명이 사망한다. 이 사망에 대한 추모집회가 열렸으나 러시아는 당시 크림전쟁의 패배와 농노 해방으로 정신이 없는지라 이를 묵인한다. 하지만 결국 사태가 심각해지자 강경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폴란드는 1863년 붉은 색당 지도부가 임시국민 정부를 선언한다. 하지만 흰색당은 이를 경계하여 합류하지 않다 나중에 동참하게 된다. 양당은 결국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다 분열하고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실패한다. 이것의 실패 후 폴란드인들은 독립을 조기시도와 무장독립투쟁보다는 자신들의 경제, 문화적 역량을 강화하는 추세로 돌아선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와 퀴리부인이 등장한 시기도 이 때다. 

 1860-1880년대 폴란드는 기본적으로 농업국이었지만 공업화가 진전한다. 그래서 노동운동도 활발해졌는데 1892년 우치에서 왕국 최초의 총파업이 이뤄졌다. 1893년 사회민주당이 결성되었고 당시의 중심활동가가 유명한 로자 룩셈부르크이다.

 폴란드의 독립 기회는 1차대전으로 찾아왔다. 러시아와 독일 모두 폴란드의 도움을 원했으나 폴란드는 양자 모두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독일이 패배하자 1918년 임시정부가 들어서고 123년 만의 독립이 이뤄진다. 서부는 포즈난, 실롱스크 접경지대가 국경이 되었고 동부는 그단스크와 발트해로 이어지는 폴란드 회랑이 설치되어 동프로이센이 독일 본국과 분리되었다. 

 독립한지 얼마니지나 않아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전쟁이 일어난다. 피우수트스키는 주변국과 연방을 구성해 러시아에 대응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연합국은 폴란드-러시아 국경을 커즌선으로 정하려 하였으나 피우수트스키가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결국 1920년 리가 조약으로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는 39만km2의 영토와 인구 2700만을 가진 나라로 완전 독립하게 된다. 피우수트스키는 독재자였으나 파시스트가 아닌 민족주의자였다. 오늘날에는 폴란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폴란드는 농업국이었지만 대공황 시절 실업률이 40%에 달할 정도로 경제가 흔들린다. 폴란드의 외교는 기본적으로 친 프랑스였지만 독일과 소련에 대해서는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즉, 거리를 두고 양쪽 어디에도 힘을 실지 않았다. 1932년 피우수트스키가 사망하자 폴란드 외교상 유제프는 친독일 외교를 전개하고 독일,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독일의 유럽 침략을 염두해둔 무리한 요구를 모두 거절한다. 결국 1939년 9월 1일 그단스크를 친선방문한 독일 순양함 홀슈타인 호가 기습공격을 감행해 2차 대전이 발발한다. 독일은 폴란드의 전력의 2배이상으로 손쉽게 폴란드를 점령한다. 

 소련은 사전에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비밀의정서를 통해 독일과 폴란드 분할을 결정한다. 그래서 독일의 폴란드 점령후 폴란드는 리투아니아 지역을 소련에 빼앗기고 결국 독립 20년만에 다시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겪는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는 단순 노동담당국으로 전락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지식 계급이 박해의 대상이었고, 중등교육 이상의 기관은 폐쇠되었다. 점령 당시 폴란드의 유태인 인구는 전체의 9.7%인 350만에 달했다. 독일에 의해 폴란드에만 400개의 게토가 설치되고 하루 184kcal의 비인간적 배급을 실시해 그들을 영양실조로 사망하게 하였다. 무려 50만 이상이 게토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련은 점령 후 무려 1백만 이상의 폴란드 인을 시베리아 등지로 강제 이송하였다.

 1944년 8월 1일 독일에 대한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다. 이는 바르샤바를 소련이 들어오기 이전에 해방해 소련으로부터 독자적인 입장에서 그들을 맞이하고자 하는 계획이었다. 2달간의 봉기로 20만이 사상하였고 결국 독일이 승리한다. 여기엔 사전에 소련과의 협의가 부족하였고 애초에 반소련입장이었기에 소련이 비협조적이었으며 영미도 방관한 측면이 있었다. 전투의 장기화로 국내군에 대한 시민의 비판이 거셌고, 망명정부에 대한 여론도 악화한다.

 1945년 얄타회담에서 폴란드 문제는 연합국의 가장 큰 이슈였다. 동부국경은 과거의 커즌선을 따른다는데 이견이 없었지만 서쪽국경이 문제였다. 얄타회담 이후 소련은 자신을 적대하는 폴란드 내의 모든 세력과 조직을 탄압한다. 1946년 국민투표가 소련의 주도하에 이뤄졌는데 상원의 폐지와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농지개혁, 오데르-나이세르 강을 서부국경으로 할지에 대한 투표였다. 모두 대찬성으로 나와서 조치가 취해졌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투표결과 조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폴란드의 영토는 러시아의 입김에 의해 동부는 러시아 쪽에 상당히 상실하고 서쪽으로 독일을 잠식하는 형태로 구성된다. 즉, 나라전체가 역사상 처음으로 서부로 크게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후 1978년 폴란드의 요한 바오로 2세가 무려 455년만의 이탈리아 지역 이외의 추기경이 교황이 되었다. 폴란드는 이렇다 동구권의 일원으로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코메콘에 기압힌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동구권이 경제적으로 흔들리며 변화가 일어난다. 1980년대에 당국은 갑작스럽게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식육의 가격을 인상하였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이런 전반적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파업과 쟁의가 증가하였고 1989년 노동운동가 바웬사가 대통령이 된다. 

 폴란드는 이렇게 반세기만에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정부에서 벗어났지만 현재 자유와 역행하고 있다. 현재의 폴란드는 헌법재판소의 기능을 약화하고, 언론의 독립성이 약하며, 이민과 난민의 수용에 소극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국와 아일랜드를 포함한 유럽 연합의 선진국가에 많은 노동력을 파견하고 있어 그들의 송금액이 나라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자국의 이주 노동자가 많은 만큼 자국의 노동자가 그 지역에서 피해를 입고 차별받는 것에 대해서는 난리를 치면서 폴란드 자국에 들어온 우크라이나 및 다른 동구권과 중동지역의 노동자에 대한 차별에서는 눈을 감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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