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세트]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1~2 세트 - 전2권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최진기 지음 / 이지퍼블리싱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살과 만행, 문명의 파괴가 있지만 전쟁사는 재밌다. 이는 후대의 인간이 당시 전쟁의 잔혹성을 목도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임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고 그도 아니면 그 자체를 즐기는 잔혹성을 가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장기나 바둑, 체스 그리고 최신의 전쟁관련 비디오, 모바일 게임들은 대개 인기가 좋다.(삼국지나 문명시리즈가 얼마나 재밌는가)

 그래서 목적이 무엇이든 전쟁을 다룬 책도 많다. 인간의 분명한 한 부분이기 때문 일 것이다. 그런데 전쟁책들은 대개 상세한 전술이나 이긴 전략, 무기등은 잘 다루지 않는 편이다. 그런면에서라면 이 책은 분명 빈틈을 잘 찌렀고 그래서 재밌다.

 저자 최진기는 두권의 책으로 고대부터 지금까지 10개정도의 전쟁을 다룬다. 다 재밌지만 새롭게 안 내용만 좀 정리해보았다. 과거 석기시대때도 전쟁은 있었겠지만 당시엔 어느 정도 규모의 문명도 없다고 봐야하니 제대로 된 문명의 전쟁 기록은 청동기부터라 할 수 있다. 청동은 귀하면서도 약했기에 청동기시대의 전쟁은 주로 귀족이 참가했다. 당시 국가재정도 열악하고 청동이 워낙 비싸 군인 스스로가 전투에 필요한 무장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 대가로 전쟁의 부산물도 약탈군인이 챙겼다.

 청동기엔 전차를 이용한 전투가 많았는데 그야말로 럭셔리전쟁이다. 청동무기에 마차, 말, 마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관점에선 우습게도 상대편과 장소와 시간을 약속잡아 전투했다고 한다. 전차가 평지에서만 운영이 가능하니 그랬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청동기 때 전차전투가 주로 이루어졌다. 거기에 인접군 귀족끼리 서로 아는 사이거나 인척이다 보니 전투에서 패배해도 대량학살이나 인명살상은 많지 않았다.

 본격적인 전투 규모의 확장은 철기시대 부터였다. 그리스는 보병중심의 부대를 갖추었는데 평지가 없다보니 기병이 양성되지 않고, 기병이 없다보니 궁병역시 양성하지 않았다. 상성상 보병은 궁병을 잡고, 궁병은 기병을 잡으며, 기병은 보병을 잡는다. 그리스 보병은 궁병과 기병이 없다는 점에서 약점을 갖지만 강력한 팔랑크스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팔랑크스 대형은 보병들이 여러열로 밀집해 오른손엔 긴 창을 왼손은 방패를 들고 전진하는 대형이다. 방패는 상당한 크기로 자신 뿐만 아니라 옆편의 아군까지 보호했다. 팔랑크스 대형은 강력하지만 약점도 있었는데 공성전을 하지 못했고, 전진공격밖에 되지 않으며, 평지가 아닌 산지에선 대형유지가 안되 쓸모가 없었다는 점이다. 팔랑크스 대형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서로들 사람인지라 팔랑크스 대형끼리 붙다보면 대형이 점차 오른쪽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이유인즉슨, 상대편이 창으로 찔러대니 왼손의 방패를 창만 들고 있는 자신의 몸 오른쪽에 슬슬 놓기 시작하고, 옆의 아군이 방패를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하는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팔랑크스 대형끼리 맞붙으면 대형의 왼편이 적에게 노출되게 된다. 그렇다보니 팔랑크스 대형에서는 오른쪽엔 공격력이 강한자를 왼쪽에는 수비력이 강한자를 배치했다. 팔랑크스 대형의 전투결과는 극적이었는데 막강한 밀집대형이지만 조직력으로 버티는 지라 먼저 틈을 보이는 쪽이 수비대형이 무너져 갑작스레 적의 창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술은 무거운 창과 방패를 오래들고 있는 쪽이 이기는 사실상의 체력전이었다.

 중세의 몽골 군은 세계최강의 군대였다. 몽골군은 거의 모조리 기병이었는데 말이 워낙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모두 안짱다리라 보병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또한 말때문인데 몽골인들이 워낙 어려서부터 말을 타다보니 그에 적합하게 다리에 변형이 와 안짱다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의 강점은 몇가지가 있는데 우선 몽골군은 수가 워낙 적다보니 자신들의 인명을 최우선하는 전략으로 전투를 했다점이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고 근접전을 최대한 피하고 멀리서 활로 공격하는 전략을 주로했다. 기본적인 전술은 만구다이라는 유인책들이 적을 유인해와 본진이 포위하여 적은 활로 섬멸하는 방식이었다.

 다음 강점은 이들의 빠른 기동력이었다. 몽골군은 조랑말을 이용하여 말이 순발력은 좋지 못했지만 지구력이 우수했다. 이런말로 하루에 수백킬로미터를 진군했다. 거기에 이들은 다른 농경국가와는 다르게 보급부대가 필요치 않았다. 식량을 말린 젖이나 말린 고기를 이용했는데 말린 고기를 물에 풀어 끓여 먹으면 훌륭한 식사가 되었다. 거기에 병사 일인이 수마리의 말을 갖고 다니며 교체하며 탔고, 말이 못쓰게 되면 잡아서 말고기로 사용했기에 웬만하면 보급에 의한 식량문제는 몽골군과 상관이 없었다.

 다음 강점은 흡수력과 합리적 정신과 잔혹함이다. 몽골군은 공성전과 수전에 약했다. 하지만 금나라와 호라즘을 공략하면서 그들의 공성기술을 익혔다. 고려에선 수전을 익힌다. 거기에 몽골군은 인명을 중시하고 오로지 이기는 것만이 우선이기에 상대편을 철저히 도구화한다. 몽골인은 풀을 먹는 사람과 고기를 먹는 사람으로 인간을 분류하고 고기를 먹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풀을 먹는 사람을 천시했는데 농경민이 바로 그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을 마구 학살하였고, 전쟁에 동원해 공성전시 앞장 세웠다. 그들은 화살받이가 되었거나 상대편 공성군의 사기와 체력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다. 몽골군은 마무리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초원이 근간이기에 점령한 성은 무너뜨리고 풀로 태워 초지화했다. 상대편에겐 항상 항복을 강요하였고, 저항시엔 모두 죽여 항복하는 적들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원한이 있거나 본보기가 될 경우엔 항복의 약속을 어기고 모두 학살하는 만행도 더러있었다. 이런 몽골의 사고는 지배적인 종교나 철학 및 문화가 전반적으로 부재하고, 오로지 수적으로 열세인 유목민의 수를 중시하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다 할 것이 없기에 흡수도 쉬웠을 것이다.

 임진왜란의 3대첩은 진주대첩과 한산도대첩, 행주대첩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입장에서고 일본입장에서는 우리에겐 가장 뼈아픈 칠천량해전과, 울산성전투, 벽제관 전투가 조선정벌의 3대전투다. 이중 벽제관 전투가 가장 의아한데, 이는 명군에게 일본군의 무서움을 알리고 이로인해 전황을 교착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명군은 초기의 실패를 딛고 이여송이 요동5만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하며 위세를 떨친다. 문제는 그 여세를 몰아 한양을 탈환코자 벽제관까지 정예기병을 이끌고 치달았다는 점이다. 일본군의 유인에 걸려 조총의 집중 사격을 당하여 패전하는데 지휘관만 무려 15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의외로 명군과 일본군의 피해는 비슷한데 막강했던 명군의 기병대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벽제관 전투로 일본군을 명군과 조선군의 추격없이 남부로 피신하여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 전투이며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아 전황이 길어지는 것을 천추의 한으로 기록한다.

 칠천량해전은 임란중 조선수군의 유일한 패배로 일본군은 거의 피해없이 일만에 달하는 조선군을 그야말로 학살한다. 낌새를 눈치채고 탈영한 경상우수사 배설의 12척이 통제사 이순신의 명량해전에서 쓸수 있었던 유일한 전력이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남으로 피신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는다. 당시 일본은 봉건영주가 성을 빼앗기면 패배하는 형태였기에 축성술이 매우 발달해있었다. 조명연합군은 마음먹고 가토 기요마사가 있던 울산왜성을 공격하지만 양측모두 치열한 전투끝에 1만5천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조명연합군이 포위를 풀어 끝이난다. 당시 물부족과 식량부족에 고전한 가토는 임란후 자신의 영지인 구마모토로 돌아가 성을 쌓으며 무려 우물을 12개나 팠다고 한다. 이 전투의 의미는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며 히데요시 사후 무사히 퇴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

 베트남은 대단한 나라다. 2차대전후 아무것도 없는 무장상황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기습전으로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공산화를 막기 위해 미군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은 무장도 완벽하고 심지어 고지를 차지한데다 숫적으로도 우위였다. 그런 이들은 고지를 파고들어 점령했으며 무기를 분해하여 고지를 올라가 방공포를 설치해 상대의 공군전력도 무력화했다. 프랑스는 2차대전에 참여한 정예들이 일만이나 포로로 잡혔으며 이 큰 저당으로 인해 베트남에서 손을 뗄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가혹한 육로이동으로 일만중 무려 8천이 죽고 만다.

 이후 공산화가 이루어지자 미국은 남베트남을 지원한다. 마음같아선 북베트남을 치고 싶었지만 중국이란 큰 존재가 있기에 어쩌질 못한다. 중국과 인접한 공산국을 치면 어떻게 되는지를 한국전에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킹만 사건으로 명분을 어거지로 만든 후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직접 공격이 아닌 폭격을 감행한다. 전쟁은 북베트남이 공격해오기 전까지 주로 남베트남의 베트콩과 이루어진다. 하지만 미군의 보급로 차단 작전은 실패한다. 북베트남 정보는 보급로로 인근 사회주의 국가들을 경유하여 설정하여 미군이 어찌할 수 없었고, 베트남 내부에서는 정교하고 방대한 땅굴을 이용해 안전했다. 미군은 네이팜탄과 고엽제등으로 짜증나는 정글을 없애려 했지만 열대의 습기찬 정글은 좀처럼 타질 않았다. 밀림속에 감춰진 곡사포로 공중전도 쉽지 않았으며 기관총만 갖고 있는 베트남의 미그기에 미사일로 무장한 팬텀기가 일방적으로 당했다. 워낙 덥고 습한지역이라 열감지 장치가 잘 작동하지 않았고, 적의 후방을 잡기 위해 팬텀기가 크게 선회해야했는데 고장도 잦았다. 미국은 이런 복합적 요인을 감당치 못하고 패전한다. 베트남 전쟁은 기간이 무척 길고 폭격이 무척 잦았음에도 인명피해는 양측합해 200만이 안될 정도로 상대적으로 인명손실이 적었다. 밀림으로 인해 직접전이 적었고, 숨을 만한 곳이 많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이 전쟁외에도 다양한 전쟁들이 재밌게 실려있다. 한국인이 썼음에도 서양의 전투사가 대부분이란게 좀 아쉽다. 한국, 중국, 일본의 국제적이었던 고수, 고당전쟁이나 규모가 컸던 중국왕조들의 전투도 다루었으면 좋지않았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좋은 책이다. 빠르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 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권이란 개념이 없고, 세계시민이나 지구촌이라는 공통의 용어가 없던 시절. 그 땐 학살은 전쟁이나 정치, 종교의 부산물로 당연한 것이었다. 과거의 사람들은 먼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그러한 일을 잘 알지도 못했고, 오직 피해국 당사자들만 기억했다. 그들 역시 오랜 아픔을 갖고 한동안 피해를 기억하며 살았겠지만 아픈 기억은 오래 전승되지 못하고 비교적 빠르게 잊혀졌다.

 하지만 인권이 발명되고, 세계시민적 시각을 갖게 된 오늘날은 다르다. 반세기가 넘어 직접 가해자나 피해당사자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음에도 각 나라들은 이를 기억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터부시한다. 재밌게도 분명히 일어난 같은 사건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반응은 극명히 다르다. 가해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가해를 부정하고, 오히려 가해과정에서 자신들의 잘못으로 입은 피해를 부각시킨다. 피해국은 피해자로써 이런 가해자의 행위 자체와 이후의 반성없는 모습을 용서하지 못하며 피해를 받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신의 가해자적 모습을 숨기고 부정한다. 이처럼 양자는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으로 인해 마찰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이 책의 제목 기억전쟁이다. 기억전쟁은 반세기전 대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겪었던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첨예하다.

 근데 이 기억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우선 부정론자들의 등장이다.

 

1. 부정론들

 역사적 사건을 부정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단도직입적 부정론이다. 그냥 부정하고서 보는 것이다. 그런일은 절대절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혐의의 부정론이다. 소문에 의해 피해 상대방에게 오히려 혐의를 씌우는 것이다. 이로써 피해당사자들을 격한 감정에 빠뜨려 흐뜨러트리는게 목적이다. 문제는 이들은 남에게 혐의를 잘 씌울지언정 자신의 가해혐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건에서 유족들에게 돈을 많이 받아내려 끝까지 저렇게 군다라는 것,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향해 돈을 벌러 갔다라는 식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악의적 혐의를 씌우는게 대표적이다.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것인데 실증적 부정론이다. 실증주의는 글자그대로 피해자들이 당한 피해를 입증할 만한 물질적 증거의 부재를 문제삼아 피해를 부정하는 방법이다. 글자그대로 과학적 접근 방법에기에 당사 피해해자 가해자가 아닌 제 3자가 보기에 이 부정론의 파급력은 상당하다. 주요학문의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은 한국의 주요 전쟁피해자들을 향해 그런 행위를 한 정부공식문건이 없다라는 식으로 일변한다(실제론 있다. 숨기고 있을 뿐.)

 문제는 그럴듯해보이는 이런 실증주의가 힘있는 자의 논리라는 것이다. 가해자들은 전쟁당시 강한 정부와 군대로 관련 문서를 스스로 생산했지만 피해자들을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저 끌려가서 당했을 뿐이고 그로인해 쓰라린 경험에 대한 감정과 목소리, 충격에 의한 불분명한 기억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피해의 문서를 내놓으란게 실증주의 부정론의 목소리인 것이다.

 게다가 실증주의 부정론자들은 정작 자신들이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문서엔 역시 관심이 없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식인 것이다.

 

2. 냉전과 민족주의

 올바른 기억을 방해하는 기억전쟁의 또 다른 요소는 냉전과 민족주의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최대 전범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소련등 새로운 냉전질서로 인해 주요 피해당사자인 한국과 대만, 동남아시아의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에 의해 억지로 일본과 손을 잡아야만 했다. 이로인해 피해 기억은 냉전이라는 오랜 기간 수면아래에만 존재했다. 냉전이 끝난 후, 각국의 피해문제는 수면위로 올라왔지만 이제는 중국 대 미국, 일본이라는 새로운 축에 의해 다시 억압당하고 있다. 박근혜와 아베의 무리한 위안부문제 해결 시도는 미국과 중국에 의한 이런 새로운 대결축에 의해 다시 피해자들의 기억이 억압당한 사례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독일은 일본 같은 전범국이지만 서유럽은 당시 연합국에 의해 무참히 폭격당한 민간의 피해를 그리고 동독 지역은 소련적군에 의해 입은 무차별한 여성성폭행과 인적 손실의 기억을 냉전의 논리에 의해 오랜시간 감춰야만 했다. 아군에 의한 피해였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전쟁중 전사자나 희생자에 대한 신화로 피해의 기억을 억압한다. 거의 모든 국가는 그체제를 막론하고 죽아간 자들을 자세한다. 즉, 전사자 숭배와 전쟁미화의 시도로 국가를 언제든 동원체제로 유지하려는 것이다(그것이 경제든, 전쟁이든) 하여튼 이와 같은 논리로 전후 한국에서는 희생자는 잊혀지고 독립투사들만이 부각되었다(제대로도 아니다. 진영논리에 의해서 일부만, 그리고 이용했을 뿐이다) 전후 일본 역시 전쟁 중 희생자들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가해자로서의 역사성, 그리고 피해자들의 기억을 망각했다.

 

3. 각 나라들의 기억들

그렇다면 이런 냉전과 민족주의, 부정론에 의해 뒤틀린 각 나라들의 기억을 어떠할까.

먼저 가해자들을 살펴보자

 

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냉전논리에 의해 서독은 서유럽은 연합국의 무차별한 폭격에 의한 민간피해를 동독은 소련적군에 의한 막대한 피해를 묻어왔다. 하지만 통일 이후 이러한 희생 기억이 수면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이런 희생자들을 나치치하 유대인의 고통과 동일시하기 시작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역사성의 망각이다.

 이탈리아 역시 파시즘 정권을 합법적으로 일으키고 전쟁에 참여했음에도 역사성을 망각했다. 자신들을 파시스트들에게 이용당한 희생자로 여기며 일반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은 협조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로 면죄부를 획득했다. 거기에서 한술 더 떠 잔학학 나치즘에 비해 자신들의 파시즘은 한층 유순했으며 모든 도덕적 끔찍한 일은 독일군이나 동성애자 마약중독자, 새디스트가 한 것으로 치부한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이탈리아에 비해 전쟁범죄에서 비교적 자유로워보인다. 독일에 적극 협조한 이탈리아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강제로 합병되어 전쟁범죄에 어쩔수 없이 참여하게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어쩌면 아시아의 다른 국가와 유럽국가들은 한국을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합병은 강제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1차대전 후 힘이 많이 빠진 당시 많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막강한 독일의 마르크경제에 병합되기를 희망했다. 그들의 적극성은 놀라울 정도인데 인구 700만중 나치당원이 무려 50만에 달했다. 거기에 더욱 적극가담자로 할 수 있는 나치 친우대의 비율은  본국인 독일의 8%를 아득히 상회하는 14%의 수준이다. 이런 전쟁범죄로 오스트리아 공산당이 주도한 전후 인민법원은 나치가해자와 공범자를 처벌했다. 하지만 이후 공산당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재판의 정당성 마저 부정하면서 재판의 처벌자들을 희생자화시킨다. 이를 통해 가해자들마저 희생자가 되는 오스트리아 전 인민의 희생자화가 완수된다.

 

나. 일본

 일본은 감히 미국에 대들다 원폭을 맞은 관계로 가해자임에도 희생자가 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맞이한다. 거기에 미국과 소련의 냉전구도하에서 미국 자본주의 진영의 한축으로 영입되면서 피해자인 다른 아시아 국가와도 손쉽게 화해하면서 국제적인 빚마저 강제 청산한다.

 이런 호기로 일본은 비교적 다른 전범국가들에 비해 손쉽게 가해의 기억을 부정하고 피해의 기억을 강화하는 코스프레가 가능했다. 그들은 군함도 같은 가해의 장소는 손쉽게 부정하면서도 나가사키나 히로시마등 피해자 코스프레가 가능한 부분을 문화재화하고 강조한다.

 특히 2차대전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체에 피해를 입히는 만행이었음에도 단지 태평양전쟁으로 이를 칭하거나 미국과의 대결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의 가해행위를 가린다. 또한 전쟁의 패배과정에서 만주와 시베리아 한반도 등지에서 퇴각하지 못해 발생한 피해의 기억을 독일처럼 탈역사화하고 피해만을 강조하면서 국민이 협조한 전쟁범죄의 역사성도 지워버린다. (대표적인 예가 문제의 책 요코이야기다) 당시와 같은 총력전 체제에서는 아래로부터의 햅조없이는 전쟁수행이 불가능한 만큼 가해국가의 희생자는 총력전체제의 공범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가해자들이 그렇다면 피해자의 기억은 어떨까?

 

다. 폴란드

 폴란드는 독일이나 소련처럼 전쟁 당사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치와 소련에 의한 피해와 유대힌 홀로코스트로 무려 500-600만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폴란드는 아주 공정?하게 피해자의 수를 유대인 300만 폴란드인 300만으로 나누는데 유대인 피해자가 실제론 더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폴란드의 전후 기억은 단순해서 폴란드인 자체도 유대인처럼 나치독일과 소련에 의한 피해자로 자신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폴란드에도 2차대전 나치의 전쟁범죄에 가담한 상당한 가해의 사실이 있다는 점이다.

 폴란드 내에서 유대인의 희생자수는 무려 300만으로 유럽의 어느나라보다도 가장 많다. 그리고 이는 단지 나치독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 색출에 있어 폴란드 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다. 아무리 나치라도 점령국인 폴란드내에서 풀뿌리 식으로 유대인을 색출하려면 현지주민의 고발과 협조가 필수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란드는 이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가린다.

 냉전 역시 폴란드의 기억을 흐뜨러트린다. 폴란드는 전후 사회주의 국가로 편입되면서 자기땅에서 발생할 홀로코스트를 그 자체로 기억히가보다는 사회주의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이용한다. 나치는 국가사회주의지만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 였기에 홀로코스트를 사회주의 입장에선 자본주의의 잘못된 부산물로 전용하기 쉬웠던 것이다. 폴란드의 민족주의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흐뜨러트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숫자경쟁이 이루어졌고, 홀로코스트 내에 폴란드인 희생자 성지가 세워지기도 했다. 홀로코스트 자체보단 자신들의 희생을 더 강조하는 느낌이다.

 

라. 유대인

유대인은 전후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해자 입장을 꾸준히 견지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건국과 관련한다. 시오니스트들은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강한 민족주의와 영웅주의가 필요했다. 때문에 시오니스트들에게 유럽으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는 영웅이나 지배자, 정복자, 주체적 인간이 없는 그야먈로 자비를 구걸하는 비겁한 역사에 불과했다. 때문에 유럽에서 비겁하게 빌붙어 살다 죽음을 맞이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은 시온주의를 부정하고 팔레스타인 이주를 거부한 민족의 배반자에 불과하게 된다. 이 같은 시각은 북미로 이주한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견지되었다. 스스로 구대륙을 떠나 신대륙을 개척한 유대인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정착이 승리이자 영웅의 이야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은 자신들과 동일시 될수 없는 패배자에 불과했다

 이 같은 홀로코스트 피해자에 대한 인식 기류가 변화한 것은 1961년 아이히만 재판때부터이다. 여러개의 다각도 카메라와 가해자들과 피해자들의 증언이 뒤얽힌 이 재판에서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 피해자에 대한 강한 공감, 그리고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이후 유대인들의 입장은 극적으로 변화하여 영웅적 시온주의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과 자신들을 동화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국가존재이유도 홀로코스트로 인해 정당화되기 시작하였다.

 

마. 중국과 한국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만행은 냉정논리와 민족주의에 의해 억압되었다. 이를 위로 일깨운 계기는 베트남전이었다. 베트남 반전운동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억압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는데 시작은 모순되게도 아사히 신문의 일본기자 혼다 가쓰이치였다. 혼다는 베트남전을 취재하며 드러난 민간인 학살과 여러 만행을 보며 자신들의 전쟁에서도 이러한 흔적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당연한 의문에서 르포를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의 만행중 대표적인 사건인 난징대학살에 주목하였고 여러 취재끝에 만행을 폭로한다. 그의 르포는 아직 냉전중에기에 동북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일본내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 난징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날뛰었고 급기야 사건을 일본 좌파들의 선전전책으로 축소하려 했다. 가장 분개해야할 중국의 마오정부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난징대학살에 관심이 없었다. 냉전체제 하에 주적인 미국 자본주의로 괜시리 일본 군국주의로 화살을 돌려 체제의 역량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일본군 학살 피해자보단 국민당 반동세력에 의한 피해자, 그리고 혁명적 순교자들이 우선시되었다.

 한국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과의 전쟁, 그리고 냉전으로 한국에서의 피해자 기억은 철저히 억압되었다. 독립투사와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이 영웅으로 국가중심의 경제개발에 이용되었으며 일본식민지에 의한 피해는 냉전과 경제개발이 어느정도 정리된 90년에 이르러서야 터져나왔다. 한국 역시 폴란드처럼 일본 전쟁과 식민지에 의한 피해자로서의 의식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가해국인 일본의 태도가 독일과는 전혀 다른 만큼 이 이상으로의 의식 발전이 어려운 상태다.

 하지만 폴란드의 경우처럼 한국은 일본의 장기간 식민지배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갔고, 전쟁에 끌려가서 일본의 전쟁범죄에 협력한 과거가 있다. 실제로 87명정도의 일본군 소속 한국인이 전범재판 끝에 유죄로 인정받았음은 적극적 협력의 반증이 될 수 있다.

 

4. 앞으로 기억이 나아가야 할 길.

과거의 분명한 기억은 전후 각국의 경제, 외교적 지형이 새롭게 그려지거나 민족주의 혹은 인종에 의해 억압받았다. 이러한 억압된 기억들이 90년대 들어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 냉전의 종식과 비슷하게 등장한 공적영역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적영역에서의 기억조차 자신이 좀더 큰 피해자라는 제로섬 게임에 빠진 상황이다. 실제로 폴란드는 유대인과 자신들 중 어느쪽이 더 큰 피해자인가라는 점에서 민감하게 굴고 있으며 책에 등장하는 아르메니아 인들은 일본군 성노예 같은 피해에 공감하면서도 자신들의 피해가 질적으로 더 높다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홀로코스트에는 인종주의적 요소나 민족주의적 요소도 가미된다.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피해는 실제로 막심하지만 지구 역사상 존재해온 그 어떤 홀로코스트보다 피해가 비극적이고 크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에 유럽과 북미사회가 주목하는 것은 이것이 같은 백인을 대상으로 한 만행었기 때문이다. 즉, 같은 문명인들간의 잔혹범죄였기에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유럽과 북미는 그리 큰 시간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벨기에의 콩고민 학살(1000만명), 호주의 테즈메니아인 절멸사건, 미국의 선주민 제노사이드(1800만명)등의 홀로코스트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그네들이 나치의 하켄 크로이즈엔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임에도 일본의 전범기인 욱일기에 탈역사적이게도 디자인적으로만 접근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비문명 야만인간의 학살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예로 2차대전후 일본군이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점령후 네덜란드 여성을 성노예로 삼은 것은 큰 문제가 되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 여성들의 피해에 서구사회는 무관심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책은 원론적인 답을 제시한다. 과거의 기억은 지배적인 사회, 문화적인 코드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되고 영향받을 수 밖에 없다. 즉 민족이나 계급, 인종, 젠더, 세대등 특정 이념에 기초한 경우 피해의 기억은 오염될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요코이야기의 경우처럼 아무리 생생한 기억이더라도 맥락을 탈역사화하는 것을 극도록 경계해야 한다. 결국 풀뿌리 기억은 철저히 역사적 맥락하에 모든 이념을 넘어서는 평화와 인권의 개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용서다. 이미 전쟁범죄의 피해 당사자와 가해자는 대부분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기본적으로 용서는 피해당사자가 가해자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기에 그들이 대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용서는 이미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들과 민족공동체라는 이유로 대신 사과하고 대산 용서하길 원한다. 그러나 섣부른 용서와 화해는 억울한 피해자를 망각하게 만듬으로써 피의 얼룩을 모른체하는 거짓평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책은 용서와 화해라는 말보다는 양자가 서로 과거의 끔찍한 과거를 아프게 인정하고 끊임없이 직시하며 살아가는 것을 제시한다. 그래야 그와 같이 일이 적어도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 때문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의 저자도 말하지만 연식이 좀 있는 분들께 고고학 하면 떠오르는 건 단연 인디아나 존스다. 여러 영화와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의 진로에 영향을 강하게 준듯, 인디아나 존스도 여러 사람들 고고학의 길로 안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고고학은 무척 영화와 다르다. 하루종일 흙바닥에 앉아 모기나 추위 및 더위, 야생동물과 씨름하며 생활한다. 야전생활과 다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걸 파내는 거도 아니다. 대부분의 고고학적 발견은 보물찾기와는 다른 것이다.

 실제 인디아나존스처럼 다른 나라에 자기 맘대로 가서 여러 사람 때려패고 죽이며, 보물을 탈취하는 것은 범죄행위에 다름아니다. 제국주의적 시각이 매우 강하게 반영된 영화인데 그래도 사람들의 모험욕을 자극하는 맛이 있긴하다.

 책은 고고학적 지식과 고고학자가 현장에서 느끼는 마음을 잘 버무렸다. 읽기 쉽고 재밌다. 물론 고고학 지식을 많이 기대한 사람에겐 다소 아쉬울수 있겠다. 들어가보자.

 

1. 죽음

 인간은 스스로 유한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죽음을 자각하며 두려워한다. 모든것이 사라질 죽음만을 인식한다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리 없다. 죽음의 극복방안으로 고대인들은 무덤을 만들어냈다. 죽은자와 그 영혼의 불멸함을 거대한 건축물인 무덤을 곧이 만들어 기념함으로써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덤은 부활과도 강력히 연결된다. 부장품을 넣는 것도 그런 것이고 양식도 그런면이 있다. 한국의 독무덤은 주로 어린아이를 묻었는데 항이라가 자궁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곧 부활을 기원하는 것이다. 시베리아에서는 통나무관이 발견되는데 나무가 하늘로 자라는 것처럼 죽은 사람 역시 하늘로 올라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아이의 경우는 독무덤처럼 나무의 공동안에 묻었으며 자리가 모자라면 더 파내기도 했다. 또한 죽은 사람의 관을 마치 열마처럼 나무에 매달기도 했다.

 사람이 죽으면 임사체험이란걸 하는 경우가 있는데 동서양을 통틀어 공통적으로 나비를 보는 경험이 나타난다. 이 체험에 문화가 기저작용을 한다면 나비는 죽음과 관련하여 동서양에 상징하는 바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나비는 애벌레어서 번데기를 거쳐 다시태어나는 느낌을 주는 생명체이므로 죽은 사람과 나비는 제법 잘 어울리는 것이 된다. 고대 요동지역의 홍산문화에서는 옥룡형태로 있던 애벌레와 나비 문양의 옥기를 무덤에 묻어 이 같은 생각을 반영하기도 했다.

 유라시아 전역에서는 제사 후 그릇을 깨는 풍습이 있어 공통적으로 무덤 주변에서 다량의 깨진 토기가 발견된다. 이는 저승과 이승을 반대로 생각하는 것으로 이승에서 깨지거나 부서진 것이 저승에선 제대로 된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행동들이다.

 조개무덤인 패총은 쓰레기장이다. 조개만 남아 있어 조개 무덤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고대인들이 조개만 따로 버릴리 없다. 패총은 종합생활쓰레기장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패총에선 옷가지나 생선뼈등 다양한 생활물건이 발견된다. 이는 조개껍질이 알칼리를 띠어 다른 것들도 잘 보존해준 역할이 크다. 패총은 여러가지 의미를 던져주는데 우선 당시의 해안선이다. 패총 인근은 당시 해안선인데 지금기준으로 생각하면 놀라운 경우가 많다. 다음은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 습관이고 조개껍데기를 통해 당대의 기후를 추정할 수 있다.

 

2. 먹을 거리와 약재, 샤면, 의술

 보리는 동아시아에서 이모작 작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근동이 원산지다. 식량으로 적합치 않아 동아시아에서는 멀리 했던 작물인데 어인일인지 5천년전 중국에서 맥주가 발견되었다. 이는 당시 동서교류가 생각보다 활발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맥주가 그대로 왔을리는 없고 보리와 맥주제조법이 왔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인삼은 중국에 알려지고 약효능을 인정받은게 후한대다. 인삼은 고구려, 백제가 주로 중국에 진상하는 상품으로 과거부터 매우 귀했다. 이유는 웬일인지 만주의 산악지대에서 자라는 것만이 효능이 우수했으며 말려 장기간 보존하는 방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발해는 영토를 상당히 동북쪽으로 뻗어나갔는데 이 쓸모없는 동토를 개척한데는 아무래도 인삼과 모피 같은 사치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견해가 타당하다.

 한국은 농경문화권임에도 소를 도살하고 잡아먹는 조리법이 상당히 발달했다. 먹는 부위도 매우 다양한데 이는 소고기의 부족때문이란 설이 있다. 조선후기로 접어들며 신분세탁 및 위조로 양반계층이 많아졌고 이들의 고기 수요로 인해 소고기가 부족해 다양한 부위를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북방민족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고문에 따르면 소고기는 사슴고기를 다루는 것과 매우 유사한데 유목민들은 사슴고기를 잡고 처리하며 피부터 뿔까지 거의 모든 부위를 먹는다. 이들이 고려후기부터 조선에 편입되며 백정계층이 되고 조리법과 처리법을 소에도 적용해서 조리법이 다양해졌다는게 두번 째 설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는 침술이 매우 발달했다. 침술이 먼저 발달한 곳은 두만강 유역으로 중국에서도 침술을 배우러 이지역으로 갈 정도였다.  이 지역이 침술이 발달한 이유는 혹독한 기후와 관련이 있다. 이 지역은 매우 한랭하여 사람들은 겨울철이면 집에서 화로가에 머물고 심지어 화장실도 실내에 있었다. 이와 같은 불결한 환경에서는 피부병이 생기기 쉽상이었고 종기를 바늘로 째는 치료법이 발달한 계기가 되었다.

 고대의 암각화를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샤면의 모습은 머리가 버섯모양이다. 이는 당시 샤면들이 신을 만나는 가정에서 환각작용을 하는 독버섯을 복용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다양한 버섯의 효과를 알고 있었고 샤먼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상당한 부작용과 모험을 감내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나 기독교의 성인들의 머리 뒤 아우라는 이 버섯의 변형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3. 고고학과 정치, 전쟁

전쟁은 여러 인간의 사회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고고학도 예외가 아니다. 1차대전에서의 참호를 건설하고 이용하는 방법은 고고학에 그대로 적용되어 유물의 발굴에 이용되었다. 또한 당대엔 처음으로 비행기가 전투에 이용되었는데 조종사들은 공중을 선회하며 땅을 살피다 우연히 튀어나오가나 인공적으로 생긴 부위를 발견하게 된다. 평소엔 눈에 띄지 않던 그 지역은 고대의 유적이 있떤 지역이었다. 돌이 있거나 땅이 다져저 다른 지역보다 농작물이나 풀이 약간 덜 자라 공중에선 눈에 띄었던 것이다.

 전투를 하며 촬영한 수만장의 사진은 이런 식으로 유적지를 발견하는데 전후에 이용된다. 항공고고학의 탄생이었다. 제국주의에도 고고학은 어용된다. 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적을 찾거나 발굴해 도적질을 하고 자신들의 침략에 이용했다.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마민족설을 제창했다. 일본의 초기 한반도 도래인을 대륙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이 무찌르고 지금의 일본을 세웠다는 설이다. 이 설을 주창해 그 증거를 찾아 침략을 과거 영토를 회복하는 것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다. 이 의도는 한반도에서 황금유물이 발견되며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주목을 받자 다행히 방향이 선회되었다.

 인간이 가장 마지막에 정착하는 섬 나라들은 아무래도 고대문화가 늦는 경향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헌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고고학적 사기를 꽤한 시도가 동서양에 있었다. 먼저 영국의 필트다운인이다. 19세기말 영국의 찰스도슨은 유인원과 인간의 뼈를 조합해 고지능의 원시인류를 영국에서 만들어낸다. 당시는 독일에서 네안데르탈이 발견되고 프랑스에서 아비뇽벽화가 발견되는등 인류의 시원이 영국의 경쟁국가에서 발견되고 있던 실정. 이에 뒤질수 없던 영국이 이런 가짜촌극을 지어낸 것이다. 찰스도슨은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이 모든걸 행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마도 영국고고학계가 집단적으로 눈을 감고 암묵적 지원을 한걸려 여겨지는데 이 희대의 사기극을 무려 50년이나 지속되어 1950년대에야 재공론화되어 종지부를 찍는다.

 동양은 일본이다. 무려 1990년대에 일본의 후지무라 신이치가 범인이다. 이 사람은 유물을 무려 10년이나 조작했는데 그의 학력이 고졸에 불과하다. 영국처럼 나라 전체의 고고학계가 공범이란 생각이 강하게 드는 부분이다. 그는 직접 뗀석기 유물을 제작해 파묻고 신마냥 기적처럼 발굴하는 기적을 일으켜 신의손이라 불렸는데 일본 구석기의 역사를 무려 70만년전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를 의심한 일본 마이니치 신문가자가 몰카를 통해 후지무라가 직접 유적을 조작하는 모습을 포착해 이 희대의 사기극 역시 종지부를 찍게된다. 최근에 일어난 일이고 이것이 일본 극우집단에 이론적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세상을 바꾼 다섯가지 상품이야기 :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그리고 석유 -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그리고 석유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욕에 대한 생물의 욕심은 끝이 없다. 애초에 우린 채워지지 않는 그릇인게 분명한데, 특히 인간에게는 생존을 위한 의식주 욕구와 더불어 사회적 위치를 과시하여 번식과 생존을 더 유리하게 하는 과시욕이 있기에 사치품에 대한 욕망도 상당하다. 이 책이 다루는 상품은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석유다. 모두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지만 이중 생존에 필수품은 소금 하나뿐이다. 물론 석유도 이젠 생존 필수품에 가깝긴하다. 하지만 나머지 모피, 보석, 향신료는 그렇지 않다. 

 필수품이건 사치품이건 이들은 강한 인간의 욕망을 불러왔고, 이 욕망은 자원의 회소성과 지역적 편중성으로 더욱 배가되었다. 구하기 힘든 만큼 더욱 과시가 쉽고, 비쌌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사람들이 목숨걸고 피를 부를 만큼 이를 얻기 위해 별짓을 다했기 때문이다. 다섯가지 필수품이 만들어간 사람들의 역사를 살펴보자.

 

1. 소금

 지금은 지천에 널린게 소금이며 나트륨과다로 문제가 되지만 사실 소금은 생존에 필수품이다. 농경이전엔 육식을 많이 하여 육류의 소금기를 먹었기에 소금은 필수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농경으로 육식이 크게 줄자 소금은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 되었다. 즉, 소금의 교역은 농경의 역사와 함께한다는 셈이다.

 현재는 바닷물을 가두어 점차 농도를 올려가며 최종적으로 소금을 얻는 천일제염업이 있지만 과거엔 그런 방법이없었다. 또한 알았다 하더라도 천일 제염업은 강한 바람과 햇살, 드넓은 갯벌을 필요로 하기에 애초에 할수 있는 장소도 드물다. 동아시아에서도 한중일중 한국만이 가능하다.  

 어쨌든 그렇기에 문명의 발달은 소금과 함께했다. 세계 4대문명은 모두 강 하류에서 시작하는데 여기엔 물과 식량과 더불어 소금을 구하기 쉽다는 이점이 작용한다. 동아시아의 홍산문명은 큰 강을 기고 있지 않음에도 염수와 염호를 인근에 갖고 있었기에 발흥이 가능했다고 저자는 본다.

 소금으로 교역을 시작한 것은 우선 유럽의 페니키아인들이다. 그들은 나라의 뒷쪽으로는 높다란 레바논 산맥이 자리하고 자신들의 평야는 협소하여 애초에 바다로 진출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들은 이집트의 소금호수에서 조염을 가져와 이를 물에 놀이고 끓여 최초로 정제염을 만들었다. 유럽의 지중해는 워낙 깊은 바다에 해안이 대부분 절벽이기에 소금생산지가 무척 적었다. 페니키아는 이런 소금의 회소성으로 유럽 각지를 누비며 부강해졌다.

 다음 타자는 베네치아였다. 원래 베네토 지역에 거주하던 이들은 무시무시한 훈족이 쳐들어오자 살기위해 고려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바다로 도망가는 것이었는데 마침 앞바다 갯벌에 섬이 있어 그리로 도망갔고 그렇게 훈족을 피할수 있었다. 무사히 도망쳤다라는 이탈리아 말에서 베네치아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위치가 비잔틴과 슬라브세계, 서방세계와 이슬람세계, 알프스의 여러 협로와 수로를 통해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로 연결되는 천혜의 중계지역이다. 이런 위치를 통해 자신들의 앞바다에서 천일제염업으로 소금을 생산했고 이를 팔았다.

 소금으로 흥한 마지막은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청어산업으로 흥했는데 한 어부가 청어를 쉽게 손질하는 칼을 발명한다. 이 칼로 청어의 손질이 매우 빨라졌고, 보관을 위해 소금이 필요해졌다. 과거엔 어선의 어업시간과 반경이 짧았는데 물고기를 잡아서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모두 썩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어를 잡은후 바로 내장을 손질하고 소금에 절이면 무려 1년이상 보관이 가능했다. 이로 인해 어선들의 조업시간과 활동반경은 매우 넓어졌고, 어획량도 급증한다.

 네덜란드 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바다 정제염을 대거 확보하고 이를 한번 더 정제하여 소금의 질을 엄청나게 올렸다. 그들은 분업화도 시도하여 청어 손질에 각 단계가 있었고 이를 통해 균질품을 생산할수 있어 청어가 매우 인기가 좋았다.

 

2. 모피

 모피는 가죽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옷이다. 쥐부터, 비버, 담비, 사슴, 곰, 너구리등 털이 많은 동물의 가죽을 주로 칭하는데 이 모피는 해당동물의 절명과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의 영토확장을 불러왔다.

 모피는 털가죽동물이 있는 모든곳에서 교역대상이었지만 러시아서 우선 흥했다. 러시아는 1581년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후 이반 4세가 모피교역을 목적으로 코사크 용병에 의한 동진을 시작했다. 당시 시베리아에는 고작 인구 20만에 120여개의 부족만이 존재하여 이렇다할 장애물이 없었다. 경제적 동인과 장애물이 없음이 함께 작용하여 하루에 100km2 이라는 놀라운 속도로 동진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무려 100여년간의 남획으로 시베리아에서 모피가 더이상 구하기 어려워지자 러시아는 남진하여 중국의 모피를 노리게 된다. 이에 청이 긴장하여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 나선정벌이다. 임란과 병란 이후 국방을 강화한 조선은 5천이상의 조총병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이 이 때 활약한다. 화력이 당시 러시아군을 앞서 조선은 이들을 쉽게 격멸하였고 당시 러시아인들은 조선인들의 모자를 보고 머리가 큰 녀석들이 무섭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남에서 좌절한 러시아의 모피 욕심은 동으로 이어져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로 향한다. 거기서도 모피가 아작나자 다음은 물개와 바다사자의 차례가 된다.

 모피러시는 미국에서도 이어졌다. 17세기 러시아의 모피가 바닥나자 북미지역이 새로운 공급처로 자리한다. 북미에는 비버가 많았기에 동부의 넓은 숲지역에서 비버사냥이 이어졌고, 인디언들과 네덜란드인들이 교역을 했다. 비버 남획은 심각하여 1720년까지 무려 2백만 마리의 비버가 사라졌고 18세기의 기록을 보면 한 해에 평균 비버 26만 너구리 23만 여우 2만 곰 2만5천등 50만 마리가 넘는 털가죽 동물이 사냥당했다. 특히, 비버는 잡기가 무척 쉬우면 반면 번식력이 낮기에 금방사라지고 만다.

 모피가 동부에서 사라지자 골드러시 마냥 서부러 사람들은 향한다. 서부의 산맥 너머에 모피가 많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하지만 모피가 생각보다 많지 않자 역시 러시아처럼 해달과 바다표범 사냥에 나섰다.

 모피사냥을 현재도 진행중이다. 덴마크는 연간 1200만 마리의 밍크를 사육하며 중국은 1800만 마리에 달한다. 캐나다에서는 한해 털가죽과 오메가 3등을 위해 30여만 마리의 바다표범을 사냥하며 털이 희고 복슬복슬한 새끼의 경우는 사냥꾼이 가죽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산채로 잡아 껍질을 벗긴다고 한다.  

 모피는 아시아에서도 인기였다. 과거 고조선은 모피 무역의 중심지였다. 철기나 청동기 이전엔 모피를 가공할 만한 도구가 마뜩지 않았는데 고조선 인근에서 나는 흑요석이 아주 적합했다. 하지만 흑요석은 화산활동이 강하게 일어난 곳에서만 있었던 것이기에 무척 희귀했고 이로 인해 고조선은 모피와 흑요석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모피 교역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시대까진 잘 이어지지만 북방을 상실한 고려 이후로는 수입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모피  수입국이 되었으며 이 사치품을 확보하기 위해 매년 막대한 부를 손실하게 되었다. 반면 모피교역을 장악한 이 지역의 야인들이 성장하여 강한 나라들을 세우고 우리와 중국을 위협하게 되었다.

 

3. 보석

보석의 역사는 유대인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본디 보석은 금이나 은에 비해 값어치가 없었는데 모래가루를 이용해 연마하던 것을 유대인들이 물레를 이용한 연마기술을 개발한 후 광채가 살아나자 가치가 폭등한다. 유대인들은 개방적이던 이베리아 반도에 많이 거주하였는데 스페인의 레콩키스타 달성후 추방령이 갑작스레 내려진다. 그들에겐 불과 3개월의 시간이 주어졌는데 당시 스페인 인구의 무려 6.5%가 유대인이었다.

 항상 쫓겨나고 핍박받은 유대이었기에 그들은 언제나 터전을 떠날 준비를 갖추는 습관이 있었다, 바로 재산을 적당히 분할하는 것이었는데 3분의 1은 현금 3분의 1은 보석 3분의 1은 기타 식이었다. 이런 식의 재산분할이 포트폴리오의 유래다. 보석은 그중에서도 환금이 용이하고 이동이 편해 선호대상이었다.

 유대인들은 개종하거나 가까운 포르투갈이나 북아프리카 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으로 이주한다. 이때부터 벨기에 앤트워프가 보석 산업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한다. 보석중 최고는 다이아몬드인데 희귀하던 이것이 19세기 남아공에서 대규모 광산이 발견된다. 당시 남아공 일대는 네덜란드 출신의 보어인이 자리잡고 있었고, 영국은 다이아몬드를 노려 무려 45만의 군대를 파견한다. 당시 보어인은 인구 50만정도의 병력은 최대 고작7만수준으로 영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영국은 보어전쟁을 일으켜 21만을 수용소에 강제수용하여 2만이 숨졌고 그들의 집과 토지를 강탈했다.

 이런 영국의 무도한 짓거리를 영국의 학자 존 앳킨스 홉슨은 목도하고 돌아와 책을 쓴다. 제국주의는 국가내의 부유층이 사치를 위해 정부의 통치를 강탈해서 외국의 몸에 빨판을 박아 그들의 부를 빼내려고 제국을 팽창시키는 기생적인 사회과정이란 내용을 담은 제국주의론이다. 이 책에서 후진국의 경제가 선진국에 종속된다는 종속이론이 발전하였고, 이는 레닌 이론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학자는 영국에선 인정받지 못했지만 세계대전가지 예언했다고 하니 대단할 따름이다.

 다이아몬드 하면 극악무도한 드비어스 사가 생각난다. 드비어스사 이름의 유래는 의외로 창립자가 아닌 남아공의 가난한 농부이다. 이 형제는 다이아 광산을 판면서 그 대가로 회사이름에 자신들의 이름이 쓰이기를 요구했다니 그것이 유래다. 드비어스는 유대인들의 회사로 이들이 악명이 높은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고가의 독점 정책을 장기간 펼쳤으며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익을 생산지 및 원산지와 전혀 나누지 않고 오히려 그 지역에 피를 부르는 정책만 감행했다는 점이다.

 드비어스는 초기 회장인 세실로즈가 남아공 정계에 진출해 총독이 되면서 법과 정책을 자기 회사에 유리하게 집행하며 힘을 키워간다. 그들은 이를 이용하여 다이아 광산을 독점하고 병합해갔다. 세실 로즈 사후엔 오펜하이머가 회사를 이어받았다. 그는 회사의 막강한 위치를 이용하여 공급을 조절하고 가격 조작으로 약한 경쟁사를 파산위기에 몰아넣은 후  헐값에 강탈하는 수법을 즐겨 사용했다. 대공황은 그에게 기회여서 위기에 몰린 다이아 광산을 매입했고 싼 값에 나오는 전세계 다이아를 헐값에 매집했다. 이후 견고해진 독점적 위치를 이용 고가로 다이아몬드를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비어스의 공급체계는 생산자-드비어스-사이드홀더-소매상으로 이어진다. 드비어스는 유리한 위치를 이용 10캐럿에 고작 15달러의 가격으로 다이아몬드를 생산자로부터 공급받는다. 드비어스는 놀랍게도 판매자를 자신들이 지정하는데 이들이 사이드홀더다. 사이드 홀더로 지정되어 드비어서로부터 다이아를 살수 있게 되면 엄청난 이익을 얻으므로 사이드 홀더는 드비어스에게 아주 비싸게 다이아를 구매한 후 이를 더욱 비싸게 소매상으로 넘기며 소매상은 이를 더욱 비싸게 소비자에 판매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15달러짜리 10캐럿 다이아는 무려 12만 5천달러에 이르게 된다. 과정마다 10배이상의 폭리를 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러시아와 결탁한 레비에프의 등장으로 드비어스의 위치는 예전만 못하다. 한때 그들의 사이드 홀더중 하나에 불과했던 레비에프는 러시아의 다이아 광산을 이용 공급을 시작했다. 그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접근해 아프리카 생산지에서 원석 가공을 제안하여 그들에게 일자리와 부를 나눠주겠다고 접근하여 호응을 얻어 시장을 잠식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최근엔 다이아매장이 아닌 인터넷을 통한 구매 등 공급처가 다양화 되면서 다이아 가격은 다소 하락하는 추세라고 한다.

 

4. 향신료

염장은 식품의 보존에 그만이었지만 배부른 유럽의 중세귀족들은 계속된 염장식품에 싫증이났다. 그들은 신선한 스테이크를 선호했는데 향신료를 뿌려 맛과 고기 비린내를 제거하고 보관도 오래가는 스테이크를 좋아했다. 문제는 향신료가 열대성 작물이라 유럽에선 전혀 재배가 안된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몽골제국의 붕괴로 안정적인 교역루트가 이슬람에 막히자 유럽의 향신료 가격은 폭등한다. 이 경제적 요인은 대서양에 인접했으며 이제 막 통일에 성공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모험을 감행하게 한다. 이들은 향신료의 주산지인 인도로 향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포르투갈은 동으로 스페인은 서로 향했다는 점이다. 아메리카의 존재를 몰랐기에 이 승부를 포르투갈의 승리로 끝난다. 동남아와 인도 일부를 차지한 포르트갈은 중국남부 까지 진출했으며 해적소탕을 미끼로 건 포르투갈의 제안에 중국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포르투갈은 요즘 회자되는 이란의 호르모즈 해협인근을 차지했는데 이로 인해 무역풍에 구애받지 않고 거래가 가능해져 거래의 회전수를 획기적으로 높여 막대한 이익을 누릴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은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이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영국은 인도를 위주로 교역했는데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만들고 아시아 요역을 주도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막대한 권한을 이회사에 부여했는데 해상교역권, 식민지 개척 및 관리권, 관리임명권, 전쟁선포권, 치외법권등 사실상 국가나 마찬가지의 권한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동인도회사는 빠른 타이밍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단과 행동이 가능했다.

 영국은 인도에서는 모직물을 중국에선 차를 교역했다. 차는 녹차, 우롱차, 홍차로 분류되는데 차 잎을 따 온도, 습도, 시간을 잘 맞추면 차 잎이 효소가 산화작용으로 발효되어 검게변하는데 이것이 홍차다. 반쯤 발효되면 우롱차가 된다. 영국인이 차를 즐기게 된 것은 과거 냉장고가 없이 차를 배로 운반하다보니 더운 열대에서 차 잎이 자연히 홍차가 되어서 그렇다. 영국 출신으로 홍차를 즐기던 미국인들은 보스턴 차사건 이후 커피로 돌아섰는데 그래서 아직도 영국은 차문화가 미국은 커피문화가 발달했다.

 

5. 석유

 첨단 산업이 발흥하고 4차산업혁명시대를 눈앞에 두며 석유는 과거의 산업 느낌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2011년 기준 세계 5대 기업중 4개가 정유회사이며 이들의 순이익은 매출의 무려 10%이상일정도로 석유의 위력은 아직 건재하며 지배적인게 사실이다.

 석유는 1855년 조지 미쉘이 석유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성분분석을 의뢰하며 발흥한다. 보고서 결과 석유는 다양한 물질로 분류가 가능함이 밝혀졌고, 값싼 공정으로 당시 고래 기름을 활용하던 램프에 사용할 기름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보였다. 이후 불과 15년뒤 사용처가 아직 불분명한 석유에 사람들이 몰려 무려 75개의 유정이 개발된다. 검은 러시의 시작이었다.

 고래가 남획되어 개체수가 줄자 석유는 더욱 중요해졌다. 램프는 생활필수품이 되었는데 석탄을 활용하는 방법도 고래 기름을 대체할 수 있었다. 석탄을 증류하여 조명용 가스를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발 우려와 가스관이 필요해 가정용으론 사용이 힘든 점든 애로사항이 많았다. 하지만 석유에서 나온 등유는 폭발위험과 가스관, 소음이 모두 발생하지 않았다.

 초기엔 지금은 오히려 가치가 낮은 등유만이 석유의 증류과정에서 필요했다. 나머지 휘발유나 경유, 찌꺼기는 모두 버려졌다. 특히 휘발유는 불이 너무 쉽게 붙고 폭발위험이 높아 처치곤란의 위험물질이었다.

 석유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록펠러다. 록펠러는 발상이 남들과 달라 유정개발보다는 석유의 정유와 운송이 돈이 된다고 보았다. 그는 정유량이 매일 달라 운송에 애를 먹던 철도회사에 일정량을 운송하는 조건으로 싼 가격에 계약을 체결해 경쟁자들을 운송비에서 압도했다.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다른 회사들을 인수합병하기 시작했고, 독점적 지위를 구축한다. 그는 독점에 대한 생각도 남들과 달라 독점이 시작되면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지면 양질의 제품을 균질하면서도 싼 가격에 공급할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의 회사 이름은 이런 철학을 반영하듯 스탠더드 오일이었고 가격도 독점적 지위 구축후 80%가 내려갔다. 물론 이윤은 그가 다 먹지만 말이다.

 록펠러는 석유가 당시 위스키나 포도주 통에 담겨 운반되어 이송중 휘발되거나 새는 경우가 만았던 것을 최초로 철제탱크를 개발하여 운송하는 생각도 해냈다.

 이렇게 새로운 연료로 등장한 석유를 모든 나라가 반긴 것은 아니었다. 석탄과 다르게 석유는 지역적 편중성이 컸다. 그러다 보니 수입을 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지금도 그렇지만 안정적인 교역로가 필요했다. 또한 영국이나 독일 같이 석탄이 풍부한 국가는 자국에 관련 산업과 일자리가 많이 구축되었기에 석유로의 전환이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석탄을 사용한 증기선은 무려 10km에서 적의 눈에 띄는등 문제가 많았기에 결국 영국과 독일도 석유로의 전환을 피하지 못한다.

 잘나가던 스탠더드 오일은 반트러스트법에 의거 1911년 무려 34개사로 강제분할된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세력을 규합해 미국에는 엑슨과 모빌, 쉐브론, 텍사코, 걸프등의 정유사가 힘을 키웠고, 영국엔 BP, 로열 더치쉘이 있었다. 이 7개의 회사를 세븐시스터즈라고 하며 이들은 1975년 OPEC가 등장하기 전가지 세계 석유의 공급을 독점하며 균일 가격에 석유를 공급하며 큰 이윤을 누려왔다.

 

-오일쇼크음모론

1970년대 제4차 중동전쟁으로 발발한 오일쇼크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경제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은 마이너스로 치달았는데 한국의 마이너스 경제성장은 이 시기와 아이엠에프시기, 서브프라임모기지론사태 시기 이 세시기 뿐이다. 하여튼 당시 미국은 재정적자와 달러와의 가치 하락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미국은 유가상승이 절실했는데 유가가 상승하며 석유의 결제화폐인 달러의 수요가 늘어나고 이를 통해 달러가치 상승과 재정적자의 감소 두마리 토끼를 한방에 잡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영국 역시 유가상승이 필요했다. 당시 영국은 북해유전을 발견했는데 시추 비용이 만만치 않아 당시의 유가로는 채산성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은 3배정도 유가 상승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세븐시스터즈의 비밀회동이 그해 5월에 열렸는데 공교롭게도 불과 5개월후 제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세계는 미증유의 오일쇼크에 빠졌고, 유가는 그들의 기대 이상인 4배로 상승한다. 유가의 상승으로 미국과 영국, 세븐시스터즈는 노래를 불렀지만 다른 나라들은 막대한 재정적자와 물가상승에 시달리게 된다. 이 사건으로 빈국에서 부국으로 부가 대거이동했는데 경제위기는 항상 이런식으로 진행된다.

 

-아프간 침공

미국은 석유산유국이지만 소비량이 워낙 많아 세계패권의 유지를 위해 석유공급이 늘 필요했다. 중동다음으로 전략적으로 미국에 중요한 지역은 그래서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가 된다. 이 지역의 유전은 싱싱한 새로 발견한 유전이었고 해저시추임에도 채산성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스피해에는 무려 2천억 배럴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배럴당 100달러로 계산해도 무려 20조 달러가 되는 금액이다. 이를 미국이 놓칠리 없는데 문제는 이 지역에 다양한 나라가 얽혔다는 것이다.

 카스피해 주변엔 이란,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카자흐, 우즈벡, 타지키스탄이 있다. 이 지역엔 미국의 적인 러시아, 중국이 인접해서 카스피해의 석유를 이들이 차지할 우려가 있었다. 미국으로선 어떻게든 카스피해의 석유를 인도양쪽으로 끌어오는게 필요했으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국가가 아프간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초기 탈레반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그들과 협상한다. 하지만 탈레반의 조건을 수용하기 어려웠던 미국은 협상 결렬후 우리가 다 아는 거짓 명분으로 아프간을 침공한다.

 

- 이라크와 이란

두차례나 전쟁을 치루고 지도자인 사담후세인 마저 제거한 미국은 지금으로선 믿기 어렵지만 오래도록 이라크와 친했다. 이는 이라크를 완충지대로 삼아 이란의 위협으로부터 석유공급선을 안정화시키고 우방 이스라엘의 안보확보를 위함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한다. 하지만 전쟁후, 사담이 중동의 패자를 노리며 쿠웨이트를 침공해 석유공급선을 위협하자 전쟁을 개시한다. 이 전쟁은 한번 더 이어지게 되는데 이땐 사담이 감히 석유의 결제를 달러화에서 유로화로 바꾼 것에서 야기된다. 결국 미국은 한번의 전쟁을 더 치루고 사담을 제거한다.

 2차대전후 영국은 이란의 민주정권인 모사데크 정권의 석유국유화로 인해 갈등한다. 미국와 영국은 모사데크와 갈등관계였던 팔레비2세를 지원해 백색혁명으로 이란에 친미국가를 세운다.하지만 이란 전통세력의 반발이 계속되어 팔레비 왕조는 고작 20년후 이슬람혁명으로 전복된다.

 

-셰일가스

셰일가스는 수직으로 석유층을 파내려고 수평으로 강한 수압으로 지층을 분쇄하여 석유를 채취하는 방식이다. 과거 채산성이 없던 것이 기술이 개발되거 유가가 상승하며 경제력이 생겨났다. 미국은 셰일가스의 등장으로 최대의 석유수입국에서 더욱 막강한 산유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셰일가스로 무려 400만 배럴의 자체 수요를 충당하게 되었는데 이는 OPEC에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갑작스런 400만 배럴의 수출감소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OPEC의 단합은 붕괴되고 2010년대에 끊임없이 오르던 유가는 하락세로 돌아서게 된다. 셰일가스는 오일쇼크 못지 않은 이득을 미국에 챙겨주었는데 우선 정적인 러시아와 베네주엘라가 몰락한다. 남미의 반미 세력의 중심이 차베스의 베네주엘라는 차베스의 사망과 유가폭락후 지금의 파탄에 이르렀으며 승승장구하던 러시아의 경제사정도 상당히 나빠지게 된다.

 반면 미국은 수입의 대체로 가격경쟁력이 살아나 제조업이 살아나게 되고, 달러 강세가 시작되었으며 민간소비가 진작되어 최상위 선진국임에도 무려 3%대의 경제성장률을 유가하락후 수년간 유지하게 되었다. 저유가는 한국에도 호재였다. 달러가 강세로 돌아서며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화 약세의 불리한 정황이 호전되었고, 수출경쟁력이 강화되었으며 저금리가 유지되어 인플레이션 통제가 가능했다. 또한 수출경쟁력 강화와 유가수입으로 인한 적자가 대폭 개선되어 큰 폭의 흑자를 수년간 기록하게 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가토 요코 지음, 윤현명 외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100여년전 우리의 역사는 굴종과 아픔, 아쉬움이 가득찬 역사였다. 절대적 피해자로서 우리는 그 역사를 기억하며 절대적 가해자로서 당시 일본을 규정한다. 더군다나 일본은 당시 식민지로서 전쟁에 강제 동원되었던 우리나 중국 등의 아시아 주변국들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인식은 지나치게 부족하다. 반면 스스로가 전쟁을 일으킨 자임에도 피해자로서의 인식은 어이없게 과대해 더욱 우리와 아시아 각국의 공분을 사고 있다.

 그런 그들이 메이지 유신서부터 2차대전의 패망까지 어떠한 길을 선택했는지를 비추어주는게 이번에 본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이다. 일본인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절대적 가해자로밖엔 그들을 인식할 수 없는 한국과 한국인인 나에게 재밌고 신선한 책이었다. 그리고 물론 신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선택이 그럴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와 피동적 입장이라는 이야기엔 절대 공감하거나 이해해주긴 어렵다.

 이건 남이 나를 칠것 같기에 먼저 공격했다라거나 내가 먼저 저놈을 꼬봉으로 삼지 않으면 다른 놈이 꼬봉으로 삼을게 뻔하기에 내가 먼저 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인정해주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책은 청일전쟁시기부터 시작한다. 1876년 우리는 강화도에서 일본에 의해 역사상 최초로 불평등조약을 맺고 개항했기에 당시부터 그들이 무척 강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보단 모든면에서 개화에서 월등했지만 일본은 여러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에 허덕이고 있었고 아직도 중국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능력에 자신이 없는 국가였다.

 또한 메이지 유신은 이루어졌으나 사쓰마 번과 조슈번간에 내전에 가까운 다툼이 있었고, 주요 인사들도 이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암살되는등 사회적으로도 다소 혼란했다. 서구열강에게도 아직은 인정받지 못해 무역아니 불평등조약을 통한 착취의 대상이거나 중국과 러시아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이를 지정학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부류일 뿐이었다.

  당시 일본의 지배층은 오스트리아 슈타인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는데 슈타인은 이익선과 주권선이란 개념을 주창했다. 주권선은 한 나라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말하는 것이며 이익선은 보다 폭넓은 것으로 나라의 존망과 관련한 외국의 상태를 의미했다. 당시 일본에게 이익선은 조선이었다. 일본의 세력들은 당시 제정 러시아가 극동으로 진출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를 완성하면 만주와 한반도가 사실상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들어오게 되고 러시아가 장악한 한반도의 원산항을 해군기지로 삼으면 다음은 자신들의 순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일본에게 선택은 두가지 였다. 조선을 누구도 차지 할 수 없는 방패막이로서 중립국화하거나 자신들이 차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러시아는 한반도에 세력을 미칠 상황은 아니었고, 이에 일본은 청과 대치한다. 청은 과거 화이질서에 속한 조선이나 베트남등에 군사적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시대가 급변하며 정책이 군사적으로 바뀐다. 청은 조선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보내 이를 제압했고, 그 수장인 대원군마저 데려가는 강수를 보인다. 이로 인해 조선내 일본 세력이 급격히 수축하자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일본은 무리수를 둔다. 조선조정은 어리석게도 동학을 진압할 힘이 없자 청에 파병을 요청했고, 일본은 조선에 군을 보낼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규모 병력을 파병한다. 뒤늦게 조선조정이 동학군과 화약을 맺었음에도 양국은 충돌했고,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다.

 일본은 이 승리로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여러개항장, 타이완, 펑후제도, 요동반도를 얻지만 일본의 영향력이 중국에 지나치게 확대되는걸 염려한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의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빼앗기고 만다.

 이로 인해 일본내에서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은 커지게 되었으며 일본은 배상금을 군비확장에 이용하게 된다. 반면 조선과 청에서는 말한마디로 일본을 굴복시키는 러시아를 보며 일본의 견제를 위해 러시아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중국은 러시아의 만주지역 철도 건설에 적극협조하였고, 조선은 정권차원에서 친러성향이 두드러진다. 그 결과 일본은 조선에 을미사변을 일으켜 일국의 황비를 암살하는 초유의 테러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일본은 열강의 하나인 러시아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러시아의 요구는 일본에 좌절을 안겨주었고, 이는 선제공격으로 이어지는 개전결심을 불러온다. 일본은 러시아로 인해 당시 만주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싶었다. 러시아 역시 한반도 보다는 만주에 관심이 많았다. 둘의 입장은 이렇게 이해되는듯 했지만 러시아는 대한해협을 비롯한 일본의 주요 해협에 대한 통과권과 한반도 이북에 대한 중립화를 요구했다. 이는 당시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과 영국의 협조, 그리고 새삼 러시아의 위협을 느낀 중국의 중립화로 일본은 전쟁을 결심한다. 일본은 중국과는 다른 러시와의 전쟁으로 더 큰 피해를 보는 승리를 거둔다. 이로 인한 자신감도 상승하고 지위도 올라갔으나 러시아는 중국과는 달랐다. 재정적 손실이 컸던 일본은 청의 경우처럼 배상금과 전승국으로서의 요구를기대했으나 러시아의 짜르는 가볍게 이를 묵살한다. 러시아를 무력적으로 침공하거나 위협할 능력이 없는 일본으로선 요구를 더 지속할 수 없었다.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본 승전이었다.

 그리고 10여년후 세계1차대전이 발발한다. 일본에겐 호기였다. 일본은 유럽의 열강에 전쟁물자를 팔아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모했고, 독일에 선전포고해 남양군도와 산둥반도의 조차지와 철도권, 만주지역의 철도권을 얻는다. 물론 이조차 쉽진 않았다. 중국내로 지나치게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우려한 영국이 일본의 참전에 많은 제한을 걸었고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일본내에선 미국과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생겨난다.

 1차대전을 정리한 파리강화회의에선 더한 일이 일어난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전승국임에도 미국과 영국인 일본이 중국내에서 권익을 누리는 것에 강한 비판을 한다. 또한 강화외의중 한국에서 일어난 삼일운동이 널리 알려지며 일본의 가혹한 식민통치가 세계적으로 비판받는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일본은 강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해양세력인 영국이 극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일본에 잠재적인 적국으로 느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만주사변이다. 일본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내전이후 희안하게도 정치세력과 군사세력이 하나로 일치하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해 이후로 군사세력이 정치세력으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는데 이게 결국은 2차대전까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군부는 정치세력의 판단을 무시하고 독단적이고 무모하게 움직이기 일쑤였다.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하극상은 물론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이나 상관을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만주사변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전체의 판단이라기보다는 만주 관동군 일부의 판단이었다. 물론 그들은 3년이상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철도를 폭파한후 중국군의 소행으로 조작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들만의 판단이고 나머지가 이를 따르지 않았다면 지속을 불가능했다. 군부의 상관들은 이들의 하극상을 묵인하거나 협조했고, 당대의 조사에 따르면 도쿄대학의 학생들 상당수가 전쟁에 동의했다.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수준이나 윤리성이 그정도였다. 이는 야당이나 좌파세력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전쟁에 반대하던 그들은 여론의 절대다수가 전쟁에 동의하자 전쟁엔 찬성하되 전쟁 참여인력의 직장이나 자위를 보장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만주사변의 승리로 만주국이 성립하며 이는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고삐가 풀린 일본의 군부세력은 중일전쟁도 일으킨다. 재정러시아에서 소비에트로 변한 소련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고, 미국이 태평양으로 세력을 본격적으로 뻗기전에 동아시아의 패권을 완성한 속셈이었다. 거기에 중국을 얕보기도 했다. 만주사변에서 그들이 보여준 저항이 형편없었고,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에, 국민당 자체에서도 반군세력이 있어 자중지란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군부는 중국의 광대한 영토에도 중심경제지역을 빼았아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것 같다. 하지만 장제스는 주요 핵심지역을 모두 상실하면서도 지휘권을 잃지 않고 장기투쟁했으며 국공합작이 한계가 많았지만 이루어졌다. 또한 일본을 견제하는 독일과 미국, 영국의 지원이 이루어졌고, 홍콩그리고 여기가 봉쇄된 이후엔 버마나 베트남을 이용한 지원이 이루어지며 중일전쟁은 장기화한다.

 이 상황에서 유럽에 2차대전이 터진다. 1차대전때처럼 일본의 정치세력들은 초기에 이를 관망한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독일이 빠르게 유럽을 장악하고 미국은 관망하며, 러시아는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어 사실상 저항세력이 영국만 남게되자. 일본의 생각을 달라진다. 이 기회에 영국 프랑스등의 식민지를 차지하고 자급자족적 총력전이 가능한 대동아공영권을 완성할 욕심을 갖게 된 것이다. 전력에 대한 판단 착오도 한몫을 한다. 당시 일본은 수십년간에 전쟁으로 항상 국력대비 군사력이 최대화 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그럼에도 전쟁에 수동적이고 고립적이던 미국의 군사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국의 잠재력을 우습게 본 것이다.

 거기에초기 기습으로 영국과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격멸하고 그들이 전열을 다듬는 사이 태평양 지역을 석권하고 방어전을 펼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미, 영과 태평양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협상이 가능핟고 생각했다. 애초에 완전히 이길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과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직접 침공이 어렵고 당시 일본의 국력으론 어림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으로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공격한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미국은 일본의 공격에 무방비였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태평양 지역에서의 선제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진주만은 깊지 않은 바다였는데 수심이 12미터였다. 당시 공격기가 함대를 공격하는 방법은 비행하여 폭탄을 선상에 떨어뜨리거나 원거리서 어뢰를 투하하는 방법이었다. 전자는 함대의 강한 포격과 기관총소사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으며 어뢰는 수심 500m정도에서 서서히 올라와 함대를 공격하는 형식에어서 수심이 얕고 함대가 모여있는 진주만은 이 같은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고 미국은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조종사들은 중일전쟁으로 단련된 이들이었다. 진주만의 환경을 고려해 3달간의 연습으로 12m 수심에 어뢰를 투하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진주만의 태평양함대는 격멸된다. 이는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뽑은 겪으로 정신을 차린 미국은 막강한 국력과 자급자족이 가능한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서의 전쟁을 수행해간다. 미국이 총력전에 돌입하자 그들의 생산력은 일본의 수십배에 달하기 시작했으며 전쟁막바지의 양국의 전력차는 무려 20배에 달하게 된다.

 100년전 일본은 전쟁국가나 다름없었다. 현대 미국이 그러한 것처럼 일본은 지역의 패권을 얻기 위해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2차대전을 차례로 일으키거나 참전하며 거의 10년에 한번 전쟁을 수행했다. 책에 등장한 것처럼 그들은 피해를 얻거나 당하기 전에 선공하여 피해를 막는 식으로 식민지를 확장하거나 전쟁을 수행하였고, 그래서인지 가해자로서의 인식이 매우 미약했다.(물론 책의 저자는 아니다. 그는 을미사변과 삼일운동, 제암리사건, 관동대지진을 모두 잘 인정한다.) 문제는 이 같은 시각이 현대일본에도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웃과의 협력과 연대를 통한 지역의 평화보다는 지역을 장악하거나 넘어서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지역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어떤 분야든 탈아시아를 외치는 것이 그러한 생각의 대표적 표상이라 생각한다. 이런 이웃과 평화와 연대에 기초한 지역의 안정성을 추구해나가는 것. 매우 힘든 우리의 과제일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