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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 - 전쟁의 기원에서 미래의 전쟁까지, 한 권으로 읽는 전쟁의 세계사
제러미 블랙 지음, 유나영 옮김 / 서해문집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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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지 못하는 동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은 생존을 위해 다른 생물을 죽여야 한다. 다른 종의 개체는 주로 먹이로 이용하기 위해 죽이지만 같은 동족 끼리는 자원을 놓고 경쟁하며 죽인다. 인간은 협력하여 집단 사냥을 오랫동안 해왔기에 사냥과 전쟁은 인류사 초기엔 잘 구분되지 않았고 크게 분화되지도 않았다. 전쟁보단 아무래도 사냥을 더 많이 했을테니 사냥했을때의 집단 행동과 양식 전술이 그대로 다툼에 이용되었을 개연성도 크다. 

 그러다 사회가 크게 분화하고 커지면서 서로 경계를 맞닿게 되었고 그러면서 전쟁이 사냥에서 본격 분화하며 전문화하였을 것이다. 인간은 전쟁을 위해 진화하기도 하였는데 전투집단 내에서 인간은 강력한 동료애와 흥분 및 고양감을 느낀다. 이는 광범위한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진화한 심리이므로 인간이 전쟁을 위한 심리적 적응을 했음을 입증한다. 

 무기로는 초기에 석재가 쓰였지만 광석에서 금속을 분리할 수 있게 되면서 청동같은 금속 무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말은 기원전 4천년경 흑해 부근에서 가축화하여 기원전 1700년경 전차에 활용되었다. 전차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재갈과 바퀴살이 필요했다. 초기 제국들이 커지면서 전쟁은 점차 대규모화하기 시작한다. 전쟁의 대규모화는 식량과 식수, 숙소, 장비의 보급을 요구했으며 이는 고대엔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필연적으로 주변 지역 및 피정복민에 대한 착취가 이뤄졌으며 전쟁과는 다른 갈등을 낳기도 했다. 

 중동지역은 비옥한 충적토 덕에 인구부양 효과가 컸고 그로 인해 초기부터 대규모 전쟁이 이뤄졌다. 이 지역에서 철기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히타이트 였지만 그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철기를 제대로 사용하여 중동을 제패한 것은 아시리아였다. 그들은 단호한 리더십과 군사주의 문화, 아슈르 신의 가호로 무장했으며 공성추와 공성탑 등 이전에 비해 매우 뛰어난 공성 능력을 갖고 있었다. 바빌론과 페르시아가 차례로 무너졌고 말 4마리의 중전차로 화력을 강화했다. 

 중국은 북부지역에 대규모 농경이 시작되며 무력 충돌과 국가가 생겨난다. 기원전 3천년경 이 지역에 성벽을 두른 거주지와 금속 무기가 등장했고 2500년 경에 청쯔야에 성벽도시가 생기고 1800년경 상왕조가 등장했다. 중국에서 전차와 합성궁, 청동으로 창끝을 댄 극과 창이 발달한 것이 기원전 2000년 경이다. 한편 서부 변경의 주나라는 유목민과의 교류로 얻은 저차를 활용하여 상을 무너뜨린다. 주나라까지 중국에서는 귀족들에 의한 소규모 전차전투가 주류였다. 하지만 전국시대부터는 석궁과 같은 무기와 대규모 보병 진형에 의한 전투가 시작된다. 무력충돌이 대규모화했고 이로 인해 전차보다는 보병이 더욱 중요해졌다. 

 인도 역시 중국처럼 오랜 문명을 가졌다. 기원전 28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에 하라파, 칼리방간, 모헨조다로 성벽이 있었고 기원전 1000년경 펀자브에 요새화한 정착지가 나타났다. 인도는 북부와 남부가 크게 다르다. 인도 북부는 기후가 비교적 시원해 말의 번식과 사육이 가능해 기병의 운영이 가능했다. 반면 남부는 열대로 숲이 울창하고 질병이 많아 말이 건강을 유지하지 못해 기병이 없었다. 이는 침략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인도 북부는 북쪽의 좁은 회랑을 통해 침공을 자주 당한다. 아리아인, 쿠샨, 월지, 스키타이, 샤카등이 그러했다. 인도는 지리적 한계로 경작 지대가 원시림에 가로막혀 잘개 쪼개져있다. 때문에 인도는 이러한 경작지를 소유한 소국이 다양하게 많았으며 좀처럼 하나가 되지 못했다. 지금의 인도에 수많은 언어가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로마는 물리적 군사적으로 광범위한 환경에서 요새나 도로를 많이 건설해 오래가는 군사인프라를 구축한다. 로마는 행군마다 쉬는 곳에 숙영지를 건설했는데 이는 이후 방어와 연락망을 제공하고 향후엔 정착촌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로마는 강했지만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그들은 남부의 삼니움과 상당히 오래 경쟁했고 기원전 250년이 되어야 간신히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차지한다. 이후 스페인 남동부를 두고 카르타고와 경쟁하는데 로마는 해군력이 열세였음에도 빠르게 만회하여 전쟁에서 승리해 시칠리아를 차지하고 주변 두 섬도 얻는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선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 본토를 침공한다. 그들은 매우 강력하여 대부분의 전투에서 로마의 주력부대를 궤멸시키고 일부 동맹도 와해시킨다. 하지만 한니발의 군대를 강했으나 알프스를 넘어온 만큼 이렇다할 공성장비가 없었다. 여기에 기다리던 지원군과 해상전력은 로마에 의해 차단되었으므로 한니발은 사실상 퇴각할수 밖에 없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 승리이후 기원전 36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시칠리아 해적을 정발함으로써 지중해를 완전히 손에 넣는다. 이덕에 매우 저렴하게 대규모 해외 무역과 식량 공급이 가능해졌다. 로마는 피정복민에게 로마인이 될 기회를 부여하여 현지인은 자기편으로 만들어 국경을 안정화하였다. 

 방어 구조물인 성은 과거엔 피신처였지만 점차 주거지로 변모한다. 석성은 화재에 강하다. 서구는 석재를 주로 사용하였고 동양은 흙, 벽돌, 목재로 성을 지었다. 석성은 화재에 강하지만 내부의 뼈대 구조물은 목재를 사용하였기에 아래를 파서 불을 붙이는 공격엔 붕괴되기 쉬웠다. 13세기부터 성규모와 높이, 복잡성에 증가했다. 궁수, 투척무기, 땅굴의 위험으로 성벽의 높이는 올라갔다. 

 유목민은 스텝의 동물을 전쟁에 이용했다. 이 동물들은 무척 강인하고 황량한 지형에 잘 적응했다. 유목문화의 생활양식은 대규모 경무장 기동전에 필수적인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그들은 이동이 생활이었기에 병참이 매우 효율적이어서 별도의 인원이나 조직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목군대는 소수이기에 인명손실에 민감했고 그래서 정복보다는 약탈과 초토화를 택했다. 농경제국의 변경을 초토화하면 양지역 사이에 완충지가 생겨났고 희생이 적어 효과적이었다. 

 몽골은 칭기즈칸이 나타난 후 호라즘과 사마르칸트, 금을 정복한다. 송을 멸망시킬때는 해자를 잔해로 메꾸고 중동지역에서 들여온 공성병기를 배치했다. 이는 트레뷰셋인데 인력으로 밧줄을 당겨서 쏘는 방식에서 평형추를 다는 방식으로 개선되었는데 이를 몽골이 도입했다. 

 화약은 중국에서 등장했다. 9세기엔 화약 제조공식이 정확해졌고 11세기에는 화약 생산 상설 병기창이 생겼으며 12세기에는 총신을 금속으로 제작하여 무기를 생산했고 14세기 들어 총과 포가 분리되었다. 초창기 공성용 사석포는 포미와 포신 분리형이었고 무겁고 발사후 열을 오랜기간 식혀야했다. 여기에 연철 이음색 부분을 만드는데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었다. 더 발전한 주조기술과 청동, 놋쇠등의 구리합금이나 주철을 사용하면서 대포는 가벼워지고 쓸만해진다. 1420년 서유럽에서는 알갱이 형태의 화약이 개발되는데 이는 구성성분이 잘 배합되고 파괴력을 높였다. 1400년경 질산칼륨대신 황산칼륨을 사용하면서 화약의 수분 흡수로 인해 품질저하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금속주조술의 향상으로 포신과 일체형의 포이가 도입되었다. 포이는 포신을 받치는 돌출부로 대포의 발사각을 조절하고 기동성과 발사속도를 향상시켰다. 

 총은 활보다 관통력이 뛰어났지만 탄알의 보급,, 연사의 어려움, 기후의 영향, 짧은 사거리, 기마에서의 사격의 어려움, 총기 폭발위험등 기존 궁병에 비해 단점이 무척 많았다. 여기에 총병은 궁병보다 명중률 향상에 많은 훈련이 필요했다. 때문에 총병은 명중률을 높이는 훈련보다는 전체를 집중시켜 전체발사량을 늘려 위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달한다. 총병은 장전에 오랜 시간이 걸려 보호를 해줄 창병이 필요해 같이 편성된다. 하지만 17세기 말에 총에 창검을 부착하게 되면서 창병이 사라진다. 18세기 들어 서양에ㅔ는 보병대열이 중앙에서 일제사격을 하고 양익을 기병이 보조하게 된다. 

 화약대포의 등장으로 성벽에도 변화가 생겨난다. 사각형 모양의 능보를 성벽 전체에 일정 간격으로 배치해 성벽에서도 대포사격을 하게 했다. 또한 성벽은 높이가 낮아졌다. 너무 높으면 포의 공격에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낮으면 적이 오르기도 쉬워져 적정한 높이를 유지했다. 화약대포는 고지나 비탈의 성격도 변화시켰다. 고지나 비탈은 전통적으로 전투에 유리하다. 적을 내려다볼 수 있으며 위치에너지가 있으니 발사무기 및 돌격의 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하지만 적의 입장에선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화약대포가 생겨나자 노출된 비탈이나 고지를 지키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해졌다. 때문에 현대전에서도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비탈사면뒤에 병력을 숨기고는 한다. 

 근대에 들어서 전쟁에서는 이동과 보급, 통신기술이 중요해진다. 증기선과 통조림, 전신이 개발되며 혁신적인 변화가 등장한다. 군수물자의 개선은 열대에서 효과가 매우 컸는데 통조림과 분유, 연유, 마가린은 냉장기술이 없던 시기에 등장해 열대에서도 식량의 선도 유지 및 보급 규모 개선이 크게 작용한다. 도로나 철도는 군사와 물자의 보급에 매우 중요했다. 이는 공격할 때도 마찬가지이고 자국은 방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의 보급으로 전쟁에서 정보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중앙이나 사령부에 전달되게 되었다. 

 이 책은 인류초기부터 현대까지의 전쟁을 무기의 등장이나 전술, 주요 전쟁사를 빠짐없이 다루려고 한 책이다. 하지만 다루는 내용이 방대하고 책이 그리 두껍지 않다보니 매우 빠르고 짧게 한 소재를 다루며 넘어간다. 이 부분이 매우 아쉬운데 뭔가 이야기를 하다 마는 느낌이 들고 전쟁사 전체를 변화시키는 주요 혁신적 변화를 다루는 면이 아쉬웠다. 원거리 무기의 등장, 기병의 등장, 총기의 등장 등은 꽤나 전쟁을 혁신적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좋은 점은 모든 전쟁에서 단순히 무기나 전술이 아니라 성공을 위해서는 현지에서의 조력과 병참 문제의 해결, 그리고 동맹을 잘 다루고 와해하는게 인류사적으로 공통됨을 보이려고 했다는 점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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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유산 - 역사와 과학을 꿰는 교차 상상력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기획 / 동아시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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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에서 과거 유산과 첨단기술을 연결하여 엮은 책이다. 하지만 책에서 양자가 비중이 비등하진 않고 유산에 더 초점이 가 있다. 그리고 연결도 좀 매끄럽진 못한 편이다. 그럼에도 첨단지식과 과거역사문화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첫 장은 미술이다. 미술은 시점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회화가 평면인 만큼 동서양 모두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찾았다. 서양은 15세기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거울을 이용해 투시원근법을 개발했다. 이후 소실점을 그림에 한 개나 두 개, 세 개도 사용하며 과학적 접근을 한다. 동양은 이를 하늘로 올라가 극복했다. 부감법을 개발한 것이다. 

 한국은 조선시대 부감법을 많이 사용했는데 그리는 대상의 규모에 따라 높이를 달리 할 수 밖에 없었고 고공부감법, 고공경사부감법, 저공경사부감법, 평행사선부감법을 이용했다. 고공부감법은 하늘의 높이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것으로 궁궐의 장대함이나 많은 인원을 동원한 행사에 적합했다. 고공경사부감법은 시선을 약간 뒤로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경사각을 표현한다. 정산의 금강전도, 김홍도의 월야선유도가 이 방법을 사용했다. 저공경사부감법은 살짝 만 뒤로 올라간 것으로 규모가 작고 대상을 크게 그려도 되는 풍속화에 적합했다. 서당이나 단오풍정 등이 이 방법을 사용했고 공간이 친밀하게 느껴지는 장점이 있다. 평행사선부감법은 고공경사부감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부감법의 최종판이다. 고공경사부감법을 취하되 건물만을 특이하게 정면에서 45도를 비틀어 그려 입체감을 드러낸다. 규장각도나 화성행궁도가 이 방법을 사용했으며 가까운 것을 오히려 작게 그리고 먼 것을 크게 그린다. 

 한국에는 평행사선부감법으로 제작한 대작으로 효명세자가 남긴 동궐도가 있다. 크기가 무려 576*273으로 창경궁과 창덕궁, 비원등 당시 궁궐의 전체를 남겼다. 워낙 대작이었기에 여러 화원이 나눠 그렸는데 그럼에도 하나의 시선으로 그림을 완성한 것이 대단하다.

 서양에서는 도자기를 도기와 석기, 자기로 구분한다. 기준은 온도인데 도기는 80-1100도, 석기는 1100-1250도, 자기는 1250도 이상이다. 이 구분에 따르면 삼국시대 백제토기는 800-900도였고 통일신라의 토기는 900-1000도, 조선 백자는 1250도 내외로 부합한다. 도자기는 유약을 쓰는데 그 역사는 철분의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분이 어느 정도 되느냐에 따라 색이 바뀌는데 흑색은 10%, 붉은 색은 5-10%다.  

 최초의 청자는 중국 한나라에서 1세기 쯤 탄생했다. 중국 항주 인근 절강성이 청자 집단 산지로 이후 1000년이 지나서야 고려에 들어왔다. 청자 생산의 핵심은 알맞은 태토를 찾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유약, 세 번째는 불을 때는 기술이다. 고려 청자의 가마기술은 아마 10세기 경 중국 월주요지역에서 장인을 통해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는 가마 밑바닥에 뒤집어 놓은 듯이 동그란 모양으로 깔려있는 감발이란 것을 쓰는데 이는 보조역할을 한다. 감발을 사용하면 자기에 열을 고르게 전달해 발색이 좋다. 하지만 소수만 소성할 수 있기에 비용이 많이 들고 고급청자에만 쓴다. 

 백자와 청자는 태토가 매우 다르다. 청자는 논밭 1미터 정도 아래의 흙이 적합하고 강진과 부안의 것이 좋으며 양도 풍부하다. 하지만 백자는 돌을 부순 흙이 적합해 산 꼭대기에 태토가 있다. 여러 지역의 태토를 배합하기에 흙의 확보가 매우 어렵다. 유약은 재를 쓰는 것과 납을 쓰는 것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재를 쓰는데 납유약은 인체에 해롭기에 써도 주로 자기의 외부에만 쓴다. 납유약은 중국의 당삼채에 적합하다. 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각종 색상이 자연스레 흘러내리는데 그래서 당삼채의 색이 총천연색을 띄게된다. 반면 재유약은 채색이 어렵다. 무슨 나무 재를 얼마나 섞느냐가 중요하다. 

 중국의 가마는 상당히 규모가 크다. 높고 길이도 긴데 반면 고려의 것은 높이도 낮고 길이도 짧다. 중국의 가마는 대량생산에 적합하고 고려의 것은 애초 소량생산 용이었던 것이다. 고려의 것은 대량생산은 어려운 반면 가마가 작기에 온도의 조절이 좋고 소성과 냉각이 쉽고 빠르다. 때문에 색이 좋고 고급청자가 잘 나온다. 청자의 색은 역시 철과 관련하는데 유약의 철이 환원하면 푸른색으로 변화한다. 가마 안의 장작이 타면 탄소가 발생하는데 탄소가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가 되어 날아간다. 이렇게 공기 중의 산소를 조절하여 산화환원을 조절해 색을 내는 것이다. 

 처음엔 아궁이에 소량의 장작을 넣고 문을 열어놓는다. 이러면 산소가 들어와 탄소와 결합하고 산소는 유약의 산화철과 결합하여 산화가 더욱 진행된다. 그러다 900도에 이르면 장작을 3-4배 넣고 문을 닫는다. 이러면 산소가 급격히 줄고 탄소가 늘어난다. 그리고 이 탄소가 유약의 산소를 빼앗아 유약을 환원시키는데 이려면서 푸른 색을 띄게 되는 것이다. 

 고려청자의 백미는 색과 더불어 상감이다. 하지만 상감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릇은 구우면 부피가 줄어드는데 청자는 15%, 백자는 20% 정도가 감소한다. 태토와 바른 유약의 열팽창계수가 같아야 같은 비중으로 줄어 균열이 없는데, 이를 맞추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대부분의 청자와 백자는 약간의 균열이 있다. 여기에 상감을 하면 태토와 유약, 그리고 백상감토, 흑상감토 4박자가 맞아야 한다. 고려청자는 중국 청자보다 색이 좋은데 이는 가마와 관련한다. 고려의 가마는 작아 빠른 냉각이 가능해 유약에 결정이 적다. 때문에 난반사가 적어 색이 잘 나는 것이다. 

 조선의 백자는 시기마다 사실 색이 조금 씩 다르다. 순백색으로 시작해 회백색, 백옥색, 청화백자로 이어지는데 가장 최고는 백옥색을 띤 18세기 백자다. 백자가 회백색을 띄는 시기는 나라 경제가 어려워 태토 확보가 어려웠던 시기다. 백자는 청자와 다르게 상감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데 이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초벌구이 한 백자는 표면이 입체이니 당연히 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우며 매우 건조하므로 수분을 빠르게 흡수한다. 때문에 한붓으로 빠르게 그리지 않으면 먹이나 물감을 모두 먹어버린다. 여기에 재벌하면 크기가 더 작아지기에 애초에 그림을 그릴때 축소 될 것도 감안해야 한다. 

 김정호는 평생 지도를 제작했다. 그는 30대였던 1834년 청구도를 제작했고 1859년 동여도를 완성하고 대동여지도를 완성한다. 대동여지도는 동여도를 초고로 삼아 판각한 것이다. 김정호는 지도제작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지리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를 편찬하여 지도와 지지를 항상 같이 제작하였다. 지도에는 정보를 담는데 큰 제약이 따르기에 그는 지지를 같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대동여지도의 지지편이 대동지지다.

 대동지지는 32권은로 1권이 서울, 2-24권은 8도의 각 군현, 25도는 산수고, 26도는 변방고, 27-28권은 정리고, 29-32권은 방여총지다. 정리고는 각종 도로망이고 방여총지는 단군에서 고려에 이르는 우리 나라의 영역을 담은 것이다. 

 김정호에 대한 오해는 세간에 널리 펴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도를 평생 전국을 돌며 실측해서 만들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한 옥사설이다. 이는 과거 교과서에 이렇다할 근거없이 짧게만 실렸던 것이 널리 퍼진 것으로 아마도 내용이 극단적이어서 였을 것이다. 책의 저자는 이것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실측이다. 아무리 공간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도라도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를 그냥 걸어서 지도로 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아파트단지는 단순하기로도 한데 경계가 복잡하고 산과 물이 접하고 고저가 있는 과거 조선의 군현은 어떨까. 물론 산 등 높은 곳으로 올라가 조망하는 방법도 있으나 전국을 이렇게 하기도 힘들고 막상 높은 곳은 시계가 나쁜 경우도 많다. 때문에 저자는 김정호가 실측이 아닌 방대한 자료를 얻어 이를 토대로 종합하여 지도를 편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기에 옥사설도 말이 안된다. 방대한 자료를 관으로부터 얻어 지도를 제작할 수 있던 자가 정부와 갈등관계이긴 어렵다. 저자는 사실상 김정호가 정부의 의뢰 혹은 관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어 정보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널리 보급할 목적으로 목판제작하였다. 목판은 약점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단색 표현으로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과 필사지도와는 다르게 많은 정보를 넣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제 동여도에는 지명이 1만 8천개인데 대동여지도에는 1만 2천개로 줄어든다. 김정호는 심사숙고하여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고 중요도를 기준으로 6천개를 떨군 것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에는 특이하게 산과 강등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도로망만은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대에도 직선도로가 매우 드문데 조선에 직선도로가 웬말일까. 여기엔 김정호의 의도가 담겨있다. 목판본은 언급한 것처럼 단색이기에 도로망마저 실제로 그리면 산맥 및 하천 등 다른 것과의 구분이 매우 어려워진다. 이에 김정호는 도로를 직선표기하고 거리를 알려주기 위해 눈금표기 하였다. 때문에 지도를 보는 사람은 군현간의 실제 거리를 매우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또한 김정호는 실제 도로가 연결되지 않은 군현 사이에도 도로를 그려넣었는데 이는 도로는 없더라도 각 군현간의 관계망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여러모로 머리를 많이 쓴 셈이다. 

 조선에서 소식을 전하는 방법은 편지와 봉수, 필마가 있었다. 이중 가장 빠른 것은 봉수인데 속도가 시속 100km였다. 하지만 봉수는 매우 단순한 의도만 전달 할 수 있었는데 봉화가 5개여서 개수에 따라 정보가 달랐다. 하나면 평시이고 두 개면 국경에 접이 출몰, 세 개면 적의 침범, 네 개면 척의 침공, 다섯 개면 전투였다. 하지만 정보전달이 매우 단순하고 실수가 잦았으며 봉수꾼이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필마에 더 의존했다.

 조선은 말을 통한 소식연결을 위해 전국에 역을 운영했다. 말은 시속이 60km로 빠르나 지구력이 약해 대충 30리 간격으로 역을 배치했다. 이로 인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15-20일이면 소식이 도달했고 실제 임진왜란때 선조는 3일 반만에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큰 규모의 역은 전국 41개 작은 역은 504개 였다. 찰방이라는 관리가 역의 총책임자였고 그 밑에 역리가 있었다. 큰 역에는 역리가 20-30명, 작은 역에는 2-3명 배치되었고 그 아래 역노비가 다수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암행어사가 동원하는 인원이 바로 이 역노비다. 1808년 전국 역에서 보유한 말의 수가 5380필에 달했다 .상당한 수인데 아마 전란이 일어나면 군마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역에서 말을 사용할 권리를 증빙하는게 마패다. 마패는 세 가지 역할을 했는데 역에서 말을 빌리고 ,신분을 증명하고 , 공문서에 도장으로 쓰인 것이다. 10마패는 왕, 7마패는 대군, 6마패는 정2품이상, 5마패는 종2품 관리이고 그 아래는 1-5마패를 썼다. 마패는 나무나 철로 초기 제작했는데 부식을 막기 위해서 나중에는 구리 마패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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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역사 기행 - 한반도에서 시베리아까지, 5천 년 초원 문명을 걷다
강인욱 지음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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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4대 문명을 지금 사회의 시원으로 보지만 이는 농경사회, 특히 서구적 시각에 가깝다. 채집 및 유목은 농경보다 오래되었고, 특히 반건조지역인 초원은 화약의 발명으로 무력화되기 전까지 적은 인구수에도 인류문명에 상당한 족적을 남겼다. 많은 문화 및 기술의 전달 통로 역할을 하였고 단절된 농경지역을 교역로로 연결했으며 때론 막강한 군사력으로 농경제국을 허물고 세계제국을 세우기도 했다. 때문에 저자는 초원은 적어도 5대 문명쯤 취급받아야 한다고 본다. 현재 초원 문명중 농경사회에 삼켜지지 않고 이렇다할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다보니 초원의 역사 역시 제대로 발굴되지 않는 측면이 상당하다. 

 농경문명을 계승한 지금의 국가들은 초원에 대해 두 가지 정도의 관점을 갖는다. 우선 대국들은 과거 초원에 당한 것을 생각하며 야만이나 이질적이고 공포의 대상으로 취급하면서도 그들이 이룬 대제국을 이중적으로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려 한다. 그리고 주변부의 국가들은 초원을 웬지 자신들의 기원으로 삼고 싶어한다. 동아시아로 치자면 전자는 중국, 후자는 한국과 일본의 태도다. 하지만 둘다 옳지 못한 태도이며 기본적으로 초원이 농경국가와 꾸준히 교류하고 기술문화적으로 상호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는게 저자의 주장이다. 

 우린 초원을 다소 낭만적으로 생각하지만 인구가 적은 만큼 그 지역은 인구부양력을 갖지 못한 매우 혹독한 지역이다. 여름이 매우 짧고 겨울은 혹독하고 길다. 초원은 이 짧은 여름에 자라난 풀에 의존한다. 식량이 없기에 유목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효과적 가축 통제와 목초지로의 빠른 이동을 위해 식량수단이던 말을 이동수단으로 길들였다. 장성한 아들이 먼저 분가하여 새로운 목초지로 떠나기에 초원에선 마지막까지 남은 막내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한다.

 말을 길들이는데는 3가지 중요한 마구가 필요했다. 우선 재갈이다. 재갈은 말의 이빨을 뽑아서 끼우거나 어금니를 갈아낸 후 끼우는 것으로 약간의 힘으로도 고삐를 당겨 말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다. 때문에 재갈이 개발되고 나서야 말에 탄 인간이 안정적으로 말의 방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안장이다. 말의 등뼈는 울퉁불퉁하여 등에 타면 탄 사람에게 상당한 부상과 불편한 감각을 준다. 때문에 안장을 개발해 등뼈를 덮고나서야 사람은 안정적으로 승마를 할 수 있게 디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기병이 등장한다. 마지막은 금속제 등자다. 등자는 이전에 개발되었지만 금속제 등자는 3-4세기 고구려고 처음 개발했다. 금속제 등자로 중무장 기병이 등장한다. 말위에서 무거운 무기를 휘두르거나 말 자체를 무겁게 무장시키면 승마자가 안정적일 수 없었는데 금속제 등자의 등장으로 큰 훈련없이도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바로 이 금속제 등자의 발명으로 탄생한 것이다. 

 말을 어느정도 다룰 수 있게 되자 전차가 등장했다. 전차는 무기이면서 신과 인간을 잇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전차는 매우 비싼 무기였는데 바퀴살이 개발되고나서 더욱 활성하한다. 유명한 카데시전투에서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맞붙었는데 히타이트는 바퀴살을 개발해 전차를 경량화한 덕에 3명이 전차에 승선했다. 한명의 방어, 한명의 공격, 한명의 운전이다. 반면 이집트는 기존처럼 한명 공격방어, 한명 운전으로 크게 불리했다. 전차는 기원전 11세기가 되어서야 중국 상나라에 전파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에선 별로 쓰이지 않았다. 이는 당시 한반도와 만주에 큰 전쟁이 없던 중교중심의 제정일치 사회라는 것과 산악지형이 많아 전차가 별로 쓸모가 없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초원 민족은 승마를 하기에 생식력이 낮았다. 승마는 위험한 것으로 격렬하게 오래 말을 타면 자연거세 확률이 높았다. 유목사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여 보상하였고 생식과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 전투에 집중해 무서운 전투력을 가진 전사로 거듭났다. 유목사회는 인구유지를 위해 생식력을 보존한 다른 사람들이 많은 아이를 낳아 그 아이를 입양시키는 방법과 전쟁포로를 집단에 유입시키는 방안을 썼다. 

 사슴은 초원에서 생활에 필수적인 고기와 가죽을 제공하기에 매우 중요한 문화적 모티프가 된다. 사슴을 숭앙하는 풍습이 초원이 널리 분포하는데 이는 동아시아에도 이어진다. 기원전 9-5세기 초원에는 사슴돌이 만들어진다. 이는 2미터 정도 크기로 자바이칼, 알타이, 몽골 등지에 분포한다. 전면을 사슴문양으로 채운 이 돌은 전체가 초원전사를 의미한다. 귀부분엔 그래서 귀걸이가 허리부분엔 허리띠와 칼 문양이 등장한다. 스키타이 전사들은 역동적인 형태의 사슴을 새긴 청동이나 목제 장식품을 애용했다. 그들이 그린 사슴은 종류만 10종 이상에 자세도 매우 자세하여 사슴에 대한 상당한 관찰과 관심을 보여준다. 한편 사슴문화는 한반도에도 펴졌는데 그래서 기원전 3-1세기 사슴문양 청동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한반도는 사슴문화가 크기 않은 지역이다. 

 중국에선 초원 세력을 야만시하고 적대하지만 그들의 역사에 초원은 역시 깊이 자리한다. 중국은 초원세력인 원과 청, 요와 금을 겪었고, 몇몇 한족(?)왕조는 사실상 초원과의 연합세력이다. 우선 주나라를 들 수 있다. 주는 중원에서 서북방면으로 건너간 일파가 현지에서 주변 세력과 연합하여 힘을 키운 후 다시 중원으로 진출해 상을 멸하고 세운 나라다. 전국시대 조나라도 있다. 조나라의 무령왕은 인근 약소국인 중산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다. 중산국은 유목문화를 받아들여 강한 기병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당하지 못한 것이다. 무령왕은 당시 중원인이 남여 모두 치마를 입던 것을 호복인 바지를 스스로 입고 명령하며 기병을 키웠다. 결국 이들은 중산국을 멸하고 중원의 패자가 된다. 다음은 진이다. 진은 위치 자체가 중국 서북방면으로 애초에 중원과 거리가 멀다. 진은 오래된 국가인데 기원전 7세기에 묵공이 서융을 제압하고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비로소 세력을 떨치게 된다.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특이한 양식으로 4세기 갑자그 등장해 200년간 유지된다. 알타이 지역의 파지릭 고분이 매우 유사하다. 파지릭 고분은 무덤 주변에 둘레돌을 두르고 무덤 위로 돌을 쌓고 안에는나무 무덤방을 놓는다. 둘 다 유라시아에서 매우 드문 방식이다. 신라와 가야에는 후발주자이고 고구려 백제와 달리 북방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짐에도 북방 문화가 많이 나타난다. 신라의 천마도와 황금보검 가야에서 출토되는 철제무기나 마구등이 그러하다. 학계에서는 한때 이들 지역이 북방기마민족의 후예가 내려와 강하게 영향을 미쳐서 그렇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저자는 그런 인구이동의 흔적은 별로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소국인 이들에게 이런 문화가 나타나는 것은 강한 힘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스스로가 북방과 대결하며 교류하고 문화를 창조하는 고구려와 강한 문화적 정체성과 폐쇄적 농경문화의 백제에 비해 바다를 접해 개방적이고 오히려 교류가 원거리로 가능했던 이들 지역이 영향을 받기 쉬웠기 때문이 아닐까로 추정한다.

 한국의 대표적 먹거리 문화인 불고기는 사실 농경과 유목문화의 결합품이다. 초원에선 샤슬릭이란 꼬치구이가 오래전 부터 유행인데 그들은 양고기를 꼬치에 끼워넣고 다니며 불에 쉽게 구워먹곤 했다. 이를 발전시킨게 고구려의 맥적이다. 맥적은 반농반목 국가인 고구려에서 콩류의 양념을 고기에 재워 꼬치 형태로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양고기와 양념이 없는 고기는 아무래도 비린내가 나기 마련인데 맥적은 양념을 하여 이것을 잠재운 것이다. 맥적은 중국과 초원에서 인기가 매우 좋았고, 조선의 설하벽으로 이어지고 지금의 산적과 너비아니로 이어졌다. 지금의 불고기는 콩과 고추장류 양념에 채소를 곁들이는 것으로 완벽한 초원과 농경의 융합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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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7-05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 ‘기병이 등장하자 전차도 등장했다’는 의미는 전차가 기병 이후에 나왔다는 의미인지요?
그렇다면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전 전차가 먼저 나오고 한참 후 기병이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닷슈 2022-07-05 22:01   좋아요 1 | URL
아니요, 북다님 말씀이 맞습니다. 전차 이후 기병입니다. 어느 정도 말을 쓸 수 있게 된다음 전차가 등장했다라는 표현을 하려던 것이었는데 좀 문제가 있네요. 고쳐야겠습니다.
 
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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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의 책을 처음 본 것은 대학 초년 시절 본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이었다. 지금 보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당시만 해도 간신히 읽고 잘 이해도 안갔었다. 전공이 경제학이었음에도 말이다. 책에서 유시민은 경쟁과 그를 위한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경제의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소위 자유주의 계열의 부자의 경제학과 평등과 복지, 이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빈민의 경제학'을 나눠 제시하였다. 

 이번 '역사의 역사'도 그렇게 나눴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오직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입장과 주관적인 서술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물론 당연히 저자는 이 정도 생각은 해보았을 것이고 그게 좋지 않다는 생각에 서술을 했을 것이다. 

 책 '역사의 역사'에서는 고대 역사의 시작으로 알려진 시점부터 최근의 역사서술을 망라한다. 물론 중요한 역사서와 사람만이다. 처음으로 다룬 것은 당연히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와 투기디데서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만큼 역사를 저술했고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했다. 두 사람 모두 문자시대 초기의 사람으로 당시 대부분의 정보는 구술로 전해졌고 문자로 접한 것도 구술을 문자화한 것이었다. 많은 정보가 전달과정에서 즉시 사라졌고 살아남아도 전승되는 과정에서 마구잡이로 왜곡, 각색, 변형되었다. 이들은 이런 시대를 살았기에 상당히 지금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많은 역사서를 쓸수 밖에 없었지만 매우 의미있는 작업을 해내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당대의 문명이었던 그리스 세계와 ,페르시아, 이집트 등의 문명에 대한 지리, 인정, 도시 ,민족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내었다. 그리스 인임에도 이들 문명에 대해 불편부당하지 않았고 적절한 분량을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그래도 그의 성향은 딱딱한 사실 중심보다는 군데군데의 빈 이야기를 주관적으로 채워나가는 서사꾼이나 이야기꾼에 가까웠다. 반면 투키디데스는 정보의 진위와 가치를 비교적 꼼꼼하게 점검하였고 사실을 시간순으로 배치하며 신화와 전설을 최대한 배제하였다. 그래서 그의 역사서는 현대의 역사서와 비슷한 형식과 내용을 갖췄다. 여기에 주요사건들이 서로 몇년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서술하여 현대의 역사가들이 해당 사건의 연도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아시아의 역사가로는 역시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크고 작은 전쟁, 국가의 흥망, 다야한 사회 제도의 특성과 변화, 개인의 생애, 전설과 신화에서 한 왕조에 이르는 수천년 중국 사회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서술하였다. 중국은 기록을 중시한 나라로 종이가 없었음에도 많은 기록이 남아있었다. 사실을 중시한 사마천은 사기를 쓰며 무려 103종의 책을 참고 했다. 역시 죽간이 없었기에 최초의 사기는 죽간에 남았다. 본기 12권, 표10권, 서8권, 세가30권, 열전70권 총 130권이다. 본기는 황제나 그에 준하는 권력자의 행적과 업적을, 표는 중요한 역사적 서술을 연대순으로 배열했다. 서는 도덕, 음악, 군사, 천문, 치수 등 고대 중국 문화나 제도의 특징과 변화를, 세가는 춘추전국시대 왕과 제후를 비롯하여 황제까진 아니지만 세상에 영향을 미친 권세가에 대해, 열전은 지식인, 정치인, 강도, 자객, 광대까지 독특한 개인의 생애를 다뤘다. 

 사마천의 이런 역사서술체계는 기전체라 불리며 19세기 후반까지 중국 문명권의 역사서술을 지배한다. 하지만 사실에 입각한 사마천의 사기도 약점은 많다. 우선 주변민족이나 국가에 대해서는 자신이 비판한 공자의 춘추필법을 따라 부정확하고 단편적이며 편향적으로 서술한다. 여기에 기록된 사실이 빈약한 열전에서는 문학적 상상력도 많이 발휘한다. 물론 이 부분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슬람 세계엔 그 유명한 이븐 할둔이 있다. 그는 역사 서설을 썼는데 그의 특이한 점은 문명을 환경의 산물로 간주하고 세계를 7개의 기후대로 나누어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살피면서 인류사를 서술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역사서설은 과학과 역사의 첫 만남이라 할 수 있으며 그래서인지 책 뒷부분에 언급하는 총균쇠 및 사피엔스와 닮았다. 이븐할둔은 뜬금없게도 역사서설 중반중반에 과도할 정도로 신에 대한 찬양을 하는데 유시민은 당시 종교적 압박이 강했던 이슬람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으로 이것을 파악한다. 

 유럽으로 돌아가 랑케가 등장한다. 그의 시대는 산업과 과학의 시대로 랑케는 많은 학문들이 전문화하고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태어나 자신의 전문분야에 전문역사학자로 일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보수적 성향으로 군주제를 옹호했기에 유럽의 여러 각종 문서와 왕실 도서관에 접근할 수 있었다. 랑케는 과학기술문명은 진보하나 인간의 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역사철학을 보였는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니 신학과 군주정이 옹호되었다. 랑케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이런 그의 생각은 역사에 대한 하나의 큰 사고를 불러왔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었지만 역사가 객관적 학문이라는 생각을 불러와 많은 역사가들을 정치적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는 장점도 있었다. 

 유시민은 맑스도 역사가로 본다. 그의 공산당 선언이 역사의 주체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역사가들의 관심 밖에 놓였있었던 노예, 농노, 노동자, 농민 등의 피지배계급을 사회를 변혁하고 역사를 만드는 주역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유물사관도 매우 이례적이다. 당시만 해도 물질적인 것 보다는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질서나 이성, 법칙에 대한 관심이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맑스는 물질이 먼저이고 인간의 정신과 의식은 나중이라는 유물론을 주장했다. 

 조선의 역사가도 언급된다. 우리의 역사가로 유시민은 박은식과 신채로 백낙준을 거론한다. 박은식은 조선망국과정을 정리한 한국통사와 이순신전, 안중근전을 남겼다. 박은식은 다소 옛 인물로 개명유학자이기에 한문이 가장 편해서인지 순한문체로 저술했다. 때문에 초기엔 보수적인 시각도 남아있었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훗날 쓰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민족주의자로 변모한다. 신채호는 고대사 검증에 주력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남겼는데 사실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다루고 싶었으나 무장투쟁운동에 주력하고 체포되고 옥사하게 되면서 단군부터 백제의 패망까지만을 다루게 되었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주터전이 한반도로 국한된것이 아니라 만주나 요동까지였음을 밝혀냈다. 

 에드워드 카는 랑케와는 다르게 정확성은 역사가의 미덕이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사실은 이야기로 남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다. 역사가가 그 사실을 남기고 다루어야만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랑케는 객관적 역사 서술을 위해 문헌을 무척 중시했지만 사실 이 문헌조차 어떤 역사가가 과거의 특정 사실만을 주목해 기록으로 남긴 것에 불과하다. 크로체는 그래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로고 선언했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의 임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평가하는 것이 된다. 역사가와 사실은 평등한 주고 받는 관계다. 역사가는 끊임없이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고, 반대로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기도 한다. 즉, 역사란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19세기까지 역사가들은 민족이나 가문, 왕조, 사회, 지역, 국가를 단위로 역사를 서술했다. 하지만 토인비가 등장하면서 역사는 문명단위로 승격된다. 토인비는 유럽은 역사가 모두 연결되어 대영제국을 제외한다면 개체로 연구할만한 국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슈팽글러의 영향을 받았는데 슈팽글러는 서구의 몰락이라는 저서에서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한물간 천동설과 동격취급한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역사도 중시하는 자신의 역사관을 지동설로 취급하고 스스로를 역사학의 코페르니쿠스로 칭하기도 했다. 토인비는 그의 관점을 받아들여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역사를 서술했다. 토인비는 20개가 넘는 당대 문명에 관한 정보를 수집 분석하였고 문명의 흥망성쇠를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찾았다. 그는 인종과 환경설을 모두 배척하였고 문명은 외부환경의 도전에 대한 성공적 응정과 실패로 흥망성쇠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토인비가 말하는 도전은 다섯 가지로 척박한 땅이 주는 도전, 새로운 땅이 주는 도전, 갑작스러운 외부의 충격(침공), 외부의 계속적인 압력,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제재(압제)다. 사회의 진보는 이런 도전에 대해 소수의 창조적 천재에 의해 이뤄진다. 이들이 이런 도전을 창조적이고 성공적으로 다루면 비창조적 다수가 결국 이를 따르게 되고 사회는 성공한다. 이를 미메시스라고 한다. 하지만 창조적 소수자는 언젠간 그 창조력을 잃는다. 그러면 비창조적 다수는 기존의 미메시스를 철회하는데 이것이 네메시스다. 

 창조적 소수자는 기존의 성공방식을 고수하다 망하는데 일시적인 자아의 우상화, 일시적인 제도의 우상화, 일시적 기술의 우상화가 그것이다. 용어는 다르지만 기존의 성공방식을 고수하다 새로운 도전에 적응못해 나타나는 문제다. 토인비의 패러다임에서는 세 집단이 있는데 창조적 소수자와 내적 프롤레타리아트,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다. 내적인 집단 내부의 노예, 농노, 천민, 노동자등 피지배 계급이며 외적은 문명 외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집단으로 야만인이다. 이 세 집단의 상호관계가 문명의 향배를 좌우한다. 

 최근엔 역사서술의 하나로 인류사가 등장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첫 등장에서 가장 최근을 다루는 인류사가 역사서술의 단위로 대두한 것이다. 인류사는 실제 과학과 역사를 전면 통합한다. 그래서 총균쇠나 하라리의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및 그외 여러 학자가 다루는 최근의 인류사 책을 보면 이것이 과학서적인지 인류학 서적인지 헷갈리는 이유다. 총균쇠를 쓴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토인비와는 다르게 환경을 인류사에 주 원인으로 다뤘다. 인간의 차이 및 사회 문화와는 크게 무관하게 인류사는 환경이 좌우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륙마다 가축, 작물의 분포가 큰 차이를 보이고 확산과 이동의 속도가 대륙마다 지형, 기후에 의해 크게 다르며, 대륙마다 고립도가 다르고, 대륙마다 인구과 민족 분포가 다름을 제시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4가지는 객관적 증명이 가능한 것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더 나아가 인류사는 사실 역사적 사건이 아닌 생물학적 사건이라 말한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혁명인 인지혁명과 농업혁명, 과학혁명이 일어났는데 다른 모든 혁명을 사실상 촉발한 첫번째 혁명인 인지혁명이 인간 뇌의 생물학적 변화로 가능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과학혁명이 인류사의 마지막 혁명이 될 것으로 파악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호모사피엔스에서 벗어나 호모 데우스의 길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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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6-28 16: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방대한 내용을 기준점을 잡아 정리하는 능력 참 부럽습니다.

닷슈 2022-06-29 16: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꾸 정리만 하고 제 생각이 잘 안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꼬마요정 2022-06-29 18:38   좋아요 1 | URL
네엣? 닷슈님 생각이 안 들어가다니요ㅠㅠ 너무 잘 쓰시는데 이렇게 겸손하기까지 하시다니... 또 부러워하면서 배워갑니다^^
 
폭격기의 달이 뜨면 - 1940 런던 공습, 전격하는 히틀러와 처칠의 도전
에릭 라슨 지음, 이경남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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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관총의 발명으로 지루한 참호전이었던 1차대전에 비해 2차대전은 신무기의 향연이었다. 전차가 등장하여 참호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해상에서는 잠수함과 구축함, 그리고 항공모함이, 공중에서는 전투기와 폭격기가 등장했다. 

 이중 폭격기는 적의 요격 범위와 관찰 범위를 벗어난 먼 상공에서 그리고 전선에서 멀리 벗어나 기존엔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적의 최후방을 타격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리고 폭격이 정확할 수 없었음과 더불어 다분히 큰 의도성을 갖고 후방의 민간인을 타격하였다. 그래서 2차대전 당시 사람들은 이 신무기에 전율했고, 공군력이 강했고 멀리 바다로 인해 떨어져 있어 적의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없었던 영국, 독일 양국은 서로를 폭격했다.

 책 '폭격기의 달이 뜨면'은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미국의 참전을 기다리며 독일의 항공 공격을 버텨냈던 영국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주인공은 영국의 총리 처칠일가와 그 가족 및 조력자들이며 1940년에서 1941년까지 서로를 폭격한 역사를 다룬다. 책은 기본적으로 다큐이면서도 소설 같기도하며 역사적 사실도 충실이 다루고 있어 무거운 두께를 가졌음에도 술술 넘어간다.  

 1940년 4월 막강하다 여겼던 프랑스의 마지노선이 독일의 전격전에 쉽게 무너졌다. 영국은 이 사실을 초기에 믿지 못하였는데 자신들이 관측한 바 프랑스의 마지노선은 매우 막강했고 그들의 육군 역시 독일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저지대 국가들이 이렇다할 저항없이 항복해버렸다. 파견한 30만에 가까운 영국지원병력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다. 곧 독일이 영국을 직접 타격할것이 분명해보였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시 영국의 총리는 체임벌린으로 그는 독일에 대해 유화책을 썼지만 결국 실패였다. 책임을 물어 사임하게 되었다. 영국 국왕 조지는 핼리팩스를 후임 총리로 염두에 두었지만 체임벌린과 정가의 성택은 처칠이었다. 처칠은 해군장관 출신으로 과거 전쟁실패로 사임했지만 전장에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으며 무엇보다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대영제국이 독일을 맞아 버텨낼순 있어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미국의 참전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열쇠였지만 당시 미국대중은 오래된 고립주의로 인해 이 지경에도 유럽에 일말의 관심이 없었다. 

 히틀러는 1940년 5월 24일 역사책에도 남아있는 결정적 패착 두 가지를 범한다. 하나는 30만에 달하는 영국 원정국의 뒤를 쫓던 기갑사단에 전격 중지 명령을 내린 것이다. 손실과 정비를 취하자는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 병력이 귀환하게 되어 영국의 숨통을 틔워주게 된다. 다른 하나는 그래도 영국 원정국 궤멸의 기회가 있었는데 괴링의 꾀임에 넘어가 이 임무를 항공부대인 루프트바페에 넘긴 것이다. 그래서 영화 덩케르크에는 독일 육군보다는 항공 부대에 의한 공격이 주로 자행된다. 

 1940년 5월 26일 처칠은 프랑스 해안에서 영국군을 철수시키는 다이나모 작전을 개시한다. 히틀러의 패착과 날씨의 도움으로 프랑스군 12만 5천 포함 총 33만의 대병력이 탈출에 성공한다. 물론 무기를 챙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작전의 성공으로 영국은 불안감을 갖게 된다. 이런 대규모 상륙귀환이 쉽게 가능하다면 독일 역시 같은 방식으로 프랑스에서 지근 거리인 영국 해안에 상륙작전을 감행할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히틀러는 바다사자 작전으로 영국에 대규모 상륙을 계획하기도 한다. 

 전쟁 전 영국은 다행히 레이더의 개발로 독일 공군의 접근을 사전에 알 수 있었다. 다만 기능이 미흡하여 적들의 고도와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었다. 영국 RAF 조종사들은 레이더 덕에 적을 쉽게 발견하고 격퇴하는게 가능했지만 레이더는 대강의 위치만 알려줄 뿐 결국엔 적을 육안으로 찾아야 했기에 야간에 이뤄지는 공격엔 방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적도 야간 공격이 불가능할터이니 이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영국은 생각했다.

 1940년 6월 22일 프랑스가 결국 히틀러와 휴전협상한다. 처칠은 육군을 그렇다쳐도 프랑스가 보유한 막강한 함대가 걱정되었다. 이들이 히틀러의 손에 들어갈 경우 지중해는 물론이고 대서양 및 북해가 독일에 넘어갈 판국이었다. 이에 처칠은 접근 가능한 모든 프랑스 함대를 무력으로 접수하는 캐터펠트 작전을 개시한다. 영국의 소머빌 제독을 프랑스 제독에 영국과 함께 싸우던가 아니면 영국 항구로 이동하던가, 그것도 아니면 서인도 제도의 프랑스 항구로 가서 무장해제 한 후 미국으로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날린다. 격분한 프랑스 제독은 이에 반발하고 교전이 벌어진다. 메르셀케비르 사태다. 프랑스 전함 브레타뉴가 침몰하고 프랑스군 1297명이 사망한다. 이 사건은 아군끼리 교전하는 비극이었지만 향후 프랑스 함대가 영국으로 이양되고 무엇보다 독일과 다른 세계에 영국의 교전의지를 내비친 주요 사건이 된다.

 히틀러가 영국지상군을 놓친 이유는 사실 그 자신이 영국에 큰 관심이 없어서였다. 히틀러의 주 목적은 영국이 아닌 소련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초기 위용을 보이면 영국이 지레 겁을 먹고 강화 및 평화협상에 들어갈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서부전선을 안정화 시킨 후 동부에 전력을 집중해 소련을 정복하는 것이 애초 그의 계획이었다. 

 영국이 항복할 의사가 없음이 분명해지면서 독일의 폭격기들이 영국 영토를 깊숙히 침범하여 폭격하는 일이 잦아졌다. 목격자도 많아지면서 전쟁은 피부에 와닿게 되었고 영국 RAF 조종사들도 빠르게 영웅이 되어갔다. 7월 14일 급기야 영국 BBC라디오는 이동취재팀을 이용하여 도버절벽에 기지국을 설치하고 공중전 상황을 중계하기 까지 하였다. 청취자는 열광했고 많은 지식인들은 이런 행태를 비판하였다. 

 영국 RAF는 당시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기가 주력이었다. 이들은 중무장에 기동성이 우수했다. 독일의 메셔슈미트 ME109는 높은 고도에서 뛰어난 성능을 보였고 방어가 강한 중장갑을 구축했다. 스핏파이어는 8정의 기관총을 ME109는 2정의 기관총에 2문의 기관포를 보유하여 화력이 비슷했다. 두 기종 모두 90분정도 비행의 연료탱크를 보유하여 작전에 지장이 많았고 독일의 경우 런던을 공격하고 간신이 돌아올 정도였다. 독일의 조종사들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여 전투경험이 많고 평균 26세였던 반면 영국은 전투경험이 적고 20세의 나이였다. 

 당시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있었다. 영국 입장에선 그나마 참전 가능성이 있는 루스벨트의 재선을 바라는 입장이었다. 한편 루스벨트는 고립주의 여론이 만만치 않은 자국에서 쉽사리 선거를 앞두고 영국을 도울 수 없었다. 거기에 미국은 1차대전 이후 사실상 비무장 상태였다. 병력도 고작 육군 17만 4천에 불과했고 개인화기도 1차대전에나 쓰던 스프링필드였다. 처칠은 해군력 강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 미국에 낡은 구축함 50대를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응하기 쉽지 않았는데 미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영국의 대서양 기지를 미국이 장기 임대하는 조건으로 구축함을 거래형태로 넘기는 것을 제안한다. 

 한편 1940년 8월 13일 괴링을 폭격기 949기 , 급강하 폭격기 336기, 전투기 1002기등 총 2300기로 공격을 감행한다. 독일은 이때 비밀항법 빔을 개발한 상태였다. 이 빔으로 비행기를 유도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적진으로 항공기를 운행할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 RAF 는 이를 사전에 파악하여 교란빔을 개발해 놓은 상태였다. 이런 대규모 공격은 처음이기에 독일은 폭격기와 이를 엄호하는 전투기가 편대를 맞추는데만해도 30분을 소요했다. 전투기가 90분 운용만 가능하다는걸 생각하면 고작 작전시간이 60분 남은 셈이었다. 전투결과는 독일에 실망스러웠다. RAF 는 13기를 잃은데 반해 독일은 48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영국 RAF 의 강한 저항으로 공중전과 폭격에서 생각보다 재미를 보지 못한다. 하지만 영국을 충분히 압박하고 있었는데 바다에서 U보트의 활약덕분이었다. 이들은 중요한 부품과 도구를 실은 배를 꾸준히 격침시켜 영국에 물자와 생산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폭격 역시 효과를 발휘했는데 겁에 질린 노동자들이 사직하거나 일을 거부하기도 했고 잘못된 경보로 인해 공장이 수시간 마비되는 일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폭격 이후 매우 힘들어졌는데 그런 이들에 희망을 준 것이 차였다. 이는 전쟁의 트라우를 진정시켰고 실제 공습 중 대피소나 공장, 군부대, 가정에서 차는 꾸준히 존재하며 사람들을 도왔다. 처칠이 끝까지 차배급에 손을 떼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영국은 처칠이 전쟁 초기 공군력을 강화하기 위해 선임한 항공생산부 장관 비버브룩의 놀라운 활약으로 8월 무려 476기의 전투기를 생산해낸다. 이는 자신들의 예상부도 200기를 상회하는 업적이었고 독일은 상상치 못한 수치였다. 

 독일은 영국 런던을 꾸준히 공습하였는데 그 결과 지붕에 뚫히고 유리창이 파괴된 집들이 많아졌다. 유리가 부족하여 판자나 천으로 메꾸는 일이 많아 비가 스며들었고, 전기와 가스는 잦은 공습으로 수시로 끊어졌다. 사람들은 잠을 이루기 어려워졌는데 언제 사이렌이 울릴지 모르고 거주공간도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난민의 수도 크게 늘어나 정부는 임시막사를 늘리고 특별 비상법으로 개인의 집을 징발하여 난민을 같이 살게 하였다. 사람들은 잦은 사이렌으로 위장장애에 시달리기 시작했으며 배급제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자 스스로 농축산물을 키워 자력구제하는 시민들이 늘어났다. 공습은 재밌게도 사람들의 성적 문란도 부추겼다. 젊은이들은 돈이나 결혼 때문이 아닌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쉽게 섹스했다. 유부남과 유부녀의 혼외정사도 흔한일이 되었고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죽음 앞에서 자손 번식을 위한 성욕이 높아진 셈이다.

 지치긴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은 야간 폭격으로 스트레스가 높아졌다. 그들은 출격하는 항공기와 귀환하는 항공기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한 일정과 신중하게 짠 경로를 따라 비행해야했다. 

 영국 폭격이 여의치 않자 히틀러는 전략을 대폭 수정한다. 히틀러가 보기에 영국은 끝까지 버티고 있었고 이로 인한 미국의 전쟁 참여는 시간문제가 되어버렸다. 히틀러는 스탈린을 믿지 않았는데 히틀러는 그가 팽창야욕으로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히틀러는 스탈린의 소련이 더 강해지기 전에 소련을 제거해야한다는 판단에 이른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 영국은 물론이고 소련과도 동맹을 맺어 독일을 포위할텐데 그 전에 소련을 먼저 제거해야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오랜 숙원인 아리아인을 위한 레벤스라움을 확보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처칠에게는 다행스럽게도 1940년 11월 5일 루스벨트가 10%이내로 대선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이 때 독일은 영국의 유서 깊은 도시 코번트리를 공습한다. 독일은 무려 11시간이 넘게 도시를 폭격하였는데 민간인 568명이 사망하고 856명이 중상을 당한다. 루프트바페는 고폭탄 500톤 소이탄 2만 9천발을 사용하여 건물 2294채를 파괴하고 4만 8940채를 파손시킨다. 이는 거의 도시 하나를 지워버리는 수준의 손실을 가져와 향후 영국은 공습에 의한 피해 정도를 1코벤트리 2코벤트리 하는 식으로 기준으로 삼게되기 까지 한다. 

 겨울이 다가오자 파손된 집은 추위를 막지 못한다. 깨지고 부서진 지붕과 창문으로 눈, 비, 바람이 들이닥쳤고 전기, 연료가 자주 끊겨 난방도 여의치가 않았다. 등화관제로 난방을 하는 것은 더욱힘들었다. 사람들은 공습경보가 울리면 공공 대피소르 피난했는데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런던의 공공대피소는 더럽고, 악취에 , 습하여 대중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3층 침대마저 사용했는데 층간 높이가 너무 낮아 옆으로 눕는게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대피소내 임시변소도 매우 비위생적이었고 심지어 침대 근처이 있기까지 했다. 

 히틀러는 결국 1940년 12월 1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이 시점에 전쟁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크리스마스는 중요했다. 영국 처칠은 독일의 공격이 없는 한 이 시기 공격을 감행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다행히 독일도 이에 응해 양국의 사람들은 모처럼 비공식 휴전 기간을 갖게 되었다. 다만 공습오인 우려로 교회에서 종소리만은 금지되었다. 

 1940년 한 해동안의 독일의 런던 공습으로 영국은 시민 1만 3596명이 사망하였고, 1만 8387명이 중상을 입는 피해를 입었다. 공습은 물자도 파괴하였는데 1941년 1월 12일 폭격은 설탕 2만 5천 톤과 치즈 730톤, 차 530톤, 베이컨과 햄 288톤, 잼과 마멀레이드 970톤을 재로 만들어버렸다. 배급제에 시달리던 영국민들에겐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1941년 2월 8일 미국 하원에서 무기 대여법이 통과된다. 그 낡은 구축함 50대의 인도가 가능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히틀러는 1941년 3월 8일 작전지시 24호를 발령한다. 이는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극동의 일본이 군사행동을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강력한 영국군의 발을 극동에 묶고 미국 역시 유럽보다는 태평양으로 향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1941년 4월 12일 독일은 영국 브리스틀을 공습한다. 6시간 동안 200톤의 고폭탄, 3만 7천개의 소이탄을 투하해 180명이 죽고 382명이 부상당한다. 독일은 시간지연 폭탄과 소음을 내는 폭탄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심과 트라우마를 안겼고, 시간 지연 폭탄으로 인해 피해지역에 쉽사리 접근하지 못해 구조를 늦어지게 만드는 효과를 냈다. 처칠은 이 와중에도 폭격 바로 다음날 브리스틀을 방문하여 대학학위수여식에 참석해 대중을 감동시킨다.

 4월 17일 런던 공습으로 사망자 1180명의 사상 최악 피해가 난다. 피카달리, 첼시, 풀몰, 옥스퍼드 스트리트, 화이트홀등이 피해를 입었고 크리스트 경매소도 파괴된다. 상징적인 해군 건물도 큰 균열이 갈 정도였다. 4월 24-25일 영국군 1만 7천이 그리스에서 패주한다. 다음 날 1만 9천 병력이 철수하는데 처칠이 총리가 된 후 노르웨이, 덩케르크에 이은 3번째 대규모 패주였다. 

 영국 RAF는 독일 항법 빔을 능숙능란하게 교란하고 교란유도 지점에 유인용 화재를 일으켜 독일 폭격기를 상당히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처칠은 비버브룩을 통해 항공전 방어를 위해 국력을 항공기 생산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이는 전차의 부족을 야기하여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그 대가를 치루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히틀러가 바다사자작전이라도 감행하는 날엔 본토를 방어할 기갑사단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었다. 

 1941년 5월 10일 저녁 11시 독일이 6시간 동안 최대 공습을 감행한다. 6시간 동안 소이탄 7천개 고폭탄 718톤, 폭격기 505기가 동원되었다. 화이트 홀과 웨스트 민스터 사원이 큰 피해를 입었다. 블룸스베리에서 불길이 일어 대영박물관의 책 25만권이 소실된다. 이 공습으로 사망자는 1436명 이재민이 1만 2천명, 중상자가 1792명 발생한다. 하원 본회의장 마저 파괴될 지경이었다. 

 한편 독일의 전력이 소련과의 전쟁으로 동부로 집중됨에 따라 5월 폭격 사망자는 5612명이던 것이 6월엔 410명, 월엔 162명, 12월엔 37명으로 크게 감소한다. 여기엔 공대공 레이더의 개발과 빔교교란의 효과 대공포의 정확도 상승으로 격추율이 상승한 것도 기여했다. 1940년에서 1941년의 폭격기간동안 영국 전역에서의 사망자는 민간인 4만 4562명, 부상 5만 2370명이었다. 이중 어린이 사망자는 5626명에 달했고 런던에서만 2만 9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1941년 6월 독일은 마침내 소련을 침공했고, 12월엔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다. 처칠은 기다렸다는 듯 루스벨트와 함께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요구에 응해준 일본에 보답하기 위해 히틀러는 12월 11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오래 버틴 끝에 처칠이 원하던 미국의 참전이라는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잠자던 사자는 히틀러의 예상과는 다르게 유럽과 태평양 양쪽을 감당할 위력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잠자고 있었기에 초기의 전황은연합국에 좋지 못했다. 영국은 극동의 보루인 싱가폴을 일본에 빼앗기고, 독일은 크레타에서 영국을 몰아내고 루브룩을 점령한다. 전세가 뒤집히기 시작한 것은 1942년 말부터로 영국은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눈엣가시 같던 롬멜을 격파한다. 그리고 미국은 미드웨이에서 일본을 격파한다. 

 처칠의 오랜 버티기가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2차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요인은 크게 세 가지 정도라 생각한다. 우선 소련이 상당한 피해를 보며 독일의 기갑사단과 육군을 결국 막아낸 것, 그리고 미국이 참전한 것, 영국이 그 소련과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기 전까지 프랑스의 궤멸에도 불구하고 홀로 버텨낸 것이다. 책은 세 번째를 다루는 것이다. 당시 영국의 처절함과 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폭격의 무서움과 사람들의 공포와 생활을 잘 다루었다. 사람들은 폭격이 막 시작되고 나서야 그것의 시작을 알 수 있었고, 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소리나는 폭탄은 폭탄이 어디로 떨어지는지 대강 알려주었지만 그렇다고 피할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 지연 폭탄(불발인지 시간지연인지 알수 없었다)은 언제터질지 몰라 막 죽어가는 사람을 구조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적은 일부로 전기 수도시설을 파괴하여 화재진압을 어렵게 만들었다. 폭격의 타겟은 전쟁 초기 군부대 및 생산시설이었지만 전쟁이 지속되며 자연스레 민간인으로 바뀌었다. 모든 건물이 목표가 될 수 있었으며 그것을 사전에 알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살아낸 것이 대단하다. 이 책은 그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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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5-07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닷슈 2022-05-07 21:24   좋아요 1 | URL
늘 감사합니다. 좋은 연휴 보내세요.

강나루 2022-05-08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닷슈 2022-05-10 22:1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나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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