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의 갈림길, 나가사키 지성인들의 도시 아카이브 2
서현섭 지음 / 보고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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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카시 하면 짬뽕과 원폭이 떠오른다. 상당히 상반된 이미지인데 실제 나가사키 역사도 그렇다. 나가사키는 일본 큐슈의 서남쪽에 있는 도시로 지리적으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류쿠, 동남아시아 쪽을 향하고 있다. 자연히 일본 교역과 무역의 중심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지역이다. 상하이까지는 850km 부산까지는 49.5km 거리다. 인구는 140만정도인데 면적이나 인구 모두 일본 전체의 1%정도에 해당한다. 다만 평지가 적고 해안선은 무척 길다. 


1. 나카사키의 교역 

나가사키를 처음 찾은 서양인들은 대항해시대를 가장 먼저 연 포르투갈인이다. 나가사키 북서쪽에는 히라도라는 섬이 있는데 14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본거지였다. 그러던 것을 15세기 포르투갈이 먼저 들어와 1561년 히라도에 상관을 개설한다. 포르투갈은 1543년 조총을 전수하고 상관을 설치하여 히라도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활발히 교역한다. 하지만 막부는 카톨릭 포교 행위를 침략 전단계 행위로 인지하고 금교정책을 강화한다. 이에 따라 1624년 스페인선의 내항이 금지되고 상관도 폐쇄된다. 포르투갈 역시 기항지가 나가사키로 병합되고 더 좁혀져 1634년 신축한 인공섬 데지마로 축소된다. 1639년엔 포르투갈의 내항도 금지되는데 그들의 뒤를 이은게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 스페인과 경쟁하며 막부측에 카톨릭의 포교와 침략을 이야기하였고 이것이 먹힌 셈이다. 

 1609년 막부는 동인도회사에 네덜란드 배는 일본의 어느 항구에도 입항해도 좋다는 허가장을 발부한다. 히라도 상관이 개설되고 네덜란드는 여기서 식량을 얻고 일본 용병을 동남아로 송출하기 까지 한다. 막부는 나가사키유력 상인 25명에게 공사비를 각출하여 부채꼴 모양의 데지마를 조성하였는데 네덜란드 만큼은 종파적으로 무해하고(신교이다) 통상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 특혜 대우하였다. 데지마의 연간임대료는 포르투갈은 은80관에 달했는데 네덜란드는 55관으로 매우 저렴했다. 막부는 데지마 상관에 가족단위의 이주를 불허하여 상관장인 카피탄을 비롯해 회계, 상주원, 창고관리원등이 모두 남자였다. 데지마 상관의 책임자인 카피탄은 에도산푸라 하여 에도를 방문해 쇼군을 알현하는 특혜가 있었다. 그들은 무역허가의 대가로 예물을 헌상했는데 의외로 안경이 매우 인기였다고 한다. 

 1642년 나가사키 일대에 흩어진 유곽을 정리하여 현재의 마루야마로 이전한다. 에도 막부시대에는 에도의 요사와라, 교토의 시마바라, 나가사키의 마루야마가 일본의 3대 유곽이었다. 나가사키 마루야마의 명성은 전국적이었는데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유일한 유곽인데다가 쇼군의 직할령인 나가사키출신만 그 적을 올릴수 있어서 였다. 1690년 마루야마의 황금기에는 유녀수가 무려 1443명이었고 네덜란드인을 상대로는 그 가격을 일본인, 중국인보다 3배를 더 받았다. 유녀들은 데지마로 출장 및 체류가 가능했으며 임신하게 되면 사내아이는 중절하게 여자아이인 경우는 출산했다. 다만 막부의 쇄국령이 본격화한 1636년에는 혼혈아와 서양인 첩 유녀들이 모두 마카오와 자카르타로 추방된다.

 나가사키는 서양인들의 무대였던 것 같지만 사실 17세기만 해도 중국인이 주인공이였다. 당대 최구의 경제대국과의 교역이고 지리적으로 인접하다보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1562년 중국상선이 나가사키에 최초 내항하는데 임진년 이후 갈등으로 10년간 교역이 중단된다. 1610년 중국인 선주 주성여가 막부로붜 거래허가서인 슈인장을 받아 일본각지에서 무역을 하고 1639년 포르투갈의 내항이 금지된 후에는 중국상선이 사실상 나가사키 경제를 좌우하게 된다. 1688년이면 나가사키 입항 중국배는 무려 200척에 달했고 인구 5-6만 나가사키인중 1만 가량이 활보하는 중국인이었다. 중국인이 크게 늘어나며 자연 문제도 생겨나 이들을 수용할 도진야시키가 생겨난다. 1689년 건설했으며 수가 많은 만큼 9400평으로 데지마의 두배크기였다. 1732년이면 도진야시키 방문 유녀가 2만 4644명에 달한다. 중국에 대한 교역은 일본 당국이 향후 의도적으로 줄이는데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생사를 주로 수입하고 금과 은을 수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16세기 초반 조선으로부터 회련법을 배워 순도 높은 은을 전세계로 많이 수출했지만 이즈음이면 크게 고갈되어 국내 통화로 사용할 양의 확보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2. 나가사키에 퍼진 난학과 문화

1774년 타헤르 아나토미아라는 네덜란드 해부학서가 해체신서라는 이름으로 번역된다. 일본최초의 서양의학서인데 이 때 한의학에는 없는 신경, 연골, 동맥, 처녀막등의 단어가 생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 난학이 퍼지니 당연히 외국어에 대한 학습 필요성이 생겨났는ㄴ데 그래서 사전이 편찬된다. 포르투갈어 사전은 직즉 있었지만 네덜란드어 사전은 네덜란드가 일본에 미친 영향에 비해 매우 늦게 편찬되었는데 1854년에 이르러서야 사전 루프 하루마가 출현한다. 1808년 페이튼 호 사건으로 일본은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영어공부에도 매진하게 된다.

 스페인 포르투갈 선교사는 16세기말 나가사키에 남만과자 카스텔라를 전파한다. 설탕, 밀가루, 계란을 혼합한 카스텔라는 처음엔 쇼군이나 상위층만 즐기는 귀중품이었지만 에도시대 중엽엔 서민들도 즐길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정작 포르투갈엔 카스텔라라는 빵이 없는데 포르투갈인들이 스페인 카스텔라 지역의 빵이라는 표현을 일본인들이 카스텔라로 오해해 명명된듯 하다. 1624년 개업한 후쿠사야가 나가사티 카스텔라의 원조 가게다.

 덴푸라도 카톨릭신자들에게서 전파되었다. 카톨릭 신자들은 사순절에 부활절을 앞두고 단식, 절식, 육식을 금하는데 생선 프라이는 가능했다. 이 생선 튀김이 콰르투 템포라스이고 이것이 덴푸라로 변형된다. 이전에 일본엔 튀김요리가 없었지만 아무 생선이나 저렴하고 가볍에 튀겨 즐길수 있어 인기가 상당해졌다. 

 네덜란드 의사 지볼트는 일본 의학의 선구자다. 그는 군의관 자격으로 나가사키에 도착해 데지마 상관에서 매주 3회 서양의학, 과학을 배우고자 하는 통역들과 의사들을 가르쳤다. 강의와 실습을 병행하고 천연두 백신 접종, 백내장수술등을 시연했다. 지볼트는 훌륭한 식물표본, 논문 작성자에게 전문서나 현미경을 선물했고, 과정을 마친 학생에겐 네덜란드어로 작성한 서양의학 수료증을 수여했다. 당대엔 최고 권위의 의사면허인 셈이었다. 지볼트는 일본 최초의 의료사숙 나루타키주쿠를 개설하고 주1회 강의와 시술을 하여 천하의 영재가 몰려들었다. 놀랍게도 수강료와 진료비가 없었으며 가난한 자에겐 식사까지 무료제공하였다. 안과, 산부인과, 의과등 여러분야의 의사, 천문학자 150명이 배출되어 일본 전역에 선진 의료기술과 과학지식이 전파되었다. 지볼트는 일본에 있으면서 입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 일본식물지, 일본동물지를 출간하여 유럽에서 일본 권위자로 명성을 얻기도 한다. 


3.기리시탄

 일본 카톨릭과 그 신자를 일본에선 기리시탄이라 한다. 1549년 동방의 사도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상륙한 것이 카톨릭의 첫 일본 전래이다. 일본에 온 선교사들은 곧 일본인이 영주에 절대 충성함을 알게되고 타겟을 영주로 바꾸게 된다. 이에 1563년 나가사키와 시가의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가 개종하게 되고 지역을 예수회에 기진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다른 영주의 침략을 방어하고 무역 관세 수입을 얻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실제 일본의 다른 영주들은 외세와의 교역에만 관심이 있었지 기리시탄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다노부나가는 경쟁세력인 불교세력을 탄압하고자 기리시탄을 공인하였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히데요시는 처음엔 기리시탄에 관용적이었지만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다. 하지만 그때만해도 남만 무역은 장려되었고, 포교도 어느 정도 묵인하에 이루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열자 1605년 20만, 1615년 50만의 기리시탄 신자가 생겨난다. 기리시탄의 교리는 주종관계와 상하질서를 거부하고 할복과 일부다처제를 부인해 일본 지배층의 질서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막부는 평등사상으로 인한 민중봉기 및 일부 경제적 이득을 노린 영주와 기리시틴 세력과의 결탁 가능성으로 인해 1614년에 금교령을 내리고 1635년까지 30만이 순교한다. 기리시탄의 시련은 1893년 금교령이 해제되고서야 풀린다. 

 1637년 나가사키 인근 시마바라에서 난이 일어난다. 시마바라와 아사쿠사에서 영주의 학정과 카톨릭 신교에 대한 박해에 항거한 반란으로 농민과 카톨릭 주축이었다. 사마바라, 아사쿠사는 기리시탄 다이묘인 아리마씨와 고니시씨의 영지로 주민 대다수가 카톨릭이었다. 하지만 기리시탄 임산부 고문치사 사건과 건축세, 선반세, 창문세, 출산세등 영주의 학정으로 백성들이 무장봉기한다. 막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규슈전 지역의 번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네덜란드 히라도 상관까지 지원을 요청해 그들에게 반란군을 향해 포격하게 한다. 막부는 10만 병력으로 하라성을 점령해 3만 반군을 모두 학살한다. 이후 막부는 네덜란드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게되고 반란을 야기한 시마바라 영주와 아사쿠사 영주를 처벌한다. 시마바라 영주 가쓰이에는 막부역사상 유일하게 할복자살이 아닌 참수를 당한다.  

 2010년 나가사키 나카마치 성당에서 이문희 대주교와 나가사키 대교구장 다카미 미쓰아키 대주교가 성로렌조 성당 설립 4백주년 공동 미사를 집전했다. 성로렌조 성당은 임진왜란때 큐수로 끌려온 조선인이 1610년 세운 성당이다. 당시 조선인 무려 1300이 세례를 받고 나가사키에 스페인 순교자 로렌조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하는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1614년 막부의 포교금지령으로 성당이 4년만에 파괴되고 만다.


4. 개항

 도쿠가와 막부는 개국 이후 해상 방어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2척의 군함을 발주한다. 1855년 이 군함을 운용할 해군 양성을 위해 나가사키 해군전습소가 개설된다. 네덜란드의 빌렘3세는 증기선 솜빙호를 쇼군에 증정하고 일본은 이를 관광호로 개명하요 해군전용전습소로 사용한다. 1857년에도에 쓰키지군함조련소가 신설되며 해군전습소는 사라진다.

 일본의 에노모토는 일본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데 그는 유학하여 피셸링 교수에게 해상국제법을 익히고 이를 일일히 번역하여 만국해율전서라는 제목으로 제본한다. 그는 프랑스, 영국을 방문하여 제철소, 병기공장을 시찰하고 1864년 발발한 덴마크, 프로에센, 오스트리아 전쟁도 참관한다. 귀국후 막부의 해군 부총재가 되지만 막부와 유신정부간의 보신전쟁에서 패해 8대의 함대로 탈출하여 홋카이도의 하코다테를 점령하여 3천병사와 항전한다. 전세가 기울자 에노모토는 적장 구로다에 만군해율전서를 맡기고 이를 본 구로다는 에노모트의 깊은 식견과 해상법에 대한 전문성에 감탄한다. 결국 에노모토는 3년간 복역 후 특사로 풀려나 1874년 주 러시아 공사가 된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을 하고 조선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권력 정치의 감각을 익힌 하나부사 요시모토를 조선으로 전출할 것을 건의한다. 

 글로버는 영국인으로 일본에 글로버 상회를 설립한다. 일본에 차수출을 하는 한 편, 사쓰마번, 조슈번의 요청으로 화약, 총기류, 함선류등을 상하이에서 수입을 주선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죽음의 상인이란 별칭도 얻는다. 글로버는 1865년 나가사키 오구라 해안에 일본최초의 철도를 부설하고 상하이에서 수입한 증기기관차1대를 주행하여 주목을 받는다. 글로버의 개항기 역할을 독보적이어서 일본 최초의 선박수리소, 다카시마 탄광 개설 자원, 일본 최초의 등대건설, 일본 최초의 조폐기 수입을 그가 수행한다. 글로버는 일본 개화기 중요인사들의 해외 유학을 도왔으며 막부의 붕괴를 예감하고 반군쪽을 지원한다. 다만 1868년 도마 후시미 전투에서 글로버는 반군에 최신 철포와 화기를 팔았는데 내전의 후유증으로 메이지정부로부터 1년간 대금을 받지 못해 상회가 파산하고 만다. 글로버는 파산후에 미쓰비시의 지원으로 부사장 역할을 하였고 1885년 일본 맥주제조회사를 설립하는데 이게 지금의 기린 맥주다. 글로버는 1908년 메이지 유신에 대한 기여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급 훈장을 수여하게 된다. 

 한편 이시기 나가사키에는 중국 푸저우 출신의 가난한 유학생이 다수였다. 중국인 크리스천 천핑순이 값이 싸면서도 푸짐한 영양만점의 중국식 우동을 개발하였고 이것이 짬뽕의 시작이 되었다. 짬뽕은 모든 것을 섞었다는 뜻과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샤뽕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짬뽕 면은 밀면에 탄산나트륨이 주성분인 도아쿠를 섞어 먼들며 이로 인해 밀면이 잘 변질되지 않고 짬뽕면 특유의 맛을 내게 된다. 


5.원폭과 평화

 원래 2차대전 중 제2원폭 목표지는 후쿠오카현의 고쿠라였다. 하지만 구름과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로 방향을 선회해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하한다. 24만 시민 중 7만 4천이 죽고, 7만 5천이 부상당했으며 2만 7천 조선인중 1만이 사망한다. 나가사키에는 조선소에서 전함과 어뢰를 제작하였는데 이 때문에 폭격의 타겟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88년 나가사키 시의회에서 공산당 시마타 보쿠의원과 모로시마 히로시 시장의 질의 응답중 시장이 천황이 전쟁중지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오키나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참극이 있었다고 발언하였다. 지방의 일이었지만 이것이 석간신문과 TV 뉴스에 방영되어 항의가 빗발한다. 하지만 건강한 시민사회세력도 있어 시장은 지지서명도 일일 1만 4천을 얻고 최종적으로는 38만명의 지지서명을 받기도 한다. 한편 우익단체는 시장을 위협하였는데 1990년 다지리 가즈미가 시장에게 총격을 가한다. 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모토시마 시장은 살아남는다.

 그는 사회적 약자인 재일 조선인, 중국인에 큰 관심을 가졌고, 조선인 원폭 위령비도 평화 공원 밖에 있던 것을 1979년 공원안으로 이전한다. 

 오카마사하루는 목사이자 나가사키 의원이고 나가사키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운영했다. 그는 일본 정부의 가해자 배상책임 문제를 거론하고 조선인 원폭 피해실태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원폭과 조선인 전 6집을 간행한다. 1979년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건립하였고 하시마에서 1925년에서 1945년 사이 사망한 조선인 1222명에 대한 사망진단서를 찾아내 이들 대부분이 위험한 작업장에 배치되어 압사, 질식사, 폭사했음을 밝혀 이를 원폭과 조선인 4집에 기록했다. 마사하루 목사는 말년에 일본 가해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재일 한국인 차별 철폐, 정부 보상 실현을 위한 자료관 설립에 심혈을 기울이다 사망한다. 

 군함도에서는 조선인이 1939년부터 집단 연행되었는데 조선인은 지하 1천미터 이상 온도 40도 이상의 환경에서 근무하였다. 군함도에서는 1925년에서 1945년까지 1295명이 사망하였는데 일본인은 겨우 58명 조선인 1222명 중국인 포로 15명이었다. 

 전후 조선인 징용공 200명은 귀향선을 타고 조선으로 향했는데 태풍으로 배가 긴급회항하다 나가사키 해안의 계보단이 이를 막아 난파되어 무려 160명이 수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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