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예술, 가짜 예술 - 우리를 조종하는 것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
장 프랑수아 마르텔 지음, 김기상 옮김 / 서스테인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술은 무엇일까? 그리고 인간의 산물인 이것은 왜 생겨났을까?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어떤 학문도 이것에 대한 마땅한 답을 내놓진 못한다. 인간 정신 진화를 잘 설명하는 진화심리학도 예술에 대한 설명은 부진하다. '성'과 관련된 가설 정도가 다다. 예술은 일부가 성과 관련이 있긴 하지만 그것의 주제와 소재는 성을 한창 넘어선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많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모든 문화권에서 꾸준히 예술을 생산하며 그것을 즐긴다. 

 

1. 진짜 예술, 가짜 예술

 책은 진짜 예술과 가짜 예술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예술과 정치, 사회와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예술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현대 사회의 병폐를 고칠 수 있는 예술의 잠재력에 주목한다.

 학자들은 예술이 오랜 시간 서서히 진화한 것이 아니라 갑작스레 나타난 것으로 본다. 4만년 전 예술이 불쑥 등장한 것으로 보는데 이것을 인간 정신이 도약한 하나의 사건으로 파악한다. 이는 이미지를 통해서 사고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러내는 상상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최초의 인간이 예술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술이 인간을 비로소 완성했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오직 예술만이 상상을 통해서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향유하며 인간은 생물학적 본능과 기계적인 인과율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을 보는 통찰력을 갖게 된다. 

 인간은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상상력의 힘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로 되어가는 존재다. 인간은 예술을 보면서 놀라움을 겪게 되는데 이는 작품의 실존적 가치를 판가름하는 척도다. 예술은 꿈의 세계가 지루한 일상에서 현실에 구현된 것으로 인간을 놀라게 하며 거기서 생명력을 얻는다. 물론 놀라움이 예술의 주요 임무는 아니다. 예술의 주요임무는 일상에서 현실의 숨겨진 실재를 포착해 날 것 그대로 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표현의 극단에 있는 사실주의와 추상주의는 모두 표현방법은 다르지만 작가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같다. 작품의 가치는 화풍이나 기법이 아니라 작가가 세상의 근원적인 신비를 얼마나 예민하게 느꼈는지 ,그리고 느낀 바를 얼마나 작품 속에 솜씨 있게 담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처럼 예술은 작가가 세상의 근원적 신비를 느껴야 하기에 존재에 대한 경외심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외심은 일상에 가려진 실체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낼 때 느끼는 감정이다. 

 문화상대주의는 현대 예술계가 미적 판단의 보편 원리라 받아들이는 생각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로 인해 오늘날 예술 그 자체가 위기에 빠졌다고 본다. 상대주의는 무엇도 예술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어떤 것도 예술이 될 수 없게 만든다. 저자는 예술은 직관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과학과 매우 유사하지만 다만 결이 다르다고 본다. 그리고 예술은 문화의 산물이 아니라고 본다. 문화라는 형식을 빌려 나타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 가깝다고 본다. 

 그래서 예술은 보편적이지만 수용자의 미적 감수성이 각자 다르니 작품마다 사람은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단지 그런 부분을 상대주의로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마말이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예술이 시대나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전 세계에 공통적인 울림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술의 본성이 절대적이라는 증거다. 즉, 예술마다 달리 느껴지는 감동의 다양한 변주는 작품 자체에 깃든 절대적 본성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일 뿐, 절대 그 본질을 벗어나진 않는다는 것이다. 미적감수성은 작품의 재미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핵심은 작품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다. 

 조이스는 진짜예술과 가짜예술을 구분한다. 그는 진짜 예술은 정적이지만 인공물인 가짜 예술은 동적이라고 주장한다. 정적, 동적 특성은 작품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작품이 감상자에 미치는 효과다. 진짜 예술이 정적인 이유는 그것이 존재의 신비를 드러내어 감상자가 그것 앞에서 정지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반면 가짜 예술, 즉 인공물은 감상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특정 감정이나 생각, 행동을 하게 만든다. 누군가 설계한 판단, 메시지를 머릿속에 주입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선, 악, 진실,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목적은 감상자로 하여금 제작자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공물은 예술과 무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예술의 탈을 쓰며, 그 과정에서 본연의 가치를 잃고 도구로 전락한다.

 인공물은 하나의 답변만을 강조하기에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통념을 낳는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과 직접 부딪혀 얻은 생각이 아니고 타인이 만든 낡은 찌꺼기와 의견이다. 지식, 습관, 이데올로기 등으로 일종의 선입견을 형성하게 된다. 인공물은 세상을 멋대로 포장해 그것이 원래 이런 것이라며 우리가 스스로 질문하지 않게 한다. 그 결과 통념이 더욱 강해지고 새로운 생각이 들어설 틈이 사라지는 것이다. 

 반면 진짜 예술은 매우 모호하다. 그리고 이런 모호함으로 인해서 다양한 해석을 수반한다. 단순한 예로 모나리자만 봐도 그거 웃는지, 무표정인지, 화가 났는지, 심지어 슬픈지 그 표정의 모호함으로 인해 상당히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그리고 실제 삶이 그러하다. 삶은 누구에게나 확실하지 않고 모호하며 불확실하다. 그리고 이것이 예술의 재료가 된다.  

 조이스는 이런 인공물도 두 가지로 구분했다. 말초적 인공물과 교훈적 인공물이다. 전자는 인간 내면의 강렬한 욕구를 자극하는 것으로 대상을 소유하고 욕망하게 만든다. 광고, 선전, CM송 등이 그렇다. 후자는 인간 내면에 혐오감을 주어 특정 대상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욕망과 혐오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생겨난 기본적 감정이다. 하지만 그것이 심해지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켜 폭동, 마녀사냥, 파시즘 등의 광기로 치닫는다. 이 때 인간은 개별적으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자극, 충동에만 반응하는 거대한 군중이 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 경우 인간은 극도로 잔인해진다. 

 그리고 인공물은 인간을 대상화한다.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는 감상자 역시 사물로 전락한다. 우리가 포르노를 소비하면 거기 나오는 여배우는 그저 성욕의 대상화가 된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했는지는 모두 탈색되어 버린다. 그리고 감상자인 나 역시 그저 성욕에 빠진 도구만이 되어 버린다. 이처럼 동적 힘이 우리의 인격을 지우고, 그 자리를 추상적 욕망으로 채운다. 마케팅의 핵심은 이성을 우회하여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생존과 본능에만 반응하는 파충류 뇌를 직접 공략하는 것이다. 

 교훈적 인공물의 대표는 이념대립 선전영화다. 특정 국가, 민족을 적대적으로 묘사하여 공포와 증오를 부추겨 대중을 하나의 정서적 공동체로 묶는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산물이었으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민주사회의 이익집단도 대중을 길들이기 위해 이를 적극 활용한다. 그들의 목표는 이 미적수단을 빌려 자기만의 도덕규범을 사람들의 내면에 강제 이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은 늘 질서유지라는 명목으로 언제나 인공물을 동원한다. 

 

2. 미란 무엇인가

 전통 미학은 미에 여러 가지 기준을 부여하여 오랜 세월 예술가를 그것에 갇히게 억압했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은 상당기간 체제의 안정과 권력을 보위하는 인공물을 생산했다. 이런 억압에 맞선게 현대 모더니즘이다. 미를 거부하고 인간의 삶, 그 자체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또 다른 형태의 미를 발견한다. 기존의 미를 파괴하여 더 파괴적인 아름다움을 잉태한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기존의 미와 구별되는 강렬하고 파괴적인 아름다움의 존재를 숭고라 칭했다. 기존의 미가 내가 규정하는 세상가 딱 맞아 떨어지는 편안한 만족감이라면 숭고는 현실이 내 예상과 전혀 다르게 나타날 대의 파괴적 아름다움이다. 

 현대 모더니즘이 잉태한게 바로 이 숭고다. 양차대전, 홀로코스트, 냉전의 광기는 이성을 무너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미의 추구는 자기기만이었다. 그래서 조화와 대칭이 아닌 숭고에서 미적가치를 찾았다. 샤를 보들레르는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기괴하다고 했다. 진정한 미는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찢어 발기는 기괴함이다. 대중이 인공물에게 미적 갈등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인공물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공물은 언제나 기존 상식과 고정관념에 기반하고 그것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진짜 예술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고 상식을 초월한다. 

 그래서 예술은 철저히 개별적이 된다. 이 개별성은 기존 진서를 뒤흔들고 해체하는 파괴적인 힘이다. 진정한 예술은 결코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는다. 예술의 본질이 언제나 새로운 것의 추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예술만이 도발적이고 숭고함을 갖진 않는다. 진정한 예술을 사실 시대를 막론하고 파격적이었다. 


3. 예술의 3요소

 조이스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예술 작품으로 구현되려면 총체성, 조화, 광채라는 3가지 단계를 거쳐야한다고 보았다. 

 총체성은 우주라는 무한한 배경에서 특정 요소를 분리하여 하나의 자율적 완결성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이 거대한 시공간에서 분리되어 나와 스스로를 경계짓고 하나의 특정한 세상을 구축하는 찬란한 이미지다. 

 조화는 작품 속 여러 요소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상을 맺는 과정이다. 작품 구성요소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조화는 반드시 기하학적 대칭이나 아름다운 균형은 아니다. 오히려 거칠고 사나운 불협화음이 더 큰 조화를 줄 때가 있다. 

 광채는 작품을 하나의 완결된 전체로 인식할 때 터져 나오는 경이로운 섬광이다. 사물의 본질이 터져나오는 순간이다. 이 광채는 반드시 관찰자가 필요하다. 예술은 관찰자를 배제하면 그것을 목격할 의식이 없어지고, 그 무엇도 세상에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식물도감은 해바라기의 표준을 보여주기 위해 현실에 존재하는 해바라기의 개별적 특성과 변칙을 지운다. 하지만 고흐의 해바라기는 그것이 공유하는 보편적 속성을 오히려 도려내고 그것만의 개성과 변칙에 집중한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의 이데아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고 내 눈앞에 들이닥친 현실의 한 조각을 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예술과 실재

 칸트는 모든 아름다움 속에는 우주의 숨겨진 질서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앙리 베르그송은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예술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베일에 쌓여있다. 인간은 선입과, 습관, 생존 본능으로 인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쓰는 언어조차 거대한 장막의 일부다. 언어는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의 개성을 지우고 일반화한다.

 하지만 갑작스런 아름다움이 닥치면 우리를 지배하던 이 관성이 일시정지한다.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의 굴레에서 벗어나 생존과 번식이라는 자기 보존의 알고리즘을 잊는다. 효율과 쓸모에서 벗어나 세속적 사고방식이 멈춘자리에 더 깊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세상과 마주한다. 

 인공물이 우리를 끌고, 미는 힘이라면 진짜 예술은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인, 원인과 결과 같은 모든 이분법적 사고를 무너뜨린다. 들뢰지는 이처럼 인간의 편견, 고정관념이 사라질 때 드러나는 세상의 실재를 인간 이전의 풍경이라 불렀다. 

 존재의 흐름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순간 세상을 쓸모로만 파악했던 도구적 관점이 사라진다. 예술에서 인간은 미적 세계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잔상이며, 그 세계에서 목소리를 부여하는 미적 장치다. 인간이 쌓아올린 문화라는 껍데기를 내려놓고 다시 자연이 일부가 되어 원초적인 흐름으로 돌아갈 때 예술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폭발한다. 


4. 예술과 상징

 예술은 기호를 상징으로 바꾼다. 기호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기호는 그 대상과 내재적 연결이 되지 않는다. 상징은 그 의미가 바뀌면 존재 자체가 무너진다. 상징을 가리키는 대상 그 자체와 내적으로 길게 연결하기 때문이다. 상징의 진가는 무한한 확장성이다. 상징은 시공간, 인과율에서 자유롭고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다층적이다. 그래서 상징은 인간 삼의 근본 토대다. 

 나에게 벌어진 일의 물리적 원인만 묻지 않고 그 일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는다면 상징의 시작이다. 기호는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기계적 인과율에서 벗어나면 상징이 된다. 기호가 상징이 된다는 것은 모든 세상을 비추는 렌즈가 된 것이다. 학교에서는 상징을 공식처럼 가르친다. 비둘기는 평화, 해골은 죽음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상징은 단 하나만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예술의 임무는 찰나의 상징을 포착해 공유 가능한 형태로 보존하는 것이다. 상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순간 그것을 광채를 잃고 단순 기호로 전락한다. 예술은 그래서 대상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은 소통이 아니라 표현이다. 

 예술이 평범한 기호를 상징으로 번성하는 비결은 바로 프레이밍이다. 프레임은 작품과 세상을 구분하는 경계다. 예술의 3가지 단계중 첫 단계인 총체성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예술가는 세상의 무수한 파편 중 특정 요소를 골라 프레임에 가둔다. 평범한 사과도 세잔에게는 우주의 질서를 품은 강렬한 상징이다. 

 프레이밍은 현실의 모든 사물을 하나의 평면 위에 납작하게 압축한다. 대상이 프레임으로 들어오면 현실의 위계질서는 효력이 없다. 프레이밍은 선택과 구성으로 완성된다. 선택은 프레임에 넣은 것과 안 넣은 것을 구분한다. 구성은 담은 것을 적재적소 배치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의 기호만을 따라가며 전체적인 줄거리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상징을 탐닉하며 깊은 실재를 맛볼 수 있다. 두 가지 다하는게 좋다. 


5. 예술과 균열

 걸작은 구조가 완벽하고 기술적으로 우수하다. 하지만 고전철머 세계관을 깨뜨리고 깊은 혼돈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없다. 그래서 고전은 형식과 기술적인 완성도에 관심이 없다. 예술은 표면과 상징으로 구성된다. 상징이 예술가가 표착한 사건이라면 표면은 사건을 드러내는 창이다. 작가들은 그래서 표면을 깨부서려 한다. 

 모든 고전은 그래서 균열이 있다. 균열은 상식을 부수고 작품을 실재와 카오스모스의 세계로 인도한다. 상징이 드러나려면 예술이 피룡하고 고전이 되려면 균열이 필요하다. 균열은 서투름이다. 기술적 결함이나 앞뒤가 안맞는 전개, 어색한 표현이다. 그런데 이게 실재와 비슷하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연한 사고야말로 세계를 구성하는 진짜 본질에 가깝다. 

 동시성은 세상이 의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인간의 의식이 우주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믿는 태도다. 예술에서 의미는 인간의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다. 창작 과정에서 작가 개인의 신념은 중요치 않다. 그래서 균열은 작가의 의도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도 모르게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예술은 인간의 피조물이 아니고 작가의 의지와 별개로 스스로 완성되는 독립적 생명체다. 즉, 작가는 예술이 발현되는 일종의 통로다.

 예술의 신비를 균열을 통해 완성된다. 균열을 작품의 여백을 만들고 우리의 참여를 허용한다. 인간의 이성요소는 여백을 메우지 못하고 상상력과 내면의 감각만이 그것을 채울 수 있다. 인간은 저마다 다르고 그래서 이 여백을 채우는 게 모두 다르다. 그래서 고전은 저마다에게 다르게 완성된다. 


6. 예술과 정치

 예술과 정치는 근본적으로 대척점에 있다. 예술은 기호를 상징으로 변환하나, 정치는 정확히 반대로 한다. 예술이 내는 균열은 정치 권력이 세운 사회에 균열을 낸다. 하지만 항상 상극은 아니다. 예술도 결국 문화라는 토대가 필요하다. 정치가 구축한 기초가 있어야 문화가 꽃 피고 그래야 예술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관점에서 예술은 권력자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도구로 기능할 때 의미가 있다. 이데올로기에 강하게 지배잗는 사회일수록 원형이 되는 신화를 경계한다. 전체주의 사회는 국가가 정해진 단 하나의 해석만을 허용하는데 신화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회는 사람들이 신화를 자유롭게 해석하게 둔다. 하지만 건강한 사회도 때로는 질서 유지를 위해 국가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할 때가 있다. 다만 목적을 달성하면 다시 해체해 신화의 바다로 돌려보낸다. 결국 이상적 사회란 질서와 혼돈, 기호와 상징이 끊임없이 순환한다. 

 이데올로기화한 정치는 가장 먼저 예술을 탄압한다. 예술이 균열로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술은 본질적으로 비정치적이고 현실에 구현된 순간 혁명적 힘이 된다. 단단하다고 믿는 것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세상의 껍데기를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7. 현대사회와 예술

현대사회는 가짜 이미지와 번쩍이는 조명, 조작된 기억과 인위적인 꿈이 넘쳐나는 미적 과잉시대다. 인공물이 생성한 안개는 우리의 삶을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인공물을 우리의 감정과 욕망을 오로지 정치선동과 시장의 마케팅에만 반응하게 한다. 그래서 마음에는 소중한 상징대신 시장이 자리한다. 

 어쩌면 인공물은 전기의 발명으로 본격화한 것일 수 있다. 인공물의 지배가 정점에 달한 것은 할리우드, 전체주의, 원자폭탄이라는 거대한 사건 때문이다. 원자폭탄은 모두가 죽는다는 상호확증파괴라는 공포를 퍼뜨려 사람을 길들이는 인공물이다. 원폭 이전 인간의 삶은 고정 상수였다. 하지만 원폭이후 사람들이 이 공통 기반이 언제든 사라질 수 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원폭의 불안을 빌미로 정치권력은 사회 곳곳에 미적 장치를 놓는다. 화려한 볼거리라는 도피처를 제공해 굳이 폭력 없이도 대중의 무의식에 자연의 이데올로기를 깊숙히 박는다. 미적 장치의 대표사례가 TV다. 그것은 대화와 밤을 앗아갔다. 

 프랑스 사상가 기드브로는 가짜 이미지만 소비하고 스스로를 소비시키는 사회를 스펙터클 사회라고 칭했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사라지고 인간은 하나의 이미지로 가공, 피상 경험된다. 인간은 직접 경험대신 영화, TV, 가상현실로 간접체험에 만족한다. 그래도 스마트폰 이전에는 티비를 끄고 한적한 교외로 나가면 인공물에게 쉽게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스마트폰이 손에 있어 이젠 한치의 틈도 없다. 우리는 SNS 의 환상에 자신을 끼워 맞춰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바꾸는 일을 일종의 자아실현이라 착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스펙터클 사회를 넘어선 유령사회가 된다. 스펙트럴 사회인데 이는 화려한 스펙트럼과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유령마냥 떠도는 스펙터를 의미한다. 인간은 주체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알고리즘과 마케팅의 유령이 되어 생각과 결정을 맡긴다.  

 이런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수단이 예술이 될 수 있다. 예술은 과학이 그러하듯 세상의 진실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겸재 정선 - 진경산수를 개척한 우리나라 화성 새로 쓰는 화인열전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 후기는 회화가 진경 산수화로 변하고, 그림의 대상과 주제가 성리학적 관념을 넘어서 일상생활, 일반 백성으로 이동하는 한국 예술사의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그 변곡점을 찍은 사람이 바로 겸재 정선이다. 정선이 개척한 진경 산수화에 대해 사실 교과서에서 절반 만을 가르친다. 진경 산수화가 조선의 산수를 실제에 가깝게 그리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산수화의 주제와 대상이 중국의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산수에서 조선의 산수로 옮겨간 것은 맞지만 진경산수는 그것을 실제에 가깝게 치밀하게 그리기 보다는 대상에서 받은 인상을 그리는 것에 가깝다.

 즉,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산과, 바다, 강, 자연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되 실제를 정확히 묘사하기보다는 대상에게서 받은 생각과 느낌 등을 화인이 주관적으로 그리는 것이된다. 서양 예술 사조로 친다면 인상주의나 추상주의로 나아가는 모더니즘 경향과 매우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이 책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님이 겸재 정신에 대해서 쓴 책이다. 과거에도 이런 책을 쓰셨는데 그간 한국 미술에 대한 연구가 양,질적으로 모두 깊어지며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책을 거의 다시 쓰셨다 한다.  

 정선은 조선시대 사람 치고는 84세까지 장수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젊어서 두각을 나타낸 반면 정선은 40세까지 이렇다할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60이 넘어서야 그 진가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정선의 대표작인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포는 모두 국보급 문화재로 정선이 70대 이후에 그린 것들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선의 회화 발전 시기를 다음의 3단계로 나눈다.

 우선 모색기로 60대 이전으로 진경산수를 개척해나가는 시기다. 신묘년 풍악도첩, 북원수회도, 사계산수화첩, 의금부계회도, 구학첩, 내연산 삼용추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다음은 60대로 확립기이다. 진경산수 화풍을 완성한 시기다. 대표작은 청풍계도, 서원소정도, 경교명승첩, 연강임술첩이 있다. 마지막은 완숙기로 70대 이후다. 진경산수의 경지에 이르러 필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시기다. 대표작은 계상정거도, 정묘년 해악전신첩, 인왕제색도이다.

 정선은 평생 그림을 쉬지 않고 그렸다. 예술을 사랑하기도 하고 여기 저기서 밀려드는 그림 요청을 대개 수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우 다작한 작가이며 작품도 현재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정선은 다른 화인들과 다르게 양반 출신이다. 광주 정씨로 증조부 정창문이 벼슬하지 못했고 그 아들 3형제도 급제를 못했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3대가 벼슬을 하지 못하면 한미한 집안으로 추락했는데 정선의 가세가 딱 그러했다. 그래서 정선은 40세까지 궁핍한 삶을 이어간다. 그런 정선에게 관직의 길을 열어준 것이 안동김씨 집안이다. 이들은 청운동 일대에 살았고 이 지역을 장동이라 불러 다른 안동김씨와 구분해 장동김씨라 불렸다. 순조, 헌종, 철종의 장인인 김조순, 김조근, 김문근이 바로 이 장동김씨다. 이들은 김상용, 김상헌 형제의 후예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이 공조참판, 김수항이 영의정, 김수증도 영의정에 오르며 집안이 궤도에 오른다. 그리고 김수항의 아들 6인이 창자 돌림으로 겸재와 인연이 깊다.

 이들 중 김창집이 영의정에 올랐는데 이들의 고조부가 겸재의 고조부와 매우 친했다. 그래서 집안이 가까웠던 것이다. 김창집의 동생 김창흡은 형과 다르게 진사시에 합격하도고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 전념한다. 그는 진경산수화와 비슷하게 진경시를 추구했는데 이게 정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창흡은 정선의 학문적 스승이었다. 장동김씨 들은 회화에 관심이 깊어 많은 작품을 수장했는데 정선도 이를 감상하며 회화에 대한 조예가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겸재는 학문에도 밝았는데 대학과 중용 등 경학에 능했고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관직엔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다 가세가 힘들어 김창집에 관직을 요청해 그의 추천으로 41세가 되어서야 종9품의 말단직 천문학겸교수가 된다. 당시 김창집이 좌상으로 관상감의 제조였기에 가능했다. 관상감의 직책은 대개 중인이 맡았지만 이처럼 한미한 양반들이 진출하기도 했다. 

 겸재는 36세에 처음 금강산을 유람하고 신묘년 풍악도첩을 그린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금강산을 유람하고 해악전신첩도 그린다. 겸재 당대에는 중국과 교류가 많아 많은 중국의 화풍이 조선에 들어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정선도 남종문인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를 묘사하거나 그런 풍으로 그린 그림들이 젊어서는 많다. 겸재는 이처럼 당대의 조선회화의 전통인 절파풍 전통에 신사조인 중국의 남종문인화풍에서 시작해 자신의 개성인 진경산수화로 나아간 셈이다.

 겸재는 신묘년 풍악도첩에서 부감법과 수지법과 점경인물을 보인다. 겸재는 중국과 우리의 자연이 다르기에 중국의 나무 그리는 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우리 산천에 걸맞는 줄기가 굽은 소나무와 무리짓는 솔방울을 그렸다. 그리고 중국의 점경인물(작은 인물 그리기)은 자세하지 않고 단순한 반면 겸재는 그것을 따르면서도 동작을 실감나게 표현해 차별점을 두었다. 그리고 겸재의 작품에는 유머와 시사성이 있다. 그림을 보면 이게 무슨일인지 추론해볼만한 서사가 있는 경우가 많고, 금강전도 같은 그림에도 곳곳에 사자바위를 그려넣는 등의 해악이 있다.

 겸재는 해악전신첩을 금강산 방문 후 그렸고 35년인 전성기 72세때 이를 다시 그렸다. 둘다 남아 있어 겸재의 화풍이 진경산수로 어떻게 발전하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해악전신첩의 전신은 대상의 외형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 담아내는 것을 말한다. 원래 전신수법은 인물의 정신을 담아내는 초상화의 기법이었으나 그것이 산수까지 확대된 것이다. 

 겸재는 45세인 1720는 하양현감에 제수된다. 하지만 이듬해인 1721년 신임사화가 생긴다. 이는 경종때 노론 4대신이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 그에게 정무대리까지 맡길 것을 주장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 이 주장은 관철되었으나 훗날 소론이 극렬히 반대하여 이 주장을 펼쳤던 노론 4대신이 화가 미친다. 그들 중 하나가 김창집이었다. 그의 은혜를 입은 겸재로서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조선시대 화가 주변 사람에게 미치는 일은 흔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창집은 유배되어 사사된다. 하지만 경종이 오래 살지 못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판이 뒤집히고, 김창집은 결국 복권된다. 

 겸재는 50대에 영남의 명승 쌍도정도를 그린다. 이는 성주 관아의 객사인 백화현의 정원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쌍도인 이유는 정원 내에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두 개 인공섬이 다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양현감 시절 겸재는 환곡을 제대로 걷지 못해 최하위 인사고과를 받는다. 그러다 55세 정기인사에서 종6품 한성부 주부를 제수 받고 이어 의금부 도사가 된다. 의금부 인사들은 자주 계회를 가졌는데 겸재도 의금부계회도를 그린다.

 한편 겸재는 사헌부 지평 김한운의 탄핵상소로 파면된다. 표면적 사유는 겸재가 잡기로 발신하여 전문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실제 겸재는 대과로 입직하지 못했고, 학문이나 관료로서의 재능보다는 환쟁이로서의 명성이 훨씬 컸기에 이와 같은 공격을 평생에 걸쳐 받게 된다. 탄핵 후 겸재는 백악산 아래 인곡정사를 짓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한다. 60대에 이곳을 그린게 인곡유거도이다. 

 겸재는 진경산수로 평생 금강산과 영남의 명승, 장동8경으로 대변되는 한양의 명소를 주로 그렸다. 장동은 지금의 인왕산 동쪽과 백악산 서쪽 사이의 지역이다. 오늘날 청운동, 옥인동, 누상동, 누하동, 신교동, 통인동, 통의동, 창신동, 궁정동, 효자동을 아우른다. '

 정선은 1733년 청하현감에 제수된다. 청하는 지금은 포항시의 일부가 되어 지역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관리의 고과는 직속상관이 6개월마다 실시해서 보고했다. 이를 일고라 한다. 상중하  3등급으로 평가했는데 다행히 정선은 이번엔 십고십상을 받는다. 이는 10번 연속 상등급 평가를 받은 것으로 순포라 칭했고 보고시 채록하여 승진의 참고자료로 삼았다. 겸재는 청하현감 시절 친우인 삼척부사 이병연과 간성군수 이병성은 만나려 동해안을 거슬러 올랐는데 그러면서 관동8경을 유람하고 이를 화폭에 남긴다. 

 그는 내연산의 삼용추를 그렸다. 내연산은 영덕과 포항사이의 산으로 보경사라는 고찰이 있다. 내연산의 용추계곡에 3연 폭포가 있어 삼용추라 하는데 연산폭포, 관음폭포, 잠룡폭포의 순이다. 

 한편 정선은 60세의 나이에 92세 노모가 돌아가셔 서울로 상경한다. 3년 상을 치루고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는 동안 관동명승첩과, 청풍계도, 세검정도 등을 그린다. 세검정은 서울에 있는 정자로 지금이야 개울이 있는 주택가에 휩싸여 정취가 없지만 과거엔 개천이 흐르고 산천이 느껴지는 정자로 장안의 선비들이 장마철에 풍류를 즐기러 자주 찾는 곳이었다. 

 겸재는 65세인 1740년 양천현령으로 제수된다. 현령은 현감보다 품계가 높은 곳으로 정선은 승진한 셈이다. 다만 70세가 되자 현령에서 물러난다. 70세가 당시 조선의 현령의 정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전국의 명소를 돌아다니며 그리는데 이전에 비해 디테일은 생략하고 대상을 과감하게 재구성하여 원숙하고 개성적 필치로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묵담채에 머무르지 않고 청록채색도 구사하며 산수화가 장엄하고 화려해진다.

 겸재가 그린 계상정기도는 1천원권에 나온 도안이다. 이황의 인물화가 그려진 반대편에 있다. 이는 71세 때 그린 것으로 도산서원 자리에 있던 계상서당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않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70대에 정선은 다시 금강산을 그린다. 임진년 그린 해악전신첩을 다시 그려 정묘년 해악전신첩을 그린다. 

 겸재의 대표작 금강전도는 여러 폭이 있다. 정선은 금강산을 여러 번 그렸는데 신묘년 풍악대첩에 금강 내산이 있고, 72세 정묘년 해악전신첩에도 금강내산이 있다. 그래서 같은 대상을 그렸기에 그의 화풍이 얼마나 다르게 발전하였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는 76세에 인왕제색도를 그린다. 인곡정사 너머로 보이는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대작이다. 묵을 짙게 써서 대비를 이루는데 정선의 그림과 좀 다른 느낌이 든다. 저자는 당시 정선의 친우들이 죽음을 맞이한 시기라 인생에 대한 무상함과 슬픔이 가미된 것을 이유로 생각한다.

 마지막 대작은 박연 폭포다. 이전까지만 해도 겸재는 대상의 디테일을 강조하는 편이었으나 이 작품에 이르러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버리고 과장으로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독특한 묵법과 필법으로 순수 조형의 힘과 아름다움을 보인다. 

 겸재는 79세인 1754년 사용원 첨정에서 사도시 청정 종4품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80세에 정3품 첨지중추부사로 승진한다. 경국대전에 80세에 이르면 양천을 불문하고 한 품계를 승진한다는 규정덕이었다. 그리고 숙종의 비 인원왕후의 칠순이 이듬해 있어서 다시 한 품계 승진한다. 그래서 무려 종2품 동지중추부사가 된다. 당상관이 된 셈인데, 그리 되면 조상들의 품계도 올려주게 된다. 집안의 영광인 셈이다. 

 겸재는 1759년 인곡정사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대가는 오래도록 살면서 평생을 수련해 발전하여 대기만성한다. 그는 진경산수로 조선만의 산수를 완성했고 18세기 이래로 많은 화인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일천원권에서 그의 그림을 늘 볼 수 있는 이유다. 정선의 작품은 박물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그의 탄생 350년을 기념하여 작품을 모아 전시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다녀온 분들인 귀한 기회를 놓치지 않은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을 읽는 안목 서양 건축사 - 낯선 시대와 공간을 들여다보는 가장 흥미로운 방법
구니히로 조지 지음, 민성휘 옮김 / 북스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 예술이나 건축은 동양과 다르게 흐름이 느껴져서 나름의 재미가 있다. 이번 책도 그런 일련의 흐름으로 보았고, 일본인이 쓴 것으로 비교적 쉬웠다. 건축은 건축가의 생각외에도 시대에 따른 정치와 경제 그리고 지배자나 권력자의 존재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그래서 건축이란 건축가와 사회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된다. 

 역사상 최초의 건축가는 아마 알수 없겠으나 저술로 파악한다면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의 비트루비우스가 될 것이다. 그는 세계최초 건축 전문서 건축 십서를 저술했다. 10권으로 건축의 원리와 역사, 신전, 극장, 목욕탕 가옥 등 다양한 건축물에 대한 설명이 수록되었다. 책은 무려 15-16세기 다빈치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영향력을 오래도록 미쳤다. 그는 책에서 건축의 3원칙을 제시했는데 기능, 구조, 미학이다 이중 기능과 구조는 시대에 따라 큰 변화가 없을지 모르나 미학은 시대에 따라 무척 다르게 정의된다. 

 동양건축은 나무 중심이다. 나무는 자연 친화적 재료지만 내구성이 약해 아주 오래가진 못한다. 나무는 자연과 순환 개념을 가진 재료로 자연과의 공생을 지향한다. 그래서 동양의 목조 주택은 툇마루가 있어 안과 밖을 연결한다. 즉, 외부가 내부로 스며들고, 내부가 외부로 확장하는 구조다. 반면 서양의 건축 재료는 돌이다. 이는 외부와 내부를 차단하는 것으로 외부를 위협으로 여기는 세계관이다. 이는 유럽의 혹독한 기후와 풍토에서 기원한 것으로 이런 건축문화는 유럽의 인간중심주의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는 이오니아식 신전을 만들었다. 기둥이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으로 발전했으며 세 형태 모두 오더형식이다. 오더는 원주와 이를 받치는 기단, 기둥위에 놓은 들보와 지붕을 포함한 각 부분의 형태와 치수의 균형을 의미한다.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아식이다. 신들의 조각가라 불린 페이디아시의 지도하에 건축가 익티노스가 설계했다. 기원전 438년 오나성했다. 폭30m, 길이70m로 기둥이 양쪽끝에서 중앙으로 갈수록 부풀어 오르는 엔티시스 형태다. 

 로마에서는 5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가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브라타니아에 118km짜리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건설했고, 여러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하드리아노폴리스를 8개 건설했다. 아테네를 재건해서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완공했다. 그는 118-133년까지 로마 북동쪽 티볼리라는 도시에 광대한 별장인 빌라 아드리아나를 건설했다. 여기에 로마 속령의 매력적인 건물 30개 이상을 재현했다. 그는 로마의 판테온을 설계했다. 아우구스투스 시절의 것을 재현한 것으로 8개의 원주가 삼각형 지붕을 받친 입구는 파르테논 신전의 느낌이며 원형홀은 천장이 반구형 돔으로 중앙에 구멍이 있어 안으로 빛이 쏟아진다. 

 로마의 콜로세움은 4층 원형 경기장이다. 1층 기둥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위로 갈수록 기둥이 가늘어져 시대상과 건축원리를 반영한다. 

 로마는 395년 동서로 분리했다. 로마 기독교 교회는 바실라카식 기독교 교회 형태를 채택했다. 이는 라틴 십자가 형태다. 동로마 비잔틴 교회는 비살리카 평면위에 반구형 돔을 얹은 양식이 주류다 수평적이고 일방적인 바실리카와 달리 중앙공간을 기준으로 대칭을 이룬다. 

 아야 소피아는 36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건축했다.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때 반구형 돔을 덮었고 직사각형 평면 위에 돔을 얹는 것이 어려워 당시 평면을 정사각형으로 하였다. 153년 오스만투르크가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자 아야소피아는 모스크로 용도변경한다. 원래 모스크는 긴 복도를 갖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아야소피아는 무슬림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이 때부터 다른 모스크들도 둥근 양식이 생겨나게 된다. 1617년 술탄아흐메드 모스크가 대표적인데 53m높이의 돔에 64m 미나레드가 4개나 된다. 기둥만으로는 돔의 무게 지탱이 어려워 여러 크기의 돔을 조합한 후 커다란 돔을 얹는 구조를 택했다. 

 11-12세기 서유럽에서는 로마네스크라는 건축 양식이 탄생했다. 로마건축을의 회귀 움직임이다. 특지은 두꺼운 벽과 반원형 아치, 볼트라고 불리는 반원형의 노출된 천장이다. 대표적인 건물이 피사 대성당이다. 로마네스크에서 고딕 건축으로 발전하며 한 가지 기술적 변화가 일어난다. 로마네스크 양식에서는 측랑의 지붕을 아치 아래 숨겨두었는데 고딕 건축은 이를 측랑의 지붕보다 더 높은 위치로 옮긴 뒤 플라잉 비트레스라는 아치를 설치해 외벽을 보강하였다. 이로 인해 고딕 양식 때는 로마네스크 시기 보다 훨씬 높은 천장 건설이 가능해졌다. 벽에 대한 하중부담도 적어져 벽이 얇아져 창문 설치가 가능해졌고, 이로 인해 스테인 글라스가 등장했다.

 이로 인해 고딕성당이 탄생한다. 고딕 성당은 높은 천장으로 인해 거기서 쏟아지는 햇빛이 장엄함을 연출했고, 종교화가 그려진 스테인 글라스의 환상적인 색채, 그리고 높은 천장이 주는 공간감에서 울려퍼지는 파이프 오르간의 장엄함이 결합하여 신자로 하여금 강력한 신성을 경험하게 하였다. 대표적 고딕 성당이 노트르담 대성당,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샤르트르 대성당, 퀼른 대성당이다. 

 14세기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된다. 로마 붕괴 이후 이탈리아는 통일 왕조가 없었다.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강력한 중앙의 간섭을 받지 않아 새로운 문화 혁신이 오히려 유리했다. 도시 국가의 귀족이 무역과 상업으로 얻은 부로 예술가와 지식인을 후원하여 기독교 중심의 중세와 다른 문화적 기반을 생성했다. 르네상스 건축의 선구자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다. 그는 3차원의 입체건물을 2차원의 평면에 그리는 투시도법을 창안했다. 

 바티칸 시국에는 성베드로 성당이 있다. 이 역시 아야소피아 처럼 여러번 개축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1세가 324년 창건했고 당시엔 돔이 없었고 바실리카의 전통형태였다.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626년으로 당시 이탈리아 대표 유명 건축가들이 모여 만들었다. 15세가 교황 티콜라이 5세가 대성당의 재건을 처음 계획했다.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가 개축을 다시 시작했고 수석건축가를 공모하여 브라만테가 선발되었다. 그는 중앙에 커다란 돔을 배치한 그리스식 십자형의 평면을 구상했다. 하지만 둘다 꿈을 실현 못하고 죽고, 계획은 좌초하다가 72세의 나이에 수석건축가가 된 미켈란젤로가 이를 실현한다. 그는 브라만테의 집중식 평면을 구현하고, 88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돔의 하부구조를 완성한다. 

 200년이 지나 17세기가 되자 이탈리아 건축은 쇠퇴한다. 이탈리아는 도시 국가로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종교적 권위가 건축을 주도했다. 하지만 주도권이 프랑스로 넘어갔고, 여기는 절대왕정의 군주가 건축의 중심이 되고 바로크가 새로운 사조가 된다. 그래서 궁정이 건축의 중심으로 자리한다. 아르두앙 방사르는 베르사유 궁전 건설에 참여했고 블루아 성을 설계한다. 건물의 모서리가 곡면으로 처리되고 내부 공간이 타원형이 사용되는등 바로크의 영향이 뚜렸했다.  

 바로크에 이어 로코코도 시작된다. 로코코는 프랑스어로 바위를 뜻하는 로카유에서 유래한 말이다. 바로크 시대 정원에서 바위를 조합해 만든 장식을 로카유 방식으로 불렀으며 시간이 지난 후에는 복잡한 실내 장식을 의미하는 언어로 사용되었다. 로코코는 지나치게 장식적인 다지인으로 후대인에게 퇴폐적 느김을 주었고 실내 장식에 치중하였기에 건축사조로 보기엔 어려운 면이 있다.

 건축의 배경에는 사회적 가치관이 자리한다. 르네상스가 근대 과학의 문을 열었다면 산업혁명은 공학의 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1851년 영국에서 세계최초 세계 박람회가 개최된다. 하이드 파크에 조셉팩스턴이 철과 유리로 길이 560미터 폭 120미터의 거대 건축물을 10개월만에 완성한다. 30만장의 유리를 사용한 크리스털 팰리스다. 전체적인 평면구조는 라틴십자가형이다. 수정궁은 박람회 후, 런던 교외로 옮겨져 오락시설로 사용되다 1936년 화재로 소실되고 복원되지 않았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은 1875년 완성되었다. 코린트식 장식과 아치의 고전적 요소가 있고, 철골을 사용해 기둥이 가늘고 가벼운 느낌이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는 이탈리아 밀라노 쇼핑아케이드 두오모 광장에 있다. 일류브랜드와 레스토랑이 즐비한 명소다. 고전양식과 중세느낌이지만 천장에 유리와 철로만든 볼트를 통해 빛이 스며들며 38미터에 달하는 유리돔이 있다.

 한편 산업화에 따른 대량생산에 대한 반발로 중세 고딕 양식의 부활을 주장하는 라파엘 전파가 탄생한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트앤 크래프트 운동이다. 모리스가 주도했고, 미국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훗날 아르누보라는 국제적인 미술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으로 파리세계박람회가 열리고 획기적 건축물로 에펠탑이 건설된다. 그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미 워싱턴 기념탑으로 167미터였다. 에펠탑은 이를 아득이 넘어서는 300미터였다. 에펠탑은 연철로 만든 것으로 철은 주철, 연철, 강철 순으로 발달했는데 당시는 연철의 시대였다. 그리고 높은 건물이었기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당시 엘리베이터는 수압식이었다. 

 19세기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골드러시로 신도시였다. 캘리포니아는 골드러시 이전만 해도 인구 200명에 불과한 무법지대였다. 하지만 골드러시와 아메리카 대륙횡단철도의 개통 이후 인구가 15만으로 폭증한다. 샌프란시스코는 인구가 폭증하며 도시계획을 했고 골든게이트 공원은 1871년 조성한다. 거리가 이 공원을 중심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을 정비하여 주택을 분양한다. 당시 주택은 빅토리아 양식의 목조주택으로 무려 4만호가 건설되었고, 일부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미국 시카고는 미시간 호수와 대서양이 운하로 연결되는 곳이다. 상품거래소가 있어 미국 전역의 농산물이 모인다. 시카고는 1880년대 교외에 풀먼 공업도시가 개발된다. 무려 6000개의 회사 직원과 가족이 거주가능한 도시였다.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에서 이 도시가 큰 주목을 받았고, 3년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도시로 국제적 표창을 받는다. 하지만 1890년대 금융 대공황 이후 직원 처우를 두고 파업과 불매 운동이 벌어지고, 기업이 거주민의 삶을 정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일어난다. 결국 1898년 일리노이 법원이 기업이 도시 건설 권리가 없다고 판결하며 1909년 매각되며 역사로 사라진다. 

 시카고는 1871년 대화재가 일어나며 도시가 재정비된다. 경제 발전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사무실 수가 증가하며 고층빌딩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었는데 화재로 인해 시카고는 10층 이상의 고층 빌딩으로 재편된다. 당시 뉴욕조차 5층 빌딩이 대세였다. 이는 철골구조와 엘리베이터로 가능했다.당시 14층의 릴라이언스 빌딩이 유명하다.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자는 알폰스 무하다. 현재 파리의 거리에는 아르누보의 흔적이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있으며 벨기에의 타셀저택과 오르타 저택도 이 양식이다. 안토니오 가우디도 아르누보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설계한 카사 밀라는 직선이 거의 없고, 유기적이며 뼈처럼 보이는 기둥과 식물을 모티프로 한 디자인이다. 미완의 걸작인 사그리아 파밀리아 성당도 마찬가지다. 고딕 양식과 아르누보의 곡선을 결합했다. 

 빈의 아돌프 로스는 빈 분리파의 장식성을 비판했다. 그는 자서전 장식과 범죄에서 장식을 범죄라고 말한다. 이는 20세기 건축의 주류 모더니즘의 탄생을 알리는 발언이었다. 그는 3년 후 자신의 주장을 로스 하우스로 구현했는데 이 건물은 장식이 전혀 없고, 기하학적 직선으로만 구성되었다. 카사밀라와는 큰 대조를 이룬다.

 20세기 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서며 근대 건축의 4대 거장이 나타나서 모더니즘 건축이 꽃을 피운다. 첫번 째 주자는 르코르뷔지에다. 그는 도미노 시스템이라는 철근 콘트리트 주택 건설 방식을 발표한다. 바닥과 기둥, 계단이 건축의 핵심이다. 이 개념이 혁신적인 이유는 외벽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전통 건축은 기둥이 외벽과 결합해 전면에 돌출된다. 도미노 시스템에서는 기둥이 내부에 위치해 보이지 않는 외벽이 된다. 그래서 이런 외벽을 커튼 월이라 한다. 르코르뷔지에는 근대 건축의 5원칙을 주창한다. 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수평 창문, 자유로운 입면이다. 그리고 이를 종합 구현한 것이 1931년 완성한 사보아 저택이다. 

 두번째 주자는 그로피우스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바우하우스는 종합예술을 교육하는 모더니즘의 최전선이었다. 보수적인 바이에른에 있어서 데사우로 쫓겨나는데 건물을 새로지을 때 설계한사람이 그로피우스다. 그는 건물을 커튼 월로 지었다. 

 세번째 주자는 미스 반데로어다. 그는 정규 건축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어려서부터 목조 건축 현장에서 일하며 건축의 감을 키운다. 그는 Less is more를 자장한다. 1929년 바르셀로나 세계박람회에서 독일관을 만들었고,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을 구축한다. 이는 1986년 복원된다. 그는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시카고 일리노이 공과대학 건축학과 주임교사가 된다. 그는 판스워스 하우스는 만드는데 연인관계인 정신과 의사 에디스를 위해 만들었다. 지역이 간혹 침수되어 바닥이 들려 있고, 모든 내벽이 천장과 맞닿지 않았고, 외벽이 유리로 개방되었다. 집은 매우 미학적이었지만 건축비가 매우 비쌌고 불편하여 에디스가 불만이 많아. 이를 계기로 파탄이 이르며 소송까지 치닫는다.

 마지막 주자는 프랭크 로버트 라이트다. 그는 일본의 제국호텔을 설계할만큼 일본과 인연이 있다. 그는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다가 해고되어 일본에 머문 적이 있고, 미국에 돌아와 1910년까지 200채의 주택을 설계한다. 당시 미국 중서부 평원과 조화를 이루는 수평적 구조의 프레리 스타일 주택을 지어 당시 미국에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건축과 대비를 이뤘다. 라이트는 건축주의 아내와 불륜을 일으키고, 유럽으로 불륜녀와 도피했으나 하인이 불륜녀와 가족을 모두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실의의 빠졌으나 일본에서 제국호텔 의뢰가 들어와 이를 수행한다.

 라이트의 최고 걸작은 유명한 낙수장이다. 폭포위에 지상3층 지하 1층 건물을 짓고, 실내계단으로 물가로 내려가게 설계되었다. 1959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도 그의 작품이다.

 1928년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며 근대 사회에 적합한 건물을 구현하려는 건축가들의 모임 CIAM이 발족한다. 그리고 미 건축계에는 아르데코 양식이 유행한다. 이는 기계를 연상시키는 직선과 기하학적 디자인이 중심을 이루는 형태로 모더니즘과 주화를 이뤘다. CIAM은 1959년 해체하다. 그리고 7년 후 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추리는 모더니즘을 비판하며 Less is bore를 외치며 모더니즘을 비판한다. 포스트 모던의 등장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건축가는 마이클 그레이브스다. 1982년 포틀랜드 빌딩은 정면에 고대신전 같은 돌출물이 있고, 측면에 기하학적 양식이 있으며, 서로 다른 크기의 창문, 여기에 갈색 계열의 채색이 있었다. 

 포스터 모더니즘 이후에는 해체주의가 등장한다. 건축은 벽이 뒤틀리고, 건물이 기울거나 부서지는듯 비정형으로 기운다. 프랭크 게리나, 스위스의 추미가 대표적이다. 해체주의는 로코코, 아르누보,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일시적 유행에 그친다. 2005년에 이르러 힘을 잃기 시작했고 모더니즘 같은 확고함이 없었다. 건축 사조를 보면 오래 간 것들은 시대의 힘과 같이 한 것들이었다. 모더니즘은 산업과 로마네스크나 고딕은 르네상스가 있었다. 

 현재 세걔 건축은 포스트 모던과 해체주의 이후 다음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 교양과 상식으로서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
유홍준 지음 / 눌와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의 역사는 매우 길며, 그 예술의 역사 역시 매우 길다. 책은 도자기, 불교 사찰, 탑, 불화, 고분, 건축, 서원, 궁, 서체, 회화, 공예까지 한국 미술의 거의 모든 것을 총 망라한다. 책은 기본적으로 시대순으로 진행되지만 각 시대의 중점이 되는 미술품을 주로 다루며 그 흐름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때문에 역사와 예술사의 흐름, 그리고 우리의 미술품을 눈으로 다양하게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1. 삼국시대

 가. 삼국시대의 도기

 삼국시대의 도기는 회색 연질도기에서 흑색 경질도기로 전환된다. 가마에서 1000도 이상 고온으로 구워 견고하다. 고구려 도기는 신라, 가야 도기와 계통이 다르고 발굴양도 이상하리 만치 적다. 백제도기는 고구려 보다는 경질이나 신라 가야보다는 연질이다. 그리고 특이한 기형이 많다. 신라, 가야 도기는 최고품질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5세기 들어 대량생산되며 정교미가 다소 쇠퇴하고 6세기에 불교가 유행하자 대형고분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며 제작 도기의 양이 크게 줄어든다. 신라의 상형도기는 수레나 마차, 지게, 배 등 구성이 기발하고 형태가 다양하다. 가야의 도기는 일본 스에키에 영향을 주었다. 

 통일 신라의 도기 기술이 발전하여 청자의 초보 형태인 삼채와 녹유가 되었다. 삼채는 당나라의 것으로 납으로 만든 연유에서 철, 구리를 섞어 초록, 노랑, 갈색의 3색을 낸다. 녹유는 잿물 유약을 도기에 입힌 것으로 환원염이면 청록산화염으로 구우면 환갈색이 된다. 


 나. 삼국의 무덤

 고구려는 초기 돌무지 무덤이다. 장군총은 7층으로 무려 사방 33미터에 높이가 13미터다. 고구려는 3세기부터 돌흙방무덤이 유행한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초기 초상화 중심으로 공적, 사적 생활상이 나아다가 중기에는 초상화가 간략화하고 행렬도와 생활풍속도가 나온다. 후기 벽화는 장식무늬화 사신도다. 550년 무렵이면 프레스코대신 벽에 직접 그려 생동감이 있다. 

 백제무령왕릉은 완벽한 벽돌무덤으로 한 칸 크기 무덤으로 중국 남조식이다. 

 신라는 부자 세습을 확립한 눌지 마립간 시기부터 거대 봉분을 축조한다. 신라는 엄청난 양의 순금 부장품을 묻었는데 금관총 발굴 당시 금의 총량은 7.5kg이었다. 신라는 고도의 금 세공기술을 보유했다. 누금기법은 금속알갱이와 금속실을 붙이는 기법으로 기원전 3천년 서아시아에서 유래한 기법으로 신라인은 이것을 구현했다. 신라금관은 총 6점 출토됬다. 5점은 금관총, 황남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에서 1점은 도굴된 것을 압수했다. 신라금관은 등근테에 뫼산자모양 세움장식 3개에 사슴뿔모양 장식 한 쌍을 붙이는 것이 기본이다. 처음에는 이것을 왕관으로 여겼으나 여성의 무덤에서 금관이 남성의 무덤에서 금동관이 출토되어 원점에서 재검토되고 있다. 

 신라 천마도는 말안장 아래 흙이 튀는 것을 막는 대래다. 천마도는 자작나무로 만든 것인데 이 나무가 신라가 아닌 고구려 지역의 나무다. 즉, 천마도는 아무래도 신라와 고구려의 관련성을 의미한다. 

 가야의 김해대성동에서는 청동솥에 출토되었다. 이것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휴대용 취사도구다. 부여의 것과 매우 유사하여 4세기 부여가 숙신의 침입으로 멸망한 후 부여인이 가야 집단으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다. 삼국의 불교문화

 불교는 삼국에서 앞장서서 수용했다. 이는 불교의 위계질서가 고대국가의 위계질서와 잘 부합했기 때문이다. 불교는 부처, 보살, 나한, 천장, 중생의 위계질서를 가졌는데 이게 왕, 귀족, 지식인, 대중의 현실세계와 잘 등치했다. 초기 전래 불교는 탑 중심이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는 탑 중심으로 주위에 회랑을 두었다. 부속건물은 좌우대칭이다. 기본적으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반이 남북 일직선 배치였다. 

 고구려는 목탑 중심으로 1탑 3금당이었다. 목탑이 팔각탑이었다. 

 백제는 1탑 1금당 가람 배치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건립했다. 한국 최대 가람으로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수도 이전 및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가 물리칠 9적이 대상이었다. 각각의 층이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이었다. 여기에 백제와 고구려가 없는데 이것 자체가 이들을 같인 민족으로 인식하고 하나로 여겼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황룡사는 창건 후 무려 6차례나 낙뢰를 맞아 중수되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전소된 후엔 더 이상 중건되지 않고 빈터가 되었다. 분황사 모전 석탑은 현재 3층이지만 원래 7층으로 추정된다. 

 대승불교가 전래되고 슬슬 탑에서 불상으로 중심이 이동한다. 고구려 백제는 하나의 광배상에 여래상을 모시고 좌우에 보살상을 작세 배치하는 1광배 3존불이 유행했다. 고구려는 국가가 불교를 적극 지원하지 않아 불상 수가 적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백제의 상징적인 불상이다. 신라는 미륵신앙와 화랑결합으로 호국불교로 국가주관의 불교행사가 많았다. 

 7세기 신라는 경주 남산에 불상을 조성했다. 경주 남산은 전체가 화강암 골산으로 200곳의 불적이 있다. 신라는 반가사유상을 많이 제작했다. 신라의 높은 보관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낮은 보관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명작이다. 둘 다 등신대의 크기로 속이 텅 빈 중공식 주조다. 동판이 아주 얇아 주조 과정의 기포가 전혀 없어 난이도가 높다. 

 신라는 하대에 이르러 왕위쟁탈전이 벌어진다. 정치적 혼란 속 불상과 석탑은 긴장미가 사라진 매너리즘이 일어난다. 이에 반해 지방호족은 자신의 문화를 창조한다. 호족의 정신적 지주가 선종이다. 하대신라는 철불의 시기다. 철불은 이상적 절대자가 아니라 현세적 능력의 인간상이었다. 

 신라의 가람배치는 쌍탑 1금당이다. 3층의 석탑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완성되었다. 신라는 중대에는 석탑이 하대에는 승탑이 유행했다. 특히 선종에서는 승탑이 유행했다. 


라. 신라의 금속공예

 통일신라의 금속공예는 청동기에서 높은 수준이었다. 청동에 장식을 가하는 방법은 평탈기법과 입사기법이 있다. 평탈기법은 얇은 금판, 은판을 여러 가지 무늬로 오려낸 다음 옻칠로 부착한다. 입사기법은 청동표면에 음각으로 그림을 새겨 그 얖은 홈안을 가느 금실, 은실로 메우는 방법이다. 


2. 고려시대

 가, 고려의 청자

 고려청자는 고도의 기술이다. 청자는 중국에서 기원했다. 하지만 고려만이 이를 제대로 구현했고 오히려 더 발전시켰다. 10세기 중국 월주요의 청자를 다완으로 수입하여 사용하다가 5대 10국 혼란기에 무역이 끊기자 자체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10세기 후반의 초기 청자 가마인 황해도 배천 원산리 가마가 길이 40미터로 월주요식 벽돌가마다. 

 월주요식 벽돌가마는 한국 전통도기기술과 결합하여 흙가마로 변모하여 크기가 10미터로 줄어든다. 11세기 강진, 부안, 해남, 고흥, 장흥에서 고려청자가 제작된다. 고려 양인 중 잡척이 농민보다 낮은 신분으로 도자기, 먹, 종이, 소금을 생산하며 향, 소, 부곡에 거주했는데 이들이 이를 청자를 생산했다. 11세기 중국 북방청자인 요주요의 영향을 받아 같은 무늬를 틀로 찍은 압출 양각기법이 유행한다. 

 송의 서긍은 1124년 송 휘종에 고려 도경을 저술해 바치며 고려청자의 비색을 언급했다. 매병은 고려 청자의 대표적 기형으로 당대의 술병이나 고려는 꿀이나 참기름을 담기도 했다. 정병은 부처님 앞에 정수를 바치는데 사요했다. 주전자는 손잡이와 뚜껄에 고리를 다록 서로 끈으로 연결했다. 고려의 궁 만월대에는 기와에 청자기와를 사용했다.

 도자기의 미는 기형, 빛깔, 무늬의 3요소다. 12세기 고려청자는 기형, 빛깔은 최고 수준이었다. 다만 양각, 음각, 투각의 기법은 무늬효과가 좀 떨어졌다. 그래서 상감이 등장한다. 상감이전엔 백토를 묽게 하여 붓으로 무늬를 그리는 백화기법이 시도되었다. 그리고 자토를 쓴 철화기법도 사용되었다. 13세기 상감기법이 등장한다. 청자의 표현영역은 확장한다. 산화동으로 붉은 색을 가하는 동화기법, 금을 쓴 화금청자, 철분이 완전히 제거된 태토로 백자를 제작하고, 철분이 많은 안료를 쓴 철채청자, 검정색의 흑유청자가 제작된다. 

 고려백자는 철분이 거의 없고 점토와 유약으로 만들어 하얗지만 질감이 매끄럽지 않은 연질 백자다. 고려청자는 왕조와 운명을 같이 한다. 공민왕때 이미 크게 쇠퇴하고 홍건적, 왜구의 창궐로 서남해안이 초토화되어 자기 생산지가 붕괴하고 도공이 대거 이탈한다. 


나. 고려의 나전

 나전은 당에서 시작하여 신라, 일본으로 전파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칠기가 꽃을 피웠다. 송은 나전칠기의 수준이 떨어졌고 고려 나전이 독보적이었다. 고려 왕실도 나전에 공을 들였다. 목종 때 관영 공예품 제작소로 중상서를 왕실에 설치했고 훗날 공조소로 이름이 바뀌어 여말까지 존속한다. 나전칠기는 나무로 기물을 만든 다음 굵은 삼베를 바르고 그 위에 자개를 붙인 뒤 옻칠을 덧입혀 반반히 만든 것이다. 헝겊 바르기-칠하기-나전 시문-칠하기-나전 무니의 칠 벗겨내기-광배기의 과정을 거친다. 

 고려 나전의 특징은 주름질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의 뒷면을 채새한 뒤 기물 표면에 붙이는 대모기법을 사용해 붉은 주황, 노랑 빛의 다양성을 냈다. 이는 고려 고유의 기술이다. 그리고 무늬 구성에 금속선을 병행했다. 


3. 조선시대

 가. 도자기

 분청사기는 고려상감청자의 전통을 이어 15세기 중엽까지 전성기였다. 1467년 경기 광주의 국영도자기 제작소인 관요설치이전까지 활성화했다. 각 지방에 산재한 지방 가마에서 생산해 양식과 조형이 자유로웠다. 분청사기는 5가지 종류가 있다. 상감 분청, 인화분청(작은 무늬를 도장으로 만들어 찍기), 박지, 조화 분청(백토를 칠하고 양각, 음각 무늬), 철화분청(백토 분장 후 철화안료로 그림 그리기), 귀얄 담금 분청(백토를 귀얄로 그려 자국을 남기거나 그릇을 백토에 담금)이 있다.

 조선 백자는 순백에 대한 숭상이 있다. 동양3국의 도자기는 초점이 다르다. 중국은 형태, 일본은 색, 한국은 선에 중점을 둔다. 조선 백자는 명의 우수한 백자의 자극을 받고 획기적으로 발전한다. 조선은 백자 생산을 위해 전국의 백토 조사 결과 강원 양구, 경상 하동, 산청 진주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1467년 경기도 광주에 관용 백자를 생산하도록 사용원에서 분원을 설치한다. 300개소의 백자 가마터가 광주에 들어서고 가마터는 땔나무의 소모로 인해 10년을 주기로 이동한다.

 조선백자는 청화백자로 발전한다다.청화안료는 이란이 원산지로 희귀하고 회회청이라 부른다. 세조가 명을 내려 국내에서 찾아봤으나 없었고 수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 중기 철화백자는 회회청 수입이 어려워 철화로 대신하며 나타난다. 조선 중기 백자는 회색 내지 갈색을 띠다가 다시 순백색을 회복한다.  

 조선말기가 되자 도자기도 매너리즘과 청나라풍의 영향으로 백자의 기벽이 두터워지고 둔장해진다.


나, 조선의 회화

 조선은 무수한 초상화를 제작했다. 초상화는 임금의 초상 어진, 공신의 공신초상, 서원과 가문의 영당의 선비초상이 있다. 공신의 초상은 처음에는 공신각에 봉안했으나 훗날 집안에 내려 가문의 영광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초상은 외형과 정신을 같이 그려냈다. 숯으로 소묘했고 그림종이에 옮겼고, 완성된 초본을 틀에 고정시키고 비단을 덮어 씌우고 윤관선을 그려 채색했다. 

 조선초기는 유행한 산수화는 소상팔경도다. 중국 동정호 남쪽의 소수와 상수가 합쳐지는 풍광을 이른 봄과 늦은 가을에 8개 주제로 그린 그림이다. 16세기 산수화를 곁들은 계회도가 유행한다. 계는 사대부들이 친목을 위해 시와 술을 즐기며 어울린 모임이다. 조선 초중기 계회도가 100점이상이다. 계회도는 3단의 축으로 상단은 계회의 명칭, 중단은 그림, 하단은 참석자의 명단이다. 

 조선시대 회화사는 초기는 안견의 화풍, 중기는 명나라 절화화풍이 유행한다. 절화화풍은 절강성 출신 화가의 호방한 필법과 활기 넘치는 화풍이다. 산수화가 자연의 서정 관념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산수인물화다. 조선후기는 속화, 진경산수화, 문인화 3대 장르가 확립한다. 진경산수화는 소중화로 중국에 대한 동경이 사라지자 우리 자연에 대한 사랑과 자랑이 생기며 확립한다. 문인화는 그림에 화가 자신의 마음을 담아낸다는 내면적 리얼리즘의 산물이다. 

 단원과 혜원은 풍속화의 대가다. 단원은 서민과 서민의 심성을 그렸고 필치가 강하며, 채색을 절제했고 배경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반면 혜원은 양반을 주로 그려 그들의 마음을 그렸고 필치가 여리고 부드러우며 채색을 많이 했고 배경을 치밀하게 묘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번쯤은, 서양미술사 - 다빈치부터 피카소까지, 시대별 대표 명화로 한눈에 보는 미술의 역사
김찬용 지음 / 땡스B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 미술 책은 볼 때마다 눈이 즐겁고 시대에 따른 흐름을 느끼는 것이 즐겁다. 예술도 인간의 산물인 만큼 그 정신의 변화를 따라가고 시대의 변화는 그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책 한 번쯤은 서양 미술사는 르네상스부터 입체주의까지를 다룬다. 과거 고전과 현대가 없는 부분이 아쉽긴 한데 아마 속편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책은 각 시기의 사조를 소개하며 대표적 예술가와 그의 작품을 보여준다. 시기를 좀 세세히 쪼갰기에 시기별 작가 수가 좀 적고, 대표작은 한개만 보여준게 아쉽긴 한데 그래도 책의 즐거움은 충분하다. 

 르네상스는 미술을 숙련공의 기술이 아닌 그 시대의 지식, 철학, 예술가 개인의 창작물로 보기 시작한 시기다. 그래서 과거와 다르게 작품에 예술가의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 등장한 예술가가 보티첼리다. 그는 종교화 중심이던 르네 상스 초기 비너스 누드를 그렸다. 이는 신성모독이었으나 이를 과감히 시도했다. 조각의 중시한 미켈란 젤로는 시스티나 천장화의 의뢰를 받아 그렸다. 흔히 아담의 창조 부분이 강조되지만 이 천장화는 빛과 어둠의 분리, 별의 창조, 땅과 바다의 분리, 아담의 창조, 하와의 창조, 원죄, 노아의 방주1,2,3의 9개 장면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직사각형의 작은 프레임을 이용해 그린 구역과 전체화면을 채운 구역을 교차하고 꺾이는 곡면에 7명의 예언자와 5 사제를 배치해 재미를 살렸다. 르네상스 시기는 3명의 천재가 빛냈다. 조각의 미켈란젤로 회화의 라파엘로 모나라지의 다빈치다. 

 르네상스 시기는 비례, 균형, 조화, 이상미가 추구되었다. 이에 반해 왜곡과 과장의 비대칭과 강렬한 색감을 강조한 사조가 매너리즘이다. 틴토레토의 낙원은 당시의 작품으로 매우 규모가 크면서 수많은 천사와 부활한 성인, 그를 따르는 추종자 50인 이상을 그려냈다. 대규모 군상이 뒤 섞인 모습으로 역동성을 준다.

 바로크는 찌그러진 진주라는 뜻으로 17-18세기 중엽의 사조다. 종교와 역사화 등 주제 표현에 강렬하고 극적인 연출을 한다. 자연스러운 묘사와 정확한 비례속에 강한 빛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키아토스쿠로 기법이 사용되었다. 당시 종교개혁으로 로마카톨릭은 이에 대응하고자 예술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래서 이 시기엔 종교적 감화를 일으키는 강렬하고 극적인 작품들이 등장한다.

 로코코는 작은 조개 장식을 의미한다. 조개껍데기 처럼 우아한 바로크라는 뜻이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유럽귀족 사회로 확산한다. 귀족 사회와 연애, 자연을 주제로 한 부드럽고 우아함이 특징이다. 바로크는 다소 진지하고 무거웠기에 귀족 사회의 사적 취향을 충족시킬 방안이 탄생의 원인이다. 앙투안 와트의 키데라 섬으로의 출항은 당시의 작품이다. 키데라 섬은 비너스의 고향으로 연인과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신고전주의는 18세기 중후반과 19세기 초에 유행한 것으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예술적 가치의 부활을 시도했다. 고고학적 정확성을 바탕으로 절제, 질서, 도덕, 공공정신을 강조한다. 합리주의 미학으로 균형과 구조, 명확한 윤곽, 입체적 형태의 완성을 중시한다. 바로크와 로코코에 반발해 계몽주의적 성격도 띈다. 나폴레옹은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자신을 국가의 영웅과 구원자로 만들려고 했으며 그래서 개선문 건설, 전쟁 약탈 예술품으로 루브루를 확장했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등장한 것으로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창작자 자신의 감정을 적극 드러낸다. 낭만주의 풍경화는 낭만주의 사조의 하위로 인물보다는 자연에 초점을 둔다. 자연을 감정과 상상의 투사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사실주의는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시작했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표현단다. 신고전주의의 이상적 미를 거부하고, 낭만주의의 문학적이고 과장됨도 경계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 여겼으며 이는 근대 회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쿠르베는 '오르낭의 매장'을 그렸다. 이는 대형작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외조부의 평범한 장례를 그렸다. 쿠르베의 작품은 당대 아카데미의 성격에 반하는 것으로 살롱에 출품이 거부되자 40점의 자기 작품만을 갖고 전시회를 기획했다. 이는 최초의 것으로 예술가의 주체적 활동 가능성을 드러낸 혁신적 일이었다. 

 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 중심의 사조다. 실질적으로 현대 미술의 시초라 볼 수 있으며 자연의 빛과 색채, 순간적 인상을 포착한다. 사물의 본질보다는 순간적 인상이 관심사였다. 드가는 무희를 많이 그렸다. 그 자신이 부유층으로 어려서부터 오페라 하우스를 드나들며 자주 관찰한 까닭이다. 그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몰래 사진을 찍은 듯한 관찰자의 시선인데 이는 드가가 당시 등장한 카메라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에 과학적 이론과 질서를 적용하고자 했다. 광학이론 기반의 점묘법과 채도 높고 밝은 빛을 구현하는 화풍이 특징이다. 조르주 쇠라는 색의 혼합 없이고 원색점을 일정한 비율로 찍으면 관찰자가 이를 혼합색으로 인지함을 그랑자르 섬의 일요일 오후로 증명했다. 샤를 앙리는 미학이 개인의 감성이나 주관이 아닌 과학적 설명이 가능한 법칙 체계라 인식했다. 그는 감정이 수학적이고 물리적으로 예측 가능하다 보았다. 상승곡선은 고양감과 희망, 생명력, 하강 곡선은 침체, 우울, 피로를 수평선은 안정감과 평온, 수직선은 장엄함과 긴장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후기 인상주의는 1880년부터 20세기 초로 인상주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다. 인상주의 색채, 표현기법, 시대정신은 계승했으나 더 깊은 감정, 상징, 구조, 형태 등을 강조했다. 고갱은 종합주의를 표현했는데 이는 인상주의 처럼 가시적 경험 포착 외에도 눈에 보이는 형태와 색채에 화가가 느끼는 감정과 기억을 종합하여 표현하는 방식이다. 세잔은 매번 달라지는 순가보다는 진정은 지금 이순간을 포착하고자 하였고 이런 시도는 관찰자와 물체의 움직임이 적은 정물화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세잔의 사과가 넘쳐나는 이유다.

 표현주의와 상징주의는 19-20세기 초에 등장했다. 개인의 내면 세계와 감정, 상징적 의미를 중시했다. 표현주의는 객관적 현실묘사보다는 주관적 감정과 내면의 고통, 감동 같은 심리를 강렬히 묘사한다. 상징주의는 현실의 직접 묘사보다 상징과 은유를 통해 꿈과 정신, 죽음, 종교, 신화등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