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한국미술사 - 교양과 상식으로서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
유홍준 지음 / 눌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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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역사는 매우 길며, 그 예술의 역사 역시 매우 길다. 책은 도자기, 불교 사찰, 탑, 불화, 고분, 건축, 서원, 궁, 서체, 회화, 공예까지 한국 미술의 거의 모든 것을 총 망라한다. 책은 기본적으로 시대순으로 진행되지만 각 시대의 중점이 되는 미술품을 주로 다루며 그 흐름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때문에 역사와 예술사의 흐름, 그리고 우리의 미술품을 눈으로 다양하게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1. 삼국시대

 가. 삼국시대의 도기

 삼국시대의 도기는 회색 연질도기에서 흑색 경질도기로 전환된다. 가마에서 1000도 이상 고온으로 구워 견고하다. 고구려 도기는 신라, 가야 도기와 계통이 다르고 발굴양도 이상하리 만치 적다. 백제도기는 고구려 보다는 경질이나 신라 가야보다는 연질이다. 그리고 특이한 기형이 많다. 신라, 가야 도기는 최고품질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5세기 들어 대량생산되며 정교미가 다소 쇠퇴하고 6세기에 불교가 유행하자 대형고분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며 제작 도기의 양이 크게 줄어든다. 신라의 상형도기는 수레나 마차, 지게, 배 등 구성이 기발하고 형태가 다양하다. 가야의 도기는 일본 스에키에 영향을 주었다. 

 통일 신라의 도기 기술이 발전하여 청자의 초보 형태인 삼채와 녹유가 되었다. 삼채는 당나라의 것으로 납으로 만든 연유에서 철, 구리를 섞어 초록, 노랑, 갈색의 3색을 낸다. 녹유는 잿물 유약을 도기에 입힌 것으로 환원염이면 청록산화염으로 구우면 환갈색이 된다. 


 나. 삼국의 무덤

 고구려는 초기 돌무지 무덤이다. 장군총은 7층으로 무려 사방 33미터에 높이가 13미터다. 고구려는 3세기부터 돌흙방무덤이 유행한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초기 초상화 중심으로 공적, 사적 생활상이 나아다가 중기에는 초상화가 간략화하고 행렬도와 생활풍속도가 나온다. 후기 벽화는 장식무늬화 사신도다. 550년 무렵이면 프레스코대신 벽에 직접 그려 생동감이 있다. 

 백제무령왕릉은 완벽한 벽돌무덤으로 한 칸 크기 무덤으로 중국 남조식이다. 

 신라는 부자 세습을 확립한 눌지 마립간 시기부터 거대 봉분을 축조한다. 신라는 엄청난 양의 순금 부장품을 묻었는데 금관총 발굴 당시 금의 총량은 7.5kg이었다. 신라는 고도의 금 세공기술을 보유했다. 누금기법은 금속알갱이와 금속실을 붙이는 기법으로 기원전 3천년 서아시아에서 유래한 기법으로 신라인은 이것을 구현했다. 신라금관은 총 6점 출토됬다. 5점은 금관총, 황남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에서 1점은 도굴된 것을 압수했다. 신라금관은 등근테에 뫼산자모양 세움장식 3개에 사슴뿔모양 장식 한 쌍을 붙이는 것이 기본이다. 처음에는 이것을 왕관으로 여겼으나 여성의 무덤에서 금관이 남성의 무덤에서 금동관이 출토되어 원점에서 재검토되고 있다. 

 신라 천마도는 말안장 아래 흙이 튀는 것을 막는 대래다. 천마도는 자작나무로 만든 것인데 이 나무가 신라가 아닌 고구려 지역의 나무다. 즉, 천마도는 아무래도 신라와 고구려의 관련성을 의미한다. 

 가야의 김해대성동에서는 청동솥에 출토되었다. 이것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휴대용 취사도구다. 부여의 것과 매우 유사하여 4세기 부여가 숙신의 침입으로 멸망한 후 부여인이 가야 집단으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다. 삼국의 불교문화

 불교는 삼국에서 앞장서서 수용했다. 이는 불교의 위계질서가 고대국가의 위계질서와 잘 부합했기 때문이다. 불교는 부처, 보살, 나한, 천장, 중생의 위계질서를 가졌는데 이게 왕, 귀족, 지식인, 대중의 현실세계와 잘 등치했다. 초기 전래 불교는 탑 중심이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는 탑 중심으로 주위에 회랑을 두었다. 부속건물은 좌우대칭이다. 기본적으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반이 남북 일직선 배치였다. 

 고구려는 목탑 중심으로 1탑 3금당이었다. 목탑이 팔각탑이었다. 

 백제는 1탑 1금당 가람 배치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건립했다. 한국 최대 가람으로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수도 이전 및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가 물리칠 9적이 대상이었다. 각각의 층이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이었다. 여기에 백제와 고구려가 없는데 이것 자체가 이들을 같인 민족으로 인식하고 하나로 여겼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황룡사는 창건 후 무려 6차례나 낙뢰를 맞아 중수되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전소된 후엔 더 이상 중건되지 않고 빈터가 되었다. 분황사 모전 석탑은 현재 3층이지만 원래 7층으로 추정된다. 

 대승불교가 전래되고 슬슬 탑에서 불상으로 중심이 이동한다. 고구려 백제는 하나의 광배상에 여래상을 모시고 좌우에 보살상을 작세 배치하는 1광배 3존불이 유행했다. 고구려는 국가가 불교를 적극 지원하지 않아 불상 수가 적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백제의 상징적인 불상이다. 신라는 미륵신앙와 화랑결합으로 호국불교로 국가주관의 불교행사가 많았다. 

 7세기 신라는 경주 남산에 불상을 조성했다. 경주 남산은 전체가 화강암 골산으로 200곳의 불적이 있다. 신라는 반가사유상을 많이 제작했다. 신라의 높은 보관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낮은 보관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명작이다. 둘 다 등신대의 크기로 속이 텅 빈 중공식 주조다. 동판이 아주 얇아 주조 과정의 기포가 전혀 없어 난이도가 높다. 

 신라는 하대에 이르러 왕위쟁탈전이 벌어진다. 정치적 혼란 속 불상과 석탑은 긴장미가 사라진 매너리즘이 일어난다. 이에 반해 지방호족은 자신의 문화를 창조한다. 호족의 정신적 지주가 선종이다. 하대신라는 철불의 시기다. 철불은 이상적 절대자가 아니라 현세적 능력의 인간상이었다. 

 신라의 가람배치는 쌍탑 1금당이다. 3층의 석탑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완성되었다. 신라는 중대에는 석탑이 하대에는 승탑이 유행했다. 특히 선종에서는 승탑이 유행했다. 


라. 신라의 금속공예

 통일신라의 금속공예는 청동기에서 높은 수준이었다. 청동에 장식을 가하는 방법은 평탈기법과 입사기법이 있다. 평탈기법은 얇은 금판, 은판을 여러 가지 무늬로 오려낸 다음 옻칠로 부착한다. 입사기법은 청동표면에 음각으로 그림을 새겨 그 얖은 홈안을 가느 금실, 은실로 메우는 방법이다. 


2. 고려시대

 가, 고려의 청자

 고려청자는 고도의 기술이다. 청자는 중국에서 기원했다. 하지만 고려만이 이를 제대로 구현했고 오히려 더 발전시켰다. 10세기 중국 월주요의 청자를 다완으로 수입하여 사용하다가 5대 10국 혼란기에 무역이 끊기자 자체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10세기 후반의 초기 청자 가마인 황해도 배천 원산리 가마가 길이 40미터로 월주요식 벽돌가마다. 

 월주요식 벽돌가마는 한국 전통도기기술과 결합하여 흙가마로 변모하여 크기가 10미터로 줄어든다. 11세기 강진, 부안, 해남, 고흥, 장흥에서 고려청자가 제작된다. 고려 양인 중 잡척이 농민보다 낮은 신분으로 도자기, 먹, 종이, 소금을 생산하며 향, 소, 부곡에 거주했는데 이들이 이를 청자를 생산했다. 11세기 중국 북방청자인 요주요의 영향을 받아 같은 무늬를 틀로 찍은 압출 양각기법이 유행한다. 

 송의 서긍은 1124년 송 휘종에 고려 도경을 저술해 바치며 고려청자의 비색을 언급했다. 매병은 고려 청자의 대표적 기형으로 당대의 술병이나 고려는 꿀이나 참기름을 담기도 했다. 정병은 부처님 앞에 정수를 바치는데 사요했다. 주전자는 손잡이와 뚜껄에 고리를 다록 서로 끈으로 연결했다. 고려의 궁 만월대에는 기와에 청자기와를 사용했다.

 도자기의 미는 기형, 빛깔, 무늬의 3요소다. 12세기 고려청자는 기형, 빛깔은 최고 수준이었다. 다만 양각, 음각, 투각의 기법은 무늬효과가 좀 떨어졌다. 그래서 상감이 등장한다. 상감이전엔 백토를 묽게 하여 붓으로 무늬를 그리는 백화기법이 시도되었다. 그리고 자토를 쓴 철화기법도 사용되었다. 13세기 상감기법이 등장한다. 청자의 표현영역은 확장한다. 산화동으로 붉은 색을 가하는 동화기법, 금을 쓴 화금청자, 철분이 완전히 제거된 태토로 백자를 제작하고, 철분이 많은 안료를 쓴 철채청자, 검정색의 흑유청자가 제작된다. 

 고려백자는 철분이 거의 없고 점토와 유약으로 만들어 하얗지만 질감이 매끄럽지 않은 연질 백자다. 고려청자는 왕조와 운명을 같이 한다. 공민왕때 이미 크게 쇠퇴하고 홍건적, 왜구의 창궐로 서남해안이 초토화되어 자기 생산지가 붕괴하고 도공이 대거 이탈한다. 


나. 고려의 나전

 나전은 당에서 시작하여 신라, 일본으로 전파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칠기가 꽃을 피웠다. 송은 나전칠기의 수준이 떨어졌고 고려 나전이 독보적이었다. 고려 왕실도 나전에 공을 들였다. 목종 때 관영 공예품 제작소로 중상서를 왕실에 설치했고 훗날 공조소로 이름이 바뀌어 여말까지 존속한다. 나전칠기는 나무로 기물을 만든 다음 굵은 삼베를 바르고 그 위에 자개를 붙인 뒤 옻칠을 덧입혀 반반히 만든 것이다. 헝겊 바르기-칠하기-나전 시문-칠하기-나전 무니의 칠 벗겨내기-광배기의 과정을 거친다. 

 고려 나전의 특징은 주름질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의 뒷면을 채새한 뒤 기물 표면에 붙이는 대모기법을 사용해 붉은 주황, 노랑 빛의 다양성을 냈다. 이는 고려 고유의 기술이다. 그리고 무늬 구성에 금속선을 병행했다. 


3. 조선시대

 가. 도자기

 분청사기는 고려상감청자의 전통을 이어 15세기 중엽까지 전성기였다. 1467년 경기 광주의 국영도자기 제작소인 관요설치이전까지 활성화했다. 각 지방에 산재한 지방 가마에서 생산해 양식과 조형이 자유로웠다. 분청사기는 5가지 종류가 있다. 상감 분청, 인화분청(작은 무늬를 도장으로 만들어 찍기), 박지, 조화 분청(백토를 칠하고 양각, 음각 무늬), 철화분청(백토 분장 후 철화안료로 그림 그리기), 귀얄 담금 분청(백토를 귀얄로 그려 자국을 남기거나 그릇을 백토에 담금)이 있다.

 조선 백자는 순백에 대한 숭상이 있다. 동양3국의 도자기는 초점이 다르다. 중국은 형태, 일본은 색, 한국은 선에 중점을 둔다. 조선 백자는 명의 우수한 백자의 자극을 받고 획기적으로 발전한다. 조선은 백자 생산을 위해 전국의 백토 조사 결과 강원 양구, 경상 하동, 산청 진주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1467년 경기도 광주에 관용 백자를 생산하도록 사용원에서 분원을 설치한다. 300개소의 백자 가마터가 광주에 들어서고 가마터는 땔나무의 소모로 인해 10년을 주기로 이동한다.

 조선백자는 청화백자로 발전한다다.청화안료는 이란이 원산지로 희귀하고 회회청이라 부른다. 세조가 명을 내려 국내에서 찾아봤으나 없었고 수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 중기 철화백자는 회회청 수입이 어려워 철화로 대신하며 나타난다. 조선 중기 백자는 회색 내지 갈색을 띠다가 다시 순백색을 회복한다.  

 조선말기가 되자 도자기도 매너리즘과 청나라풍의 영향으로 백자의 기벽이 두터워지고 둔장해진다.


나, 조선의 회화

 조선은 무수한 초상화를 제작했다. 초상화는 임금의 초상 어진, 공신의 공신초상, 서원과 가문의 영당의 선비초상이 있다. 공신의 초상은 처음에는 공신각에 봉안했으나 훗날 집안에 내려 가문의 영광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초상은 외형과 정신을 같이 그려냈다. 숯으로 소묘했고 그림종이에 옮겼고, 완성된 초본을 틀에 고정시키고 비단을 덮어 씌우고 윤관선을 그려 채색했다. 

 조선초기는 유행한 산수화는 소상팔경도다. 중국 동정호 남쪽의 소수와 상수가 합쳐지는 풍광을 이른 봄과 늦은 가을에 8개 주제로 그린 그림이다. 16세기 산수화를 곁들은 계회도가 유행한다. 계는 사대부들이 친목을 위해 시와 술을 즐기며 어울린 모임이다. 조선 초중기 계회도가 100점이상이다. 계회도는 3단의 축으로 상단은 계회의 명칭, 중단은 그림, 하단은 참석자의 명단이다. 

 조선시대 회화사는 초기는 안견의 화풍, 중기는 명나라 절화화풍이 유행한다. 절화화풍은 절강성 출신 화가의 호방한 필법과 활기 넘치는 화풍이다. 산수화가 자연의 서정 관념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산수인물화다. 조선후기는 속화, 진경산수화, 문인화 3대 장르가 확립한다. 진경산수화는 소중화로 중국에 대한 동경이 사라지자 우리 자연에 대한 사랑과 자랑이 생기며 확립한다. 문인화는 그림에 화가 자신의 마음을 담아낸다는 내면적 리얼리즘의 산물이다. 

 단원과 혜원은 풍속화의 대가다. 단원은 서민과 서민의 심성을 그렸고 필치가 강하며, 채색을 절제했고 배경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반면 혜원은 양반을 주로 그려 그들의 마음을 그렸고 필치가 여리고 부드러우며 채색을 많이 했고 배경을 치밀하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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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은, 서양미술사 - 다빈치부터 피카소까지, 시대별 대표 명화로 한눈에 보는 미술의 역사
김찬용 지음 / 땡스B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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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미술 책은 볼 때마다 눈이 즐겁고 시대에 따른 흐름을 느끼는 것이 즐겁다. 예술도 인간의 산물인 만큼 그 정신의 변화를 따라가고 시대의 변화는 그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책 한 번쯤은 서양 미술사는 르네상스부터 입체주의까지를 다룬다. 과거 고전과 현대가 없는 부분이 아쉽긴 한데 아마 속편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책은 각 시기의 사조를 소개하며 대표적 예술가와 그의 작품을 보여준다. 시기를 좀 세세히 쪼갰기에 시기별 작가 수가 좀 적고, 대표작은 한개만 보여준게 아쉽긴 한데 그래도 책의 즐거움은 충분하다. 

 르네상스는 미술을 숙련공의 기술이 아닌 그 시대의 지식, 철학, 예술가 개인의 창작물로 보기 시작한 시기다. 그래서 과거와 다르게 작품에 예술가의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 등장한 예술가가 보티첼리다. 그는 종교화 중심이던 르네 상스 초기 비너스 누드를 그렸다. 이는 신성모독이었으나 이를 과감히 시도했다. 조각의 중시한 미켈란 젤로는 시스티나 천장화의 의뢰를 받아 그렸다. 흔히 아담의 창조 부분이 강조되지만 이 천장화는 빛과 어둠의 분리, 별의 창조, 땅과 바다의 분리, 아담의 창조, 하와의 창조, 원죄, 노아의 방주1,2,3의 9개 장면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직사각형의 작은 프레임을 이용해 그린 구역과 전체화면을 채운 구역을 교차하고 꺾이는 곡면에 7명의 예언자와 5 사제를 배치해 재미를 살렸다. 르네상스 시기는 3명의 천재가 빛냈다. 조각의 미켈란젤로 회화의 라파엘로 모나라지의 다빈치다. 

 르네상스 시기는 비례, 균형, 조화, 이상미가 추구되었다. 이에 반해 왜곡과 과장의 비대칭과 강렬한 색감을 강조한 사조가 매너리즘이다. 틴토레토의 낙원은 당시의 작품으로 매우 규모가 크면서 수많은 천사와 부활한 성인, 그를 따르는 추종자 50인 이상을 그려냈다. 대규모 군상이 뒤 섞인 모습으로 역동성을 준다.

 바로크는 찌그러진 진주라는 뜻으로 17-18세기 중엽의 사조다. 종교와 역사화 등 주제 표현에 강렬하고 극적인 연출을 한다. 자연스러운 묘사와 정확한 비례속에 강한 빛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키아토스쿠로 기법이 사용되었다. 당시 종교개혁으로 로마카톨릭은 이에 대응하고자 예술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래서 이 시기엔 종교적 감화를 일으키는 강렬하고 극적인 작품들이 등장한다.

 로코코는 작은 조개 장식을 의미한다. 조개껍데기 처럼 우아한 바로크라는 뜻이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유럽귀족 사회로 확산한다. 귀족 사회와 연애, 자연을 주제로 한 부드럽고 우아함이 특징이다. 바로크는 다소 진지하고 무거웠기에 귀족 사회의 사적 취향을 충족시킬 방안이 탄생의 원인이다. 앙투안 와트의 키데라 섬으로의 출항은 당시의 작품이다. 키데라 섬은 비너스의 고향으로 연인과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신고전주의는 18세기 중후반과 19세기 초에 유행한 것으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예술적 가치의 부활을 시도했다. 고고학적 정확성을 바탕으로 절제, 질서, 도덕, 공공정신을 강조한다. 합리주의 미학으로 균형과 구조, 명확한 윤곽, 입체적 형태의 완성을 중시한다. 바로크와 로코코에 반발해 계몽주의적 성격도 띈다. 나폴레옹은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자신을 국가의 영웅과 구원자로 만들려고 했으며 그래서 개선문 건설, 전쟁 약탈 예술품으로 루브루를 확장했다.

 낭만주의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등장한 것으로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창작자 자신의 감정을 적극 드러낸다. 낭만주의 풍경화는 낭만주의 사조의 하위로 인물보다는 자연에 초점을 둔다. 자연을 감정과 상상의 투사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사실주의는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시작했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표현단다. 신고전주의의 이상적 미를 거부하고, 낭만주의의 문학적이고 과장됨도 경계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 여겼으며 이는 근대 회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쿠르베는 '오르낭의 매장'을 그렸다. 이는 대형작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외조부의 평범한 장례를 그렸다. 쿠르베의 작품은 당대 아카데미의 성격에 반하는 것으로 살롱에 출품이 거부되자 40점의 자기 작품만을 갖고 전시회를 기획했다. 이는 최초의 것으로 예술가의 주체적 활동 가능성을 드러낸 혁신적 일이었다. 

 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 중심의 사조다. 실질적으로 현대 미술의 시초라 볼 수 있으며 자연의 빛과 색채, 순간적 인상을 포착한다. 사물의 본질보다는 순간적 인상이 관심사였다. 드가는 무희를 많이 그렸다. 그 자신이 부유층으로 어려서부터 오페라 하우스를 드나들며 자주 관찰한 까닭이다. 그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몰래 사진을 찍은 듯한 관찰자의 시선인데 이는 드가가 당시 등장한 카메라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에 과학적 이론과 질서를 적용하고자 했다. 광학이론 기반의 점묘법과 채도 높고 밝은 빛을 구현하는 화풍이 특징이다. 조르주 쇠라는 색의 혼합 없이고 원색점을 일정한 비율로 찍으면 관찰자가 이를 혼합색으로 인지함을 그랑자르 섬의 일요일 오후로 증명했다. 샤를 앙리는 미학이 개인의 감성이나 주관이 아닌 과학적 설명이 가능한 법칙 체계라 인식했다. 그는 감정이 수학적이고 물리적으로 예측 가능하다 보았다. 상승곡선은 고양감과 희망, 생명력, 하강 곡선은 침체, 우울, 피로를 수평선은 안정감과 평온, 수직선은 장엄함과 긴장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후기 인상주의는 1880년부터 20세기 초로 인상주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다. 인상주의 색채, 표현기법, 시대정신은 계승했으나 더 깊은 감정, 상징, 구조, 형태 등을 강조했다. 고갱은 종합주의를 표현했는데 이는 인상주의 처럼 가시적 경험 포착 외에도 눈에 보이는 형태와 색채에 화가가 느끼는 감정과 기억을 종합하여 표현하는 방식이다. 세잔은 매번 달라지는 순가보다는 진정은 지금 이순간을 포착하고자 하였고 이런 시도는 관찰자와 물체의 움직임이 적은 정물화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세잔의 사과가 넘쳐나는 이유다.

 표현주의와 상징주의는 19-20세기 초에 등장했다. 개인의 내면 세계와 감정, 상징적 의미를 중시했다. 표현주의는 객관적 현실묘사보다는 주관적 감정과 내면의 고통, 감동 같은 심리를 강렬히 묘사한다. 상징주의는 현실의 직접 묘사보다 상징과 은유를 통해 꿈과 정신, 죽음, 종교, 신화등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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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 - 빛으로 가득 찬 델프트의 작은 방 클래식 클라우드 21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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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험 상 한국 사람들은 서양의 그림 중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다빈치의 '모나리자',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를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유명해서일까, 아니면 언급 빈도가 높아서일까, 아니면 알기가 쉬워서일까. 하여튼 세 작품은 가장 인기가 높아 보이며 웬만한 한국인들도 알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고흐나 다빈치가 위 작품의 작가인건 잘 알고 있지만 의외로 진주 귀고리 소녀는 잘 알아도 정작 그 창작자인 페르메이르는 대개 모른다. 아무래도 페르메이르가 다른 둘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탓일 것이다.

 책은 그런 페르메이르를 다룬다. 그를 알려면 먼저 당시 네덜란드를 알아야 한다. 네덜란드가 위치한 지역은 플랑드르라 불리는 저지대로 유럽 대륙의 3개 강인 라인 강, 마스 강, 스헬더 강이 북해로 들어가며 만든 삼각주다. 그래서 땅이 낮고, 습지가 많고 매우 습하며, 퇴적 지역이라 영양은 풍부하다. 즉, 농사가 잘 될 가능성은 높으나 땅이 침수가 잘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정착을 위해 인위적 노력이 필요하다보니 11세기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풍차는 이런 저지대의 물을 퍼내기 위한 자연동력 장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힘들여 좁을 땅을 개간했기에 각자의 사유재산 개념이 일찍이 정착했으며, 큰 제방이나 댐의 공사엔 대규모 협력이 필요했기에 협력에 대한 의지도 강하다. 네덜란드는 이렇게 신경작지이다보니 유럽에서 봉건제가 정착하지 못했고, 귀족이 소유한 땅도 매우 적었다.

 이런 나라다 보니 실용적 분위기가 강했다. 남부인 벨기에 지역은 일찍이 사치품과 작물교역으로 부유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지역은 청어 교역이 중심이어서 가난했고, 부를 찾아 무역을 펼쳐나갔다. 이들은 노동을 중시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런 그들에게 칼뱅의 신교가 종교로 적합했다. 문제는 이 네덜란드 지역을 합스부르크가가 지배했으며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광신적 구교도였다는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에 강한 세금을 물리고 자국의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을 도입했다. 1566년 이에 대한 반발로 곳곳에서 성상파괴가 일어났고 알바공작의 1만 군대가 파견되어 전쟁이 일어난다. 무려 80년 전쟁으로 네덜란드는 1648년에야 독립한다. 

 네덜란드는 부유해졌고 동인도회사도 설립한다. 동인도회사의 수익을 나누기 위해 세계최초의 주식거래서도 설립한다. 이런 부를 바탕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세분화한 직업을 가졌고 이런 직업의 사람들을 그리는 것이 유행했다. 그림을 그리면 의뢰자들이 모두 동등히 나왔고 그에 따라 작업비를 부담했다. 그리고 이런 풍부한 수요를 바탕으로 무려 당시 700명의 화가가 활동하며 정물화, 초상화, 풍속화 등을 그렸다. 페르메이르는 이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당시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연간 100개 정도의 작품을 그렸지만 페르메이르는 고작 2-3개를 작업했다. 속도가 느렸고 마르는데 오래 걸리는 호두기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35개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초기 여러 그림을 그렸지만 결국 실내 인물화가 그의 전공 비슷하게 된다. 당시 화가들의 경쟁을 치열해서 자신들이 잘 그리는 부분에 특화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페르메이르도 그래 보인다.

 페르메이르는 작품에서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우선 언급한 것처럼 실내 모습을 그렸다. 방의 모습은 하나같이 다 비슷한데 그의 작업실을 모티브로 한 경우가 많아 보인다. 실내에는 거의 십중팔구 창문이 왼편에 존재하여 빛의 효과를 드러내고, 배경이 되는 방의 벽 부분에는 유독 지도나 그림이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림은 그 내용으로 작품 전체의 분위기나 주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림에 유독 여인이 많이 등장한다. 남자가 등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지리학자'와 '천문학자' 정도다. 그리고 노란색과 푸른색을 선호했다. 이 중 푸른색은 고가의 라피스라줄리를 사용해서 경제적 부담을 줬다. 그는 여성들의 장신구로 진주를 선호했다. 그래서 진주귀고리 소녀의 귀고리가 돋보였고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다. 또한 악기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배우고 있거나 가르치는 장면들 그렸다. 등장인물들은 무언가에 열중하여 앞을 잘 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도 독특한 점이다. 

 그의 작품 중 최고로 여겨지는 진주 귀고리 소녀는 모나리자처럼 생각보다 크기가 작다. 이 그림은 초상화가 아니라 트로니로 구분되는데 초상화는 인물의 실제 모습이나 안정적 표정이나 상태를 그려내는 반면 트로니는 순간의 모습이나 특징, 표정등을 잡아내는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진주 귀고리 소녀는 소녀가 무슬림이 아님에도 터번을 착용하고 있고 입을 살짝 벌리고 옆을 살짝 돌아보는 모습은 초상화로 적합하지 않다. 진주귀고리 소녀에서 페르메이르는 그림의 윤곽을 정확하게 그리지 않았고 생동감 있는 입술과 눈빛, 귀고리를 강조하며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책을 보며 알았는데 연구결과 그냥 검은색인 진주귀고리 소녀의 배경은 사실 녹색 커튼임이 밝혀졌다. 세월이 오래 지나다 보니 변색된 것이다.  

 페르메이르는 말년이 불행했다. 부인 카트리나와 아이 17을 낳아 11명이 생존한 것인데 당시로선 과다한 생존률이어서 가계에 부담이 컸다. 그리고 그는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느렸지만 꾸준히 그의 그림을 고가로 구입해주는 후원자가 있었는데 그가 사망한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며 운하를 파괴하는 수법을 썼는데 그 과정에서 집안의 토지가 수몰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부업인 숙박업도 잘 되지 않았고, 그림도 수요가 줄어버렸다.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해 빚에 시달리다 사망한다. 페르메이르의 후원자가 수집한 그림들도 그 후계자들이 모두 사망하여 경매에 붙여졌다. 때문에 페르메이르는 아주 유명하진 않았음에도 그림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다. 그의 그림은 18세기부터 주목받기 시작하여 차츰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평생 네덜란드의 도시 델프트를 떠나지 않았는데 그가 그린 델프트 풍겨도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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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1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르메이르 그림에는 별거 아닌 생활이 빛나는 순간으로 변하는 마법이 있어 좋아해요. 페르메이르가 가장으로서 열심히 생계를 꾸려간건 참 좋은데 그런다고 그림 그릴 시간도 없이 고군분투했던건 참 안타깝더라구요

닷슈 2025-08-12 21:27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잔잔한 맛이 페르메이르 그림엔 정말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나는 국악 수업 - 40가지 주제로 읽는 국악 인문학 지식 벽돌
이동희 지음 / 초봄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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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대중음악은 세계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자국의 음악이 그 나라를 넘어 세계에서 이 정도로 흥행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더구나 우린 변방인 아시아가 아닌가. 그치만 그 이름은 한국음악이 아닌 K pop이다. 글자 그대로 외국, 특히 미국음악을 들여와 우리의 색을 입힌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진정한 한국의 음악은 국악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국음악을 단순히 음악이라 하지 않고 국악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앞에 별도의 지칭이 붙었다는 것은 이미 즐기고 듣는 생활음악의 자리를 서양음악에 내주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은 그 외에도 자국의 언어 교과를 국어, 역사는 국사라고 하는 좀 이상한 면이 있다. 

 한국인은 대개 국악을 즐기지 않는다. 잘 알지도 못하고 대중음악이 아니며, 학교에서 딱히 배운적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교육과정이 개정되어 음악교과의 거의 절반을 국악이 차지한다. 하지만 개정 이전 교육과정을 경험한 기성세대는 음악시간에 국악을 접한 비중이 10-20%정도에 불과했었다. 

 국악은 한국인의 현대 정서와 다르게 좀 많이 느리다. 물론 빠른 곡도 있지만 대개 확실히 서양음악에 비해 느리다. 이는 서양음악이 빠르기의 기준을 심박수로 한 것에 비해 국악은 호흡수로 하기 때문이다. 심박보단 호흡이 확실히 느리다. 여기에 국악은 궁중, 양반 계층을 중심으로 발달하다 보니 그들의 유교문화가 반영되어 느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국악을 일상생활에 잘 활용한 예가 서울지하철의 환승음악이다. 기존엔 서양음악과 다른 음악을 사용하다 2009년부터 국악곡 '얼씨구야'를 음악으로 사용했다. 다들 한 번은 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14년만에 곡을 '풍년가'로 바꾸었다. 

 국악은 원래 작곡가가 없다. 그냥 연주자들이 다양하게 변주하는 과정에서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중반부터 국악도 작곡가가 출현한다. 그리고 음악도 다양화한다. 

 국악은 원래 양반과 중인이 즐기는 정악과 서민 중심의 민속악으로 구분한다. 정악은 양반, 중인이 모여 취미로 음악, 시낭송, 서예, 그림, 바둑 등을 즐기며 듣는 풍류악이다. 민속악은 서민 중심으로 생성되고 향유한 음악이다. 대표 장르가 판소리이며 숙종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판소리는 12마당이었지만 치정극과 복수 이야기를 덜어내고 삼각오륜에 부합하는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흥보가만 전해진다. 없어진 이야기들은 모두 재밌고, 양반을 비판하며, 성적인 면이 많은데 무척 아쉽다. 민속악엔 기악독주곡인 산조, 사물놀이, 시나위 등이 있다. 현재 국악은 여기에 창작국악이 더해져 지금은 총 3장르가 된다. 

 국악기를 만드는 재료는 8가지다. 대한제국의 백과사전은 증보문헌비고는 이를 팔음이라 칭한다. 쇠, 돌, 명주실, 대나무, 바가지, 흙, 가죽, 나무로 각각 금부, 석부, 사부, 죽구, 포부, 토부, 혁부, 목부라 한다. 금부악기는 편종, 특종, 방향, 징, 꽹과리, 나발이 있다. 편종은 가장 낮은 황종부터 반음씩 총 16음계고 특종은 황종음 하나만을 내는 큰 종이 매달린 악기다. 방향은 16개의 건반이 있는 큰 실로폰 같은 악기다. 석부악기는 편경과 특경인데 편종, 특종과 같은 방식으로 돌로 만든 차이다. 사부악기는 가야금, 거문고, 해금, 아쟁, 비파가 있다. 죽부는 대금, 중금, 소금이 있고 리드로 부는 향피리, 당피리, 세피리와 단소, 풍소가 있다. 포부는 생황이 있는데 이것은 국악기 중 유일하게 화음연주가 가능하다. 토부는 훈과 부가 있는데 훈은 오카리나와 비슷하고, 부는 큰 질 그릇을 내서 채로 쳐서 소리를 내는 악기다. 혁부믄 장구와 북, 소고가 있다. 목부는 박과 축, 어, 태평소가 있다. 축은 제사의 시작에 어는 제사의 끝을 알리는 악기다. 

 국악의 시작은 당연히 민족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의 왕산악은 중국의 칠현금을 참고하여 6개 줄의 거문고를 만든다. 백제는 금동대향로에 5명의 악사가 등장한다. 유명한 노래 정읍사는 수제천의 전신이다. 신라는 진흥왕대에 가야의 우륵을 통해 가야금을 만든다. 12줄 악기로 왕은 우륵에게 계고, 법지, 만덕의 세 제자를 붙여주고 이들은 각각 가야금과 노래, 춤을 배운다. 하지만 가야와 신라의 정서가 달라서인지 이 세 제자는 스승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음악을 변형한다. 신라는 국가음악기관은 음성서를 설립하고 삼현(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삼죽(대금, 중금, 소금)의 악기를 편성한다. 그리고 나당연합군 시절 당에서 당악이 유래하며 자신들의 음악을 향악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발해는 왕립음악기관인 태상시가 있었고, 연해주에서는 유목민의 악기인 바르간이 출토된 걸로 보아 초원의 음악도 수용한 것 같다. 고려는 송을 통해 교방악과 사악이라는 음악이 유래하여 당악에 편입된다. 송휘종은 1116년에 대규모 아악을 보내주었는데 이 때부터 우리 음악이 당악, 아악, 향악으로 구분된다. 고려는 궁중무용인 중재가 유행했고, 청산별곡, 서경별곡, 가시리, 쌍희곡, 사모곡이 유행했다. 고려는 궁중음악을 관장한 대악서, 공인의 실질적 음악 연습과 교육을 하는 관현방, 종묘에서 노래와 연주를 익히는 아악서가 있었다. 조선전기는 외국의 영향이 없는 독자적 음악의 발전시기다. 세종은 정간보를 창안했고, 새 악곡을 창작하고 아악을 정비했다. 세조는 궁중음악기관 5곳을 통폐합하여 장악원을 만들고 종묘제례악의 기틀을 마련하고 아버지가 만든 곡들은 여기에 편입시켰다. 성종은 최고의 음악 교본은 악학궤범을 완성한다. 양난으로 조선은 많은 악기를 상실한다. 그리고 음악이 중심이 민간으로 이동한다. 조선 후기에는 성악곡이 기악곡화하는데 염니락, 영산회상, 낙양춘, 사관풍류, 횡성곡 등이 그렇다. 그리고 악곡의 속도가 빨리지고 고음화한다. 개화기는 판소리를 오페라처럼 만든 1인 1역의 창극이 크게 유행한다. 일제강점기 정악은 이왕직아악부로 명맥만 유지했고 민속악은 민중자각의 모태가 되어 크게 발전한다. 1951년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고, 54년 대학에 국악과가 신설되었으며 62년 중요무형문화재법에 따라 64년 종묘제례악이 1호로 지정된다. 그리고 1994년이 국악의 해로 지정된다. 

 조선 세종은 음의 기준을 정한다. 황해도 해주의 곡식 기장의 길이를 기준으로 하여 국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황종 음을 대는 대나무 율관을 제작한다. 이를 근거로 주선율을 연주하는 편종과 편경을 제작한다. 세종은 전반기엔 아악, 후반기는 향악에 집중한다. 여민락, 취풍형을 작곡하고 종묘제례악도 작곡한다. 세종은 아악이 궁중음악이므로 왕과 왕비의 제사인 종묘제례악에 당연히 향악을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학문의 덕을 기리는 보태평과 군사적 업적을 기리는 정대업을 작곡한다. 하지만 반대가 심해 당대엔 어려웠고 그 아들인 세조가 이를 종묘제례악으로 지정한다. 

 한국의 아리랑은 본래 강원도 정선을 비롯하여 영월과 평창 등 태백산맥 일대에 분포한 메나리조의 아라리에서 유래했다. 아리랑의 의미는 밀양의 전설적 인물 '아랑'이라는 설, 신라왕비 알영비라는 설, 긴(아리) 강(라)이라는 의미라는 설, 아리따운 임을 의미한다는 설, 나의 이치를 찾는다는 설등 다양하다. 

 사물놀이는 풍물놀이 중 판굿을 극대화한 음악이다. 1978년 김덕수와 금용배를 비롯한 젊은 20대 예인들이 완성했다. 단기간 폭발적 인기를 얻었으며 리듬만으로 하나의 장르를 완성한 매우 독특한 음악이다. 사물놀이는 꽹과리, 장구, 북, 징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각각 별, 인간, 달, 해를 상징하고 소리는 번개, 비, 구름, 바람에 비유된다. 

 민속악 중 유일한 기악 합주곡이 시나위다. 시나위는 전라대 일대의 무속음악의 반주가 독립하여 발전한 것으로 재즈의 즉흥성을 갖고 있다. 

 민요는 지역별로 독특한 음계와 발성법을 갖고 이를 토리라고 한다. 경기, 충청일부의 음악은 경토리다. 맑고 경쾌하며 음악이 분명하고 빛깔이 부드럽다. 굿거리 장단과 세마치 장단을 쓴다. 전라도는 육자배기 토리다. 극적이고 굵은 목을 눌러내는 특유의 창법이 있다. 떠는 목, 꺽는 목이 있으며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장단을 쓴다. 평안도와 황해도는 수심가토리다. 하늘하늘한 소리와 큰소리로 부르다가 콧소리를 낸다. 함경도와 경상도는 메나리토다. 경상도는 장단이 빠른 반면 함경도는 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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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그림과 편지들 - 세상에서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내 동생 테오에게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이승재 옮김 / 더모던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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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고흐는 그 유명세에 비해 살아 생전 단 한 점의 그림 밖에 팔지 못했다. 물론 주변의 예술가나 지인들은 그의 그림을 꽤 원하기도 하고 얻어가기도 했지만 세속적 인기는 없었던 셈이다. 판매에 성공한 유일한 그림은 '붉은 포도밭'이다. 그의 대표작은 아닌 셈이다.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반 고흐만이 아니다. 당시의 '인상주의' 화풍은 지금이야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지만 당시엔 매우 새로운 시도로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시대를 앞서간 셈이다. 고흐는 그의 동생 테오와 상당히 많은 서신을 주고 받았다. 그래서 다른 화가들에 비해 우리는 그의 실존적 어려움과 고민, 인간 됨에 대해 다소 살펴볼 수 있다. 

 동생 테오는 평소 심장에 지병을 갖고 있었는데 형의 죽음이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고흐가 죽고나서 고작 반 년만에 자녀와 아내를 두고 죽고 만다. 고흐의 동생 테오의 서신은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던 테오의 아내가 대량으로 발견하고 이에 큰 감명을 받고 세상에 공개하며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고흐의 집안은 괜찮은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목회자였고 큰 아버지는 유럽 여기저기에 지점을 둔 화랑을 하고 있었다. 고흐의 아버지는 고흐를 목회자로 만들거나 세속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여러 노력을 하고 학교에도 보내봤지만 민감하고 감수성이 있는 고흐의 영혼은 그것에 걸맞지 않았다. 고흐는 큰 아버지가 운영하던 구필화랑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인상주의 화풍을 접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27살이라는 지금으로 봐도 매우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에 들어선다.

 결국 화가가 된 그를 집안에서는 어떻게든 정착을 시키기 위해 안트베르펜의 미술학교로 보내기도 했으나 고흐가 전형적 교육과정과 그림 그리는 방법을 거부하면서 이조차도 무산된다. 동생 테오 역시 집안의 화랑을 물려받아 일을 한다. 그리고 테오는 제법 돈을 벌었는데 이것이 고흐의 물질적 기반이 된다.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돈이 아니었다면 평생 그림을 한 점 밖에 팔지 못하는 비인기 아마추어 작가인 고흐가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남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재 세계인은 고흐의 작품에 대해 동생 테오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빚은 무엇보다도 고흐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앞 부분은 항상 이전에 돈을 보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염치없게도 다시 돈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점철된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이 점점 발전하고 있으며 새로운 시도와 노력으로 곧 그림이 팔릴 것이라는 망상에 가까운 기대도 보인다. 

 고흐는 특유의 임파스토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그림에 유화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형식으로 고흐는 색을 섞기도 했지만 혼합하려는 두 색을 가깝게 두텁게 칠해 혼합효과를 내기도 했다. 임파스토 기법으로 그의 그림은 강한 질감과 두터운 느낌, 강렬한 색조, 깊은 공간감과 입체감을 준다. 하지만 이 기법은 필연적으로 물감을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었고 고흐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했다. 그럼에도 고흐는 이 기법을 고수하고 대부분의 작품이 이 방법을 사용한다. 

 고흐는 자신처럼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는 작가들을 위한 하나의 예술 공동체를 구상했다. 그들이 한 장소에 모여 같이 작업하고, 게중에 운 좋고 당대의 인정을 받는 작가가 얻는 수익을 어려움을 겪는 작가를 위해 사용하고 그런 어려움을 겪는 작가가 성장해 다시 공동체에 기여하는 그런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구상도 망상에 가까워 친구인 고갱 하나를 영입하는데도 실패한다. 고갱도 고흐 만큼은 아니지만 당시에 그림이 잘 팔리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는데 동생 테오의 경제적 유인책으로 고흐와 합류했다가 고흐의 민감함과 예술적 지향성의 다름. 그리고 프랑스 아를에 대한 실망으로 가까운 시일에 고흐를 떠나버린다.

 고흐는 고갱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동생의 결혼으로 경제적 지원이 감소하거나 끊어질 것에 대한 염려로 상당한 정신적 불안을 보인다. 지역 주민과 집주인은 그런 고흐를 정신병자로 여겼고, 그는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모처럼 꾸며 놓고 오래도록 그림 작업을 했던 아를의 하숙방에서도 쫓겨난다. 고흐는 잠시 좋아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병원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바깥에서 총상을 입는다. 그는 처음엔 괜찮은 듯 보였으나 갑작스레 상황이 악화되어 이틀 만에 사망하고 만다.  

 고흐의 삶은 전체적으로 매우 불행했다. 아버지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림을 그린 사촌형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으며 동생 테오조차 형의 그림이 팔릴만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0년의 시간을 그리며 단 한 점의 그림도 팔리지 않았으니 형에 대한 애정과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 쳐도 충분히 그럴만하다. 여기에 동시대의 예술가들 역시 그의 그림에 주목하지 않았다. 연애사도 불운해 고백하는 사람마다 집안의 반대, 혹은 이미 연인이 있거나, 아니면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 이런 모든 악조건에도 꾸준히 그림을 그려낸게 그에겐 하나의 해방구이자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지금 그의 그림 하나하나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매우 비싸게 팔리는 현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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