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어떻게 ‘일본’이 되었나 - 새로운 세대의 일본 문화 디코딩
김유영 지음 / 브라운출판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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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와 일본, 중국은 지리적으로 인접하나 매우 다르다. 그리고 여기에는 지리적 환경과 그것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빚어낸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인문적 요소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책은 일본인의 정신과 사회문화적 요인을 빚어낸 지리, 역사문화적 요소를 깊고 흥미롭게 잘 풀어낸다.


1. 일본인은 청결하다?

 한국인은 일본인이 매우 청결하고 궁중도덕 의식이 높다고 여긴다. 지금은 우리도 상당히 깨끗해져 그런 의식이 좀 옅어졌으나 과거에는 상당했다. 아마 지금은 중국인이 한국인과 일본인을 그리 여기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를 일본의 민도라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한국의 경우처럼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일본은 도쿄올림픽 이전 공중도덕과 거리의 청결도가 엉망이었다. 1950-60년대 길거리를 쓰레기로 가득했고, 지하철이나 수도권행 기차는 새치기에, 먼저타기 등등 공중도덕 의식이 영 엉망이었다. 이런 일본이 바뀐 것은 우리와 같다. 올림픽이다. 일본은 1964년 동경올림픽을 계기로 대대적인 도시환경미화와 공중도덕 의식 캠페인을 벌이며 이것이 먹힌다. 공공장소에 쓰레기통을 만든 것도 놀랍게도 이때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대대적 거리 미화와 공중도덕 함양 캠페인이 이뤄졌다. 애국주의, 민족주의와 결합행 강한 압박으로 이것이 사회에 자리잡았다. 결국 일본과 우리 사이엔 개발의 올림픽이라는 계기의 시간차만 있었을 분이다. 중국도 모르긴 몰라도 아마 2008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공중도덕 민도라는 것이 많이 올라가지 않았을까 싶다.


2.안과 밖이 다른 이중성

 일본인의 행동을 지배하는 강한 두 축이 있다. 다테사회라고 불리는 수직 사회의 위계질서와 동조압력은 우치와 소토로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하는 성향이다. 일본은 수평적 요소인 자격보다는 수직적 요소인 인간관계가 자신을 규정하는 핵심원리다. 그래서 일본 사회는 독특한 패션 문화와 서브컬쳐 등 강한 개성을 드러내고 허용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상 매우 보수적이고 수직적 사회다.

 그래서 일본 만화나, 드라마, 영화에서 머리는 원색으로 물들이고 놀고 방탕한 주인공들도 웬지 가업을 이끌게 되거나 취업을 하게 되거나 사회로 진출하면 놀랍게 머리를 깎고 검게 만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실제 사회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한국도 다소 그런 경향이 있지만 일본에 비할바는 아니다.

 이는 강한 위계와 강한 동조압력 때문이다. 일본의 우치는 내집단으로 가족, 회사, 동료, 동창이다. 그리고 소토는 외집단으로 고객, 타사직원, 타인이다. 일본은 극진한 예의, 오모테나시 문화는 소토를 대함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외부를 존중하기보다는 그들과의 마찰을 피해 내부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정해진 형식에 맞는 진중함을 보인다. 하지만 소토라도 우리 내부를 위협할만한 것이 아닌 만만한 대상은 극진한 예우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만만한 어린 아이나, 만만한 국력의 외국인에 대해서는 갑질과 무시가 자행된다. 

 일본어에서 주다는 아게루다. 우치에서 우치, 우치에서 소토, 소토에서 소토간에는 아게루라는 동사를 쓰지만 유독 소토에서 우치는 쿠레루라는 다른 표현을 쓴다. 

 일본이 이렇게 된데는 섬이라는 지정학적 요건이 크다. 일본은 과거부터 동북아 문명의 종착지로 가장 문명이 들어오는 시점이 늦었다. 그리고 중국과는 멀리 떨어져있고 한반도는 일본보다 작은데다 중국과의 대결에 나라를 지키는데 급급해 삼국시대 외에는 일본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어찌보면 막강한 대륙 및 북방세력을 한반도가 막아준 꼴이다. 이러다보니 일본이 이 치열한 동북아에서 겪은 외침이란게 13시 여몽연합군의 실패한 정벌이 고작이다. 그래서 외부충격이 역사상 페리 제독 이에는 사실상 없었고 이로 인해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와 지배층의 전면적 교체도 없었다. 

 그 상징이 일본의 덴노다. 만세일계라 할 정도로 지배구조가 변하지 않는다는 강고한 역사적 경험이 있기에 기존 위계질서가 철저히 내면화 되어 있다. 

 여기에 도쿠가와 막부의 봉건제가 이를 더욱 강화했다. 막부는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반란과 하극상을 막기 위해 사회 전체를 엄격한 위계구조로 만들었다. 사농공상의 신분제로 사무라이, 농민, 공인, 상인의 계급이 철저했다. 그리고 지방 다이묘 통제를 위해 매우 정교한 통치시스템을 고안했으니 그것이 참근교대다. 이는 다이묘가 격년으로 자신의 영지와 막부가 있는 에도를 오가며 거주하는 것이다. 이는 다이묘에 경제적 부담을 지우고 그 처자식을 에도에 사실상 인질로 잡아두는 제도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다이묘들에겐 이 참근교대의 규모가 자신의 세를 과시하는 장이 되어 어처구니 없게도 막부는 참근교대 인원을 제한하는 법까지 제정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강고한 신분체계가 260년간 지속되다보니 일본 사회는 상하관계가 생존의 제 1원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변하지 않는 사회의 수직체계와 자신의 소속의 강고함이 내부 집단에서의 수직체계를 고수하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방향으로 고착한 것이다.

 일본의 집단주의는 때로는 상당히 잔혹한 방향으로 작동한다. 막부는 5가구를 하나의 단위로 몪눈 고닌구미를 시행했는데 이는 상호감시와 연대책임의 원리다. 납세, 범죄, 종교 문제등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연대책임이 발생한다. 이는 매우 잔혹한 처벌이었기에 사람들은 자발적 내부통제를 강화했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의 집단은 현재의 집단 평화를 깨는 자에게 매우 가혹하다. 코로나 19 요코하마항에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가 정박하지 못하고 연안을 겉돌았다. 코로나 19 집단 감염이 선내에 창궐했기 때문인데 당시 의료진은 격리된 배안에서 필사의 사투를 벌였다. 이중 한 간호사가 감염되었는데 그 공로와 노고에도 그는 지역사회에서 큰 비난을 받았다. 가족이 따돌림 받았음도 물론이다.

 코로나 19기간 일본 사회에서는 일종의 자경단 같은 것이 존재했는데, 외부인이나 외부 차량 번호가 발견되면 그 차량에 돌아가라는 욕설이나 심지어 타이어 펑크, 사이드 미러 파괴등이 자행되었다. 고닌구미의 현대적 재현인 셈이다. 

 일본 사회에서 집단주의는 평소에는 질서와 조화로 작동하지만 이처럼 위기시 자신들의 집단 보호를 위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이나 .위해를 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과도하고 가혹하며 매우 배타적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지역에 대단한 살인자라도 발생하면 무관한 그 가족을 공격하고 집등을 테러하며, 집에 살인자의 집이라는 구호등을 붙이는 일이 자행되는 것이다. 

 일본의 내집단에 대한 강박은 국기 스모에서도 드러난다. 스모에서 이기는 방법은 다소 특이하게도 상대를 눕히거나 때려 제압하는 것이 아닌 경기장에서 밀어내는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을 내집단에서 밀어내는 것을 상징한다. 즉, 내집단에서 밀려나는 것이 패배인 것이다. 

 이러한 동조압력은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억압하고 사회 전체를 경직되게 만든다. 특히 사회 전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브레이크는 사실상 사라지고 엑셀만 존재한다. 군국주의 일본이 딱 그러했다.

 이는 일본인의 도덕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국인의 도덕에는 성리학적 가치관이 깊게 자리한다. 인간으로 지켜야할 도리가 마땅히 있고, 이런 도덕률은 절대적인 윤리로 외부 시선이나 상황에 따라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개인의 내면에 확고히 자리하며 그래서 한국인에겐 지조 있는 행동이 중요하다. 그래서 부정을 저지르면 깊은 죄의식을 느끼고 반성과 참회, 자신의 양심을 회복하려 한다. 반면 일본은 상대적의적 도덕이다. 이들은 도덕의 기준점이 내가 아니고 타인이다. 이는 집단에서의 소속과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생존에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수치문화가 발달했다. 개인이 부정을 저지르면 내면적 참회보다는 행동, 성과로 타인에게 뭔가를 보여야 한다. 그래서 사회적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집중한다. 그리고 이게 불가능하다 판단되면 그래도 외부에 자신의 결의를 보여야 하며 그것이 극단적 할복이다.


3. 개성적 문화의 근원

 이런 강직함에도 일본엔 세계인을 사로잡은 독특한 패션, 만화, 게임, 음악, 영화 등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순되 보이는 이런 면은 사실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막부는 사회를 엄격한 위계질서에 두었음에도 영리하게도 숨통을 트일 해방구는 마련해놨다. 그것이 문화 예술과 유흥이다. 마치 오늘날 독재정권들이 잘 써먹는 3S 정책과 유사하다. 

 계급은 통제되지만 사람들은 계급안에서의 상승과 자아실현은 만끽할 수 있었다. 유흥과 예술이 자아실현의 해방구였던 것이다. 막부시절 행정권이 미치지 못한 강변지역에 모여사는 이들이 가와라모노다. 이들은 도축, 가죽세공, 청소 등 부정한 일에 종사했다. 그리고 이들이 예능과 공연 등 유흥에 종사했다. 천민은 엄격한 규범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예술에 두각을 나타내기 좋았다. 그래서 이 계급에서 유명 가부키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출판 역시 소재가 다양했다. 폭력적이고 기괴한 소설이 많았고 노골적인 성행위가 묘사된 것도 많았다.  

 일본의 미의식은 각 시대의 지배층과 연관한다. 헤이안시대 귀족은 문학, 중세 무사는 선불교, 에도시대 상인 죠닌은 유흥문화가 중심이다. 헤이안의 미의식은 모노노아와레다. 모노는 사물이나 인간 세상이며, 아와레는 마음 깊은 곳의 감정이나 정서다. 덧없이 피고지는 벚꽃의 애틋함, 저무는 달의 쓸쓸함, 무상을 인지하는 애상적 아름다움이 모노노아와레다. 무사계급은 선불교다. 유겐은 직접 드러내지 않고 그윽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이다. 화려한 외면이 아닌 사물의 감춰진 본질이다. 이는 모노노아와레를 넘어 그 감정을 마음에 삭히고 절제하여 더 깊고 상징적인 정취를 표현한다. 유겐 미학의 정점은 14세기 전통가면극 노다. 노는 배우가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극도로 절제도니 움직임과 상징적 동작만으로 깊은 슬픔과 고뇌를 표현한다.

 막부는 공창으로 유곽을 운영했다. 이는 풍기문란을 통제하고, 유곽에서 자금을 징세하고, 무사의 다툼 방지와 사회 불안의 해소를 위해서였다. 에도의 요시와라, 교토의 시마바라, 오사카의 신마치가 3대 유곽이다. 유곽은 담을 높게 두르고 해자까지 둘러 도시와 분리된 별도의 공간이었다. 유곽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에서만큼은 에도의 엄격한 신분제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무라이는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는 두 자루의 칼을 반납하서야 유곽 입장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유곽에서는 개인의 가치는 그가 가진 돈과 멋이었다. 여기서 빛을 발하는 것은 상인 죠닌이었다. 그들이 이 두 개를 가졌기 때문이다. 유곽에는 유조라는 유녀가 있었다. 그리고 이 유조의 시중을 드는 소녀가 가부조다. 미모, 교양, 기예를 모두 갖춘 최상급 유녀가 오이란 또는 다유라 불렸다. 아무리 손님이 대단해도 이들은 그 손님을 거부할 권한이 있었다. 

 유곽의 미의식은 스이와 츠다. 츠는 유곽의 규칙, 풍속, 인간 관계를 꿰뚫은 통달의 경지다. 그리소 스이는 츠를 갖췄음에도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절제와 세련된 태도다. 


4. 일본의 성문화

 일본의 개방적 성문화는 이런 유곽도 있지만 건국신화부터 심상치 않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남신 이자나기와 여신 이자나미의 성교로 시작한다. 이들이 일본을 구성하는 섬들을 낳는다. 그래서 일본인에게는 다른 민족과는 달리 성이 죄악이 아닌 신성하고 강력한 힘의 원천으로 자리한다. 또한 건국 신화에서 나타나는 실패의 원인 역시 도덕적 타락이나 원죄가 아닌 단순 절차상의 오류다. 이는 성에 대한 긍정적, 자연주의적 인식의 기반이었다. 

 일본은 과거 여성의 신분이 남성에 비해 낮지 않았고, 자유와 평등을 바탕으로 이혼율도 높게 나타났다. 이것이 변한 것은 메이지 시대다. 메이지 유신 후 메이지 민법은 가장인 고슈에 절대적 권한을 부여한다. 아내를 무능력자로 규정하여 남편 동의 없이는 재산 처분, 계약, 소송등 법률행위를 못하게 만들었고, 아내의 간통은 형사처벌 대상이나 남편의 간통은 상대가 유부녀인 경우에만 문제가 되었고, 친권을 남성에게만 부여했다. 이런 차별은 미군정때가 되어서야 법적으로 해소되었다.

 일본은 성인 비디오 AV의 천국이다. 이는 1980년 VCR이 보급되며 산업으로 성장하였다. 놀랍게도 다른 나라와는 달리 AV배우는 일본에서 스타가 되어 아이돌과 비슷한 인기를 누린다. 그래서 상당수 여성이 적극적으로 이 직업에 진출했을 거란 생각이 들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기만적 스카우트와 심리적 압박으로 원치않는 촬영을 강요당하며 업계에 입문한다. 대부분 길거리 캐스팅으로 처음에는 아이돌 데뷔를 약속하짐나 노출이 심한 촬영을 계약을 빌미로 강요하며 차츰 수위를 높이는 식이다. 이런 피해는 오래되었음에도 공론화 되지 않다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과 지원단체의 노력으로 2022년에서야  AV출연 피해 방지 구제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기모노는 여성이 입는 옷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이는 메이지 정부와 서구오리엔탈리즘의 합작이다. 기모노는 원래 남여가 모두 입는 일본의 전통 옷이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1871년 일본식 상투와 칼의 휴대를 금지하고 서구식 근대 국가를 표방한다. 그리고 남성 관료와 군인에 서양 복식을 입혔는데 계급과 훈장이 드러나며 그 정점에 있는 덴노가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근대식 복식의 변화대상은 남성 뿐이었다. 여성은 심지어 왕세자비 마저 기모노를 입었다. 

 메이지 정부는 여성이 근대적 활동을 하는 양장을 입은 여성이기보다는 기모노를 입고 전통적 가치관을 지키는 수동적 존재이길 원했다. 왕실의 이런 이미지는 국가행사와 의례, 홍보사진, 우키요에를 바탕으로 널리 퍼졌다. 대외적으로도 해외박람회, 선물, 기념 엽서 등에 다양한 전시와 미디어에 기모노 입은 여성이 등장했다. 부드러운 국가이미지와 일본 상품 판매 촉진을 위해서다. 

 메이지 정부는 조직적으로 서구에 기모노는 여성이 입는 옷이라는 인식과 동양적 우아함을 상징한다는 메시지를 반복한다. 그 결과 기모노는 본래 의미와 다르게 서구에서 재해석된다. 서구의 강력한 코르셋과 다른 넉넉함, 비단 재질, 다양한 문양이 있는 기모노는 이국적 관능감과 신비감을 불러왔다. 특히 게이샤의 엽서, 사진으로 인해 기모노 입은 여성은 성적대상화까지 된다.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은 이런 이미지의 상징이다. 주인공 초초는 순수하고 헌신적이나 본처가 있는 서양 남성을 좋아하다 결국 버림받자 기모노를 입은 채 자결한다. 연약하고 수동적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다. 

 전후 일본의 항공사 JAL은 광고에서 기모노 입은 여성 승무원을 등장시킨다. 서구 사회에 일본 여성에 대한 긍정적이고 특정화한 이미지를 다시 각인시킨 것이다. JAL은 일본 기모노 여성이 보살핌, 안락함, 이국적 판타지여행을 충족시켜줄 것처럼 묘사했다. 

 결국 기모노 입은 여성 이미지는 일본이 갖는 남여 차별적 시도와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5. 일본의 건축 문화

 일본은 남북이 매우 길고 아한대와 아열대 기후가 모두 나타나나, 대부분의 인구가 거주하는 지역은 동서로 길게 누워 전반적으로 매우 덥고 습한 기후가 일반적이다. 한편 겨울에는 대륙의 한기가 뻗치나 동해를 건너며 공기가 습윤해져 다소 온난해진다. 반면 한반도의 북풍은 매우 춥고 건조하다. 

 그래서 한국의 건축은 겨울, 일본의 건축은 여름에 방점이 찍힌다. 한국의 건축은 기본적으로 남향, 온돌, 흙과 돌을 이용한 두꺼운 벽과 낮은 천정으로 겨울을 대비하는 것이 기본형이다. 다만 방과 방 사이에 마루를 두어 공간을 두어 여름을 나고, 들문으로 통기성을 높였다.

 일본의 주택은 여름용이다. 목재로 기둥을 세운 후, 일종의 탈부착식 벽으로 필요에 따라 공간을 나누고 구획힌다. 가옥의 바다을 지면에서 띄워 습기를 차단하고 통기성을 높이고 바닥을 짚으로 짝 다다미를 놓아 역시 습기를 조절하고 발바닥이 달라붙는 찜짐함을 막는다. 여기에 처마가 넓어 직사광선을 막고 집안의 정원과 연못도 공기순환을 일으켜 시원함을 가져온다. 

 다만 겨울도 만만치 않게 추워 대비가 있다. 겨울에는 마루 바닥의 일부를 뜨어내어 테두리를 두고 바닥엔 모래를 깔고 화로인 이로리를 놓는다. 이렇게 난방을 하는데 난방 후 온기가 남은 이로리 위에 덮개를 덮은 후 침구로 깔아 온기를 유지했는데 이것이 고타츠의 시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방은 역부족이라 일본은 남아도는 온천을 이용해 체온을 놓이고 잠자리에 드는 풍습이 있다. 전반적으로 일본은 겨울에 무관심하고 건축비 절감과 느슨한 법령으로 인해 창호의 단열기능이 형편없다. 일본은 고대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한국의 온돌 풍습이 전해졌으리란 짐작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온돌은 일본처럼 지진이 잦은 지역에는 적합하지 않다. 균열로 인해 시스템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단독주택 선호가 높다. 이는 토지 소유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문화, 그리고 건물의 감가상각이 높기 때문이다. 일본의 목조 주택의 경우 내구 연한은 22년에 불과한데 그러면 가치가 제로가 된다. 그래서 땅을 소유해야 부동산 재산이 보존되는 것이다.  

 일본은 공영주택이 경제적으로 불리하다. 단독 주택인 소규모 주거 용지는 고정자산세가 1/6으로 경감되며, 주택자금은 1천만엔까지 증여세가 면제다. 반면 공동주택은 수도권의 경우 장기수선충당금이 월 11907엔에 달한다. 그리고 크기도 평균 65제곱미터로 협소하다. 그래서 일본은 대부분의 가정이 가족을 늘리면 목조주택을 마련한다. 그리고 목조주택은 지진에 강하고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어 지진이 많은 일본에 적합하다.

 일본은 임대가 활성화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첫 임대 계약때 집주인에게 감사의 의미로 1-2월 월세에 해당하는 감사금인 레이킹을 지불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첫 입주시 목돈이 든다. 레이킹에 1-3개월 월세에 해당하는 보증금과 첫 월세, 부동산 중개비가 든다. 그리고 집에서 나갈때는 집주인은 대개 보증금에서 감가상각 비용을 감한다. 하지만 세입자의 권리도 막강하다. 세입자는 사실상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임대의 무한 갱신권을 갖는다. 


6. 동일본 대지진과 피해자 코스프레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은 무려 22325명이 사망, 실종되었다. 3개의 단층이 파괴된 진도 9이상의 기록적 지진이었다. 하지만 다른 지진과 다르게 피해가 영속적인 것은 원전의 파괴 때문이다. 원전은 대규모 냉각수를 필요로 하기에 대개 해안가에 위치한다. 다만 일본은 쓰나미가 잦음에도 이에 대한 충분한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이 오늘의 결과를 낳았다. 

 후쿠시마 원전은 해일에 대비해 10m 높이의 부지에 건설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과거에도 15m이상의 해일이 발생한 적이 있어 그 이상의 대비가 필요했다. 또한 원전은 냉각이 필수이기에 단전이 되어도 자체 발전기가 가동되어 냉각을 유지한다. 그럼 자체 발전기는 어처구니 없게도 지하에 설치했다. 이는 미국의 방식으로 미국은 허리케인과 토네이도를 대비해 이 비상시설을 지하에 놓는데 그 방법을 어리석게 채택한 것이다. 구조상의 문제로 단 1기의 비상발전기만이 지하에 있지 않았는데 해일 후에 그것만 살아남아 원전의 생명을 다소 남아 연장시켰다. 

 사실 원전 사고 후, 원전에 바닷물을 주입하여 냉각을 유지하면 지금 같은 피해는 막아볼만 했다. 하지만 도쿄전력은 원전 장비에 집착한 나머지 바다물 주입을 금지시켰고, 이런 무리한 지시를 거부한 실무자가 바닷물을 주입해 그나마의 피해를 막았다.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는 구 소련이 체르노빌에서 그러한 것처럼 사태를 축소시키고, 피해를 과소보도했다. 그 결과 빠른 대피가 늦었고 많은 사람이 피폭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대피 반경은 2-3-10-20km순으로 확대발표했는데 이는 30시간 동안 이뤄진 조치로 매우 늦었다. 현재는 반경 20km가 법적 강제 대피선이다. 2012년 후쿠시마현 주민 16만이 피난했고, 현재 돌아온 사람은 25%에 불과하다. 

 복구 작업도 난망하다. 제염작업은 기화 한장 한장은 닦아내고, 표토와 잔디 등을 모두 갈아없애야 한다. 그 분량이 1130만제곱 킬로미터에 달한다. 그리고 원자로 과열을 막기 위해 지금도 해수를 유입시키고 있고 그 결과 막대한 오염수가 발생했다. 1046기의 오염수 저장고를 지었는데 그것이 모두 차버려 일본 정부는 무책임하게 이를 바다에 방류하고 있다. 

 이런 사상최악의 인재에도 도쿄전력 관계자들은 재판에서 모두 무죄처분을 받았다. 업무상 과실 치사로 기소되었으나 재판부는 쓰나미는 예상할 수 없는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이들에게 주어진 처분은 사과와 급여삭감이 전부다. 

 일본은 원전반대 집회와 원전 정책을 반대한 배우 야마모토타로를 TV드라마에서 퇴출시켰다. 또한 정부에 불리한 인터뷰를 진행한 구니야 히로코를 NHK 프로그램에서 하차시켰다. 그는 그 프로를 23년간 진행했었다. 또한 가수 사이토 가즈요시가 반원전 노래를 공개하자 해당영상을 비공개처리하고 지상파 출연을 배제한다. 공산주의 중국 뺨치는 수준이다.

 그리고 일본은 불만을 누르고 지역 주민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해야 한다는 정서적 연대 캠페인을 벌인다. 후쿠시마 농수산물 사먹기 운동, 종이학 접어 보내기 운동등이 그 예다. 동정심과 희생에 대한 부채감을 강조해 피해 서사 확산을 시켰는데 이를 통해 분명한 피해-가해 관계를 흐리고 피해자에 대한 정서적 연대감만 남기게 된다. 이는 피해자들로 하여금 치유받지 못한 상태를 유지시켜 세습적 희생자를 만들게 한다. 

 일본은 어처구니 없게도 오염수를 방류하며 자신들의 사고의 최대 피해자라며 이를 정당화한다. 분명한 가해자가 피해자 행세를 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실수로 집에 불이 나서 이웃집까지 번졌는데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이웃에 내가 최대 피해자라며 항변하는 형국과 같다.

 일본의 이런 행태는 과거에도 있었다 .바로 2차 대전과 식민 지배에 태도가 그러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명백한 가해자임에도 2차 대전, 특히 핵무기에 의한 최대의 피해자라는 태도를 내세운다. 과거 한 프로에서 일본의 핵피해자는 미국의 과학자를 초청해 사과를 요구했는데 합리적으로 올바른 미국의 과학자를 이를 단호히 거부하는 좋은 예를 보였다. 


7. 일본의 종교

 일본에는 수많은 신사와 사찰, 종교의 영향이 담긴 시설이 많지만 정작 일본인들은 대부분 자신이 종교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일본이 다종교와 실용적 신앙자세를 갖고 있고, 관습 중심의 문화속에서 생활의 일부로 종교가 포섭되었으며, 과거 2차대전 때 국가신토의 강요로 인한 거부감이 있어서다. 

 일본인은 특정 종교에 잘 귀속하지 않고, 필요한 시기 적절한 신을 선택하는 실용적 종교관을 보인다. 애가 100일이 되면 신토식 행사를 하고 결혼은 기독교 식이며, 장례를 불교식으로 한다. 일본은 문화의 변방으로 불교가 538년 백제로부터 전래된다. 이후 자연신에 더해 조상이 모두 부처가 된다는 식의 사고로 신이 더욱 분화하고 다양해진다. 이처럼 일본은 종교가 침투해도 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식 보다는 기존의 것에 필요에 따라 융합하는 형태를 취한다. 

 신도는 교리체계가 불분명하다. 그래서 관혼 상제 같은 생활 속 의례, 가족 커뮤니티의 확장선 상에서 조상 숭배 수단으로만 작동한다. 신토와 불교는 서로 융합하였는데 메이지 일본은 신토를 국교로 삼는 과정에서 불교를 축출한다. 그래서 신불분리령을 발표하고 수천 개의 신궁사가 폐지되었으며 신사 내 불상이 철거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그동안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번을 권력에서 배제시켰는데 이들은 도요토미 편에 붙어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19세기 막부가 서양 열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자 반기를 들고 상징뿐이던 덴노를 수단으로 삼는다. 덴노는 신격화와 권력의 정점화는 국민 통합과 급진적 개혁에 대한 저항을 마무시키는데 적절하기 때문이다. 덴노에 대한 충성은 국민에게 곧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덴노의 지위를 군주에게 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프러시아 헌법을 참고하여 헌법을 통해 부여한다. 이로써 근대화 과정에서 국민을 자유와 평등, 권리를 법적으로 박탈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덴노는 정점으로 하는 국가이데올로기 완성을 위해 국가신토를 완성하기 위해 모든 이데올로기, 사상, 종교를 그 아래에 두었다. 모든 신사는 덴노는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디 체계로 개편되었다. 1906년 신사합병령으로 일촌 일사 정책이 시작되어 지역 주민이 대대로 모셔오던 잡다한 신사들이 철거되었다.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어 국가신토와 반하므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경험으로 인해 현대 일본인은 종교가 국가의 하부조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반감도 심한 편이다. 

 야스쿠니는 근대국가 일본의 형성 과정에서 사망한 호국영령을 신으로 모신 사찰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서 사망한 246만여명의 영령이 신으로 합사되었다. 일본은 물론 한국의 현충원에 해당하는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이 따로 있다. 이것이 공식 국가기관이고 야스쿠니는 사실 일개 종교시설일 뿐이다. 그럼에도 일본 정치인들이 상징적으로 이를 방문함으로써 강압적 국가신토의 망령이 유지되고 있다.

 야스쿠니의 근본 문제는 다음과 같다. 우선 A급 전쟁범죄를 신으로 합사했다는 점이며,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된 식민지의 국민들 역시 합사했다는 점이고, 현재 유족들이 분사를 원하고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8. 일본의 전통 예술

 일본은 전통 예술의 맥을 잘 이어가고 있는 나라다. 여기에는 이에모토가 존재한다. 이에모토는 거의 모든 예술 분야에 존재하는 것으로 단순한 도제시스템이 아니라 한 가문이 그 분야 전반의 세습문화를 관장하는 것이다. 이에모토는 권한이 막강하다. 일본은 무형문화재를 116명 선정하는데, 이 지위는 이에모토에서 거의 세습된다. 그리고 이에모토의 지위는 실력이나 신망이 아니라 역시 직계세습이다. 이에모토는 그 분야에서 해당기술을 제자에게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인 면허에 대한 발급권을 갖고 있다. 즉, 이 분야에서 먹고 사고 지위를 올리는데 이에모토는 절대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순작용은 전통의 체계적이고 확실한 계승이다. 하지만 단점은 실력주의가 아닌 폐쇄적인 혈연적 세습, 그리고 창의성을 억압하는 경직화, 그리고 과도한 돈이 든다는 것이다. 

 일본의 전통예술에는 도가 많이 붙는다. 무사도, 다도, 서도 이런 식이다. 일본의 도는 한국이나 중국의 도와 다르다. 사실 이 도는 도교에서 온 것이지만 일본에서의 도는 특정 행위를 평생 반복하여 정해진 형식을 철저히 다름으로써 완벽한 기술과 더불어 인격의 완성에 도달하는 깨달음의 과정과 그 자체다. 

 도에 이르는 과정으로 중세에 슈하리 개념이 생겨난다. 슈는 스승의 가르침과 정해진 형식을 철저히 따르는 단계다. 하는 기본을 완전히 익히고, 자신에게 맞게 응용하고 기존의 틀을 서서히 깨는 단계다. 마지막 리는 스승 유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 경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일본에는 무사도란게 있다. 무사도는 일본 사무라이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 같지만 사실 근대의 발명품에 불과하다.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은 덴노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강조하고, 서구에 미개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미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발명한 것이 무사도다. 서구의 기사도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이를 제시하고 미화한 것이다. 패전 이후에도 이는 영향력을 유지하여 7인의 사무라이, 라스트 사무라이, 고스트 오브 시네마 등의 작품이 등장한다.


9. 일본의 아이돌과 한류

 지금이야 K pop이 대세지만 과거 아시아 문화의 주류는 J pop이었다. 한국 대중가요 역시 1990년대만 해도 일본의 J pop을 베껴낸 곡과 댄스, 스타일 등이 수두룩했다. 일본의 아이돌은 1970년대 컬러 티비의 보급으로 본격 등장한다. 생동감 있는 화면을 통해 아이돌이 스타로 다가온 것이다. 당시 야마치 마리, 미나미 시오리, 코야나기 루미코 같은 신인 3인방이 등장해 큰 인기를 끌었고, 이어서 3인조 캔디즈, 2인조 핑크 레이디 등이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가창력 보다는 앳된 이미지와 청순한 외모로 인기가 좋았고 이들의 미소와 노래는 전후 경제성장의 피로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했다. 

 80년대는 일본 아이돌의 황금 시대로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가 큰 인기를 끌었다. 90년대는 버블경제가 붕괴하며 온 국민이 하나의 스타를 사랑하던 시대가 막을 내린다. 이후 두 프로듀서가 아이돌 산업을 재편한다. 아키모토 야스시는 미숙한 소녀들을 데뷔시켜 성장과정을 대중이 함께하게 하는 AKB48을 성공적으로 데뷔시킨다. 2000년대 들어서는 아이돌이 대중 전반의 사랑을 받는게 아니라 특정 팬덤에 의존하는 하위 문화로 자리 잡게 되며 주류는 뛰어난 가창력과 자작곡 능력을 갖춘 아티스트가 차지하게 된다. 아무로 나미에, 아타다 히키루가 그들이다. 

 여자와 다르게 남자 아이돌 시장은 자니스 사무소가 오랜 기간 독식한다. 자니스는 SMAP, Tokio, v6, kinki kids, 아리시 등 굵직한 아이돌을 배출했다. 다만 이들은 BBC가 창업자 자니 기타가와가 수십년간 소속 소년 연습생을 성착취한 것이 드러나며 2023년 자니스 사무소가 문을 닫게 된다. 그간 자니스는 시장을 독점하며 특정 스타일의 아이돌만 배출하고, 반대쪽은 강한 세력으로 탄압하고 견제하여 싹을 잘라내는 방식을 취했었다.

 일본은 버블 경제가 붕괴하며 대중산업에 큰 변화가 생긴다. 티비 광고비가 크게 줄어 방송국들은 저예산 프로그램 제작과 해외 프로그램을 도입하게 된다. 과거 같은 해외 로케이션과 거대 세트를 동원한 버라이어티 쇼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 당시 해외에서 도입한 가성비 좋은 프로그램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의 '겨울연가'다. 이는 일본 NHK가 정규 편성해 더욱 화제를 끌었고, 왕이나 주군에게나 붙은 '사마'라는 표현이 남자 주인공에게 붙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겨울 연가의 순애보는 일본인에게는 매우 고전적 주제로 당시 일본 방송계나 드라마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이 일본의 중장년층들에게 고전의 큰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K pop은 일본의 청년을 사로잡았다. 일본은 21세기 들어서도 저작권 보호를 위해 음악 영상을 유튜브나 인터넷에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일본 아이돌과 문화의 확산과 접근을 저해하는 측면이 있었다. 한국은 정반대로 영상을 인터넷에 쉽게 올렸고 이를 통해 세계로 빠르게 퍼질 수 있었다. 일본의 아이돌은 트렌드가 미숙한 상태로 데뷔를 시켜 팬들과 함께 성장서사를 그려나가는게 일종의 공식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아이돌은 전혀 달랐다. 철저한 트레이닝으로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데뷔했고, 이들의 보이는 완벽한 비주얼과 압도적 퍼포먼스는 동경의 대상으로 일본 청년층을 매료시켰다. 

 이처럼 일본에서의 한류의 성공은 버블 이후 일본이 겪은 구조적 균열과 정서적 공백을 한국이 뛰어난 실력과 콘텐츠로 파고든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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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마스를 모른다 - 금기와 편견 너머, 하마스를 이해하기
헬레나 코번.라미 G. 쿠리 지음, 이준태 옮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감수 / 동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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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마스에 대해서 떠오르는 것은 테러단체라는 국제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10여년 정도 전에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승리해서 제1당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당시 좀 놀라웠는데 그들이 단순히 테러만을 일삼는게 아니라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 상당히 정치적 지지를 받는 합리적 정치집단이라는 점이라서였다. 그리고 최근의 일은 갑작스런 대규모 이스라엘인 납치전의 대대적 성공으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은 상당부분 서구 언론이나 이스라엘의 입장에 가깝다. 나의 정보라는 것이 그들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세계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 그리고 하마스의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한다. 그들은 대개 악마화되고, 테러집단으로 치부되며, 세계 언론에 접근할 기회라는 것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래서 제목처럼 우리가 얼마나 하마스에 대해서 모르는지, 그래서 하마스에 대해서 나름대로 그들의 입장에서 알려주는 책이다. 과거 일제 강점기 우리 조상들의 입장이 생각났다. 아무런 힘이 없는 상태에서 국제사회는 아마도 강력한 일본의 입장과, 그들과 이익을 공조하는 열강의 입장만을 대변했을 것이다. 점령당하고, 피해자인 한국인의 입장은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한국인이 일본의 불의와 그들에게 당하는 피해, 학살에 저항에 일으키는 소요나, 무력 저항은 모두 소위 무도한 '테러'로 치부되고 악마화되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읽었다. 우리가 독립하지 못했다면 아마 비슷했을터니 말이다. 팔레스타인 원주민은 서구가 기획한 이스라엘이라는 식민주의 프로젝트에 100년 넘게 맞서 싸웠다. 가장 보수적인 국제법적 언어로도 팔레스타인에겐 무장 저항을 포함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의 원리가 보장된다. 이스라엘과 서구는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을 하마스로 축소시키고 하마스를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세력으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도 모두 하마스를 지지한 것에서 비롯한 책임이 있다는 프로파간다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하마스는 이슬람적 가치를 수행한다. 이는 하마스의 도덕적 우위를 보장해주는 주요 경쟁력이다. 그들은 아동과 여성의 보호를 최우선시하며 심지어 이스라엘 포로마저 인도적으로 처우하며 이를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끊임없이 어필한다. 오히려 이를 잘 지키지 않는 것을 이스라엘에 가깝다. 물론 완벽한 민족해방운동 따위는 존재할수도 없으며 그런걸 요구하는 것 역시 말도 안된다. 어떻게 점령당하고 핍박받으며 땅을 잃은 자들에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투쟁을 요구할 수 있는가. 이미 점령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데. 하지만 그럼에도 하마스는 비교적 이스라엘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투쟁을 진행하고 있고, 비폭력적, 외교적 방식을 선호한다. 폭력적인 방식이 많은 소모를 낳는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입장은 다양하다. 하마스를 지지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며, 적대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근 전쟁으로 인해 집단학살이 이어지며, 하마스에 대한 불만도 더욱 커졌다. 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하마스에 대한 비판 집회는 오히려 사라졌다. 

 하마스는 오래도록 미국과 이스라엘에 의해 견제받고 탄압받았다. 수뇌부는 늘 제거대상이었고, 제거되어왔는데 그럼에도 하마스는 늘 건재했다. 이는 하마스가 내부 합의체에 의한 권력 분산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는 하마스가 고위 지도부가 늘 살해되는 경험을 가졌기에 구축한 방안이다. 

 이스라엘과 서구는 팔레스타인을 외교적으로 악마화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사태를 악화한다. 이는 외교를 망쳐 수십년간 파괴적인 분쟁에 갇혀 식민통치나 군사점령으로 고통받아온 이들을 훨씬 더 폭력적인 그리고 중무장한 침략자들의 손에 내맡긴다.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인구는 천만에 달하며 이중 팔레스타인계 주민은 2023년 기준 21%다. 그래서 하마스가 던지는 질문은 보다 현실적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이 땅에서 쫓아내거나 완전한 한 독립국가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들을 이 영토안의 정당한 주민으로 인정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스라엘인들을 국가로 인정하듯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을 구가로 인정하는가 같은 것이다. 이는 매우 현실적이고 타협적 질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태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헌법이 없는 몇 안되는 국가다. 이스라엘이 헌법이 없는 이유는 매우 폭력적이다. 이는 팔레스타인의 존재 때문이다. 헌법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보편적으로 언급하는 조항이 들어간다. 이로인 언급한 것처럼 21%의 팔레스타인계 주민에게 이스라엘 주민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만 한다. 그것이 싫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과거 남아공처럼 아파르트헤이트적 국가로 규정된다. 그리고 헌법을 가진 국가는 그 헌법에 그 나라의 영토를 규정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헌법이 없다. 이스라엘은 건국이래 팔레스타인 영토를 계속 침탈해 완전 흡수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부로 영토를 규정하면 법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에 헌법 따위는 없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매우 젊다. 인구의 50%가량이 30세 미만이다. 그리고 이 젊은 세대들은 그 동안 중간 세대 실용주의자들의 실패로 실망이 큰 상태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분할, 파타흐(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최대정파로 하마스의 경쟁세력이다)와 하마스의 분열로 인해 하마스의 활동가들이 급진화했다. 이는 향후 하마스가 군사주의적이고 투쟁적인 흐름으로 치우칠 가능성을 높인다. 

 하지만 그간 하마스는 두 가지 주요 이념적 흐름을 보였다. 하나는 이슬람 주의적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적 흐름이다. 다른 아랍세력과 협력을 구축하는 흐름에서는 이슬람주의적 흐름을 보였지만 이스라엘과의 투쟁에서는 민족주의적 흐름이 강했다. 그리고 하마스는 전체적으로 이슬람주의보다는 민족주의적 흐름이 강하며 그로 인해 세속주의적 성격이 더 강하다. 또한 하마스는 다층적 조직이다. 이들은 정치조직으로 정당이면서, 자선 조직이고, 군사조직이다. 

 하마스는 세속적 측면이 강해 어떤 조직과 동맹을 맺을 땐, 그 조직의 종파적 정체성이나 사상적 정체성은 크게 따지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이 중요하다. 하마스의 특이점은 이들이 무려 37년 이상 통합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팔레스타인의 그 어떤 정치조직이나 운동 또는 적인 이스라엘의 그 어떤 정당아니 조직도 이런 일관성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 

 서구인들은 이런 하마스를 테러조직으로만 파악한다.

 이런 테러리즘 서사는 3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폭력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소거한다. 그리고 정치적 해결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상정한다. 마지막으로 하마스와 같이 복잡한 운동을 일차원적인 것으로 축소해버린다. 결국 이런 테러리즘 서사는 마땅히 저항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의 저항할 권리를 부정해 버리게 된다. 이런 테러리즘 서사는 식민주의의 유산으로 과거 식민주의가 반식민주의 운동을 무력화하기 위해 만든 논리다. 과거 영국이나 서구는 무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공의 만델라를 테러범 취급했었다. 

 2023년 10월 7일의 하마스의 이스라엘인 납치 작전은 의외의 대성공이었다. 이 사건의 파문은 매우 커서 아직까지 이어지는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전쟁의 시작점이 되었다. 하마스는 자신들도 이 작전의 성공에 매우 놀랐으며, 이스라엘은 그들대로 자신들의 취약성에 매우 놀랐다. 하지만 하마스는 그 후폭풍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는데, 하마스는 이후 전투가 다수의 전선으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헤즈볼라,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 예멘의 후티반군, 이란 등이 다 방면에서 호응해 이스라엘이 정신을 못차려 자신들만 타격하진 못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응에 대해 국제사회가 강한 비판을 해서 지금 처럼 야만적인 학살은 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세계는 생각보다 야만적이었다. 지금의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다.

 하마스는 세속적이기에 여성에게도 허용적이다. 하마스는 여성이 대학에 진학하고 직업을 갖는 것에 대해 관용적이다. 이슬람주의 여성과 좌파여성 모두 하마스가 조혼과 명예살인에 대해서 하마스가 반대한다고 단언한다. 하마스는 양자 모두 이슬람적이지 않은 관습이고, 아랍적인 문화 관습이므로 유지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출구조사 결과 2006 총선에서 하마스에 투표한 사람들 중 두 번째로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이 주부였다. 하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측면도 강해 여성이 최고지도자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여성 국회의원과 장관이 다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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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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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이다. 그는 운좋게도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거기서의 책을 남겼다. 책은 전후에 바로 나왔지만 처음엔 호응을 얻지 못했다. 상처를 바로 직면하기 힘들어서였다. 일부 출판사들을 출간을 거절하기 했다. 하지만 곧 큰 반향을 얻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데는 몇 가지 큰 행운 덕이 었다. 우선 1944년이라는 전쟁 막바지에 수용소로 향했단 점이었고, 나치가 지나치게 유대인을 많이 소각하고, 전상자가 많아 노동력이 부족했다는 상황,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그가 몇 차례 선별의 위기를 운 좋게 넘겼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에서 유대인들은 기차를 타고 마지막으로 보이는 이탈리아 말들을 지나 폴란드로 향했다. 몇몇 사람들은 끌려가는 마지막 날까지 일상을 영위하고 아이들의 옷을 빨고, 아이들을 먹였다. 그리고 심지어 한 부부는 기차안에서도 갓난 아이를 따뜻한 물에 씻겼다. 그런데 그런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간다. 수용소에 도착해 모든 이들은 젊은 남성, 노인, 여성, 아이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젊은 남성은 제외한 나머지들은 모두 가스실로 향해 죽임을 당한다. 분류는 철저하다. 가스실로 향하는 이들은 그들이 그리로 향한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비인간적 수용소 일이 시작된다. 수용소 생활이 시작되며 174000번대의 번호가 박힌다. 이것은 이탈리아계 유대인의 번호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다른 번호를 갖고 있다. 이들은 생존자들이다. 174000번대의 이탈리아인들은 처음엔 94명이었지만 혹독한 수용소 생활과 겨울을 지나고 나서 29명이 살아 남는다. 그리고 여기서 선발을 통해 8명이 가스실에서 소각되고 21명이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 시작된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책 제목처럼 모두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의 인간성은 모두 땅에 묻혔다.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인간성을 땅에 묻어 버렸다고 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코고 작은 일을 맡을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포로들 모두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내적으로 황폐해졌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협력하는 존재이고, 그것은 도덕성의 기반인데 2차 대전처럼 그런 것들이 철저히 파괴되고 필요없어진 상황에서는 그런 인간적인 것들을 전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레비는 책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적인 면이 남아 있는 사람을 단 한명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에 대한 찬사를 책에 남긴다.

 수용소 생활을 하다 새로운 유대인의 수송이 오면 그것은 축복이 아나라 새로운 선발을 의미하는 저주가 된다. 선발은 주로 노인, 병든 사람이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선발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선발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정보가 빠른 자들은 재빠르게 병사에서 빨리 퇴원하기도 하며, 의사타 특권층을 매수하고, 매일 면도를 하거나, 자주 씻으며 대비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여력이 되는 평소 나치와 연이 닿는 약삭 빠른 자들 뿐이다. 대개의 포로들은 굶주림과 노동에 지쳐 대비를 하지 못한다. 선발이 오든 말든 그저 당할 뿐이다. 게다가 그 선발은 심지어 공정하지조차 않다. 선발은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 대거 몰아놓고 순식간에 이뤄진다. 방금 온 젊은이는 당연히 수용생활에 시달리 레비보다 건강할 터인데 주눅이 들어 욺츠리고 있다가 선발되었다. 또 어떤 젊은이는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선발되었다. 그렇게 레비는 운좋게 선발되지 않았다. 

 지옥같은 수용생활은 나치가 패전하며 끝이 난다. 나치는 소련군이 당도하기 몇달 전 수용소를 버리가 도망간다. 포로들은 힘이 없어 수용소를 떠나지도 못하고 주변에서 식량을 구하며 버틴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굶거나 병든 사람들이 죽어나가기도 한다. 어처구니 없게도 연합군이 도달했을때 갑작스레 식량을 보급 받은 많은 포로들이 그로 인해 죽기도 했다고 한다. 

 프리모 레비는 전후, 결혼을 하고 정상적인 삶을 산 것 같았지만 1987년 아파트 3층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지만 자살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수용소 생활의 어두움이 그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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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익스프레스 - 길고 쓸모 있는 인생의 비밀을 찾아 떠난 여행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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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전 유행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저자가 비슷한 개념으로 프랭클린 익스프레스란 책을 냈다. 한국에서 스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크게 인기를 끌었는지 서문에 한국독자를 위한 글을 좀 썼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인기를 끈 것은 아마 제목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도 그 책의 제목에 끌려서 그것을 봤었다. 물론 책은 실망스러웠다. 이 책도 사실 같은 부류라 생각되어 보지 않으려 했지만 우리 독서토론회 책이라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다. 책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보단 좀 나았지만 볼만한 책은 아니란 생각이다. 조금 얻게 된 점은 벤자민 프랭클린에 대한 인물에 대해 약간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단 점이다.

 각 나라는 화폐에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의 도안을 넣는다. 국방, 문화, 예술, 과학이든 무엇이든 말이다. 한국은 이순신, 이이, 이황, 세종, 신사임당이 들어간다. 시기상 모두 조선시대에 편중된다. 그리고 이순신을 제외하면 이이, 이황은 유학자다. 물론 세종은 종합적 인물이다. 신사임당은 최고가액에 들어갈만한 인물인지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하여튼 미국에는 1$, 2$, 5$, 10$, 20$, 50$, 100$ 지폐를 발행하는데 이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이 도안으로 사용되는 것은 10달러와 100달러 두 경우 뿐이고 이 중 무려 최고가액인 100달러에 벤자민 프랭클린의 도안이 사용된다. 그만큼 이 사람은 미국 역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책 '프랭클린 익스프레스'는 저자가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따라 다니며 그의 탄생부터 평생의 공간과 주요 사건을 탐색하며 단상을 쓴 책이다.

 나는 벤자민 프랭클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가 미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이고 연으로 번개 실험을 할 정도의 과학자라 상당한 교육을 받은 인텔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의외로 그의 가방끈이 상당히 짧다란걸 알 수 있었다. 그가 교육을 받은 겨우 10세까지였다. 이는 그의 집안이 가난해서도 그가 공부를 못해서도 아니였다. 벤자민의 집은 영국에서 건너온 귀족 집안은 아니었어도 가난한 집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벤자민은 타고난 성품이 실용적이고 종교에 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는데 그것이 그의 아버지를 거슬리게 했었던 것 같다. 저자는 그것이 그의 학업 중단의 주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것은 주요 성직자로 나가는 것이었는데 벤자민의 아버지가 보았을때 그것은 아들의 성미로 보았을 때 가망없는 것이거나 오히려 위험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대신 벤자민은 책을 사랑했기에 그것을 통해 꾸준히 학습했고 다양한 사람과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배워나갔다. 당시에는 책이 귀했던 시기였기에 평균적인 지식인의 집에는 10권 정도의 장서가 집에 있었는데 벤자민 프랭클린 사망 당시게 그의 집에는 무려 4276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당시 미국에서 최대의 개인 장서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젊어서 한 때 채식주의를 고집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돈을 아껴서 책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보스턴에서 형 제임스의 제자로 들어가 도제관계가 된다. 즉, 인쇄공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런데 형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당시 도제 관계는 엄격했다. 7년간의 관계는 사실상 법적 계약에 가까웠다. 벤자민은 당시 어린 나이에 다른 필명으로 글을 기고하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이것을 형 제임스에게 들키고 만다. 이것을 괘씸하게 여김 형과 마찰이 생기고 벤자민을 형과 다툼끝에 뉴욕을 거쳐 필라델피아로 떠난다.

 당시만 해도 필라델피아는 매우 작은 도시였다. 그는 형과의 도제계약을 깼기에 체포될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젋었던 그는 거기서 인쇄공으로 일한다. 젊었던 그는 자리를 잡는 듯 했으나 그곳 총독의 권유로 런던으로 향한다. 런던에서 그는 커피하우스를 경험한다. 커피하우스는 당시 새롭고 흥미진진한 발상이 떠오르고 최신의 뉴스가 모이는 곳이었다. 그는 여기서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고 성장하여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는다. 프랭키라는 아이였는데 천연두로 어려서 죽고 만다. 벤자민은 당시 조잡한 천연두 예방접종에 긍정적이었는데 아이에게 이것을 접종하는 것을 주저했던 것을 평생 후회한다. 당시는 계몽주의 시대로 아마추어의 시대이기도했다. 당대의 놀라운 과학적 발견은 대개 벤자민 프랭클린처럼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아마추어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미국은 식민지이자 변방의 후진국으로 과학장비가 크게 부족했는데 벤자민은 영국에서 쌓은 네트워크로 인해 실험도구와 최신 전기 관련 문헌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전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금의 전기배터리, 양과 음, 양극, 음극, 전도체, 축전기, 충전, 방전의 용어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그는 전하가 새로운 물질의 생성이 아닌 전류의 재분배로 일어나는 것이고 전기가 늘 만물에 존재한다는 것을 통찰했다. 또한 전하량이 보존되고 전기는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질 뿐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전기가 통하는 뾰족한 물질이 전기를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관찰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미 전역에서 늘 일어나는 번개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피뢰침을 창안했다. 그는 피뢰침의 발명 그리고 연을 통해 번개를 끌어들이는 실험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전기를 향한 그의 이러한 놀라운 통찰과 호기심은 딱 6년간 만 지속되었다. 아쉬운 순간인데 그의 정신적 에너지가 공공 분야로 향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미국에는 공공병원과 의사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대학을 나온 사람도 인구의 10%에 불과했다. 당시 보스톤을 찾은 스코틀랜드 의사 윌리엄 더글러스는 북미의 의료계에 대해 질병보다 의사가 더 위험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벤자민의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타고난 통찰력으로 납 중독 이론을 세우고, 일반 감기이론을 정립했고 천연두 예방접종을 홍보하고 전기치료와 음악 치료를 시도했다. 그는 환기와 규칙적 운동이 대중화하기전에 이미 그 효과를 신봉하고 실천했다. 그래서 84세까지 장수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펜실베니아 의회에 공공병원 건립을 주장하며 자신이 기부금을 모아오면 그만큼 기부할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무려 2700파운드를 모아와 의회가 어쩔수 없이 그 이상을 기부하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펜실베니아 병원이 1752년 2월 11일 건립된다. 

 그는 이후 50이 넘어 런던으로 간다. 이후 런던에서 상류층과 교류를 맺으며 식민지 체신부 장관으로 오래 생활하지만 식민지와 본국의 관계가 악화하며 그의 말년도 좋지 않아진다. 68세가 되자 그는 영국 고위 관료가 모인 앞에서 투계장에서 공개 모욕을 당한다. 그리고 체신장관 대리 자리에서도 쫓겨나고 아내 데보라의 건강이 악화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영국과의 타협을 시도하나 결국 돌이킬수 없는 길을 갔음을 깨닫고 귀국한다.

 1775년 귀국하자 전쟁은 이미 발발한 상태였다. 식민지인들은 저항투사로 귀국한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15년이나 영국에 체류한 그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미국은 그를 체신장관에 임명했다. 벤은 미국의 화폐 도안을 디자인했고 전쟁에 필요한 화약을 만들기 위한 질석 생산을 가속화했다. 에세이와 노래를 만들어 영국군을 조롱하고 경험이 부족한 독립군을 격려하기도 했다. 반면 벤의 아들 윌리엄을 아버지와 다르게 끝까지 영국왕에 충성하며 뉴저지와 총독으로 남아 아버지를 곤란하게 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주요 업적의 하나로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한다. 토마스 제퍼슨은 이를 종교적 권위에 기대어 작성했다. 그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신성하고 부인할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썼는데 벤자민이 여기서 신성하고 부인할 수 없는 이라는 부분을 자명한으로 수정했다. 종교적 부분을 이성으로 바꾼 것이다. 

 한편 미 정부는 벤자민 프랭클린을 프랑스에 외교관으로 파견한다. 당시 프랑스는 7년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하여 여력이 없었지만 영국에 원한이 깊었다. 프랑스의 봉불루아르는 필라델피아를 방문하여 미국을 탐색하였는데 그는 미국이 형편없었음에도 본국에 그들의 전력을 과대평가하여 보고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조심스레 미국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벤은 프랑스에 방문한다. 설득은 쉽지 않았다. 지난 세기 프랑스는 식민지를 두고 영국과 4차례나 전쟁을 벌였고 루이 16세는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 영국 외교관들은 미국이 오합지졸이라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고 실제 미국은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상하게도 프랑스내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인기가 상당히 높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워싱턴 장군이 전세를 역전시켜 전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1777년 12월 4일 미국이 새러토가에서 대승을 거두어 8천명의 영국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분위기가 바뀐다.

 프랑스는 이것을 기점으로 전폭지지를 하기 시작한다. 프랑스는 벤자민과 2개의 조약을 맺고 대출과 증여 형태로 무려 4800만 리브로(지금 가치로 14억 달러)이상을 원조한다. 여기에 프랑스 군함과 병사를 직접 파견한다. 이런 지원을 얻은 결과 미국은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다.

 결국 벤자민이 프랑스에 체류한 상태에서 미국은 영국의 독립협상을 맺게된다. 협상은 매우 지리했다. 영국은 패배했음에도 조약에 쉽게 응하지 않아 2년간 협상이 이뤄진다. 여기서도 벤은 강한 압박에도 침착하게 협상에 응해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낸다. 결국 미국은 서쪽 경계를 미시시피강 유역까지 얻게 된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거의 일평생 노예 소유주이자 노예 거래로 이득을 취했다. 물론 그는 노예를 많이 거느리지는 않았다. 겨우 7명 정도를 거느린 것으로 추정된다. 토머스 제퍼슨이 수백을 거느린 것과 비교하면 아주 적다. 게다가 그는 만년에 더 이상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고, 조심스레 노예제 폐지론으로 기울었으며 죽기직전에는 노예제를 적극 반대했다. 그는 84세까지 장수했고, 쓸모있는 긴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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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대항해 - 뗏목과 카누로 바다를 정복한 최초의 항해자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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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간은 지구 각지로 퍼져나갔다. 인간은 육상 생물이기에 우선적 경로는 당연히 이동이 적합한 육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는 70%가 물로 뒤덮여 있다. 그렇기에 바다는 어쩔수 없이 때론 이동의 경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바다는 깊고, 땅보다 훨씬 이동하기 어려우며, 방향과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고, 식량과 식수도 없으며, 거센 파도와 풍랑이 언제든지 생존을 위협했다.물론 디젤엔진과 첨단 항법장치가 개발된 지금 바다는 과거만큼 인간에게 도전의 대상이자 경외, 위협이지 않다. 책 '인류의 대항해'는 산업화 이전 바다로 진출하고 도전했던 과거 인류의 교역과 진출의 역사를 다룬다. 


1. 동남아와 태평양

 빙하기에 동남아 지역은 지금의 인도차이나 반도와 섬들이 연결된 커다란 대륙인 순다와 호주 및 인근의 섬들이 연결된 사훌이라는 커다란 대륙이 있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해류와 바람이 비교적 예측이 용이해 항해에 적합했고 줄줄이 분포한 높고 낮은 섬이 많아 기준 가시선 항법에도 좋았다. 과거의 항해는 무엇보다 가까운 시간내에 육지로 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육지가 항상 보이는 곳에서만 항해하거나 일련의 섬들을 따라 항해하는 방법을 주로 이용했다.  

 바다에서 육지 발견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상적인 조건에서 카누에 탄 사람은 대기가 빛을 굴절시키는 것을 감안해 지구의 곡면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 멀리 볼 수 없다. 여기에 구름이나 옅은 안개, 거품이라도 생긴다면 시계는 상당히 나빠진다. 

 그런데 동남아 지역은 해역 전반의 기상상태가 양호하고 센바람이 비교적 장기간 없어 육지 발견과 항해가 좋다. 여름 몇 달간 몬순으로 북서풍과 북서해류가 남으로 이동시켜주고, 겨울에는 남동 무역풍과 북쪽해류가 북으로 이동을 시켜준다. 이 패턴으로 계절간 방대한 지역을 이동하며 흩어진 섬사회를 탐험하고 식민화하고 교역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항해가 용이해도 도구가 필요하다. 바로 선박이다. 최초의 배는 뗏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뗏목은 섬유질의 끈으로 나무들을 엮기에 끈이 나무를 파고들지 않아 좋았다. 다음 등장한 수단은 갈대보트다. 이는 매우 가벼워 뭍으로 쉽게 옮길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방수처리를 해도 갈대 자체가 물을 쉽게 먹어 오래가지 못한다. 다음으로 등장한 쓸만한 배가 카누다. 

 통나무 카누는 몸통 속을 파내서 쉽게 만들지만 길고 폭이 좁다. 그래서 안정성이 낮고 수송력도 적다. 뱃전이 낮아 내부로 물도 쉽게 들어온다. 그래서 나온 해법이 아웃리거를 달거나 쌍둥선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카누의 안정성과 수송력이 몰라보게 좋아진다. 그리고 카누에 돛대와 돛의 설치도 가능해진다. 

 2만 5천년전 후빙하기의 항해자들은 솔로몬 제도까지 정착한다. 1만 3천년전 마우스섬까지 간 항해자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들은 섬 동물을 너무 많이 사냥해서 회색늘보주머니쥐, 주머니오소리, 왈리비들의 사냥감을 섬에 들여오기도 했다. 뉴기니와 비스마르크 제도는 여러 열대작물이 유래한 곳인데 식량이 되는 토란, 사탕수수, 일종의 바나나 종이 있는 곳이다. 이런 개량종 식물이 등장하여 카누 선장들은 토란과 마 같은 작물을 이용하여 식량을 배안에 저장하여 장기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잦은 항해에도 남태평양의 인구는 좀처럼 늘지 않았다. 이는 말리라이가 옮겨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최소 2종의 말리리아 원충이 수천년전 정착자들을 따라 순다에서 사훌로 이동했다. 말리라이가 열대지역의 섬들에 퍼쳐 모기 서식지 보다 높은 뉴기니의 고지대 지역만 높은 인구 밀도가 유지되었다. 

 기원전 1600년 경 뉴브리튼 섬의 위타리 섬이 대규모로 폭발한다. 이 대재난 직전이나 직후 정도에 이전에 비해 더 크고 튼튼한 카누를 탄 사람들이 서쪽에서 비스마르크 제도에 도착한다. 이들을 라피타인이라 한다. 이들은 기원전 1500년가지 오세아니아 근해에 정착하고 향후 2-3세기 동안 이동하지 않고 토착민과 통혼하며 융화한다. 

 라피타인은 새로운 식량을 가지고 오는데 그로 인해 수렵에 의존하던 섬 경제에 유연성이 생겼고 식량의 저장이 가능해 장거리 항해능력이 생겨났다. 이들의 쌍동선 카누는 비록 느린 속도였지만 거의 맞바람의 60도 각도에서도 항해가 가능했다. 라피타인들의 섬 이동은 의도적 식민화 과정이었다. 이는 인구압력이나 교역, 차남들의 기회 탐색이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딴 섬들은 자급자족이 어려웠기에 교역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섬들간에는 이런 교역 구조를 정례화하기 위한 전통이 존재했다. 그것이 쿨라 교환관걔다. 두 종류의 교환물품인 빨간조개껍대기와 하얀조개껍데기가 각각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으로 섬들을 돌았다. 이 물품이 섬에 오는 것은 섬의 위신 문제였고 물품이 오가며 다른 물품의 교환이 이뤄졌다. 의례에 참여하는 자들간에는 서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교역의 날짜는 정기적이고 주기적이며 신중했다. 이런 식으로 섬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의존을 정례화했다. 

 라피타인의 진출은 사모아섬까지였다. 사모아 섬 동쪽은  섬이 더 작고 고립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무려 1800년간 라피타인의 후손은 여기에 머문다. 서기 1000-1300년이 되어서야 동태평양 지역의 식민화가 이뤄진다. 


2. 에게해

 에게해는 빽빽한 섬과 강한 바람, 짧고 가파른 파도로 인해 건너기 만만치 않은 바다다. 그리스 앞바다엔 에비아, 크레타, 로도서, 레스보스 4개의 큰 섬이 있고 그 가운데 키클라데스제도가 있다. 초창기 항해가들에게는 다행스럽게 이 키클라데스제도의 섬간 거리가 10-20km정도로 가까웠다. 키클라데스제도는 건조지역으로 땅이 척박하다. 즉, 식량과 식수 확보가 어렵다. 하지만 석기시대 수렵민의 필수품인 흑요석이 풍부하다. 특히 밀로스 섬에 많았는데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많이 낮아 밀로스섬까지 가기 쉬웠다. 

 메마른 땅이지만 작물과 가축을 동반한 영구정착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4천년 전 낙소스섬에 농경인이 정착했다. 대개 대규모, 중간급의 섬부터 정착이 시작되었다. 키클라데스제도에서는 보리, 밀, 콩류가 자라고 염소와 양이 척박한 섬의 사면에서 살수 있다. 하지만 생산성이 낮아 인구 부양력이 낮고 이는 섬 사이의 고도의 상호의존성을 요구했다. 

 나일강 유역은 질 좋은 목재가 부족했다. 파라오들은 부피가 큰 목재 수송을 위해 해상무역을 했다. 삼나무 무역은 지금의 베이루트은 비블로스를 국제무역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그래서 레바논의 삼나무 무역은 기원전 2200년경까지 수세기간 번영했다. 레바논으로의 여정은 여름철의 연안 항해가 가장 많았다. 

 기원전 2000년 이집트의 배들은 크레타에 도달했다. 여름이면 우세한 북풍으로 지중해 연안을 따라 터키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키프로스 크레타 에게해에 도달했다. 초여름엔 에테시아 바람을 타고 북아프리카와 나일을 들러 귀환했다. 이집트 나일 삼각주 북서부의 아나리스 시는 기원전 1640-1530년까지 국제무역을 육성한 힉소스인들이 통치하고 미노스인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고대 키프로스는 구리의 원산지로 청동기 시대 인기가 좋았다. 

 이 번영은 기원전 1200년경 미케네와 미노스, 히타이트가 붕괴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적들이 에게해에 득세하며 끝난다. 람세스 3세는 기원전 1187년 나일에 침입한 이들은 막느라 전쟁을 치뤄야 할 정도였다. 기원전 1000년 경이 되어야 동지중해에 다시 안정이 찾아온다. 레반트 연안의 비블로스와 티레, 시돈의 페니키아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자줏빛 염료 무역을 장악해 부를 쌓았다. 

 페니키아인은 육로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만과 페르시아만, 이집트와 홍해를 거치는 교역로를 장악했다. 그들은 해상무역에 집중해 기원전 1000-800년 시칠리아에서 샤르데냐가지 고대 동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해 카르타고와 우타카에 전초기지를 수립한다. 그들은 그리스 포카이아인과 경쟁했으나 승리해 일부 그리스 식민지를 제외한 지중해 전 해안 지역을 석권한다. 

 기원전 500년이 되자 개방형 해적선 대신 세삼하게 설계한 전함이 등장한다. 충각이 달리고 병사가 서서 싸울 수 있는 갑판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노잡이는 보호 받으며 바닥에 격리되어 노를 저을 수 있어 속도가 높아졌다. 전함을 더 빨라지고 더 낮아지고 날렵해졌다. 이단 배치 노는 삼단 노선으로 진화한다. 

 아테네의 항구 피레우스는 교역로의 광대한 그물의 중심이다. 아테네는 30만의 시민을 위해 연간 800척의 분량의 곡물을 수입했다. 로마인들은 농부 군인으로 해상무역 전문가는 아니지만 해적 소탕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들은 대규모 무역과 곡물 운송 사업에 뛰어든다. 


3. 몬순 세계

몬순세계는 몬순의 영향을 받는 동아프리카 해안, 홍해, 인도, 스리랑카, 동남아, 중국을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몬순 계절풍은 예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 해안을 따라 인도로 항해가 쉽다. 홍해는 나일강과 연결되며 페르시아만은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과 연결된다. 교역의 최적조건인 셈이다. 

 몬순계절풍은 11월-3월 북동부에서 불어온다. 이건 비교적 얌전하다. 5월-9월은 남서부에서 불어오고 이건 상대적으로 강하고 스콜이나 폭풍을 동반한다. 고대 페르시아만에서는 연안에서 갈대에 역청을 발라 방수처리한 보트를 썼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야자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목재가 없었다. 배로 쓸만한 좋은 목재는 인도 서해안에 풍부했다. 

 인도는 거대한 아대륙 국가로 자급자족적 국가라 해안에 큰 관심이 없었다. 기원전 2000년 하라파 문명의 요람인 인더스강 유역이 장거리 상업의 중심지였다. 인도의 사정이 이러하니 무역의 중심은 메소포타미아였다.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은 인도의 조선공들에게 배운 기술인 널을 꿰멘 배를 타고 다니며 인도양 연안 항해의 큰 비중을 담당했다. 4-6세기 중국의 배들이 인도와 교역했다. 6세기 스리랑카는 중국과 페르시아가 만나는 기점으로 거래상품은 비단이었다.

 이슬람이 부상하자 거대한 상업적 팽창이 인도양을 감쌌다. 아랍의 배를 페르시아에서 광저우까지 진출하다. 아랍의 배는 널을 티크나 코코야자로 만들었다. 티크는 매우 오래가고 작업이 쉽고 인도 남부에서 널리 자란다. 코코야자는 몰디브와 라카티브 제도에 풍부하다. 배는 용골에 가로 널을 꿰메 붙이고, 짝을 지어 가지런히 맞댄 널을 끄트머리에 단순한 작은 송곳으로 힘겹게 구멍을 꿇고 코코넛 껍질로 만든 거친 밧줄로 통과시키는 식으로 건조했다. 이는 쇠못배도다 약하고 물이 샜다. 역청이나 송진을 고래기름과 혼합한 뱃밥으로 이음새의 틈을 매우고 생선기름으로 널을 방수처리했다. 그래서 환기가 어려운 갑판아래는 악취가 심했다. 

 대형삼각돛은 사각에 비해 배가 바람에 훨씬 가깝게 붙어 범주하는 것이 가능했다. 해안 가까이 붙어 항해하는데 유리해 인도양 무역선에 안성맞춤이었다. 다만 맞바람에 약하고 뒤에서 바람을 받는 경우 효율이 낮았다. 


4.동아프리카

 바스코 다가마가 1497년 잠베지강 어귀에 도달했을 때 이미 몬순 무역은 규모가 상당했다. 아프리카는 철, 금속, 가죽, 황금, 구리, 노예등의 상품의 무한한 공급지였다. 동아프리카 해안은 연중 대부분의 기간 북동 몬순 계절풍이 불었다. 이 지역은 인도양 세계의 일부로 내륙과 사회적 유대로 매끄럽게 연결된 곳이다. 아자니아 본토와 마다가스카르를 비롯한 앞바다 섬들은 매우 다양한 환경을 제공했다. 

 북쪽은 반건조 기후, 남쪽은 사바나와 맹그로브 습지, 열대 우림. 물고기와 조개가 풍부하고 목재가 많으며, 산호도 건축에 이용이 가능했다. 동아프리카의 철광석과 목재는 초기 교역조건으로 매력적이었다. 이후에는 황금과 상아, 노예가 상인들을 끌어당겼다. 상아는 인도의 것보다 단단해 조각에 유리해 인기가 좋았다. 

 아프리카의 맹그로브 장대는 중동 여러 도시의 가옥 지붕을 이었고 노예는 수입되었다. 노예들은 유프라테강 저지대의 습지 일부에서 물을 빼는 역할을 맡았다. 무역선들은 동아프리카의 당나라의 도자기를 실어 날랐다. 페르시아만의 상선들은 아프리카 상아와 인도네시아 용연향을 인도와 스리랑카, 남중국해에도 운송했다. 잦은 교역으로 소규모 이슬람 사회가 동아프리카 해안에 형성되었다. 

 아라비아, 페르시아, 아자니마 무역은 9세기 후반 당나라가 멸망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노예반란으로 쇠퇴한다. 하지만 서기 첫 천년 후반기가 되자 지중해에 중대한 정치 사회적 변화가 나타난다. 남부 독일에 신성로마제국에 등장하고 비잔틴 제국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북아프리카에 파티마 왕조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술, 수공업, 정교한 건축, 사치품과 원자재 수요가 증가했다. 

 이후 대략 800년간 아프리카에서 금이 수출되었고 이는 당시 글로벌 경제의 중심 요소였다. 


5. 알류트 열도

 이곳은 습기가 많고 비교적 따뜻한 남서풍이 북쪽으로 불어서 연중 1/3기간 시계를 심각하게 제한한다. 곳곳에 바위섬이 많고 거센 풍랑이 있어 항해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아한대 치곤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고지대 호수의 민물이 매우 맑고 해안은 상륙에 적합하다. 그리고 바다사자와 바다표범, 고래, 대구, 넙치 등 해양생물이 풍부하다. 그래서 초기부터 해양사회가 발전했다. 

 북극권의 선박은 뼈나 유목으로 프레임을 짜고 힘줄로 묶어 유연한 선체구조를 가진다. 다음 바다사자나 표범의 가죽으로 덮는다. 가죽을 프레임에 단단히 고정하지 않는데 프레임 자체도 다소 느슨하다. 이는 유빙이나 부빙에 배가 부딪히 때 충격을 완화하여 침몰을 막기 위해서다. 그리고 배가 가벼워 얼음위로 올리기가 쉽다. 이 가죽보트는 프레임이 유연해 형태를 변화시키기도 쉽다. 그래서 시시각각 항해형, 사냥형, 적재형, 이동형으로 변화한다. 

 북극권의 배 바이다르카는 제작에 수개월이 소요된다. 일단 용골과 뼈대인 유목을 모으는 것이 어렵다. 턱처럼 생긴 이물이 물의 저항을 줄이고 노젓는 사람이 내는 속도 향상에 기여한다. 고래 수염으로 묶은 상부 프레임은 속도와 내향성에 기여하고 바다사자 가죽 덮개는 선체를 덮어 방수를 한다. 

 알류트 지역은 전통적으로 해양생물을 사냥하기에 해안거주를 한다. 650-750년 대규모 해안마을이 사라지고 연어를 따라 강으로 거주지가 이동했고 1450년이 되어야 다시 해안으로 거주지가 돌아왔는데 이는 800-1200년 중세 온난기로 대양순환저해로 해수온도가 상승해 해양생산성이 저해했기 때문으로 추정되다. 알류트인의 대형보트 제작에는 바다사자의 가죽덮개가 필수인데 보트 한대당 바다사자 15-20마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바다사자의 감소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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