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익스프레스 - 길고 쓸모 있는 인생의 비밀을 찾아 떠난 여행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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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전 유행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저자가 비슷한 개념으로 프랭클린 익스프레스란 책을 냈다. 한국에서 스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크게 인기를 끌었는지 서문에 한국독자를 위한 글을 좀 썼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인기를 끈 것은 아마 제목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도 그 책의 제목에 끌려서 그것을 봤었다. 물론 책은 실망스러웠다. 이 책도 사실 같은 부류라 생각되어 보지 않으려 했지만 우리 독서토론회 책이라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다. 책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보단 좀 나았지만 볼만한 책은 아니란 생각이다. 조금 얻게 된 점은 벤자민 프랭클린에 대한 인물에 대해 약간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단 점이다.

 각 나라는 화폐에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의 도안을 넣는다. 국방, 문화, 예술, 과학이든 무엇이든 말이다. 한국은 이순신, 이이, 이황, 세종, 신사임당이 들어간다. 시기상 모두 조선시대에 편중된다. 그리고 이순신을 제외하면 이이, 이황은 유학자다. 물론 세종은 종합적 인물이다. 신사임당은 최고가액에 들어갈만한 인물인지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하여튼 미국에는 1$, 2$, 5$, 10$, 20$, 50$, 100$ 지폐를 발행하는데 이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이 도안으로 사용되는 것은 10달러와 100달러 두 경우 뿐이고 이 중 무려 최고가액인 100달러에 벤자민 프랭클린의 도안이 사용된다. 그만큼 이 사람은 미국 역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책 '프랭클린 익스프레스'는 저자가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따라 다니며 그의 탄생부터 평생의 공간과 주요 사건을 탐색하며 단상을 쓴 책이다.

 나는 벤자민 프랭클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가 미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이고 연으로 번개 실험을 할 정도의 과학자라 상당한 교육을 받은 인텔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의외로 그의 가방끈이 상당히 짧다란걸 알 수 있었다. 그가 교육을 받은 겨우 10세까지였다. 이는 그의 집안이 가난해서도 그가 공부를 못해서도 아니였다. 벤자민의 집은 영국에서 건너온 귀족 집안은 아니었어도 가난한 집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벤자민은 타고난 성품이 실용적이고 종교에 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는데 그것이 그의 아버지를 거슬리게 했었던 것 같다. 저자는 그것이 그의 학업 중단의 주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것은 주요 성직자로 나가는 것이었는데 벤자민의 아버지가 보았을때 그것은 아들의 성미로 보았을 때 가망없는 것이거나 오히려 위험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대신 벤자민은 책을 사랑했기에 그것을 통해 꾸준히 학습했고 다양한 사람과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배워나갔다. 당시에는 책이 귀했던 시기였기에 평균적인 지식인의 집에는 10권 정도의 장서가 집에 있었는데 벤자민 프랭클린 사망 당시게 그의 집에는 무려 4276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당시 미국에서 최대의 개인 장서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젊어서 한 때 채식주의를 고집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돈을 아껴서 책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보스턴에서 형 제임스의 제자로 들어가 도제관계가 된다. 즉, 인쇄공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런데 형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당시 도제 관계는 엄격했다. 7년간의 관계는 사실상 법적 계약에 가까웠다. 벤자민은 당시 어린 나이에 다른 필명으로 글을 기고하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이것을 형 제임스에게 들키고 만다. 이것을 괘씸하게 여김 형과 마찰이 생기고 벤자민을 형과 다툼끝에 뉴욕을 거쳐 필라델피아로 떠난다.

 당시만 해도 필라델피아는 매우 작은 도시였다. 그는 형과의 도제계약을 깼기에 체포될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젋었던 그는 거기서 인쇄공으로 일한다. 젊었던 그는 자리를 잡는 듯 했으나 그곳 총독의 권유로 런던으로 향한다. 런던에서 그는 커피하우스를 경험한다. 커피하우스는 당시 새롭고 흥미진진한 발상이 떠오르고 최신의 뉴스가 모이는 곳이었다. 그는 여기서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고 성장하여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는다. 프랭키라는 아이였는데 천연두로 어려서 죽고 만다. 벤자민은 당시 조잡한 천연두 예방접종에 긍정적이었는데 아이에게 이것을 접종하는 것을 주저했던 것을 평생 후회한다. 당시는 계몽주의 시대로 아마추어의 시대이기도했다. 당대의 놀라운 과학적 발견은 대개 벤자민 프랭클린처럼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아마추어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미국은 식민지이자 변방의 후진국으로 과학장비가 크게 부족했는데 벤자민은 영국에서 쌓은 네트워크로 인해 실험도구와 최신 전기 관련 문헌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전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금의 전기배터리, 양과 음, 양극, 음극, 전도체, 축전기, 충전, 방전의 용어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그는 전하가 새로운 물질의 생성이 아닌 전류의 재분배로 일어나는 것이고 전기가 늘 만물에 존재한다는 것을 통찰했다. 또한 전하량이 보존되고 전기는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질 뿐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전기가 통하는 뾰족한 물질이 전기를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관찰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미 전역에서 늘 일어나는 번개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피뢰침을 창안했다. 그는 피뢰침의 발명 그리고 연을 통해 번개를 끌어들이는 실험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전기를 향한 그의 이러한 놀라운 통찰과 호기심은 딱 6년간 만 지속되었다. 아쉬운 순간인데 그의 정신적 에너지가 공공 분야로 향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미국에는 공공병원과 의사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대학을 나온 사람도 인구의 10%에 불과했다. 당시 보스톤을 찾은 스코틀랜드 의사 윌리엄 더글러스는 북미의 의료계에 대해 질병보다 의사가 더 위험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벤자민의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타고난 통찰력으로 납 중독 이론을 세우고, 일반 감기이론을 정립했고 천연두 예방접종을 홍보하고 전기치료와 음악 치료를 시도했다. 그는 환기와 규칙적 운동이 대중화하기전에 이미 그 효과를 신봉하고 실천했다. 그래서 84세까지 장수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펜실베니아 의회에 공공병원 건립을 주장하며 자신이 기부금을 모아오면 그만큼 기부할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무려 2700파운드를 모아와 의회가 어쩔수 없이 그 이상을 기부하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펜실베니아 병원이 1752년 2월 11일 건립된다. 

 그는 이후 50이 넘어 런던으로 간다. 이후 런던에서 상류층과 교류를 맺으며 식민지 체신부 장관으로 오래 생활하지만 식민지와 본국의 관계가 악화하며 그의 말년도 좋지 않아진다. 68세가 되자 그는 영국 고위 관료가 모인 앞에서 투계장에서 공개 모욕을 당한다. 그리고 체신장관 대리 자리에서도 쫓겨나고 아내 데보라의 건강이 악화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영국과의 타협을 시도하나 결국 돌이킬수 없는 길을 갔음을 깨닫고 귀국한다.

 1775년 귀국하자 전쟁은 이미 발발한 상태였다. 식민지인들은 저항투사로 귀국한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15년이나 영국에 체류한 그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미국은 그를 체신장관에 임명했다. 벤은 미국의 화폐 도안을 디자인했고 전쟁에 필요한 화약을 만들기 위한 질석 생산을 가속화했다. 에세이와 노래를 만들어 영국군을 조롱하고 경험이 부족한 독립군을 격려하기도 했다. 반면 벤의 아들 윌리엄을 아버지와 다르게 끝까지 영국왕에 충성하며 뉴저지와 총독으로 남아 아버지를 곤란하게 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주요 업적의 하나로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한다. 토마스 제퍼슨은 이를 종교적 권위에 기대어 작성했다. 그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신성하고 부인할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썼는데 벤자민이 여기서 신성하고 부인할 수 없는 이라는 부분을 자명한으로 수정했다. 종교적 부분을 이성으로 바꾼 것이다. 

 한편 미 정부는 벤자민 프랭클린을 프랑스에 외교관으로 파견한다. 당시 프랑스는 7년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하여 여력이 없었지만 영국에 원한이 깊었다. 프랑스의 봉불루아르는 필라델피아를 방문하여 미국을 탐색하였는데 그는 미국이 형편없었음에도 본국에 그들의 전력을 과대평가하여 보고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조심스레 미국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벤은 프랑스에 방문한다. 설득은 쉽지 않았다. 지난 세기 프랑스는 식민지를 두고 영국과 4차례나 전쟁을 벌였고 루이 16세는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여기에 영국 외교관들은 미국이 오합지졸이라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고 실제 미국은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상하게도 프랑스내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의 인기가 상당히 높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워싱턴 장군이 전세를 역전시켜 전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1777년 12월 4일 미국이 새러토가에서 대승을 거두어 8천명의 영국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분위기가 바뀐다.

 프랑스는 이것을 기점으로 전폭지지를 하기 시작한다. 프랑스는 벤자민과 2개의 조약을 맺고 대출과 증여 형태로 무려 4800만 리브로(지금 가치로 14억 달러)이상을 원조한다. 여기에 프랑스 군함과 병사를 직접 파견한다. 이런 지원을 얻은 결과 미국은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다.

 결국 벤자민이 프랑스에 체류한 상태에서 미국은 영국의 독립협상을 맺게된다. 협상은 매우 지리했다. 영국은 패배했음에도 조약에 쉽게 응하지 않아 2년간 협상이 이뤄진다. 여기서도 벤은 강한 압박에도 침착하게 협상에 응해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낸다. 결국 미국은 서쪽 경계를 미시시피강 유역까지 얻게 된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거의 일평생 노예 소유주이자 노예 거래로 이득을 취했다. 물론 그는 노예를 많이 거느리지는 않았다. 겨우 7명 정도를 거느린 것으로 추정된다. 토머스 제퍼슨이 수백을 거느린 것과 비교하면 아주 적다. 게다가 그는 만년에 더 이상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고, 조심스레 노예제 폐지론으로 기울었으며 죽기직전에는 노예제를 적극 반대했다. 그는 84세까지 장수했고, 쓸모있는 긴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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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대항해 - 뗏목과 카누로 바다를 정복한 최초의 항해자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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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간은 지구 각지로 퍼져나갔다. 인간은 육상 생물이기에 우선적 경로는 당연히 이동이 적합한 육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는 70%가 물로 뒤덮여 있다. 그렇기에 바다는 어쩔수 없이 때론 이동의 경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바다는 깊고, 땅보다 훨씬 이동하기 어려우며, 방향과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고, 식량과 식수도 없으며, 거센 파도와 풍랑이 언제든지 생존을 위협했다.물론 디젤엔진과 첨단 항법장치가 개발된 지금 바다는 과거만큼 인간에게 도전의 대상이자 경외, 위협이지 않다. 책 '인류의 대항해'는 산업화 이전 바다로 진출하고 도전했던 과거 인류의 교역과 진출의 역사를 다룬다. 


1. 동남아와 태평양

 빙하기에 동남아 지역은 지금의 인도차이나 반도와 섬들이 연결된 커다란 대륙인 순다와 호주 및 인근의 섬들이 연결된 사훌이라는 커다란 대륙이 있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해류와 바람이 비교적 예측이 용이해 항해에 적합했고 줄줄이 분포한 높고 낮은 섬이 많아 기준 가시선 항법에도 좋았다. 과거의 항해는 무엇보다 가까운 시간내에 육지로 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육지가 항상 보이는 곳에서만 항해하거나 일련의 섬들을 따라 항해하는 방법을 주로 이용했다.  

 바다에서 육지 발견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상적인 조건에서 카누에 탄 사람은 대기가 빛을 굴절시키는 것을 감안해 지구의 곡면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 멀리 볼 수 없다. 여기에 구름이나 옅은 안개, 거품이라도 생긴다면 시계는 상당히 나빠진다. 

 그런데 동남아 지역은 해역 전반의 기상상태가 양호하고 센바람이 비교적 장기간 없어 육지 발견과 항해가 좋다. 여름 몇 달간 몬순으로 북서풍과 북서해류가 남으로 이동시켜주고, 겨울에는 남동 무역풍과 북쪽해류가 북으로 이동을 시켜준다. 이 패턴으로 계절간 방대한 지역을 이동하며 흩어진 섬사회를 탐험하고 식민화하고 교역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항해가 용이해도 도구가 필요하다. 바로 선박이다. 최초의 배는 뗏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뗏목은 섬유질의 끈으로 나무들을 엮기에 끈이 나무를 파고들지 않아 좋았다. 다음 등장한 수단은 갈대보트다. 이는 매우 가벼워 뭍으로 쉽게 옮길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방수처리를 해도 갈대 자체가 물을 쉽게 먹어 오래가지 못한다. 다음으로 등장한 쓸만한 배가 카누다. 

 통나무 카누는 몸통 속을 파내서 쉽게 만들지만 길고 폭이 좁다. 그래서 안정성이 낮고 수송력도 적다. 뱃전이 낮아 내부로 물도 쉽게 들어온다. 그래서 나온 해법이 아웃리거를 달거나 쌍둥선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카누의 안정성과 수송력이 몰라보게 좋아진다. 그리고 카누에 돛대와 돛의 설치도 가능해진다. 

 2만 5천년전 후빙하기의 항해자들은 솔로몬 제도까지 정착한다. 1만 3천년전 마우스섬까지 간 항해자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들은 섬 동물을 너무 많이 사냥해서 회색늘보주머니쥐, 주머니오소리, 왈리비들의 사냥감을 섬에 들여오기도 했다. 뉴기니와 비스마르크 제도는 여러 열대작물이 유래한 곳인데 식량이 되는 토란, 사탕수수, 일종의 바나나 종이 있는 곳이다. 이런 개량종 식물이 등장하여 카누 선장들은 토란과 마 같은 작물을 이용하여 식량을 배안에 저장하여 장기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잦은 항해에도 남태평양의 인구는 좀처럼 늘지 않았다. 이는 말리라이가 옮겨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최소 2종의 말리리아 원충이 수천년전 정착자들을 따라 순다에서 사훌로 이동했다. 말리라이가 열대지역의 섬들에 퍼쳐 모기 서식지 보다 높은 뉴기니의 고지대 지역만 높은 인구 밀도가 유지되었다. 

 기원전 1600년 경 뉴브리튼 섬의 위타리 섬이 대규모로 폭발한다. 이 대재난 직전이나 직후 정도에 이전에 비해 더 크고 튼튼한 카누를 탄 사람들이 서쪽에서 비스마르크 제도에 도착한다. 이들을 라피타인이라 한다. 이들은 기원전 1500년가지 오세아니아 근해에 정착하고 향후 2-3세기 동안 이동하지 않고 토착민과 통혼하며 융화한다. 

 라피타인은 새로운 식량을 가지고 오는데 그로 인해 수렵에 의존하던 섬 경제에 유연성이 생겼고 식량의 저장이 가능해 장거리 항해능력이 생겨났다. 이들의 쌍동선 카누는 비록 느린 속도였지만 거의 맞바람의 60도 각도에서도 항해가 가능했다. 라피타인들의 섬 이동은 의도적 식민화 과정이었다. 이는 인구압력이나 교역, 차남들의 기회 탐색이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딴 섬들은 자급자족이 어려웠기에 교역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섬들간에는 이런 교역 구조를 정례화하기 위한 전통이 존재했다. 그것이 쿨라 교환관걔다. 두 종류의 교환물품인 빨간조개껍대기와 하얀조개껍데기가 각각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으로 섬들을 돌았다. 이 물품이 섬에 오는 것은 섬의 위신 문제였고 물품이 오가며 다른 물품의 교환이 이뤄졌다. 의례에 참여하는 자들간에는 서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교역의 날짜는 정기적이고 주기적이며 신중했다. 이런 식으로 섬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의존을 정례화했다. 

 라피타인의 진출은 사모아섬까지였다. 사모아 섬 동쪽은  섬이 더 작고 고립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무려 1800년간 라피타인의 후손은 여기에 머문다. 서기 1000-1300년이 되어서야 동태평양 지역의 식민화가 이뤄진다. 


2. 에게해

 에게해는 빽빽한 섬과 강한 바람, 짧고 가파른 파도로 인해 건너기 만만치 않은 바다다. 그리스 앞바다엔 에비아, 크레타, 로도서, 레스보스 4개의 큰 섬이 있고 그 가운데 키클라데스제도가 있다. 초창기 항해가들에게는 다행스럽게 이 키클라데스제도의 섬간 거리가 10-20km정도로 가까웠다. 키클라데스제도는 건조지역으로 땅이 척박하다. 즉, 식량과 식수 확보가 어렵다. 하지만 석기시대 수렵민의 필수품인 흑요석이 풍부하다. 특히 밀로스 섬에 많았는데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많이 낮아 밀로스섬까지 가기 쉬웠다. 

 메마른 땅이지만 작물과 가축을 동반한 영구정착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4천년 전 낙소스섬에 농경인이 정착했다. 대개 대규모, 중간급의 섬부터 정착이 시작되었다. 키클라데스제도에서는 보리, 밀, 콩류가 자라고 염소와 양이 척박한 섬의 사면에서 살수 있다. 하지만 생산성이 낮아 인구 부양력이 낮고 이는 섬 사이의 고도의 상호의존성을 요구했다. 

 나일강 유역은 질 좋은 목재가 부족했다. 파라오들은 부피가 큰 목재 수송을 위해 해상무역을 했다. 삼나무 무역은 지금의 베이루트은 비블로스를 국제무역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그래서 레바논의 삼나무 무역은 기원전 2200년경까지 수세기간 번영했다. 레바논으로의 여정은 여름철의 연안 항해가 가장 많았다. 

 기원전 2000년 이집트의 배들은 크레타에 도달했다. 여름이면 우세한 북풍으로 지중해 연안을 따라 터키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키프로스 크레타 에게해에 도달했다. 초여름엔 에테시아 바람을 타고 북아프리카와 나일을 들러 귀환했다. 이집트 나일 삼각주 북서부의 아나리스 시는 기원전 1640-1530년까지 국제무역을 육성한 힉소스인들이 통치하고 미노스인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고대 키프로스는 구리의 원산지로 청동기 시대 인기가 좋았다. 

 이 번영은 기원전 1200년경 미케네와 미노스, 히타이트가 붕괴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적들이 에게해에 득세하며 끝난다. 람세스 3세는 기원전 1187년 나일에 침입한 이들은 막느라 전쟁을 치뤄야 할 정도였다. 기원전 1000년 경이 되어야 동지중해에 다시 안정이 찾아온다. 레반트 연안의 비블로스와 티레, 시돈의 페니키아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자줏빛 염료 무역을 장악해 부를 쌓았다. 

 페니키아인은 육로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만과 페르시아만, 이집트와 홍해를 거치는 교역로를 장악했다. 그들은 해상무역에 집중해 기원전 1000-800년 시칠리아에서 샤르데냐가지 고대 동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해 카르타고와 우타카에 전초기지를 수립한다. 그들은 그리스 포카이아인과 경쟁했으나 승리해 일부 그리스 식민지를 제외한 지중해 전 해안 지역을 석권한다. 

 기원전 500년이 되자 개방형 해적선 대신 세삼하게 설계한 전함이 등장한다. 충각이 달리고 병사가 서서 싸울 수 있는 갑판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노잡이는 보호 받으며 바닥에 격리되어 노를 저을 수 있어 속도가 높아졌다. 전함을 더 빨라지고 더 낮아지고 날렵해졌다. 이단 배치 노는 삼단 노선으로 진화한다. 

 아테네의 항구 피레우스는 교역로의 광대한 그물의 중심이다. 아테네는 30만의 시민을 위해 연간 800척의 분량의 곡물을 수입했다. 로마인들은 농부 군인으로 해상무역 전문가는 아니지만 해적 소탕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들은 대규모 무역과 곡물 운송 사업에 뛰어든다. 


3. 몬순 세계

몬순세계는 몬순의 영향을 받는 동아프리카 해안, 홍해, 인도, 스리랑카, 동남아, 중국을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몬순 계절풍은 예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 해안을 따라 인도로 항해가 쉽다. 홍해는 나일강과 연결되며 페르시아만은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과 연결된다. 교역의 최적조건인 셈이다. 

 몬순계절풍은 11월-3월 북동부에서 불어온다. 이건 비교적 얌전하다. 5월-9월은 남서부에서 불어오고 이건 상대적으로 강하고 스콜이나 폭풍을 동반한다. 고대 페르시아만에서는 연안에서 갈대에 역청을 발라 방수처리한 보트를 썼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야자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목재가 없었다. 배로 쓸만한 좋은 목재는 인도 서해안에 풍부했다. 

 인도는 거대한 아대륙 국가로 자급자족적 국가라 해안에 큰 관심이 없었다. 기원전 2000년 하라파 문명의 요람인 인더스강 유역이 장거리 상업의 중심지였다. 인도의 사정이 이러하니 무역의 중심은 메소포타미아였다.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은 인도의 조선공들에게 배운 기술인 널을 꿰멘 배를 타고 다니며 인도양 연안 항해의 큰 비중을 담당했다. 4-6세기 중국의 배들이 인도와 교역했다. 6세기 스리랑카는 중국과 페르시아가 만나는 기점으로 거래상품은 비단이었다.

 이슬람이 부상하자 거대한 상업적 팽창이 인도양을 감쌌다. 아랍의 배를 페르시아에서 광저우까지 진출하다. 아랍의 배는 널을 티크나 코코야자로 만들었다. 티크는 매우 오래가고 작업이 쉽고 인도 남부에서 널리 자란다. 코코야자는 몰디브와 라카티브 제도에 풍부하다. 배는 용골에 가로 널을 꿰메 붙이고, 짝을 지어 가지런히 맞댄 널을 끄트머리에 단순한 작은 송곳으로 힘겹게 구멍을 꿇고 코코넛 껍질로 만든 거친 밧줄로 통과시키는 식으로 건조했다. 이는 쇠못배도다 약하고 물이 샜다. 역청이나 송진을 고래기름과 혼합한 뱃밥으로 이음새의 틈을 매우고 생선기름으로 널을 방수처리했다. 그래서 환기가 어려운 갑판아래는 악취가 심했다. 

 대형삼각돛은 사각에 비해 배가 바람에 훨씬 가깝게 붙어 범주하는 것이 가능했다. 해안 가까이 붙어 항해하는데 유리해 인도양 무역선에 안성맞춤이었다. 다만 맞바람에 약하고 뒤에서 바람을 받는 경우 효율이 낮았다. 


4.동아프리카

 바스코 다가마가 1497년 잠베지강 어귀에 도달했을 때 이미 몬순 무역은 규모가 상당했다. 아프리카는 철, 금속, 가죽, 황금, 구리, 노예등의 상품의 무한한 공급지였다. 동아프리카 해안은 연중 대부분의 기간 북동 몬순 계절풍이 불었다. 이 지역은 인도양 세계의 일부로 내륙과 사회적 유대로 매끄럽게 연결된 곳이다. 아자니아 본토와 마다가스카르를 비롯한 앞바다 섬들은 매우 다양한 환경을 제공했다. 

 북쪽은 반건조 기후, 남쪽은 사바나와 맹그로브 습지, 열대 우림. 물고기와 조개가 풍부하고 목재가 많으며, 산호도 건축에 이용이 가능했다. 동아프리카의 철광석과 목재는 초기 교역조건으로 매력적이었다. 이후에는 황금과 상아, 노예가 상인들을 끌어당겼다. 상아는 인도의 것보다 단단해 조각에 유리해 인기가 좋았다. 

 아프리카의 맹그로브 장대는 중동 여러 도시의 가옥 지붕을 이었고 노예는 수입되었다. 노예들은 유프라테강 저지대의 습지 일부에서 물을 빼는 역할을 맡았다. 무역선들은 동아프리카의 당나라의 도자기를 실어 날랐다. 페르시아만의 상선들은 아프리카 상아와 인도네시아 용연향을 인도와 스리랑카, 남중국해에도 운송했다. 잦은 교역으로 소규모 이슬람 사회가 동아프리카 해안에 형성되었다. 

 아라비아, 페르시아, 아자니마 무역은 9세기 후반 당나라가 멸망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노예반란으로 쇠퇴한다. 하지만 서기 첫 천년 후반기가 되자 지중해에 중대한 정치 사회적 변화가 나타난다. 남부 독일에 신성로마제국에 등장하고 비잔틴 제국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북아프리카에 파티마 왕조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술, 수공업, 정교한 건축, 사치품과 원자재 수요가 증가했다. 

 이후 대략 800년간 아프리카에서 금이 수출되었고 이는 당시 글로벌 경제의 중심 요소였다. 


5. 알류트 열도

 이곳은 습기가 많고 비교적 따뜻한 남서풍이 북쪽으로 불어서 연중 1/3기간 시계를 심각하게 제한한다. 곳곳에 바위섬이 많고 거센 풍랑이 있어 항해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아한대 치곤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고지대 호수의 민물이 매우 맑고 해안은 상륙에 적합하다. 그리고 바다사자와 바다표범, 고래, 대구, 넙치 등 해양생물이 풍부하다. 그래서 초기부터 해양사회가 발전했다. 

 북극권의 선박은 뼈나 유목으로 프레임을 짜고 힘줄로 묶어 유연한 선체구조를 가진다. 다음 바다사자나 표범의 가죽으로 덮는다. 가죽을 프레임에 단단히 고정하지 않는데 프레임 자체도 다소 느슨하다. 이는 유빙이나 부빙에 배가 부딪히 때 충격을 완화하여 침몰을 막기 위해서다. 그리고 배가 가벼워 얼음위로 올리기가 쉽다. 이 가죽보트는 프레임이 유연해 형태를 변화시키기도 쉽다. 그래서 시시각각 항해형, 사냥형, 적재형, 이동형으로 변화한다. 

 북극권의 배 바이다르카는 제작에 수개월이 소요된다. 일단 용골과 뼈대인 유목을 모으는 것이 어렵다. 턱처럼 생긴 이물이 물의 저항을 줄이고 노젓는 사람이 내는 속도 향상에 기여한다. 고래 수염으로 묶은 상부 프레임은 속도와 내향성에 기여하고 바다사자 가죽 덮개는 선체를 덮어 방수를 한다. 

 알류트 지역은 전통적으로 해양생물을 사냥하기에 해안거주를 한다. 650-750년 대규모 해안마을이 사라지고 연어를 따라 강으로 거주지가 이동했고 1450년이 되어야 다시 해안으로 거주지가 돌아왔는데 이는 800-1200년 중세 온난기로 대양순환저해로 해수온도가 상승해 해양생산성이 저해했기 때문으로 추정되다. 알류트인의 대형보트 제작에는 바다사자의 가죽덮개가 필수인데 보트 한대당 바다사자 15-20마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바다사자의 감소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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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독, 혼자 있는 시간의 힘 - 당신은 혼자 있는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조윤제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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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보지 않는 유형의 책이지만 보게 되었다. 현대인은 매우 바쁘고 혼자 있는 시간이 적다. 물론 과거보다는 가족의 수도 줄고, 강제적인 직장에서나 사회에서의 모임도 줄어들고 근무 일수와 시간 수도 줄어들어 혼자 있는 시간은 많아 졌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시간을 플랫폼과 SNS에 빠져있기에 그런 시간은 진정 혼자 있는 시간이라 보긴 어렵다. 저자는 여러 동양 고전의 명언을 들며 혼자 있는 시간에 자신을 휴식하고 만들어서 채워가야 한다고 말한다.

 몇 가지 인상에 남는 구절이 있었다. 

 "몸의 큰 부분을 따르면 대인이 되고, 작은 부분을 따르면 소인이 된다."

 공적인 역할을 충실한 것이 대인, 이기심만을 사리사욕을 채우는게 소인이란 의미다. 정치인은 마땅히 대인이어야 겠지만 대부분 소인인게 문제다. 유튜브에서 마치 자신이 대인인 것처럼 떠드는 자들도 대부분 소인이다. 진짜 대인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이긴 자를 미움과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힘들다. 서로 생각과 느낌이 다르기에 그렇다.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타인을 질시하지 않고 배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매우 어렵다. 타인이 나를 비추는 거울이란 것은 나를 괴롭히는 타인 역시 그 원인이 나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독서란 글줄과 글줄을 엮으며 행간에 자신을 채우는 행위다."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독서에서 책이 주는 지혜와 지식을 통해 역시 독자는 스스로 채워진다. 


 "총명함의 지혜가 있으면 어리석음으로 그것을 지키고, 공로가 천하를 덮을 사람이면 사양함으로 그것을 지키고, 용기와 힘을 세상을 떨칠 사람이면 두려워 함으로써 그것을 지키고, 온 세상 가득 부귀를 지니면 겸손함으로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도 무척 맞는 말이다. 내가 남보다 더 나은 부와 지위를 갖는다는 것은 자신을 무척 거만하게 만드는 행위지만 타인이 질시하게 만드는 행위다. 그걸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러한데 거만하게 내세운다면 지지를 얻기 힘들 것이다. 실제 인간사회의 초기 지도자들은 왕 정도로 독재가 되기 전이면 무엇이든 자신의 부족민들에게 자신의 부를 나누었다. 그러지 않으면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이런 좋은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 이걸 보고 깨달음과 치유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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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인간의 최후 - 세컨드핸드 타임, 돈이 세계를 지배했을 때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장수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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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릴 적 음악 교과서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있었다. 노래를 배우며 그래도 막연히 내가 어른이 되면 통일 정도는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고 내가 상당히 나이가 든 지금까지도 여전히 분단이 유지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이러다 곧 분단 100년을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한국의 분단은 더둑 고착화되는 느낌이다. 통일이 될 것만 같던 시기도 있었다. 70년대의 남북 기본 합의서 작성 때가 그랬고, 90년대에 동구권이 붕괴했을때는 가장 기대감이 컸으며, 김일성이 사망하고 북이 큰 경제위기를 겪었을 때,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노무현도 방문했을 때, 문재인의 중재하에 김정은과 트럼프가 만났을 때도 그러했다. 하지만 현실은 분단의 고착화다. 이미 북은 남한을 대한민국이라고 부를 만큼 거리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아무래도 정치는 민주주의,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를 띠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그렇다면 오래도록 독재와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북한 사람들이 정체성에 큰 혼란을 띠게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일부 새터민들이 그런 단면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수도 적고 탈북을 할 만큼 체제에 불만이 많았던 만큼 일반화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렇기에 먼 훗날 북한이 남한과 통일한다면 그 때의 북한 사람들은 사실상 마지막 '붉은 인간'이 될 것이다. 

 책 '붉은 인간'은 대충 구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에 자본주의가 태동한 2000년대 정도에 러시아인들은 인터뷰한 것을 엮은 책이다. 자료가 방대한 만큼 책의 두께도 상당하다. 모두가 인터뷰를 거의 그대로 실은 형태가 저자의 생각이나 말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반응은 사람 수 만큼 다양하지만 동일한 국가에서 동일한 사건을 겪으며 살아온 만큼 몇몇 공통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우선 소련에 대한 강한 향수다. 소련에 대한 거부감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인터뷰가 과거나치 독일의 침략을 물리치고 경제난 속에서도 미국과 패권전쟁을 벌였으며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고 사회주의 이상을 추구했던 소련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사실 이 제국이 소련 사람들에게 준 것은 고통 뿐이다. 2차 대전은 1천만 이상의 사망자를 만들었고, 스탈린의 독재는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으로 몰아갔으며, 미국과의 대결은 핵과 인공위성을 만들었음에도 이렇다할 생필품하나 만들지 못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은 역설적으로 그것음 감내하면서도 유지하고 번성시킨 제국에 대한 애착을 만든 느낌이다. 

 대부분의 인터뷰는 고르바초프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무너지고 소련이 러시아로 변모하며 지금의 자본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실행한 인물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소련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2000년대 초반의 러시아가 경제,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기에 그러한 상황을 초래한 고르바초프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또한 그가 지나치게 많은 영토와 핵을 해체한 것에 대한 불만도 컸다.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 초기에 러시아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들어서며 기대감도 컸던 것 같다. 맥도날드가 생기고 첨단 서구의 전자제품과 다양한 필수품은 눈이 돌아갈 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경제위기로 인해 화폐가치가 폭락하며 그런 대다수의 제품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과거의 화폐로 살 수 있었던 구 소련의 형편없는 제품을 그리워 할 지경이다. 또한 갑작스런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당시 군에 있었던 사람이나 정치에 인맥이 있던 사람들 주요 에너지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눈치 빠른 사람들에게 과도한 이익과 경제적 권력을 몰아주게 되었는데 그에 따른 소외감이 가장 큰 것으로 보였다. 이들을 긍정하는 인터뷰는 전혀 없었고 욕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비방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구소련에서는 이렇다할 유흥거리가 없어 사람들은 책과 극장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돈으로 갖가지 유흥거리와 소비거리가 들어오며 문화적으로 일차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타락에 대한 비방이 많았다. 

 독재자들에 대한 애착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에서의 초기 형편없는 대응 및 군사적 실패, 승전 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숙청을 벌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성공적으로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강력한 소비에트 국가를 완성시킨 인물론 평가받는 분위기 였다. 스탈린의 가혹함을 말하는 이는 거의 없었고 그리워하거나 칭송하는 경우가 많았다.

 러시아의 대규모 숙청은 소위 말하는 할당제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을 고발하거나 과도한 감시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소로 몰아넣었다. 때문에 소련에서는 과거 서로 동료였음에도 서로 고발을 했거나, 이후 복권되어 돌아와 같이 구소련의 비슷한 직장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이 공존하며 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복잡함이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었다.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동구권인 민족 전쟁의 장으로 변화하여 체첸이나 아제르바이잔, 동유럽에서 민족 청소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이런 잔상을 보며 소련이라는 울타리에서 잘 지냈던 과거를 그리워했고 어제까지만 해도 이웃이었던 사람들의 변화에 경악했다. 

 다수가 소련을 옹호했지만 그 체제를 강하게 비판한 사람도 있었다. 전쟁에 끌려가 처참한 상황에 맞이한 것, 수용소에 억울하게 끌려가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 경제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하는 사람도 소수 있었다. 사실 대다수가 그러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음은 언급한 것처럼 소련이라는 국가가 그것을 감내할 만한 것이었다는 집단적 생각에 갇혀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책은 무척 길기에 읽기가 쉽지 않다. 몹시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같이 공존했다. 지금의 한국에는 큰 의미가 없지만 언젠가 통일 한국에서 북한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부분이 많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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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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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을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맞이한다. 그리고 그 직전까지 건강을 다시 회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음에도 사실상 생명을 연장하는 수준에서 버티는 세월이 상당히 늘어났다. 이는 사실상 고통의 연장에 가깝다.하지만 과거의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가족들과 친지들 주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건강에 대한 관리가 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오래도록 앓던 증상이 갑자기 터지며 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과거의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시기도 빨랐지만 현대의 죽음은 외롭고 고통을 받는 기간이 길어졌다.

 인간은 분명 죽게 설계되어 있기에 나이가 들수록 생체지표가 급격히 나빠진다. 일생동안 턱근육은 40%, 아래턱뼈는 20%가 소실되어 약화된다. 이처럼 치악력이 약해지기에 인간은 나이가 들면 탄수화물 위주의 씹기 쉬운 식품을 위주로 섭취하고 이는 충치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선진국 사람은 대개 60세가 되면 평균 치아의 1/3을 손실하고 84세가 되면 40%가 손실된다.   

 그리고 혈관에도 문제가 생긴다. 나이가 들면 뼈와 이의 칼슘은 소실되나 다른 부분인 혈관과 관절, 근육, 심장판막, 폐 등에는 오히려 축적된다. 특히 혈관에 칼슘이 쌓이면 혈관 자체가 좁아지고 뻣뻣해져 고혈압이 유발된다. 그래서 65세가 되면 인구의 절반이 고혈압이 된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털이 하얗게 된다. 이는 색소세포의 감소때문이다. 색소세포는 수명이 수년 정도인데 젊을 때는 줄기세포가 이를 충분히 대체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이 줄기세포도 부족해져 50세 정도가 되면 머리의 절반에 흰머리가 된다. 그리고 피부세포에도 검버섯이 생긴다. 피부세포의 노폐물을 제거하는 기능이 점차 사라져 잔여물이 뭉쳐서 황갈색의 피로푸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는 땀샘의 기능을 저하시키기에 나이가 들수록 일사병과 더위에 취약해진다. 

 그리고 노인은 잘 넘어진다. 매년 35만의 미국인이 넘어져서 고관절 골절상을 읿고 이중 40%가 요양원행이 되며 20%는 다시 걷지조차 못하게 된다. 노인이 넘어지는 이유는 균형감각의 쇠퇴와 근육약화 네 가지 이상의 처방약을 복용하기 때문이다. 이 3가지 요인이 모두 있다면 1년 사이 낙상확률은 100%이고, 1가지만 갖고 있다면 확률은 12%로 떨어진다. 

 이처럼 나이가 들며 인간은 노인병이 다가온다. 하지만 미국에서 노인병 관련 전문훈련과정을 마치는 의사는 1년에 300명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의사와 병원은 노인병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노인병은 재정안정성에 크게 관련한다. 미 메디케어의 25%가 수명이 마지막 1년에 이른 환자들에게 사용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막판 1-2개월에 집중된다. 즉, 고통스러운 연명에 상당한 의료비용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관리를 하고 몸에 좋은 것을 먹고 하지만 그 시기를 다소 늦출 분 누구나 신체가 기능을 서서히 잃어 더 이상 일상을 할 수 없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두려워하는 일인 더 이상 자율적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오래도록 가족과 같이 살고 아이들을 키워낸 집에서 떠나게 되며, 자신과 같이 했던 가족 및 주변사람들과 떨어져 외롭게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거나 건강상 큰 위기를 겪게 되면 세계관 및 주변에 대한 행동이 변화한다. 어리고 성장기에는 자신이 못하던 것을 하려하고 도전적이며 관계를 넗히는 등 성장지향적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거나 고령이 되고, 건강상의 큰 위기를 겪고 나면 기존의 것을 유지하려 하고 사회적 관계도 좁혀서 기존에 친했던 주변인들과의 만남을 늘리는 등 안정지향적으로 변화한다. 

 때문에 책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죽음을 맞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개인적인 욕심 및 가족의 욕심으로 무리한 연명과 과도한 치료보다는 호스피스 등을 이용하고, 자신의 활동력을 온존하는 쪽으로 하여 가급적 자율적인 삶과 주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놀랍게도 적극적인 치료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수명을 연장하고 개인의 자율적인 생활시기를 늘렸다.

 요양원의 문제도 지적한다. 대부분의 요양원 및 요양병원은 다수가 좁은 곳에서 생활하여 개인적 생활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반려동물이나 식물등의 반입도 엄격히 제한되며 식생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개인에게 화장실과 공간을 개인적으로 허용하고 반려동물과 식물도 반입이 가능하며 때때로는 본인이 원하는 건강에 좋지 않은 불량식품을 허용한 요양원이 노년의 환자에게 훨씬더 좋았다. 이 경우 역시 수명과 자율적 생활이 가능한 시기가 연장되었다. 요양원이 갇힌 노인들이 모두의 반대에도 그토록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다.

 한국은 세계에서 3번째로 수명이 긴 나라다. 하지만 유교문화의 붕괴와 과도한 의료, 무수한 낮은질의 저렴한 요양원, 가족의 분리, 상대적으로 낮은 건강수명, 노인 빈곤 등으로 많은 노인들이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이 하고 있다. 과도한 치료보다는 삶의 질에 집중하고 그들을 집과 적어도 죽음이 가까워진 순간에는 가족과 함께하자는게 책의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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