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르메이르 - 빛으로 가득 찬 델프트의 작은 방 ㅣ 클래식 클라우드 21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평점 :
경험 상 한국 사람들은 서양의 그림 중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다빈치의 '모나리자',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를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유명해서일까, 아니면 언급 빈도가 높아서일까, 아니면 알기가 쉬워서일까. 하여튼 세 작품은 가장 인기가 높아 보이며 웬만한 한국인들도 알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고흐나 다빈치가 위 작품의 작가인건 잘 알고 있지만 의외로 진주 귀고리 소녀는 잘 알아도 정작 그 창작자인 페르메이르는 대개 모른다. 아무래도 페르메이르가 다른 둘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탓일 것이다.
책은 그런 페르메이르를 다룬다. 그를 알려면 먼저 당시 네덜란드를 알아야 한다. 네덜란드가 위치한 지역은 플랑드르라 불리는 저지대로 유럽 대륙의 3개 강인 라인 강, 마스 강, 스헬더 강이 북해로 들어가며 만든 삼각주다. 그래서 땅이 낮고, 습지가 많고 매우 습하며, 퇴적 지역이라 영양은 풍부하다. 즉, 농사가 잘 될 가능성은 높으나 땅이 침수가 잘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정착을 위해 인위적 노력이 필요하다보니 11세기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풍차는 이런 저지대의 물을 퍼내기 위한 자연동력 장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힘들여 좁을 땅을 개간했기에 각자의 사유재산 개념이 일찍이 정착했으며, 큰 제방이나 댐의 공사엔 대규모 협력이 필요했기에 협력에 대한 의지도 강하다. 네덜란드는 이렇게 신경작지이다보니 유럽에서 봉건제가 정착하지 못했고, 귀족이 소유한 땅도 매우 적었다.
이런 나라다 보니 실용적 분위기가 강했다. 남부인 벨기에 지역은 일찍이 사치품과 작물교역으로 부유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지역은 청어 교역이 중심이어서 가난했고, 부를 찾아 무역을 펼쳐나갔다. 이들은 노동을 중시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런 그들에게 칼뱅의 신교가 종교로 적합했다. 문제는 이 네덜란드 지역을 합스부르크가가 지배했으며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광신적 구교도였다는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에 강한 세금을 물리고 자국의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을 도입했다. 1566년 이에 대한 반발로 곳곳에서 성상파괴가 일어났고 알바공작의 1만 군대가 파견되어 전쟁이 일어난다. 무려 80년 전쟁으로 네덜란드는 1648년에야 독립한다.
네덜란드는 부유해졌고 동인도회사도 설립한다. 동인도회사의 수익을 나누기 위해 세계최초의 주식거래서도 설립한다. 이런 부를 바탕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세분화한 직업을 가졌고 이런 직업의 사람들을 그리는 것이 유행했다. 그림을 그리면 의뢰자들이 모두 동등히 나왔고 그에 따라 작업비를 부담했다. 그리고 이런 풍부한 수요를 바탕으로 무려 당시 700명의 화가가 활동하며 정물화, 초상화, 풍속화 등을 그렸다. 페르메이르는 이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당시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연간 100개 정도의 작품을 그렸지만 페르메이르는 고작 2-3개를 작업했다. 속도가 느렸고 마르는데 오래 걸리는 호두기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35개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초기 여러 그림을 그렸지만 결국 실내 인물화가 그의 전공 비슷하게 된다. 당시 화가들의 경쟁을 치열해서 자신들이 잘 그리는 부분에 특화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페르메이르도 그래 보인다.
페르메이르는 작품에서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우선 언급한 것처럼 실내 모습을 그렸다. 방의 모습은 하나같이 다 비슷한데 그의 작업실을 모티브로 한 경우가 많아 보인다. 실내에는 거의 십중팔구 창문이 왼편에 존재하여 빛의 효과를 드러내고, 배경이 되는 방의 벽 부분에는 유독 지도나 그림이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림은 그 내용으로 작품 전체의 분위기나 주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림에 유독 여인이 많이 등장한다. 남자가 등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지리학자'와 '천문학자' 정도다. 그리고 노란색과 푸른색을 선호했다. 이 중 푸른색은 고가의 라피스라줄리를 사용해서 경제적 부담을 줬다. 그는 여성들의 장신구로 진주를 선호했다. 그래서 진주귀고리 소녀의 귀고리가 돋보였고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다. 또한 악기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배우고 있거나 가르치는 장면들 그렸다. 등장인물들은 무언가에 열중하여 앞을 잘 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도 독특한 점이다.
그의 작품 중 최고로 여겨지는 진주 귀고리 소녀는 모나리자처럼 생각보다 크기가 작다. 이 그림은 초상화가 아니라 트로니로 구분되는데 초상화는 인물의 실제 모습이나 안정적 표정이나 상태를 그려내는 반면 트로니는 순간의 모습이나 특징, 표정등을 잡아내는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진주 귀고리 소녀는 소녀가 무슬림이 아님에도 터번을 착용하고 있고 입을 살짝 벌리고 옆을 살짝 돌아보는 모습은 초상화로 적합하지 않다. 진주귀고리 소녀에서 페르메이르는 그림의 윤곽을 정확하게 그리지 않았고 생동감 있는 입술과 눈빛, 귀고리를 강조하며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책을 보며 알았는데 연구결과 그냥 검은색인 진주귀고리 소녀의 배경은 사실 녹색 커튼임이 밝혀졌다. 세월이 오래 지나다 보니 변색된 것이다.
페르메이르는 말년이 불행했다. 부인 카트리나와 아이 17을 낳아 11명이 생존한 것인데 당시로선 과다한 생존률이어서 가계에 부담이 컸다. 그리고 그는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느렸지만 꾸준히 그의 그림을 고가로 구입해주는 후원자가 있었는데 그가 사망한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며 운하를 파괴하는 수법을 썼는데 그 과정에서 집안의 토지가 수몰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부업인 숙박업도 잘 되지 않았고, 그림도 수요가 줄어버렸다.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해 빚에 시달리다 사망한다. 페르메이르의 후원자가 수집한 그림들도 그 후계자들이 모두 사망하여 경매에 붙여졌다. 때문에 페르메이르는 아주 유명하진 않았음에도 그림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다. 그의 그림은 18세기부터 주목받기 시작하여 차츰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평생 네덜란드의 도시 델프트를 떠나지 않았는데 그가 그린 델프트 풍겨도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