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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한 작전 - 서구 중세의 역사를 바꾼 특수작전 이야기
유발 하라리 지음, 김승욱 옮김, 박용진 감수 / 프시케의숲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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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발 하라리를 '사피엔스'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된 후에, '호모 데우스', '극한의 경험'을 차례 대로 읽었다. '사피엔스'에 중독되어 다시한번 '사피엔스'의 희열을 느껴보고 싶어서, '호모 데우스'를 읽었으나, 그 희열을 100% 느끼지는 못했다. 그래서 '극한의 경험'을 읽었지만, 나는 여전히 굶주리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 번역된 4권중에서 내가 읽지 않은 마지막 책인 '대담한 작전'을 꺼내들었다. 영문명은 'Special Operations in the Age of Chivalry'였다. '기사도 시기의 특수작전'으로 직역된다. 기사도 시기의 특수작전을 하라리는 어떻게 해부했을까?

 

1. 친절한 출판사의 배려

  책을 읽다보면, 책의 내용은 훌륭하지만,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사진과 지도 등의 자료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서 곤란을 겪는 경우가 종종있다. 특히 세계사 책을 읽을 때는 해당 지명의 위치를 알길이 없기에 고등학교 사회과 부도를 펴들때도 있었다. 무책임한 저자와 불친절한 출판사에게 속으로 욕을 날리며 책을 읽는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은 유발 하라리가 첨부하지 않은 사진이나 지도를 친절하게 첨부하여 읽는 사람의 이해를 쉽게하려 노력한 흔적이 역역했다. 특히 144쪽에 제시된 서아시아 지역의 지도는 보두앵 구출작전이 진행되던 시기의 서아시아 판도를 이해하기에 적합했다. 작가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것은 출판사의 역량이다. 유발하리리의 '대담한 작전'을 돋보이게하는 출판사의 세심한 배려가 빛나는 책이다.

 

2.   유발 하라리의 빛나는 사료 분석 - 니자리파(하시신)

  영어의 assassination과 hashish와 관련 깊은 조직을 아는가? 많은 사람들이 '하사신'파를 떠올릴 것이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라는 책에서 아주 인상 깊었던 암살 조직이 '하사신파'였다. 암살을 할때 마약(하시신 hashish)을 먹거나, 쾌락의 정원을 맛본 전사들이 죽어서 다시한번 쾌락의 정원에 가기 위해서 암살에 용감히 나선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과연 이 이야기는 사실일까? 이슬람에 대한 자료가 워낙적기에 무비판적으로 믿었던 사실들을 하라리는 여러 종류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이들이 암살을 결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유발 하라리는 종교적 열정과 박해 받는 소수파의 생존술, '국영' 기숙학교 운영 등 실제적, 역사적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니자라파 피다이(암살자)의 암살 동력을 서술한다. 하라리가 '사피엔스'와 같은 대작을 쓸 수 있었던 밑바탕을 이러한 글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말이 나온김에 니자리파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자. 니자리파의 일화중에서 너무도 충격적인 일화가 있다. 니자리파의 우두머리 시난이 전령을 살라딘에게 보냈다. 살라딘이 2명의 호위병을 대동하고 전령을 만나려하자, 전령은 그 2명도 물려줄 것을 요청한다. 이를 살라딘이 거절하자, 전령이 2명의 호위병에게 말한다. "만약 내가 주인의 이름으로 이 술탄을 죽이라고 명한다면 그리하겠느냐?" 맘루크는 칼을 빼들고 명령만 내리라고 말한다. 전령이 2명의 맘루크를 데리고 떠나자, 살라딘은 시난과 화해한다. 물론, 유발 하라리는 이 이야기가 실화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지만, 이 일화 자체는 니자리파에게 기가 질리게 만든다. 흩어져 있는 수많은 니자리파가 몇년동안 암살예정자의 주위를 맴돌다가, 그의 심복이 되기도한다. 그들의 우두머리 시난이 명령을 내리면, 그들은 지체없이 암살예정자를 죽여버린다.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니자리파는 템플기사단, 병원 기사단은 암살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그랬을까? 이들 조직들은 특정 리더의 죽음이 조직 유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기사단은 관료적 조직이며 위계적인 규율로 유지된다. 어느 한사람이 암살로 죽으면, 새로운 사람이 조직을 이끈다. 반면 한사람의 탁월한 리더십에 의해서 움직이는 조직일 수록 니자리파의 암살효과가 극대화된다. 이부분을 읽으면서, 의열단이 1920년대 후반, 의열투쟁에서 독립군 육성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전환을 한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일본 지휘관 한두놈을 죽인다고해서, 독립을 일룰수는 없었다. 일본 지휘관놈 후임에 더 악독한 지휘관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3. 우리역사를 떠올리다.

  서양사를 읽는데, 한국사가 오버랩된다. 내가 한국인인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프랑스왕과 부르고뉴의 샤를 사이의 끊임 없는 암투와 독살 시도, 암살 시도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비교를 해보았다. 어찌하여 이리도 비열한 암투들이 성행할까? 그에 비하면 우리의 역사는 암살 혹은 독살이 적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덕일이 '조선왕 독살사건'이라는 책에서는 조선왕 4명중에서 1명이 독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의혹이며, 하나의 설일뿐이다. 반면에 프랑스왕과 부르고뉴의 샤를 사이의 암투와 암살 시도는 실제 역사기록이 남아있다. 기록되지 않은 독살시도는 또 얼마나 많을까?

  7장 '오리올의 방앗간'편에서 프랑수와와 카를 5세 사이에 대격전이 펼쳐진다. 카를 5세의 대군을 몽 모랑시 사령관은 청야전술로 대응한다. 청야전술!!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고구려가, 고려가, 조선이 외세이 침략에 대항해서 펼쳤던 전술이 청야전술이다. 우리의 전형적인 전술을 프랑스에서도 사용할 줄은 몰랐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공간은 다르지만, 전쟁의 전술은 서로 비슷할 수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4. 고전의 향연

  <도덕경(道德經)> 제 36장을 나는 좋아한다.장차 움츠리려면 반드시 반드시 펴고, 장차약하게하려면 반드시 강하게하고, 장차 피폐하려면 반드시 흥하게하고, 장차 빼앗으려면 반드시 주어라(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면, 반드시 먼저 나의 것을 주어야한다. 상대방을 약하게하려면 그들이 승리에 취해서 교마하게 만들어야한다. 그러면 그들은 스스로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래서 옛말에 '전성기의 왕은 섬기지 말라'는 표현이 있지 않은까? 부르고뉴의 전성기인 샤를 시기에 아이러니컬하게도 부르고뉴의 쇠락이 시작되었다. 암살과 협박, 거짓말로 부르고뉴는 프랑스에 대항할 수 있는 강략한 세력으로 부상한다. 전성기의 그는 교만해져서 이웃나라를 침범하여 영토를 계속 넓히려했다. 그 교만이 재앙을 가져왔고, '부르고뉴왕국'이라는 꿈은 사라지게 된다.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고 했지 않은가? 비열한 술수로 흥한 샤를은 자신의 비열한 술수에 빠져 몰락하게 된다.

  이러한 비극은 샤를에게만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맞수인, 프랑스의 루이도 만만치 않은 비열한 사람이다.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 납치를 일삼았다. 루이는 부르고뉴 영토를 거의 모두 자신이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했던 것처럼, 적들이 자신을 납치 혹은 암살할까봐 장원 주위에 도랑을 파고, 철창을 담처럼 둘렀으며, 석궁병을 배치했다. 비열한 행위를 일삼았던 자들은 자신도 그러한 비열한 행위를 당할까봐 두려움에 떠는가 보다. 성경에 '뿌린데로 거두리라'라는 말이 있다고한다. 샤를과 루이! 그들은 뿌린데로 거두었다.

 

  '사피엔스' 이후, 하라리의 마력이 내주위를 감싸고 있다.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는 나의 역사인식과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그의 책들을 더 열심히 찾아서 읽는다. 아직, 유발 하라리가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하기 전의 글이기에 기대했던 것 만큼의 희열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유럽의 기사도시기 특수작전을 이해하는 좋은 책인 것 만은 확실하다. 지나친 기대를 갖고 읽지 않는다면, 나름은 '특수작전'이 주는 재미를 느끼며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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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경험 - 유발 하라리의 전쟁 문화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희주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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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발 할라리!! '사피엔스'를 읽었을 때, 그에게 받은 강력한 계시(새로운 깨달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피엔스의 역사를 한권의 책으로 엮어 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새로운 역사로 바라보며, 나에게 강력한 계시를 주었다. 그의 전공이 중세 전쟁사이고, 한국에 번역된 책이 '호모 데우스'말고서도 2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모 데우스'도 '사피엔스' 만큼은 아니지만,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기에 그의 책을 더 읽기로 결심했다. '대담한 작전'과 '극한의 경험'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읽을 것이지를 고민했다. '대담한 작전'이 단편적인 에피소드의 모음으로 보인 반면에, '극한의 경험'은 유발 하라리 만의 통찰이 묻어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느껴졌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이전에 전쟁하는 인간 '호모 벨리쿠스'가 있다."라는 표지글이 나를 강력하게 끌어 당겼다. 그리고 책장을 넘겼다.

 

1. 고통이 우리에게 새로운 '계시'를 줄 수 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이 책에서 '계시(revelation)'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계시'라는 단어를 종교적 의미의 단어로 받아들인다면, 이 책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새로운 깨달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발 하라리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깨달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통이 우리에게 '계시'를 줄 수 있을까? 특히 극한의 경험인 전쟁을 통해서 '계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본다. '군대 갔다와야 사람된다.'라는 말을 흔히 듣고, 번지 점푸를 하거나 커다란 동물을 사냥하고, 고통을 참을 줄 알아야 성인으로 인정하는 풍습이 인류의 문화 속에 녹아 있다. '고통'이 새로운 '계시'를 준다는 인류의 인식은 과연 타당한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맴도는 화두이다. 우리는 이 화두에 앞서 해답을 얻었던 씻다르타의 경험을 되새겨 보아야할 것이다. 씻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고행'을 했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을 한다. 그리고 그 명상을 통해서 위대한 종교적 깨달음을 얻는다.

  반면 예수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 예수의 수난 등, 서양 근대초기의 문화속에는 고통을 새로운 깨달음이나 개종의 장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많이 있었다. 상해를 무거운 벌로 다스리는 서양인들! 백인들의 경우, 동양인들 보다 진통제 처방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고통을 잘 참아내지 못하는 백인들이 오히려 고통을 통해서 계시를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인식을 만들어 낸점이 아이러니컬하다.

  진정으로 전쟁이라는 극한의 체험이 인간을 종교적 계시,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 수 있을까? 전쟁 후에 군인들이 수도원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유발하라리가 지적했듯이, 수도원에 상이군인 수용시설로 많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전쟁이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는 결론은 유보되어야한다. 예수회를 만든 로욜라도 전쟁의 참상을 보고 종교적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이뤄진 독서와 명상이 그를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었다. 전쟁이 계시를 주진않았다. 깊은 성찰과 독서가 그에게 계시를 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경험이 종교적 계시를 주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은 왜일까? 뇌과학에서 입증되었듯이,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 단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뿐이다. 상이 군인이 은둔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합리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귀향한 군인을 부모 형제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기록을 유발 하라리는 전쟁이 이들을 성숙시켰기 때문이라고 서술했다. 이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풍파가 그들을 빨리 늙고 살기 등등한 존재로 만들었을 뿐이다. 대학에서 복학한 예비역들이 아저씨 처럼 나이들어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갈 것이다.

 

2, 한국군대 문화의 뿌리를 해부하다.

  흔히들 우리 군대문화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만주군과 일본군에서 군대생활하던 친일군인들이 한국군의 주류가 되었고, 그들이 만든 한국군에는 일본군에서 흔히보이는 구타와 얼차려 등의 비인간적인 악습들이 그대로 일제의 잔재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조국을 위해서 스스로 독립군에 입대한 군인들에게는 구타와 무조건적 강요가 필요 없을 것이다. 반면에 강제로 군대에 끌려와 자신과 상관없는 전쟁에 동원되는 사람을 움직이려면 구타와 강요는 필연적이다.

  현재 우리군의 모든 악습은 일본군에서 왔다는 선입견은 타당할까? 유발 하라리는 나에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군대가면 똑똑한 사람도 생각을 못하는 멍청한 행동을 한다. "내가 왜그랬을까?"라는 말을 외치며 얼차려를 받는 훈련병들을 생각하면, 군대에 들어와서 왜? 생각을 못하는 존재로 변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군대에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은 데카르트 때문이었다. 데카르트? 그는 위대한 철학자가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그가, 군인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데 기여를 했다니..... 그러나 사실이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의 젊은 귀족으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장교로 입대했으며, 30년 전쟁이 한창일때 보헤미아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가던 중에, 화로에 몸을 녹이다가 '고기토 에르고썸'을 생각해 낸다. 데카르트의 이론은 군대에 적용된다. 데카르트의 정신이 육체를 통제하듯, 장교들이 사병을 확고히 통제하도록 군대가 만들어진다. 머스킷총 발사에서 장전까지 32개의 개별동장으로 나눠 반복 연습시키고, 기계처럼 전장에서 총을 쏘도록 훈련시킨다. 아는 것이 가장 적은 사람이 가장 잘 복종한다. 사병은 생각하지 않는 육체적 존재로 전락한다. 오직 생각은 장교들이 할 뿐이다.

   정신과 육체라는 이분법적 생각! 그리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데카르트의 사상은 놀랍게도 한국군에서도 목격된다. 군에 입대하고 특히, 신병교육대에서 오직 생존만을 생각하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생각하는 존쟁기 보다는 조교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기계로 만들어졌다. 자대에 배치받고 나서도 시키는데로만 하면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계급이 올라가 생각을 해야할 때는 머리가 아팠다. 군대는 나를 기계적 존재로 만들어 갔다. 그 시초는 데카르트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3. 생각하는 군대가 강한 군대이다.

  17.18세기 구체제 군대는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철저히 유린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구체제의 사병들은 감시의 대상이었다. 언제 탈영할지 모르기에 산림에서 산개대형의 훈련을 하지 않았다. 오직 연병장에서 기계와 같은 반복된 훈련만을 했다. 기병은 적을 감시하기 보다는 보병의 탈영을 감시했다. 이는 군사천재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도 마찬가지 였다. 더욱이 프로이센 군대는 '태형'이라는 악습이 오랫 동안 남아있었다. '태형'과 같은 강한 체벌은 군인의 명예심을 말살 시키고, 전투의지를 상실시킨다. 군인 개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군대와 스스로 생각하고 그들을 고귀한 인간으로 대하는 프랑스군대 중에서 어느 군대의 전투력이 강하겠는가? 구체제의 군대가 프랑스군대의 문화와 훈련법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프랑스군대는 연전연승을 할 수밖에 없었다.

  놀랍지 않은가? 프로이센의 군대에서 보였던 감시와 처벌이라는 문화가 한국군대에도 있다. 내가 군복무 중에도 구타는 암암리에 있었다. 구타를 없애려는 노력을 군대를 몰라서 하는 망상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도 많았다. 생각하지 말고 선임병의 명령에 복종만 할것을 강요하고 이를 따랐다. 프랑스 군대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훈련받았다. 부사관도 사병도 작전계획을 이해해야한다고 프랑스 군은 믿었다.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로봇군대! 스스로 생가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훈련중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하고 무조건 뛰도록 훈련받았다. 우리군대문화는 아직도 프랑스 군대의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프로이센 군대의 낡은 문화에 취해있다. 적어도 내가 군대에 복무하던 시절까지는 말이다.

  클라우 제비츠는 '전쟁론'에서 "군대 정신이 훈련 숙달보다 훌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군대를 강한 군대로 만들고 싶다면, 생각하는 군대, 군인에게 강한 자부심을 주는 군대 문화를 만들어야할 것이다.

 

4. 전쟁이 계시를 준다는 믿음의 탄생! 그리고 비극의 시작

  낭만주의와 민족주의가 광기처럼 퍼져나가면서 전쟁을 '숭고한 것'으로 여기고 '평화를 상업적 정신을 따르는 천박한 사리사욕'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참전 경험을 '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인식과 경험'이라며 동생의 입대를 축하하는 사람까지 출현한다. 낭만주의 시기에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체험이 축복일 수 없다. '평화만 아니라면, 그곳에서 겪은 것을 제 아이에게 경험하고 싶'다는 글 속에서 소름돋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전쟁의 경험을 새로운 계시를 받는 숭고한 경험으로 생각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출현한다. 물론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환멸을 느끼고 자신이 생각했던 전쟁의 숭고함이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탈영을 결심하는 병사들도 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 병사들의 깨달음이 낭만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커다란 '주의'를 꺾어 놓지는 못했다. 그리고 1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소위 남자다움을 폭력과 근육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남자라면 군대에 갔다와야 사람이된다고 생각하는 살마들! 남자는 거칠고 강하게 키워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러한 믿음이 더큰 폭력을 낳고 인류를 파멸로 몰아 넣는다. 진정한 남자다움은 인간다움에 있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한다. 폭력은 숭고한 것이 아니라 야만적인 것이며, 근육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건강미일 뿐임을 깨달아야한다.

 

  유발 하라리는 "전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사담 후세인"에게 감사를 표현하며 이책을 저술했다. 전쟁을 빼 놓고 인류의 역사를 서술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연구할 수밖에 없다. 유발하라리의 전쟁 문화사 '극한의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계시를 얻었다. 그것은 강한 군대는 폭력에 의해서 병사를 기계로 만들으로써 완성되는 것아 아니라, 존중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군대로 탈바꿈함으로서 이뤄질 수 있다는 진리이다.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다. 강하게 학생을 억압함으로써 명품교육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스스로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참된 인간을 길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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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개의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 이야기 - 바이킹에서 이케아까지 50개의 키워드로 읽는 시리즈
김민주 지음 / 미래의창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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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우리의 화두는 '유럽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자'였다. 그런데, 그 유럽에서도 중심부와 주변부가 있었다. 서유럽이 그 중심에 있고 동유럽과 북유럽이 그 주변에 있었다. 이제는 서유럽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나의 머릿속에서 불현듯 스쳐 지나갈때,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미처 몰랐던 북유럽의 역사를 50개의 키워드로 풀어쓰고 있었다. 과연 북유럽은 어떠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었을까?

 

1. 민족주의를 생각하게 한 '장 시벨리우스'

  "비평가들이 하는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 비평가를 기리기 위한 조각상은 세워지지 않는다."라는  말로 유병한 장 시벨리우스! 그는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1865년에 태어났다. 핀란드의 낭만적 민족주의 작곡가인 그는 '핀란디아'를 작곡했고 수많은 핀란드인들의 가슴에 핀란드인이라는 민족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핀란드 정부는 그의 작품 활동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살고 있는 저택 주변에서는 자동차 경적을 울리지 못하게 했으며, 비행기도 날지 못하도록 했다.

  이러한 일화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장 시벨리우스의 아버지는 핀란드계 군의관이지만, 어머니는 스웨덴계였다. 그의 부모가 그를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학교에 보냈기 때문에 핀란드의 문화를 접하면서 그는 낭만적 민족주의 작곡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장 시벨리우스의 몸에는 핀란드의 피와 스웨덴의 피가 섞여있다. 혈통으로 따진다면 그는 완벽한 핀란드인이라고 볼 수 없다. 민족주의라는 것은 허상일까? 낭만적 민족주의 작곡가 장시벨리우스를 혈통으로 그를 핀란드인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은 너무도 우스운 일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민족이란 사피엔스의 상상의 창작물이니까.... 오히려 문화적으로 그가 어떠한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규정지었고, 어느 나라 문화를 더 사랑했는가가 중요하지 않을까? 사피엔스가 호모하빌리스를 비롯해서 네안데르탈인을 박멸하고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것은 고도의 거짓말을 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거꾸로 말한다면, 사피엔스의 상상의 무기인 '민족'도 버릴 수없는 무기라는 점이다. 그러하기에 민족이라는 개념을 버릴 수 없다. 상상의 무기를 버린 사피엔스를, 상상의 무기를 버리지 않은 사피엔스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인간의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키에르케고르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쇠렌 키에르케고르! 그는 인간이 짊어지고 가야할 너무도 무거운 짊을 한꺼번에 짊어진 사람이다. 쇠렌 키에르케로그의 성인 '키에르케고르'는 '공동묘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원래 어버지집의 하녀였다. 또한 아버지는 임신한 하녀와 재혼을 한 것이다. 당시 교회법에서 재홈을 금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가수성 많은 키에르케고르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신을 저주했음을 고백했고, 자신의 자녀들이 일찍죽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아들에게 고백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러한 원죄속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리라는 것은 너무도 낭만적인 상상이다. 이브의 원죄로 인해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쫒겨났으며, 그래서 인류는 불행해졌고, 원죄를 속죄해야한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러한 원죄는 인간의 삶을 너무도 크게 짖누른다. 이러한 원죄에 더해져서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짖지도 않은 원죄를 짊어져야했다. 결혼도 파국을 맞고, 교회를 비판하며 논쟁으로 삶을 살다가 거리에서 쓰러져 병원에서 삶을 마감한다.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가 아닐지라도, 부모에 의해서 짊어지고 가야하는 원죄! 부모의 잘못으로 짊어져야하는 원죄의 가장 커다란 무게를 키에르케고르는 짊어져야했다. 이 원죄를 스스로 벗어던지지 못했기에 키에르케고르는 행복할 수 없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하는 자는 영원히 주인이 될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그것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3.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기에 행복한 가정을 꿈꾼 칼 라손

  너무도 강한 속박은 용수철이 튀어오르는 것 처럼 사람을 반대 방향으로 가게한다. 행복한 자신의 가정을 그림으로 그려 많은 사람들에게 가정의 행복을 꿈꾸게 만들었던 칼 라손! 그의 어버지는 배에서 석탄을 때거나 곡물을 운반하는 잡역을 했으며, 주폭을 가족에게 일삼았다. 빈민가의 지겨운 삶을 살았던 그였기에 따뜻하고 아늑한 가정의 삶을 강하게 희구했나보다. 그는 '해가 비치는 집'이라는 제목의 화집을 발간해서 독일에서 3개월동안 4만부를 팔았다. 산업혁명의 전개되면서 전체의 부는 증가했으나, 사회불평등을 심화되었고, 역설적으로 인간은 불행해졌다. 그중에 한원인이 가정의 해체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는 조루주바타유의 말처럼,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아늑하면서도 따뜻한 가정을 많은 사람들이 욕망했다.

  세상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산업혁명이 인류에게 전체적인 부를 증가시켰으나, 과연 인류를 행복하게 했는지는 생각해보아야한다. 그리고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기울여야하는지 칼 라손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이 책은 북유럽의 역사를 너무도 소략하게 소개해주고 있다. 그러나 북유럽의 현재와 북유럽이 가지는 의미를 이처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와 더 많은 관련을 맺고 있는 북유럽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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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 - 한 젊은 역사가의 사색 노트
이영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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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의 책은 어렵다. '감시와 처벌'을 읽으려 했다가 읽기 어려워 책을 덮고 책장에 다시 꽃아놓은 기억이 난다. 푸코에 대한 이야기는 대학원 강의시간에 많이 들었다. 그래서 푸코를 알고 싶었기에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만나고 싶었다. 도서관 서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빨간색 표지의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라는 책을 발견했다. 무척이나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하고 책을 빼들었다. 너무도 어렵다는 생각에 마음을 단단히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푸코에게 빠져들었다.

 

  1. 철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을 이해하라

  우리가 어느 인물의 철학을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 인물의 말들만을 수입했기 때문이다. 철학은 인물과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와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아니다. 그 인물이 시대와 소통하면서 만들어진 고뇌의 산물이다. 푸코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푸코의 삶을 먼저 이해했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모른채 그의 어려운 책들을 읽으려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이 책은 푸코의 삶의 괘적을 따라가며 그의 삶이 어떠한 철학을 낳았는가를 말한다. 동성애자였던 푸코, 자살을 생각하는 푸코에게 광인으로 취급되는 현실속에서 자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라도 '광기의 역사'를 쓴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68혁명을 거치면서 사회참여를 하며 감옥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그는 '감시와 처벌'을 쓰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성의 역사 1,2,3'을 쓴다. 동성애자로서의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한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의 철학을 이해하니 한결 그의 철학이 쉽게 나에게 다가왔다.

 

  2. 모든 학문은 현재의 학문이다.

  "철학은 역사에 내재하는 정치이며, 정치에 필수불가결한 역사다"라는 말이 나의 심금을 울렸다. 한국사회에는 많은 학자들이 있다. 많은 철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용기있게 현실문제에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학자는 많지 않다. 그러면서 좌와 우 양쪽을 비판하면서 마치 자신은 가장 객관적인 것처럼 포장한다. 그들을 보면서 과연 당신은 진정한 학자인가를 묻고 싶었다. 푸코는 단순히 연구만 한 평범한 학자가 아니다. 68혁명을 거치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시대와 맞섰다. 학자인 그는 문제의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여 투쟁의 근거를 제공했다. 한번의 혁명보다는 지속적인 저항을 택한 그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화려한 혁명전사가 되기 보다는 평범한 저항자가 되자! 우리의 삶을 한꺼번에 바꿀 수 없다. 우리 삶을 옥죄는 중층적 권력들 즉, 권위주의, 위선, 사유 억압 등과 맞서자!!

  모든 철학은 지금 현실을 위해 존재한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가 현대사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모든 철학은 현재의 철학이어야만 그 생명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철학도 역사의 산물이기에... 사족을 붙이자면, 우리사회의 불교도 시대와 호흡해야되지 않을까? 어느 불교 철학자분이 말한 '참여불교'를 생각해 본다.

 

  3.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 역사가가 되다.

  푸코의 책을 접하면서 그가 역사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광기의 역사', '감옥의 역사', '성의 역사'라는 제목이 그를 철학자이기 보다는 역사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예루살램의 아이히만'을 읽을 때 느꼈던 철학자이기 보다는 역사가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를 '계보학', '지식 고고학'이라는 표현으로 일컫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의 눈으로보면 그의 방법론은 역사학과 비슷했다. 물론 푸코는 역사학의 방법론 뿐만 아니라, 정치학, 의학 등등 다양한 방법론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핵심적 연구 방법론은 '계보학'이다. 이는 역사학적 방법론이라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다. 웁살라 도서관에서 수많은 사료들을 보면서 '광기의 역사'를 집필했다. 역사가가해야할 일들을 한 철학자가 해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방법론은 이후 역사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의 방법론, 그의 역사관 등에서 많은 힌트를 얻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실들을 탐구해서 역사의 지층을 벗겨내, 위대한 역사적 논문들을 쓰는 학자들도 많다. 맞다 그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 역사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방법론은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에게 익숙한 현실속에서 위대한 진주를 찾는 안경이 되었다.

 

  우리가 푸코를 읽는 것은 단순히 푸코의 철학을 암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푸코를 두번 죽이는 일이다. 우리가 푸코를 읽는 것은 푸코의 사유를 통해서 한국 사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력을 갖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푸코의 삶과 푸코의 역사관, 방법론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국사회를 들여다 보았다. 물론, 푸코라는 안경으로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그 첫단추를 꽤기 위한 길안내를 했을 뿐이다. 한번의 혁명보다 지속적인 저학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제 다른 푸코의 책에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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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실패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 지음, 장혜경 옮김 / 율리시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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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실패한 정책, 실패한 대통령, 실패한 사업 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실패한'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실패를 한 사람이라면 그 실패를 통해서 그들은 무엇을 배웠는지 궁금해졌다. 실패한 4대강 사업을 보면서 이 사업이 실패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하고, 성공한 사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과연 실패를 실패로 인정할 용기도 없는 그들을 무엇이라 불러야할까?

 

이 책은 12가지의 실패한 일들을 모아아 놓았다. 이들 실패는 참으로 귀중한 실패도 있으며, 참으로 다행한 실패도 있다. 그리고 실패 그 자체의 의미밖에 없는 실패도 있다.

 

1. 참으로 귀중한 실패

이 책의 첫장에는 연금술사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있다. 금을 얻겠다는 인간의 욕망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이것이 화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연금술사가 백금으로 불리는 도자기를 독일 마인츠에서 발명했다는 사실은 연금술을 행하면서 이어진 필연적인 실패들이 단순한 실패가 아닌 귀중한 실패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들 실패가 다양한 합금과 화학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동양에서는 화약의 발명으로 이어진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의도했던 것을 얻지 못했다고 실패로 규정할 수 없는 실패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실패는 우리에게 너무도 귀중한 자산을 물려주었다.

내가 위대한 정치가가 되기를 꿈꾸었다가 위대한 정치가는 못되었지만, 내가 사는 주변을 훌륭하게 바꾸었다면, 나는 위대한 실패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실패는 실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실패는 위대한 성공을 다른 분야에서 낳았기 때문이다.

 

2. 참으로 다행한 실패

실패가 인류의 입장에서는 행운으로 느껴질 때도 많다. 원숭이와 인간의 교배를 예로 들 수 있다. 인간이 넘보아서는 안되는 영역이 있다. 바로 신의 영역이다. 인간을 원숭이와 교배시키려는 소련의 프로잭트는 참으로 다행한 실패였다. 사람의 정액을 원숭이에게 주입하는 다양한 시도, 더 나아가 원숭이의 정액을 사람에게 주입하는 시도까지 계획한 일들은 너무도 무시무시한 실패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SF영화의 소재로 자주 사용된다. 영화 에일리언도 이러한 과학자들의 욕망을 소재로한 영화이다. 인문학적, 도덕적 품성이 결여된 과학이 때로는 인류를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3. 실패 그 자체의 의미밖에 없는 실패

헤르만 죄르겔의 아틀란 트로파와 헨리 포드의 포드란디아, 히틀러의 광궤철도, 시베리아 강줄기를 바꾸려는 소련의 시도는 정말 실패 그자체의 의미밖에 없는 실패이다. 과거 정권이 했던 4대강 사업을 떠올리게 하는 실패들이다. 지중해를 말려 유럽의 영토를 넓히겠다는 헤르만 죄르겔의 아틀란트로파 계획,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고무농장을 만들려했던 헨리 포드의 포드란디아, 사업성과 실현가능성은 절대 생각하지 않고 폭 4미터, 2층 구조의 광궤철도를 놓겠다는 과대망상증의 히틀러의 계획, 북극해로 흘러가는 물길을 바꾸겠다는 소련의 시도는 실패그 자체의 의미밖에 없는 실패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를 통해서 이러한 일들을 하면 안된다라는 교훈을 우리는 얻지 못했다. 과거 정권의 무모한 4대강사업과 그로인해서 강바닥에 쏟아부은 22조라는 혈세에 대해서 뼈져린 반성을 우리는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와 비슷한 사업들이 행해지는 현실을 보면서, 이들 실패는 실패 그자체의 의미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들 실패가 실패 그 자체의 의미밖에 없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들 실패로 부터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책을 덮으면서 실패 그 자체가 귀중한 실패가 우리사회에서 늘어나길 바래본다.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고자했던 루드비히 자멘호프의 에스페란토어, 세계보건기구의 소아마비 근절 프로젝트들은 비록 아직은 실패했지만, 그리고 언젠가는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의 과정 그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희망을 준다. 이 책에서 '낙담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라는 말이 나의 뇌리속에 맴돌고 있다. 실패를 실패로 인정하고 낙담하는 순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아름다운 실패를 위해서 터벅터벅 앞으로 나갈 때, 진정으로 아름다운 실패속에서 참다운 성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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