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경험 - 유발 하라리의 전쟁 문화사
유발 하라리 지음, 김희주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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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발 할라리!! '사피엔스'를 읽었을 때, 그에게 받은 강력한 계시(새로운 깨달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피엔스의 역사를 한권의 책으로 엮어 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새로운 역사로 바라보며, 나에게 강력한 계시를 주었다. 그의 전공이 중세 전쟁사이고, 한국에 번역된 책이 '호모 데우스'말고서도 2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모 데우스'도 '사피엔스' 만큼은 아니지만,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기에 그의 책을 더 읽기로 결심했다. '대담한 작전'과 '극한의 경험'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읽을 것이지를 고민했다. '대담한 작전'이 단편적인 에피소드의 모음으로 보인 반면에, '극한의 경험'은 유발 하라리 만의 통찰이 묻어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느껴졌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이전에 전쟁하는 인간 '호모 벨리쿠스'가 있다."라는 표지글이 나를 강력하게 끌어 당겼다. 그리고 책장을 넘겼다.

 

1. 고통이 우리에게 새로운 '계시'를 줄 수 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이 책에서 '계시(revelation)'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계시'라는 단어를 종교적 의미의 단어로 받아들인다면, 이 책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새로운 깨달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발 하라리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깨달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통이 우리에게 '계시'를 줄 수 있을까? 특히 극한의 경험인 전쟁을 통해서 '계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본다. '군대 갔다와야 사람된다.'라는 말을 흔히 듣고, 번지 점푸를 하거나 커다란 동물을 사냥하고, 고통을 참을 줄 알아야 성인으로 인정하는 풍습이 인류의 문화 속에 녹아 있다. '고통'이 새로운 '계시'를 준다는 인류의 인식은 과연 타당한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맴도는 화두이다. 우리는 이 화두에 앞서 해답을 얻었던 씻다르타의 경험을 되새겨 보아야할 것이다. 씻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고행'을 했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을 한다. 그리고 그 명상을 통해서 위대한 종교적 깨달음을 얻는다.

  반면 예수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 예수의 수난 등, 서양 근대초기의 문화속에는 고통을 새로운 깨달음이나 개종의 장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많이 있었다. 상해를 무거운 벌로 다스리는 서양인들! 백인들의 경우, 동양인들 보다 진통제 처방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고통을 잘 참아내지 못하는 백인들이 오히려 고통을 통해서 계시를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인식을 만들어 낸점이 아이러니컬하다.

  진정으로 전쟁이라는 극한의 체험이 인간을 종교적 계시,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 수 있을까? 전쟁 후에 군인들이 수도원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유발하라리가 지적했듯이, 수도원에 상이군인 수용시설로 많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전쟁이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는 결론은 유보되어야한다. 예수회를 만든 로욜라도 전쟁의 참상을 보고 종교적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이뤄진 독서와 명상이 그를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었다. 전쟁이 계시를 주진않았다. 깊은 성찰과 독서가 그에게 계시를 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경험이 종교적 계시를 주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은 왜일까? 뇌과학에서 입증되었듯이,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다. 단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뿐이다. 상이 군인이 은둔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합리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귀향한 군인을 부모 형제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기록을 유발 하라리는 전쟁이 이들을 성숙시켰기 때문이라고 서술했다. 이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풍파가 그들을 빨리 늙고 살기 등등한 존재로 만들었을 뿐이다. 대학에서 복학한 예비역들이 아저씨 처럼 나이들어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갈 것이다.

 

2, 한국군대 문화의 뿌리를 해부하다.

  흔히들 우리 군대문화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만주군과 일본군에서 군대생활하던 친일군인들이 한국군의 주류가 되었고, 그들이 만든 한국군에는 일본군에서 흔히보이는 구타와 얼차려 등의 비인간적인 악습들이 그대로 일제의 잔재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조국을 위해서 스스로 독립군에 입대한 군인들에게는 구타와 무조건적 강요가 필요 없을 것이다. 반면에 강제로 군대에 끌려와 자신과 상관없는 전쟁에 동원되는 사람을 움직이려면 구타와 강요는 필연적이다.

  현재 우리군의 모든 악습은 일본군에서 왔다는 선입견은 타당할까? 유발 하라리는 나에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군대가면 똑똑한 사람도 생각을 못하는 멍청한 행동을 한다. "내가 왜그랬을까?"라는 말을 외치며 얼차려를 받는 훈련병들을 생각하면, 군대에 들어와서 왜? 생각을 못하는 존재로 변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군대에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은 데카르트 때문이었다. 데카르트? 그는 위대한 철학자가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그가, 군인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데 기여를 했다니..... 그러나 사실이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의 젊은 귀족으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장교로 입대했으며, 30년 전쟁이 한창일때 보헤미아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가던 중에, 화로에 몸을 녹이다가 '고기토 에르고썸'을 생각해 낸다. 데카르트의 이론은 군대에 적용된다. 데카르트의 정신이 육체를 통제하듯, 장교들이 사병을 확고히 통제하도록 군대가 만들어진다. 머스킷총 발사에서 장전까지 32개의 개별동장으로 나눠 반복 연습시키고, 기계처럼 전장에서 총을 쏘도록 훈련시킨다. 아는 것이 가장 적은 사람이 가장 잘 복종한다. 사병은 생각하지 않는 육체적 존재로 전락한다. 오직 생각은 장교들이 할 뿐이다.

   정신과 육체라는 이분법적 생각! 그리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데카르트의 사상은 놀랍게도 한국군에서도 목격된다. 군에 입대하고 특히, 신병교육대에서 오직 생존만을 생각하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생각하는 존쟁기 보다는 조교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기계로 만들어졌다. 자대에 배치받고 나서도 시키는데로만 하면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계급이 올라가 생각을 해야할 때는 머리가 아팠다. 군대는 나를 기계적 존재로 만들어 갔다. 그 시초는 데카르트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3. 생각하는 군대가 강한 군대이다.

  17.18세기 구체제 군대는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철저히 유린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구체제의 사병들은 감시의 대상이었다. 언제 탈영할지 모르기에 산림에서 산개대형의 훈련을 하지 않았다. 오직 연병장에서 기계와 같은 반복된 훈련만을 했다. 기병은 적을 감시하기 보다는 보병의 탈영을 감시했다. 이는 군사천재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도 마찬가지 였다. 더욱이 프로이센 군대는 '태형'이라는 악습이 오랫 동안 남아있었다. '태형'과 같은 강한 체벌은 군인의 명예심을 말살 시키고, 전투의지를 상실시킨다. 군인 개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군대와 스스로 생각하고 그들을 고귀한 인간으로 대하는 프랑스군대 중에서 어느 군대의 전투력이 강하겠는가? 구체제의 군대가 프랑스군대의 문화와 훈련법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프랑스군대는 연전연승을 할 수밖에 없었다.

  놀랍지 않은가? 프로이센의 군대에서 보였던 감시와 처벌이라는 문화가 한국군대에도 있다. 내가 군복무 중에도 구타는 암암리에 있었다. 구타를 없애려는 노력을 군대를 몰라서 하는 망상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도 많았다. 생각하지 말고 선임병의 명령에 복종만 할것을 강요하고 이를 따랐다. 프랑스 군대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훈련받았다. 부사관도 사병도 작전계획을 이해해야한다고 프랑스 군은 믿었다.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로봇군대! 스스로 생가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훈련중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하고 무조건 뛰도록 훈련받았다. 우리군대문화는 아직도 프랑스 군대의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프로이센 군대의 낡은 문화에 취해있다. 적어도 내가 군대에 복무하던 시절까지는 말이다.

  클라우 제비츠는 '전쟁론'에서 "군대 정신이 훈련 숙달보다 훌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군대를 강한 군대로 만들고 싶다면, 생각하는 군대, 군인에게 강한 자부심을 주는 군대 문화를 만들어야할 것이다.

 

4. 전쟁이 계시를 준다는 믿음의 탄생! 그리고 비극의 시작

  낭만주의와 민족주의가 광기처럼 퍼져나가면서 전쟁을 '숭고한 것'으로 여기고 '평화를 상업적 정신을 따르는 천박한 사리사욕'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참전 경험을 '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인식과 경험'이라며 동생의 입대를 축하하는 사람까지 출현한다. 낭만주의 시기에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체험이 축복일 수 없다. '평화만 아니라면, 그곳에서 겪은 것을 제 아이에게 경험하고 싶'다는 글 속에서 소름돋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전쟁의 경험을 새로운 계시를 받는 숭고한 경험으로 생각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출현한다. 물론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환멸을 느끼고 자신이 생각했던 전쟁의 숭고함이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탈영을 결심하는 병사들도 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 병사들의 깨달음이 낭만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커다란 '주의'를 꺾어 놓지는 못했다. 그리고 1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소위 남자다움을 폭력과 근육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남자라면 군대에 갔다와야 사람이된다고 생각하는 살마들! 남자는 거칠고 강하게 키워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러한 믿음이 더큰 폭력을 낳고 인류를 파멸로 몰아 넣는다. 진정한 남자다움은 인간다움에 있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한다. 폭력은 숭고한 것이 아니라 야만적인 것이며, 근육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건강미일 뿐임을 깨달아야한다.

 

  유발 하라리는 "전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사담 후세인"에게 감사를 표현하며 이책을 저술했다. 전쟁을 빼 놓고 인류의 역사를 서술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연구할 수밖에 없다. 유발하라리의 전쟁 문화사 '극한의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계시를 얻었다. 그것은 강한 군대는 폭력에 의해서 병사를 기계로 만들으로써 완성되는 것아 아니라, 존중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군대로 탈바꿈함으로서 이뤄질 수 있다는 진리이다.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다. 강하게 학생을 억압함으로써 명품교육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스스로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참된 인간을 길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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