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 발해고 -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 번역한 4권본
유득공 지음, 김종복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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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는 우리의 역사이다. 그러나, 우리는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도 없다. 발해의 역사를 생동감 있게 설명하고 싶은데, 읽고 참고할 수 있는 변변한 참고서적이 없다. 발해의 역사를 알고 싶은 열망에 유득공의 '발해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선후기를 살았던 그도 발해의 역사를 알고 싶었으리라. 그는 우리보다도 발해의 역사를 더 알고 싶었으나, 변변한 역사서를 구할 수 없었기에 여러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서 '발해고'를 편찬했다. 유득공의 핏땀이 아로 새겨져 있는 발해고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발해고'는 3차에 걸쳐 수정되었다.

  한국사 시간에 '유득고 '발해고''를 외우도록한다. 발해사와 조선 후기 실학에 관한 문제가 출제될때, 유득공의 '발해고' 서문은 자주 출제되어왔다. 전문용어로 '일타쌍피'라 한다. 발해사와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두개의 주제에 겹치는 부분은 시험에 자주 출제된다. 이렇게 중요한 유득공의 '발해고'가 3차에 걸쳐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왜? '정본'이라는 수식어를 김종복 교수가 붙였는지 납득된다. 워낙 사료가 부족하다보니,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 초고를 작성했으나, 여러 서적을 틈틈히 살펴보면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발해사의 파편들을 발견한 유득공은 '발해고'를 수정한다. 발해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발해의 역사서를 저술하려 했으나, 워낙 자료가 부족하여 '발해사'라 이름 붙이지 못하고, '발해고'라 이름붙였다. 3차에 걸치 수정은 유득공이 얼마나 발해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고 싶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서이다.

 

2. 오류가 많은 '발해고'

  실학자! 조선후기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다양한 개혁안을 내놓고, 국어와 국사, 우리 지리에 관한 주체적 인식을 통해서 수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우린 배웠다. 철저히 우리역사를 탐구해서 놀라운 학문적 성과를 얻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발해고'에는 오류가 있었다. 특히 발해의 지리를 고찰한 '지리고'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유득공이 참조했던 '요사' 지리지는 급하게 저술되는 바람에 오류가 많다. 이러한 사료의 오류뿐만 아니라, '동국여지승람'에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의 위치를 평안도 성천으로 보았는데, 서경 압록부 소속의 신주, 환주, 풍주, 정주 등을 압록강 이남 지역에 비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하늘 아래 어찌 완벽한 것이 있으랴! 유득공에게 완벽한 발해사를 요구했다면, 그것이 너무도 가혹한 요구였으리라. 사료의 한계 시대적 한계가 뒤엉켜 크고 작은 실수가 있을 수 있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였기에 그나마 발해 역사가 우리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하나가 더 추가 될 수 있었지 않았을까?

 

3. 조선 후기 지명에 대한 단상

  '발해고'를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64~65쪽의 '오경도'이다. 사서에 자주 나왔던 '살수'와 '패수'의 위치가 지도에 표시되었으며, '태백산'과 '토문강'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삼국유사의 '태백산 신단수'가 명확히 백두산으로 서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이를 '장백산'이라 부른다는 기록까지 있었다. '장백산'과 '백두산'은 다른 살이라는 일부의 주장이 설득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토문강'이 '두만강'이라 표시되어 있다. '토문강'은 어떠한 강인가? 백두산 정계비에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글귀로 유명해지지 않았던가! 백두사 정계비의 '토문강'을 중국은 '두만강'으로 비정하고, 우리는 '송화강의 지류'로 비정한다. 따라서 간도는 우리의 땅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발해고'에는 '토문강'을 '두만강'에 비정하고 있다. 나의 머리가 멍해졌다. 혼란스러웠다. 최소한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보았다. 물론, 더 많은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결론을 내려야한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 불어닥친 혼란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발해고'는 너무도 얇은 책이다. 2~3일 만에 다 읽을 정도로 책의 분량은 적었다. 더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주었다. 그리고 백두산 정계비를 비롯한 '간도'문제에 대해서 더 많은 탐구를 해야겠다는 과제도 안겨주었다. 고려와 조선에서 돌보지 않았던 '발해'의 역사를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자신의 열정으로 되살리려했다. '발해'를 사랑한 그의 열정의 일부남아 우리가 우리 역사에 갖는다면, 동북공정의 위기 속에서 '발해사'를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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