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스 마카브르

보르크만 부인 (강하고 확고하게) 에르하르트는 그럴 거야! 난 확실히 알고 있어!
엘라 렌트헤임(고개를 저으며) 넌 그걸 알지도 못하고 그걸 믿지도 않아, 군힐.
보르크만 부인 난 그걸 믿지 않아!
엘라 렌트헤임 그건 그저 네 꿈일 뿐이야! 왜냐하면 거기에라도 매달리지 않는다면, 넌 절망에 빠져 버릴것만 같거든.
보르크만 부인 그래, 난 진정 절망에 빠질 거야. (격해져서) 어쩌면 그게 네가 바라는 거겠지, 엘라! - P31

빌톤 부인 (가볍게 그리고 무심하게) 난 살면서 네, 아니요 대답을 수없이 해 왔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요. 이모님께서 방금 막 오셨다는데 그냥 두고 떠나시려고요? 부끄러운 줄 아세요, 무슈 에르하르트…아드님께서 그러시면 되겠어요? - P42

위쪽 응접실에서 음악 소리가 더욱 커진다.

보르크만 부인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움찔거리더니 몸을 움츠리면서 무의식적으로 속삭인다.) 늑대가 다시 울부짖는군・・・ 병든 늑대가. (잠시 그대로 서있다가 카펫 위에 풀썩 쓰러지더니 몸을 뒤틀면서 슬퍼하며 속삭인다.) 에르하르트! 에르하르트... 내게 충실하거라! 오, 집에 와서 네 어미를 도와야지! 난 더 이상 이런 삶을 견딜 수가 없구나! - P54

보르크만 자넨 내내 나한테 거짓말을 해 왔어.
폴달 (고개를 저으며) 난 거짓말을 한 적이 없네,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여기 앉아 내게 거짓으로 희망과 믿음, 신뢰를 얘기한 거 아닌가?
폴달 자네가 내 소명을 믿어 주는 만큼 거짓은 아니었네. 자네가 날 믿어 주고 내가 자넬 믿는 한 말이야. - P78

보르크만 의심을 품는 순간, 추락하고 마는 거야.
폴달 바로 그것 때문에 여기 와서 신념으로 가득 찬 자네한테 나 자신을 의지하는 게 그토록 위안이 됐던 거야. (모자를 쓰며) 하지만 이제, 자넨 내게 낯선 사람 같군.
보르크만 내게 자네도 마찬가지야.
폴달 잘 있게,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잘 가게, 빌헬름. - P80

엘라 렌트헤임(미소를 지으며) 당신은, 승리를 추호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죠.
보르크만(조급하게) 인간이란 게 그런 거요, 엘라. 동시에 의심하면서 믿는 거지. (자기 자신에게) 그래서난 내 풍선 안에 당신과 당신의 재산을 싣고 싶지않았던 거요.
엘라 렌트헤임 (긴장하여) 왜죠, 난 그걸 묻는 거야! 이유가 뭔지 말해 봐요!
보르크만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서) 그런 여행엔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걸 가져가는 게 아니야.
엘라 렌트헤임 당신은 가장 소중한 걸 가져갔잖아요. 도래할 당신의 인생... - P88

엘라 렌트헤임 (휘청거리며 황망하게) 보르크만・・・ 에르하르트는 이 폭풍 속에서 좌초되고 말 거예요. 당신과 군힐 서로가 이해를 해 줘야 해요. 우리 당장 군힐한테 내려가야 돼요
보르크만 (그녀를 바라보며) 우리라니? 나도 말이오?
엘라 렌트헤임 당신이랑 나랑 함께요.
보르크만 (고개를 저으면서) 저 사람은 단단한 여자야. 한때 내가 산에서 캐내고 싶어 했던 광석처럼 단단하지. - P107

엘라 렌트헤임 먼저 친구분을 안으로 모시도록 해요, 보르크만.
보르크만 (매정하게) 내 얘기했잖소, 이 집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엘라 렌트헤임 하지만 이분 넘어지셨단 얘기 당신도 들었잖아요!
보르크만 오, 우린 다 넘어지는 거야. 적어도 인생에서 한 번쯤은. 하지만 다시 일어나야지. 그리고 아무일 없는 척하는 거야. - P149

해설

그러나 스캔들 및 파산에 대한 입센의 집착은 어린 시절불행한 가족사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입센이 일곱 살 때, 그의 아버지는 투자 실패와 낭비벽으로 파산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이 일로 입센 가족은 경제적 궁 - P175

핍뿐만 아니라 가정 파탄의 위기에까지 내몰리게 되는데, 불화의 중심에는 항상 껍데기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술과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가 있었다. 훗날 입센은 그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맞는 사회적 지위를 되찾게 될 날을 꿈꾸었다"고 기억한다. 그런 의미에서 입센의 아버지 크누드는 욘가브리엘 보르크만의 가장 오래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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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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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자기 앞의 생을 이제야 읽었다(그런 책이 어디 한 두 권?).


뭐야 이 책 이런 내용이었어? 내가 상상한 이야기와 전혀 다른 스타일이네. 나는 뭔가 좀 더 진중하고 심오한(이라고 쓰고 지루한 이라고 읽는다) 줄거리와 문장일 거라 상상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의 내용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다고 생각했다. 독서괭님에게도 내용 전혀 모른다고 댓글도 달고 말이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 10년 전이긴 하지만 - 나는 <빨간책방>에서 자세하게 다뤄진 방송을 들었고, 심지어 3년 전에 <라디오 북클럽 김겨울입니다>에서도 들었네?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을 수가!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 작가 자신의 삶이 너무 흥미로워서 책 내용 따위 전혀 남지 않은 것인가. 나의 기억력의 심각함에 다시 한번 심각함을 느낀다(음주 자제 필요...).


이 책을 읽고 나서 두 방송 편을 다시 들었는데 흥미롭게도 두 방송에서 다뤄지는 소설의 느낌이 사뭇 달랐다. 말하는 사람의 감상이나 방송의 분위기, 방송 시간 등등 여러 상황들 때문이겠지만. 역시 100명이 책을 읽으면 100가지 감상이 나오는구나 싶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아파트에서 그를 사랑으로 키워준 로자 아줌마나 가난하지만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종교 그러나 동일한 비천한 계급의 이웃들.


모모에겐 어떤 생이 펼쳐질까. 모모는 그들과 다른 생을 살 수 있을까. 그에겐 그럴 기회와 의지가 있을까.



그림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말 그대로 치부를 드러내는, 인물들의 특징을 잘 살린, 특히 로자 아줌마가 서서히 죽어가며 변해가는 모습을 너무도 탁월하게 묘사한 그림이 이야기가 가진 슬픈 여운을 각인시킨다.



모모가 말한다. 사랑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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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3-12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에밀 아자르 최고 작품은 <자기앞의 생> 이죠~!
저도 이 일러스트로 추가 구매했는데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햇살과함께 2024-03-13 09:37   좋아요 0 | URL
다른 거 안 읽어봤지만, 새파랑님이 최고라니.
일러스트 너무 좋습니다^^ 다시 읽어보세요~

독서괭 2024-03-12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우 저는 모모가 달걀을 손에 쥐고 멍하니 있던 장면이랑 사람은 사랑이 없어도 살 수 있나요? 라고 묻는 장면 아직도 생각나요 ㅜㅜ 넘 마음아픔 ㅠㅠ

햇살과함께 2024-03-13 09:39   좋아요 1 | URL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모모의 단순하고 간결한 문장들이 참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세 자매 읽기

세 자매

마샤 난 벌써 엄마 얼굴을 잊어버리기 시작했어.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우리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잊을 거라고.
베르쉬닌 그래요. 잊을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운명입니다. 어쩔도리가 없어요. 우리에게 심각하고 의미심장하며 매우 중요한것처럼 보이는 것도 시간이 흘러가면 잊히거나 중요하지 않은것처럼 보이게 되는 겁니다. - P562

안드레이 내가 아는 사람도 없고, 나를 아는 사람도 없이 모스크바에 있는 레스토랑의 거대한 홀에 앉아 있으면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아. 그런데 나도 모든 사람들을 알고, 그들 모두도 나를 아는 여기는 연고도 없는 것처럼 낯설어…… 연고도 없고 고독해. - P580

베르쉬닌 그래요...... (웃는다) 어쩐지 이 모든 것이 이상하군요!

사이.

화재가 시작됐을 때 나는 서둘러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다가가서 보니까 우리 집은 멀쩡하고 무사해서 위험하지 않더군요. 그런데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개와 말이 질주하는데 두 딸이 어머니도 없이 속옷만 입고 문지방에 서 있더군요. 애들 얼굴에는 뭐랄까 불안과 공포, 애원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자니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기나긴 인생행로에서 이 아이들은 또 무엇을 참아야 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을 붙잡고 달렸어요. 그리고 내내 한 가지만 생각했습니다. 얘들은 이 세상에서 또 무엇을 견뎌야 할 것인가! - P614

투젠바흐 쓸데없는 것들과 어리석고 사소한 것들이 아무 까닭도 없이 갑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때가 가끔 있지. 예전처럼 그것들을 조롱하고, 그것들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계속 걸어가면서도 중단할 힘이 없다는 걸 느끼는 거야. 아, 그런얘긴 그만두자고! 난 즐거워. 이 전나무와 은행나무 그리고 자작 - P640

나무를 인생에서 처음으로 보는 것 같아. 그것들도 나를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 같아. 정말로 아름다운 나무들이야. 그리고 분명히 나무들 옆에는 아름다운 삶이 있을 거야!

"어이! 호프-호프!" 하는 고함소리.

가야겠어. 갈 시각이야....... 이 나무는 바싹 말랐지만 여전히 다른 나무들과 함께 바람에 흔들리고 있어. 그래서 내 생각에는 만일 내가 죽더라도 여전히 나는 이런 저런 식으로 삶에 참여하게될 거야. 안녕, 내 사랑....... (두 손에 키스한다) 당신이 나한테 준 당신 서류는 내 책상에 있는 달력 아래 있어. - P641

이리나 (올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다) 때가 오면 이 모든 것이 무엇 때문인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이 있는지 모든 사람들이알게 될 거고, 아무런 비밀도 없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살아야해…… 일해야 해. 오직 일해야 해! 내일 나는 혼자 가겠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내 모든 인생을 바치겠어. 지금은 가을이고 곧 겨울이 오겠지. 눈으로 길이막히겠지만, 나는 일하고 또 일할 거야…… - P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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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칠층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로자 아줌마는 육중한 몸뚱이를오로지 두 다리로 지탱하여 매일 칠층까지 오르내려야 했다. 그녀는 유태인이라서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불평할 처지가 못 되지만, 그래도 칠층을 오르내리는 일만은 정말 힘에 부친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그녀는 다른 일들로 심신이 괴로운데다가 건강도별로 좋지 않았다. 또하나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그녀가 엘리베이터 하나쯤은 갖추어진 아파트에서 살 만한 자격이 있는 여자라는 점이다. - P9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 P13

순간, 나는 울기 시작했다. 나역시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것을잘 알고 있었지만, 공공연하게 그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울 것 없다, 모하메드. 하지만 그래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으면맘껏 울어도 좋아. 이 아이가 원래 잘 웁니까?"
"전혀요. 얘는 절대로 울지 않는 아이예요. 하지만 얼마나 날 애먹이는지 몰라요. 내 속 썩는 건 하느님이나 아시지요."
"그렇다면, 벌써 좋아지고 있군요. 아이가 울고 있잖아요. 정상적인 아이가 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아이를 데려오길 잘하셨어요. 로자 부인. 부인을 위해서 신경안정제를 처방해드리죠. 별건 아니지만 부인의 불안증을 없애줄 겁니다." - P43

그러고 나서 아줌마는 마치 아주 먼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듯내 머리 위로 시선을 던진 채 중얼거렸다.
"모모야, 그곳은 내 유태인 둥지야.".
"알았어요."
"이해하겠니?"
"아뇨.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런 일엔 익숙해졌으니까."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 P80

말을 마친 후 로자 아줌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누구보다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카츠 선생님말이 맞는 것 같다. 그는 말했다. 창녀들은 자기가 바라보고 싶은대로 바라보는 눈이 있다고 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주는 드리스 씨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허락하지 않았을 뿐 - P112

나는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여러분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 - P158

한다. 그건 그가 생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감상에 젖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어쨌든 더빙하는 남자가 적절한 어감을 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녹음을 다시 하기 위해 화면을 앞으로 돌려야만 했다. 우선 그는 총알을 막으려고 손을 뻗쳤고, 그때 "안 돼, 안 돼!"와 "날 죽이지 마, 죽이지 마!"라는 소리가 녹음실의 마이크 앞에 안전하게 서 있는 남자의 목소리로 끼워맞춰진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몸을 뒤틀면서 쓰러졌는데, 영화에서는 그런 게 재미다. 그는 이제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갱들은 그가 더이상 자신들을 해칠 수 없는데도 확인사살을 했다. 이미 살아날 가망은 없어졌는데 모든 것은 다시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고그 남자는 다시 살아났다. 마치 하느님이 더 쓸 데가 있어서 손을잡아 일으켜세우는 것처럼. - P160

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기분이 별로였다. 그럴 때면 맛있는 것이 더욱 맛있어졌다.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죽고 싶어질 때는 초콜릿이 다른 때보다 더 맛있다. - P162

로자 아줌마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 이도 거의 없었다. 미소를지을 때 아줌마는 평소보다 덜 늙어 보이고 덜 미워 보였다. 그녀의 어린애 같은 미소는 미용 효과가 있었다. 그녀는 유태인 대학살전인 열다섯 살 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 P173

그날은 그녀가 정신이 맑아져서 장례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그녀는 종교의식에따라 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는 그녀가 하느님이두려운 나머지 종교의식 없이 매장됨으로써 하느님을 벗어나보려는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지나간 일은 어쩔수 없으므로, 이제 신이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러 올 필요는 없다고아줌마는 말했다. 정신이 맑을 때 로자 아줌마는 말하곤 했다. 완벽하게 죽고 싶다고. 죽은 다음에 또 가야 할 길이 남은 그런 죽음이 아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자움 씨네 형제들은 그녀가 레알 시장과 생드니 거리, 푸르시 거리, 블롱델 거리, 라 트뤼앙드리 거리를 두루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로자 아줌마는 감동에 젖었다. 그녀는 특히 젊은 시절에 하루에도 사십 번씩 오르내리던 작은 호텔이 있는 프로방스 거리를 지날 때 무척 감격했다. 자기가 몸을 팔아벌어먹던 거리며 골목길을 다시 돌아보게 되어 무척 기쁘다고, 밀린 빚을 다 갚은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산책을 해서 무척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 P198

나는 그와 함께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쁜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P203

나는 무슨 추억이 될 만한 것이라도 있을까 하고 그의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주머니 속엔 푸른색 골루아즈 담배 한갑뿐이었다. 담뱃갑 속에는 아직 한 개비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의 곁에 앉아서그것을 피웠다. 그 담뱃갑 속에 있었을 다른 담배들은 모두 그가피웠을 테니, 나머지 한 개를 내가 피운다는 것이 뭔가 의미 있는일같이 여겨졌으므로,
나는 조금 울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도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이제 그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기쁘게 했다.
잠시 후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얼른 집으로 올라와버렸다. - P255

엄마는 중절수술을 받지 못했는데, 그땐 그것이 계획적인 살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로자 아줌마는 그 얘기를 늘입에 달고 살았다. 그녀는 교육도 받고 학교도 다녔다고 했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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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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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이란 진정 신에 의해 정해진 것이란 말인가. 달아나려 하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넘어서려 하지만 더 큰 화만 불러오는, 죽어서야 해방되는, 어리석고도 불쌍한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라니. 왜 살아야 하는 건가.
그냥 읽는 것 만으로는 난해한, 깊이 있는 해석, 공부가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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