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칠층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로자 아줌마는 육중한 몸뚱이를오로지 두 다리로 지탱하여 매일 칠층까지 오르내려야 했다. 그녀는 유태인이라서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불평할 처지가 못 되지만, 그래도 칠층을 오르내리는 일만은 정말 힘에 부친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그녀는 다른 일들로 심신이 괴로운데다가 건강도별로 좋지 않았다. 또하나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그녀가 엘리베이터 하나쯤은 갖추어진 아파트에서 살 만한 자격이 있는 여자라는 점이다. - P9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 P13

순간, 나는 울기 시작했다. 나역시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것을잘 알고 있었지만, 공공연하게 그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울 것 없다, 모하메드. 하지만 그래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으면맘껏 울어도 좋아. 이 아이가 원래 잘 웁니까?"
"전혀요. 얘는 절대로 울지 않는 아이예요. 하지만 얼마나 날 애먹이는지 몰라요. 내 속 썩는 건 하느님이나 아시지요."
"그렇다면, 벌써 좋아지고 있군요. 아이가 울고 있잖아요. 정상적인 아이가 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아이를 데려오길 잘하셨어요. 로자 부인. 부인을 위해서 신경안정제를 처방해드리죠. 별건 아니지만 부인의 불안증을 없애줄 겁니다." - P43

그러고 나서 아줌마는 마치 아주 먼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듯내 머리 위로 시선을 던진 채 중얼거렸다.
"모모야, 그곳은 내 유태인 둥지야.".
"알았어요."
"이해하겠니?"
"아뇨.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런 일엔 익숙해졌으니까."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 P80

말을 마친 후 로자 아줌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누구보다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카츠 선생님말이 맞는 것 같다. 그는 말했다. 창녀들은 자기가 바라보고 싶은대로 바라보는 눈이 있다고 했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주는 드리스 씨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허락하지 않았을 뿐 - P112

나는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여러분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 - P158

한다. 그건 그가 생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감상에 젖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어쨌든 더빙하는 남자가 적절한 어감을 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녹음을 다시 하기 위해 화면을 앞으로 돌려야만 했다. 우선 그는 총알을 막으려고 손을 뻗쳤고, 그때 "안 돼, 안 돼!"와 "날 죽이지 마, 죽이지 마!"라는 소리가 녹음실의 마이크 앞에 안전하게 서 있는 남자의 목소리로 끼워맞춰진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몸을 뒤틀면서 쓰러졌는데, 영화에서는 그런 게 재미다. 그는 이제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갱들은 그가 더이상 자신들을 해칠 수 없는데도 확인사살을 했다. 이미 살아날 가망은 없어졌는데 모든 것은 다시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고그 남자는 다시 살아났다. 마치 하느님이 더 쓸 데가 있어서 손을잡아 일으켜세우는 것처럼. - P160

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었다. 기분이 별로였다. 그럴 때면 맛있는 것이 더욱 맛있어졌다.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죽고 싶어질 때는 초콜릿이 다른 때보다 더 맛있다. - P162

로자 아줌마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 이도 거의 없었다. 미소를지을 때 아줌마는 평소보다 덜 늙어 보이고 덜 미워 보였다. 그녀의 어린애 같은 미소는 미용 효과가 있었다. 그녀는 유태인 대학살전인 열다섯 살 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 P173

그날은 그녀가 정신이 맑아져서 장례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그녀는 종교의식에따라 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는 그녀가 하느님이두려운 나머지 종교의식 없이 매장됨으로써 하느님을 벗어나보려는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지나간 일은 어쩔수 없으므로, 이제 신이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러 올 필요는 없다고아줌마는 말했다. 정신이 맑을 때 로자 아줌마는 말하곤 했다. 완벽하게 죽고 싶다고. 죽은 다음에 또 가야 할 길이 남은 그런 죽음이 아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자움 씨네 형제들은 그녀가 레알 시장과 생드니 거리, 푸르시 거리, 블롱델 거리, 라 트뤼앙드리 거리를 두루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로자 아줌마는 감동에 젖었다. 그녀는 특히 젊은 시절에 하루에도 사십 번씩 오르내리던 작은 호텔이 있는 프로방스 거리를 지날 때 무척 감격했다. 자기가 몸을 팔아벌어먹던 거리며 골목길을 다시 돌아보게 되어 무척 기쁘다고, 밀린 빚을 다 갚은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산책을 해서 무척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 P198

나는 그와 함께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쁜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P203

나는 무슨 추억이 될 만한 것이라도 있을까 하고 그의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주머니 속엔 푸른색 골루아즈 담배 한갑뿐이었다. 담뱃갑 속에는 아직 한 개비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의 곁에 앉아서그것을 피웠다. 그 담뱃갑 속에 있었을 다른 담배들은 모두 그가피웠을 테니, 나머지 한 개를 내가 피운다는 것이 뭔가 의미 있는일같이 여겨졌으므로,
나는 조금 울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도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이제 그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기쁘게 했다.
잠시 후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얼른 집으로 올라와버렸다. - P255

엄마는 중절수술을 받지 못했는데, 그땐 그것이 계획적인 살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로자 아줌마는 그 얘기를 늘입에 달고 살았다. 그녀는 교육도 받고 학교도 다녔다고 했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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