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본의 극우세력은 이 상황을 군침을 흘리며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군대의 보유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 ‘평화헌법‘의 폐기를 단단히 벼르고 있는 자민당 정권은 곧 다가올 참의원 선거에서의 압승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들에게 ‘핵무장 국가 북조선‘의 등장은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지금 북한 핵무장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일본 국민들이지 지배층은 아닐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국민들이 불안을 느끼면 느낄수록 자신들의 호전적 목적 달성이더 쉬워진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 P281

실제로 ‘자유무역‘의 ‘자유‘가 뜻하는 것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자유로운‘ 강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확실하다. - P283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에서의 사회복지시스템이 소비에트사회주의체제 존속 기간 동안 흔들리지 않고 건재해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사실은 또한 대처와 레이건 정부에 의해 주도된 신자유주의 논리세계 전역을 휩쓴 시기가 어째서 소비에트사회주의 몰락 이후였는지 그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준다. 신자유주의란 자본주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형태의 약육강식 논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한 논리가 거침없는 폭주를 하게 된 것은 역시 소비에트사회주의라는 경쟁 체제가 소멸됨으로써 자본주의가 더이상 자제력을 발휘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진 현실과 따로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 P283

일찍이 철학자 푸코는 복지국가를 정의하여, 그것은 국가가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을 낙인(烙印)찍고, 통제하는 방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관점에 따라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푸코의 이 말은 복지국가체제가 내포한 어두운 진실을 어느정도 정확히 건드리고 있는 진술이라는 것은 쉽게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따지고보면, 누군가의 말처럼, 복지국가(welfarestate)란 기실 전쟁국가(warfare state)와 모태가 같은 쌍둥이 형제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P287

"일을 하든 아니하든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할 것을 제안하는 것은 이러한 노동윤리 · 생활윤리와 정면에서 배치되는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은 근본적으로 ‘근대적인 노동윤리 · 생활윤리에 토대를 둔 가치, 신념, 관습, 제도를 뛰어넘어 새로운(그러나 실은 오래된) 지평, 즉 탈근대적 혹은 비근대적 세계를 안내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 P288

자본주의 근대문명이란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의 이데올로기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지만, 원자력 기술은 이 이데올로기의가장 과격한 체현물임이 분명하다. 즉, 원자력시스템은 끊임없이 약자들을 제물로 삼지 않고는 한순간도 버틸 수 없는 ‘희생의 시스템‘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원자력시스템이존립하기 위해서는 첫째, 원전 인근 지역에서 늘 불안과 위험 속에 살아야 하는 시골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하고, 둘째, 원전의 방사능 구역에서 온갖 궂은 작업을 수행하며 살아야 하는 노동자의 희생이 필요하며, 셋째, 처치 불가능한 핵폐기물을 떠안고 살아야 할 미래세대들의 희생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원자력은 안전하고 값싸고 깨끗하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 끊임없이 유포되는 상황에서 늘 진실이 희생되고, 진실에 기반을 둔 건전한 사회적 이성과 상식이늘 희생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 P295

이렇게 보면, 오래전부터 원전을 도쿄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해온 반핵운동가 히로세 다카시의 논리는 정곡을 찌르는 바가 있다. - P296

2015년 3월 말에 퇴임하는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키는 무척 홍미로운 인간이다. 지난 5년간 대통령 재임 중, 그는 오늘날 세계의 정치엘리트들과는 전혀 딴판의 언행과 자세를 보여주었고, 그럼으로써 라틴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언론의 끊임없는 주목을 받아왔다. 그의 이색적인 언행 중 가장 자주 언급된 것은, 대통령 관저를 노숙인들의 거처로 내주고 자신과 아내는 수도 근교의 작은 농가 오두막에서 거주한다는 것, 대통령으로서 받는 봉급의 대부분을 시민단체나자선단체에 기부하고 나머지 얼마 안되는 돈(한국돈으로 월 약 170만 원)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생활을 한다는 점 등등이다. - P298

정말로 가난한 이는 물질이 부족한게 아니라 탐욕 때문에 ‘자유‘를 잃은 사람이라고 그는 말했다. - P298

그는 엘리트 정치가들이 결여한 능력, 즉 풀뿌리 민중의 생활현실의 심부(深部)를 들여다보는 본능적 능력과 체질의 소유자이다. 예를 들어, 빈민가 가정을 방문할 때, 무히카 대통령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것은그 집 아이들이 자기만의 매트리스를 갖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루과이의 서민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무히카는 자신들의 생활 내면을 가장 잘 이해하는 지도자로서 계속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던것이다. - P300

고대 아테네인들은 인간이란 누구나 자기통치의 능력이 있다는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권력의 유혹에 끝까지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겸허히 수용하고, 그 바탕 위에서 역사상 최량의 정치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 제비뽑기민주주의를 우여곡절 끝에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문화적·예술적 활동도 그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궁극적 목적에 겨냥되어 있었고(아테네 제1 시민페리클레스의 말을 빌리면, 아테네 도시국가 전체가 민주주의의 학교였다), 그 결과 200년 이상 고도의 문명적인 시민생활을 향유했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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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것은 성장 없는 시대에 대비한 지혜의 결집이다. 이를 위해서도 시급한 것은 국가 차원의 정치적 이성이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의 확보이다. 문제는 참신한 인물의 영입이 아니라 양심적인 인간들이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제도의 구축이다. 하지만 구태의연한 선거제도가 계속되는 한, 이것은 불가능하다. - P270

이 비례무도(非禮無道)한 상황이 정권교체로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것은 아니라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근원적으로 보자면 이것은근대국가의 근저에 박혀 있는 뿌리 깊은 모순, 부조리, 불의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작가로서의 생애 내내 번민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빌리면, 자본주의 근대국가란 "내가 행복해지기위해서는 타자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시스템이라고 간단히 요약할수 있다. 이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체제 변호론자들은 교활하게도 "대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불가피한 희생" 이라는 논리로 정당화하려고해왔고, 지금도 이 논리는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뿐만 아니 - P276

라 근대국가는 이 근본적으로 불의(不義)한 논리를 법제화해왔고, 그 결과 법치주의라는 미명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뿌리째 거덜 내는 행위를 끊임없이 비호해왔던 것이다. 이른바 ‘국익‘ 혹은 ‘공익‘을 위한다면서 말이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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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안더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첫 남편.

그러니까 관건은 방사능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정보이다. 그러나 국제원자력위원회(IAEA)는 물론이고, 일반적으로 꽤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세계보건기구(WHO)조차도 방사능 문제에 있어서는 일관되게 거짓정보를 생산·유포하는 데 협력해왔다. 예를 들어, 1959년에 맺어진IAEA와 WHO 사이의 협약은 WHO라는 유엔 기구가 국제 원자력 추진세력 앞에서 얼마나 허약한지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 협약은 방사능에 관한 한, WHO의 독자적인 조사·평가와 그 연구결과의 공개를 일절금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WHO는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피해상황에 대한 학술대회를 두 차례나 개최하고도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못한 채 그냥 앵무새처럼 IAEA의 견해를 되풀이하여, 체르노빌 사고 피해자가 수천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믿기 어려운 WHO의 굴종적인 행태는 관계된 관료·과학자들의 왜소함뿐만 아니라, ‘원자력체제‘가 얼마나 가공할 반생명·비윤리성에 기반하고 있는가를 암시해주고 있다. - P251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 밑에서 시작된 원자력발전 시스템은, 핵무기에 못지않게 생명과 평화에 위협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없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본적으로 원자력발전과 핵무기는 일란성쌍생아라는 사실이다. 이번 호에 전재 · 소개된 인터뷰 기사에서 일본의평론가 가라타니 고진(行人)이 "원전은 핵무기 개발을 전제로 한 산업이기 때문에 핵무기를 꿈꾸는 국가는 원전을 결코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지만, 이것은 약간의 과장이 있을지 몰라도 핵심을 찌르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 P251

그러나 원자력발전 시스템의 존속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될 제일 절박한 이유는, 이것이 현재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서 미래세대의 삶의 토대를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극히 비윤리적인 시스템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P252

핵에 대한 무관심 · 무감각의 결과는 반드시 묵시록적 상황을 낳는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한나 아렌트의 첫 남편이기도 했던 독일철학자 귄터 안더스가 생전에 한 말이다. 그는 핵에 대한 무관심·무감각은 무엇보다도 현대인에게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대사회는 경제성장과 효율성의 원리에 압도적으로 지배되면서 세계 자체가 거대한 기계로 변했고, 인간은 한갓 그 기계의 부품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양심과 책임과 윤리의식, 즉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 P252

상상력의 결여는 현대인의 숙명이 되었다- 이것이 안더스의 비관적인결론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핵 없는 세상을 위해서 열심히 싸웠다. - P253

<녹색평론> 독자들 중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평론‘이라고 굳이 고집해온 까닭이 없지 않다.
그것은 이 잡지 창간의 주요 목적이 ‘저항’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론‘
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상대화하면서 철저히 의심하고, 질문하는 행위, 따라서 근원적인 의미의 저항을 뜻한다. 처음부터 《녹색평론》이 의도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사회와 세계 전체가 직면한 위기에 맞서서, 이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만 올바른 방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실로 다양한 의견-현실에 대한 분석과 진단, 해법들이 개진되고 있다.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분석, 진단, 해법들이 과연 안심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좌우의 이념과 논리를 가지고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정당하게 설명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다는 판단 밑에서 작업해왔다. - P256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성장을 통해서 극복한다는 방법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복지국가‘ 시스템을 통한 극복이라는 것도, 그것이 불가피하게 더 많은 성장을 전제로 하는 시스템인이상, 역시 지속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산업사회의 주류였던 방법, 즉 대규모 산업시스템 속에서 일자리와 생계를 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소규모 지역중심, 자립적 생산·생활 협동체들을 광범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틀 속에서 태양에너지에 기반을 둔 순환경제를 구축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다. 문제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과 확산을 가로막는 기득권 세력의 방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민주주의의 확립, 즉 보편적 이성이 존중을 받고, 합리적 상식이 통할 수 있는 정치시스템을 확보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 P261

그런 만큼 독일의 자세는 단연 돋보인다. 특히 주목할 것은 메르켈 독일 수상이 원전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안전위원회’와 함께 ‘윤리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 그리고 윤리위원회 위원장에 자신의 정치적 적수를 임명함으로써 정파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공정한 결론을 원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지 양심적인 행위라기보다 매우 합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자면 비판적인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윤리위원회‘에는 원자력에 관여하고 있는 전문가·관계자는 단 한 사람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윤리위원회 구성 멤버는 가톨릭의 추기경, 프로테스탄트 목사,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을 포함한 몇몇 학자, 소비자 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교수 등열일곱 명이었다. 이 위원회에 참여했던 베를린자유대학 교수 미란다슈라즈는 지난 6월 일본에서 행한 강연에서, 윤리위원회가 이렇게 구성이유는 "어떠한 에너지를 사용할 것인가는 전력회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요 정책을 이른바 관계 당국이나 기업 혹은 전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생활하는 주체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지만, 이 당연한 논리가 새삼 극히 신선하게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비이성과 몰상식이 활개를 치는 사회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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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란, 간단히 말하면, 보편적인 인간가치에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편성은 결국 ‘진실‘을 외면하고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지식인의 일차적인 과업은 가능한 한 철저히 ‘진실‘을 밝히고, 그것을 동시대인들과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인이 이 과업을 방기할 때, 그가 속한 공동체의 건강성이 지켜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지식인 자신의 개인적인 삶도 심히 허망하고 추해지기 쉽다는 문제가 있다. - P236

리영희는 거의 최후의 공식 인터뷰에서 자신이평생 관심을 가졌던 것은 ‘진실‘이었으며,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에서 언제나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하워드 진 역시 자신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느낌을 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힘없는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말할 것도 없이, 그 희망은 ‘진실‘의 힘에 의해 발효되고 배양된다고 할수 있다. 그러니까 지식인이 진실을 정직하게, 용기있게 말한다는 것은그 지식인 개인의 삶을 위엄있게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신이속한 사회를 희망의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데 무엇보다 큰 기여를 하는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을 말하는 행위는 지식인이 자기의 이웃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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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 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람들은 안다.
어느 날 이 시스템이 붕괴될 것임을
- 존 버거 - P222

인간은 누구든지 국가나 자본 혹은 복지체제에 이바지하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사람들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발언 속에서 개인의 존재를 다분히 도구시하고, 그럼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무례함과 몰이해를 드러내면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인생까지도 비하(下)하는 기묘한 결과를 빚어내고 있다. - P223

국가란 본래 풀뿌리 민중의 삶에 대하여 진정으로 친화적일 수도, 우호적일 수도 없는 권력기구이다. 국가는 징세(稅)와 공공사업과 복지서비스라는 형태를 통해서 재분배라는 기능을 행사하지만, 그 재분배란근본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민중에 대한 수탈을 지속하기 위한 방책일 뿐인지도 모른다.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독점하고 있는 국가라는 괴물은 자기확대의 욕망 때문에 쉽사리 자본과 손을잡으면서, 풀뿌리 민중의 요구는 간단히 무시하거나 외면해버린다. 이것은 국가의 체질화된 뿌리 깊은 습성이다. - P227

그러니까 바람직한 것은 개인의 이익추구가 그대로 공동체의 전체적이익과 조화 내지는 양립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민주주의를 논하면서 토크빌이 언급한 "올바르게 이해된 자기이익"이라는 개념이다. 1830년대에 미국을 방문했던 이 프랑스 지식인의 눈에비친 미국사회의 괄목할 만한 특징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가 특히 주목했던 게 미국에서는 구대륙과는 달리 "이익을 떠난 희생이라는 관념이 희박하다는 사실이었다. 토크빌은 미국에서는일반적으로 덕행은 숭고하거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으로이해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사람들은 동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그런 희생이 결국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위대한 것은 무사무욕(無私無慾)이 아니라, 올바르게 이해된 자기이익"이다(《미국의 민주주의》, 제2권, 1840). - P229

그리하여 지구생태계의 전면적인 붕괴가 임박한 시점에서도 국가는 기껏해야 ‘녹색성장‘을 운위할 수 있을 뿐이다. 녹색이란 무엇보다 인간생존의 자연적 한계를 예민하게 의식하는 토대 위에서 비폭력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가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절대로 성장논리와 양립할 수 있는 게 아니다. - P231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출산율 저하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은 것은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래를 단순히 현재의 연장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구히 산업국가의 틀 속에서 살아가는 것 이외의 삶의 방식을 상상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산업국가는 뿌리로부터극복해야 할 시대착오적인 유제(制)이다. 산업국가의 틀은 그것이 아무리 복지체제를 갖춘다 하더라도 자유로운 영혼에게는 근원적인 질곡일 뿐이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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