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촛불시위가 왜 시작되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이명박 정권의 이해력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들 자신은 선거 때에 비해서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데, 시민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촛불이 한창일 때 대통령이사과 아닌 사과를 두 번이나 한 것은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지, 촛불의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기회가 오자 즉시 전방위적인 탄압에 나섰고, 사실상 경찰국가체제의 수립에 열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정권은 더욱 고립을 자초하고, 고립 때문에 갈수록 더 포악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 P212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 논리는 일본의 경제학자 나가타니 이와오(中谷巖)의 말이 아니더라도 심히 ‘위험한 사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원래 하버드대를 나와 오랫동안 일본정부의 경제정책에 관한 조언자로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히 권장해온 나가타니는 작년가을 월스트리트의 금융파국을 보면서 이른바 ‘전향‘을 한 끝에 최근《자본주의는 왜 자멸했는가》(2009)라는 책을 써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 사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개인단위로 세분화하여, 그 원자화된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사상이기 때문에 안심, 안전, 신뢰, 평등, 연대 등 공동체적가치에는 아무런 무게도 두지 않는다. 즉, 인간끼리의 사회적 유대는이익추구라는 대의(大義) 앞에는 해체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위험사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 P214

그러나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는 도저히 합의에 이를 수 없는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비판세력 혹은 저항세력을 강권에 의해서 억압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명박 정권이 노골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고수하는 이상, 이 나라가 경찰국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의 대적(敵)은 민주주의인 것이다. - P215

아무리 생각해도, 열심히 노력하면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얘기이다. 부와 가난의 문제는 절대적 궁핍상태를 제외한다면 어디까지나 권력관계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본적으로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즉, 빈부격차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이 아니라 정치적 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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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버스가 ‘신세계‘에 도착한 이후 20여 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스페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른바 ‘인디오 논쟁‘은 이른바 ‘국익‘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스러운 만행에 직결되는 개념일 수 있는지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될 수 있다. 당시 스페인 왕실의 신대륙에대한 정책을 좌우할 만큼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이 ‘인디오 논쟁‘의 핵심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즉 인디오의 ‘인간성‘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즉, 인디오를 서구 백인과 똑같이 하느님의 아들, 딸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노예와 황금을 가져다줄 풍부한 잠재력을 가진 이신세계의 원주민의 인간됨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아메리카 땅과그 원주민에 대한 거리낌 없는 학살과 착취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 P184

오늘날 되돌아볼 때, 아메리카 토착민의 ‘인간성‘ 여부를 놓고 벌어진 16세기의 이 논쟁은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자의 인간성 자체를 무시하는 정신적 습벽은 대항해시대에 본격화하여 이후 제국주의 시대를 통해 훨씬 더 강화되어 근대적 세계의 핵심적인 생존의 원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 P185

지난 백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개화기 이래, 한국인들이 열심히 적응하려고 해온 근대세계의 질서란 근본적으로,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대로,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타자의 불행이 전제되어야 할것"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하는 ‘어둠의 체제‘였다. - P185

그러나, 오늘날 자유무역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세계의 다수 민중의 삶이 가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개발과 발전의 열매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자유무역체제하의 무자비한 경쟁논리 밑에서 민중의 오랜 삶을 지탱해온 온갖 종류의 공동체적 상호부조의 관계망이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어버린다는 데에 재앙의 핵심이 있다고 할수 있다. - P193

그는 토착농민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돈의 논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애와 환대의 원리임에 주목하고, 이러한 생활원리가 가령서구 근대의 핵심적인 가치 중의 하나인 관용(tolerance)과 어떻게 근본적으로 다른지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관용은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강자의 너그러움의 표시이다. 그것은 약자나 소수자가 강자가 지배하고있는 기성의 질서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될 때는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덕목이다. 따라서 관용은 근본적으로 불관용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비서구 세계 토착민들의 삶을 오랫동안 특징지어온 환대(hospitality)의 원리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자에게로 향하는 존경과 포옹이다. 따라서 타자는 단지 베풂의 대상이 아니라, 타자를 포옹하는 사람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없어서는 안될 동반자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토착민들의 삶은 서구적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먼 공생공락의 삶을 성립시켜온 것이다. - P194

그러나 우리는 미국적 문화, 생활방식은 세계평화와도, 민주주의와도, 지구의 건강과도 양립할 수 없는 본질적으로 낭비와 수탈을 구조화하고 있는 체제, 즉 근원적인 의미에서 범죄적인 체제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 P196

민주주의는 몇몇 제도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단계에 이르러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돌보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고, 순간순간 되풀이하여 쟁취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트에 의한 권력독점 현상이 구조적으로 강화되기 쉬운 오늘의 상황에서는 민주주의의 생명은 풀뿌리 민중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거리로 나오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음이 분명하다. 정말로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정당하게 요구하고, 그들의 민주시민으로서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것이 허용되고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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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콤플렉스는 외국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존재로 보지 않게 한다.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매우 선택적이고, 심지어 차별적이다. 우리의 서양 콤플렉스와 강자숭배주의가 얼마나 기막힌 수준까지와 있는가는 네팔 여성 찬드라 꾸마리 구릉이 겪은 참혹한 이야기에서선명하게 볼 수 있다.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일하던 찬드라 구릉이어느 일요일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돈을 내지 못했다는 죄때문에 경찰에 연행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행색이남루하고, 경찰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말을 한다는 이유로 주거불명의 정신병자로 오인되고, 그 후 6년 반 동안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정신병원에서 갇혀 지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 P156

아마 찬드라 구릉이 영어를 말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터무니없이정신병자 취급을 받지는 않았을 게 틀림없다. 우리가 찬드라의 이야기에서 큰 절망을 느끼는 것은 설령 경찰이나 정신병원에서 시초에 본의아닌 오인이 있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 여성이 적어도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밝혀졌을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방치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찬드라가 수용되어 있던 병원 쪽에서는 얼마 있지 않아 이 여성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였고, 그래서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병원에서 잘못 파악한 이름ㅡ찬드라 고름 - 이 법무부에 비치되어 있는 외국인 노동자 명부에 보이지 않는다는 컴퓨터 조회의 결과 때문에 다시몇 년을 허무하게 정신병원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찬드라 고름‘이 ‘찬드라 구릉‘을 잘못 발음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섬세한 배려만 있었던들 이 여성과 딸의 행방을 몰라 애태우던 네팔의가족들의 비극은 좀더 일찍 마감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 P157

문제는 가난이 아니라, ‘풍요로운‘ 소비문화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경제성장 없이는 인간다운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박멸해야 할 바이러스처럼 가난을 무조건 혐오해왔다. 그 결과 ‘품위있는‘ 가난과 그 의미에 관한 성숙한 인식은 이 사회에서극도로 축소되었고, 우리의 삶은 외형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혹은그 때문에-내면적으로는 심히 병들고 공허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자립적인 생존의 기반이자 도덕적 삶의 원천인농경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감각이 상실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식량자급률 25퍼센트 수준 - 그나마도 석유에 의존해서 - 이라는 한심한 농업현실로는 한 사회공동체의 장기적인 존속이 명백히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목전의 이윤추구에 혈안이 되어, 마치 내일이 없는사람들처럼, 땅을 죽이는 일에 광분하고 있다. - P162

그들이 그렇게 되었던 것은 그들이 현상을 넘어 볼 수 있는 비전이나상상력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텐데, 그러한 상상력의 결핍은그들이 엘리트로서의 자각 이전에 당대의 밑바닥 풀뿌리 민중과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던 점에 연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신채호나 한용운의 경우, 최초에 얼마간의 사상적 혼란기가지난 다음에 그들이 끝끝내 사회진화론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이 늘 민중과 함께 있겠다는 철저한 평등주의 사상, 혹은 근원적 자유의 사상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P168

아마도 밑바닥에서도 가장 밑바닥으로 밀려난 소외의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 어머니에게는 "근대적인 교육이 가져다준 지식이나 이론은 없었지만 근대적인 개념에 지배당하지 않는 지혜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서경식은 말하고 있다. 요컨대, 그 어머니의 삶을 이끈 것은 흔히 지식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근대, 전근대,
탈근대 따위의 관념적 언어로써는 절대로 포착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본능적인 감각과 의식이었을 것이다. - P169

이 경쟁지상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출산과 보육과 교육 과정에서 단계단계마다 부모나 자식이나 어김없이 겪을 엄청난 시련과 스트레스를 사전에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떤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를 엄두를 내겠는가. 이것은 결코 출산장려금 따위로 해소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금 출산율 저하라는 현상은 사람들이 대부분 무의식중에 행하는 ‘보이콧‘ 행위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 보이콧은 그동안 한국의 경제적발전의 성과를 긍정하고 미화해온 무수한 ‘교육받은‘ 엘리트들의 논리가 한마디로 허위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P171

일찍이 간디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정치적으로 해방되더라도,
만약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생존양식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그것은인도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지배자의 피부빛깔이 달라진 것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간디의 정치적 후계자 네루는 간디의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네루는 산업주의적 생산양식은 시대의 필연적인 추세라고 생각했고, 그의 지도 밑에서 인도는 현대적인 산업국가가 되기 위한 수많은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형 댐이 아직도 건설 중인 국가가 되었고,
교육받은 소수 엘리트들과 대다수 민중 사이의 소득 및 생활수준의 격차는 갈수록 심화되어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독립이전보다도 풀뿌리 민중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이 참담한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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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원리주의란 모든 것은 기술의 힘으로 제어되고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완고한 신념에 붙들려 있는 정신적 태도라 할 수 있는데, 이때 기술은 또 상황의 전체적인 국면을 고려하는 생태적 관점이 아니라 상황의 전체 맥락으로부터 고립시켜 문제를 해소시키려는 환원주의적 관점에 뿌리박고 있다. 물론 이런 관점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데 비상한 효율성을 발휘하고, 부분적으로 뛰어난 합리성을 갖지만, 상황 전체의 장기적인 맥락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효율성과 합리성은 지극히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다 잘 알고 있는 일이며, 산업기술주의 문명의 지속불가능성이 바로 여기서 비롯하고 있음은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 P134

그러나 실제로 《녹색평론》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목표로 한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었다고 할 수 없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아마 우리가 희망해온 것은 그러한 근본적인 질문의 전파를 통해서 지금 뿌리로부터 병든 문명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연대의 그물이 형성되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더 견딜 만한 것이 되도록 돕는 일이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 P141

지난 10년 동안 <녹색평론》을 통하여 우리가 일관되게 이야기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없는 성장, 팽창을 내재적인 요건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산업경제, 산업문화가 물러나고, 새로운 차원의 농업 중심 사회가 재건되는 것만이 생태적, 사회적 위기와 모순을 벗어나는 유일하게 건강한 길이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이 근본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지고, 또 평등하게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존공영(共存共榮)이 아니라 공빈공락(共貧共樂)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 P144

유사 이래의 전면적인 생태적 위기로 인해 우리가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은 재화와 서비스의 총량적 증가를 통한 부의 분배라는 종래의 논리는 아무리 기술적 수단이 발달한다 할지라도 결국 생태적 파국을 불가피하게 하며, 따라서 타자들 - 사람이든 아니든 - 에게 상처를 주지않고 우리가 인간다운 위엄과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난하게 겸손하게 사는 도리밖에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목소리를 낮추어야 딴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고, 사람이 조용해져야 새들이 노래를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 P144

미국은 항상 옳고, 세계 어느 곳이든지 미국이 보기에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이면 언제나 정치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뿌리 깊은 오만은 실제 미국의 엘리트 문화 전체를 물들이고 있음이 틀림없다. - P148

일찍이 간디는 서구문명에 대하여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에 값할만한 게 못 된다고 일갈한 바 있다. 간디에 의하면, 참다운 문명이란 자발적으로 물욕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 P149

간디는 사람들의 기본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는 이 지구는 극히 풍요로운 곳이지만, 탐욕 앞에서 지구는 지극히 결핍된 곳이라는 뜻의 말을 하였다. 이 지상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이보다 더 간명한 진리를 드러내는 말은 없을 것이다. - P150

무고한 아프간 백성들에 대한 공격을 당장 그만두라는 우리의 외침이 위선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미국적 생활방식‘과의 결별을 준비하고, 우리의 삶을 자립적, 자치적인 것으로 바꾸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한경쟁의 자유시장 경제에 우리가 속절없이 매여있는 한, 우리는 투기꾼들이 판치는 노름판의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누추하고 비루한 야만의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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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란 것은 뿌리 없는 지식의 파편으로 그것 자체로는 사람의 주의력을 끊임없이 흩어지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할 뿐이다. (아마 이것이 오늘의 산업체제가 노리는 것인지 모른다. 소비주의 사회란 끊임없는 잡담과 수다 속에서 대중의 주의력이 한없이 분산되어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정보를 의미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 필수적인 것은 인간적인 맥락이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은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원천적으로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험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들에게는 자라는 도중에 반드시 몸으로, 감각으로 익혀야 할 경험이 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흙장난을 해보지 않은 아이가 자연에 대해 어떤 근원적인 이해를 가지고 자랄 것인가? 텔레비전과 컴퓨터 앞에 매달려 아동기의 대부분을 ‘가상현실‘의 체험으로 보낸 아이들이 과연 다른 사람, 다른 생명의 슬픔과 기쁨을 이해하고, 보살피고 돌보는 능력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가상현실‘의 경험은 거기서 사람이 싫증 나거나 고통을 느낄 때는 언제라도 플러그를 뽑아버리면 순식간에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뿌리 없는’ 경험이다. - P104

랍비들 사이에 전해져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사의 안내를 받아 천국과 지옥을 차례로 구경하였습니다. 먼저 지옥이란 데를 가보았더니, 사람들이 모두 못 먹어서 말라비틀어진 몰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커다란 가마솥이 있고 그 솥에는 향기로운 죽이 그득히 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죽을 떠먹을 수 있는 국자가 너무 크고 길어서 사람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국자를 가지고 자기 입에 죽을 떠 넣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바로 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여기에도 커다란 솥에 죽이 그득 끓고 있고, 아까 본 것과 같은 어마어마하게 큰 국자가 있었습니다. 모든 조건은 지옥에서와 꼭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혈색 좋은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배불리 먹고있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큰 국자를 가지고 죽을 떠서 각자가 자기 입으로 가지고 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상대방의 입에 서로 떠 넣어주는 것이었습니다. - P114

우리는 이제 중요한 것은 삶 자체이지, 이른바 생활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식의 근본적인 전환에 의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끝없이 야만적이게 하는 경제물신주의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따라서 인간다운 삶의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 공생의 논리를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 P126

내핍과 절약과 가난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에 있어서는항구적인 생활방식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활향상 의지를 우습게 보거나 과학기술의 능력을 얕잡아보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조건을 고려할 때, 이 지구 위에 서식하고 있는 사람을 포함한모든 목숨붙이들이 공생공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고르게가난한’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127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행할 때, 그것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우리 자신을 ‘들어올리는‘ 행위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여, 가난을 받아들이거나 가난을 선택하는 것은 삶의 전락이 아니라 고양(高揚)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생각해보더라도 가난해져야 우리가 서로서로 돕고, 상부상조할 필요성이 생겨난다는 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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