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 때문에, 지금 환경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지배적인 논의방식에서 보는 것처럼 이것을 단순한 외부적 재난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 자신의 기본가정 자체의 결함으로 인식하는 데 무능력을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근원적인 공포가 사태의 정당한 인식을 가로막고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본질적인 결핍을 느끼면서도 환경재난에. 대한 기술주의적 접근방법만이 활개를 치고, 또 그러한 현실에 대체로묵종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 P13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품고 있는 맹목적인 숭배나 신뢰는 과학은 거짓이없고 실패가 없다는 전연 근거 없는 미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미신이 널리 유포된 데에는 이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비역사적 사고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의 진리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인 것이었지 결코 항구적인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하게 과학적인 태도는 그러니까 늘 열려 있는 겸손한 태도일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현재 능력이 - P15

나 인식방법으로써 포착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하여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참다운 과학정신과 인연이 먼 태도라 해야 옳다. - P16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관계, 그리고 근대과학의 근본가정에 깔려 있는 폭력성에 대한 뿌리로부터의 철저한 반성 없이, 계속하여 더 많은 과학과 더 정교한 기술만을 구한다면 파멸은 불가피할 것이다. - P16

생산과 소비의 양적 증가는 도리어 인간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비극적인 경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바로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 P17

따지고 보면,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삶의 우주적 연관이나 자연적 근거를 완전히 망각한 문화라는 것은 거의 낯선 것이었다고 할 수 있고, 사람의 에너지를 온통 소득과 소비의 경쟁 속에 쏟아붓도록 강요하는 오늘의 지배적인 산업문화는 인류사에서 극히 예외적인 생존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P18

우리가 생명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러한 문화의 재건은 우리 각자의 인간적인 자기쇄신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이 분명하다. - P19

따지고 보면, 현대 기술문명의 기저에는 정복적 인간의 교만심이 완강하게 버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도를 따르는 순리의 생활을 우습게 여기면서,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통제와 조종 속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야만적인 폭력이 끝없이 창궐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연적 환경이든 인문적 환경이든 나날이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생활의 창조적 재조직이 가능하려면, 자기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겸손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정신적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인다. - P19

상업주의의 가공할 압력 밑에서, 자본의 지배에 반대하려는 의도로 출발한 문화적 작업들이 흔히 거의 예외없이 자본과 상품논리의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오늘의 현실인 것 같다. 그러나 죄악의 출발은 가난이 아니라 잉여라는 옛사람들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헌신과 자기희생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는 문화가 활개를 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 P21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회나 세상이 변해야 할 필요성에 관해 말하고있지만, 그러나 세상이 변하려면 자기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줄 아는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은 매우 드문 것 같다. 우리의 고통은 자기 자신이 바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정확히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일 것이다. 개인적인 노력은 별로 의미가 없으며, 문제는 구조적이다ㅡ라고 흔히 지식인들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번 호 《녹색평론>의 여러 필자들, 특히 <작은 行星을 위한 食事>의 필자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듯이, 구조적 변화의 출발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있는 것이며, 나 자신이 변화함으로써 벌써 세계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임있는 인간으로 성장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이 당면한 생태적, 사회적, 문화적, 도덕적 위기에 대한 진실로 인간다운 양심적인 응답일지도 모른다. - P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국가권력을 행정·입법·사법의 삼권으로 분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들어왔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권력분립, 즉 부자와 빈자의 이해관계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가져올 것인가? 바로 이것을 무시한 결과, 우리는 하나의 계층이 우위를 점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어버렸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빈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중간계층은 (일반적으로는 부지불식간에) 자기들이 부자들의 이해관계에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부자들은 재력을 통해서 어떻게든 권력을 갖기 마련이고, 중간층은 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사회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 덕분에 언제나 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결국 민주주의란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빈자들을 권력구조 속에 포함시키는 것을 뜻하게 된다. 따라서 국가권력이 행정·입법·사법으로 분리될 때이 각각의 권력 내에 민주적 요소들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 P167

지역의 의회들은 공동체 의식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대표자들이 위에서 모든 것을 관리할 때에는 시민의 정치참여라는 것이 보통 투표라는 고독한 행위로 축소되어버린다. 공동체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다. 자치는 활발한 참여와 공동체를 낳는다. 루소가 "인간은 타인에게 자신을 대표하도록 허용하는 순간 자유를 잃게 된다.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썼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 P169

"스위스연방의 지방분권은 중앙정부가 칸톤에 권한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칸톤과 민중의 동의에 의해서 국가가 그 권력을 얻는 것이다." - P177

지난 두 세기 동안 선거대의제가 표준이 된 결과, 오늘날 전 세계가 처해 있는 위험한 상황은 과장해서 말하기 어렵다. 금융위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권력은 (민중이 아니라) 정부들의 손에 있고,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이성적이며 진보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전쟁, 오염, 낭비, 환경파괴, 그리고 (국민에게) 설명책임이 없고 무책임한 소수 특권층에게 국가의 자산을 넘겨주는 일에 협력해왔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상(理想)은 내동댕이쳐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비밀리에 설계, 집행되는 시스템에 속박되어 있다. 농장, 주택, 사업체, 일자리, 소유물, 생계, 인간의 삶이 거대한 기생충 같은 금권정치의 손아귀로 넘어간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 말고 다른 어떤 돌파구가 있을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도입은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고(폭동, 반란을 통해 통치자가 각성하게 만드는 일) 혹은 헌법을 통해 지속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실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도아니다. 문명이 생겨난 이래 계속되어온 일이다. - P186

그러나 민주주의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상황도 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선거대의제에 대한 대안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한다. 정치는 ‘전문가들에게 일임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소비자로서의 낙수효과를 누리는 대가로, 정치적 자유와 책임을 양도하는 데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현실은 특권층의 탐욕이 모든 것을 먹어치우려고 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때에만 위협을 받을 것이다. - P189

소로에게 보내는 다섯 번째 편지

흑인과 여성의 자유를 위하여

당신이 노예제 폐지를 위해 노력한 것은 존 브라운의 영향도 있었지만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신시아에게서 받은 교육의 힘이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당신에게 어머니와 누이는 숨을 거둘 때까지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을 것입니다. 존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성장한 집 역시 ‘지하철도’의 중요한 정거장 중 하나였다고 하더군요. 당신의 어머니는 ‘콩코드 노예 반대 여성협회‘를 창립한 개혁주의자였고, 수많은 노예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주었지요. 평소에도 노예들이 재배한 사탕수수에서 나온 설탕을 저녁식탁에 올리지 않을 만큼 그녀는 철저한 노예제 폐지론자였습니다.
여권운동의 선구자인 마거릿 풀러가 말했던 것처럼 그 당시에 "여성 보호를 가장 뜨겁게 외친" 사람은 바로 "흑인 노예를 옹호한 사람들"이었지요. 당신의 어머니를 비롯해 실제로 도망노예들을 보이지 않게 돕고 노예제 폐지를 이루어내는 데 있어서 여성들의 역할은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역사에 남아 있는 여성들의 이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위대한 아들의 이름을 기억하지만 그 아들을 길러낸 어머니를 함께 기억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 P199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당신을 비판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당신의 책을 읽다가 여성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곤 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때로는 여성혐오적인 성향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향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지요. 엘런 데버루 수얼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뒤 독신으로 살면서 여성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을 가졌으리라 짐작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루이자 메이 올컷, 마거릿 풀러 등 주관이 뚜렷하고 지적인 여성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던 걸 보면 당신의 여성관이 보수적이었다고만 말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 P202

중독공화국

지은이는 중독을 "한편으로 현재의 느낌에 둔감하도록 하는 행위이자, 다른 편으로 본래적인 욕구 충족이 아닌 대리물을 통한 가짜 만족을 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모든 중독의 밑바탕에는 일종의 ‘심리적 허기’가 깔려" 있는데, 이 허기는 결코 충족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결국 "영원한 불만족의 상태"로서 중독이라는 문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P204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폭력의 과정을 통해 개인 차원에서나 집단 차원에서나 체계적으로 중독을 조장하고, 바로 그 중독을 먹고사는 시스템이다." - P206

지은이에게 영향을 준 심리학자 앤 윌슨 섀프는 《중독사회》에서 중독의 핵심적인 문제로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며 새로운 깨달음 같은 것을 가로막는 것을 꼽는다. "중독시스템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 핏기 없이 살아가는 것이 별로 불편하지 않도록, 아니 오히려 편안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중독에 빠진 인간과 사회는 스스로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으며, 오히려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중독 그 자체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내가 이 세계를 통제하고 있다는 거짓된 인식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중독시스템이다. - P209

앙제에서 중소도시의 미래를 보다

도시재생의 핵심은 교통정책

지방 중소도시가 활력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교통이다. 시민들이 자가용에 의존하지 않고 대중교통과 자전거와 보행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해야 중소도시 상점가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결국 ‘모빌리티’(이동수단)다. 사람들의 원활한 이동을 보장해주는 대중교통 중심의 교통체계를 만들어주는 것이 재생의 핵심이다. 사람 몸 안에 맑은 피가 구석구석 돌아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 P2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생은 문학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여전히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절실한 마음으로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을 꾸준히 찾으셨다. 그렇게 해서 만난 작가가 이시무레 미치코였다.
한 강연에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문학은 결국 삶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악마의 정신이 지배하고 있더라도 끝끝내 꺾이지 않는 인간정신이 있고, 아무리 할퀴고 짓밟아도 끝끝내 소멸될 수 없는 근원적인 기운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게 하는 게 좋은 문학과 예술의 몫입니다." - P151

그의 분노는 회사 측이나 정부, 혹은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진실을외면하는 회사 직원들과 시민들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고향 마을에 닥친 불행을, 연민의 차원을 넘어서서, 근대 자본주의사회가 지닌 본원적 폐해로 인식했다. 그 순간 그는 한 사람의 탁월한 작가로서도 제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미나마타병)은 결코 사람들 정면으로 다가왔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엇보다 마음을 놓고 있는 일상적인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 숭어잡이나 맑게 갠 바다의 낙지낚시나 야광충이 춤추는 밤낚시의 방심한 틈을 타서, 사람들의 먹을거리인 신성한 생선들과 더불어 사람들의 체내 깊숙이 침투하고 말았던 것이다. 《슬픈 미나마타), 123~124쪽) - P156

참된 문명이라면 산을 황폐하게 하지 않고, 강을 더럽히지 않고, 마을을 부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는 어떤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도 서양식 근대만을 금과옥조처럼 추종하는 메이지 일본은 "흙묻은 구두를 신고 다다미 위로 뛰어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니 반드시 화를 불러일으키리라 경고했다. 1910년 마침내 조선을 집어삼키자, 사람들은 그것을 세계 일류 국가로 발돋움한 증거라 여겼다. 하지만 다나카 쇼조에게 "얼간이가 약자를 집어삼키는" 그따위 ‘탄서주의(香主義)’는 오히려 일본이 망해간다는 증거였다. - P15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2-24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살님!
가족 모두 행복 가득! 하시길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
゚。  。゚
 ゚・。・゚
⠀()_/)
⠀(。ˆ꒳ˆ)⠀
ଫ/⌒づ🎁

햇살과함께 2021-12-24 13:16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scott님도 크리스마스 춥지 않게^^ 즐겁게^^ 보내세요~
 

뿌리에서부터 질문하기 - 김종철 선생님의 창간사, 1주년, 10주년, 20주년 권두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품고 있는 맹목적인 숭배나 신뢰는 과학은 거짓이 없고 실패가 없다는 전연 근거 없는 미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미신이 널리 유포된 데에는 이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비역사적 사고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의 진리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인 것이었지 결코 항구적인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하게 과학적인 태도는 그러니까 늘 열려 있는 겸손한 태도일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현재 능력이나 인식방법으로써 포착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하여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참다운 과학정신과 인연이 먼 태도라 해야 옳다. - P113

따지고 보면, 현대 기술문명의 기저에는 정복적 인간의 교만심이 완강하게 버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도를 따르는 순리의 생활을 우습게 여기면서, 모든 것을 자기자신의 통제와 조종 속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야만적인 폭력이 끝없이 창궐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연적 환경이든 인문적 환경이든 나날이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생활의 창조적 재조직이 가능하려면, 자기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겸손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정신적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인다. (창간호, 1991년 11-12월) - P116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서 《녹색평론》은 단순한 기술이나 ‘녹색산업주의‘로는 문제 해결이 근본적으로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아직은 소수의 의견을 대변하고자 노력해왔다. 오늘날 우리의 지배적인 삶의 양식, 즉 산업문화가 근본문제이며, 그 산업문화를 진보나 발전으로 보는 근대화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이분법적 유물주의의 세계관 - 이런 것이 본질적으로 재고되지 않는 한, 이 전대미문의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하려고 하였다. - P118

그러나 이러한 구조에 다가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동안 개발 이데올로기 또는 산업문화의 지배하에서 우리자신도 모르게 두텁게 쌓여온 인간중심주의적 교만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되는 것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주생명과 내 생명이 다른 것이 아니며, 만물이 나의 부모형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보편적으로 확대된 문화를 누릴 필요가 있다. 불필요하게 생명체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없이는 산업주의적 생활방식에 대한 중독상태로부터 벗어나올 수도 없고, 설사 의도적인 노력을 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금욕적 생활의괴로움만을 안겨주기 쉬운 법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기쁨으로 하지 못하는 행동은 뿌리가 약할 수밖에 없다. - P119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생명을 부정하는 모든 사회적 목표와 권력체계를 폐기해야 하고, 경쟁의 논리에 세뇌된 우리 자신의 내면을 해방시켜야한다. 일찍이 미국의 문명비평가 루이스 멈퍼드가 갈파한 바와 같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장래는 결국 한 가지 조건에 달려 있다. 그것은 "모든 수준에서 또 온갖 종류의 공동체에서 권력의 강화가 아니라 상부상조와 애정 어린 연대와 생명의식의 강화를 통해서 이 행성이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재천명하는 방향으로 살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건이다.(제7호, 1992년 11-12월) - P120

지난 10년 동안 《녹색평론》을 통하여 우리가 일관되게 이야기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없는 성장, 팽창을 내재적인 요건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산업경제, 산업문화가 물러나고, 새로운 차원의 농업 중심 사회가 재건되는 것만이 생태적, 사회적 위기와 모순을 벗어나는 유일하게 건강한길이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이 근본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지고, 또 평등하게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존공영(共存共榮)이 아니라 공빈공락(共共樂)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 P122

따라서 타자들 - 사람이든 아니든 - 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우리가 인간다운 위엄과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난하게,
겸손하게 사는 도리밖에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목소리를 낮추어야 딴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고, 사람이 조용해져야 새들이 노래를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 P122

그러나, 실제로 미국적 생활방식 또는 미국적 문명이란 대체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 전체 인구의 5%에 해당되는 인구가 세계 전체 자원의 대부분을 독점적으로 점유, 소비함으로써 유지되고 있는 그러면서도 인종적, 계층적, 성적 불평등의 문제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이른바 미국적 생활방식이란 결코 부러워할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전체의 평화와 생태계를 위협하는 재앙일 뿐이다. 석유의 낭비를 무한정 자극하는 미국적 생활방식이 아니라면 중동을 비롯한 세계 도처의 무고한 사람들의 자주적인 삶이 터무니없이 유린되지도, 토착민들의 땅이 무참히훼손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 P127

일찍이 간디는 서구문명에 대하여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게 못된다고 일갈한 바 있다. 간디에 의하면, 참다운 문명이란 자발적으로 물욕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 P128

간디는 사람들의 기본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는 이 지구는 극히 풍요로운 곳이지만, 탐욕 앞에서 지구는 지극히 결핍된 곳이라는 뜻의 말을 하였다. 이 지상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이보다 더 간명한 진리를 드러내는 말은 없을 것이다. - P128

《녹색평론》 독자들 중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평론‘이라고 굳이 고집해온 까닭이 없지 않다. 그것은 이 잡지 창간의 주요 목적이 ‘저항‘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상대화하면서 철저히 의심하고, 질문하는 행위, 따라서 근원적인 의미의 저항을 뜻한다. 처음부터 《녹색평론》이 의도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사회와 세계 전체가 직면한 위기에 맞서서, 이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만 올바른 방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실로 다양한 의견 - 현실에 대한 분석과 진단, 해법들이 개진되고 있다.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분석, 진단, 해법들이 과연 안심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좌우의 이념과 논리를 가지고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정당하게 설명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다는 판단 밑에서 작업해왔다. - P131

그러나 문제는 그 ‘경제문제‘가 이제는 ‘에콜로지‘를 고려하지 않고는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국면에 지금 우리 모두가 처해 있다는 점이다. - P1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잡지 발간 초기 《녹색평론》은 외국의 ‘녹색사상‘을 전파하는 데 주력하였다. 생태주의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던 당시 사회풍토에서 외국의 대안적인 삶과 사유를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한 전망을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탈학교 사회》의 저자 이반 일리치, 진보적 미술평론가로 말년에 알프스에서 농사와 글쓰기를 병행한 존 버거, 체코의 시인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 문명비평가이자 시인인 웬델 베리, 인류학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경제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제러미 리프킨, 기계문명 비평가 루이스 멈퍼드, 공생공빈의 삶을 주창한 쓰치다 다카시 등의 글을 번역, 소개했다. - P85

그즈음 《녹색평론》의 관심은 환경생태주의에서 정치민주주의로 향했다. 계속된 발언과 투쟁 속에서 생태·환경 등 모든 문제의 해결 방법은 민주주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기본소득 도입과 은행의 공공화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시민 참여가 보장되는 직접민주주의를 확대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넓혀갔다. 이후 잡지 지면에는 기본소득, 숙의제, 추첨민주주의와 같은 서양의 새로운 생각, 개념, 제도들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금융위기, 민주주의, 기본소득’, ‘민주주의와 시민의회‘, ‘시민주권시대를 향하여‘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사례를 소개하는 특집이 자주 실리기도 했다. - P87

처음 《녹색평론》이 생태주의를 내걸고, 크고 작은 의제들을 제시하자모두들 ‘무모한 실험‘, ‘근본주의적 발상‘이라며 비웃었다. 그러나 광야에서 외치던 《녹색평론》의 예언은 터무니없는 꿈이 아니었다. 불소화는 중단됐고, 기본소득과 지역통화는 실험 중이다. 《녹색평론》이 끊임없이 주장했던 탈성장·반개발의 담론은 기후위기 속에서 점점 호소력을 높여가·고 있다. 30년을 돌아보니, 《녹색평론》이 옳았다.
그럼에도 개발과 성장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들은 지속적으로 지구환경, 자연 생태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성장의 덫에 걸린 그들은 ‘녹색성장‘, ‘녹색뉴딜‘, ‘지속가능한 성장‘ 등 희한한 구호를 내걸며 생태주의에 물타기를 하고 있다. 탄소중립이라는 전지구적 명제에 딴죽을 거는 재계, 기업인, 정치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 P89

《녹색평론》은 이전의 환경보호운동, 오염 방지·제거 운동 등이 주력한 ‘온전한 근대산업문명의 본래 모습‘의 회복 또는 보호라는 틀을 뒤엎어버렸다. 기존 환경보호운동의 전제가 되는 근대산업문명 자체를 부정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녹색평론》의 ‘래디컬‘한 속성이다. 이것은 창간 뒤 30년이 지나도 초지일관 변하지 않았다. - P96

"지난 2~3세기 동안 이른바 문명세계가 산업문명을 통해서 이룩했다고 하는 높은 생활수준은 실은 인간사회가 자신의 보금자리를 끊임없이 찢고 할퀴는 난폭한 짓을 되풀이함으로써 얻어진 부산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구 자본주의의 산물인 산업경제와 그것에 의존해온 근대적 문명은, 그것이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와 지하자원을 대량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것인 한,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종말의 파국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한계를 그 출발점에서부터 내포하고 있다" (책머리에〉,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녹색평론사, 2019). - P96

"유한한 지구상에서 직선적인 성장·진보를 끝없이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인 모순이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이상, 지금 가장 긴급한 것은 순환적 삶의 패턴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곳). - P96

그러나 《녹색평론》은 이른바 ‘발전‘ 혹은 ‘진보‘의 이름 밑에서 인간생존의 사회적·자연적 토대를 끊임없이 훼손하는 일체의 움직임, 논리, 사고, 제도, 관행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늘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했고, 동시에 어떻게 하면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고 공정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 왜 우리가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다"(《대지의 상상력). - P1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