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선생님 책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볼 줄이야~!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위상을 알 수 있네.
간만에 서태지와 아이들 베스트를 듣는다. 명곡이다 명곡!

그래서 달력이 없어도 날짜는 정확히 알고 시계가 없어도 시간을 알았다. 꼭두새벽부터 어둑새벽, 찬새벽, 밝을녘 등등으로 아침시간을 나누었다. 저녁나절부터는 해거름, 해넘이, 어스름저녁, 이렇게 숫자표시보다 훨씬 따뜻하고 시적(詩的)인 시간개념으로 사물을 표현했다. - P94

그러나 정경식 씨는 현실을 가장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역사적 인간이다. 그가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정당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솔직한 자기성찰이 있기 때문이다. 기도원이나 절간에 파묻혀 경건하게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살아가는 노동만이 진정한 구도자의 길이기 때문이다. - P110

서울 변두리산의 소나무가 유달리 솔방울을 많이 맺고 있는 까닭은 공해로 인해 죽어가면서 자손을 많이 퍼뜨리기 위한 소나무 스스로의 자구책에 의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 P111

만약에 자연이 모두 파괴되어 버리면 그땐 인간만으로는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들이 다 없어지면 오히려 자연은 펄펄 살아갈 수 있다. - P114

우리 조상들은 ‘본다‘라는 말을 시각적인 말로만 사용하지 않고 모든 일에 두루 사용했다. ‘장보러 간다‘, ‘밭에 나가본다‘, ‘제사보러 간다’, ‘잔치보러 간다‘, ‘예배보러 간다‘, ‘집본다‘ 이렇게 일을 가지고 ‘볼일‘이라 했고 ‘볼일 한다‘가 아니고 ‘볼일 본다‘고 했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것이다. ‘보살핀다‘라는 말은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 말인가? - P115

신학은 인간을 버리고 추상적인 뜬구름을 잡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가. 수십만권의 신학서적이 이 땅에 평화를 위해 얼마만큼 보탬이 되었는지 의심스럽다. - P116

공산주의국가에서 이런 환상적인 신학을 과감히 부정한 것은 용기있는 일대 혁명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지나치게 유물사관에 빠져 만물의 뜻까지 버린 것이 큰 실수였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은 만물의 기능만 알고 뜻을 거역한 탓이다. 이 땅의 주인은 인간들만이 아닌데 인간중심의 인간제국을 건설하려는 오만이 결국 인간상실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 P116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이사야서 11장이다.

그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 P119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 P120

나는 내가 가난한 때문인지 이런 사람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옵니다.
모양새나 옷차림이 더러울 뿐인데,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업수이 여겨지고 미움받는 것입니다. 같은 인생이면서 남에게 미움받고 멸시당하면 얼마나 가슴아픈 일이겠어요.
거지가 될 지경까지 왔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슬픔이 있었겠어요.
죽어버렸으면 싶었던 때는 없었을까요? 분명 몇번이고 몇번이고 있었겠지요. 그런데도 살아온 것입니다.
나는 세 사람이 나간 뒤를 슬픈 마음으로 조용히 바라보았습니다.
오늘밤은 어디서 잘까요? 먹을 것은 있을까요? 내일도 또 어디선가 누구한텐가 미움받으며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가엾기그지 없습니다. (1955년 4월 23일) - P122

불쌍한, 이것들이 옛날의 우리였습니다. 정말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아버지만 술을 잡숫지 않고 부지런히 상 일을 하신다면 이놈들 둘쯤은같이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두 남매를 보내며 나는 다음에 또 오라고 당부했습니다.
대문간에 한참 동안 서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가는 두 남매를 지켜보았습니다. (1965년 10월)

이 두 개의 일기 중 앞의 것은 일본에서 사는 동포 소녀 스에꼬의 것이고, 뒤의 것은 윤복이의 일기다. 두 어린이는 한 10년 사이를 두고 태어나 똑같이 열살 때부터 일기를 썼다.
두 아이의 일기책을 읽고 있으면 정말 천사의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싶어진다. - P123

산업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제 어떻게 사고를 당할지 아무도 모른다. 불의의 사고로 죽는 사람을 하느님의 저주라고 보는 우리들의 잘못된신앙관도 버려야 한다. 더불어 교회 헌금도 스스로의 신앙 양심에 맡겨야지 하나하나 이름을 밝히고 액수를 밝히는 건 고쳐야 한다. - P128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의성지방 시골교회 집사님인데 한 십년 전에이상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들어보니 꼭 옛날이야기만 같은 내용이었다.
어느 날 아주머니는 몹시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자기도 모르게귀찮아서 퉁명스럽게 지금은 바쁘니 다른 데나 가보라고 거지에게 박대를 하며 내쫓은 것이다. 그런데 그 거지가 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을 힐끗보니 놀랍게도 틀림없는 예수님이었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그만두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떠서 달려나가 보니 거지는 그새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옆집으로 또 옆집으로 샅샅이살펴보았지만 역시 허사였다. 집으로 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의 눈에는 어떤 낯선 사람도 예수님으로 보이게 된것이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십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을 했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아주머니는,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다 해드리고 싶어예."
그날 나는 살아있는 동화의 주인공 같은 아주머니를 한없이 쳐다보며부러워했다. 여태껏 들어온 설교 중에도 진짜 설교를 들은 것이다. 버스비가 모자라 기차를 타게 되었고 뜻밖에 예수님 대접도 받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들었으니 그날은 꼭 천국에 사는 기분이었다. 그 시골교회 아주머니는 가장 복된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분인 것이다. - P129

이젠 온갖 것이 돈으로 계산되는 시대가 되다 보니 사람도 물건처럼 돈으로 인격을 측정하게 되었다. 그 사람이 어떤 보람있는 일을 하는 것보다 돈을 얼마나 벌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게 된 세상이다. 이러니까 학교도 값비싼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된 것이다. 닭을 닭으로 키우지 않 - P137

고 닭고기로 키우다 보니 닭의 품성을 잃어버리듯이 사람도 사람으로 키우지 않고 돈벌이 물건으로 키우니까 아이들이 자살을 하고 심지어는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는 악마가 된 것이다. - P138

혼례는 친정집에서 치르는데 영천댁의 남편이 그 혼례를 치르고 나서거기서 죽었으니 신부에게는 그토록 가혹한 운명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죄인 아닌 죄인으로 형벌처럼 살아온 평생을 열녀상 한 장으로 무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영천댁 할머니에겐 그 상이 도리어 또하나의 형벌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P147

3개월 동안의 피난생활에서 30년을 살아도 겪지 못할 일들을 겪었다.
희한하게도 인간은 극한상황에 부딪치면 거의 무감각해지는지 도무지 곁에 총알이 날아오고 바로 건너편에 폭격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가장힘든 건 잠을 못 자고 먹지 못해 배고픈 것이었다. 밤낮 쉬지 않고 걸을땐 폭격 따위야 조금도 두렵다는 느낌이 없고 그냥 졸음이 와서 흐느적거렸다. - P153

내 어린 시절은 이래서 온통 회색 빛깔로 색칠되어 버렸다. 두번씩이나겪은 전쟁의 상처는 평생을 두고 아물지 않았다. - P155

당시의 부산은 온갖 잡동사니가 쌓인 난지도 쓰레기장 같았다. 물통 속에서 살았다는 그리스의 괴상한 철인 디오게네스처럼, 모두 한뼘만한 틈바구니만 있으면 드럼통 속에도 가마니떼기 속에서도 사람이 살았다. 넘치는 것이 사람이었다. 거지, 깡패, 양아치, 석탄장수, 부두노동자, 양공주, 암달러장수, 밀수꾼, 어쨌든 살기 위해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다 했다. 그걸 크게 나누면 거지와 도둑이란 직업으로 부르는 쪽이 쉽다. - P155

아무것도 감춰진 것이 없어 차라리 전쟁은 인간의 가장 정직한 행동을 그대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연극일지 모른다. - P156

우리나라엔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아름다운 나무꾼 형제 이야기가 있다. 형제는 하루하루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느날 길에서 금덩어리 두 개를 줍는다. 형제는 사이좋게 하나씩 나누어 가졌는데,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갑자기 동생이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버린다. 놀란 형이 왜 버리느냐고 황급히 묻자 동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 P164

"형님, 여태까지는 아무 욕심 없이 마음 편하게 살았는데 갑자기 금덩어리를 가지게 되자 마음이 이상해졌어요. 형님이 가진 금덩어리까지욕심이 생겨 괴로워 그만 강물에 던져버렸어요. 버리고 나니 제 마음이다시 평안해졌어요."
동생의 말을 들은 형도 역시 "그래, 안 그래도 나도 똑같이 마음이 이상해졌단다. 네가 없었으면 저 금덩어리를 내가 다 차지할 텐데 하는 욕심이 생겨 괴로웠다." - P165

베를린 장벽은 사람의 손으로 쌓았다가 다시 사람의 손으로 헐었다. 이처럼 자신이 가진 종교가 장벽이 되고,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관과 모든사상이 장벽이 되어 인간을 해치고 있다면 지체하지 말고 과감히 헐어버릴 수밖에 없지 않는가? - P167

그러나 비판만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서태지와 아이들‘도 그런 어른이 금방 되기 때문이다. 서태지가 어른이 된 다음의 세상은 그럼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10년 뒤면 ‘서태지 세대‘도 이렇게 욕을 얻어먹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도 청소년들은 꿈이 있어야 한다.
욕했던 사람이 다시 욕을 얻어먹는 그런 악순환은 그만 끝내야 하는데그럼 어떤 대안이 있을까. 서태지의 다음 노래가 똑같이 욕만 해댄다면서태지의 노래는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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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이라고 부른 이유는 구약의 야훼가 전쟁의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야훼가 다스렸던 유대왕국은 전쟁과 살상이 끊이지 않았다. 이사야서 11장 앞부분만 빼고는 거의 모든 구약성서는 전쟁으로 되어 있다. 나는 시편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를 요즘 와서 알게 되었다. 시편에 나오는 다윗 왕의 노래는 거의 매편마다 원수를 갚아달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것도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권력과영화를 지키기 위해 도전해오는 원수를 아주 무참히 없애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 야훼는 그들의 기도대로 쳐서 죽이고 빼앗고 부수고 씨를 말리는 잔인한 폭군이었다. - P59

이 세상에서 진정 공생(共生)의 길을 찾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일하는사람은 모두가 참된 하느님을 찾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 누구나 그 무엇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다. 우리의 모습이 본래부터 하느님이었는데 새삼스레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 노력은 가장 우둔한 짓이다. 가장 사람다운 삶과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다. - P60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길이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자연을 자연답게 보호하는 길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개는 개의 모습대로, 닭은 닭의 모습대로, 모든 동물과 식물이 그들대로의 섭생에 따라 보호되어야 한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정말 아름답다. - P60

결국 우리는 평화라는 환상을 어떻게든 현실에서 이루어보려 하지만안된다.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한 이후 결코 한번도 평화는 없었다. - P62

우리나라는 5천년 역사 동안 수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평화롭지 못했다. 아기 베개에다 좁쌀을 넣는 것은 난리가 나서 급할 때 가지고 가는 임시 식량이라고 했다. - P64

스페인의 화가 피카소가 그린 전쟁 그림 <게르니카>에선 사람만이는 것이 아니었다. 소나 말 같은 짐승들도 무참히 죽어갔다. 그림의 한가운데 커다란 말 한 마리가 목을 길게 치켜들고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모습은, 인간의 죄악상을 짐승이 대신 고발하는 듯이 보인다. 참으로 비참하다. - P70

원래 농민들은 농사일 외에는 다른 데 마음쓸 여가가 없다. 농민들이 순박하고 인심이 좋은 것은 바로 이렇게 머리를 쓰는 일보다 몸으로 일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맑고 푸른 자연 속에서 곡식을 가꾸며 살아가는 것은 비록 땀 흘리는 힘든 일이지만 충분히 보상되기 때문이다. 농촌은 그래야 된다. 농민이 농사일 외에 다른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낮에는 들에서 일하고 밤에는 식구들과 오손도손 얘기 나누다 편히 잠들 수있는 평화로운 농촌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바람이며 행복이다. 그 어떤 교육도 종교도 이 이상의 삶을 보장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 P84

자연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되는 모든 것을 가르쳐준다. 자연의 모습은 그 어떤 것도 추하게 보이지 않고 아름답다. 얼굴을 붉히면서 그림을 그려가면서 성교육을 시키는 인간은 과연 고차원적인 우등생이 되는 걸까? 고층빌딩을 짓고 아파트니 빌라니 콘도니 하는 화려한집안에서 과연 우리는 깨끗하게 살고 있다는 건가? 진공소제기로 청소를하고 수세식 화장실은 우리가 배설해놓은 똥오줌을 눈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씻어준다. 온갖 세척제와 화장품으로 씻고 바르고 하니까 우리인간은 이 지구 위에서 가장 깨끗한 동물이라 자랑해도 될까? 이 지구상에서 가장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곳은 과연 어딜까? 그런 냄새는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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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을 앓은 것은 열아홉살 때부터였다. 처음엔 숨이 차고 몹시 피곤했지만 그런대로 두해를 더 버티다가 결국 1957년 고향으로 돌아와버렸다. 마을에는 객지에 갔다가 결핵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나말고도 십여명이나 되었다. 식모살이갔던 성애와 철도기관사 조수로 일하던 태호, 산판에서 일하던 청수, 기덕이, 옥이, 성란이 우리는 이따금 나오는 항생제를 배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허탕치고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약이 필요한 만큼 공급되지 않아서였다. - P19

이곳 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은 1967년이었다. 전에 살던 집은 소작하던 농막이어서 비워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한평생 당신들의 집이 없었다. 가엾은 분들이다. - P20

겨울이면 아랫목에 생쥐들이 와서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옷 속으로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어오기도 했다. 처음 몇번은 놀라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그것들과 정이 들어버려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개구리든 생쥐든 메뚜기든 굼벵이든 같은 햇빛 아래 같은 공기와 물을마시며 고통도 슬픔도 겪으면서 살다 죽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황금덩이보다 강아지똥이 더 귀한 것을 알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 P20

예배당 문간방에서 16년 살다가 지금은 이곳 산밑에 그 문간방과 비슷한 흙담집에서 산다. 사는 거야 어디서 살든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 P20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과 굶주림, 그 속에서도 과연 인간이 인간답게 살수 있을까. 앞서간다는 선진국은 한층 더하다. 그들은 침략과 약탈과 파괴와 살인을 한 대가로 얻은 풍요를 누리는, 천사처럼 보이는 악마일 따름이다. - P21

누가 이렇게 물었다.
"장가는 못 가봤는가요?"
"예, 못 가봤습니다."
"그럼, 연애도 못 해봤나요?"
"연애는 수없이 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하고도 아이들하고도 강아지하고도 생쥐하고도 개구리하고도 개똥하고도..…" - P21

지. 함께 모여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옷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궂은 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다고 했다. - P22

다만 내가 예배당 문간방에 살면서 새벽종을 울리던 때가 진짜 하느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 P23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줍소서.

하면서 흐느끼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가난한 사람의 행복은 이렇게 욕심 없는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기도가 끝나 모두 돌아가고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비출 때, 교회 안을 살펴보면군데군데 마룻바닥에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고 그 눈물은 모두가 얼어 있었다. - P23

이와 같이 기독교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있고, 교회에 가서 울부짖는다고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기독교가 있든 없든,
교회가 있든 없든, 하느님은 헤일 수 없는 아득한 세월 동안 우주를 다스려왔다. 선교사가 하느님을 전파하면 하느님이 거기 따라다니며 머물고같이 사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부터 하느님은 어디서나 온세계 만물을 보살펴오셨다. 하느님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마음이다. 종교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려는 의지이지, 종교가 요구하는 대로 하느님의 섭리를 바꾸는 게아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바로 자연의 섭리가 된다. 하느님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 했다. 그러니 하느님이 곧 자연인 것이다. - P27

가끔 가다가 아이들이 묻는다.
"집사님, 밤에 혼자서 무섭지 않나요?"
그러면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한다.
"무섭지 않다. 혼자가 아니고 내가 가운데 누우면 오른쪽엔 하느님이눕고 왼쪽엔 예수님이 누워서 꼭 붙어서 잔단다."
아이들은 눈이 땡그랗게 되어 다시 묻는다.
"진짜예요?"
"그럼, 진짜지."
"그럼 자고 나서 하느님하고 예수님은 어디로 가요?"
"하느님은 콩 팔러 가시고, 예수님은 산으로 들로 다녀오신단다."
이쯤되면 아이들은 갈피를 못 잡고 더이상 질문도 못 한다. 외롭다고 쩨쩨하게 밖으로 푯대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혼자서 꾹꾹 숨겨놓고 태연스레 살 뿐이다. 하느님이 계속 침묵하시듯 우리도 입 다물고 견디는 것뿐이다. - P46

그러나 이런 인과응보의 신앙은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식의 교훈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수백번, 수천번 부흥회를 해도 한국교회의 삶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이 언제나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는 까닭이 바로 이런 축복신앙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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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술의 개발을 통해서, 또는 쓰레기 재활용과 같은 임시 미봉책으로 이 문제에 계속 접근하려고 해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 P46

오늘날 우리의 지배적인 삶의 양식, 즉 산업문화가 근본문제이며, 그 산업문화를 진보나 발전으로 보는 근대화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이분법적 유물주의의 세계관 - 이런 것이 본질적으로 재고되지 않는 한, 이 전대미문의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농업의 포기야말로 모든 재난의 진정한 시작이라는 데 주목하여, 땅을 살리는 일이 가장 급한 과제이고, 그러기 위해서 농촌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한 자치적 협동운동에 무엇보다 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누구나가 농사를 지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아니지만, 적어도 우리의 사회생활이 전체적으로 농적(農的)인 기반 위에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유한체계 속에 생존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생명체로서 우리가 자연의 순환적 운행질서에 순응하지 않고는 지속적인 삶을 지탱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때문이다. - P47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생명을 부정하는 모든 사회적 목표와 권력체계를 폐기해야 하고, 경쟁의 논리에 세뇌된 우리 자신의 내면을 해방시켜야 한다. 일찍이 미국의 문명비평가 루이스 멈퍼드가 갈파한 바와 같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장래는 결국 한 가지 조건에 달려 있다. 그것은 "모든 수준에서 또 온갖 종류의 공동체에서 권력의 강화가 아니라상부상조와 애정 어린 연대와 생명의식의 강화를 통해서 이 행성이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재천명하는 방향으로 살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건이다. - P48

거대한 권력의 집중 그 자체에 이미 반생명적이며, 반생태적인 경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는 결코 거대권력의 통제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도, 또 그렇게 극복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경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걷잡을 수 없는 환경위기의 상황에서 기성의 권력의 틀에 익숙한 버릇대로 이른바 환경독재 - 에코파시즘 - 를 용인하려는 태도이다. ‘강력한 정부‘를 운위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선거라는 정치 행사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지 않으면 안될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는 오직 하나 - 풀뿌리 민주주의밖에 없다는 것, 그 밖의 온갖 형태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다만 위장된 엘리트 권력체제라는 것일 것이다. - P51

이제 국민주권의 개념에서 주민주권 개념으로 중심을 옮기는 문제를 숙고해야 하지 않을까? - P52

주요 정책 결정에서 아직도 생태적 균형과 조화에 대한 고려가 후퇴를 강요당하고 있는 이 광란적인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생명보다도 기계와 물건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사회체제와 그체제를 근원적으로 떠받치는 우리들 각자의 욕망의 구조를 뿌리로부터물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 P58

우리의 고통은 우리 자신이 "얼마쯤이면 충분한지를" 모른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 P58

다시금 삶에 대한 진정한 열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순리(順理)에 의존하는 길밖에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식욕을 자연스럽고 소박한 것으로 만드는 일, 다시 말하여 ‘배고픔’을 경험할 수 있는생활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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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두려운 것은 가난이 아니다. 우리를 타락시키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편의주의와 물질적 풍요에 중독되는 일이다. - P24

어떤 기술, 또는 어떤 구조적 변혁의 노력에 앞서서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지금과 다른 존재로 변화해나갈 용의를 갖추는 것이다. - P26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했듯이,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로 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가난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권력행사가 아니라 겸손과 무소유야말로 참답고 충만한 삶을 이룬다는 것을 실제로 당장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 - 이것이 구원을 향한 진정한 출발점일 것이다. - P26

그런데, 이런 논의에서 잊지 말아야 할 또하나 중요한 문제는 그 고엽제와 성분이 거의 같은 제초제가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대량으로 우리의 농토와 잔디밭과 골프장에 끊임없이 살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농촌 노동력의 격감으로 제초제 없이는 거의 농사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농업 현실이다. - P29

그런데 이러한 처방은 근본적으로 농사라는 것을 단지 산업의 한 형태로 보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문제인 것이다. - P30

‘지속 가능한 개발‘이나 ‘녹색산업주의‘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공식이 제시되는 것은 환경문제도 적당히 고려하되 지금까지의 습관도 버리지 못하겠다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사실상 아직도 우선적인 관심은 산업·소비문화 체제를 어떻게 온존시킬 것인가라는 것이지, 환경문제에 있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 P35

어느 정도까지 가난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생활은 사회적으로나 생태학적으로나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라는 깨달음과 그러한 깨달음을 위한 내면적 공간의 확보야말로 진짜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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