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안더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첫 남편.

그러니까 관건은 방사능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정보이다. 그러나 국제원자력위원회(IAEA)는 물론이고, 일반적으로 꽤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세계보건기구(WHO)조차도 방사능 문제에 있어서는 일관되게 거짓정보를 생산·유포하는 데 협력해왔다. 예를 들어, 1959년에 맺어진IAEA와 WHO 사이의 협약은 WHO라는 유엔 기구가 국제 원자력 추진세력 앞에서 얼마나 허약한지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 협약은 방사능에 관한 한, WHO의 독자적인 조사·평가와 그 연구결과의 공개를 일절금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WHO는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피해상황에 대한 학술대회를 두 차례나 개최하고도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못한 채 그냥 앵무새처럼 IAEA의 견해를 되풀이하여, 체르노빌 사고 피해자가 수천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믿기 어려운 WHO의 굴종적인 행태는 관계된 관료·과학자들의 왜소함뿐만 아니라, ‘원자력체제‘가 얼마나 가공할 반생명·비윤리성에 기반하고 있는가를 암시해주고 있다. - P251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 밑에서 시작된 원자력발전 시스템은, 핵무기에 못지않게 생명과 평화에 위협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없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본적으로 원자력발전과 핵무기는 일란성쌍생아라는 사실이다. 이번 호에 전재 · 소개된 인터뷰 기사에서 일본의평론가 가라타니 고진(行人)이 "원전은 핵무기 개발을 전제로 한 산업이기 때문에 핵무기를 꿈꾸는 국가는 원전을 결코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지만, 이것은 약간의 과장이 있을지 몰라도 핵심을 찌르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 P251

그러나 원자력발전 시스템의 존속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될 제일 절박한 이유는, 이것이 현재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서 미래세대의 삶의 토대를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극히 비윤리적인 시스템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P252

핵에 대한 무관심 · 무감각의 결과는 반드시 묵시록적 상황을 낳는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한나 아렌트의 첫 남편이기도 했던 독일철학자 귄터 안더스가 생전에 한 말이다. 그는 핵에 대한 무관심·무감각은 무엇보다도 현대인에게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대사회는 경제성장과 효율성의 원리에 압도적으로 지배되면서 세계 자체가 거대한 기계로 변했고, 인간은 한갓 그 기계의 부품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양심과 책임과 윤리의식, 즉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 P252

상상력의 결여는 현대인의 숙명이 되었다- 이것이 안더스의 비관적인결론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핵 없는 세상을 위해서 열심히 싸웠다. - P253

<녹색평론> 독자들 중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평론‘이라고 굳이 고집해온 까닭이 없지 않다.
그것은 이 잡지 창간의 주요 목적이 ‘저항’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론‘
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상대화하면서 철저히 의심하고, 질문하는 행위, 따라서 근원적인 의미의 저항을 뜻한다. 처음부터 《녹색평론》이 의도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사회와 세계 전체가 직면한 위기에 맞서서, 이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만 올바른 방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실로 다양한 의견-현실에 대한 분석과 진단, 해법들이 개진되고 있다.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분석, 진단, 해법들이 과연 안심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좌우의 이념과 논리를 가지고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정당하게 설명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다는 판단 밑에서 작업해왔다. - P256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성장을 통해서 극복한다는 방법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복지국가‘ 시스템을 통한 극복이라는 것도, 그것이 불가피하게 더 많은 성장을 전제로 하는 시스템인이상, 역시 지속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산업사회의 주류였던 방법, 즉 대규모 산업시스템 속에서 일자리와 생계를 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소규모 지역중심, 자립적 생산·생활 협동체들을 광범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틀 속에서 태양에너지에 기반을 둔 순환경제를 구축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다. 문제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과 확산을 가로막는 기득권 세력의 방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민주주의의 확립, 즉 보편적 이성이 존중을 받고, 합리적 상식이 통할 수 있는 정치시스템을 확보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 P261

그런 만큼 독일의 자세는 단연 돋보인다. 특히 주목할 것은 메르켈 독일 수상이 원전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안전위원회’와 함께 ‘윤리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 그리고 윤리위원회 위원장에 자신의 정치적 적수를 임명함으로써 정파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공정한 결론을 원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지 양심적인 행위라기보다 매우 합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자면 비판적인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윤리위원회‘에는 원자력에 관여하고 있는 전문가·관계자는 단 한 사람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윤리위원회 구성 멤버는 가톨릭의 추기경, 프로테스탄트 목사,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을 포함한 몇몇 학자, 소비자 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교수 등열일곱 명이었다. 이 위원회에 참여했던 베를린자유대학 교수 미란다슈라즈는 지난 6월 일본에서 행한 강연에서, 윤리위원회가 이렇게 구성이유는 "어떠한 에너지를 사용할 것인가는 전력회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요 정책을 이른바 관계 당국이나 기업 혹은 전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생활하는 주체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지만, 이 당연한 논리가 새삼 극히 신선하게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비이성과 몰상식이 활개를 치는 사회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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