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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먹고살기 - 경제학자 우석훈의 한국 문화산업 대해부
우석훈 지음, 김태권 그림 / 반비 / 2011년 8월
평점 :
문화생태계에서 진화란 무엇인가
이 책을 주말에 읽었다. 그리곤 우울한 주말을 보냈다. 생각보다 이 책은 문화적이지 않았다. 외려 정치적이기까지 했다. 이 책의 구호는 아마도 ‘토건은 탈문화 탈토건만이 문화’, 정도가 될 것이다. 제목만 보기엔 예능프로들을 보는 중간에 슬슬 넘겨보아도 좋을 것 같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만 떠오르게 하는 진중함이 버티고 있다. (예를 들면 런닝맨에서 뛰어가는 유재석을 죽어라 좇아가며 촬영하는 VJ는 월급이 얼마일까? 뭐 이런) 가볍게 넘기고 말기엔 개운치가 않은 무언가가 있는 셈이다. 이런 류의 책은 혼자만 읽고 방법을 찾는 쪽이라면 큰 도움은 되지 못할 듯하다. 제시된 문제 해결로 궁극엔 정부, 시민차원의 문화정책의 변화를 언급하고 하고 있는데 이는 정작 문화로 먹고 살고자 하는 청춘에 소구한다기 보다는 그러한 문화정책을 시행하는 책임자들이 읽어야 할 내용들에 가깝다.(그렇담 제목은 ‘문화로 먹고 살기’가 아니라 ‘문화로 먹고 살게 해주기’가 맞는 것 아닐까) 문화에 속하는 하위영역별로 제시된 문제점과 해결방안들이 자칫 현재 그 속에서 실상을 겪고 있는 기성세대들이 보기엔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생산 및 기획자가 되고자 하는 준비생들에겐 현재 문화시장이 어떤 상황인지 보다 냉정하게 관찰하는 조감도의 역할로선 의미가 클 듯하다. 어찌 보면 현재 겉보기와는 달이 문화산업에 뛰어든다는 것은 가진 꿈이 많을수록 무너질 희망도 많다는 뜻과도 같은데 그래도 꼭 진출해야 겠다면 내가 감당해야 할 미래는 어떤 난관들이 있는지 미리 예견해보고 그것들을 하나씩 극복해 나가겠다는 자세로 전체 문화시장이 더 커지고 더 탄탄해지도록 기여하는 일꾼이 되라는 당부와 같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현재 화제성에 비해 리뷰는 많지 않은 편인데 프레시안에 소개된 혹평만으로 이 책에 대한 평가가 귀결되는 건 성급하다는 생각이다. 부족한 소견이지만 이런 책은 결론에 대한 적절성 여부나 그 논쟁보다는 일단 문제제기에 대한 화제성 창출과 국민적 아젠다 공유가 우선 아닐까. 왜냐하면 문화는 다른 분야와 달리 우리가 늘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표적인 분야이고(특히 이 책에 소개된 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일반대중들은 더욱더) 실제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실상을 잘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방송, 영화, 책, 음악, 스포츠등 우리는 소비자로서 오늘도 문화상품을 뒤적이고 향유하는 직접주체로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있는 것이 곧 우리문화의 현상이라 의심없이 믿는 사람들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문화의 수준도 향상되어 어엿한 한류를 수출하는 나라로서 각 분야 공히 고급문화를 생산, 소비하는 듯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문화에 대한 열등감, 미국문화에 대한 패배감, 일본문화에 대한 적대감을 너머서 이젠 우리 한국문화도 세계에 먹히는구나, 하는 우쭐한 기분을 서서히 가지게 된 것이다. 파리에서 소녀시대가 공연을 하고 유럽여성들이 슈퍼주니어의 노래를 한국어로 따라 부르고 울면서 소리 지를때 늘 그렇듯 잘 훈련된 애국심은 가슴 저 밑바닥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것이 우리들 실상인 것이다. 실적위주의 한국식 성장모델 덕에 우리는 해마다 속으론 노벨문학상을 목빠지게 기다리면서 겉으론 그런 상은 중요하지 않다며 서로를 위로한다. 평소에 소설을 읽어온 독자는 아닐지라도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 유럽, 일본에 멀리멀리 수출되어 베스트 셀러를 기록했다는 소식에는 가슴이 홧홧해져오는 독자들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조수미, 정명훈, 장한나와 같은 음악가 몇 명으로 우리도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나라의 국민이라 생각하며 김연아, 박태환 선수같은 도저히 이룰 수 없었을 것 같았던 종목의 금메달 소식에 스포츠 선진국이라는 위치를 스스로들 부여한지 얼마나 되었던가.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로 인해 스케이트장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피겨를 배우는 학생들이 많아지듯 국가적으로 어떤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다면 그것이 곧 그 분야의 발전으로 인식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외양적인 모습과는 달리 우리가 어떻게 탈문화적인 국가, 비문화적인 시민이 되어왔는지를 데이터와 통계로 증명하며 앞날을 걱정한다. 전국에 공연장을 많이 지었다고 음반시장이 활성화되었는가, 그래서 음악산업이 발전했는가. 올림픽 메달을 많이 땄다고 국민의 체력이 좋아졌는가. 한류가 한바탕 불고 있다고 가수의 인권이 높아졌는가. 천만 관객의 영화가 생겼다고 스탭의 인건비가 늘었는가. 런닝맨이 중국, 동남아에 큰 인기를 누린다고 구성작가들이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하는 문제들이다. 이 모든 질문의 시작은 문화산업에 진출하여 그것으로 밥벌어 먹고자 하는 청춘들이 많아졌기 때문이고 애석하게도 청춘의 꿈만큼이나 그들의 밥벌이는 처참한 현실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외형적으로 나라가 발전해 문화도 덩달아 발전을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실상은 좀 충격적이었다. 예전에 약간의 무리를 해 지금보다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간 사촌언니네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언니는 집만 좋고 밖에 나가면 허허벌판인 이 생활이 과연 내가 원하던 꿈인지 모르겠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거리에 나가면 애매한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이 동네 동사무소에까지 흔하게 된지 오래다. 커피숍, 은행, 마트에서부터 버스정류장, 지하철역, 터미널 같은 공공장소는 물론 심지어는 아파트에 서는 일일 장터도 문화를 표방하며 행사를 홍보한다. 우리사회에서 좌파와 우파의 구분없이 그냥 품격을 높이고자 할 때 접두또는 접미사격으로 문화를 따붙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 책은 이렇듯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문화가 어떠한 수준에 놓여있는지 냉정하게 점검해보는 평가의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듣고 보는 문화이상은 사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문화이하의 이야기였다. 또 먹고 산다는 건 직업의 문제, 나아가 생계, 생존의 문제이다. 그러니 바꿔 말하면 이 책은 문화가 너무 좋아 그것으로 꿈을 이루고 싶은데 먹고 살지는 못해 많은 청춘이 죽음까지 내몰린 절박한 상황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역으로 문화로 죽고살기가 된 작금의 시대에 문화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단 말인데 저자는 먹고살기가 아닌 죽고살기가 된 문화를 경제적으로 분석해보고 그걸 다시 정치적으로 담론화해보자 제안한다.
이 책에서 가장 명확하게 담론화된 개념은 ‘문화생태계’이다. 저자는 문화를 생태계의 용어를 빌어 ‘문화생태계’라 규정짓고 건강하고 튼실한 문화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의 토건문화를 청산해야한다고 외친다. 소녀시대가 파리 콘서트를 마치고 귀국할 당시 공항에선 즉각 헤어스타일과 신발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연예인의 공항패션이 화제가 되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녀들은 한국식으로 말하면 국위선양을 마치고 귀국한 수출역꾼들이 아닌가. 그녀들의 공항패션에서 나는 지난 시절 가발, 신발공장에서 청춘을 바친 여공들의 착취된 노등을 떠올렸다. 내 딴엔 소녀시대가 어린나이에 연습으로 착취를 당하는 연상을 하며 그들의 인권은 국권을 앞설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건 나도 모르게 70년대식 수출중심주의에 길들여진 한국적 사관에 불과했다. 그녀들의 활동을 용역으로보고 수출상품처럼 생각한 것이니 무의식에선 자랑스러움이 먼저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수출중심주의가 곧 국수주의, 국가패권주의와 결합하여 ‘한류우드’같은 토건문화를 반복, 재생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저자는 문화산업의 확대를 경기장, 공연장, 관광지등의 시설적인 투자로 밀어붙인 정부의 정책때문에 지난 5.6년간 문화산업이 추락했다고 주장한다. 본원상품을 개발할 생각을 않고 파생상품만 파이를 키워 스스로 그 몸피를 감당하지 못하는 꼴이 된 것이다. 저자는 문화산업에 진출하고자 하는 자들을 생태계의 일원으로 보고 맨 밑바닥에서부터 상호발전적인 진화를 하는 것이 문화계 전체를 발전케 한다고 말한다.
방송은 악마와의 싸움
책에서 처음 화두를 꺼낸 건 방송분야인데 안그래도 바로 어제 <무한도전>이 방송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며 방통위에서 제재를 가하겠다는 기사를 보았기로 나는 화가 나면서도 순간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무한도전>은 탈계몽, 탈권위를 앞장세워 저렴해 보이는 캐릭터들의 값비싼 도전을 프로그램의 정체성으로 하고 있고 무엇보다 자막의 개념화(?)에 실험적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번 방통위의 제재는 시사하다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무한도전이 그동안 자막으로 양산해온 턱주가리아, 장모반데라스, 저쪼아래등의 대표적 문자개념 캐릭터는 품위높으신 교수님들의 소위 있어 보이는 빈번한 영어합성어 사용에 대한 예능대항적 유머라고 보았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본원시장이 디지털화되면서 작품, 결과물, 생산물이라는 뜻의 콘텐츠가 문화상품이라기 보다는 문화생산자들, 예술가를 납품업자처럼, 정부를 용역관리자처럼 보이게 하는 용어라며 콘텐츠를 문화상품과 동일시하는 표현에 불쾌감을 표했는데 나는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대부분 방송, 언론에서 대중에게 주입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좀 유식해보이려고 스스로들 차별성을 위해 그들이 사용한 단어와 더 차별화하기 위해 선택 조합해 탄생한 예능적 문자들-턱주가리아등-은 그들의 품위를 더 높여주면 주었지 적어도 깎아 내리지는 않을 장치인 것이다. 다시 말해 무한도전이 동네 바보형, 하찮은 형, 키작고 소심한 동생, 태생적으로 매력없는 동생, 깐죽거리는 친구를 내세워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이 외려 자신들의 우월성과 구별해주는 효자프로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꾸 자기들의 권위에 반하는 방식이라 규제하는 것 자체가 아직도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옛날 식민지 시대, 군사정권, 독재정권의 잔재인 것이다. 이미 무한도전과 함께 대표적 주말 예능프로인 <1박 2일>이 폐지결정 된 후 새삼 몇 년 동안 정상을 지켜온 예능의 대표 프로를 향해 방송의 품위를 저해한다는 발상은 역으로 그러한 옹졸하고 권위적인 낡은 국수주의적 시각을 재차 확인하는 것 같아 시청자로서 낯 뜨거울 지경이다. 같은 날 방송의 품위를 대놓고 지적한 방송통신 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는 대한가수협회장 태진아 대신 참고인 자격으로 가수 유열이 참석을 했다. 그런데 장관에 님자를 붙이자는 방통위 위원장의 발언에 유열이 박수를 치자 민주당 최종원 의원이 “지금 누가 박수 쳤어? 박수친 사람 누구야?"라고 고함을 치며 즉각 '색출작업'에 나섰고 이에 동조한 몇몇 의원은 '박수친 사람 나오라'는 고성으로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이 예능프로보다 더 싼티나는 삿대질과 고함소리가 과연 이 나라의 품위있는 분들이 활동하는 국정현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상황도 얼마든지 재미나게 개그소재로 발전시킬 수 있겠지만(주조연이 모두 연예계 인사아닌가) 안그래도 불황인 코미디계에 어느 누가 미쳤다고 이런 식의 정치코미디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방송의 경우 특히 ‘권위주의, 상명하복, 전도된 계몽주의로 돌아가려는 이명박 정권은 문법상 버라이어티 쇼’와 맞지 않는다 주장한다. 웃긴 건 이 책에서 알려준 여사님 사업이라는 한식세계화에 걸맞게 무한도전은 뉴욕에 비빔밥을 소개하기도 한 꽤 계몽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조정대회 한다고 백날 뉴스에서 알려줘봤자 미사리에 몇 십만 인파가 몰려드는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역으로 무한도전 때문에 조정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는 뉴스가 최전방에 보도되는 것이 우리 실정인 것이다. 죽고 싶다는 노래가사가 청소년 자살을 부른다며 방송금지를 하고 실컷 다보고 즐겨 놓고 뒤늦게 여자 아이돌 가수의 춤이 선정적이다 규제를 하는 것이 이 나라의 방송심의 수준인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좋으니 얼씨구나 일본에 앞장서 수출할 땐 언제고) 옛날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안기부 시절에나 왜 사랑이 이루어 질수 없는 것이냐며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이 불순하다 금지하는 줄 알았는데 이건 80년대로 문화가 퇴보하는 현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류바람을 이용해 한국어 가사를 널리 알리자는 것도 한글발전을 위해 힙합용 랩 가사를 심의하자는 것도 모두 국수주의적 시각인 것이다. 잣대만 편할 대로 바꿔가며 본질과 상관없는 비문화적 행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 우리 현실이요 수준인 것이다.
방송이야기로서 기억나는 건 한국인은 데이터 상으로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 없이 일요일에는 꼬박 4시간이나 TV를 시청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해가 가는 건 예능 두어 프로와 드라마 한편만으로도 그 시간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은 주말에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가며 밥먹을 때도 손님이 왔을 때도 낮잠을 잘 때도 습관적으로 TV를 켜놓고 있기는 하니까. 주 5일제와 인터넷등으로 TV시간이 줄어들지 알았지만 우리의 일상은 매번 여행적이고 매순간 IT적이진 않는 것이다. 주말엔 누구나 무한도전과 1박2일의 예능 프레임에 자의적, 타의적으로 위치해 있는 것이 우리네 평범한 삶이라는 것. 이젠 본방의 구속력이 약해지고 여러 채널로 원하는 영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외려 예전보다 방송 프로그램을 공유하는 범위와 대상은 더 넓어진 것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비슷한 생활습관으로 인해 내용상 같은 방송의 통제하에 놓여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저자는 이것이 바로 방송을 장악하려는 정권의 욕심을 부른다고 지적한다.
얼마 전 한예슬 사태를 보면서 회당 출연료를 삼천만이나 받는 그녀가 제작환경의 열악함을 토로하는 모습에 잘했다 큰일했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모든 건 외주가 늘어나면서 제작비, 광고비 때문에 검증된 스타시스템에 목메는 드라마 현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요즘은 톱스타와 몇몇 스타작가만으로는 흥행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연기력 되는 톱스타가 흥행드라마를 배출할 확률은 더 많긴 하지만 내 생각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드라마가 너무 많다는 느낌이다. 다양성 면에서도 예전의 청소년 드라마나 TV 문학관, 베스트 극장같은 단막극은 사라졌고 미니시리즈식의 각종 판타지에만 획일적 욕망을 드러낸다. 누가 먼저 잘못을 했는지 따지기 전에 주요 타겟군에 위치한 시청자로서 주제넘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미니시리즈는 예전 M본부의 월,화 전략 상품이었다. 그 이유는 주 5일제가 시작되기 전 가장들이 그때 제일 야근이나 회식을 많이 하기 때문이었고 남편이 들어오지 않는 시간대에 주부들은 드라마로(주로 불륜스러운 내용을 담은) 외로움을 달랬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막장식이 시간대와 요일을 막라하고 배치되어 있지만 그땐 그랬었다는 이야기다. 이 미니시리즈가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확장되어 작금의 전성기를 맞이한데는 사실 우리 아버지, 우리 남편들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가끔 ‘모래시계’같이 남편들의 귀가시간을 앞당기는 드라마가 혜성같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어머니, 주부들은 남편과 같이 드라마 보는 것을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드라마가 이토록 경쟁력있는 문화상품이 된 것은 결국 지난시절 불철주야 회사에 매달려온 많은 남성들 때문이었고 덕분에 드라마의 양적, 질적인 발전을 가져온 것이니 한류는 사실상 70,80년대 수출역꾼들이 이루어낸(?) 문화 금자탑이 아닐까. 그러므로 저자가 제시한 지역형 드라마, 청년 드라마가 성장을 하려면 지금처럼 일터위주의 생활방식, 성공 및 성과위주의 출세지향 방식의 삶에선 불가능한 제안이 아닐까 싶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남편 뒷바라지를 죽도록 해야 하는(안하더라도) 주부들 입장에선 더 이상 전원일기식의 농촌드라마나 대가족 정서가 중요하다는 홈드라마, 청소년시절을 떠올리는 학교드라마는 보고 싶지가 않다. 허황된 꿈이지만 육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지라도 재벌 2세와 환상적인 여행을 떠나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 비록 고졸이고 외모도 그렇고 그렇지만 내가 들어간 회사의 사장 아들이 나만 좋다고 좇아 다니는 드라마, 그 남자와 결혼하고자 하는 미모의 고학력 여성을 보기 좋게 물먹이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 오늘 죽더라도 그 직전에 한번은 꼭 세상과 남자, 그리고 나보다 많은 걸 가진 여자들에게 복수를 하고 죽고 싶은 것이다.
저자는 미국처럼 사회적 지지를 받으면서 파업으로 저작권 개선을 요구하는 작가들을 예로 든다. 드라마 조합이나 보조금, 출연료 상한제같은 대안, 배우 생협같은 조합단체도 어떠냐고 묻는다. 인력 양성, 취업 기회, 생계보장 측면에선 실용적인 대안이다. 그런데 이 시민단체스러운 대안들이 먹혀들 여지는 털끝만도 안 보이는데 어쩌란 말인가. 배우나 가수는 속된말로 폼나보이니까 하는 것 아닌가? 성공확률은 터무니 없이 낮지만 성공에 대한 보상이 확실하니까 도전하는 것 아닌가. 연기가 좋고 노래가 너무 좋아서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렇게 좋다는 연기와 노래지만 무명일 땐 그 비참함마저 나중에 유명해질 때를 위해 참고 견디는 거 아닌가. 예전에 방송사에서 월급받고 배우들이 연기할 때도 지금처럼 장동건, 김태희가 되기 위해 떼거지로 오디션에 몰려들었을까. 우리나라처럼 한방신화를 기대하는 풍토에선 저자의 제안이 썩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역전 드라마를 드라마 같은 방송환경에 실연하고 그것의 실현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기꺼이 연기와 노래에 도전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단순한 연기와 노래에의 재능 및 열정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유명인이 되어 돈도 벌고 사랑도 받는다는 욕망에는 근본적으로 한방에 인생을 뒤집겠다는 성공야망이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다. 연예계는 그래도 학벌과 엘리트 시스템에서 자유롭고 변수가 많이 따르기에.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치열하다. 이긴 사람이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다가지기 때문에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배우나 가수들이 성공하거나 유명해져도 똑같이 돈을 받고 대우도 비슷하다면 굳이 스타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도 언젠가는, 하는 신화는 한류스타 배용준이나 소녀시대의 로망이 절정일때 더 극대화되는 장치이고 그 때문에 재능은 있지만 여타 다른 이유로 밥을 굶게 되는 도전자들이 넘치게 되는 분야가 아닐까. 도전할수록 실패하는 분야, 그곳이 연예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에선 이런 전복적 희망만이 유일한 자산인 지원자들을 잘 걸러내고 그 열정을 다른 곳으로 전도하는 기회도 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예인이 되겠다고 하는 도전자들은 설사 유명해진 후라도 보통사람보다 몇 배 더 세간의 관심과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당하겠다는 의지가 사실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망보다 앞서야지만 연예생태계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다고 본다. 예전에 처리된 사안이라도 재수없으면 미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한방에 내리막길을 걸을지 모르는 곳이 그곳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오랜 정상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실제 상처와 비난보다도 그 상처와 비난을 지혜롭게 잘 견디는 의지에 달려있다고 여긴다. 상처에 대한 내성은 절망에의 노출빈도가 아닐까. 어쩌면 삼진아웃을 많이 당한 선수가 홈런을 가장 잘치듯 많이 떨어지고 실패해 본 사람이 결국 최정상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이 책에서 어떠한 암울한 환경을 고발하였다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자, 실패해도 또 멈추지 않는자, 그 사람만이 문화생태계를 진화시킬 주역이 되지 않을까 싶어진다.
그런 면에서 어제 일어난 예리밴드의 슈스케 탈퇴는 아쉽고 안타깝다. 슈스케의 편집방식이 잔인하고 자극적이라는 건 초등생도 다 아는 사실이다. 슈퍼스타 K는 공중파 오디션 프로들의 도전을 받으면서 자신들이 가진 환경속에서 장점을 찾아 그것을 차별화하기 위해 악마적 편집이라는 무리수 자체를 차별화로 내세운 프로그램이었다. 슈스케는 참가들을 위한 방송도 되지만 무엇보다 그 과정을 즐기는 시청자들의 방송도 되는 것이다. 슈스케측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참가자들은 거두절미하고 이기적인 인물로 편집하는 방향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이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제작진은 서로 이질적인 참가자들간의 화합과 협연 과정을 엿보는 것이고 그런 말도 안되는 장애를 이기고 끝내 양보하고도 성취를 이뤄내는 울랄라 밴드 같은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시적으로 회자되는 세간의 잡소리에 휘둘려 갑자기 자신들의 꿈을 버리고 명예를 찾겠다는 행동은 당황스러웠다. 시청자는 일등이 되면 그 모든 걸 잊는다. 내 생각에 예리밴드의 리더는 지금 당장 헤이즈의 탈락에 가해자가 된 듯한 비난과는 달리 그러한 소신있는 주장, 자기밴드의 색깔을 잃지 않겠다는 고집이야말로 진정한 아티스트의 예술성이라 칭찬받을 기회가 반드시 오리라 생각한다. 자기 목소리, 자기 색깔이 없는 친구는 그냥 모창이나 하고 말 것이지 뭐하러 가수되고 밴드를 해야 할 것인가. 음악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음악에 이기적이지 않는 것이 이상한 태도이고 대중은 자기음악에 이기적인 것을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일인자는 그러한 과정상의 비난과 상처, 그 악마적인 모든 것에 일일이 대응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리밴드의 돌발적 탈퇴로 슈스케의 편집방향에 공개적인 비난이 가해졌고 시청률위주의 방송에 경종을 울리는 효과는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세간의 반짝하는 반응에 너무나 빨리 반응한 것이 아닌지 아쉽다. 물론, 지금같은 유명세만으로도 이미 예리밴드는 얻을 것 이상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새삼 방송의 속성을 이유로 자신들의 명예를 찾겠다한 행보는 어짜피 언더에서 주류로 진출하고자 했던 본인들의 최초 의지를 기만하는 행동은 아니었을지.
<슈퍼스타 K3 지난 16일 방송분 -예리밴드 리더 한승오와 헤이즈 멤버간 대화 中에서>
출판, 영화는 아사(餓死)와의 싸움
그밖에 저자가 지적하는 출판계는 솔직히 전하려고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는 잘 파악이 안되었다. 안 그래도 프레시안의 서평에는 출판계의 현실과 이상 사이를 ‘곡예하듯 넘나든다’는 평이 있었는데 내가 가장 의아한 건 방송, 영화, 음악, 스포츠처럼 과연 출판계에도 진입하려는 사람이 많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시장대비 실제 진출의지를 가진 사람보다는 잠재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분야가 아닐까 해서다. 또 하나 사회과학 분야의 저자인 우석훈은 지난 십년간 사회과학 분야의 저서가 가장 큰 몰락의 과정을 겪었다며 5000권 정도를 팔면 이른바 ‘고종석급’이고 1만부, 2-3만부가 넘어가면 신의 영역인 ‘장하준급’, ‘박경철 급’이라 언급했다. 내가 이 책을 받았을 때 이 책은 이미 2쇄 본이었다. 그렇담 저자 역시 고종석급 이상은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미 네임 벨류를 가진 저자가 자신은 상관없는 듯 같은 분야의 저자를 급으로 나누어 언급하는 게 보기 편하진 않았다. 인상깊었던 사실 중 하나는 사회과학 서적은 정치적 입장이 좌파인지, 우파인지 명료하지 않으면 어느 편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인데 굳이 우파는 자존심구겨가며 시장으로 들어와 떠들어댈 이유가 없기 때문에 진보, 좌파를 표방하는 저자의 책들만 나오고 또 관심을 받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굳이 이 (정도의)책이 좌파스럽다 여기지 않은 나로선 과연 이 책이 위치하는 좌표가 어느 지점일까를 억지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우파일 거면 이쪽 분야 책은 안 쓰는 게 좋다는 말로도 들려 역시 기분 좋지는 않았다. 저자의 결론은 금서에 도전하는 정신이 곧 사회과학 서적을 쓰겠다는 의지라 했는데 이 책에 의하면 금서는 우파서적이 되는 것이 아닌가. 데이터를 넘어서는 저자만의 통찰력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나는 진보, 좌파가 대세인 현실에서 우파일수록 사회과학에 도전해야 한다고 믿는다. 저자는 ‘책방소년’ 출신으로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 동네서점이 사라지는 것이 곧 감성적 도시기반 시설이 없어진다는 뜻과도 같다고 아쉬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알라딘이 중고서점을 시내 한복판에 개장한 것은 고무적인 행보라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저자도 출판계와 관련된 핵심인사라 그런지 다른 분야보다 솔직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같은 출판계의 인사들이 볼 때는 위선이라 생각한 부분을 혹평한 것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도 갈팡질팡한 채로 그러니까 우파인지, 좌파인지 명확히 해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의 전공분야인 책에 대해 말할 땐.
그런가하면 이 책에서 내가 문화소비자로서 가장 심각하게 위기를 인식하고 공감한 것은 영화부분이었다. 얼마 전 <디워>를 제작한 심형래 감독의 제작사가 부도가 났다는 소식과 겹쳐지면서 스크린 쿼터제 폐지로 인한 우리 영화시장의 몰락이 멕시코나 브라질일만 같지는 않았다. 지난 추석때 지인들은 부담없이 웃고 즐기기 위해 <가문의 영광 4-가문의 수난>같은 코미디 영화를 택하였다 들었다. 누가봐도 작품성으로 보았을 때 턱없이 모자랐지만 그같은 작품성은 다른데서 얼마든지 채울 수 있으므로 굳이 가족끼리 보는 영화에까지 같은 기준을 적용하긴 그랬다는 뜻이다. <괴물>이후 한국영화는 제작측이나 관객측이나 전반적인 슬럼프를 맞았다는 생각이다. 뚜렷한 이유도 모르겠고 사람들은 예전만큼 영화 한편에 큰 기대도 하지 않는다. <친절한 금자씨>처럼 감독, 연출, 결말에 대한 찬반 논쟁도 줄었다. 좋아도 크게 감동하지 않고 나빠도 크게 욕하지 않는 것. 이것도 비슷한 이유일지는 모르겠는데 칸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타고 몇몇 감독이 수상을 한 이후로는 국제적 영화 실적에 정점을 찍었다 생각하는지 더 이상 서로들 노력을 하려고 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대중적 관람욕구가 대형 뮤지컬이나 비싼 콘서트로 옮아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저자는 영화를 교육적 대안으로 풀어보자는 의견을 비쳤는데 이 책에서 가장 신선하게 다가왔다. 협업을 바탕으로 한 영화제작과정을 학교교육에 도입하고 예술성, 여가성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지금의 인력은 최대로 활용하고 또 미래 인력 생성에도 기여한다는 정책은 가장 현실적으로 보였다. 이는 상업영화말고도 다큐, 애니메이션등의 영상제작의 다양성에도 고무적인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올 초에 장래가 촉망되는 한 여성 시나리오 작가가 젊은 나이에 굶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스탭으로 밥벌어 먹고 살기는 거의 불가능한 현실과 작가들의 복지문제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비단 영화판의 시나리오 작가뿐만이 아닌 대부분 글로 생계를 유지하는 무명작가들은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을 살고 있을 터이다. 영화판에서는 아예 기나긴 거지같은 조연출 생활을 거치지 않고서는 감독으로서 큰소리 치기 힘든 분위기가 팽배하다. 문학도 굶어 죽기 직전까지 고생하지 않으면 진정한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부를 얻게 되면 창작보다는 명성에 의해 부수적인 수입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수 있다고 여기며 대중은 돈 좀 만진 작가들에겐 더 이상 피같은 작품을 기대하진 않는다. 무명시절, 습작시절, 연습생일 때 죽도록 정말 딱 죽기 직전까지만 피나도록 고생하지 않고서는 아니 이제 더 이상 했다간 죽을 것 같은, 그러한 시간들을 거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도 없고 혹시 성공했다 하더라도 대중은 그런 성공엔 감동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분야는 먹고 살 생각으로 덤벼들면 죽고, 죽고 살, 아니 죽어도 좋을 생각으로 끝까지 버티지 않으면 진짜 살아남기 죽기보다 어려운 곳이라는 결론이다.
음악, 스포츠는 '뽀다구'와의 싸움
저자는 책은 그래도 밀리언셀러가 나오는데 더 이상 음반을 사지 않는 것이 우리의 기억과 추억의 동반 상실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CD, LP시장을 구매체로 분류하며 MP3를 좇아 달려온 기술의 세월이 앨범을 통한 서사구조를 이해하는 감성을 짓밟았다는 분석이다. 그래도 특이한건 디지털 시대에도 끊임없이 오디오 음향기기 시장만은 죽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한다고 하는데 그 중심에 또 교회라는 핵심시장이 있다고 판단했다. 지금의 아이돌 그룹이 전성시대인 것은 어쩌면 한 시장 자체가 죽어가면서 막판 대 바겐세일을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며 ‘음향산업을 배후산업을 포함한 하나의 틀로 이해하지 못한’것이 큰 실수라 결론지었다.
도서관 짓느라 도서구입비가 없고 학교인프라 늘리느라 정작 학생들 급식 보조할 돈이 없고 오디오 콤포넌트 사느라 앨범 살 돈이 없다. 전부 토건시대의 ‘뽀다구‘ 문화의 잔재인 셈이다. -291p
음악분야에서도 이와같은 토건문화의 적용은 예외가 없었다. 으리으리한 오페라 하우스를 건축함과 동시에 예산이 없어 국립오페라 단원을 해고하는 아이러니가 곧 우리 문화산업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방송에서 본방 시청률이 본원상품이라면 텍스트에선 단행본이 영화에서는 극장관람객이 음악시장에선 음반이 본원상품이다. 저자는 문화산업에서 본원상품이 활력을 찾지 못하고 후방문화, 파생상품만 득세를 이루는 것은 장기적인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가만보면 저자는 문화를 말하면서 바뀌어진 생활패턴과는 연계분석을 하지 못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제라도 중학생 아이들에게 한 달에 두장씩 CD를 사주라고 권유했는데 그게 사준다고 해서 한자리에 앉아 예전 우리처럼 우아하게 음악감상할 여건이 되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MP3를 가지고 있는데 빠른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똑같이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스마트폰은 즉시성을 MP3는 보관성의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나가수에서 바비킴이 ‘골목길’이라는 노래로 1등을 했다하자. 1등 발표 십분 후 벅스에선 실시간 1위로 바비킴이 리스트에 등장한다. 아이는 스마트폰에서 벅스 아이디를 통해 골목길을 다시 들어보고 나는 그 원곡인 신촌블루스의 골목길을 들어볼수 있다. 그 밑에는 같이 경연곡으로 등장한 박정운의 ‘오늘같은 밤이면’이나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도 물론 들을 수 있게 같이 떠있다. 그렇게 재감상을 한 후 정작 음원을 내려받는 건 리쌍의 7집 앨범이다. 몇주전 리쌍 7집이 통으로 1위에서 10위를 달린 적이 있는데 굳이 앨범이 아니더라도 완판이 가능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통다운의 이유는 가사의 연계성 때문이다. 더 이상 아이돌 노래의 가사는 아이들조차도 의미를 두지 않는다. 우리 때처럼 가사의 서정성에 눈물흘리는 시대가 아니라 지나가는 가사의 구체적, 현실적 한마디에 위로를 받는 것이 요즘 아이들의 현실인 것이다. 멜로디에 실은 가사가 아닌 랩에 실린 가사에 서사적 감동을 받는 것은 노래는 아름답다기 보다 지극히 일상이라는 뜻이다.) 즉, 학원가는 무료한 버스안에서 오며가며 듣겠다는 뜻이다. 앨범을 사지 않고서도 음원만으로 통다운을 받게 할 정도의 경쟁력은 그러니까 리쌍 정도의 서사력을 가져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스마트폰은 바로 노래 들으면서 가사를 확인할 수 있어 영어가사의 경우 큰 도움이 된다. 이 모든 게 한 달에 몇 천원이면 가능한데 CD를 구입하여 한자리에 앉아 오디오 기기의 재생을 하라는 건 조금 저자답지 않은 제안이 아닐까. 차라리 학생별 MP3 음원 이용실태를 조사해 바람직한 음원 활용방법, 음원을 이용한 파생상품, 이러한 것들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아닐까. 음악의 본원상품이 앨범이라는 것이 이제 시대에 맞지 않는 결론이라고 보며 본원상품의 파급력을 가진 음원시장에 대한 더 깊고 예리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스포츠의 본원상품은 올림픽이나 월드컵같은 국제행사가 아니고 일반인 체육이나 사회인 체육같은 생활체육이라 말한다. 사회치유활동으로서 스포츠가 활성화되는 것, 스포츠 네트워크가 보다 깊숙하고 넓어지는 사회가 선진사회이며 금메달 몇 개, 무슨 국제대회 유치 같은 실적위주의 스포츠 성과는 국민을 위한 체육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실적에 따른 스포츠 연금이 폐지되어야 하며 엘리트 체육식의 행보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선수도, 나라도, 국민도 서로 망하는 구조라 부연한다. 이것도 나는 4년마다 월드컵 특수병에 신음하는 대중의 환타지가 반사적으로 떠올라 저자가 부럽다는 유럽의 어느 변두리 마을 수영장에서 노인들이 자유롭게 수영하는 모습같은 건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적으로 스포츠보다는 건강을 위한 다이어트가 더 득세를 이루는 지금의 판세는 분명 유럽식이 아닌 미국식이 자명한데 누구나 악기하나쯤 연주할 수 있는 나라도 부럽지만 누구나 집근처에서 수영을 취미로 즐기는 노인들의 나라가 우리가 지향하는 스포츠 선진국의 로망이 되길 바래본다.
국민들이 살찌게 하고 다이어트 업체와 제약회사 그리고 영리병원이 돈 버는 미국모델과, 스포츠와 식품으로 국민들이 살찌지 않게 하고 대신 암처럼 많은 비용이 도는 질환에 국가가 거의 완벽하에 지원하는 유럽모델 가운데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 -358p
문화활동은 자기만족의 문제
방송, 출판, 영화, 음악, 스포츠를 중심으로한 문화생태계속에서 각각의 본원상품을 추적해보고 지난 십년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앞으로 전체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어떤 문화정책이 시급한지 저자는 다양한 제안들을 내놓았다. 미처 몰랐던 이면의 진실도 알게 되었고 실현불가능해 보이는 대안,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의견도 있었다. 경제적 시각으로 문화 시장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고 해당 문화의 성장, 발전, 쇠퇴, 몰락의 추이를 관찰해 볼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 책은 통계치를 소개하다보니 숫자의 경제, 규모의 경제를 말하는 책이기도 하다. 분명한건 문화에 지출하는 비용이 예전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그 욕구만은 더 증가한 것이 아닐까 싶다. 돈을 많이 지불했다고 꼭 문화생활에 만족을 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문화생활을 여유롭게 하고 있다는 모양새 자체가 삶의 안정감과 보상감을 제공해주는 것이지 방송, 영화, 책, 음악, 스포츠 상품에 내가 감동을 받고 그것을 마음껏 향유한 정도와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그런면에서 저자는 비용대비 만족도 변화도 제시했어야 한다고 본다. 또 사람들이 총지출에서 카메라와 애완동물을 사는 것에 더 많은 지출을 했다는 점도 내 시선을 끈다. 문화에 대한 필요성보다는 같은 시기 디지털 기기의 교체, 신규매체에 대한 지불이 지난 시절 우리를 더 유혹했다는 것 역시 저자가 말하는 뽀다구 문화와 일맥상통한다. 외로움을 달래려 애완동물을 구입했다는 것, 그 동물사진을 찍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도 2차적인 문화생활보다는 일차적인 개인적 본능이 더 중요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지금 심하게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는 상황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새롭고 첨단의 커뮤니케이션 기기들을 구입해 세상과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자신이 더 중요하고 자신의 삶만이 더 각별한 태도로 기계를 이용하고 있으며 그 상실감과 허전함은 정작 사람이 아닌 동물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다.
그래서인지 새삼 이곳 서재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다 이런 책을 읽었다고 떠드는 행위 자체가 내겐 상당히 이차적인 문화 활동을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문화로서 본원적 상품이 책이라면 서재는 명실공히 파생상품이요, 후방문화이다. 책을 읽고 혼자서 가슴에 묻어두거나 혹은 연구나 업무적 방편으로만 책을 넘기는 사람은 절대 그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이 궁금하지가 않다. 책을 읽으면서 서재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TV가 보여주는 것들, 세상이 떠드는 이야기, 그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눈길이 가기 시작했고 포털뉴스나 실시간 검색에 반응을 하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트윗에 그럴싸한 문장들을 적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책꽂이에 꽂아만 두는 것과 그것을 읽었다고 굳이 글로 남기는 행위가 다른 것은 후자의 경우 필연적으로 사유 및 사고의 시간을 가져오는데 이 반복적인 행위가 자기도 모르는 통찰력이 되어 문화전반에 대해 서슴없이 떠들게 되는 자신만의 시각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책을 읽고 그러한 자신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남기는 사람들의 특성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관해 떠들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책이 유익하지 않았다 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책에 관심있는 분들은 대부분 문화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하에 이 책에 대해 같이 떠들 다른 분들을 만나고 싶다. 글쎄, 나는 문화로 밥 벌어 먹고 살기 힘들지는 모르겠으나 문화로 지겹게 수다떠는 건 자신있다. 나같이 문화에 참견하고 싶은 분들의 다르고 새로운 시각을 기다린다. 책을 읽고 또 그 의견을 나누고 공감하다 반대하다 그렇게 이 생태계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어쩌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문화생활의 가장 본원적 소비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나는 될수 있으면 문화로 쓰고 떠들며 살고 싶다. 그것이 먹고 사는 일이면 더 없이 좋겠지만. 죽고 살기가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