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빅브라더스, 궁금하다


   어제 KBS 예능프로에서 황석영작가를 볼 수 있었다. ‘빅브라더스’라는 파일럿 프로였는데 4명의 MC중 어엿한 한자리를 차지하고 계셨던 것. 지난번 무릎팍 도사 유홍준 편에서 조선 3대 구라중 한명으로 언급된 황석영 작가는 이미 사석에서 그 입담이 유명하시다 들었다. 책과 작가가 나오는 프로치고 11시대 편성인 것은 모험적인 시도로 보였다. 아무래도 무릎팍의 하향세를 틈타 기회를 엿보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하지만 S본부 '짝'의 상승세도 만만치 않을터) 첫회 게스트는 소녀시대 유리, 티파니, 태연, 서현이었고 이들은 다른 예능에서와는 달리 그래도 진지한 답변으로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표방하는 프로그램 취지는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었으나 글쎄, 내용상으로는 아저씨 이상의 나이드신 분들이 소녀시대에 궁금한 점들을 맥락없이 인터뷰하는 수준에 그친 것 같다. 사실 게스트는 거의 황석영 작가인듯한 분위기가 많이 느껴졌고 무엇보다 MC들의 질문이 실망스러웠다.(면접식 질문은 좀 쌩뚱, 서현의 답변은 좋았지만) 하지만 지난번 이외수 작가, 김정운 교수를 투탑으로 하는 인문학 버라이어티 ‘야동’이라는 파일럿 프로보다는 그런대로 재미는 제공했다고 본다.(그러나 야동에서도 게스트가 소녀시대였다면 흥미는 제공했을듯) 빅브라더스가 실험에만 그치지 말고 좀 오래갔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는데 그럴려면 가장 시급한 것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인 듯하다.

   우선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가장 대변해주는 상징적 존재는 단연 황석영 작가이다. 촬영장소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북카페로 유명한 홍대 카페 꼼마의 천장형 서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MC 네 사람이 잡힐 땐 고스란히 뒤에 배치된 책들이 (장시간)노출되고 있다는 것. 상당히 문학적인 뉘앙스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나같이 유난히도 책들의 제목이 눈에 팍팍 들어오는 사람은 왜 하필 저책이 작가 뒤에, 김용만 뒤에 있는 것일까 그게 더 궁금하다. 황석영 작가를 의식해서 그런지 구성상 게스트들이 만들어 보고 싶은 책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긴 했지만 스타가 아닌 청춘이라면 외려 박탈감만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차라리 상투적이긴 해도 요즘 읽고 있는 책이나 좋아하는 작가를 말하는 것이(그도 없으면 좋아했던 작가, 어릴 때 읽었던 책이라도) 어떨까 싶었다. (엄청난 간접광고의 효과를 볼 것이고 태연효과, 유리효과등이 나타나겠지만 그렇게라도 책이 팔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해서)

   그런데 MC 들중 송승환은 ‘난타’로 뮤지컬 한류를 이끈 어엿한 문화계인사이고 김용만 역시 예전 ‘느낌표-책을 읽읍시다’에서 공익성 강한 버라이어티를 진행한 바 있다. 조영남도 가수이긴 하지만 미술, 문학, 전시등 예술 전방위 분야에서 인텔리한 연예인의 이미지가 강한 인물이다. 이미 문화로 먹고 살면서 나름 성공을 이룬 40대 이상의 남성들이 자신과 같은 분야의 신세대를 알 수 있도록 돕는다는 발상이 썩 이해되진 않았다.

   우선 신세대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누가 느끼는 것일까. 신세대를 왜 알아야 할까. 알아야 한다면 그것을 왜 누구에게 알려야 할까. 그리고 알리는 사람은 누가 되는 것이 좋을까. 소녀시대는 신세대를 알려줄 수 있는 대표적 걸그룹일까. 아니 신세대를 말하는 대표군으로 적정한 선택일까. 그들이 자신의 세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MC들이 알아낸 것은 무엇일까. 그 알아낸 바를 우리가 같이 아는 것은 어디에 도움이 될까.

   소녀시대가 대답한 내용들은 서현의 연습생 친구 환희를 제외하면 거의 우리가 이미 알고 있거나 우리가 알고 싶은 신세대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냥 나이지긋한 아저씨들이 보기엔 마냥 이쁜 처자들의 사생활이 궁금해 이 질문, 저 질문 해보는 수준이었달까. 보아이후 한국의 아이돌들은 초등생부터 연습생 시절을 거치며 학교생활과 친구를 외면한 채 오로지 스타를 향해 혹독히 조련된 친구들이다. 나는 보아가 성인이 된 후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볼때 예전처럼 놀랍다거나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그것은 그녀의 얼굴에 스쳐가는 알 수 없는 그림자, 찰나의 표정에서 감지되는 어떤 슬픔 때문이다. 완벽한 무대매너와 가창력 뒤에 자신이 버려야 했던 모든 것에 대한 외로움, 차갑게 변화된 보아의 얼굴에서 나는 상실감을 느낀다. 작가와 문화계 인사가 나와서 이들에게 새삼 뭘 물어볼 것인가. 이들을 앞장세워 한류를 수출해온 어른된 입장에서 이들의 공을 치하하기 보단 이들이 놓치고 버리고 온 것들을 위로하거나 깨우쳐 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빅브라더스가 어짜피 소녀시대처럼 젊은 나이에 성공한 게스트들을 초대해 신변잡기식 인터뷰를 이어나가는 포맷이라면 이 프로그램의 차별성은 연예가 중계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기왕 서재를 배경으로 할 거, 기왕 대작가를 모셨을 거 문학과의 만남을 시도하던지, 책이야기를 하던지, 그게 시청률이 안 될 거 같으면 그들의 고민이라도 상담을 해주던지,(아이돌로서 부족한 문화소양 함양? ㅋ, 혹은 심리치유? ) 아니면 역으로 질문을 받던지, 특정한 주제를 놓고 토론이라도 하던지 하는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황석영 작가는 지난여름 60대 문화계인사 대표격으로 ‘희망버스’를 탄 분이다. 배낭메고 청바지입고 다녀와 선배로서 김진숙에 면목이 없다며 편지형식의 후기를 쓰신 분이다. 이외수 작가가 방송에 나와 줄기차게 ‘감성’을 부르짖고, 김정운 교수가 ‘여자’를 외치고 다른 작가 분들이 ‘폭력’이나 ‘자본’, '인권', '개발'등의 개인 작품과 화두에 해당하는 이념을 대외적으로도 언행일치시키듯 좀 더 색깔있는 목소리를 내주셔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다. 황석영 작가는 서사적인 작품과는 달리 방송에선 여간해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벗지 않는 분이다. 화면상으로는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인사에 속한다. 아마 어줍짢게 목소리를 암시하느니 아예 방송용과 비방용으로 나누어 깔끔하게 분리하시는 행보를 택하신듯하다. 그렇다고 예능에서 독자들과의 만남이나 강연식의 계몽주의를 설파하시라는 건 아니고 평소 젊은이에게 하고 싶었던 말씀은 해주셨으면 한다. 작가만이 할수 있는 조언과 배려가 돋보이길 바라는 마음은 나만의 욕심일까.



#2. 빅브라더스, 오래가자


   그리고 어제 서재에선 유난히도 특정 출판사의 책이 거의 백프로였다고 본다. (문학동네가 꼼마에서 행사를 많이 하는 것도 아는 분들은 아실터 ㅋ) 그런데 황석영 작가의 <개밥바라기별>과 <낯익은 세상>은 그렇다 치고 눈에 확 띄던건 김언수 작가의 <캐비닛>이었는데  이 책이 하필 황석영 작가 바로 어깨뒤에 정면으로 배치되어 상당시간 노출되었다. <설계자들>도 다른 쪽에 있긴 했지만 그 책이 메인에 배치된게 끝까지 의아했더라는 ㅋ. 기왕 노출시켜 줄거 마치 현빈처럼 게스트중 한 명이 슬그머니 서가를 둘러보다 한권을 빼내든가 하여 그 책의 판매고나 올려줄 것이지.

 <조영남과 황석영 사이 어엿한 '캐비닛'>
 

  줌 아웃된채 훑어 보아도 상단에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이 포진되있고 중간층에 적절히 <신의 궤도>, <꽃의 나라>, <1Q84>,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같은 소설, 시집들도 보인다. 오래된 <람세스> 같은 책들도 꽃혀 있어서 흡사 내 서재인줄 알고 얼마나 반가왔던지.  

   나는 점점 서가에 무슨 책이 꽂혔나를 확인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무슨 숨은 그림찾기 하듯 다음의 책을 발견하고 잽싸게 찾아보았다. 참 골고루 장르별로 신간이 배치되 있었다는 걸 알았고 내가 모르는 채 이토록 신간들이 세월가듯 휙휙 스쳐지나가고 있구나를 새삼 통감했다.

   

 

 

 

 

 

 

 

< MC들 뒤 서가에 꽂혀 있던 신간들> 

 

   최근에 소설에 관심이 멀어져 억지로 두어권을 읽었는데 한국소설이 아주 관념적이거나 아니면 대중적이거나 극과 극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능도 마냥 웃기기만 하고 던지는 메시지가 없으면 실패하듯 소설도 수준이 되면서 재미도 곁들이지 않으면 점점 선택을 받기 힘들어질거라는 예감이 든다. 올해는 <7년의 밤> 이후 대박소설이 나오지 않고 있는 듯한데 이건 외국소설도 마찬가지인듯하고 작년의 <덕혜옹주> 열풍과 <1Q84>의 독식에 비하면 낯설은 광경이다. 더군다나 유명인사들의 정치관련 서적들이 득세를 이루는 실정이라 올해 소설전망은 이후 김훈의 실적에 달리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하여튼 나는 TV를 보다 우연히 책을 보게 되는 현상을 바란다.  TV보다 책이 더 좋을때도 있다는 걸 알게되길 바란다. 그래서 빅브라더스가 좀 오래 버텨주길 바란다. 나는 그들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여전히 감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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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9-22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봤군요.
저도 조금 보다 말았습니다. 하도 피곤하기도 하고, 첫번째 게스트가 소녀시대라 별로 구미가 안 당기더군요.
근데 과연 이게 오래 버텨줄지 그게 좀 그래요.
그 인터뷰 장면 저도 봤는데 과연 그럴 필요 있나 싶기도 하고.
MC가 네 명이라는 것도 좀 그렇고.
난 예전엔 안 그랬는데, 조용남이 다시 나와 설치는 게 영 맘에 들지가 않아요.ㅋ
황 어르신이 MC로 나으셨다는 것도 좀 어색하고.
그도 자리를 잡아가면 괜찮을 것도 같지만 울나라에선 아직도 좀 낮선 일이죠.
만약 이것이 자리를 잘 잡는다면 그건 강호동 덕이 클거라고 봅니다.^^

한사람 2011-09-22 18:37   좋아요 0 | URL

예, 저도 네명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어요. 조영남 거슬렸구요 ㅋㅋ
(조영남씨는 게스트로 나올땐 웃긴데 MC가 되면 산만해지거나 엉뚱해져서리)
차라리 김용만보다 젊은 아저씨가 한명이 더 필요해 보였어요.

자리잡는다면 강호동 덕이라는 말씀 공감해요~
무엇보다 황석영 작가가 그 프로에서 뭘 할거냐, 이게 제일 큰 문제이자 답일거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1-09-22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볼 때는 서현이가 무슨무슨 위성이랑 영양제를 무인도에 가져가겠다고 했는데. 이건 뭔가 이러면서 채널을 변경했어요. 11시에 하는 예능은 거의 안 보는 편인데 그래서 이것도 모르겠고 이전 파일럿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책이 있었구나, 거기에, 책! 아아아아아아, 새로운 사실이에요, 한사람님.^-^

한사람 2011-09-22 18:40   좋아요 0 | URL

히히, 무인도 질문이요? 갑자기 면접식으로 질문하는거 보기 좋지 않았어요. 얻은건 서현답 정도 ㅋ
이전 파일럿은 일요일밤에 하던건데 이외수 작가, 김정운 교수가 MC였고 주제가 있었는데 기억 안나요
내용이 너무 진부하고 없어지겠다 싶었는데 그 이후로 안하더군요 ㅋㅋ

이 프로는 책에 관련된게 아닐거면 뒤에 서가배경은 좀 아닌것 같고
책으로 할거 같으면 구성상 보완이 절실해 보여요
그래도 반응은 괜찮은 거 같으니 시청률 상관없이 꾸준히 밀고 나갔으면 해요

맥거핀 2011-09-22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황금어장이 안해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무심결에 보게 된 프로그램입니다. 마침 소녀시대가 나오기도 하고..(-_-) 약간은 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처음에 뒤편에 엄청난 책장을 보고 놀랐지만, 보다보니 왜 저기서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느낌. 뭐 예를 들어 뉴스에서 학자들 인터뷰하면 꼭 뒤에 책장을 놓고 하는 듯한 그런..병풍으로서의 느낌밖에는 안되는. 말씀하신대로 게스트들에게 좋아하는 책이나 최근에 읽은 책들을 물어봤으면 것도 나름 재미있었을 듯 한데(그 사람이 읽은 책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 뭐 가상의 책 어쩌구 하며, 결국 해피투게더나 놀러와에서 에피소드 말하는 식이 되어버렸으니 말이죠..

사실 파일럿이라 그런지, 약간 균형이 안맞는 느낌은 있어요. 하기는 뭐 옆에 패널로 계신 분들이 황석영, 조영남, 송승환 이런 분들이고 보면, 뭔가 어지간히 균형을 잡기도 힘들겠지만.. 그분들도 말로 한마디 하는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고, 나온 게스트들도 그렇다고 말들을 안시킬 수 없으니, 뭐라도 들어야 하고..프로그램 측에서 적당히 균형을 잘 잡지 않으면 프로그램이 산으로 갈 것 같다는 느낌.

저는 게스트보다 그양반들 얘기를 좀 들었으면 하는데, 뭐 프로그램의 취지상 그분들 말씀이 많아진다는 것은 프로그램이 망하는 지름길이겠지요.;; (개인적으로 김용만 씨를 좋아해서, 진행력을 믿어 봅니다.)

한사람 2011-09-22 18:45   좋아요 0 | URL

저는 황석영 작가 나온다 해서 봤어요. 짝 볼까 하다가 ㅠ
서가 배경은 너무 장시간이었죠? 놀러와 처럼 면접 끝나면 공간을 좀 바꾸던가 했으면 좋았을텐데 카페다보니 어려웠을거 같구요. MC간 정리가 안된게 제일 어수선해 보였죠. 거기다가 반말도 가끔 나오고 자기가 개인적으로 궁금한거 물어보느라 시간 다 보내고 ㅋㅋ

그런 프로 하다보면 연예인들 지식이 어느정도 뽀록 나잖아요. 어제 서현은 그래도 생각을 좀 하는 친구 같더군요. 가장 자의식이 뚜렷해 보였거든요. 저도 김용만 좋아하는데 프로성격과 잘 어울리니 삐그덕 거리더라도
계속 방송하길 바래요. 시도는 신선했거든요.

프레이야 2011-09-22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어제 첫방영이었군요.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잠시 봤어요.
그들의 대화는 잘 듣지 못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면 한사람님 말씀처럼 좀더 보강이 필요하겠네요.
세대간의 괜찮은 대화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개밥바라기별'과 '캐비닛'을 책꽂이에서 발견했어요.
책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풀어가도 좋을 것 같은데 글쎄요 작가의 마음이니까요.^^

한사람 2011-09-22 18:49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프레이야님 !

뒤에 책 보이던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유심히 보잖아요 ㅋㅋ
슬쩍 꽂아놓은거 다 알죠. 책으로 풀면 시청률 안나올까봐 주저하는게 역력히 보이던데
그럴거면 왜 서가를 배경으로 할까 싶기도 하고
제작진이 일단 반응을 보고 정할거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승승장구보다는 시청률 좋게 나왔다고 하니까
없어질거 같지는 않아요~~~ 개인적으로 책 소개도 저런 예능프로에서 좀 다루어 졌으면 좋겠고
그게 좀 너무 교양적이면 문학적 이야기만으로도 좋을 거 같은데 더 두고 봐야죠.

글구 황석영 작가가 언제까지 나올까 싶기도 하구요 ㅋㅋ

루쉰P 2011-09-22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듯 티비 프로에 대한 소상한 리뷰를 해 주시니 이 프로그램 피디가 꼭 한사람님의 글을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네요. 근데 재밌는 건 장사하는 사람은 자기 것만 보인다고 하듯이 책을 좋아하시니 프로그램에서도 책들을 찾아내는 한사람님의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ㅋㅋ
문학적 프로그램이 좀 생겼으면 하는 것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물론 책을 주제로 해서 어떻게 재밌게 풀어갈 것이냐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뿔테 안경을 쓰고 비평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이 책이 상징하는 바는 어쩌고 저쩌고 하는 프로그램은 사절이지만 그래도 문학에 대한 관심을 받을 수 있게 끔 만드는 프로그램이 좀 있었으면 하네요.
그렇다고 제가 방송국 가서 만들 여건은 안 되고 말이죠. -.- 암튼 한사람님 리뷰에 공감하고 갑니다. ㅋㅋㅋ

한사람 2011-09-23 08:37   좋아요 0 | URL

히히 유심히 봤죠, 무슨 책이 꽂혀있나 ㅋㅋ

지난번 무릎팍 도사 유홍준편에서 보았듯이 예능이 지적으로 흘러가면 말로는 좋다고 하면서 바로 시청률이 낮아진다고 해요. 유익하다, 고상하다, 품격있다싶으면 그래 ~ 하면서 채널을 돌린대요.
주입식 교육에 하도 치여 살아서 그럴까 싶구도 하구요 ㅋ

어제도 조영남씨가 태연에게 뽀뽀한 기사만 화제가 되었잖아요. 모든 관점을 늙다리 아저씨들이 헤벌레 하는 새파란 아가씨들로만 프로그램을 구성하니까 그런일이 발생하죠. 제가 보았을땐 그 장면이 문제되지 않았거든요. (물론, 조영남씨가 평소에 여성편력이 심하다는 평을 들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ㅋ) 시청자나 제작진 모두가 걸그룹을 일종의 성적환타지로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죠.

그러니까, 저 프로도 예능이냐, 교양이냐 확실히 하지 않으면 외면당하리라고 봅니다.
그런면에서 어제식이라면 뒤 서가배경은 필요없었다는 뜻 ㅋ

언제나 루쉰님 덧글은 묘하게 에너지가 되요~ 고마워요!

2011-09-23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4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9-24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녀시대 이름 다 알고, 얼굴도 다 아는데...다 똑같아 보이다니...역시 황석영 아저씨는 만주 장춘에서 태어난 티가 나서 어쩔 수가 없군요.

조 영감이 왜 포옹하자 제안했는지 속이 다 보여서...우리 태연누나 얼굴에 입구린내 다 묻히고! 으아! 분노의 밤! 팬들은 분노한답니다.

한사람 2011-09-24 23:20   좋아요 0 | URL

후후, 저는 그 장면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보았어요
원래 여성 게스트들 잘 껴안지 않았나요?
그런데 기사로 보니까 유독 얼굴이 크로스되긴 했더군요. 태연도 놀라는 표졍을 짓구요 ㅋㅋ
소녀시대는 워낙 예능과 인터뷰에 훈련이 된 친구들이라 그들이 알려고 하는 것들은 절대 알수 없었을텐데 말이죠,,

그러고보니 노이에자이트님은 전혀 제 윗세대가 아니신걸로 보입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1-09-25 15:41   좋아요 0 | URL
으아~ 우리 소녀시대 누나들을 건드리는 놈들! 미워할 거야!
 
문화로 먹고살기 - 경제학자 우석훈의 한국 문화산업 대해부
우석훈 지음, 김태권 그림 / 반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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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태계에서 진화란 무엇인가


   이 책을 주말에 읽었다. 그리곤 우울한 주말을 보냈다. 생각보다 이 책은 문화적이지 않았다. 외려 정치적이기까지 했다. 이 책의 구호는 아마도 ‘토건은 탈문화 탈토건만이 문화’, 정도가 될 것이다. 제목만 보기엔 예능프로들을 보는 중간에 슬슬 넘겨보아도 좋을 것 같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만 떠오르게 하는 진중함이 버티고 있다. (예를 들면 런닝맨에서 뛰어가는 유재석을 죽어라 좇아가며 촬영하는 VJ는 월급이 얼마일까? 뭐 이런) 가볍게 넘기고 말기엔 개운치가 않은 무언가가 있는 셈이다. 이런 류의 책은 혼자만 읽고 방법을 찾는 쪽이라면 큰 도움은 되지 못할 듯하다. 제시된 문제 해결로 궁극엔 정부, 시민차원의 문화정책의 변화를 언급하고 하고 있는데 이는 정작 문화로 먹고 살고자 하는 청춘에 소구한다기 보다는 그러한 문화정책을 시행하는 책임자들이 읽어야 할 내용들에 가깝다.(그렇담 제목은 ‘문화로 먹고 살기’가 아니라 ‘문화로 먹고 살게 해주기’가 맞는 것 아닐까) 문화에 속하는 하위영역별로 제시된 문제점과 해결방안들이 자칫 현재 그 속에서 실상을 겪고 있는 기성세대들이 보기엔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생산 및 기획자가 되고자 하는 준비생들에겐 현재 문화시장이 어떤 상황인지 보다 냉정하게 관찰하는 조감도의 역할로선 의미가 클 듯하다. 어찌 보면 현재 겉보기와는 달이 문화산업에 뛰어든다는 것은 가진 꿈이 많을수록 무너질 희망도 많다는 뜻과도 같은데 그래도 꼭 진출해야 겠다면 내가 감당해야 할 미래는 어떤 난관들이 있는지 미리 예견해보고 그것들을 하나씩 극복해 나가겠다는 자세로 전체 문화시장이 더 커지고 더 탄탄해지도록 기여하는 일꾼이 되라는 당부와 같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현재 화제성에 비해 리뷰는 많지 않은 편인데 프레시안에 소개된 혹평만으로 이 책에 대한 평가가 귀결되는 건 성급하다는 생각이다. 부족한 소견이지만 이런 책은 결론에 대한 적절성 여부나 그 논쟁보다는 일단 문제제기에 대한 화제성 창출과 국민적 아젠다 공유가 우선 아닐까. 왜냐하면 문화는 다른 분야와 달리 우리가 늘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표적인 분야이고(특히 이 책에 소개된 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일반대중들은 더욱더) 실제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실상을 잘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방송, 영화, 책, 음악, 스포츠등 우리는 소비자로서 오늘도 문화상품을 뒤적이고 향유하는 직접주체로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있는 것이 곧 우리문화의 현상이라 의심없이 믿는 사람들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문화의 수준도 향상되어 어엿한 한류를 수출하는 나라로서 각 분야 공히 고급문화를 생산, 소비하는 듯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문화에 대한 열등감, 미국문화에 대한 패배감, 일본문화에 대한 적대감을 너머서 이젠 우리 한국문화도 세계에 먹히는구나, 하는 우쭐한 기분을 서서히 가지게 된 것이다. 파리에서 소녀시대가 공연을 하고 유럽여성들이 슈퍼주니어의 노래를 한국어로 따라 부르고 울면서 소리 지를때 늘 그렇듯 잘 훈련된 애국심은 가슴 저 밑바닥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것이 우리들 실상인 것이다. 실적위주의 한국식 성장모델 덕에 우리는 해마다 속으론 노벨문학상을 목빠지게 기다리면서 겉으론 그런 상은 중요하지 않다며 서로를 위로한다. 평소에 소설을 읽어온 독자는 아닐지라도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 유럽, 일본에 멀리멀리 수출되어 베스트 셀러를 기록했다는 소식에는 가슴이 홧홧해져오는 독자들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조수미, 정명훈, 장한나와 같은 음악가 몇 명으로 우리도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나라의 국민이라 생각하며 김연아, 박태환 선수같은 도저히 이룰 수 없었을 것 같았던 종목의 금메달 소식에 스포츠 선진국이라는 위치를 스스로들 부여한지 얼마나 되었던가.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로 인해 스케이트장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피겨를 배우는 학생들이 많아지듯 국가적으로 어떤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다면 그것이 곧 그 분야의 발전으로 인식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외양적인 모습과는 달리 우리가 어떻게 탈문화적인 국가, 비문화적인 시민이 되어왔는지를 데이터와 통계로 증명하며 앞날을 걱정한다. 전국에 공연장을 많이 지었다고 음반시장이 활성화되었는가, 그래서 음악산업이 발전했는가. 올림픽 메달을 많이 땄다고 국민의 체력이 좋아졌는가. 한류가 한바탕 불고 있다고 가수의 인권이 높아졌는가. 천만 관객의 영화가 생겼다고 스탭의 인건비가 늘었는가. 런닝맨이 중국, 동남아에 큰 인기를 누린다고 구성작가들이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하는 문제들이다. 이 모든 질문의 시작은 문화산업에 진출하여 그것으로 밥벌어 먹고자 하는 청춘들이 많아졌기 때문이고 애석하게도 청춘의 꿈만큼이나 그들의 밥벌이는 처참한 현실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외형적으로 나라가 발전해 문화도 덩달아 발전을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실상은 좀 충격적이었다. 예전에 약간의 무리를 해 지금보다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간 사촌언니네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언니는 집만 좋고 밖에 나가면 허허벌판인 이 생활이 과연 내가 원하던 꿈인지 모르겠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거리에 나가면 애매한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이 동네 동사무소에까지 흔하게 된지 오래다. 커피숍, 은행, 마트에서부터 버스정류장, 지하철역, 터미널 같은 공공장소는 물론 심지어는 아파트에 서는 일일 장터도 문화를 표방하며 행사를 홍보한다. 우리사회에서 좌파와 우파의 구분없이 그냥 품격을 높이고자 할 때 접두또는 접미사격으로 문화를 따붙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 책은 이렇듯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문화가 어떠한 수준에 놓여있는지 냉정하게 점검해보는 평가의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듣고 보는 문화이상은 사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문화이하의 이야기였다. 또 먹고 산다는 건 직업의 문제, 나아가 생계, 생존의 문제이다. 그러니 바꿔 말하면 이 책은 문화가 너무 좋아 그것으로 꿈을 이루고 싶은데 먹고 살지는 못해 많은 청춘이 죽음까지 내몰린 절박한 상황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역으로 문화로 죽고살기가 된 작금의 시대에 문화란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단 말인데 저자는 먹고살기가 아닌 죽고살기가 된 문화를 경제적으로 분석해보고 그걸 다시 정치적으로 담론화해보자 제안한다.

   이 책에서 가장 명확하게 담론화된 개념은 ‘문화생태계’이다. 저자는 문화를 생태계의 용어를 빌어 ‘문화생태계’라 규정짓고 건강하고 튼실한 문화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의 토건문화를 청산해야한다고 외친다. 소녀시대가 파리 콘서트를 마치고 귀국할 당시 공항에선 즉각 헤어스타일과 신발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연예인의 공항패션이 화제가 되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녀들은 한국식으로 말하면 국위선양을 마치고 귀국한 수출역꾼들이 아닌가. 그녀들의 공항패션에서 나는 지난 시절 가발, 신발공장에서 청춘을 바친 여공들의 착취된 노등을 떠올렸다. 내 딴엔 소녀시대가 어린나이에 연습으로 착취를 당하는 연상을 하며 그들의 인권은 국권을 앞설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건 나도 모르게 70년대식 수출중심주의에 길들여진 한국적 사관에 불과했다. 그녀들의 활동을 용역으로보고 수출상품처럼 생각한 것이니 무의식에선 자랑스러움이 먼저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수출중심주의가 곧 국수주의, 국가패권주의와 결합하여 ‘한류우드’같은 토건문화를 반복, 재생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저자는 문화산업의 확대를 경기장, 공연장, 관광지등의 시설적인 투자로 밀어붙인 정부의 정책때문에 지난 5.6년간 문화산업이 추락했다고 주장한다. 본원상품을 개발할 생각을 않고 파생상품만 파이를 키워 스스로 그 몸피를 감당하지 못하는 꼴이 된 것이다. 저자는 문화산업에 진출하고자 하는 자들을 생태계의 일원으로 보고 맨 밑바닥에서부터 상호발전적인 진화를 하는 것이 문화계 전체를 발전케 한다고 말한다.


방송은 악마와의 싸움

   책에서 처음 화두를 꺼낸 건 방송분야인데 안그래도 바로 어제 <무한도전>이 방송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며 방통위에서 제재를 가하겠다는 기사를 보았기로 나는 화가 나면서도 순간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무한도전>은 탈계몽, 탈권위를 앞장세워 저렴해 보이는 캐릭터들의 값비싼 도전을 프로그램의 정체성으로 하고 있고 무엇보다 자막의 개념화(?)에 실험적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번 방통위의 제재는 시사하다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무한도전이 그동안 자막으로 양산해온 턱주가리아, 장모반데라스, 저쪼아래등의 대표적 문자개념 캐릭터는 품위높으신 교수님들의 소위 있어 보이는 빈번한 영어합성어 사용에 대한 예능대항적 유머라고 보았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본원시장이 디지털화되면서 작품, 결과물, 생산물이라는 뜻의 콘텐츠가 문화상품이라기 보다는 문화생산자들, 예술가를 납품업자처럼, 정부를 용역관리자처럼 보이게 하는 용어라며 콘텐츠를 문화상품과 동일시하는 표현에 불쾌감을 표했는데 나는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대부분 방송, 언론에서 대중에게 주입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좀 유식해보이려고 스스로들 차별성을 위해 그들이 사용한 단어와 더 차별화하기 위해 선택 조합해 탄생한 예능적 문자들-턱주가리아등-은 그들의 품위를 더 높여주면 주었지 적어도 깎아 내리지는 않을 장치인 것이다. 다시 말해 무한도전이 동네 바보형, 하찮은 형, 키작고 소심한 동생, 태생적으로 매력없는 동생, 깐죽거리는 친구를 내세워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이 외려 자신들의 우월성과 구별해주는 효자프로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꾸 자기들의 권위에 반하는 방식이라 규제하는 것 자체가 아직도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옛날 식민지 시대, 군사정권, 독재정권의 잔재인 것이다. 이미 무한도전과 함께 대표적 주말 예능프로인 <1박 2일>이 폐지결정 된 후 새삼 몇 년 동안 정상을 지켜온 예능의 대표 프로를 향해 방송의 품위를 저해한다는 발상은 역으로 그러한 옹졸하고 권위적인 낡은 국수주의적 시각을 재차 확인하는 것 같아 시청자로서 낯 뜨거울 지경이다. 같은 날 방송의 품위를 대놓고 지적한 방송통신 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는 대한가수협회장 태진아 대신 참고인 자격으로 가수 유열이 참석을 했다. 그런데 장관에 님자를 붙이자는 방통위 위원장의 발언에 유열이 박수를 치자 민주당 최종원 의원이 “지금 누가 박수 쳤어? 박수친 사람 누구야?"라고 고함을 치며 즉각 '색출작업'에 나섰고 이에 동조한 몇몇 의원은 '박수친 사람 나오라'는 고성으로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이 예능프로보다 더 싼티나는 삿대질과 고함소리가 과연 이 나라의 품위있는 분들이 활동하는 국정현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상황도 얼마든지 재미나게 개그소재로 발전시킬 수 있겠지만(주조연이 모두 연예계 인사아닌가) 안그래도 불황인 코미디계에 어느 누가 미쳤다고 이런 식의 정치코미디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방송의 경우 특히 ‘권위주의, 상명하복, 전도된 계몽주의로 돌아가려는 이명박 정권은 문법상 버라이어티 쇼’와 맞지 않는다 주장한다. 웃긴 건 이 책에서 알려준 여사님 사업이라는 한식세계화에 걸맞게 무한도전은 뉴욕에 비빔밥을 소개하기도 한 꽤 계몽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조정대회 한다고 백날 뉴스에서 알려줘봤자 미사리에 몇 십만 인파가 몰려드는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역으로 무한도전 때문에 조정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는 뉴스가 최전방에 보도되는 것이 우리 실정인 것이다. 죽고 싶다는 노래가사가 청소년 자살을 부른다며 방송금지를 하고 실컷 다보고 즐겨 놓고 뒤늦게 여자 아이돌 가수의 춤이 선정적이다 규제를 하는 것이 이 나라의 방송심의 수준인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좋으니 얼씨구나 일본에 앞장서 수출할 땐 언제고) 옛날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안기부 시절에나 왜 사랑이 이루어 질수 없는 것이냐며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이 불순하다 금지하는 줄 알았는데 이건 80년대로 문화가 퇴보하는 현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류바람을 이용해 한국어 가사를 널리 알리자는 것도 한글발전을 위해 힙합용 랩 가사를 심의하자는 것도 모두 국수주의적 시각인 것이다. 잣대만 편할 대로 바꿔가며 본질과 상관없는 비문화적 행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 우리 현실이요 수준인 것이다.

   방송이야기로서 기억나는 건 한국인은 데이터 상으로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 없이 일요일에는 꼬박 4시간이나 TV를 시청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해가 가는 건 예능 두어 프로와 드라마 한편만으로도 그 시간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은 주말에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가며 밥먹을 때도 손님이 왔을 때도 낮잠을 잘 때도 습관적으로 TV를 켜놓고 있기는 하니까. 주 5일제와 인터넷등으로 TV시간이 줄어들지 알았지만 우리의 일상은 매번 여행적이고 매순간 IT적이진 않는 것이다. 주말엔 누구나 무한도전과 1박2일의 예능 프레임에 자의적, 타의적으로 위치해 있는 것이 우리네 평범한 삶이라는 것. 이젠 본방의 구속력이 약해지고 여러 채널로 원하는 영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외려 예전보다 방송 프로그램을 공유하는 범위와 대상은 더 넓어진 것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비슷한 생활습관으로 인해 내용상 같은 방송의 통제하에 놓여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저자는 이것이 바로 방송을 장악하려는 정권의 욕심을 부른다고 지적한다.

   얼마 전 한예슬 사태를 보면서 회당 출연료를 삼천만이나 받는 그녀가 제작환경의 열악함을 토로하는 모습에 잘했다 큰일했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모든 건 외주가 늘어나면서 제작비, 광고비 때문에 검증된 스타시스템에 목메는 드라마 현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요즘은 톱스타와 몇몇 스타작가만으로는 흥행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연기력 되는 톱스타가 흥행드라마를 배출할 확률은 더 많긴 하지만 내 생각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드라마가 너무 많다는 느낌이다. 다양성 면에서도 예전의 청소년 드라마나 TV 문학관, 베스트 극장같은 단막극은 사라졌고 미니시리즈식의 각종 판타지에만 획일적 욕망을 드러낸다. 누가 먼저 잘못을 했는지 따지기 전에 주요 타겟군에 위치한 시청자로서 주제넘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미니시리즈는 예전 M본부의 월,화 전략 상품이었다. 그 이유는 주 5일제가 시작되기 전 가장들이 그때 제일 야근이나 회식을 많이 하기 때문이었고 남편이 들어오지 않는 시간대에 주부들은 드라마로(주로 불륜스러운 내용을 담은) 외로움을 달랬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막장식이 시간대와 요일을 막라하고 배치되어 있지만 그땐 그랬었다는 이야기다. 이 미니시리즈가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확장되어 작금의 전성기를 맞이한데는 사실 우리 아버지, 우리 남편들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가끔 ‘모래시계’같이 남편들의 귀가시간을 앞당기는 드라마가 혜성같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어머니, 주부들은 남편과 같이 드라마 보는 것을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드라마가 이토록 경쟁력있는 문화상품이 된 것은 결국 지난시절 불철주야 회사에 매달려온 많은 남성들 때문이었고 덕분에 드라마의 양적, 질적인 발전을 가져온 것이니 한류는 사실상 70,80년대 수출역꾼들이 이루어낸(?) 문화 금자탑이 아닐까. 그러므로 저자가 제시한 지역형 드라마, 청년 드라마가 성장을 하려면 지금처럼 일터위주의 생활방식, 성공 및 성과위주의 출세지향 방식의 삶에선 불가능한 제안이 아닐까 싶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남편 뒷바라지를 죽도록 해야 하는(안하더라도) 주부들 입장에선 더 이상 전원일기식의 농촌드라마나 대가족 정서가 중요하다는 홈드라마, 청소년시절을 떠올리는 학교드라마는 보고 싶지가 않다. 허황된 꿈이지만 육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지라도 재벌 2세와 환상적인 여행을 떠나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 비록 고졸이고 외모도 그렇고 그렇지만 내가 들어간 회사의 사장 아들이 나만 좋다고 좇아 다니는 드라마, 그 남자와 결혼하고자 하는 미모의 고학력 여성을 보기 좋게 물먹이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 오늘 죽더라도 그 직전에 한번은 꼭 세상과 남자, 그리고 나보다 많은 걸 가진 여자들에게 복수를 하고 죽고 싶은 것이다.

   저자는 미국처럼 사회적 지지를 받으면서 파업으로 저작권 개선을 요구하는 작가들을 예로 든다. 드라마 조합이나 보조금, 출연료 상한제같은 대안, 배우 생협같은 조합단체도 어떠냐고 묻는다. 인력 양성, 취업 기회, 생계보장 측면에선 실용적인 대안이다. 그런데 이 시민단체스러운 대안들이 먹혀들 여지는 털끝만도 안 보이는데 어쩌란 말인가. 배우나 가수는 속된말로 폼나보이니까 하는 것 아닌가? 성공확률은 터무니 없이 낮지만 성공에 대한 보상이 확실하니까 도전하는 것 아닌가. 연기가 좋고 노래가 너무 좋아서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렇게 좋다는 연기와 노래지만 무명일 땐 그 비참함마저 나중에 유명해질 때를 위해 참고 견디는 거 아닌가. 예전에 방송사에서 월급받고 배우들이 연기할 때도 지금처럼 장동건, 김태희가 되기 위해 떼거지로 오디션에 몰려들었을까. 우리나라처럼 한방신화를 기대하는 풍토에선 저자의 제안이 썩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역전 드라마를 드라마 같은 방송환경에 실연하고 그것의 실현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기꺼이 연기와 노래에 도전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단순한 연기와 노래에의 재능 및 열정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유명인이 되어 돈도 벌고 사랑도 받는다는 욕망에는 근본적으로 한방에 인생을 뒤집겠다는 성공야망이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다. 연예계는 그래도 학벌과 엘리트 시스템에서 자유롭고 변수가 많이 따르기에.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치열하다. 이긴 사람이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다가지기 때문에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배우나 가수들이 성공하거나 유명해져도 똑같이 돈을 받고 대우도 비슷하다면 굳이 스타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도 언젠가는, 하는 신화는 한류스타 배용준이나 소녀시대의 로망이 절정일때 더 극대화되는 장치이고 그 때문에 재능은 있지만 여타 다른 이유로 밥을 굶게 되는 도전자들이 넘치게 되는 분야가 아닐까. 도전할수록 실패하는 분야, 그곳이 연예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에선 이런 전복적 희망만이 유일한 자산인 지원자들을 잘 걸러내고 그 열정을 다른 곳으로 전도하는 기회도 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예인이 되겠다고 하는 도전자들은 설사 유명해진 후라도 보통사람보다 몇 배 더 세간의 관심과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당하겠다는 의지가 사실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망보다 앞서야지만 연예생태계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다고 본다. 예전에 처리된 사안이라도 재수없으면 미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한방에 내리막길을 걸을지 모르는 곳이 그곳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오랜 정상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실제 상처와 비난보다도 그 상처와 비난을 지혜롭게 잘 견디는 의지에 달려있다고 여긴다. 상처에 대한 내성은 절망에의 노출빈도가 아닐까. 어쩌면 삼진아웃을 많이 당한 선수가 홈런을 가장 잘치듯 많이 떨어지고 실패해 본 사람이 결국 최정상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이 책에서 어떠한 암울한 환경을 고발하였다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자, 실패해도 또 멈추지 않는자, 그 사람만이 문화생태계를 진화시킬 주역이 되지 않을까 싶어진다.

   그런 면에서 어제 일어난 예리밴드의 슈스케 탈퇴는 아쉽고 안타깝다. 슈스케의 편집방식이 잔인하고 자극적이라는 건 초등생도 다 아는 사실이다. 슈퍼스타 K는 공중파 오디션 프로들의 도전을 받으면서 자신들이 가진 환경속에서 장점을 찾아 그것을 차별화하기 위해 악마적 편집이라는 무리수 자체를 차별화로 내세운 프로그램이었다. 슈스케는 참가들을 위한 방송도 되지만 무엇보다 그 과정을 즐기는 시청자들의 방송도 되는 것이다. 슈스케측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참가자들은 거두절미하고 이기적인 인물로 편집하는 방향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이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제작진은 서로 이질적인 참가자들간의 화합과 협연 과정을 엿보는 것이고 그런 말도 안되는 장애를 이기고 끝내 양보하고도 성취를 이뤄내는 울랄라 밴드 같은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시적으로 회자되는 세간의 잡소리에 휘둘려 갑자기 자신들의 꿈을 버리고 명예를 찾겠다는 행동은 당황스러웠다. 시청자는 일등이 되면 그 모든 걸 잊는다. 내 생각에 예리밴드의 리더는 지금 당장 헤이즈의 탈락에 가해자가 된 듯한 비난과는 달리 그러한 소신있는 주장, 자기밴드의 색깔을 잃지 않겠다는 고집이야말로 진정한 아티스트의 예술성이라 칭찬받을 기회가 반드시 오리라 생각한다. 자기 목소리, 자기 색깔이 없는 친구는 그냥 모창이나 하고 말 것이지 뭐하러 가수되고 밴드를 해야 할 것인가. 음악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음악에 이기적이지 않는 것이 이상한 태도이고 대중은 자기음악에 이기적인 것을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일인자는 그러한 과정상의 비난과 상처, 그 악마적인 모든 것에 일일이 대응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리밴드의 돌발적 탈퇴로 슈스케의 편집방향에 공개적인 비난이 가해졌고 시청률위주의 방송에 경종을 울리는 효과는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세간의 반짝하는 반응에 너무나 빨리 반응한 것이 아닌지 아쉽다. 물론, 지금같은 유명세만으로도 이미 예리밴드는 얻을 것 이상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새삼 방송의 속성을 이유로 자신들의 명예를 찾겠다한 행보는 어짜피 언더에서 주류로 진출하고자 했던 본인들의 최초 의지를 기만하는 행동은 아니었을지.  

 

 <슈퍼스타 K3 지난 16일 방송분 -예리밴드 리더  한승오와 헤이즈 멤버간 대화 中에서>

 

출판, 영화는 아사(餓死)와의 싸움


   그밖에 저자가 지적하는 출판계는 솔직히 전하려고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는 잘 파악이 안되었다. 안 그래도 프레시안의 서평에는 출판계의 현실과 이상 사이를 ‘곡예하듯 넘나든다’는 평이 있었는데 내가 가장 의아한 건 방송, 영화, 음악, 스포츠처럼 과연 출판계에도 진입하려는 사람이 많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시장대비 실제 진출의지를 가진 사람보다는 잠재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분야가 아닐까 해서다. 또 하나 사회과학 분야의 저자인 우석훈은 지난 십년간 사회과학 분야의 저서가 가장 큰 몰락의 과정을 겪었다며 5000권 정도를 팔면 이른바 ‘고종석급’이고 1만부, 2-3만부가 넘어가면 신의 영역인 ‘장하준급’, ‘박경철 급’이라 언급했다. 내가 이 책을 받았을 때 이 책은 이미 2쇄 본이었다. 그렇담 저자 역시 고종석급 이상은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미 네임 벨류를 가진 저자가 자신은 상관없는 듯 같은 분야의 저자를 급으로 나누어 언급하는 게 보기 편하진 않았다. 인상깊었던 사실 중 하나는 사회과학 서적은 정치적 입장이 좌파인지, 우파인지 명료하지 않으면 어느 편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인데 굳이 우파는 자존심구겨가며 시장으로 들어와 떠들어댈 이유가 없기 때문에 진보, 좌파를 표방하는 저자의 책들만 나오고 또 관심을 받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굳이 이 (정도의)책이 좌파스럽다 여기지 않은 나로선 과연 이 책이 위치하는 좌표가 어느 지점일까를 억지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우파일 거면 이쪽 분야 책은 안 쓰는 게 좋다는 말로도 들려 역시 기분 좋지는 않았다. 저자의 결론은 금서에 도전하는 정신이 곧 사회과학 서적을 쓰겠다는 의지라 했는데 이 책에 의하면 금서는 우파서적이 되는 것이 아닌가. 데이터를 넘어서는 저자만의 통찰력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나는 진보, 좌파가 대세인 현실에서 우파일수록 사회과학에 도전해야 한다고 믿는다. 저자는 ‘책방소년’ 출신으로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 동네서점이 사라지는 것이 곧 감성적 도시기반 시설이 없어진다는 뜻과도 같다고 아쉬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알라딘이 중고서점을 시내 한복판에 개장한 것은 고무적인 행보라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저자도 출판계와 관련된 핵심인사라 그런지 다른 분야보다 솔직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같은 출판계의 인사들이 볼 때는 위선이라 생각한 부분을 혹평한 것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도 갈팡질팡한 채로 그러니까 우파인지, 좌파인지 명확히 해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의 전공분야인 책에 대해 말할 땐.

   그런가하면 이 책에서 내가 문화소비자로서 가장 심각하게 위기를 인식하고 공감한 것은 영화부분이었다. 얼마 전 <디워>를 제작한 심형래 감독의 제작사가 부도가 났다는 소식과 겹쳐지면서 스크린 쿼터제 폐지로 인한 우리 영화시장의 몰락이 멕시코나 브라질일만 같지는 않았다. 지난 추석때 지인들은 부담없이 웃고 즐기기 위해 <가문의 영광 4-가문의 수난>같은 코미디 영화를 택하였다 들었다. 누가봐도 작품성으로 보았을 때 턱없이 모자랐지만 그같은 작품성은 다른데서 얼마든지 채울 수 있으므로 굳이 가족끼리 보는 영화에까지 같은 기준을 적용하긴 그랬다는 뜻이다. <괴물>이후 한국영화는 제작측이나 관객측이나 전반적인 슬럼프를 맞았다는 생각이다. 뚜렷한 이유도 모르겠고 사람들은 예전만큼 영화 한편에 큰 기대도 하지 않는다. <친절한 금자씨>처럼 감독, 연출, 결말에 대한 찬반 논쟁도 줄었다. 좋아도 크게 감동하지 않고 나빠도 크게 욕하지 않는 것. 이것도 비슷한 이유일지는 모르겠는데 칸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타고 몇몇 감독이 수상을 한 이후로는 국제적 영화 실적에 정점을 찍었다 생각하는지 더 이상 서로들 노력을 하려고 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대중적 관람욕구가 대형 뮤지컬이나 비싼 콘서트로 옮아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저자는 영화를 교육적 대안으로 풀어보자는 의견을 비쳤는데 이 책에서 가장 신선하게 다가왔다. 협업을 바탕으로 한 영화제작과정을 학교교육에 도입하고 예술성, 여가성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지금의 인력은 최대로 활용하고 또 미래 인력 생성에도 기여한다는 정책은 가장 현실적으로 보였다. 이는 상업영화말고도 다큐, 애니메이션등의 영상제작의 다양성에도 고무적인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올 초에 장래가 촉망되는 한 여성 시나리오 작가가 젊은 나이에 굶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스탭으로 밥벌어 먹고 살기는 거의 불가능한 현실과 작가들의 복지문제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비단 영화판의 시나리오 작가뿐만이 아닌 대부분 글로 생계를 유지하는 무명작가들은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을 살고 있을 터이다. 영화판에서는 아예 기나긴 거지같은 조연출 생활을 거치지 않고서는 감독으로서 큰소리 치기 힘든 분위기가 팽배하다. 문학도 굶어 죽기 직전까지 고생하지 않으면 진정한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부를 얻게 되면 창작보다는 명성에 의해 부수적인 수입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수 있다고 여기며 대중은 돈 좀 만진 작가들에겐 더 이상 피같은 작품을 기대하진 않는다. 무명시절, 습작시절, 연습생일 때 죽도록 정말 딱 죽기 직전까지만 피나도록 고생하지 않고서는 아니 이제 더 이상 했다간 죽을 것 같은, 그러한 시간들을 거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도 없고 혹시 성공했다 하더라도 대중은 그런 성공엔 감동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분야는 먹고 살 생각으로 덤벼들면 죽고, 죽고 살, 아니 죽어도 좋을 생각으로 끝까지 버티지 않으면 진짜 살아남기 죽기보다 어려운 곳이라는 결론이다.


음악, 스포츠는 '뽀다구'와의 싸움


   저자는 책은 그래도 밀리언셀러가 나오는데 더 이상 음반을 사지 않는 것이 우리의 기억과 추억의 동반 상실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CD, LP시장을 구매체로 분류하며 MP3를 좇아 달려온 기술의 세월이 앨범을 통한 서사구조를 이해하는 감성을 짓밟았다는 분석이다. 그래도 특이한건 디지털 시대에도 끊임없이 오디오 음향기기 시장만은 죽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한다고 하는데 그 중심에 또 교회라는 핵심시장이 있다고 판단했다. 지금의 아이돌 그룹이 전성시대인 것은 어쩌면 한 시장 자체가 죽어가면서 막판 대 바겐세일을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며 ‘음향산업을 배후산업을 포함한 하나의 틀로 이해하지 못한’것이 큰 실수라 결론지었다.


도서관 짓느라 도서구입비가 없고 학교인프라 늘리느라 정작 학생들 급식 보조할 돈이 없고 오디오 콤포넌트 사느라 앨범 살 돈이 없다. 전부 토건시대의 ‘뽀다구‘ 문화의 잔재인 셈이다.       -291p


   음악분야에서도 이와같은 토건문화의 적용은 예외가 없었다. 으리으리한 오페라 하우스를 건축함과 동시에 예산이 없어 국립오페라 단원을 해고하는 아이러니가 곧 우리 문화산업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방송에서 본방 시청률이 본원상품이라면 텍스트에선 단행본이 영화에서는 극장관람객이 음악시장에선 음반이 본원상품이다. 저자는 문화산업에서 본원상품이 활력을 찾지 못하고 후방문화, 파생상품만 득세를 이루는 것은 장기적인 발전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가만보면 저자는 문화를 말하면서 바뀌어진 생활패턴과는 연계분석을 하지 못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제라도 중학생 아이들에게 한 달에 두장씩 CD를 사주라고 권유했는데 그게 사준다고 해서 한자리에 앉아 예전 우리처럼 우아하게 음악감상할 여건이 되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MP3를 가지고 있는데 빠른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똑같이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스마트폰은 즉시성을 MP3는 보관성의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나가수에서 바비킴이 ‘골목길’이라는 노래로 1등을 했다하자. 1등 발표 십분 후 벅스에선 실시간 1위로 바비킴이 리스트에 등장한다. 아이는 스마트폰에서 벅스 아이디를 통해 골목길을 다시 들어보고 나는 그 원곡인 신촌블루스의 골목길을 들어볼수 있다. 그 밑에는 같이 경연곡으로 등장한 박정운의 ‘오늘같은 밤이면’이나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도 물론 들을 수 있게 같이 떠있다. 그렇게 재감상을 한 후 정작 음원을 내려받는 건 리쌍의 7집 앨범이다. 몇주전 리쌍 7집이 통으로 1위에서 10위를 달린 적이 있는데 굳이 앨범이 아니더라도 완판이 가능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통다운의 이유는 가사의 연계성 때문이다. 더 이상 아이돌 노래의 가사는 아이들조차도 의미를 두지 않는다. 우리 때처럼 가사의 서정성에 눈물흘리는 시대가 아니라 지나가는 가사의 구체적, 현실적 한마디에 위로를 받는 것이 요즘 아이들의 현실인 것이다. 멜로디에 실은 가사가 아닌 랩에 실린 가사에 서사적 감동을 받는 것은 노래는 아름답다기 보다 지극히 일상이라는 뜻이다.) 즉, 학원가는 무료한 버스안에서 오며가며 듣겠다는 뜻이다. 앨범을 사지 않고서도 음원만으로 통다운을 받게 할 정도의 경쟁력은 그러니까 리쌍 정도의 서사력을 가져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스마트폰은 바로 노래 들으면서 가사를 확인할 수 있어 영어가사의 경우 큰 도움이 된다. 이 모든 게 한 달에 몇 천원이면 가능한데 CD를 구입하여 한자리에 앉아 오디오 기기의 재생을 하라는 건 조금 저자답지 않은 제안이 아닐까. 차라리 학생별 MP3 음원 이용실태를 조사해 바람직한 음원 활용방법, 음원을 이용한 파생상품, 이러한 것들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아닐까. 음악의 본원상품이 앨범이라는 것이 이제 시대에 맞지 않는 결론이라고 보며 본원상품의 파급력을 가진 음원시장에 대한 더 깊고 예리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스포츠의 본원상품은 올림픽이나 월드컵같은 국제행사가 아니고 일반인 체육이나 사회인 체육같은 생활체육이라 말한다. 사회치유활동으로서 스포츠가 활성화되는 것, 스포츠 네트워크가 보다 깊숙하고 넓어지는 사회가 선진사회이며 금메달 몇 개, 무슨 국제대회 유치 같은 실적위주의 스포츠 성과는 국민을 위한 체육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실적에 따른 스포츠 연금이 폐지되어야 하며 엘리트 체육식의 행보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선수도, 나라도, 국민도 서로 망하는 구조라 부연한다. 이것도 나는 4년마다 월드컵 특수병에 신음하는 대중의 환타지가 반사적으로 떠올라 저자가 부럽다는 유럽의 어느 변두리 마을 수영장에서 노인들이 자유롭게 수영하는 모습같은 건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적으로 스포츠보다는 건강을 위한 다이어트가 더 득세를 이루는 지금의 판세는 분명 유럽식이 아닌 미국식이 자명한데 누구나 악기하나쯤 연주할 수 있는 나라도 부럽지만 누구나 집근처에서 수영을 취미로 즐기는 노인들의 나라가 우리가 지향하는 스포츠 선진국의 로망이 되길 바래본다.


국민들이 살찌게 하고 다이어트 업체와 제약회사 그리고 영리병원이 돈 버는 미국모델과, 스포츠와 식품으로 국민들이 살찌지 않게 하고 대신 암처럼 많은 비용이 도는 질환에 국가가 거의 완벽하에 지원하는 유럽모델 가운데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 -358p




문화활동은 자기만족의 문제


   방송, 출판, 영화, 음악, 스포츠를 중심으로한 문화생태계속에서 각각의 본원상품을 추적해보고 지난 십년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앞으로 전체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어떤 문화정책이 시급한지 저자는 다양한 제안들을 내놓았다. 미처 몰랐던 이면의 진실도 알게 되었고 실현불가능해 보이는 대안,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의견도 있었다. 경제적 시각으로 문화 시장의 전체 흐름을 파악하고 해당 문화의 성장, 발전, 쇠퇴, 몰락의 추이를 관찰해 볼 수 있어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 책은 통계치를 소개하다보니 숫자의 경제, 규모의 경제를 말하는 책이기도 하다. 분명한건 문화에 지출하는 비용이 예전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그 욕구만은 더 증가한 것이 아닐까 싶다. 돈을 많이 지불했다고 꼭 문화생활에 만족을 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문화생활을 여유롭게 하고 있다는 모양새 자체가 삶의 안정감과 보상감을 제공해주는 것이지 방송, 영화, 책, 음악, 스포츠 상품에 내가 감동을 받고 그것을 마음껏 향유한 정도와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그런면에서 저자는 비용대비 만족도 변화도 제시했어야 한다고 본다. 또 사람들이 총지출에서 카메라와 애완동물을 사는 것에 더 많은 지출을 했다는 점도 내 시선을 끈다. 문화에 대한 필요성보다는 같은 시기 디지털 기기의 교체, 신규매체에 대한 지불이 지난 시절 우리를 더 유혹했다는 것 역시 저자가 말하는 뽀다구 문화와 일맥상통한다. 외로움을 달래려 애완동물을 구입했다는 것, 그 동물사진을 찍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도 2차적인 문화생활보다는 일차적인 개인적 본능이 더 중요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지금 심하게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는 상황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새롭고 첨단의 커뮤니케이션 기기들을 구입해 세상과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자신이 더 중요하고 자신의 삶만이 더 각별한 태도로 기계를 이용하고 있으며 그 상실감과 허전함은 정작 사람이 아닌 동물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다.

   그래서인지 새삼 이곳 서재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다 이런 책을 읽었다고 떠드는 행위 자체가 내겐 상당히 이차적인 문화 활동을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문화로서 본원적 상품이 책이라면 서재는 명실공히 파생상품이요, 후방문화이다. 책을 읽고 혼자서 가슴에 묻어두거나 혹은 연구나 업무적 방편으로만 책을 넘기는 사람은 절대 그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이 궁금하지가 않다. 책을 읽으면서 서재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TV가 보여주는 것들, 세상이 떠드는 이야기, 그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눈길이 가기 시작했고 포털뉴스나 실시간 검색에 반응을 하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트윗에 그럴싸한 문장들을 적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책꽂이에 꽂아만 두는 것과 그것을 읽었다고 굳이 글로 남기는 행위가 다른 것은 후자의 경우 필연적으로 사유 및 사고의 시간을 가져오는데 이 반복적인 행위가 자기도 모르는 통찰력이 되어 문화전반에 대해 서슴없이 떠들게 되는 자신만의 시각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책을 읽고 그러한 자신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남기는 사람들의 특성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관해 떠들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책이 유익하지 않았다 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책에 관심있는 분들은 대부분 문화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하에 이 책에 대해 같이 떠들 다른 분들을 만나고 싶다. 글쎄, 나는 문화로 밥 벌어 먹고 살기 힘들지는 모르겠으나 문화로 지겹게 수다떠는 건 자신있다. 나같이 문화에 참견하고 싶은 분들의 다르고 새로운 시각을 기다린다. 책을 읽고 또 그 의견을 나누고 공감하다 반대하다 그렇게 이 생태계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어쩌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문화생활의 가장 본원적 소비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나는 될수 있으면 문화로 쓰고 떠들며 살고 싶다. 그것이 먹고 사는 일이면 더 없이 좋겠지만. 죽고 살기가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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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9-20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당히 긴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근데 읽다보니 이 책이 안다루는 부분이 없군요. 방송, 영화, 출판, 음악 그리고 스포츠까지..글쎄요. 아마 자세히 다룰려고 하면, 책 한 권 가지고는 절대 모자르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잘 요약정리했을지 궁금하네요. 저는 사실 요즘 오디션 열풍이 썩 반갑지만은 않아요. 금요일 밤이던가요. 방송 3사 및 케이블에서 모두 오디션을 틀어대는데, 이게 뭐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하루 왠종일 경쟁하며 살고 있는데, 또 누군가가 경쟁하는 꼴을 봐야하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아무튼 그와 관련해서 하신 말씀은 공감이 갑니다. 그런 오디션 프로그램이 먹히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뭔가 한방을 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얘기겠지요. 단계를 밟는 루트를 결코 뚫기가 쉽지 않으니까. 아니 뭐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여지니까 말이죠.

지금의 영화계도 암울하다기 보다는 그저 사회를 잘 반영한 구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승자독식의 구조이고, 치열한 경쟁이 있고, 그 밑에서 허덕이는 스탭들이 있고, 개봉도 못하고 사라지는 영화들이 수두룩하지요. 물론 뭐 질이 떨어지니까 개봉을 못한다 그러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것을 도대체 누가 판단을 하나요. 그렇게 엉망으로 대접하다가, 얘가 좀 한다 싶으면, (자신들이 말하는 소위) 메이저 시장으로 데려가고, 한 편 잘 뽑아먹고, 안된다 싶으면 바로 버리고 그러는 거지요. 그러고는 정부에서는 무슨 컨텐츠 공모 1억원이니 어쩌니 한방주의로 가는거구요. 그 1억을 가져다가 지금 독립영화 재능있는 사람들에 쏟아부으면 훨씬 나을텐데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예전보다 어떤 측면에서는 조금 나아진 게 그모양이라는 게 또 문제가 아닐까요. 독립영화상영관이다 뭐다 많이 생기고 예전보다 여러 경로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루트가 늘어난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만, 아직까지 하는 행태들을 보면, 참 이해가 안되는 것들이 많아요. 글쎄요. 저도 어지간히 MB정부 안좋아하기는 합니다만, 이번 정부의 어떤 문화에 대한 정책들만이 그렇게 문제라고는 얘기를 못 하겠습니다. 잘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많은 문제들이 예전부터 이어져왔던 것들이라는 생각이예요. 그걸 이 정부 탓으로만 돌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석훈 씨가 토건 어쩌구 하는 것은 쌩뚱맞은 느낌이네요. 그걸 꼭 토건이라고 불러야하나? ㅋ)

맥거핀 2011-09-21 16:30   좋아요 0 | URL
우석훈 저자는 뭐 4대강 사업에도 계속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왔으니, 아마도 MB정부의 토건이 여러모로 마음에 걸리는 모양압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자의 성향도 그렇고, 책의 어떤 내용도 그렇고, 정치적 스탠스가 상당히 담겨 있는 책으로 보입니다(물론 이것은 읽지 않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로지 리뷰만 봤을 때는요). 책 제목만 봐서는 문화산업에 관심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집어들 것으로 생각이 되기도 하는데, 그 사람들이 읽을 때는 조금 쌩뚱맞다고 여겨지는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여겨지기도 합니다.

MB정부가 조금 더 망가뜨린 것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겠지요. 아마도 이 정부가 문화 쪽에 가지고 있는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이야기하자면, 일단 돈 자체를 안쓴다는 점과 문화에 앉혀놓은 사람들이 대부분이 이쪽에 발을 걸치고 있긴 하되, 대부분 상당히 정치적이기만한(그리고 때로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이겠지요. 뭐 돈을 아예 안쓴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정부의 문화에서 돈쓰는 방식은 그런 거 같아요. 일단은 내버려 둔 다음에, 자신들의 말대로 하면 치열한 경쟁을 거쳐서 살아남은 자원들에게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 즉 땅은 황폐하게 내버려둔채, 운 좋게 싹이 몇 개 나면은 그 중 튼튼한 놈을 골라서 물을 주겠다는 식(그리고 좀 튼튼해질 거 같아도 싹이 좀 왼쪽으로 큰다 싶으면 밟아버리고..ㅋ). 그런데 일단은 메마른 땅에 날지 안날지 모르지만, 일단 물을 좀 뿌려야 되는 것 아닐까요. 물도 주고 햇빛도 들추고 그래야 뭔가 싹들이 땅을 뚫고 나아갈 희망이라도 가지지요. 근데 또 한편으로는 땅이 황폐화된 것도 하루이틀 이야기는 아니다..뭐 그런 이야기지요.

글쎄요. 올려주신 내용만 봐서는 문화로 먹고 살려면 각오 단단히 해야한다. 왠만하면 그런 생각은 안하는 게 좋지 않나 그런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네요.^^;

아이리시스 2011-09-21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보니까 짬뽕 생각나네요! 저는 잘 안 먹지만.. 이 책은 뭐랄까, 저자랑 좀 어울리지 않네요. 소재들은 정말 혹하네요. 한사람님 리뷰로 저는 읽은 것 같아요.^-^

2011-09-21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르트르와 까뮈]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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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사람들

   이 책은 재미난 책은 아니지만 의외로 재미나게 읽었다. 이 책을 만나기 전에 내가 그들의 작품을 읽은 것이라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과 까뮈의 <이방인>정도에 불과했다. 이 단편적인 지식과 어디나 천편일률적인 인물 소개를 통해 내 머릿속에 저장된 그들은 그냥 위대한 프랑스 지성인중 두 사람 정도였달까.(한명이 철학자고 한명은 예술가라는 구분없이) 두 사람이 친구였고 서로의 사상 때문에 절교를 했는지 그들 사이에 보부아르라는 증인이 있었는지 그런 사실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프랑스 어느 시기 아니 세계사의 어떤 흐름속에서 어떤 개인적 의도로 작품을 집필했는지 해당 작품이 상대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 알지도 못한 채(알려고도 않은 채) 그동안 나는 그래도 그들의 작품을 읽어는 봤다는 알량한 독서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새삼 사르트르는 왜 그러한 변명을 하면서 지식인을 ‘정의’ 내리려 했는지 까뮈의 뫼르소는 왜 그러한 ‘살인’을 해야 했는지 다시 질문하며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책에 의하면 서로는 서로를 만난이후 평생 동안 아니 죽고 나서도 서로의 작품을 벗어나 본적은 없는 듯하다. 이것은 서로가 한 말과 글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한 운명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서로의 개별적인 작품들은 상대의 전체 중 부분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독자적으로 완성된 작가들이 아니었다고 본다. 이런 운명적인 관계가 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두 사람의 치열했던 인생을 때론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때론 망원경으로 조망하며 독자들 앞에 흥미진진하게 펼쳐보였다. 번역도 자연스럽게 다가왔고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저자의 사유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치열하고 정직하게 배치되는 느낌을 받았다. 또 미처 읽어보지 못한 두 사람의 작품도 골고루 소개하며 때론 집중적으로 반복, 인용하면서 독자와 눈높이를 맞추는 정성도 대단했다. 결국 숨은 에피소드, 두 사람의 지인, 당시 잡지와 기사, 언론과 대중의 반응, 정치 및 국제 변화등이 다양하게 증언의 역할을 하며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한편을 기꺼이 만들어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 영화 한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엿보는 듯한 추적과 추리, 추론의 재미가 아닐까. 사색과 사유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바이다.



1. ‘관찰자’로서 ‘개입자’ 되기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장 거슬렸던 건 사르트르도 까뮈도 아닌 보부아르였다. 보부아르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밀접하게 그들을 겪은 지인으로 등장한다. 때론 인터뷰로 혹은 자신의 문학으로 그녀는 그들을 회상하는데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나는 보부아르가 여성이었고 사르트르와 연인관계였던 것이 궁극에 객관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조건임을 부연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그려본 상황은 같은 여성으로서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세 사람간의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가장 측근에 오래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도 유명한 작가였기 때문에 그녀의 견해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의미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저자 역시 그때 같은 장소에 있었던 보부아르는, 하고 자주 증언의 기회를 부여, 삽입하곤 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모종의 불쾌감이 자주 들었고 보부아르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저자의 말처럼 ‘제 3의 극’으로서 관계에 연루된 자로서 적어도 이번 영화에선 주조연이 확실했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몇 년 동안 두 명의 남성과 공동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둘 다 각각 그 분야의 최고였다. 한명은 기획자로서 지적인 외모를 가졌고 한명은 디자이너로서 터프한 외모를 지녔다. 그리고 그 두 명은 나와 작업을 하기 이전에 이미 동료이기도 했다. 동창이거나 사는 동네, 전공때문이 아니라 업무상의 필요에 의해 친구가 된 경우였다. 나는 디자인을 공부한 기획자였다. 내 역할은 기획의 언어를 시각적으로 풀고 디자인의 의미를 다시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내가 없어도 결과물을 낼 수 있었지만 프로젝트가 커지자 더 큰 성공을 위해 나는 계획적으로 투입된 사람이었다. 기획자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한국의 일류대를 졸업했고 디자이너는 어렵게 유학을 다녀온 해외파였다. 둘 다 기혼자였기 때문에 나는 이성적(異性的)으로도 자유로왔고 한참 선배들이라 그들 양쪽으로부터 배우고자하는 의지가 충만한 시절이었다. 우리 팀은 바깥에서 보기에 완벽해보였다.

   궁극에 추구하는 작품 성향은 같았지만 세분화하여 나눠보면 어떨 땐 기획이 더 좋은 평판을 얻기도 하고 어떨 땐 디자인이 뛰어나 당선된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두 사람간 자존심 문제였는데 세간의 평판에 따라 그들은 점점 어색한 사이가 되어갔다. 원래 사내에서 브리핑을 도맡아하던 냉철한 기획자는 처음엔 새로운 감성이 돋보이는 디자이너를 앞장서서 소개하고 각종 모임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성적인 매력과 섹시한 외모를 지닌 새로운 디자이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는 가끔 돌발적인 행동을 하거나 충동적인 감성으로 주위를 놀래켰지만 그러한 기질적 성향마저도 창의적인 태도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기획자는 좀처럼 일인자의 자리를 디자이너에게 내주는 법이 없었고 일의 성과를 자신의 공으로 돌리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다. 결국 인맥이 풍부했고 사회성이 뛰어났던 기획자는 업계에서 디자이너를 소외시키는데 성공했고 두 사람은 공모에서 적으로 자주 만나는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기획자, 디자이너 모두 개인회사를 오픈하여 실력있는 업체로 인정받았지만 두 사람은 화해하지 못했고 특히 디자이너는 (업계와 타협하지 않는)독자적인 행보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는 한국의 주류 디자인 인맥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실수나 오류를 감싸안는 디자이너들도 많지 않았다. 나는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낭만적으로 보인 디자이너에게 더 끌렸지만 업무이해 관계상 디자이너의 편을 들어주진 못했다. 나도 결국은 기획자였고 내가 디자인으로 밥벌어 먹고 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디자이너의 곁에선 영원한 보조나 이인자가 될 것이라는 계산적인 생각이 많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나도 그를 외면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개인적인 친분은 유지했기로 그 디자이너의 생각과 상황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많이 도와줄 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겁하게 침묵한 적이 많았다. 내 쪽의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은근히 그의 작품을 비난의 도구로 활용한 적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당선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마음 한 켠에 이렇듯 오래된 부채감은 오래도록 나를 분열스럽게 만들었다. 우리들 기획자의 마음속에 그는 차별화된 능력과 타고난 재능으로 보기 드문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가던 최고의 디자이너였지만 이미 그가 화려하게 재기하기 힘들 시점에서야 그의 전설을 가십거리처럼 회자하곤 했다. 학벌과 지연중심의 한국사회에서 그는 일인자가 되기 힘들었고 그를 견제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비타협적인 독선, 다혈질적인 성격, 예술적 고집을 이유로 들며 그를 고립시켰다.

   내가 이 책을 재미나게 읽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내 개인적인 경험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대도 다르고 분야와 레벨도 다르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감히 회사시절 내 위치를 사르트르와 까뮈의 우정과 투쟁을 지켜본 보부아르의 위치와 견줄 순 없겠지만 나는 우리네 인간관계에서의 역학적 흐름을 바탕으로 몇몇 그녀의 인터뷰에서 위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필히 까뮈에게서 더 남성적인 매력을 강하게 느꼈다고 판단된다.(그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으리라고 본다) 까뮈는 사르트르보다 보부아르에게 마음을 자주 털어 놓았고 보부아르 역시 (사르트르 부재시)그런 카뮈를 받아주었을 터이다. 사르트르는 작은 키, 사팔뜨기라는 핸디캡으로 외모상으로 카뮈보다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쪽이었다.(나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부아르는 각종 모임에서 카뮈와 사르트르가 여자를 사이에 둔 감정적이고 성적인 긴장이 종종 있었다고도 언급했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위대한 사상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도 결국은 그 이전에 여성에 어필하는 남성이었다. 그들은 사상과 작품, 정치뿐 아니라 남성성으로서도 내외적으로 경쟁하는 위치는 아니었을까. 경쟁구도 속에서 보부아르는 머리로는 사르트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르트르와 카뮈를 알고 있고 친하다는 것이 자신의 경쟁력이 되는 순간도 있었을 터이다. 때론 카뮈에 대한 죄책감으로 때론 사르트르에 대한 미안함으로 대외적 칭찬과 비난을 적절히 구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사르트르의 대리인이 되어 글을 쓴 적도 있었고 카뮈의 상담자가 되어 위로를 한 적도 있었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보부아르는 그들 사이의 단순관찰자가 아니라 ‘제 3의 극’으로서 그들 관계에 자발적, 타의적으로 개입했다. 나는 그래서 그녀의 모든 공표된 객관이 결코 그녀 개인의 모든 주관을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백프로 솔직하지 못했다고(할 수 없었다고) 여긴다. 내가 시나리오 작가라면 필히 보부아르를 그들 사이 중재가 아닌 긴장을 유발하는 주역으로 배치할 것이다. 그리고 항상 만약, 이 상황에서 보부아르가 없었다면 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의 경우의 수를 만들어 보았을 것이다.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우정에 이미 오래전부터 개입되있었던 여성의 존재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사건 관찰자가 아닌 확실한 개입자 혹은 공모자, 방관자, 조정자로서 이 영화속 주조연이 확실하다고 본다. 이 책을 읽은 덕에 이렇듯 독자의 위치에서 그들 사이 인간관계를 추론해보고 또 내 맘대로 배치시켜보는 건 행운이었다.

   그녀의 많은 증언가운데 기억나는 한마디를 옮겨본다.


“ 나는 그(카뮈)에게서 그가 자신의 생과 쾌락에 몰두하는 열광적이고도 굶주린 태도를 좋아했다. ”     -114p


   나는 그녀마저 사르트르의 우월감의 테두리에 포함되려고 했던 심리가 거울을 보듯 당황스러워 슬픈 기분마저 들었다. 보부아르는 여튼 카뮈에 대해 호불호를 자주 언급했는데 나는 그녀가 말하는 방식이 기분좋지는 않았다. ‘열광적이고도 굶주린 태도’는 나로선 상당히 모멸감을 느끼는 표현이다. 보부아르는 왜 그 좋다는 태도로 인해 카뮈가 돌발행동을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였을까. 그것은 자신들은 열광적이지도 그래서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혹 카뮈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기 충분했지만 진정으로 카뮈를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2.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기

   책을 덮고 두 사람으로부터 반사적으로 떠오른 감정은 확연했다. 사르트르의 우월감과 카뮈의 순수함. 적어도 사르트르는 카뮈가 자신에게 대응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치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카뮈를 처음만난 날부터 (자신이 가지지 못한)그의 재능에 이끌렸지만 항상 자신이 더 우월한 위치에서 그를 평가하고 재단했다. 이는 사르트르가 이미 유명인사로서 연장자였고 출신성분도 중산층 이상의 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이었기에 알제리 출신 청소부의 아들이었던 카뮈를 자연스럽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가 될 수 있었을 터이다. 카뮈역시 자존심 때문에 그의 위성으로서 무리에 속하길 원하지 않았고 사르트르 다음의 이인자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외려 정치활동은 카뮈가 더 선배격이었고 레지스탕스 대원, 비중있는 일간지 편집장으로서 카뮈는 얼마든지 자신을 차별화시킬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공격하는 양상을 들여다보면 사르트르가 카뮈에 더 적의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카뮈는 배신과 상처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것이 사르트르가 카뮈와 경쟁하는 위치에 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까뮈는 자신이 서른 살이고 사르트르가 서른 여덟살 때 첫 만남에서 이미 비평적 명료함에선 한수 위인 사르트르가 자신보다 훨씬 지적이라 판단했지만 사르트르는 자신이 부족했던 본능적인 창조성, 독립심, 용기를 지닌 카뮈를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자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서로가 상대를 평가하는 그 지점이 애초부터 영원한 친구로 이어지기 어려웠던 불씨라는 생각이다. (만약, 존경하는 선후배 사이로 남게 된다면 모를까) 우정은 사랑과 존경과 달라 아무리 분야가 다르고 나이차이가 나도 서로 동격임을 인정하는 배경이 튼실해야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지겹게도 자신이 평가한 지점으로만 카뮈를 위치시키고 싶어 했고 카뮈는 끈질기게 그 위치를 거부, 외면했다. 서로를 비난할 때도 카뮈는 사르트르를 포함한 실존주의자들의 성향을 지적하는 것에서 시작한 반면 사르트르는 카뮈 개인의 역량에 집중적인 공격을 한다. 카뮈가 언급했듯이 사르트르는 자신들의 유죄성을 무마하려 상대의 유죄를 발본하여 비난하는 위선적 기질이 다분했다.(그런데 이건 경지에 오른 지식인의 보편적 특성아닐까) 담론을 창출하고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논쟁으로 승리를 이끄는 것은 전후 프랑스 사회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층으로서 커다란 능력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보여준 정치적 저널리즘의 양상들로부터 카뮈는 애초부터 사르트르 개인을 공격할 마음은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자신의 견해에 저항하는 카뮈 개인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당시 역사적 상황 때문에 묻지도 않은 질문에 상대가 답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다시 한쪽에서 화답을 해야 했던 상호적 관계였다. 이 관계에서 카뮈는 다소 방어적으로 보였고 사르트르는 무릇 공격적으로 보였던 것 역시 두 사람이 서로를 평가하는 위치가 달랐던 것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이것은 대부분 아주 냉철한 문장 속에서도 ‘반공산주의자는 개다’같은 한마디로 급진적인 색깔을 감추지 않는 사르트르의 타고난 신분적 우월감때문이 아닐까.(누가 감히 사르트르에게 인간이 아닌 신분으로서의 '개'를 빗댈 수 있겠는가) 서로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작품에 화답하면서 상대 저서를 통해 논쟁하는 방식은 직접적으로 상처주지 않는 고품격의 매너가 아니라 같은 위치에 이름을 올려놓기 싫은 지식인 기득권층의 세련된 위선은 아니었을지.

   
 
불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사르트르 추도사 中에서
 
   

   카뮈는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카뮈 사후 20여년 동안 사르트르는 카뮈에 대해 발언할 자의적, 타의적 기회가 부여된다. 만약 사르트르가 먼저 죽고 카뮈가 그의 추도사를 작성했다면 저렇게 말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함께’ 살아가는 ‘다른’ 방식은 서로가 동의하에 마련한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어느 한쪽이 주도한 방식이라 하기도 난감하지만 분명한 건 두 사람이 주체가 되어 삶의 방식을 각자 인식하면서 서로와 같이 나간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저 결과적으로 그 방식은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고 해야 할 듯하다. 사르트르의 추도사는 틀린 말은 아니나 사르트르가 해야 할 말로는 적당해보이지 않았고 그건 세상이 그들에게 해야 할 말로 보였다. 나는 그 위치가 곧 사르트르가 카뮈에게 상정한 관계상의 우월적 관점이라 생각한다.

   가끔 이곳 서재에서도 어떤 블로거가 글을 올리면 마치 그에 화답하듯 반대나 찬성의 글이 올라오고 어떤 블로거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사유를 확장, 정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책의 리뷰가 올라오면 마치 그 리뷰에 답하듯 전혀 다른 평의 리뷰가 올라오기도 한다. 때론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반대로 공감의 시너지가 확산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서재활동이라는 것이 혼자서 사고하고 오롯한 자기 생각만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들 모두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받고 있는 관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도 분명 사르트르적, 카뮈적, 보부아르적인 ‘다른’ 태도가 공존한다고 느낀다. 위선에 강인한 사람, 위선에 상처받는 사람, 위선에 중립적인 사람...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어느 지성인에 가까울까를 생각했다. 저자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한계를 뛰어넘고 두 사람의 세계관을 복합시킨 새로운 유형의 인물을 기다린다 했지만 나는 어쩐지 사르트르적인 카뮈보다는 카뮈적인 사르트르에 더 끌린다. 그래서 우울하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진정한 지식인은 도덕주의자도 이상주의자도 아니라 말했다.(이말도 결국 카뮈를 겨냥한 듯 보였지만) 지식인의 임무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모순속에 사는 것이며 자신을 만들어온 근원적 상황과 그 형성과정에 의해 부단히 형성되는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고 충고한다. 까뮈는 그런 지식인들이 결국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자기비판을 하고 자기 위선을 감추기 위해 상대에게 죄를 덧씌우는 것이 모순이라 지적했다. 결국 두 사람의 충고를 종합하면 자기 발전을 위한 순수한 의도의 자기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모습이 그래도 카뮈적인 사르트르에 가까운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3. ‘반항’이냐 ‘혁명’이냐

   또 하나 보부아르와 함께 이 책의 조연으로 인상깊었던 인물은 메를로 퐁티였다. 메를로 퐁티는 사르트르와 함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사용에 우호적인 반면 카뮈는 공산주의를 무조건적인 살인자 집단으로 보고 폭력에 엄중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메를로 퐁티는 ‘공산주의가 자행하는 폭력을 자본주의가 행사하는 폭력을 종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한 바 있다. 이에 동의한 사르트르는 폭력적, 억압적이지 않고서는 이미 폭력과 억압이 난무하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메를로 퐁띠는 이미 우리가 육화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우리의 운명’이라 설파한 철학자였다.(나는 리뷰에 이 문구를 몇 번이나 인용했던가) 우리가 생명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일임을 주장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왜 이 폭력 메카니즘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면서 실력행사를 한 것일까. 사르트르가 노동자계급에게 방향을 급선회한 것은 문학의 운명이 노동자계급과 연결되어 있다는 자기 철학의 근본적 주제와 맥을 같이한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부르주아 출신이면서 평생 그 계급에 저항하는 모순에 괴로워했다) 그는 자기철학인 실존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 통합하고자 폭력과 혁명을 결합시키면서 서구에 대항하고자 했다. 하여 부르주아의 폭력에 대응하는 노동자의 폭력은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행위로 간주한 것이다. 이것이 새삼 대단해 보인 것은 태생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철학을 정치행동과 일치시키기 위해 나아가 자기이론을 역사에 실행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자기 삶을 불살랐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사르트르 개인의 사상적 변화를 넘어 자유와 사회주의를 연결시키는 개념으로서 바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 대응하는 당시 프랑스의 답변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뮈는 마르크스주의를 살인과 동일시하여 살인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사르트르를 이해하지 못했고 급기야 공산주의를 ‘문명의 질병’, ‘현대의 광기’로 규정짓게 된다. 카뮈는 미,소 두 진영사이의 제 3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우파와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솔직히 당시 프랑스에서 카뮈가 더 혁명적 인사가 될 줄 알았던 독자로선 의아한 행보이긴 했다. 여기서 나는 정치활동 이전의 카뮈의 예술적 기질을 떠올려 본다. 사르트르가 현실적, 실리적이었다면 카뮈는 이상적, 도덕적이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출신의 사르트르와 알제리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카뮈는 각자 태생적인 자기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한사람은 현실과의 타협을 한사람은 보다 근원적인 가치를 지향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카뮈는 사르트르가 있는 한 자신을 철학자가 아닌 예술가로 칭해지길 바랐는데 나는 이 차이가 곧 자신이 자신을 바라는 궁극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이는 곧 내게 있어 ‘혁명’과 ‘반항’의 차이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된 듯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궁금하던 책은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었다. 그런데 또 다행히도 저자는 <반항적 인간>에 대해 많이도 친절했다. 카뮈가 말하는 ‘반항’은 원초적이고 존중과 연대성을 전제로 하면서 승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혁명’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살인같은 극단적인 방법도 주저하지 않는 건강하지 못한 태도라 말한다. 즉, ‘반항’에는 그 어떠한 폭력적 함의도 소거한 채로 인간적인 소박한 기원을 담고 있을 뿐 인 것이다. ‘반항’은 카뮈가 공산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활용한 개념이며 사르트르가 ‘혁명가’라면 카뮈는 ‘반항인’이라 볼 수 있는 중요한 태도 변수이다. 카뮈가 말하는 ‘혁명가’는 추상적, 권위적, 종말론적이고 교양이 풍부한 서구적 인간을 상징하며 사르트르가 말하는 ‘반항인’은 자기기만과 부조리를 인정하지 않는 나약한 지식인이다. 프랑스와 친공산 좌파지식인은 <반항적 인간>에 반항했고 우파인 미, 영 언론은 대체로 옹호했다. 카뮈가 용감했던 것은 바로 우파로부터 응원을 좌파로부터 조롱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저자는 사르트르가 천재성을 지녔음에도 정작 혼자서 정치폭풍을 감당해내는 이러한 배짱과 용기가 없었다고 꼬집는다. 내 생각에 카뮈의 반항은 ‘예술’이고 사르트르의 혁명은 ‘정치’였다고 본다.

   <반항적 인간>은 철학, 사상, 문학, 미학, 정치에 대해 사르트르에 화답한 저서이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이 도전에 절대로 침묵하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자신보다 급 떨어지는 동료에게 <반항적 인간>의 서평을 쓰게 하여 카뮈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반항적 인간>을 통해 자신을 무시한 카뮈를 교묘하게 공격하기 시작했고 서로간 서평을 통한 논쟁은 일 년 이상 이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슴없이 전개되는 사르트르의 카뮈를 향한 신랄한 비판들은 독자입장에서도 충분히 모욕적이었다. 사르트르는 지배계급의 사주를 받아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우파적인)을 사이비 지식인이라 말했는데 그는 1930년대 프랑스 소설가 니장(Nizan) 의 ‘집 지키는 개’를 인용하며 그들을 한껏 비하한 적이 있다. 자기 모순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층을 ‘개’에 비유한 사르트르가 카뮈가 포함된 반공산주의자를 ‘개’의 집단으로 격하시킨 발언은 카뮈가 말하는 반항을 패배적인 노예기질로 판정하며 현실 부적격자로 위치시킨 것은 아닐까. 이 ‘개’같은 발언은 프랑스 출신이 아닌 식민지 알제리 출신인 카뮈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사르트르의 공개모욕은 누가보아도 절교선언이 되었을 터이다. 이는 ‘당신은 역사의 방향으로 의자를 놓았군요’ 혹은 ‘자신들의 의자를 역사의 방향으로만 놓았던 비판자들’이라는 카뮈의 문학적 표현에 비하면 너무나 충격적이고 살인적이기까지 하다. 역사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까뮈를 깎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그런 식으로 정치할거면 앞으로 영영 이 사회에 적응하지 말라는(예술이나 하라는) 사형선고에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완벽한 사람들

   저자는 사르트르 연구자였지만 이 책은 다분 카뮈입장에서 충격, 불신, 배신감, 상처들에 더 공감하도록 유도한다. 나 역시 두 사람 중 카뮈에게 더 마음이 기울었다.(이 사실이 내게 알려준건, 그러므로 나는 사르트르에 가까운 인간이구나, 였다 ㅠ) 지방출신으로 출세한 카뮈가 특권지식인층에 비웃음을 사고 축출, 배반, 고립화, 은둔, 예술적 고갈로 이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밝혀내었기에. 카뮈주변엔 무조건 충실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사르트르 주변엔 카뮈 외에 친구가 없었다는 식으로 카뮈는 인간적으로 인간에 충실했고 사르트르는 비인간적으로 인간을 무시했다는 뉘앙스를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사르트르가 카뮈의 출세에 공헌은 했지만 역으로 그의 고립에 누구보다 기여했다며 가해자로서의 역할을 재확인 한다. 저자는 카뮈는 사르트르를 증오했고 사르트르는 자기 정당화에 일생을 바친 것이라 말한다. 카뮈는 작품의 성공과 인생의 완성이라는 의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사르트르는 자기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상을 거부했다고 평한다. (카뮈가 받았기 때문에 거절한 것은 아닐까, 그래야 카뮈와 다른 격으로 존재하니까)

   하지만 저자는 결국 그들 모두의 행동과 태도를 ‘반은 옳고 반은 그른 ’것으로 자기기만의 체계를 이룬 것이라 평가했다. 오늘날 승리자는 카뮈라고 손들어 준 채로. 비록 카뮈 살아생전엔 서평간 논쟁을 통해 사르트르가 판정승을 거두고 그 후에도 정치적 우세속에서 카뮈를 공격해왔지만 카뮈 사후 사르트르는 자신들이 비웃었던 카뮈의 ‘적십자적 도덕’에 굴복하였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상대를 비난함으로써 서로 자기들의 논리를 정당화하는데 전력을 소모했고 그럼으로써 각자 발전했다. 각자 문학과 철학적 관점을 자신들의 정치적 관점과 동일하게 전개하는 삶을 살았고 그래서 그들은 역사적 사실이자 역사인 채로 기록되었다.


“카뮈와 사르트르 각자는 상호적 토론속에서 자신들을 형성해 나갔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에게서 인정하게 될 완벽한 정치적 지식인들로 탄생했던 것이다.”     -485p


   저자는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을 역사의 탓으로 돌리며 오늘날 이분법적인 해석을 통한 왜곡보다는 폭력과 전쟁이 여전한 세계적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적 지식인을 기다린다며 펜을 놓았다. 두 사람의 능력과 세계관을 통합시키는 완벽한 사람을 기다린다고.

   
 
우리가 서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1945.11.15
 
   

   이것은 카뮈가 사르트르를 만난 지 약 일년 후에 이루어진 인터뷰이다. 카뮈는 자신이 사르트르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내 저서는 실존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처음부터 밝힌 것이다. 즉, 사르트르와 카뮈는 서로 달랐기 때문에 서로에 끌린 것이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 우정을 이어가기 위해서 그 우정이 영원하길 바래서 만남을 지속한 것이 아니고 어쩌면 이미 예감된 이별을 확인하고 싶어 관계를 이어온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짜피 이별할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만이 중요했던 것이고 그 시점의 조율과 기획은 아마도 사르트르 쪽이 더 치밀하고 현실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을 보면서 그리고 이 두 사람을 조합한 완벽한 사람을 기다린다는 저자를 보면서 그 완벽함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어떤 희망을 얻게 된다. 이들은 각자 서로보다 완벽히 부족했기 때문에 서로를 자신보다 완벽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상대, 그런데 그 재능으로 자신을 이기고 세상에 자신보다 월등히 빛나는 타자를 볼 때 부러움과 함께 패배감, 시기, 열등감을 내재화하게 된다. 그런데 상대의 재능이 내가 진출하고자 하는 분야와 상관이 없다면 모를까 내 희망과 정면에서 상충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마도 그처럼 되려고 그를 한번이라도 이겨보려고 아니 그 근처에라도 가보려고 부단히도 노력하지 않을까. 때론 아무리 해도 안되는 자신에 실망하며 터무니 없는 성과에 절망도 하겠지만 이기고 지고와 상관없이 그동안의 시간들이 결국 자신을 발전시키는 건 아닐까. 만약 내가 완벽하다면 나는 아무런 노력도 희망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내가 부족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늘 나를 미소짓게 한다. 다만, 과다한 자기비판이 또 다른 복종을 향한 퇴보가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시스템의 지배와 억압을 용인하면서 밖으론 자유를 떠벌리는 위선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주변 인간관계를 잃으면서까지 내 자신의 명성만을 지키는 독선자도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사르트르가 카뮈에게, 카뮈가 사르트르에게 자신은 있었지만 상대가 가지지 못한 약점을 비난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우리 모두는 사르트르의 단점도 카뮈의 약점도 무수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건 역으로 상대의 장점이 사무치게 부러워서 터져 나온 반응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이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들이 가장 위대하다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 내 부족함이 상대의 능력에 반하고 상대의 부족함이 내 능력에 끌리는 것이 각자가 완벽한 세상보다는 더 뜨겁게 느껴진다. 그들은 서로 완벽하게 부족함으로써 각자 부족한 완벽자로 서로를 돋보이게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완벽한 사람은 자신만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투쟁은 지금 우리의 우정보다 영원하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건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나는 누군가의 사르트르가 아니 내 미래 경쟁자의 카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살면서 나의 카뮈가 당신의 사르트르가 이 세상에 같이 존재한다는 건 쉽지 않은 행운이다. 그 행운을 위해 가끔 등장하는 보부아르쯤은 참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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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질투'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릅니다.
내게 가지고 있지 않은 재능(권력, 금전, 능력..)에 대한 질투, 저는 항상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 하거든요.
그리고 그것을 감추려고 필연적으로 '위선'을 하게 되어버려요.

저는 위선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악이라 생각한답니다. 하지만 균형은 중요한거죠.
위선이 너무 없는 사람, 위선이 너무 많은 사람... 결국 제가 추구하는 것은 위선에 중립적인 사람인가요?

실존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사르트르 평전부터 몇권이나 사놓고는, 아직도 서재 그 자리에.. ㅠㅠ

좋은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이 듭니다. 한사람님, 즐거운 주말되세요. 중년의 늘어진 주말 말구요~ 헤헤.
(동갑내기가 맨날 중년의 주말을 쓰니까, 저두 함께 쳐진단 말예요! 항의 중~~~~~~~ ㅋㅋㅋㅋ)

보물선 2011-09-20 13:02   좋아요 0 | URL
저도 중년이라는 표현에 항의를 더합니다^^

아이리시스 2011-09-1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이건 제가 괜찮아요? 라고 물었던 그 책이네요.ㅎㅎ 반갑다..^^

카뮈와 사르트르도 미칠 것 같이 좋은데 보부아르가 중심에 있다니 이건 정말 호기심 동하는 어려운 책이에요. <카뮈 전집>을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꽂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펴보는 것. 그건 제 꿈이거든요. 좋아하는 작가들은 많지만 카뮈는 어쩐지 살아가는 데에도 답을 알려줄 것 같아서요. 하지만 그 반대이기도 해서 좋은가 봐요. 궁금하고.

중년의 주말 쓰지 말래요, 마고님이.ㅋㅋㅋㅋㅋㅋㅋㅋ

참!

2011-09-16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6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9-1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와 사르트르의 대립은 나치부역자에게 관용을 베풀 것인가의 여부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에 초점을 두지요.저 역시 그런 분야를 자세히 파헤친 책을 읽었고요.하지만 한사람 님 처럼 두 남자 사이에 보부아르를 넣고 바라보니 또달리 선명해지는 느낌이네요.

이 책에선 나치부역자 처벌문제로 카뮈와 사르트르가 맞선 이야기엔 비중을 어느 정도 할애하고 있던가요?

cyrus 2011-09-1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카뮈와 사르트르의 소설부터 먼저 읽어봐야 할거 같아요.
생각해보니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와의 관계에 대한 책은 예전에 꽤 나왔던데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인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9-1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치부역자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다른 책들에서 많이 다루었죠.

알제리 문제에서 카뮈가 좀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지금도 욕을 많이 먹고 있죠.역시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지배한 달콤한 맛은 버리기가 힘든가 봐요.프랑스가 전후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독립운동을 탄압한 잔인함은 상상이상이죠.우리나라 사람들은 프랑스가 왠지 멋있는 나라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심해놔서...

사르코지 집권 이후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했던 시절을 못사는 나라에 근대문물을 전해주었다 운운 하며 합리화하는 내용을 교과서에 실었죠.이런 견강부회도 굉장히 뿌리가 깊더라고요.

한사람 님의 다정한 인사가 기분 좋습니다.

가연 2011-09-1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민하다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이 '거슬리는' 보부아르를 축으로 쓰려고 했던 거에요. 그런데 한사람님께서 먼저 이렇게 리뷰를 쓰셔서ㅎㅎ 괜스레 저도 그런 방식으로 했으면 완전 비교될 뻔 했네요, 풋.

2011-09-20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붐이 붐을 일으키다


   지난 추석 연휴의 TV 예능에서 자주 눈에 띄던 인물은 단연 붐이었다. 본방, 재방, MC, 게스트 할 것 없이 붐은 안나오는 데가 없어 보였다. 많은 예능인들이 제대를 하고 늘 그렇듯 컴백을 하였지만 붐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방송 3사를 통틀어 열렬히 환영받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김종민과 하하는 자신의 고정프로로 복귀했지만 초반엔 잃어버린 감을 찾는데 힘겨운 시간을 보내었고 노유민, 천명훈은 존재감이 없어진지 오래이다. 김종민과 하하도 강호동과 유재석이라는 메인 MC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자체 독립적으로 다시 감을 잡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그런데 붐은 마치 어제까지 그대로 방송을 이어온 사람처럼 강호동, 이경규, 이휘재, 김제동등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입담으로 추석 예능 MC계를 올킬했다.

   붐이 입대하기 직전에 가장 인기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붐이 이렇게 환대(?)받을 만큼이었나 싶을 정도로 갸우뚱해질 정도였달까.(솔직히 톱스타 MC는 아니었잖나)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아 붐은 오랜 유-강체제가 허물어질 조짐을 보이는 이 시기에 절묘하게 등장해 당분간 메인 혹은 보조 MC의 자리를 독차지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것이 단순한 운발 만은 아닌 것 같고 순발력과 능숙도, 타이밍등을 보았을 때 본인 자신이 군대행사 4백 여회를 통해 더욱 내공을 쌓는 기회를 갈고 닦아 왔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또 하나 강호동이나 유재석의 도움없이 오로지 혼자서 혼자 몸과 입으로 2년 반을 버틴 자생(?)의 시간이 그를 키운 건 아닐까 싶다. 기본이 가수출신에 댄스가 능하고 오랜 리포터 활동을 통한 인터뷰 및 대응능력, 각종 행사진행에서 비롯된 현장 순발력, 그리고 군대생활로 다져진 체력, 인내력까지 합쳐져 예능의 블루칩으로 떠오를 확률이 많아졌다.

   붐을 보면서 사실상 ‘스타킹’과 ‘강심장’에서 (강호동 보조 진행으로서)인기절정(?)일 때 군대 입대한 그의 경력이 기억났었고 자연스레 추석 전 전격 은퇴선언을 한 강호동이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이었다. 붐 아카데미 출신인 이특도 이제는 어엿한 진행자로서 한층 성숙해진 느낌이고 1박 2일의 이수근도 명절특집, 신규 프로에 단골 MC로 등장하는 것은 익숙한 광경이 되었다. 강호동과 함께 두 프로를 해온 이승기 역시 일,이년 전과 비교하면 그 입답과 진행실력은 일취월장 했다고 볼 수 있다. 무릎팍에서의 유세윤 정도가 공중파에서 독립적인 행보를 보여주지 못했는데 내 생각엔 캐릭터가 강하지 않으면 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약점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튼 나는 붐을 보면서 새삼 강호동과 함께한 보조 MC들의 경쟁력을 떠올려 보았는데 경쟁자인 유재석과 함께하는 MC들과 비교해 보았을때 확실히 (MC로서)발전도가 더 높아보였다. 나는 이 결과가 강호동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강호동이라는 1인자가 지향하는 방송정체성과 개인 야망도에 따른 것이라는 생각이다. 강호동과 오래 같이 하고 그에게 방송을 배웠다면 결국 강호동 같은 진행자가 될 확률이 많지 않을까. 강호동은 이경규를 넘었듯이 결국 그들중 누구는 강호동을 넘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이는 유재석과 함께 하면 유재석의 방송정체성과 개인 야망도에 따라 마찬가지로 (유재석을 넘기보다는)유재석과 영원히 함께하는 방송인이 될 확률이 많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대부분 유재석을 넘을 생각을 하지 않고 유재석 손을 잡거나 그의 품안에 있고 싶어 할 듯하다)

   다시 말해 강호동은 본인의 정체성과 시청자가 바라는 캐릭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 2, 제 3의 강호동에 의해 왕좌를 내어주게 되고 필연적으로 이경규와 같은 1인자도 2인자도 아닌 그저 특등자로 남게 될 인물이라는 것. 그렇기에 유재석에 비해 좀 더 마초적이고 형님적인 강호동은 어쩌면 유재석보다 더 외로울 수 있는 성향은 아닐까. 승부에서 진다는 것을 곧 자신과의 싸움에 진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그가 이번 한 번의 실수로 은퇴를 선언한 것을 보고 그답다고 하는 말들은 어쩐지 그가 그동안 얼마나 실수나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고 철저했을까를 역으로 상기하게 된다. 좀 안타까운 것은 기질적인 이유로 강호동은 승부를 걸어 승패가 결정나는 일이 아닌 것에는 좀처럼 도전의식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강호동이 반드시 새로운 것에의 도전을 위해 방송에 복귀하리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2. 일인자는 은퇴를 한다


   강호동을 보면서 나는 일인자의 은퇴를 생각했다. 그가 일등이 아니었다면 은퇴를 선언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조용히 국세청의 조사를 받아들이고 성실히 금액대로 세금을 납부하면 그만이고 사람들은 한 연예인이 덜 낼 뻔했던 세금을 가지고 바빠죽겠는데 소송을 걸 리가 만무하다. 나도 조그만 개인회사를 운영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세무사와 미팅을 할 때 애매한 경비정산은 무조건 회사경비로 처리하도록 부탁했지만(예를들어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산 것도 능력자 세무사는 추석용 접대선물로 분류한다) 세무사의 능력은 곧 기업의 대표가 세금을 덜 내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 쯤은 세금내는 대표에겐 일반상식에 불과하다. 나는 강호동이라고 무슨 성자처럼 될 수 있으면 국가에 세금을 많이 내도록 정산을 분류해주시오, 했으리라고 보지 않는다. 더군다나 백 만원에 십 만원하고 백억에 이십억은 (아까운 정도가 ㅋ)차원이 다르다. (전문가들의 절세수단은 간이영수증의 그것과 다르다고 믿고 싶지만) 그리고 강호동의 세무사가 특별히 도덕적이지 않아서 내도 될 것을 굳이 어떻게든 안내려고 머리 굴려 서류처리했다고 보지도 않는다. 세무사들은 보통 애매모호한 상황일때 관례에 따라 처리하고 자기 월급주는 사람의 편에 서게 되있다. 세무사 월급이 아깝지 않은 이유는 바로 절세 때문인데 까놓고 말해 이 나라에 내가 번 돈에서 얼마라도 세금내고 싶은 납세자가 몇이나 될까. 내가 강호동이라도 세무사가 될 수 있으면 적게 내는 쪽으로 (머리좋게)정산해온 서류를 보고 나는 공인이니 나라를 위해 모범을 보이기 위해 우리 한 푼이라도 더 냅시다, 이렇게 안한다. 나보다 똑똑하신 세무사님께서 알아서 해주셨겠죠. 믿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정서 아닌가. 무식한 강호동이는 틀림없이 유식한 세무사에 기댈 수 밖에 없었을 터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세금에 관해선 세무사보다 무식하다. 혹시 약간의 서로 간에 양심이 찔리거나 애매모호한 사항들은 어련히 알아서들 잘난 국세청쪽에서 잘 지적해 주신 후 그때 내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 않는가. (물론, 안걸리면 다행이고 ㅋ) 나는 누구도 강호동이 더욱 엄격하게 경비처리를 하지 못한 것에 혹시라도 알고서 슬그머니 넘어가려 했다 할지라도 돌을 던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가 경비고 어디서부터 개인지출인지 이거야 말로 '애정남'에게 묻고 싶다. 애초부터 대기업 빠져나가기 좋으라고 가이드라인 흐리멍텅하게 짜놓은 국세청이 그런 일도 안할 것이면 그냥 은행에 전기료 고지서 내듯 내버리면 될 것이지 뭐하러 서류는 내고 복잡하게 확인을 할 것인가.

   이쯤에서 현장 PD나 연예인 측근 스탭, 코디와 매니저등의 증언이 올라오기 마련인데(예를들어 강호동은 늘 제 택시비를 내주었어요, 제 학원비도 대주셨죠, 전세금을 꿔줬어요 앗 그런데 영수증을 못드렸어요 뭐 이런 ㅋ) 내 생각엔 강호동처럼 경비정산한 연예인들이 많기 때문에 그냥 불똥이 자신에게 튈지 몰라 몸을 사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MC계 일인자의 세금처리 방식은 곧 예능계의 세금처리 방식이 아닐까. 한번의 실수로 은퇴를 선언한 강호동도 있는데 자칫 세금문제로 일이 터졌다간 밥줄 끊어지게 생겼으니 말이다. 강호동은 어쩌면 여러 사람 밥줄, 명예줄, 인기줄때문에 혼자 짊어지겠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강호동이 억울하다는 건 연예계에서 더 잘 알고 있을 것. 잠시, 글이 옆으로 새었는데,

   다시, 그렇다면 일등은 왜 은퇴를 선언하는가.
   사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본 것은 어느 분야나 자타공인 일인자로 회자되는 인물의 은퇴, 그리고 은퇴방법이었다.

   연휴에 ‘카페 정윤희’라는 다큐를 보았다. 그녀가 브라운관에서 사라진 건 대략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였는데 소위말해 전성기 때 쿨하게 연예계를 떠나 지금까지 그 어떤 토크쇼나 예능에서도 볼 수 없었던 전설의 탤런트였다. 물론 쓸데없이 어린 시절의 기억력이 좋은 내 기억속의 그녀의 마지막은 ‘간통사건’이긴 했다. 어느 중소기업 사장과 간통으로 고소되어 어쩔수 없이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는 기사였고 그땐 간통이 큰 범죄였기 때문에 그녀가 원한다 해도 계속하여 배우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관능적인 외모에 비해 솔직히 연기력이 대단한 배우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발음이 부정확하고 시선처리가 불안했고 디테일이 많이 떨어지는 배우에 속했다. 내 기억으로 그녀는 드라마왕국 MBC에 출연한 드라마는 없었다. 당시 연기 좀 한다하는 정애리, 차화연, 이경진에 비하면 그녀는 정말 미모와 분위기 하나로 히로인이 된 경우였달까. 하지만 누가 뭐래도 톱탤런트로서 그녀는 일인자였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때 선데이서울에 1면 기사로 등장한 ‘정윤희 간통’ 기사가 간접적이고도 타의적인 은퇴기사라고 여긴다. 아직까지도. 이건 순전 또 내 추측인데 그녀가 절대로 대중앞에서 복귀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아마도 간통에의 기억을 다시 불러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간통으로부터 호출되어야 하는 자신보다는 간통과 동시에 잊혀지는 걸 선택한 것은 아닐까.

   가요계 은퇴는 아니지만 자발적인 선언에 의해 가요대상 및 각종 예능프로의 방송 은퇴를 선언한 사람은 조용필이다. 그는 더 이상 가요대상을 수상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나서 90년대 이후 방송계를 떠났다. 그리고 콘서트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대중과 소통하는 진정한 음악인의 행보를 보여주었다. 서태지의 경우도 비슷했는데 창작의 고통을 앞세워 그는 무늬만 은퇴를 선언 했고 (방송이 아니어서 그렇지)잘은 모르지만 계속해서 음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밖에 영화계, 문화계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받아본 일인자는 이렇듯 자주 은퇴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간혹 천재적인 일인자는 세상과 그에 적응하는 혹은 못하는 자신을 견디지 못해 죽음으로 은퇴를 선언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3. 자신을 이기지 말자


   일인자는 어느 순간 일인자인 자신과 외다리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이기는 것만이 일등인 순간이 왔음을 알게 되었을 때 일인자는 그다지 행복할 것 같지 않다. 대중들도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일인자에겐 필연적으로 실망을 하게 되어 있다. 지금 일인자보다는 못하였지만 기존의 자신을 넘으려 최선을 다한 이인자, 삼인자에게 더 박수를 보내주는 것도 잔인하지만 일인자가 감당해야 할 몫인 것이다. (인순이를 보라. 누가 보아도 그녀는 그중에서 가장 멋지고 감동적인 무대를 선사했지만 그건 원래 일등인 인순이의 모습이었고 그전 일등의 무대보다 특별히 나은 것은 아니었기에 또 언제나 일등을 할 수 있기에 쉽게 일등이 되지는 못한다) 그런 면에서 자신 스스로 일인자라 여기는 사람들은 어쩌면 반드시 자발적 은퇴를 하게 되어 있지 않을까. 물론 그 부담마저 매번 극복하고 또 매번 일등을 하는 박정현 같은 예외의 전교 일등 부류도 있긴 하다만. 일등중에서도 모두 전교일등, 전국수석이 되지 못하듯 평범한 고통으로 번민하는 일등이 다수일 듯하다. 오랜 세월, 여러 번 일등을 해온 사람은 일등이었다는 자의식, 앞으로 그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부담감, 일등이 아닌자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리는 음해와 시기, 혹시나 실패나 실수로 추락할까 두려운 불안등을 모두 같이 짊어지고 가는 고독한 러너인 것이다.(강호동이 그랬지. 스타와 슈퍼스타는 그 부담감을 이기느냐 못이기느냐의 차이라고) 

   연휴에 사르트르와 까뮈를 읽으면서 그들 일인자들은 무엇보다 세상과 사람들이 아닌 자기자신을 극복하려 했던 점이 참 인상깊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자신이 못가진 재능을 알아보고 친구로 지내지 않았다면, 그래서 라이벌이 되지 않았다면 그토록 자신을 극복하려 모든걸 걸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여지껏 강호동에 필적하는 라이벌은 본인 자신도 말했듯이(이건 유재석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유재석뿐이었다. 예전에 이휘재와 남희석이 양강체제를 이루어 갈 때, 김용만과 김국진이 커플이면서 라이벌이었을 때 한명씩 살아남으면서 양강체제는 변화를 반복하며 유재석-강호동의 체제까지 이어져왔다. 그리고 한명이 이탈하는 것이 남은 한명에게 결코 득이 되지 않는 것을 보아왔다. 그래서 일인자에겐 자신의 추락이 자신의 추락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고 어쩌면 자신만이 추락할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은 무언의 책임감으로 슬픈 존재인 것이다. 나는 솔직히 같은 사태가 유재석에게 일어났다면 유재석은 잠정은퇴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데 모든건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일인자의 성향과 연결되어 있다는 결론이다.

   그래서일까...나는 요즘 내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스스로가 너무 힘들다.(힘들다기 보다 지겹다)

   오늘 아침 전설의 투수 최동원 감독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보면서 일인자가 남긴 한마디, 괜찮다는 말씀을 떠올린다. 유독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운동선수, 여배우들의 자존심을 생각하며 일인자가 되고자 소망하던 내 자신을 처절하게 들여다 보게 된다. 가을이 시작되어 그런걸까. 조금은, 조금만 덜 진지해졌으면. 덜 엄격해졌으면. 못난 자신에 못견뎌 하지 말았으면 ...












 

 

 

 
덧붙임) 갑자기 생각났어요. 80년 그러니까 제가 4학년 때인가, 드라마 <축복> 
이라고 주인공이 골수암에 걸린 정윤희였는데 드라마 주제곡이 조용필의 '촛불'이었어요.
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  그때 돌쟁이 조카중에 한 녀석에게 제가 누가~ 하고 부르면 
지키랴~ 하고 대답했었죠. 그 자식이 벌써 결혼을 했다네요. 세월이 일등을 추억하게 하네요
은퇴도 그리움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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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5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5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1-09-15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저는 솔직히 강호동의 잘못이 상당히 있다고 생각하고, 그가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어쩌면 한편으로는 제가 지금까지 어떤 사업을 해본 적이 없고, 항상 월급을 받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이 은퇴가 되어야 하는가는 잘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는 일단 처리할 건 처리하고, 한 6개월 정도의 자숙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잠정은퇴기 때문에 실제로 언젠가는 컴백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요.)

말씀하신대로 강호동의 은퇴는 어떤 식으로든 유재석에게도 영향을 미치겠지요. 유재석 강호동 진행스타일이 확연하게 다르고, 그것이 지금까지는 서로에게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측면이 있으니까요. (붐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도 공감이 가구요. 확실히 두 사람이 주위 사람을 활용하는(?) 방식도 다르니까..)

이런..달을 보랬는데, 달을 가리킨 손가락만 보고 있네요. 아무튼 글 잘 읽고,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갑니다.^^

한사람 2011-09-15 08:33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연휴에 미드와 미친하셨나요? ㅋㅋ

예, 저도 솔직히 강호동이 어떻게든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번의 실수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비난을 견디는 내성은 전혀 기르지 못한것 같아 인격적으로 성숙치 못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ㅠ
(어찌 되었건 본인 괴로움을 못견디고 무너진 것이니까요)

저는 개인사업을 3,4년 했는데요.. 부가세 때려맞는 달은 죽을맛이었어요..
이곳에서 풀어놓을 말은 아니지만 아마 사업자들은 그놈의 세금 안내기 위해 어떤 편법을 쓰는지
또 대기업으로부터 어떤 부당한 관례를 안고가는지 보이지 않게 새나가는 돈, 영수증 없이 거래하는 돈, 이런 것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차마 말로 다 꺼낼수 없을 것 같아요 ㅋ
그래서 세무사들은 마트에서 장보고 백화점에서 쇼핑할때도 절세방법을 알려주죠(이런데서라도 줄이려구요)
제가 월급받고 할때는 아깝긴해도 그래도 동료도 같이 낸다는 연대의식이 있었는데
사업을 하다보니 될수 있으면 비리를 많이 저지르는것이 살아남을 길이더군요
연예계가 기준없는 현금거래가 많잖아요. 영수증처리도 잘 안하구요
저는 강호동의 세무사가 판단한 해석및 분류기준이 곧 대한민국 예능계의 세금기준이라고 보았어요

그리고.. 왜 음주운전은 틀림없이 불법이고 특히나 유명인의 경우는 조심해야 하는데 방심하다 걸리는 것처럼
세금건도 우연히,,걸린것이라고 생각했죠.. 또 비난의 강도가 높은 것이 (세금건 자체보다는)앞서 일어난 1박2일의 일방적 하차와 종편행의 거액스카우트설이 연계되있기 때문에 그 서운함이 같이 투사된 것이라 보았구요

저는 일인자가 되는 것보다는 그 품위와 전설을 유지하는 것이 몇 백배 더 어렵다고 느낍니다
일인자가 되기까지는 개인의 노력이 많은 영향을 미치지만 그 이후의 행보와 평가는 개인적인 기질, 성향, 야망의 방향이 우선시 된다고 봐요. 그리고 그 부담감을 못이길 경우 어떤식으로든 은퇴를 선택하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달 이야기도 좋지만 달 그림자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그리고 같이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라주미힌 2011-09-15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저는 누울 자리를 보고 뻗는것 같던데요...
은퇴도 은퇴가 가능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보통은 퇴출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죠.
조세제도가 워낙 저질이라 심지어 장관이나 대통령 조차 약간의 흠 밖에 되지 않는,
탈세가 절세로 밖에 인식 되지 않는,
이 나라 실정에서 강호동의 처사는 나름 우월해 보이는 효과까지도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네요 ㅎ
법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작위적이고 자의적으로 작동하며,
기질 또는 여론에 의해 결정적으로 작동하는 현상들을 보면
역시 잘나고 볼 일입니다. ㅎ

한사람 2011-09-15 13:10   좋아요 0 | URL

라주미힌님, 연휴는 잘 쉬셨나요..?
그렇죠 !! 확실히 은퇴선언을 할만한 위치니까 과감한 행보도 펼칠수 있는 것이겠죠..
웃긴건 퇴출운동 할때는 언제고 반대로 복귀서명운동에 동참한 사람도 이만명을 바라본다고 하잖아요
나혼자 다 짊어진다는 뜻일수도 있지만 가만보면 애꿎은 제작진, 강라인, 시청자들이
결국 그의 고통을 나누는 셈이 된것이구요
뉴스나 언론도 강호동 개인의 책임보다는 가이드라인이 불분명한 연예계 경비정산문제를 화두로 내세우고..
그가 결코 자신으로 인한 파장을 예상안하고 아무데나 누워버린건 아닌듯 합니다 ㅋ

우리같은 일반인들은 꿈도 못꾸어 볼 금액이기에. 가늠조차 안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아무래도 사업에 많이 관여하다보면 이해관계때문에
적이 많이 생기게 되는데 세금 탈루건은 최근 탄력받은 강호동의 수익구조에 대한 투명성, 의문, 시기에서 비롯된게 아닐까 싶네요^^

cyrus 2011-09-15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휴 때만 되면 하는 TV 프로그램들이 나오는 사람만 다를 뿐 내용상 그 나물에 그 밥이더군요.
물론 나오는 사람들 역시 평소에 TV에 자주 나오는 유명 연예인들이지만요 ^^;;
그래도 이번 연휴 프로그램을 보면서 눈에 띈게 역시 붐의 예능 복귀였던거 같아요.

그리고 저 역시 최동원 씨의 부고 소식이 참 안타깝게 느꼈습니다. 공교롭게도 최동원 씨가
돌아가시기 전날에 스포츠 채널에서 추석특집으로 최고의 한국시리즈라는 제목의 방송을 본 적이 있어요.
그 때 나온 한국시리즈가 바로 최동원 씨가 한국시리즈 4승이라는 전후무후한 기록을 세웠던
84년 한국시리즈 경기였거든요. 저는 그걸 보면서 최동원 씨가 대단하다고 느꼈었는데,,
하필 그 다음날에 그 분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어서 허무하더군요.

한사람 2011-09-15 13:20   좋아요 0 | URL

어제 라디오 스타에서도 붐이 나오더군요 ㅋ
박효신 애국가 흉내에서 빵 터졌죠 ㅋㅋㅋ

최동원 감독은 특히 울 엄니가 좋아하시던 분이라 더 짠하고..마음 아픕니다 ㅠ
옛날에 최동원 선수가 전성기일때 롯데가 우승도 하고 그랬잖아요.(시루스님은 모르겠다 하하, 그 84년 한국시리즈 4승할 때가 그때죠)
오십대면 한창인데 너무 일찍 가버리셨어요..

우리 어릴땐 전두환 정책으로 완전 프로야구를 주말마다 매번 생중계했습니다..
무슨 의무처럼 시청한 것 같기도 하고..그때 선수들이 많이 기억나는데
한 시대의 전설이 별세한다는 건 다시 그 시절의 추억이 그림으로만 박제되는 것 같습니다..

stella.K 2011-09-1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내 서재에도 썼지만,
왜 이제와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6억이면 적은 돈 아닌데,
1,20만원 같아야 피라미 같아서 세무서 사람들 모르고 넘어 간다죠.
그래봐야 세무서 사람들 자기도 직무유기 한 거 아닙니까?
몇번 경고장 같은 거 가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강호동 정도면 밑에 사람 두고 관리 받고 있겠죠.
그럼 그 사람의 농간으로 일이 이 지경이 났다는 건데...
말에 의하면 강호동이 저래뵈도 상당히 무섭다고 하더군요.
사병도 있다는 소리 들었습니다.ㅋㅋ
어쨌든 미운털 박혀서.

한사람 2011-09-15 14:3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잘은 모르지만 시점도 그렇고
뭔가 강호동이 적을 만들었거나 위로부터(?) 밑보였거나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건 왜 일까요 ㅠ

추석연휴는 안철수와 강호동을 밥상으로한 난상토론장이었네요..
연신 출연하는 붐을 보면서요 ㅋ

결국 돈도 많이 버니까 낼 세금도 많다는 건데
저는 6,7억 세금이 상상도 안가요~

언젠가 저 사는 동네에 강호동이 육칠팔이라는 고기집을 오픈했는데
그때 유재석, 이휘재, 장동건, 비까지 나타나서 동네가 난리가 난적이 있었어요
조그맣고 별 볼일 없는 가게였지만 그이후 그 지역 상권은 엄청나게 발전했어요
동네 아줌마들이 그때 강호동을 다시봤답니다^^

2011-09-15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6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9-15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오신 분들이 모두 강호동,최동원 이야기를 하셨군요.저는 좀 명랑한 추억인 정윤희 누나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시기로 보아 '축복'은 TBC의 마지막 무렵 드라마 같아요.그 무렵 언론통폐합이 진행되었으니까요.그리고 나훈아 씨가 김지미 씨와 이혼하고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1982)이란 영화에 주연으로 나왔는데 이 영화의 여주인공이 정윤희 씨였죠.
탈세 이야기가 좀 무거워서 연예계 이야기 남기고 갑니다.

한사람 2011-09-16 08:3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노이에자이트님 !

TBC를 알고 계신걸 보니 연배가 한참 아래는 아니신듯해요 ㅋ 어쩜 저보다 위일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ㅋㅋ 듭니다^^

제가 어릴때 잠깐 TBC를 기억하는데 그 방송이 재미난게 젤루 많았었죠
글구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은 제가 모르는 영화여요.. 정윤희 영화는 앵무새와 뻐꾸기 밖에 모릅니다, 하하
어제 서울쪽만 정전되는 줄 알았는데 저희동네도 오후 늦게 정전이 되서
가게들이 난리가 났었어요. 올해는 예기치 못한 난리들이 뜬금없이 나타나네요

날도 더운데 건강 챙기시기 바래요^^

노이에자이트 2011-09-16 16:45   좋아요 0 | URL
하하하...저는 일제시대 가수들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어요.그러면 제 나이가 90살? 한국대중연예의 역사관련 지식을 여기저기서 흡수하고 있어요.

서울 부산 지역에 살던 분들은 TBC를 보셨겠지만 그외 지방에선 볼 수 없었어요.라디오방송은 나왔지만...이 사실은 처음 아시나봐요.

언론통폐합은 5공청문회 때 중요하게 다뤘고요. 1989년 시사월간지에 자세히 나와있죠.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참으며 살아요.

앵무새와 뻐꾸기라는 제목이 있었나요?

한사람 2011-09-17 08:15   좋아요 0 | URL

아하, 저도 옛날 노래는 쫌 알아요~
특히 70년대 말 흑백 TV에서 유행하던? ㅋㅋ

옛날에 부산에 가면 드라마를 (재방이 아니고 본방을)서울보다 약 4,5일 늦게 방송하던 기억이 나요
90년대에 생긴 SBS도 부산에 가면 안나왔던거 같구요
언론통폐합때 탤런트들이 울고 하던 장면이 스치네요

정윤희 영화중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와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를 기억해요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제목만 기억하네요 ㅋ)
모두 야한 영화로 기억하는데 실은 그 영화들이 저항영화였다고 하더군요

노이에자이트님은 확실히 대선배님이 맞으시군요 ㅠ

그럼, 편안한 주말되시어요^^ 하하

노이에자이트 2011-09-17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가 사놓은 1984년~2002년 시사월간지가 있어서 그걸 가끔 본답니다.1975년~1978년 시사주간지도 있어서 그 시절 이야기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참고하죠.

옛영화는 EBS에서 일요일 밤 11시에 하는 <한국영화걸작선>을 2년 간 매주 봐서 그 방면에 빠삭하죠.제 부모 님이 가물가물하면 제가 정확히 알려줄 정도니까요.<앵무새~>와 <뻐꾸기~>도 여기서 방영했죠.이대근,윤양하가 정윤희 상대배우였어요.로케 촬영한 곳의 산골경치가 정말 기막히죠.

방금 어떤 분은 저의 글을 읽고 10대 청소년 같은 느낌이 난다고 했는데...앞으로 걸그룹 이야기를 몇 번 더 할테니 그땐 한사람 님이 저를 10대나 20대로 생각할 거에요.
 

 


#1. 이루지 못한 결말


   내가 처음 드라마라는 걸 연속해서 보게 된 것은 MBC 주말극이었던 것 같다. 그땐 흑백이었고 TV에서 내일을 위하여 어린이들은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나라는 캠페인성 멘트를 9시 뉴스 전에 내보낼 때였다. 그렇고 그런 신파조의 드라마 속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김수현 극본의 드라마들이었다.(이덕화, 정애리 주연의 '안녕하세요) KBS가 주로 홈드라마가 많았던 반면 현대극으로서 사랑과 배반, 불륜과 복수등을 그린 MBC 드라마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도시적, 감각적, 비극적이었다. 열 살이 되기 전부터 나는 김수현 드라마에 꽂혀 한때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꾼 적도 있었다. 대학시절 MBC 베스트 극장 극본 공모를 쓰다가 집에 뭔 일이 터지는 바람에 완성을 못한 적도 있었다. 그때 극본 내용이 대학을 다니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돈을 벌기위해 유흥가로 발을 들여놓는 여학생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웃긴 건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쓰러진 아버지를 둔 내 처지를 비관해(?) 그런 유치한 시놉이 이야기로 만들어졌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때 내지 못한 결말이 꼭 두고 온 숙제처럼 가끔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사회에 나와 직업을 가지고 여전히 늘어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그리고 드라마 작가로 성공하는 (비슷한 나이의) 작가들을 보면서 한번 씩 회사를 때려치고 싶을 때 에이씨, 드라마나 써볼까 지금부터라도, 하하. 이런 생각을 주기적으로 했었던 것도 같다. 그 생각을 하면 여지없이 그때 내지 못한 결말, 비록 공모에 접수했다 하더라도 당선도 되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어찌되었건 내가 만든 이야기의 결말을 짓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살아오면서 내게 적지 않은 의미를 지녔다고 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결말을 어떤 식으로 지어야 할지 마치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인생의 미래처럼 많이도 두려웠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여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쓰레기가 되든 완성을 했어야 하는데, 그 미련은 이상하게도 드라마작가에는 다시 도전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버린 듯하다. (그 이후로 나는 서평에서도 내 식대로 결론을 내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도 안한다는 ㅋ)


#2. 이루어진 결말


   드라마가 또 한편 끝이 났다.
   드라마가 끝이 난다는 건 내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본다.

   예전에 방송사가 딱 세 개였을 때, 지금처럼 아침부터 한밤중 까지 일주일 내내 본방, 재방, 케이블까지 합쳐 허구헌날 드라마가 방송의 메인이지 않았을 적에, 그땐 드라마 선택권도 별로 없었다. 미니시리즈라는 개념도 내 기억엔 ‘질투’가 처음이다. 특별기획이라는 것도 ‘여명의 눈동자’가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그땐 인터넷은 없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내가 보는 드라마는 거의 남들도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라마에서 전격적으로 키스를 하기 시작한 것도 80년대 후반, 김희애, 채시라, 최진실이 주인공인 드라마였었다. 오늘날 한예슬 사태를 보면 참 그때만큼 근성있고 책임감있으면서 연기까지 악바리인 배우들이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많고 많았던 드라마를 거쳐 왔으면서 드라마 마지막회의 결말이 생각나는 건 몇 개 되지 않는다는 것. 끝나는 걸 분명 아쉬워 했던 기억은 선명한데 그에 비해 뇌리에 저장된 장면은 드문 듯하다. 해피엔딩을 지향하지 않는 대표적 작가 김수현 작품에서도 내 맘에 들었던 결말은 거의 없었다. (김수현 작가는 시청자와 타협하지 않는다) 시청자 입장에선 열린 결말도 썩 개운치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대체로 해피엔딩은 잘 기억이 안나고 주인공이 죽은 것으로 마무리 되는 작품들이 여운이 오래갔었던 것 같다. (예를들어 조인성, 소지섭, 하지원의 동반죽음 같이) 언젠가 고현정, 최재성이 주연인 ‘두려움없는 사랑’이라는 드라마가 한창 유행일 때가 있었는데 그 드라마에서 최재성이 시한부 인생이었건만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반대로 최재성은 죽지 않고 둘이서 알콩달콩 잘살게 되었던 기억도 있다. (이건 내 생각인데 그때 고현정의 불행에 동의하지 않았던 시청자들은 마찬가지로 고현정의 실제 불행때문에 드라마에서 묘한 부채감을 느끼는게 아닐까. '두려움없는 사랑'은 울컥하는 고현정 연기의 시작이었기에)

   그래서였을까. 어제 막을 내린 <여인의 향기>는 그 결말이 좀 새로웠다.
   너무나 익숙하게 당연히 여주인공이 죽고 나서 그려지는 틀에 박힌 장면들을 예상했던 탓일까. 아마도 깨끗이(?) 연인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는 버킷리스트의 완성을 예상했다면 시시한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드라마의 절정과 사실상 결말은 엄마에게 시한부인생을 고백한후 엄마가 아이처럼 오열하는 장면이었다고 봄) 우리는 추억에 잘 학습된 시청자들이니까. 또 언젠가 김희애가 차인표의 품안에서 조용히 죽어갔던 드라마 ‘완전한 사랑’의 한 장면도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에 연재는 언제 죽을지는 모르나 아니 빠른 시일 내에 언젠가는 죽겠지만 어쨌든 드라마상에선 그래도 여전히 내일을 기다리는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남은 시간이 하루인 사람일지라도 그 남은 내일은 희망으로 본 것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육개월이었으니 육개월을 더 산 주인공은 아마도 한 달 안에 죽을 수도 정말 운이 좋아 지금 계절을 넘기고 내년 봄을 맞이할 수도 아니, 기적이 일어나 몇 년을 더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죽기 전까진 변함없이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내일을 기다리는 평범함. 죽는 시점은 모두 다르겠지만 죽음 전의 우리는 어쩌면 이런 모습이 되어야겠지 않느냐고. (사실, 이게 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지만)

   <여인의 향기>는 자꾸 비교되는 <시크릿 가든>보다 화제성은 덜 하였지만 우리 실생활에 많은 의미를 선사해준 드라마였다. 환타지 측면에선 모두 변변찮은 노처녀와 재벌 2세와의 로맨틱한 사랑을 핵심으로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결말은 낭만성과 그로인한 카타르시스를 버리고 덤덤했다. 적어도 대리만족에선 실패했다. 내가 혹시 김선아가 내 대신 죽는 것을 바랐던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내 자신의 진부함과 잔인함에 놀랐다. 우리 삶이라는 게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실은 모두가 시한부 인생이고 주어진 삶을 아니 그래서 놓여진 죽음을 살아가는 것 아니었나. 육개월이라는 극단적인 시간표가 우리 생을 더 절망의 도가니에 빠지도록 할 수도 있겠지만 하루하루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듯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남은 인생의 시간표를 알지 못하는 시한부 인생에게 묵직한 교훈을 주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여인의 향기>가 끝나면 엄청 서운할 줄 알았는데(이제 무슨 재미로 사나 싶어 ㅋ) 어쩐지 그 헤어짐이 아쉽지만은 않았다. 허탈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오는데 괴롭지도 않았다. 참 기특한 드라마였다. 아니 그러한 내가 더 기특했는지 모르지만.


#3. 알지 못하는 결말


   공교롭게도 같은 날 인순이가 나가수에서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가지고 자신의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는 모노드라마로 한편의 뭉클한 무대를 꾸몄다. 인순이는 인터뷰 할 때 지나온 시절의 고생이 생각나 눈물을 보인 것이 아니고 삼십, 사십, 오십을 지나오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을지, 그때도 사람들이 나를 반겨줄 것인지, 만약 못하게 된다면...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스스로의 감동, 슬픔, 회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깨달았다.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 반드시 앞으로를 그리게 된다. 슬프게도 그렇게 돌아보기 시작한다는 건 바로 지금부터가 그 돌아본 만큼보다 많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내 나이 서른 즈음엔 황금기였지, 거침없었지..
내 나이 마흔 즈음엔 불같은 사랑을 했지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딸아이를 선물 받았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때 였어
내 나이 쉰 즈음 난 달리고 있어
목적지도 모른 채 하늘 한번 보지 못 한 채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도 모른 채난 달리고 있어 습관처럼
조금 있음 나의 다른 나이 즈음을 경험하겠지
그때 난 어떤 모습일까         - 인순이, <서른 즈음에> 中에서
 
   


   내가 서른 살 즈음에 김광석의 노래를 들었을 땐 내 인생이 너무 바쁘고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 그 노래는 큰 울림을 주지 못했다. 노래처럼 서른 살이라고 모두 서른을 노래한 가사가 와닿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 내 서른은 숨가쁘고 거침없었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노래가 갑자기 가슴을 때린 건 서른이 한참 지난 거의 삼십대 중후반이었던 것 같다. 김광석 베스트 앨범을 선물로 받아 차에서 흘려 들었는데 노래 가사 중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라는 부분이 스며들듯 내게로 다가왔다. 이별과 실패의 실행자가 그 주체가 내가 아니었다는 것이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나는 시간과 사람과 계절과 바로 오늘의 내 자신과.

   늘 그렇듯 하루 하루가 또 멀어져 내 청춘의 시간들과 많이도 멀어진 지금, 그러니까 서른이 한참 지난 후 뒤돌아보니 나는 여기까지 이별해 와 있었고 그건 내일도 마찬가지 일거라는 깨달음. 청춘이 그렇게 흘러온 것과 마찬가지로 남은 내 인생도 지금처럼 똑같이 흘러갈 것이라는 슬픔. 절대 누구든 돌아갈 수는 없고 그저 이렇게 매일과 이별하며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두려움. 이별만이 인생을 완성하는 슬픔이라는 사실. 그러니 그 노래는 서른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서른을 지나온 모든 서른이었던 사람, 이제서야 자신의 서른이 기억나기 시작한 사람을 위한 노래였던 것이다. 서른 즈음에 들어야 할 노래가 아니라 이제는 비로소 서른 즈음을 돌아볼 나이에 겨우 들려오는, 마흔도 쉰도 그 다음도 돌아보듯 그려볼 수 있는, 그래서 가슴으로 만날 수 있는 노래였던 것이다. 그건 다시는 서른을 돌아갈 수는 없고 오로지 서른을 서른이 아니기 때문에 기억할 수만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잔인한 노래였던 것.

   나는 내 남은 인생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이 꼭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내 아버지는 대충 마지막을 아셨고 내 어머니는 전혀 모르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더 불행한 인생이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마지막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 또 다른 삶의 시간을, 계기를 마련해주지 않았을까. 만약 혹시 알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그리 놀라지는 않고 싶다.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는 별개로 내 인생은 변함없이 나의 것이었고 그 인생을 지키고 살아내는 것도 내 몫일 것이기 때문에. 혹시 터무니 없이 짧다면 그것도 그리 큰 불행은 아니라고 여기고 싶다. 무작정 길다고 썩 좋을 것 같지도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그렇게 매일을 매일과 이별하며 또 내일을 기다리고 싶다.

   내게 드라마가 끝난다는 것은 내가 살지 못했던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맺지 못한 결말이 하나 탄생하는 것과 같다. 살아가면서 결말이 다양해진다는 경우의 수가 많아진다는 그래서 어떤 결말이라도 소중히 받아들이는 양분이 되어주길.

   운좋게도 이번 결말은 달보고 소원을 빌어보기 참 적당한, 그래서 가을 즈음에 유익한 결말이었다.






 

 

 

 

 

 

 

 

덧붙임) 그 와중에 짬짬이 <사르트르와 까뮈의 우정과 투쟁>을 읽었다.
참 재미나게 덮었다. 여인의 향기와 인순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암튼, 나는 TV를 보다 책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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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9-1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순이 모노드라마를 보았는데
참 감동이더군요.
그렇게 청중들과 함께 무대를 공유하고 감동으로 이끄는 무대 장악력이
탁월한 것 같습니다.
언제 또 인순이의 독백을 외우셨습니까?ㅋ
한사람님의 글은 언제나 진지하고 짠한 감동이 있군요.^^

한사람 2011-09-14 20:24   좋아요 0 | URL

히히, 외운건 아니고 ㅋㅋ
늘 진지하기만 한게 ㅋ 제 장점이자 단점...이라 생각해요 ㅠ

2011-09-15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5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