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루지 못한 결말


   내가 처음 드라마라는 걸 연속해서 보게 된 것은 MBC 주말극이었던 것 같다. 그땐 흑백이었고 TV에서 내일을 위하여 어린이들은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나라는 캠페인성 멘트를 9시 뉴스 전에 내보낼 때였다. 그렇고 그런 신파조의 드라마 속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김수현 극본의 드라마들이었다.(이덕화, 정애리 주연의 '안녕하세요) KBS가 주로 홈드라마가 많았던 반면 현대극으로서 사랑과 배반, 불륜과 복수등을 그린 MBC 드라마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도시적, 감각적, 비극적이었다. 열 살이 되기 전부터 나는 김수현 드라마에 꽂혀 한때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꾼 적도 있었다. 대학시절 MBC 베스트 극장 극본 공모를 쓰다가 집에 뭔 일이 터지는 바람에 완성을 못한 적도 있었다. 그때 극본 내용이 대학을 다니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돈을 벌기위해 유흥가로 발을 들여놓는 여학생의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웃긴 건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쓰러진 아버지를 둔 내 처지를 비관해(?) 그런 유치한 시놉이 이야기로 만들어졌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때 내지 못한 결말이 꼭 두고 온 숙제처럼 가끔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사회에 나와 직업을 가지고 여전히 늘어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그리고 드라마 작가로 성공하는 (비슷한 나이의) 작가들을 보면서 한번 씩 회사를 때려치고 싶을 때 에이씨, 드라마나 써볼까 지금부터라도, 하하. 이런 생각을 주기적으로 했었던 것도 같다. 그 생각을 하면 여지없이 그때 내지 못한 결말, 비록 공모에 접수했다 하더라도 당선도 되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어찌되었건 내가 만든 이야기의 결말을 짓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살아오면서 내게 적지 않은 의미를 지녔다고 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결말을 어떤 식으로 지어야 할지 마치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인생의 미래처럼 많이도 두려웠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여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쓰레기가 되든 완성을 했어야 하는데, 그 미련은 이상하게도 드라마작가에는 다시 도전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버린 듯하다. (그 이후로 나는 서평에서도 내 식대로 결론을 내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도 안한다는 ㅋ)


#2. 이루어진 결말


   드라마가 또 한편 끝이 났다.
   드라마가 끝이 난다는 건 내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본다.

   예전에 방송사가 딱 세 개였을 때, 지금처럼 아침부터 한밤중 까지 일주일 내내 본방, 재방, 케이블까지 합쳐 허구헌날 드라마가 방송의 메인이지 않았을 적에, 그땐 드라마 선택권도 별로 없었다. 미니시리즈라는 개념도 내 기억엔 ‘질투’가 처음이다. 특별기획이라는 것도 ‘여명의 눈동자’가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그땐 인터넷은 없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내가 보는 드라마는 거의 남들도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라마에서 전격적으로 키스를 하기 시작한 것도 80년대 후반, 김희애, 채시라, 최진실이 주인공인 드라마였었다. 오늘날 한예슬 사태를 보면 참 그때만큼 근성있고 책임감있으면서 연기까지 악바리인 배우들이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많고 많았던 드라마를 거쳐 왔으면서 드라마 마지막회의 결말이 생각나는 건 몇 개 되지 않는다는 것. 끝나는 걸 분명 아쉬워 했던 기억은 선명한데 그에 비해 뇌리에 저장된 장면은 드문 듯하다. 해피엔딩을 지향하지 않는 대표적 작가 김수현 작품에서도 내 맘에 들었던 결말은 거의 없었다. (김수현 작가는 시청자와 타협하지 않는다) 시청자 입장에선 열린 결말도 썩 개운치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대체로 해피엔딩은 잘 기억이 안나고 주인공이 죽은 것으로 마무리 되는 작품들이 여운이 오래갔었던 것 같다. (예를들어 조인성, 소지섭, 하지원의 동반죽음 같이) 언젠가 고현정, 최재성이 주연인 ‘두려움없는 사랑’이라는 드라마가 한창 유행일 때가 있었는데 그 드라마에서 최재성이 시한부 인생이었건만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반대로 최재성은 죽지 않고 둘이서 알콩달콩 잘살게 되었던 기억도 있다. (이건 내 생각인데 그때 고현정의 불행에 동의하지 않았던 시청자들은 마찬가지로 고현정의 실제 불행때문에 드라마에서 묘한 부채감을 느끼는게 아닐까. '두려움없는 사랑'은 울컥하는 고현정 연기의 시작이었기에)

   그래서였을까. 어제 막을 내린 <여인의 향기>는 그 결말이 좀 새로웠다.
   너무나 익숙하게 당연히 여주인공이 죽고 나서 그려지는 틀에 박힌 장면들을 예상했던 탓일까. 아마도 깨끗이(?) 연인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는 버킷리스트의 완성을 예상했다면 시시한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드라마의 절정과 사실상 결말은 엄마에게 시한부인생을 고백한후 엄마가 아이처럼 오열하는 장면이었다고 봄) 우리는 추억에 잘 학습된 시청자들이니까. 또 언젠가 김희애가 차인표의 품안에서 조용히 죽어갔던 드라마 ‘완전한 사랑’의 한 장면도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에 연재는 언제 죽을지는 모르나 아니 빠른 시일 내에 언젠가는 죽겠지만 어쨌든 드라마상에선 그래도 여전히 내일을 기다리는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남은 시간이 하루인 사람일지라도 그 남은 내일은 희망으로 본 것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육개월이었으니 육개월을 더 산 주인공은 아마도 한 달 안에 죽을 수도 정말 운이 좋아 지금 계절을 넘기고 내년 봄을 맞이할 수도 아니, 기적이 일어나 몇 년을 더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죽기 전까진 변함없이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내일을 기다리는 평범함. 죽는 시점은 모두 다르겠지만 죽음 전의 우리는 어쩌면 이런 모습이 되어야겠지 않느냐고. (사실, 이게 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지만)

   <여인의 향기>는 자꾸 비교되는 <시크릿 가든>보다 화제성은 덜 하였지만 우리 실생활에 많은 의미를 선사해준 드라마였다. 환타지 측면에선 모두 변변찮은 노처녀와 재벌 2세와의 로맨틱한 사랑을 핵심으로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결말은 낭만성과 그로인한 카타르시스를 버리고 덤덤했다. 적어도 대리만족에선 실패했다. 내가 혹시 김선아가 내 대신 죽는 것을 바랐던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내 자신의 진부함과 잔인함에 놀랐다. 우리 삶이라는 게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실은 모두가 시한부 인생이고 주어진 삶을 아니 그래서 놓여진 죽음을 살아가는 것 아니었나. 육개월이라는 극단적인 시간표가 우리 생을 더 절망의 도가니에 빠지도록 할 수도 있겠지만 하루하루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듯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남은 인생의 시간표를 알지 못하는 시한부 인생에게 묵직한 교훈을 주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여인의 향기>가 끝나면 엄청 서운할 줄 알았는데(이제 무슨 재미로 사나 싶어 ㅋ) 어쩐지 그 헤어짐이 아쉽지만은 않았다. 허탈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오는데 괴롭지도 않았다. 참 기특한 드라마였다. 아니 그러한 내가 더 기특했는지 모르지만.


#3. 알지 못하는 결말


   공교롭게도 같은 날 인순이가 나가수에서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가지고 자신의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는 모노드라마로 한편의 뭉클한 무대를 꾸몄다. 인순이는 인터뷰 할 때 지나온 시절의 고생이 생각나 눈물을 보인 것이 아니고 삼십, 사십, 오십을 지나오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을지, 그때도 사람들이 나를 반겨줄 것인지, 만약 못하게 된다면...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스스로의 감동, 슬픔, 회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깨달았다.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 반드시 앞으로를 그리게 된다. 슬프게도 그렇게 돌아보기 시작한다는 건 바로 지금부터가 그 돌아본 만큼보다 많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내 나이 서른 즈음엔 황금기였지, 거침없었지..
내 나이 마흔 즈음엔 불같은 사랑을 했지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딸아이를 선물 받았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때 였어
내 나이 쉰 즈음 난 달리고 있어
목적지도 모른 채 하늘 한번 보지 못 한 채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도 모른 채난 달리고 있어 습관처럼
조금 있음 나의 다른 나이 즈음을 경험하겠지
그때 난 어떤 모습일까         - 인순이, <서른 즈음에> 中에서
 
   


   내가 서른 살 즈음에 김광석의 노래를 들었을 땐 내 인생이 너무 바쁘고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 그 노래는 큰 울림을 주지 못했다. 노래처럼 서른 살이라고 모두 서른을 노래한 가사가 와닿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 내 서른은 숨가쁘고 거침없었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노래가 갑자기 가슴을 때린 건 서른이 한참 지난 거의 삼십대 중후반이었던 것 같다. 김광석 베스트 앨범을 선물로 받아 차에서 흘려 들었는데 노래 가사 중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라는 부분이 스며들듯 내게로 다가왔다. 이별과 실패의 실행자가 그 주체가 내가 아니었다는 것이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나는 시간과 사람과 계절과 바로 오늘의 내 자신과.

   늘 그렇듯 하루 하루가 또 멀어져 내 청춘의 시간들과 많이도 멀어진 지금, 그러니까 서른이 한참 지난 후 뒤돌아보니 나는 여기까지 이별해 와 있었고 그건 내일도 마찬가지 일거라는 깨달음. 청춘이 그렇게 흘러온 것과 마찬가지로 남은 내 인생도 지금처럼 똑같이 흘러갈 것이라는 슬픔. 절대 누구든 돌아갈 수는 없고 그저 이렇게 매일과 이별하며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두려움. 이별만이 인생을 완성하는 슬픔이라는 사실. 그러니 그 노래는 서른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서른을 지나온 모든 서른이었던 사람, 이제서야 자신의 서른이 기억나기 시작한 사람을 위한 노래였던 것이다. 서른 즈음에 들어야 할 노래가 아니라 이제는 비로소 서른 즈음을 돌아볼 나이에 겨우 들려오는, 마흔도 쉰도 그 다음도 돌아보듯 그려볼 수 있는, 그래서 가슴으로 만날 수 있는 노래였던 것이다. 그건 다시는 서른을 돌아갈 수는 없고 오로지 서른을 서른이 아니기 때문에 기억할 수만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잔인한 노래였던 것.

   나는 내 남은 인생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이 꼭 나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내 아버지는 대충 마지막을 아셨고 내 어머니는 전혀 모르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더 불행한 인생이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마지막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 또 다른 삶의 시간을, 계기를 마련해주지 않았을까. 만약 혹시 알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그리 놀라지는 않고 싶다.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는 별개로 내 인생은 변함없이 나의 것이었고 그 인생을 지키고 살아내는 것도 내 몫일 것이기 때문에. 혹시 터무니 없이 짧다면 그것도 그리 큰 불행은 아니라고 여기고 싶다. 무작정 길다고 썩 좋을 것 같지도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그렇게 매일을 매일과 이별하며 또 내일을 기다리고 싶다.

   내게 드라마가 끝난다는 것은 내가 살지 못했던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맺지 못한 결말이 하나 탄생하는 것과 같다. 살아가면서 결말이 다양해진다는 경우의 수가 많아진다는 그래서 어떤 결말이라도 소중히 받아들이는 양분이 되어주길.

   운좋게도 이번 결말은 달보고 소원을 빌어보기 참 적당한, 그래서 가을 즈음에 유익한 결말이었다.






 

 

 

 

 

 

 

 

덧붙임) 그 와중에 짬짬이 <사르트르와 까뮈의 우정과 투쟁>을 읽었다.
참 재미나게 덮었다. 여인의 향기와 인순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암튼, 나는 TV를 보다 책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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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9-1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순이 모노드라마를 보았는데
참 감동이더군요.
그렇게 청중들과 함께 무대를 공유하고 감동으로 이끄는 무대 장악력이
탁월한 것 같습니다.
언제 또 인순이의 독백을 외우셨습니까?ㅋ
한사람님의 글은 언제나 진지하고 짠한 감동이 있군요.^^

한사람 2011-09-14 20:24   좋아요 0 | URL

히히, 외운건 아니고 ㅋㅋ
늘 진지하기만 한게 ㅋ 제 장점이자 단점...이라 생각해요 ㅠ

2011-09-15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5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