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기린의 말 - 「문학의문학」 대표 작가 작품집
김연수.박완서 외 지음 / 문학의문학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나잇살의 이름값

 


박완서(1931-2011), 이청준(1939-2008), 최일남(1932), 윤후명(1946), 이승우(1959), 권지예(1960), 이나미(1961), 조경란(1969), 김연수(1970), 이명랑(1973). 이상, 감히 이 책을 이루는 주인공들을 열거해 봅니다.  

이름을 부르고 나면 내게 다가와 꽃이라도 되어야 할진대 이들을 호명하고 나니 저는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수록된 작품들도 한결같이 그 먹먹한 이름값을 한답니다. 이 책은 2007년에서 2010년 사이 <문학의 문학>이라는 문예지에 실린 중견작가의 단편 10편으로 엮어진 소설집입니다. 작가들의 나이를 보니 이명랑 작가를 제외하면 모두 불혹을 지나셨습니다.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 이청준 작가와 같은 세대인 최일남 작가는 꼭 제 아버지와 출생연도가 같습니다. 저와 갑장인 김연수 작가를 기점으로 얼추 가까운 사촌 동생과 바로 위 언니에서부터 막내이모, 큰 삼촌, 고모부까지 꼭 집안 경조사라고 한자리에 모이신 어르신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속된 말로 애들은 가라, 식의 어른들 모임인 것이지요. 이 책을 덮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결론은 요즘 세간에 유행하는 어느 프로그램처럼 ‘나는 작가다’ 의 진짜(?) 라이브 소설 경연장이라도 구경하고 돌아온 느낌이었달까요. 문학의 연륜이라는 것, 세월의 내공이라는 것, 살면서 쓰면서 그들이 축적해온 것들이 담담하면서도 엄숙하게 녹아들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묵직한 감동을 선사하더군요. 고개가 절로 숙여지더라는 것이죠. 고개를 숙이니 새삼 이참에 처연하게 떨어진 꽃잎들이 서러운 계절을 확인합니다. 이번 봄엔 간다는 것, 가버렸다는 것에 슬퍼하지 말자 다짐을 했더랬죠. 삼년 째 불혹 증후군을 앓고 있는데 병도 오래되니 진화하는가 봅니다. 처음엔 나이드는 것이 꼭 계절에 지는 것만 같았는데 이젠, 슬슬 중년이라는 말도 익숙하고 내가 입어도 될 옷처럼 느껴지거든요. 이 책과 저와의 인연을 중년이라는 공감으로 정리하자면 이 책은 ‘중년이 그리워지는 소설’, ‘중년을 위로하는 소설’,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제가 소개를 할 순서는 이 책의 목차와는 다릅니다. 얼마 전 작고하신 박완서 작가와 이청준 작가의 작품을 앞에 두고, 그 다음부터는 나이순입니다. 이깟 순서가 뭐 대수라고 생각나는 대로 적어도 알아주는 이 하나 없겠지만, 어쩐지 이번만큼은 윗물 아랫물에도 예의를 차리고 싶었습니다. 나이가 뭐 중요 하냐,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나이들어서 그런 것일까요. 점점 나이드신 분들에게 깍듯이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 더 오래 더 많이 써온 것이 자랑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보기에 한참 어린 저겠지만 나이들지 않고서는 배어 나올 수 없는 향기, 아니 나이 들어서라야만 나오는 체액, 그 나잇살의 아름다운 완성을 보란듯이 증명하셨기 때문에요.


1.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2008) / 박완서(1931-2011)

저는 이 작품을 여러 번 읽고 읽을 때마다 청승을 떨었습니다. 이제 고인이 된 작가의 글이라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이 박완서 작가의 마지막 단편이라는 안타까움도 아니었습니다. 이토록 짜릿한 중산층 며느리의 속물적 심경은 이제 더 이상 만날 수가 없겠구나, 하는 애틋함이야 당연한 것이겠죠. 이야기는 영원해도 그렇게 한 세대는 가는 것일 테니까요. 허나, 이제 그 다음 세대인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차례구나, 내 할머니고 어머니가 아닌 내 이야기일 수 있구나 하는 현실감이 너무나 분명하게 잔인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꼭 먼저 간 남편은 아직도 젊은이인데 남겨진 아내만 할망구가 되어버린 얄궂은 운명만 같아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게 소설 속 주인공이 되었다가 저 역시도 사라지는 세대가 될 터이니까요.

박완서 작가는 생전에 ‘나는 사람과 세상에 복수하려고 글을 쓰게 되었다’ 고 한 바 있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 야속하기만 한 세상에게 보아라, 당신네들이 실은 이렇게 생겨먹지 않았소, 내가 모르는 줄 알았지? 하고 말하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상처를 글로 갚는 것이 작가들의 재주이자 팔자인 것일까요. 이 작품의 주인공은 며느리도 있(었)고 시어머니도 있는 낀 세대 며느리입니다. 물론 아들도 남편도 있지요.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잃은 작가가 눙쳐낸 며느리 보고서는 뭐라 언급하기조차 미안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사실적이고 속속들이 저릿저릿합니다. 일제시대 경성사범 학교를 나오신 교사출신 시어머니를 둔 며느리는 말합니다. 나는 결코 저런 잘난 시어머니는 되지 말아야 겠다고요. 그런데 여우같은 여자에게 홀려 장가간 아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남의 자식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우린 지금 남남이라니까요, 완전.’ 아무리 지들 좋아 한 결혼이라지만 부모에게 상의 한마디 없이 이혼한 자초지종이라도 들어보고 싶었던 주인공의 계획은 한 때 며느리였던 아들 전처와의 깔끔한 대화로 마무리됩니다. 작가는 묻습니다. 이들이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 어떤 며느리의 잘못 때문이냐고요. 혹시 아들의 어머니가 갱년기인 탓은 아닐까 하고요. 입술은 마르고 얼굴은 벌개지고 속에선 천불이 난다는데 나이들면 다 그런 것이냐고요. 시어머니에게 위로부터의 모멸감을 느낀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아래로부터의 패배감을 느끼며 집에 돌아옵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코 골며, 아, 아 간간이 신음하며’ 잠이 듭니다. 아니 꿈을 꿉니다. 집에서 못된 바람은 죄다 여자에게 불어 오나니 속에서 천불이 날 수 밖에요. 하지만 남편이라는 현실앞에선 완벽히 꺼지지가 않네요. 사람에겐 그래서 꿈이 필요한 걸까요. 가슴이 홧홧해지는 것이 꼭 갱년기 예행연습 만 같아, 이 작품을 예방약처럼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속은 좀 상해도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느새 속이 시원해지니까요. 아마 박완서 작가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2. 이상한 선물(2007) / 이청준(1939-2008)

이 작품도 이청준 작가의 유작입니다. 두 분 다 소설의 고향같은 분들이라 한자리에서 괜스레 마음이 황망해지는 시간이었어요. 저에게 이청준 작가의 단편은 '소설의 교과서'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한번 읽고는 제 뜻을 파악하지 못한 듯 싶어 두 번, 세 번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곤 한답니다. 이청준 단편들은 언제나 충분히 평범하고 느리게 시작하는 편인데 이 작품도 그저 나이 지긋한 한 사내가 고향길을 찾아가는 장면이 처음입니다. 그다지 별스럽지 않아 보이죠. 극적인 반전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심각한 사건이 날 것 같지도 않아요. 그래서 초반엔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되니 쉬워 보이는 구석이 있어요. 그런데 자꾸 따라 가다보면 정신을 차리지 않고서는 덮고 나서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많지가 않습니다. 꼭 어려운 문제 가르쳐 주는 선생님의 당부 말씀 같은 소설입니다. 설명을 하도 완벽하게 잘 하셔서 그럭저럭 수업 들을 땐 내가 내용을 이해했다고 생각이 들지만 집에 가서 혼자 풀어보려면 손댈 수가 없는 문제처럼 말입니다. 소설이 완벽하다고 선생님이 완벽하다고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이야기의 웅숭깊음, 소설의 절대성, 문학의 경지 같은 의미를 절로 떠올리게 합니다.

이청준 단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미덕은 그 완성도를 향한 모든 문장의 적확한 밀도 가 아닐까요. 전혀 작위성을 감지 할 수 없는 편안함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할 말을 하고 싶은 만큼만, 해야 할 만큼만 하고 붓을 놓습니다. 가령,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그는 그 돌판 조각이 진짜 벼루로 변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무연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혼자 중얼대고 있었다.’인데 이 문장만 떼어놓고 보면 꼭 이것이 끝인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끝이라고 하기엔 아쉽고 남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여운속에서 몇 번이고 이 문장을 읽습니다. 그러다보면 아...중요한 것은 ‘그 돌판 조각이 진짜 벼루로 변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하는 우리네 심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돌판 조각도 벼루라고 우기고 그것을 알면서도 돌판으로 먹을 갈았다 하는 것이, 그런 사람이 있었다지, 그 사람을 알고 있네 하는 것이 바로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으니까요. 작가는 혼신을 다해 앞서 이야기가 생산되고 그것을 유통하는 마을사람들의 심리를 잘 설득해주었던 것인 걸요.

그래서 작가가 전해주는 ‘선바우골 인물전’의 인물들은 사실 '날궂이 하는 미친년'이나 유난히 큰 양물을 지녔다는 '장순이'나 비극적 천재 '씨름꾼'이나 동네 '그림자 도둑', '도깨비 할배'의 이야기가 아니고 ‘저 몹쓸 도둑이나 노름꾼, 패륜아 무리까지도 나름대로 사람살이의 반면 거울을 삼을 수 있었’다는 동네사람들의 이야기 인 것입니다. 그 동네사람들 중에서도 '걸어 다니는 법'전으로 불렸다는 '황기태 씨'가 동네 최고의 출세인물일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죠. 황기태 씨는 지방 중하위 공무원으로 크게 출세했다고 볼 수 없는 인물이지만 고향에선 공부로 출세한 그를 ‘선바우골 인물전’의 어엿한 주인공으로 여겼다네요. 작가는 기인이나, 재주꾼, 초인격 인물의 이야기가 신화를 만들고 신화를 통해 마을이 하나로 묶이는 과정, 알면서도 속아주며 풍진세상을 헤쳐 나가는 보통 사람들의 고집스런 세월을 담담히 보고합니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속담의 주인공, 전남 장흥이 고향인 작가가 고향을 위해 평생토록 해야 했을 일은 시골에 길을 닦아주고 다리를 놓아주는 일이 아니라 황기태 씨처럼 고향 인물전의 주인공이 되어주는 일은 아니었을까요. 아니 보다 많은 황기태 씨의 이야기를 만들고 전해주는 일은 아니었을까요. 이청준은 바로 진짜 벼루로 변신할 지 모르는 숫돌판을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는지 모르겠어요. 비록 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상한 선물’이라고 회자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3. 국화 밑에서(2010) / 최일남(1932)

주제넘지만 저는 여지껏 이런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유식하고 고상하게 혹은 어렵고도 근사하게 이 작품을 말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제 언어로 그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할 밖에요. 이 작품은 이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두 분의 고인을 제외하면 작가들 중에 가장 고령이시고요. (참고로 제 아버지가 1932 년생이신지라 아버지의 이야기만 같습니다) 가장 연장자가 말하는 소설은 가장 자연스런 ‘죽음’을 주고받는 대화 였습니다. 그냥 소설이라기 보다는 평소 생각으로 보였습니다. 평생토록 생각해온 것들을 다만 글로 적었다는 느낌이었어요. 주인공은 하루에 두 번의 장례식장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곳의 상주와 주거니 받거니 장례문화와 풍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제가 놀랍게 느낀 것은 소설언어가 격조높고 고풍스럽다는 것입니다. 같은 한국어인데 어딘가 국어수준이 높은 선진국 나라의 언어같았다고 할까요. (배운)어르신으로서 젠 체 하는 한자나 고리타분한 옛 글투가 아니라 수준높은 한글과 국어, 그리고 인문학적 용어들이 멋스럽게 용해되어 있었습니다. 단순히 의성어, 의태어의 맛깔스런 표현이 아니라 예를 들면 ‘미소를 띤 모습이 긴 세월을 와락 당겨 냅뜨는 폭인가, 그때 그 사람의 얼굴이 빈소에서 보다 훨씬 뚜렷했다.’ 혹은 ‘근력이 좋아 뵌다는 수인사에 내장은 엉망이라는 겸양이 상투적일지언정 말의 디딤돌로는 불가피하다.’같은 문장에선 이미 우리말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문체로 문학이라는 언어를 이룩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보시게. 사는 일이 들쭉날쭉인 터에 사람들의 삶에 언제는 서론결론이 따로 있었다고 믿나. 심심파적인 양 중간에 어쩌다 반전이 있기는 있거늘 그것도 믿을 게 못되네. 잘못 뒤집었다간 본전마저 날리기 쉬우니깐.”

그래서 위와 같은 구절은 마치 작가라는 대 인생선배가 한참 아래인 인생후배에게 전해주는 생활속 조언만 같습니다. 이 작품에는 장례를 말하는 영화와 소설, 시를 비롯해 작가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아는 만큼, 보고 듣고 느낀 만큼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저는 이제부터 누군가가 어떻게 죽고 싶느냐고 물어본다면 ‘화장실에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가고 싶다고 그렇게 시적으로 말하려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비로소 환해지는 죽음도 문학에는 있다더라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에는 죽음의 종류도 다양해 입맛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냐, 가령 어느 노작가의 잘빠진 소설에서처럼 말입니다.


4. 소금창고(2007) / 윤후명(1946)

작년에 윤후명 작가의 글을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2010 / 현대문학>에 수록된 ‘모래의 시’라는 단편으로 뵌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의 글은 전체적으로 몽환적이고 시적입니다. 그래서 끝내 철학적으로 마무리 되는 작품이기에 읽고 나면 더없이 쓸쓸해지는 바람같이 몹쓸 종류의 소설이죠. ‘모래의 시’는 어머니 임종 후 고향인 강원도 바닷가를 찾아가며 지나온 삶의 편린들을 시적인 감성으로 회상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건 '손 한 번 잡아보자'는 어머니의 유언이 마치 파도에 휩쓸린 모래알처럼 아스라이 흩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삶이란 그리움의 야적장 같은 것이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버려져 있는 저 폐품들을 보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폐품은 유품이 되어 달겨든다. 버려야지, 하면서 내놓았다가 다시 하는 수 없이 간직하곤 하는, 이젠 못 쓰는 낡은 물건들 속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리움들.... 많은 그리움을 뒤에 두고 우리는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 것일까.” - 모래의 시 中

우리는 늘 그렇듯이 추억을 찾으러 떠났다가 그리움만 잔뜩 발견하고 돌아오곤 합니다. 결국 그리움도 무언가를 찾기 위한 강렬한 의지로부터 생겨난 욕심일뿐 아닐까요. 누군가가 보고 싶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려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것이죠. 보고 싶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구요. 이번 소설에서도 작가는 그 시절을 찾아 떠납니다.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것이 마치 그리움을 해소해 주는 일인 것 처럼요.

더욱 낭만적으로 이제는 사라진 협궤열차를 타고 그 옛날 염전 바닷가에 위치한 소금창고를 찾아 떠납니다. ‘협궤열차’는 주인공에게 ‘지난 한 시절이 실려 있는 열차’이고 ‘내가 헤매 다니던 그곳’이며 ‘오랫동안 내 젊음을 보낸 공간’이기도 합니다. 열차를 타고 달리는 짧은 여행은 과거 ‘조개의 섬’이나 ‘갯벌의 황소’를 만나러 가는 길이며 친구들과의 추억이 깃든 그리움의 시원, 바로 ‘소금창고’와 재회하러 가는 길인 것입니다. 소금창고는 ‘순간이 마지막 휘발되기 전에 갈피 지어 차곡차곡 쟁여 둠으로써 추억을 발효시키’는 공간이었다죠. 그곳에서 추억을 나눈 친구들은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남루한 사진 한 장만 남았지만 그땐 그렇게 소금창고에서 시만 쓰고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라면에 바닷가 젓갈들만으로도 살아갈 계획을 세워놓고 그것을 ‘희망’이라고 불렀으니까요. 사람에게 어떤 희망은 죽는 날이라는 절망속에서도 죽도록 잊혀지지 않는 질긴 환영일까요. 그렇다면 주인공이 자꾸 우연히 마주치던 여자 여행객은 소금창고에 저장된 추억의 환영이었을지 모릅니다. 우연도 세 번이 넘으면 필연이라 했던가요. 아...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네요. 그것은 희망으로 동화(同化)되는 한 편의 동화(童話)였습니다. 열차가 달려가는 그곳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희망스런 날들의 시공간, 그 희망의 기록장 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추억은 아름다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소금창고에 꽁꽁 쟁여둔 소금, 세월이 지나도 절대 썩지 않는 소중한 그것. 나만의 그것 말입니다.


5. 한 구레네사람의 수기(2008) / 이승우(1959)

이 작품은 이 책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소설입니다. 저는 사실 소설에 종교적인 기운이 강하게 묻어나 있는 글을 별로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예수와 십자가의 의미를 등에 업고 인간 구원의 과정을 그려내는 작가의 행보가 썩 맘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성경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제가 호감가지는 장르의 글은 아니었던 것이죠. 구레네 사람 시몬은 병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려고 골고다 언덕길로 끌고 갈 때, 그 처형장면을 구경하려고 언덕 가까이 왔다가 잡히는 바람에 예수가 무거워 힘들어하는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는 인물입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기독교 역사상)영광스런 큰일을 한 사람이죠. 작가는 이 성경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시몬의 시점으로 서술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다시 쓰는(re-writing) 방식의 소설 인지라 저는 최근에 익숙한 서사를 재해석하기로 유명한 소설가 최제훈 작가를 떠올렸습니다. 최제훈 작가의 전략이 텍스트의 변주로 이른바 읽는 사람 마음대로 독자 ‘좋을 대로 해석하기’였다면 이승우 작가의 전략은 ‘다른 눈으로 해석하기’로 생각됩니다. 역사는 인물과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서술하는 시점의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이 작품에서 시몬은 흑인인데다가 장사꾼으로 등장합니다.(구레네는 지금의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지방에 해당) 아들과 함께 돈되는 곳을 찾아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보따리 장사꾼인 것이죠. 작가가 이미 가지고 있던 제 편견을 누그러뜨리며 전혀 다른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생각한 것은 바로 시몬이 사람의 아들이라 불린다는 나사렛 사나이를 두고 인간적인 의심을 품는 부분이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 를 섬세한 소설로 완성시킨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되는 과정과 그 순간에 일어나는 한 인간의 깨달음을 종교적이지 않게 주형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시공간에 자석같이 편입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 인간이 그것이 구원인지 변심인지 무엇인지 인식하기 전에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설명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체험이 아니면 감동받기 힘든 것이죠.

“그리고 나는 예감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람으로 인해 나의 인생인 달라질 거라는 예감은 바위처럼 견고했다. ... 그가 세상을 구원할 능력을 가졌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의 눈과 손에 붙잡혀 다른 존재로 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롭게 변화되지 않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그 사람이 예수가 아니더라도 살면서 한번쯤은 겪게 되는 순간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특별해 보일 것 같은 순간의 솔직한 보편성에 감동받았습니다. 결국 구원받는 순간은 늘 바라던 구애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아닐까요. 나를 구원해주는 대상이 예수가 아니면 어떤가요. 중요한 건 지금부터 달라질 내 인생 인 것이지요. 그건 흑인이건 장사꾼이건 구원을 원하는, 혹은 원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공평한 시작 아닐까요. 돌이켜 보건대, 제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기대하건대, 앞으로도 이 순간이 다시 오길 바라게 되네요. 그러니까, 끝내 ‘희망’을 설득하며 묘한 끌림을 주는 매력적인 소설이었습니다.


6. 퍼즐(2007) / 권지예(1960)

이 책에서 가장 소름끼치고 을씨년스러워 한나절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통속적일 수 있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사연이 미세한 고품격의 감성들로만 조각조각 맞추어지는 느낌. 같은 불륜이라도 감독에 따라 예술영화가 되듯이 말입니다. 마지막 순간 책을 덮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완벽히 맞추어진 퍼즐의 잔상에 애도의 시간이라도 가져야 할 것 같았습니다.

"단 한 조각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완전하게 맞추기 위해 퍼즐 게임은 존재하는 것이다."

여인은 5대 독자의 집안에 재취로 시집을 옵니다. 순전 씨받이 역할로 말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웃기기도 하야 전처가 낳은 딸의 방에선 임신 테스트 키트가 발견되지요. 처음부터 대놓고 아들낳기를 강요받아온 이 여인은 여러 차례 태아감별 검사로 강제적 인공유산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폐허가 된 육신은 어느덧 폐경이라는 절망을 받아들여야 했고 가족의 외면속에서 정신마저 피폐되어 갑니다. ‘한 세상 지나며 씨를 내지 못하고 꽃이 진 자신의 몸을’ 매순간 자각하는 여인은 전처 딸의 창가에 둥지를 튼 새와 고양이 울음소리와 사라진 아기들의 뼈, 핏덩이로 흩어진 살점들을 제 정신으로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족이 된지 18년이 되었지만 늘 ‘물 위의 기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작품에서 여인의 취미로 묘사된 퍼즐을 맞추는 작업은 거꾸로 완성된 작품에서 하나씩 퍼즐이 사라져 가는 게임으로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소멸의 완성이 퍼즐게임의 승리일 수 있다는 것. 여인은 끝내 사라짐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킨 것이니까요. 미술품에 애정을 쏟는 남편은 겉모습만 중시하는 가식적인 중산층의 표상이겠죠. 내면의 아름다움과 상관없이 형식적인 틀에 맞춰 아들이라는 퍼즐 하나가 간절했던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거부하는 전처 딸이 둥지에 든 새를 혐오하는 것은 자발적인 낙태와 함께 인명을 경시하는 다음 세대의 환유이겠지요. 파출부 자식이면서 지적 장애를 가진 다 큰 아들이라도 하나 있었다면 좋겠다는 여인의 마지막은 권지예 작가의 계략이자 치밀한 각본의 결과입니다. 포르말린에 채워져 물러 터지고 말 과육과도 같은 살점의 영구보관. 그녀가 스스로 뚜껑을 닫으며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되어버린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뚜껑을 덮으면 엄마 뱃속처럼 따뜻해서 괜찮을 거라는 그래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는 그곳은, 혹 누군가가 뚜껑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을까요?


7. 마디(2007) / 이나미(1961)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삭발’을 감행합니다. ‘요즘 부쩍 스무 살 이후로 이십년 세월이 드문드문 도막난 채 떠오른다’는 주인공이니 얼추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모양입니다. 그녀는 음대 작곡과 출신의 강사인데 어린 시절 장독대에서 떨어져 귀를 크게 다친 경험일랑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 사실이 환기되느냐 하면 삭발하고 보니 그토록 엄청난 상처를 남긴 흉터가 세상에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즉, 머리만 깍지 않았어도 잊고 살아도 좋을 상처였지요. 왜 머리를 깍아야 했을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어찌어찌하다 마흔에 드디어 삭발하게 된 이유를 말하는 소설인 것입니다. 삭발하였으므로 오래된 상처, 잊었던 나를 발견한 이야기일테니까요.

삭발을 하게 된 경위는 여느 소설과 다르진 않았습니다. 그녀는 실연을 당했고 친구는 배신했으며 교수임용에도 실패했으니까요. 그런데 작가는 그간의 사연에 구구절절 치중하기 보다는 삭발식으로 향하는 심정과 삭발식의 순간에 보다 집중합니다. 사진관과 목욕탕, 미용실로 옮기는 발걸음이 얼마나 장중하던지 흡사 입대를 앞둔 누군가가 생각나기도 했으니까요. 직업적으로 청각이 누구보다 중요한 그녀에게 감응 신경성 난청이라는 뜻밖의 진단은 아무리 잘 견뎌온 인생이라지만 새로운 상처가 되고도 남았겠지요. 작가의 오랜 내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멀지 않았습니다. 삭발이라는 초강수도 울고 갈 꽃구경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마디’가 제목으로서 울림을 주는 절절한 깨달음. 생물의 마디는 절연되었기에 마지막이 아니라 지금부터 성장할 수 있기때문에 소중한 마디였던 것이죠. 잘라내었기 때문에 새롭게 자라나길 기다리는 마디였던 것입니다.

“최근 내 인생도 전지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했다. 자의든 타의든 쳐낼 것은 쳐내고 그 상처의 마디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굵고 튼실해진다는 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몽당나무들.”

가지를 치는 것(전지작업,剪枝作業)이 과실의 생산을 늘리기 위한 작업
이었다는 것을 알 게된 불혹이야 말로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는 나이’라는 작가의 마지막이 저는 어쩐지 이 책에서 주제상으로는 가장 젊다고 느껴진 소설이기도 합니다. 아직, 마흔밖에 되지 않은 것이니까요. 작가의 문장들도 아픔을 무릅쓰고 곁가지를 잘 다듬어 내었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입니다. 생각보다 마흔 즈음에 찾아오는 불혹병이 깊고 쓰라리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젊고 건강하게 한 이십년 살다보니 그 시절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룬 것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다면 없는 대로 자아성찰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게 되어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죠. 제 경우도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처럼 ‘난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내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제와 없어진 무엇을 발견하는 일은 실로 ‘나이 마흔에 벌어 놓은 건 나이뿐이’라는 이 소설의 허탈함과 꼭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상처의 가지치기, 전지작업이 필요했던 제게도 선물같은 작품이었습니다. 가지치기를 끝내고 다음의 열매를 기다리는 이 심정을 당신도 알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8. 파종(2009) / 조경란(1969)

잘은 모르지만, 작가들은 이런 소설을 훌륭한 소설이라고 말할 듯 합니다. 꼭 화장을 하고 나왔는지 분명히 알고는 있지만 전혀 화장을 안한 듯 느껴지는 고난이도의 화장술처럼 말입니다. 기초부터 꼼꼼히 바를 걸 다 바르고 색조도 종목별로 다 했지만 누구보다 자연스러워 마치 원래 타고난 얼굴인듯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화장술. 알고 보면 그게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인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죠. 하루아침에 표현할 수 있는 테크닉이 아님을, 오랜 세월 터득하고 반복되어온 끝에 이루어진 진화의 산물임을 화장하는 사람은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소설가를 글쓰는 기술자로 보았을 때 절대 흉내낼 수 없는 수준높은 기술력으로 탄생된 제품일 것입니다.

우선 이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가족’입니다. ‘어제는 달에 갔습니다.’ 라는 생뚱맞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적 도입이 저는 좋았습니다. 뭐 대충 가족이 시적이기 얼마나 어렵습니까. 소설에서 만난 가족들은 (우리 가족과 똑같이)대개 ‘구질구질’하거나 ‘지긋지긋’하기 마련이니까요. 작가는 달나라에 착륙한 우주인처럼 달밤의 장면을 아름답게 중계합니다. 그 에메랄드빛 바다에 표독스런 송곳니를 가진 바다코끼리를 보았다는데 그 녀석이 꼭 자기 식구들 같다고 노래하네요. 서로의 몸통에 작살처럼 쑤셔 넣는 송곳니야말로 우리네 가족들의 오래된 무기라고요. 무릎을 탁치며 이것은 시라는 실로 소설을 뜨개질하는 작가의 기술력이다, 이렇게 감탄을 했습니다.

그렇게 바다코끼리의 송곳니를 가지고 돌아와 우리 가슴속에 서서히 후벼 파는 기술을 작가는 미련없이 보여주더군요. 읽는 동안만큼은 이 책에서 이 작품이 제일 아팠거든요. 사실, 가족이라는 존재는, 고의로 상처를 주기보다는 툭툭 늘 습관적으로 스크래치를 내고 가지 않습니까. 어떨 땐 상처인지도 모르고 지나갈 때가 더 많은 게죠.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집에서 오래 살다보면 서로의 송곳니도 흉기가 아니라 공구로 생각되니까요. 드라이버 좀 돌렸다고 아프다 소리치면 그건 우리끼리 엄살인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글로 소설화되고 나면 참 전혀 새로운 아픔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 아픔을 별스럽지 않게 감당하는 가족은 아버지와 딸입니다. 아픔을 과장하지 않고 단순하게 절제하면서도 그 순간을 정밀하게 포착해낸 작가의 솜씨가 일품입니다.

“아버지는 나 몰래, 나는 동생 몰래 모두가 잠든 한밤중의 식탁에서 눈치껏 술을 마십니다. ...이곳에서 나라는 존재는 저녁 밥상을 치우는 것으로 깨끗이 끝납니다. 조금만 배려받지 못하면 풀이 죽고 무시당한 느낌이 들곤 해요. 나이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를 보면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는 나는 아무 데서나 엎드려 잠들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동생은 엎으려 있는 내 귀를 왼손으로 잡아 끌어올리면 언니야, 또 달에 갔다 왔냐? 혀를 차기 마련이지요. ”

일본에 시집간 동생이 팔에 기브스를 하는 바람에 살림을 도와주러 간 아버지와 큰 딸은 어쩌다보니 둘도없는 내면의 술친구가 되버립니다. 이들이 가족간의 상처를 견디는 방법은 공교롭게도 알코올이었거든요. 힘이 되주려 간 것이지만 눈치 덩어리가 된 아버지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큰 언니는 도쿄라는 낯선 도시 어느 시장 골목을 헤매돌다  허름한 술집에서 반갑게도 재회합니다. 술을 끊지 못해 서로 울고 싶은 마음으로 웃어보는 두 사람, 서로에게 ‘딱 한잔’만 권하며 술잔을 건네던 그 장면은 조경란 작가가 말하는 웅숭깊은 가족의 백미였습니다. 아버지는 딸네 집 베란다가 허전해 꽃이라도 심어보려고 꽃씨를 사오는 분이었어요. 타국에서 사온 꽃씨가 시금치 씨앗인지도 몰랐고 파종시기도 모르셨지만 시금치가 명아주과라는 풀인 것은 아는 사람이었어요. 여기저기 빈터에서 흔히 자라지만 툭 던져놓으면 잘도 뿌리를 내려 쑥쑥 자라는 풀 말입니다. 어쩌면 가족이란 장미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시금치처럼 질긴 것이 아닐까 싶어요. 마침 시금치는 찬 바람과 눈을 맞고 자란 1월 것이 가장 맛이 좋다고 하잖아요. 각자 가진 송곳니로 서로를 할퀴어도 그토록 시린 세월을 지나온 가족이야말로 서로에게 가장 뜨거운 존재들이겠죠. 조경란의 <파종>은 가족이라는 흔하고도 질긴 씨앗을 송곳니처럼 특별하게 심어주는 소설이었습니다.


9. 깊은 밤, 기린의 말(2010) / 김연수(1970)

이 작품은 이 책의 표제작이면서 첫 수록 작입니다. 책을 덮고 조용히 왜 이 작품이 표제작이 되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솔직히 제목만으로 보면 소설집의 이름이 될 만한 작품으로는 이 작품이 가장 문학적으로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열 편을 묶어주는 아예 다른 언어로 제목을 지을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깊은 밤, 기린의 말’은 의미심장한 네이밍이라는 것이죠. 특히 동물원이 운영중인 대낮도 아니고 ‘깊은 밤’에 들려오는 ‘기린의 말’은 어떤 의미일까. 기린이 말은 할 수 있으며 또 한다 해도 누군가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기린이 말을 한다 가정했을 때 그럼 어떤 내용을 말 하였을 것인가. 그런데 왜 하필 기린이란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기린’이 의미하는 바를 성찰하는 이야기이며 그것은 이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과적 전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기린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우리는 기린이 하는 말을 꼭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기린이 말을 하지 않았거나 들리지 않았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어도 말입니다.

이처럼 기린에게 눈과 귀를 기울여보면 작가가 왜 자폐아 가정을 관망하여 관통하는 동물로 기린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봄날 쌍둥이 자매와 자폐동생 태호 삼남매는 동물원을 가게 됩니다. (동물원에서는 꼭 벚꽃이 흩날리거든요) ‘엄마와 아빠는 우리를 동물원에 버리려고 한 적이 있었다.’는 꽤 자극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도입은 알 수 없는 슬픔을 예고하는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물원에서의 ‘기린은 멀리서 우리 쪽을 바라봤다. 우리는 기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기린은 무엇도 흔들지 않았다. 기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즉 이들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때 기린은 마치 자폐아 동생처럼 소통이 불가능한 대상인 것입니다. 쌍둥이 자매는 ‘기린과 태호가 말하는 방식’이 같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 작품에서 태호의 엄마는 ‘시인이 되지 못하고 내성적인 쌍둥이와 자폐아의 엄마가 된’ 꿈을 잃어버린 중년으로 등장합니다. 엄마는 태호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닐지어니’라 시를 적습니다. 엄마는 시를 적고 태호가 관심을 보인 강아지에게 ‘기린’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기린’이라 말하면 태호가 유일하게 반응을 보이며 좋아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날부터 태호와 기린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겠죠. 신기한 것은 태호가 기린과 소통이 되(었다 생각하)자 엄마는 문학 신인상 공모에 당선이 되며 시인의 꿈을 이루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애끓는 절망을 적은 것이 애틋한 희망이 되어버린 겁니다. 헌데, 얄궂게도 기린은 앞 못보는 장애 강아지였습니다. 같은 상처를 지닌 존재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 그건 꼭 기린과 태호만은 아닐 겁니다. 태호와 가족은 이제 기린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죠. 우는 이유를 알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무리 깊은 밤일지라도 그것은 기린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기린의 말은 시각장애처럼 아픔을 가진 사람이 들려주는 울음과 같은 목소리가 아닐까요. 모두 잠든 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이 소설이라는 시공간에서 각자 생의 상처와 고통을 토해내는 작가들의 깊고도 조용한 말... 그것은 강아지를 기린이라 생각하며 행복을 느끼는 태호에게 희망이 되고도 남는 말일테죠. 누구에게나 들리는 말은 아니고 태호처럼, 태호가족처럼 기린과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독 더 생생히 들리는 한밤중의 교신일테죠. 작가들의 발신음이 별처럼 수놓아지는 아름다운 밤일테이죠.

당신은 기린의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기린의 울음소리에 같이 울어 본적이 있나요?


10. 제삿날(2009) / 이명랑(1973)

이 작품을 가장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명랑하다기 보다는 맹랑하달까. 한편의 잘 짜여진 단막극처럼 꽁트로 여겨지는 구성과 솔직하고 시원한 대사들이 매력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소설은 화자가 여러 명입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이며 각자의 입장에 처한 주장을 비교해 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왔습니다. 모두들 자기 생각만 하는 어른들이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 나라고 별 수 있었을까 싶어 슬퍼지기도 하더군요.  밖으로 꺼내놓고 말을 안해서 그렇지 속으로 삼키는 말을 말풍선에 달아봅시다 ! 모두 똑같을 테죠. 이 책에서는 가장 나이가 어린 작가지만 그녀가 들고 나온 문제는 우리사회 만연되어 가고 있는 ‘노인 부양 문제’ 였습니다. 노인을 둘러싼 자기들 문제겠지만요.

소설에선 두 어머니를 둔 아들과 며느리가 등장합니다. 두 어머니는 현재 과부인 실정이고 이들은 우연히 만나 같이 살게 된 경우입니다. 그 우연이라는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엄청난 비밀이었다는 것인데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밝혀지는 출생과 양육의 모든 과거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주인과 더부살이 관계인 이들 두 어머니가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자식들이 병원에 모이게 되었고 여기서 병원비와 간병인에 대한 의견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죠. 작가는 이 상황에서 주인 어머니의 큰아들과 큰 며느리, 더부살이 아주머니의 아들과 며느리를 각각 공평한 화자로 내세우며 정당한 발언권을 부여합니다. 이들 네 명이 속내를 드러내며 어떻게든 자기 부모를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작태는 속된말로 재수가 없는 꼴이지요. 그 와중에 주인 어머니의 큰 며느리는 충격받아 쓰러진 척, 쇼를 연출하기까지 하네요. 더부살이 아주머니를 내쫓았다는 막장 며느리는 ‘그나저나 이 노인네는 왜 죽지도 않나?’ 하며 자칫 잘못하다가 병수발 들지 모르는 자신의 오늘에 적나라한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런데 이들 네 명의 배은망덕한 자식들을 뒤로 더 충격적인 반전의 커밍아웃을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분이 있었으니.... 우리 어머니들은 왜 그렇게 모두들 기구하기 짝이 없을까요. 두 과부가 거짓말처럼 공유한 귀신의 사연이 그것입니다. 어찌 보면 자식들을 속여 온 두 어머니의 세월 속에서 인생의 죄와 벌을 논하는 짜릿한 반격은 속이 다 시원할 정도였지만, 책을 덮고 나면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참 완벽해 보였다고 할까요. 조금더 씁쓸해도 좋았을 듯했는데 너무 완벽해 인간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그 점, 그것만이 옥의 티였습니다. 그것도 실은 위의 어르신들의 작품을 읽었기에 자동적으로 비교되는 결과였구요. 제가 인위적으로 나이순으로 작품을 배치했는데 그건 아마도 세월따라 쌓여지는 나잇살만큼의 연륜, 마음의 무게가 아닐지요. 


나이듦의 시간값 

긴 서평을 지양하려 했는데 이번에도 실패했습니다. 요즘 제가 젊은 작가들의 소설집을 동시에 읽고 있는 터라 이 책은 나이는 괜히 먹는 것이 아니라는 끄덕임을 주는 시간이었어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대개 아찔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매스도 예리하고 송곳도 날카롭지요. 반면에 지긋하신 작가들의 소설은 느리고 두껍지만 둔중한 울림이 있습니다. 나이든다는 자신감을 선사하는 자랑스런 작품들이라고나 할까. 좋은 소설, 좋은 작가가 많겠지만 자신의 위치와 경력에서 작품으로서 완벽한 소설을 완성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저는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당대에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으로만 느껴집니다. 조금 호들갑을 떨어보자면 같이 살아주셔서 읽게해 주셔서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만큼이요. 허나 현대미술관 같은 갤러리에서 이름난 화가들의 작품을 모두 관람한다고 해서 전 작품을 이해하고 돌아오진 않지요. 그냥 가슴으로 느낄 뿐, 작가가 말하려 했던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 작품들을 모두 잘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돌아오는 길이 분명 벅찬 감동으로 가득했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진실이랍니다.  

나이가 드니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고상하게, 더 품격있고 교양있게 나이들 수 있을지 그것도 고민이 될 때가 많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고민은 나이가 들어도 어째 나이들어 기대하는 자기모습이 아닌 것 같기에 계속 하게 되는 고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나이 들었다고 다 용서되고 다 알아지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씀이죠. 욕심이 사라지기는 커녕 헛된 바램은 더해지고 부질없는 기다림도 생기더란 말입니다. 이제껏 먹은 것이라고는 나이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벌어 놓은 것이라고는 나이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때 이렇게 나이든 작가들의 나잇값 제대로 하는 소설을 읽는 것도 좋은 처방인 듯합니다.  

이제 '깊은 밤, 기린의 말'쯤이야 모두 알아 듣고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강아지도 그가 좋다면 기린이라 부를 수 있고 그래서 기린이기에 못다한 말까지도 강아지 안아주듯 보듬을 수 있는 나이이길 바랍니다.

그 말귀 알아듣는 알찬 시간이야 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나이듦의 시간이 아닐까요. 나잇값을 한다는 것, 그 나잇살만큼 불어난 시간값을 한다는 말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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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5-22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꼭 봐야겠습니다. 나는 작가다!
정말 '나는 가수다' 보면서 가수가 노래 한 곡 뽑아내기까지
저렇게 힘이 드는거였구나, 새삼 깨닫겠더라구요.
뭘 하든 이런 마음으로 하면 좋겠구나 싶어요.

한사람 2011-05-22 22:00   좋아요 0 | URL

아..스텔라님..후회없으실 거여요~
어제 책 덮고 오늘 오전동안 폭풍처럼 리뷰를 작성했어요^^
노래를 잘한다고 꼭 인기가 많은 것은 아니듯이
소설 잘쓴다고 꼭 책 많이 팔리는거 아니잖아요..
하지만 분명 명품 소설들이었어요^^

굿바이 2011-05-23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 기대가 되지만 한사람님의 글이 좋아서 몇 번을 읽습니다.
좋은 책 소개 잘 읽었습니다 ^^

한사람 2011-05-23 18:23   좋아요 0 | URL

요즘은 글 잘썼다는 말도 좋지만, 글이 좋다는 말씀이 더 좋습니다^^
제 글이, 몇번이나 읽을 만한 글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은 자꾸 다시 보고 싶은 책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5-24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서평이군요, 책 앞에 실렸으면 싶을 정도로 좋은 글이네요.

제가 소설을, 특히 한국 단편 소설을 그다지 선택하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
한사람님의 글로 인해 냉큼 장바구니로 넣습니다.

네, 나이듦이란 내가 누구인지 알고 타인이 누군이지 알아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말귀를 알고 서로 보듬어준다는 것, 쉽지만은 않은 일 같아요. 그렇게 늙을 수 있을까요?

한사람 2011-05-24 09:58   좋아요 0 | URL

저는 생각해요..나이들면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줄것 같아도 어쩐지
반복되는 자신의 말만 하게 되는 것 같아서요..나이들었다고 안들어 주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요 ㅠ.ㅠ
실은 말이 많고 지겨우니까 잘 안듣고 싶은 것인데 말이죠..

요즘은 잘 늙어야 잘 죽을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잘 죽는 건 태어나는 것처럼 아주 운명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보물선 2011-06-01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있는데... 이거 이벤트가 되서 문학의문학 계간지도 1년치 온다는데...
문학적인척만 하는게 아닌가 싶다. 읽어야 내속에 스미지...

한사람 2011-06-02 00:44   좋아요 0 | URL

좋겠다 ~

나는 그런 이벤트는 당첨된적이 거의 없어요 ㅠ.ㅠ
 

 

#1. 약속

책을 받아들면 마음으로 이 책을 언제까지 읽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 책 약속은 칼같이 지키는 편이다. 책이 책상에 쌓이고 점점 높이가 높아지는 것만큼 스트레스도 없기 때문에. 누가 언제까지 읽으라고 강요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책을 치우지 않는 책상이 제일로 하루를 무겁게 한다.

#2. 피로

나는 책을 빨리 읽는 편은 아니다. 제일 빨리 읽었던 시기는 20대 때였던 것 같다. 엄마가 책을 참 좋아 하셨는데 아주 옛날, 그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는 한자리에 앉아서 책 좀 오래보면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눈도 침침해져서 이것도 늙어서 할 짓은 아니라고. 그런데 이 말씀을 이제야 실감한다. 책을 좀 오래 본 것 같은 날은 확실히 눈 상태가 양호하지가 않다. 내 평생 처음으로 책 좀 즐기면서 보려고 눈에 좋다는 영양제를 샀다.

#3. 계획

직장다니지 않고 집에서 시간이 많을 것 같은 주부도 주말이 좋다. 사실 주부는 평일이 더 여유롭긴 한데 이 마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다같이 마음이 여유로와지는 분위기속에서 물리적, 심리적 숙제로부터 얼마간 해방된 느낌? 그래서 언젠가부터 금요일이 되면 이번 주말에 무엇을 하나, 이런 고민을 위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주말을 무사히 넘겼을 때 야릇한 보람까지도.


받거나 얻거나 가져다 놓고 아직 책거리를 못한 책을 마저 읽기로 했다. 다음의 세권 중에 한권은 서평을 쓸 생각이다. 나는 소설집을 습관적으로 읽는 편인데 여지껏 그 이유를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냥 내 스타일과 잘 맞아서? 정도로만. 그런데 소설집의 단점은 끊어지기 때문에, 끊어서 쉬어갈 수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언제라도 끊고 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흐름이 툭툭 끊어지는 주부들의 주말엔 소설집이 유용하다. 오늘은 딸아이와 <위대한 탄생>을 봐줄 것이고, 일요일은 임재범 노래를 들으면서 벌써부터 눈물 흘릴 계획을 야무지게 세운 터이다.

그 나머지는


하나, 2011 젊은 작가상 수상집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이 올해로 두 번째인데
이 책을 작년에 받아 들고 ‘젊음’과 ‘젊은 작가’, ‘젊은 소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바퀴 돌아왔다.

첫 수록작이 대상작인 김애란의 작품이다.
이 작가 확실히 성숙해졌다.
<물속 골리앗>은 내가 읽었던 김애란은 아니었다.
뭐랄까. 더 징그러워졌다고 할까.

나는 소설 읽으면서 청승맞게도 잘 우는 편인데
읽으면서 울컥했던 소절을 옮겨본다.
마치 내가 적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   나는 좀 외로웠다. 얼마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그리고 이럴 때 내게 다른 형제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들이 존재했다면 이렇게 어두운 날, 그 모든 자식들이 모여 뭔가 상의해볼 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그중 누군가는 모든 걸 나보다 잘해 나갔을텐데. 아버지를 매장하는 것도, 어머니를 위로 하는 것도, 전구를 갈거나 잡다한 고지서를 처리하는 일 역시 말이다. 하다못해 그들은 나보다 더 잘 울었으리라.   " 

                                                                                                                                - 물속 골리앗 / 김애란

 

두울, 깊은 밤, 기린의 말 (문학의 문학)

이 책을 어쩐 일인지
한 달 넘게, 만지고 쓰다듬고 껴안고만 있을 뿐 아직 다 읽지를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미안하지 않은 건 박완서 작가의 글 때문인 듯하다.
자꾸 그 페이지만 다시 보게 된다.

죽은 사람의 영화는 애절하기만 한데
죽은 사람의 글은 애절, 애통은 물론 애끓는 유언같다.

이제는 이런 방식의, 이런 내용의 , 이런 글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슬픔이 오롯한 작품이었다.  

 
 


"    찬바람 난 지 언젠데 자꾸 속에서 열불이 나려고 해서 손사래로 부채질을 하다말고 내가 미쳤지, 나는 세면대로 가서 찬물로 북북 세수를 하고 외출준비를 했다. 뭐가 미쳤다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이 판국에 손사래로 바람을 내려는 건 확실히 미친 짓이지만 더 미친 짓은 남편에게 뭔가 하소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였다. 오늘 온종일 내가 무슨 일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지 최소한 남편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출근하려는 남편에게 슬쩍 운을 뗀다는 게, 여보 나 왜 이렇게 울화가 치밀고 얼굴이 화끈거리지, 했더니 그가 한다는 소리가 갱년긴가 보군, 했다. 그래 갱년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화상이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지가 여자에 대해 뭘 안다고." 
                                                                                                           
                                                                                                               
-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 박완서 


 세엣, 2011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작가)

이 책은 다른 소설집과는 다르게
같은 작가들이 해당 소설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과정이 지면으로 정리되어 있다.
작가들끼리는 이런 걸 중요시 하는 구나, 이런 글을 잘 쓴 글이라 하는구나 하는
평가기준을 엿볼 수 있다.

세간의 평가와 크게 다르진 않지만
나름대로 해당연도의 문제작들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내겐 흥미로왔다.
수상작도 아니고 순서도 없다.
작년에도 이 책에서 선택된 소설들은 이상하게도 기억이 오래가는 구석이 있었다.
(단편은 원래 잘 잊어먹게 되있다)

그중에 내가 좋아라 하는 편혜영의 작품을 옮겨본다.  


"    조는 언제고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우연히 교통사고에 휘말려 그가 없이도 태연히 계속될 이 세계로부터 사라져 버리거나 사라지고 싶어지는 순간이 닥쳐올지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해왔다. 그는 한 번도 삶을 가차 없이 버리고 떠나려는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충동을 부채질만한 기막힌 우연을 만난 적도 없었다. 지금의 삶이 그다지 지속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기회도 없었다. 그는 인생이라는 게 공평하고 정연하고 이성적인 게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은근히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으나 막상 그럴 기회가 없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       
                                                                                                                   - 서쪽으로 4센티미터 / 편혜영

 

그래. 

이번 주는 임재범을 비롯한 김애란, 박완서, 편혜영....실로 여러분들과 주말을 견뎌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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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1-05-20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이틀 남았어요. TV 프로그램을 이렇게 날짜 꼽아가며 기다려본 건 인생 처음입니다. *^^*

한사람 2011-05-20 15:38   좋아요 0 | URL

오늘 임재범의 사랑이라는 노래가 떳길래 오전 내내 들었어요 ㅠ.ㅠ


stella.K 2011-05-2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땐간 주말을 즐기는 방법도 가르쳐 주시길 바래요.
견디는 건 좀 힘들잖아요.ㅋ

한사람 2011-05-20 15:38   좋아요 0 | URL

언젠가부터 견디게 되었어요 ㅋ
즐긴적이 있었나 없었나, 싶어요 ㅋ

마녀고양이 2011-05-20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여, 회사 때려치운 이후에는 월요일 오전이 가장 좋답니다.
월요일 오전은 일부러 약속이나 수업, 또는 중요한 어떤 것도 잡지 않아요.
주말 내내 밥 수발 드느라 힘들었는데, 월요일 오전부터 허겁지겁 나가면 삶이 너무 팍팍하게 느껴져서요. ^^

집에 책이........... 너무너무너무 잔뜩 쌓여있어요, 숨막혀요. ㅠㅠ
그런데도 책 사고 시퍼요. 이거 중독 맞죠?

한사람 2011-05-20 23:38   좋아요 0 | URL

맞아요 ~ 월요일 오전의 평화..노동 해방 ㅠ.ㅠ
다 나가고 난후 진정한 자아위로(?)의 시간이죠 ㅋㅋ

그래서 주말엔 진득이 앉아서 책 읽기는 좀 어려울때가 많아요
그런데 또 주말이라고 책을 놓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는 ㅋㅋㅋ

글구 가만보면 집에 책이 쌓여있는 분들이 매번 책에 기웃거리고 또 사고...집어들고 온다는 ㅋ

gimssim 2011-05-2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재범이 맹장수술해서 나가수 녹화가 불투명하다고 ...

번호를 매겨가며 쓰시는 님의 글들은 다가가기가 좀 쉽습니다.
책을 꾸준히 읽으시는 모습도 저에게는 도전이 됩니다.
요즘 읽는 책은 거의 사진에 관련되 책이어서요...

한사람 2011-05-20 23:41   좋아요 0 | URL

흐흑...그러게, 왜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맹장이 터져가지고...
다음엔 김현식 노래 부른다던데, 하차라도 하면 안되잖아요
다들 요즘 낙이 임재범 노래 듣는거던데...

중전님은 사진을 잘 찍으시는 분이군요^^
단편 소설집을 좋아라 하는 분들이 많지가 않아요
그래서 주변에 같은 책을 읽는 분들이 거의 없답니다
이곳에나 와야 책동무를 만나니까요

cyrus 2011-05-20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주일 중에서 주말이 좋은거 같아요, 확실한건 학교 안 가고 늦게까지 자도 되잖아요 ^^;;
무엇보다도 토요일은 무도, 일요일은 나가수라는 예능 프로그램의 종결자들이 있어서
항상 주말이 오면 뭔가 설레면서 기대됩니다. 가끔 운 좋으면 친구 만나서 공짜술 얻어먹으면
금상첨화구요 ㅎㅎ


한사람 2011-05-20 23:43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저와 TV취향이 같으세요^^
저도 토요일은 무도, 일요일은 나가수 !!

시루스님은 꼭 공부하는 시동생 같아요 ㅋㅋㅋ

달사르 2011-05-2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저는 토, 일만 되면 날짜 감각이 없어져서 오늘 오전 내도록 나가수 방송시간 알아봤더랬어요. 근데 컴맹이어선지 제대로 설명된 곳을 못 찾아서..에이..이러고 있었는데, 하하. 일요일 방송이로군요. 한사람님, 일요일인건 이제 알았는데, 방송 시간은 몇 시인지..
저도 임재범 사랑, 어제부터 종일 들었네요. ^^

음..김애란은 저는 위의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징그럽다는 말, 완전 공감입니닷. 징그럽게 글을 잘 써서, 징그럽게 이쁜 작가같애요.

한사람 2011-05-21 14:52   좋아요 0 | URL

'나가수'가 일요일 5시 20분일 걸요? ㅋㅋ

임재범의 사랑이 오늘 생각해보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인것도 같고
비까지 오는데 목소리는 깔리고....ㅠ.ㅠ
참..임재범은 그동안에도 쭈욱 가수말고는 한일이 없는 사람인데,
이제와 예능 하나때문에 이렇게 열렬한 팬이 될 수 있다는게 신기해요, 창피하기도 하고 ㅋ

달사르님도 저 책 읽으셨다고 하니 왜이리 반갑지요?
김애란은 확실히 변했죠?
마치 펜에 칼이나 송곳을 댄 사람같아요

대단했습니다 !!!

gimssim 2011-05-22 12:50   좋아요 0 | URL
김애란에겐 은근슬쩍 질투가 나요. 젊은 친구가 대단하죠?
 
초역 니체의 말 초역 시리즈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시라토리 하루히코 엮음, 박재현 옮김 / 삼호미디어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을 쓸 때 비겁하긴 하나 유명한 철학자를 인용하면 돌파구나 전환점이 될 때가 있다. 까놓고 말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젠 체하며 적고 싶을 때 니체만큼 폼나면서 안전한 사람도 없다. 니체는, 니체라면 우리가 니체를 하나도 모르고 자신의 이름을 들먹거려도 어쩐지 용서해줄 것 같다. 니체를 말하면 나만 아는 것을 잘난 체 한다는 느낌도 덜하고 그렇다고 식상하다는 인상도 덜하다. 옳고 그름을 떠나 누구하나 꼭 인용해야 할 학자가 있다면 니체는 호감도면에서 상위권인 것이 확실하다. 니체라는 브랜드 이미지에 대해 나는 그다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어렴풋이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달까. 날카로운 통찰력이야 철학자들이 가진 공통의 미덕이겠지만 '니체 NIETZSCHE'는 대중성과 신비성을 동시에 지닌 꽤 매력있는 네이밍인 듯하다. 프로이트나 융을 거론하며 심리를 분석하는 건 진부해 보이고 라캉이나 들뢰즈를 언급하며 정신분석학을 가져오긴 지식이 짧게 느껴진다면 분석같은 건 포기하고 그냥 니체의 글 한 토막을 이미지처럼 삽입하면 어떠한가. 좀 더 예술적이고 그래서 더 흥분되지 않을까?

  나는 이 책을 절대 사려고 집어 들진 않았다.(왜 변명을 하는 거지? 무엇이 캥기는 것이지?) 그야말로 구경차원에서 페이지를 들쳐보았다. 명언집은 서점에서 오며 가며 들추어 보기 얼마나 적절한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시크하고 의미심장한 미소까지 불어넣었다.(절대 속지는 않겠다는) 그런데 몇 페이지 넘기다 보니 이 책을 끝까지 읽어도 좋겠다는 알 수 없는 믿음이 불현듯 발생했던 것. 그래도 나는 순간의 소유욕에 눈이 멀어 집에 가서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고 눈을 크게 떠보았다. 얼마 전 받아든 러셀꼴이 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책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글씨는 단정했고 종이질은 유연했고 광택없는 채도에 냄새마저 순박한 것이 여간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다.(나는 서점에서 책 살 때 꼭 책 냄새를 확인한다) 그래 나는 아직 이 정도의 니체라야 어울리는 사람일지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엔 한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마치 나 들으라는 듯 첫 페이지의 다음 문장이 흠칫하게 만든다.


자신을 대단치 않은 인간이라 폄하해서는 안된다. 21p


  순간 거짓말처럼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내가 요즘 들어 더욱 눈물이 많아진 것에 나이들면서 생기는 감정의 유연함이 아니라 얼마간 자존심의 훼손에서 시작된 무언가의 상실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 문장을 읽자 마자 어쩐지 이 책을 덮고 나면 실낱같은 자존심 같은 게 회복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까 (젠장)스스로도 잃어버렸다고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싶었지 말이다. 나는 마치 속마음을 들킨 듯 니체의 문자에 굴복했고 그 사람을 몰래 집으로 모셔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부터 당신을 사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은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고 봄날은 가고 마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잡지 않아도 오늘만은 당신을 가져 가 보겠어요’... 온라인 서점에서 주로 책을 구입하다 보니 예전처럼 충동구매가 사라진 것 같아도 어쩐지 책의 내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만져보고 사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많았다. 나는 서점에서 확인하고 싶었던 책이 몇 권 있었는데 정작 그 책들은 꼼꼼히 확인하고도 구매의욕이 전혀 일지 않았건만, <니체의 말>, 이 책은 왜 그렇게 강렬하게 나를 끌어 당기던지.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그건 본능이라고 하는 건데 본능은 가장 지성적인 것이므로 당신의 지성은 나를 원한 것이다. 아... 오월이여. 여인의 변덕을 용서하시라.

  술렁술렁 주말의 여유를 즐기며 이 책을 가벼운 마음으로 넘겨갔다. 그리곤 주말이 지나고 나니 나도 모르는 사이 이 책은 더 이상 넘길 페이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니체는 나의 꿈쩍 않던 이성을, 꿈틀거리던 감성을 적신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무심코 한 두 번 스쳤지만 그러는 사이 그이만의 자연스런 매력을 알게 된 것과 같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추어 본 만남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니체는 내게 무언가를 회복시켜준 것이다. 나는 니체 사상의 계보와 니체 철학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자랑이다) 그저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에 해당되는 몇 종류의 말들만 (그것도 찾아 내어야)어설프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다 알지 못해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듯 나는 니체가 했다는 232 번의 말로써도 충분한 위로를 받았다. 이 책은 니체의 저서에서 일본인 ‘시라토리 하루히코’라는 번역자가 명언만을 발췌해 엮은 책을 다시 우리 번역으로 소개한 책이다. 이중번역이라고 하기에 문장은 물 넘어가듯 매끄럽고 상당히 정제된 느낌을 받는다. 고가의 정수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맑디 맑은 생수의 느낌. 일본에서 이미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는 점이 우리 출판계에 그다지 영향을 준 것 같지는 않고 얼마 전 러셀의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와 비교하자면 발췌된 문단이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편집상 인간내면의 성찰이라는 대전제를 계속하여 환기할 수 있도록 앞뒤 맥락없이도 명언 그 자체로 빛이 발한다는 느낌이다. 잘 모으셨고 소중하게 정리하셨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발췌문의 모음집을 단편적으로 읽었다는 공허함보다는 발췌로 이루어진 하나의 명상 에세이를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부분을 모아놓고도 전체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꽤 진지한 모음집이었던 것이다.

  모아진 글들은 ‘자신’, ‘기쁨’, ‘삶’, ‘마음’, ‘친구’, ‘세상’, ‘인간’, ‘사랑’, ‘지성’, ‘아름다움’이라는 열 개의 카테고리 아래 가지런히 배치되었다. 책의 첫 번째 키워드는 ‘자신에 대하여’로 시작하고 그 아래 첫 번째 명언의 제목은 ‘첫걸음은 자신에 대한 존경심에서’였다. 열가지 상위 주제를 주욱 따라가다 보면 결국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을 존경해야 하며 그러한 자신의 본질을 알기 위해 자신을 풍요롭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 고귀한 자신을 만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존재가 스스로 존경스러워 질 때가 바로 자존심을 찾게 되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살아 오면서 자존감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사람에게 그것의 본질을 알려주며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넉넉한 기회의 시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나 역시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부분도 ‘자존감’에 대한 인식과 ‘자존심’의 회복, ‘자긍심’의 확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새삼 내 자신이 고상해질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기는데 일본 번역자는 니체를 통해 ‘자존심 회복’을 하게 될(해야 할) 일본 독자들을 겨냥했던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곧 자신의 꿈과 이상을 인식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판단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철학하는 자세의 기본일 것이다. 가령, 니체는 자신의 본질을 알고 싶다면 다음의 질문에 확실히 답하라 주문한다.

- 지금까지 자신이 진실로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 자신의 영혼이 더 높은 차원을 향하도록 이끌어 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기쁨을 안겨주었는가?
- 지금까지 자신은 어떠한 것에 몰입하였는가?

  답을 모아보면 그것이 곧 의심없는 자신이며 그렇기에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질문의 답은 사람일 수도 어떤 행위일 수도 또는 물질이나 무형의 현상일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오늘 자로 답하는, (물론 모범답안처럼)내가 지금까지 진실로 사랑한 것은 ‘나만의 시간’이고, 내 영혼의 차원이 높아지도록 이끌어 준 것은 ‘독서’이고, 내 마음을 채우고 기쁘게 해준 것은 ‘지식’이고, 지금까지 ‘글쓰기’에 몰입하였다고 적어보자. 나의 본질은 대체로 고독한 학자를 추구한다는 뜻이렸다. 이런 ‘도식적인 생각하기’에 나는 내 본질이 흥미로와지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나의 본질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짜릿하게 가르쳐 주는 시원한 해답도 자주 등장한다.

풍요로움은 스스로에게 있다.
사람은 대상물에서 무엇인가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물에 의해 촉발된 자신 안의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내고 이끌어 내는 것이다. 결국 풍요로운 대상물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능력을 높이는 최고의 방법이요,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즐거운 지식
 
  나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내 능력이 높아지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인생도 풍부해지는 것이라는 세상 당연해 보이는 이치는, 인간은 그 대상물이 아니라 ‘그 대상물에 의해 촉발된 자신 안의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내고 이끌어’ 내는 존재라는 속성을 파악한 니체이기에 무겁도록 놀라워 보이는 것이다. 쉬운 예로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의 미션곡을 받아든 참가자들을 떠올려볼까. 참가자는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라는 조용필의 노래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노래에 의해 촉발된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사랑, 이별등의)를 찾아내 그것을 끄집어 내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임재범의 노래를 들으며 그의 노래로부터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임재범의 노래로 촉발된 우리 가슴속 숨겨진 각자 저마다의 사연이 자극되어 지는 것이기에 끝내 눈물로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풍요로우면 그만큼 내 속에서 찾아낼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처가 풍요로운(?) 나는 그래서 그렇게 매순간 눈물이 나는 것이고 복받치는 것이란 말인가.

  이 책은 사람마다 자신이 더 보고 싶은 대로 더 듣고 싶은 대로 감동의 위치를 자기위치에 자리시킬 것 같은 책이다. 열 가지 주제하에 전개되는 230여 번의 카드중 분명 심장에 박혀버리는 잊지 못할 패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구성만으로 볼 때 마지막 장에 위치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번역자의 자의적 해석(과 편집)으로 생각되지만 나는 최종적인 개인의 ‘아름다움’이라는 선택이 퍽이나 마음에 든다. 니체는 지적인 자유를 물론 소중한 가치로 여겼지만 지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은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부분적인 풍경처럼 한정된 전망에 불과하다 말한다. 광범한 교양도 좋지만 대신 그런 것 보다는 이상과 꿈을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니체가 아름답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이상과 꿈을 버리지 마라
이상을 버리지 마라. 자신의 영혼속에 있는 영웅을 버리지 마라. 누구나 높은 곳을 목표로 한 이상과 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과거의 일이었다며, 청춘 시절의 일이었다며 그리운 듯 떠올려서는 안 된다. 지금도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한 이상과 꿈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어느 사이엔가 이상의 꿈을 버리게 되면 그것을 말하는 타인이나 젊은이를 조소하게 된다. 시샘과 질투로 마음이 물들어 혼탁해지고 만다. 발전하려는 의지나 자신을 이기려는 마음 또한 버려지고 만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코 이상과 꿈을 버려서는 안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나이가 되면 으레 꿈은 과거의 일일뿐이고 그것은 지나간 청춘에 불과했다고 꿈을 이루어 본 적도 없으면서 마치 꿈을 초월한 사람처럼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과 꿈을 버리는 일이 곧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일이라면 결국 자존심의 훼손은 자기 자신에서 기인한 것 아닌가. 꿈과 포부를 밝히는 청춘을 뒤에서 냉소하고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하며 쓴웃음짓는 일이 실은 스스로 자존심을 내팽겨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니체는 과거 ‘어디에서 왔는가’가 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는가’가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말한다. 화려했던 과거에 집착하면서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인간과 비교하며 우월감을 가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상투적으로 꿈을 입으로만 내뱉으며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행위는 현재에 만족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와 무엇이 다르냐 반문한다. 이에 우리가 죽는 날까지 노력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보건 말건 자신을 증인삼는 일이며 자기 시련을 겪어 낼 때 비로소 자존심은 바로 서는 것이라 말한다. 자신이 고상한 존재라는 자존심은 곧 자신감이 되며 그것은 자기 시련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자존심이 자기보상이라는 결론이 나는 미치도록 좋았다. 자존심은 누구를 위한, 누구 때문이 아닌 나를 위한 나를 위해 존재하는 내가 수여하는 상장이었다.

  조금은 자존심에 여유를 느끼는 내 자신을 발견하면서 니체의 간략 독서를 마치고자 한다. 실제로도 나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니체를 모르면 또 어떠한가. 내가 초대한 그는 나를 기쁘게 하였으니 된 것 아닌가. 니체는 ‘지성’을 말하면서 ‘너무 힘주지 마라’는 뼈아픈 충고를 잊지 않았다. 너무나 온 힘을 다해 완성한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긴장과 고통스런 인상을 준다고 한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고통스런 불쾌감이 배어 있기 때문에 타자는 부담을 감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의 전부가 아닌 4분의 3정도만으로 일과 작품을 완성하면 상대에게 여유감을 제공하므로 쾌적한 기분으로 수용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한다. 리뷰 힘빼기를 연습중인 나로서는 천금같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책을 덮으며 알게된 4분의 3의 법칙을 나는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최근에 나는 내가 바라는 완성도의 늪에서 완벽함의 벽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이번 우연은 꼭 그동안의 필연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최종적 절차, 그 절차의 기념식만 같다.

니체는 어느 봄날의 끄트머리, 행복하고 싶었던 그날 오후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로부터 실컷 행복했다. '니체'때문인지 '나'때문인지 그건 중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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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06-04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의 철학을 '어떻게 하면 사나이답게 살 수 있을까' 라는 문제의식이다, 라고 평하던 사람도 있던데ㅎ 어째 인용하신 글들을 보니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정말 제 생에서 우울할때 니체의 글을 만났었습니다. 아직 별로 오래 살지도 않았지만요, 풋.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문장의 광기 같은 것에 전염되어서 같이 울기도 했고.. 그러다 꼭 풍선에 바늘로 콕 찌르듯 펑 터진 후에...(뭐라 설명이 어렵네요 ㅎㅎ;) 좀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한사람 2011-06-04 09:16   좋아요 0 | URL

빵빵해지던 풍선이 한순간에 빵터지는 순간을 떠올립니다. 알것 같아요 ~
무릇 남자의, 사나이의 자존심이라는게 대부분 그럴거니까요 ㅋㅋㅋ

하지만 분명 터지기 직전까진 얼마나한 위롭니까?

철학자가 위로주기 힘들어여, 피곤만 가중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ㅋㅋ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무선)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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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 동안 저는 행복했습니다. 건널목 아저씨가 정성껏 깔아준 카페트를 즈려 밟고 꼭 지난 시절로 되돌아가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자꾸 추억속의 누군가가 떠오르고 어렴풋이 보고도 싶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랬나요? 더 정확히 얼굴 생김새와 이름이라도 기억해보려 했지만 그저 씨익 웃는 모습만 스쳐 지나가더군요. 이를테면 노란 스쿨버스를 운전해주시던 콧수염 기사 아저씨, 갈 때마다 서비스로 시원한 빙수를 주시던 떡볶이 집 아주머니, 한쪽 얼굴에 큰 화상흉터가 있었던 매점언니, 뭐 그런 분들이 건널목 저편에서 자꾸 손짓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건널목을 건너기 전부터 벌써 가슴이 쿵쿵거리더니 길을 다 건널 때쯤 되니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여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슬픈 건 아니었어요. 솔직히 이 책이 아니었으면 평소에 생각날 분들도 아니었는걸요. 그치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게 꼭 오랫동안 헤어진 ‘그 사람’과 다시 만나는 것처럼 순간 반갑고도 벅차올라 어찌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 사람’과 덥썩 두 손이라도 맞잡고 얼싸안은 후 한번 울고 나서라야 말이 터져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촌스럽고 유치해도 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마치 ‘그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훌쩍거리며 울었더랬습니다. 오랜만에 아이처럼 소리를 내어보았지만 끝내 달래주는 사람은 없더군요. 예, 저는 어른이니까요. 어른은 스스로를 달래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어쩌면 저는 ‘그 사람’을 만났기에 울었던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다시는 만나기 힘들 거라는 예감에, 아니 ‘그 사람’이 만날 수 없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울음이 터진 것 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 사람’이 더 그리워지는 걸까요?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 다시는 돌아 갈 수 없는 시절들, 다시는 가볼 수 없는 곳, 하지만 너무도 그리워 언젠가는 어딘가에는 꼭 있을 것만 같은 잡을 수 없는 ‘그리운 이야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동화책, 이 한편의 이야기는 얼마나 기특한가요. 혹시 건널목 아저씨는 우리들에게 마법의 양탄자라도 깔아 주신 건 아닐까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훨훨 날아 도착한 곳, 저는 오늘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저는 김려령이라는 작가를 알 지 못했습니다. <완득이>는 귀에 익은 제목이었지만 작가의 이름은 낯설었어요. 동화는 더 이상 동화같은 시간을 잃어버린 저 같은 어른이 집어들만 한 책이 아니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이죠. 제가 무심했습니다. 동화는 동심을 자극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동심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필요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동심을 잃어버렸는지 원래 동심이 있기는 했는지 동화를 읽기 전엔 모르는 것 일 뿐이었어요. 저에게 김려령은 낯설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동화작가 오명랑’은 꼭 옛날 옛적에 제가 나경이와 종원이 만할 때 즐겨보던 명랑만화 ‘꺼벙이’나 ‘로봇 찌빠’, ‘강가딘’ 같은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처럼 느껴졌어요. 요즘은 ‘명랑하다’는 말조차 잘 쓰지 않는 단어라 내심 반갑고도 설레었답니다. 오명랑 작가가 ‘문밖동네’라는 엄청 큰 출판사에서 나온 <내 가슴에 낙타가 산다>를 썼다는 분이니 얼추 김려령 작가의 아바타라고 해도 좋을 듯 하군요. 오명랑 작가는(이하 오작가) ‘아직 독자들에게 들려주지 못하고 가슴에 꽁꽁 숨겨둔 이야기’가 하나 있다고 했어요. ‘너무 깊숙이 몸에 박힌 말처럼 툭 나와 버리는 문장’인지라 스스로 지어서 쓰지는 못할 이야기라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을 이야기라 쓰지 못해도 꺼내어 보고 싶다고 했지요. 그리곤 끝내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이 대신 써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래서 세상을 따스하게 하는 이야기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네요. 맞아요. 어른들은 누구나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못할 가슴속 이야기가 있어요. 나이가 들면 상처도 그리움이 되지요. 작가들은 이 가슴속 상처를 남몰래 꺼내어 때로는 예쁜 포장을 때로는 섬세한 칼질을 하는 분들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작가지만, 아무리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지만 어떤 사무친 이야기는 글로는 적어낼 수 없는 암 덩어리 같은 것인지 모르겠어요. 분명 암 덩어리를 제거해야 살 수 있는 거지만 그것을 없애버리면 그 사람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덩어리를 어떻게든 토해내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이야기를 가득 실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지나갈 수 있는 건널목을 설치하는 일은 아니었을까요? 아마도 스스로 이야기의 건널목이 되어 드릴 터이니 자신의 이야기를 통과한 아이들이 더 따스한 사람, 지금보다 더 온정넘치는 세상과 만나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바램은 아주 분명하게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역시 울면서 건너온 건널목이지만 이렇게도 행복한 기분이 되었으니까요.

  이야기가 그냥 우리사회 흔한 미담같지 않고 더욱 가슴깊이 와 닿았던 건 아무래도 오작가가 어린 시절 직접 겪었던 생생한 체험담이라 고백했기에 더욱 그랬을까요? 오작가가 어릴 적 꾹꾹 참아버린 눈물이, 쌀과자를 맛보며 엄마를 기다리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생활보호 대상자로 이층집 지하에 오빠와 단둘이 살면서 건널목 아저씨와 조우한 일곱 살의 기억... 살면서 어떤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불행했던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도록 만들지요. 엄마는 돈을 벌러 집을 나가셨고 그 사이 아빠는 병환으로 돌아가셨고 덩그러니 남겨진 태석, 태희 남매의 눈물젖은 라면의 맛은 어땠을까요. 빈병이나 폐품을 줍는 왕거지로 불리우며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던 오빠를 바라보던 동생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었을까요. 다른 친구들처럼 달려와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줄 놀려주는 친구들을 혼내줄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서럽고 두려웠을지요. 저는 혼자 자라서 그런지 평소엔 티격태격 하다가도 동생이 싸우면 꼭 같은 편이 되주던 언니나 오빠가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지금까지도 유치하게 무조건 내 편인 사람이 언제나 목마르게 그립기도 하구요. 그래서...책을 반쯤 읽었을 때야 알았어요. 오작가는 건널목 아저씨를 말하려 이야기 교실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이야기 교실을 잠시 빌린 것이었다는 것을. 오작가는 건널목 아저씨를 통해 자신의 뭉쳐진 상처를 어른된 마음으로 어루만져 주고 돌아오고 싶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김려령 작가는 오작가라는 건널목을 통해 우리를 따스한 동화나라에 가닿게 하고 싶었다는 것을.

  그래요. 오작가가 생계방편으로 마련한 이야기 교실은 이야기가 탄생되는 작가의 또 다른 원고지였답니다. 그 입체적인 원고지 안에서 ‘그리운 건널목 아저씨’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저는 나경이, 종원이, 소원이와 함께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 듣기 교실에 수강한 한 명의 어린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옛날에 5시 30분 TV 시작 시간이 되면 모두 모여앉아 만화를 시청하던 그 때 처럼요. 건널목 아저씨는 ‘신호등 안전모’를 쓰고 ‘이동식 건널목’을 배낭에 매고 다니는 이상한 아저씨였어요. 아니 처음엔 만화 주인공처럼 보기엔 남루해도 언젠간 악당이라도 물리칠 근사한 힘을 가진 마법사일지도 몰라 의심을 했지요. 만화에서 보면 고물상이나 실험실 같은 데서 ‘짠’하고 변신하는 정의의 주인공들 있잖아요. 그런데 점점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저씬 그런 힘세고 멋진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저 아파트 팔각정 뒷길을 따라 만물 고물상에서 쓸쓸히 기거하는 떠돌이 아저씨였어요. 슬프고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거짓말처럼 아이들 등하교 시간에 맞춰 찻길에 카페트를 깔아 건널목을 만들어 주고는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비밀스런 아저씨 였으니까요. 저는 그래도 어른이니 그쯤 되면 분명 말 못할 사연이 있을 분이라는 생각을 하였죠. 오작가와도 어떤 사연이 있는 분이겠다, 그렇다면 건널목 아저씨는 오작가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뭐 이런 앞선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답니다.

  예상대로 아저씨는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가슴아픈 사연을 지닌 분이었어요. 원래는 자동차 제조회사에 다니던 분이었는데 아저씨 부인은 쌍둥이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그렇게 아프게 얻은 쌍둥이들이었지만 어이없게도 무단횡단으로 그만 잃게 되었답니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자신이 만든 자동차로 자식을 해치게 된 간접 범인이 된 것이죠.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요. 사랑하는 아내의 생명을 앗아가면서까지 탄생한 아이들인데 그 아이들마저 아저씨 곁을 떠났으니 멀쩡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아저씨는 더 이상 쌍둥이 자식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쌍둥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스스로 위험을 알리고자 건널목이 없는 차도를 찾아 다니신 거여요. 위험한 곳에서 온몸으로 건널목 설치를 건의하는 아름다운 일인 시위자를 자청하신 거랍니다. 저도 부모의 한사람이기에 그것은 자식을 죽게 한 가해자로서 스스로 내린 형벌이었다고 생각해요. 아저씨는 쌍둥이 형제가 너무나 보고파서 쌍둥이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경비직도 선뜻 받아 들이셨대요. 그렇게 해서 진짜 건널목이 생기면 아저씬 그 동네를 떠나곤 했답니다. 세상의 모든 건널목이 다 설치되는 그 날까지 아니 죽는 그 날까지 아저씬 가짜 건널목으로 사실 생각이었겠죠. 건널목이 없었기에 쌍둥이를 잃은 아저씨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건널목이라도 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곳도 건너진 못 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쌍둥이들에게 최소한의 사회 안전장치인 건널목을 마련해주지 못한 것은, 설령 건널목이 없더라도 아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늘 바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어른들 일테죠. 하지만 그런 어른들은 보기에 누추하고 남들을 배려하는 사람들에게는 냉소를 던지고 반대로 겉모습이 화려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들에게는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겁쟁이들 아닌가요. 어른인 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가슴이 답답해져 한숨이 멈추지 않았어요. 우리같은 어른들에게 이 모든 걸 배운 아이들이 바로 건널목 아저씨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어요. 쌍둥이 형제의 돈을 뺏으려던 중학생 아이들에게 아저씨가 사정없이 두들겨 맞을 때 저는 더 이상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인 제가 벌을 받아 실컷 얻어맞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많이도 아팠습니다.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일자리도 없는, 하지만 ‘많은 걸 잃고도 많은 걸 주었던’ 건널목 아저씨에게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요. 만약 근사하게 차려입고 좋은 차에 좋은 아파트에 사는 아저씨였다면 절대 쌍둥이 아이들이 돈 뺏기는 현장같은 건 발견할 수도 없었을 거 잖아요. 세상이 야속하다지만 이럴 순 없는 거 잖아요. 자식같은 아이들에게까지 무시를 당하며 맞아야 했던 아저씨의 서러움이 복받쳐서 저는 그만 목울대가 울렁거렸습니다. 그 순간 왜 꼭 맞고도 가만있어야 했느냐 아저씨에게 묻고 싶었지만 저는 입술을 꼭 깨물었어요. 어쩐지 아저씨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거든요. 아저씬 맞으면서도 도망가는 쌍둥이 형제들을 보고 자신의 쌍둥이 자식들을 떠올렸을지 모르잖아요. 자식 먼저 보낸 아비가 잘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그래 맞아야 한다면 자신이 대신 맞아도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잖아요. 아니, 아이들에게 차라리 맞기라도 해야 쌍둥이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달랠 수 있었을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저는 건널목 아저씨는 바보 아저씨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얼굴이 퉁퉁부어 돌아가던 아저씨 뒤에서 소리치고 싶었어요. 그치만 ‘바보’라고 부르고 나면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어쩐지 더 화가 났습니다. 아저씬 그런 제 목소리에도 ‘괜찮다’ 끄덕이며 바보같은 웃음을 지으셨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런 바보를 알아주는 똑똑한 이웃들이 있었다는 거여요. 이 책에서 복숭아할머니와 경비아저씨, 반장 아주머니, 그리고 15층의 도희 학생이 없었다면 저는 세상을 한없이 원망했을 테니까요. 다시는 이런 나쁜 동화책은 보지 않을 지도 몰랐어요. 바보 아저씨와 똑똑한 이웃들이 사는 그리운 그곳이 우리 사는 같은 아파트 인 것도 저는 좋았어요. 사실 부끄럽지만 어른인 저만해도 옆집 이웃과는 겨우 얼굴인사만 나눈 것이 전부이거든요. 그거 아세요? 저는 아직도 한 달 전 이사 온 옆집 새댁이 건넨 사과주머니에 무엇도 채워 보내지 못했답니다. 이곳 아파트에선 다들 그렇게 서로 바쁜 척 하는 것이 아무런 흉이 되지 않잖아요. 옛날에 저 어릴 적에 서울 아파트에 처음 이사왔을 땐 아랫집 현옥이와 매일 서로 집을 오가며 쥐포도 구워먹고 핫케잌도 태워먹고 그랬는데... 엄마들은 매일 아침 모닝커피 타임을 가지셨고(그때 옆에 있다가 마지막 한 방울을 얻어먹던 재미를 아시나요?) 그러고 보니 그땐 전화도 같이 쓰고 그랬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주차장에서 서필로 땅따먹기 하다가 이집 저집에서 고등어니 된장찌개니 하는 저녁반찬 냄새가 흘러 나오면 엄마들은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때 배는 엄청 고파도 친구들과 헤어지던 게 얼마나 아쉬웠던지 지금 생각하니 콧잔등이 다 시큰해지네요. 그랬어요. 건널목 아저씨가 지켜주던 아리랑 아파트 105동은 옛날에 저 어릴 적 살던 아파트의 풍경처럼 그렇게 아스라했습니다.

  지금 사는 우리 아파트 501동에 건널목 아저씨 같은 분이 계시다면 세상엔 얼마든지 좋은 사람들도 많구나 그래도 한번 살아볼만한 거구나, 싶어질 텐데요. 건널목 아저씨는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 귀찮고 더러워서 하기 싫은 일은 알아서 미리 해놓는 분이셨어요. 부모님이 싸우기만 하는 도희의 카운슬러가 되어주기도 했구요. 오작가 남매인 태석과 태희는 바로 건널목 아저씨를 통해 훗날 한 가족이 되는 도희를 만나게 되었다네요. 건널목 아저씨는 말 그대로 사람사는 소중한 인연의 건널목이 되어 주셨네요. 그뿐인가요. 건널목 아저씨는 오작가 남매의 지하방에 이불대신 푹신한 건널목을 깔아주고 또 한번 최소한의 안락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답니다. 그런 건널목 아저씨 때문에 태석오빠와 도희언니, 그리고 오작가까지 이들 모두는 건널목같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엄마가 자신을 버렸다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응어리도 건널목 아저씨가 내민 손길 덕택에 그리운 상처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 작품을 읽고 살면서 누군가에게 건널목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답니다. 건널목 아저씨처럼 가진 게 많지는 않지만 그냥 곁에 있어도 포근한 에너지를 전해주는 사람. 누군가의 무단횡단과 어떤 이의 신호위반을 지켜주는 반가운 하얀 善의 마음. 생각해보니 세상에 그런 건널목의 손길과 마음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우리 모두는 저 건너편의 세상에 도착하기에는 언제나 두렵고 외로우니까요.

  그러니까,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도착한 그곳, 동화나라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나라가 아니었어요. 오작가로 분한 김려령 작가는 이 모든 것이 동화지만 우리 사는 세상에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 말해주는 듯해요. 그렇죠? 지금 건널목 아저씨는 사라졌지만 우리도 건널목 아저씨가 되어 줄 수 있다고 격려해주는 것 같아요.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 하나만 데워지면 얼마든지 위험한 그 곳에 건널목이라는 마음을 깔아 줄 수 있다고 말이어요. 그렇담 우리 ‘그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이제 우리 스스로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건 어때요? 우리 모두는 어디선가 언제라도 다시 보고 싶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잖아요. 당신은 나의 ‘그 사람’이 되고 나는 당신의 ‘그 사람’이 되어 드리는 거여요. 생각만 해도 행복해져요. 그럼 길을 가다 건널목을 발견해도 내가 먼저 건너가려 뛰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은 이 건널목을 발견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일랑 안 해도 되는 거잖아요.

  이제부턴 우리 아이들에게도 건널목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보다 더 근사하고 감동적이지 않나요? 그래요.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은 되기 쉬워도 건널목이 되어 주는 사람은 쉽지 않을 거여요. 건널목을 건너기만 하는 사람은 언제나 급하게 건너고 나서 혼자 도착한 그 곳이 무지 외롭고 재미 없을 거여요. 설령 그곳에서 친구를 만났어도 늘 그렇듯 절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을 거여요. 세상의 위험을 혼자서 보란듯이 뛰어 넘는 것만이 生의 목표는 아닐 거여요. 누군가에게 안전하고 튼튼한 바닥이 되어 주는 일, 작지만 포근하고 따스한 천장이, 언제나 그립고도 보고픈 길이 되어 주는 일. 그것이야 말로 우리 生을 더욱 아름답게 살찌울 테죠. 모르는 친구도 내가 놓아준 다리를 통해 건너갈 때 그 행복감은 더 커질테죠. 그렇게 아름다운 건널목, 이토록 든든한 건널목을 통과해 ‘그 사람’과 재회할 수 있는 나라, '그 사람'이 사라지지 않아도 되는 나라, 그 곳에서 우리 만나요. 그곳에서 서로가 ‘그 사람’을 본적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해요. 그땐 다시 ‘그 사람’을 못 볼까봐 우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내가 같은 ‘그 사람’ 이었다는 것에 우리 서로 마음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손잡고 울어요. 우리 그렇게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살아요. 마법이 아닌 진짜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양탄자를 날게 해요. 동화나라가 우리의 오늘이 되는 그 날을 같이 기다려요. 그때까지 모두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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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5-16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그분'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인가요^^

한사람 2011-05-16 15:50   좋아요 0 | URL

헉....속내를 들킨 이 심정이란....ㅋ
네오님 예리하신걸요?

네오 2011-05-16 20:43   좋아요 0 | URL
사연이 너무 구구절절 하셔가지고요^^
 

 


요즘 서평을 어떻게 써야 할까 생각을 정리중이다. 정확히는 어떤 서평이 '좋은 서평'일까라고 말하고 싶다.

우연히 알라딘 인문 MD 서재에 실린, <인터뷰> ‘서평계의 두 고수 고명섭기자와 로쟈 이현우를 함께 만나다’ (http://blog.aladin.co.kr/bookeditor/4786365) 라는 글을 보았다. 마지막에 좋은 서평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로쟈님의 견해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현우 : 저는 좋은 서평의 조건보다는 효과 면에서 말씀을 드릴게요. 저는 어떤 책을 안 읽도록 설득해주는 서평이 제일 좋아요. 돈과 시간을 절약하게 하거든요. 별 하나짜리 서평을 설득력 있게 쓰는 거죠. 본인은 불만이겠지만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유익하니까요. 별 다섯 개짜리 서평보다 오히려 하나짜리 좋은 서평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마존에서 서평을 볼 때 별 하나짜리와 다섯 개짜리를 보는데, 하나짜리도 짧은 거는 특별히 새길 게 없어요. 그런데 길게 차근차근 왜 이 책이 별 하나인가를 알려주는 서평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으로 좋은 서평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서평. 돈과 시간을 요구하는 서평이죠. (웃음) 사서 꽂아두기라고 해야겠다는 마음을 부추기는 글 말이에요. 세 번째는 잘 정리해주는 서평인데, 살 수도 있고 안 살 수도 있지만 읽은 척할 수 있게 해주는 서평이죠. 어디 가서 한 마디 던질 수 있는 서평이요. 고명섭 선생님께서 이런 서평을 많이 써주시죠.


자연 내 서평은 어디에 속할까를 갸우뚱해보고 나는 1. 어떤 책을 안 읽도록 설득해주는 서평 2.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서평 3. 잘 정리해서 읽은 척 할 수 있게 해주는 서평 中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여지껏 좋은 서평을 쓰려고 노력해 왔다기 보다는 그냥 좋은 글을 쓰려고 안간힘을 써오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다 보니 확실히 꼭 일년 전의 내 서평보다는 지금의 서평이 발전을 이룬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과연 내 서평이 좋은 서평인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는 주저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니체의 말>에 가슴을 때리는 문장을 만났다.

해석의 딜레마
모든 일은 어떻게든 해석이 가능하다. .....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해석을 하는 순간부터는 그 해석속에 자신을 밀어 넣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결국 해석에 사로잡히고, 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시점에서만 사물을 보게 된다. 요컨대 해석 또는 해석에 기인한 가치 판단이 자신을 옴짝 달싹 못하도록 옭아매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하지 않고서는 상황을 정리할 수가 없다. 여기에 인생을 해석한다는 것의 딜레마가 있다. - 농담, 음모 그리고 복수 中

정확한 이유에 근접하지 못하고 있던 갑갑함을 시원하게 뚫어주던 한 구절, ‘해석 또는 해석에 기인한 가치 판단이 자신을 옴짝 달싹 못하도록 옭아매는 것’ 에서 나는 좀처럼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어떨 땐 어쩌다 (큰 고민없이)시작된 해석의 틀에서, 주어진 분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그대로 침몰한 채로 글을 마감하곤 했던 것. 혹시 나는 깊숙하게 해석한 것이 좋은 서평의 토대라고 믿어온 것은 아닐까.

나는 솔직히 지나간 내 서평은 다시 쳐다보지도 않는다. 길고 지루하고 해석은 또 얼마나 세세한지 다시 읽으면 깨끗이 삭제하고 싶어 질까봐 그냥 모아두는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다수 리뷰대회 수상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선정하는 이달의, 이주의 리뷰같은 행운은 거의 성실성(?)과 분량, 그리고 잘 써보겠다는 의지(?)가 반이상이었다고 느껴진다. 그동안 새롭고 창의적인 해석이라기 보다는 그저 주어진 책 자체에 종합적인 분석을 해온 내 경우, 적어도 이 사람이 책은 꼼꼼하게 읽었구나, 하는 태도 하나는 어필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 성실성과 태도, 혹은 기교만 늘어가는 필력들만으로는 좋은 서평이 되기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좋은 서평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고명섭 기자와 로쟈 이현우님처럼 전문적으로 서평을 쓰고 그 서평이 영향력을 미치는 분들이 아니더라도 나는 드디어 ‘좋은 서평’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놀랍다 놀라워) 그런데 분명한 답이 있을 것 같은 질문이 외려 ‘좋은 사람’이라는 기준처럼 더 애매하고 어렵다. ‘안 좋은’ 서평은 알 것도 같은데 말이다. 세상에 책 많이 읽은 사람, 글 잘쓰는 사람은 너무도 많은데 책 많이 읽었다고 글 잘 쓴다고 꼭 서평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책 많이 읽고 글을 잘 쓰면 서평을 잘 쓸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을까. 서평을 자꾸 쓰다보면 결국 서평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어쩐지 서평은 쓸수록 어려워진다. 그런면에서 거침없이 휘갈겨온 지난 일년이 그립다 그리워!)

 

 

<내가 생각하는 ‘안 좋은’ 서평>


1. copy & paste & transform

- 신문기사, 백과사전, 기존의 책 인용이 과도하게 사용된 경우-어디까지가 기사이고 어디서부터 의견인지 구분이 안 가므로 언뜻 보기에 굉장히 유식해 보인다는 가시적 효과는 발생한다.(주로 라틴어 어원, 그리스 신화, 기호및 사회학 용어, 신종언어의 인용도 포함-물론 나도 포함, 내 이웃님들은 절대 오해를 하시면 안됨. 어디까지나 '과도'하게 의지할 경우임)

- 처음엔 객관적 사실 인용에서 시작해 마치 자신의 견해인듯 변형하는 행위-기사를 가져와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환기를 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번 유사하거나 반박하는 결론으로 매듭지어 또 다른 새로운 기사를 만드는 행위. 결론이 기사를 통해 사유한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기존내용에 업어가는 습관을 형성하므로 기사없이는 절대 서평을 쓸 수 없다.

2. 작위적인 개인경험

- 소설의 내용과 비슷한 개인의 경험을 그럴듯하게 과장 및 2차 주형(사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 경우는 리뷰대회 접수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서평의 첫 시작일 경우가 많다. 극적인 個人史는 분명 글로써 임팩트한 매력을 제공하기 마련이므로. 나 역시도 나도 모르게 이런 방법을 자주 사용해왔다. 이른바 리뷰의 소설화 ! 지난 일년 간의 경험상 이 방법은 잘만 활용하면 거의 수상권에 안착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번 맛들이면 극적인 개인경험의 시나리오에서 절대 헤어 나오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내 인생에서 누구하나 죽었거나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는 이야기의 시작을 할 수가 없다. 정말로 소설과 똑같은 일이 내게 벌어졌을 수도 있지만 매번 이런 방식의 구라로(우연히 꼭 같은 경험-그러므로 공감백배-절대 잊지 못함) 서평을 완성하면 극적인 個人史 없이는 어떤 서평도 완성할 수가 없다. 언제나 미완성인 느낌이 드는 것이다.

대부분 개인사의 감동적인 주형은 어느 정도 필력이 있는 서평자들이 꺼내드는 카드일 경우가 많다. (또 출판사에서는 대부분 이런 서평을 선호한다) 그리고 좋은 글, 감동을 선사하는 글이 될 확률이 높다.(하필 그 소설의 주인공처럼 나도 도둑질을 했다니까) 그런데 대회같은 가시적인 표식을 배제하면 과연 좋은 서평인가는 모르겠다. 앞으로 스스로 지양하고 싶은 방법이다.

3. 화제만을 유도하는 전략적 수사

- 가령 지금 세간에 유행하는 어떤 책이나 어떤 현상이 있다고 치자. 어떤 책의 서평을 쓸때 당연히 지금 주요이슈인 사회문제나 트렌드를 떠올리게 되며 그것에 비추어 내 사고를 정리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꼭 별 상관없어 보이는 ‘신정아’나 ‘고현정’을 들먹이며 단순화제성으로 갖다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끝까지 읽어보면 해당책의 서평이 아니라 신정아 비판이다. 헐) 깊이있는 서평이라야만 좋은 서평인 것은 아니다. 나조차도 서평엄숙주의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중이니까. 그런데 제발, 그 이야기 하고 싶으면 그 책의 서평을 쓰는 게 어떤가. 자신은 그런(?) 책들에 관심없는 사람이므로 그 책은 사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이말 만은 꼭 하고 싶다며 신랄한 비판을 하는 대상이 왜 절대 그녀의 책은 아닌 것인지.

4. 논리의 전개가 퍽이나 주관적인 비판

- 내가 감동받은 책이 또 다른 서평자의 입장에선 정말 실망일 수가 있다. 소설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그런데 자기 맘에 안 들면 꽝이고 들었으면 훌륭하다 식의 비판을 ‘그냥’ 이 한마디로 밀고 나가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물론, 대부분의 알라딘 서평자들은 논리의 아름다움을 중요시 하는 분들이므로 이런 분들은 거의 없다고 보고 싶지만 간혹 알려진 서평자들도 자세한 이유를 들지 않고 ‘실망이다’, ‘수준이하다’ 식의 간단명료한 글을 올린 것을 본 적이 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는 강박, 나는 솔직한 서평자라는 자부심, 솔직한 글에 대한 열렬한 지지등의 여러 이유로 한번 잡은 방향이 여지를 주지 않고 뻗어나가는 경우가 있다. (시원하게 솔직한 글일수록 추천은 늘어난다. ㅋ ) 하지만 니체 식으로 말하면 솔직이라는 해석의 딜레마에 빠져 그 안에서 꼼짝없이 갇혀버린 것이다.

이럴때 나는 흔들린다. 거짓인 서평은 ‘안 좋은’ 서평인 것이 맞으나 솔직한 서평은 ‘좋은’ 서평인가, 하고 말이다.


그야말로 두서없이 생각나는 것만 적어보았다. (원래 안좋은 거 말하기는 좋은 거 말하기 보다 훨씬 쉽다 ㅋ) 

이제 좋은 서평을 정리할 차례이다. 하지만 난 아직 그럴싸한 답을 정리하기 어렵다. 로쟈님과 고명섭 기자처럼 답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내게도 그런 날이 올까? 좋은 서평은 말이죠, 결국 자기 맘에 드는 서평이 아닐까요? 자기 완성도에 다다른 것인지는 자신만이 알잖아요. 혹은 좋은 서평이라는 게 말이죠,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도 이 책이 이런 책이구나 깨닫게 해주는 서평 아닐까요? 뭐 이런 식의.  

 

그런데 꼭 좋은 서평을 써야하나요?  

누구를 위해 좋은 서평은 존재하는가,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출판사? 작가? 독자? 평론가?  아님, 서평자 자신?

결국 책좀 읽고 글좀 쓰는 분들이군요 ! 

흑, 그럼 좋은 서평은 적어도 서평을 읽어줄만한 사람들을 위한 글인 건가요?
그렇담, 굳이 (지들끼리 ㅋ)좋은 서평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그래도 서평없이는 상황을 정리할수 없으니, 여기에 서평의 딜레마가 존재하네요, 니체는 천재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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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5-15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랍다 놀라워"에 하이파이브를 하고픈 심정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내주제에 무슨 서평(책에 대한 평가)이냐 싶어서 '리뷰'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데요. 저의 사라져가는 기억을 되살리는데도 유용하고 그 내용울 참고하거나구매여부는 제글을 읽는분들에게 판단하도록 맡겨두고 싶어서에요. 꼭 이것이 지켜지는건 아니지만 도움은 되는듯해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1-05-15 13:40   좋아요 0 | URL

그렇죠 !! 제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게되다니 말입니다.
반딧불이님 말씀보고 언젠가 의아하게 생각된 -유사하게 사용되는- '리뷰'와 '서평' 그리고 '독후감'의 차이를 생각해봅니다.
리뷰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전체를 대강 살펴보거나 중요한 내용이나 줄거리를 대강 추려 냄'이라고 하는군요. 하지만 방송용어로는 '영화, 라디오, TV, 연기자에 대한 비평'이라는 뜻이 존재한다는군요
그러니까 책을 리뷰하는 리뷰어는 서평자와 동의어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대부분 출판사에는 '서평'대회보다는 '리뷰'대회라고 칭하죠
'평가'보다는 '다시보기' 하는 아마추어리즘을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싶기도 하고...

제가 얼마전, 서평단과 평가단은 역할이 틀린 것이라는 내용을 리뷰에 삽입한 적이 있는데,
저는 사실 리뷰와 서평은 같은 것이라고 여겼거든요^^
독후감이라고 하면 '평가'보다 '감상'이 위주가 되는 글이라 생각했구요...

하지만, 반딧불이님 처럼 '리뷰'가 '서평'보다는 덜 무겁게 느껴진다는 생각,
듣고보니 깨닫게 됩니다.





마녀고양이 2011-05-15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여, 어려운 서평은 일단 on,no! 랍니다.
수사적인 문구, 현학적인 문구, 너무나 전문적인 문구들 있잖아요. 그리고 언어를 위한 언어도 어렵더라구요.
물론 서너번 되씹어도 고소한 맛이 나는 글이 좋긴 하지만,
그래도 그럴듯하기만 하고 읽어도 핵심이 무엇인지 잡아낼 수 없는 서평은 힘들구요.

요즘은 서평이나 리뷰보다는, 이런 블러그를 통한 자신만의 재해석이라는 새로운 차원이 있다네요.
즉 책 리뷰 같지만, 그를 통하여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라던데요.
멋진 서재를 보면 그런 말에도 동감하게 됩니다,, 끄덕끄덕.

참, 좋은 글이네요.

한사람 2011-05-15 17: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일단 어려운 용어들이 많으면 서평을 끝까지 읽기도 힘들죠^^
그런데 요즘은 이런 생각도 들어요, 그런 분들은 외려 쉽게 쓰기가 더 어려운 것은 아닐까..하고요
이건 글을 잘쓰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데, 원래부터 글쓰기 방법으로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자기 방식이 되어버린 것이죠. 어떤 분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글이나 대회용으로 접수한 글이 아니더라도
아주 오래전부터 교양있는 문체와 해박한 지식, 현학적인 용어들로 리뷰를 완성하시더라는 거죠.
즉, 아는 만큼, 읽은 만큼 토해내는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분들, 분명히 본받고 싶더라구요
(원래 그날 하루 멋낸 사람이랑 쭈욱 그렇게 멋내온 사람이랑 틀려보이듯이요 ㅋㅋ)

그리고 '블로그를 통한 자신만의 재해석'이 아주 맘에 드는 분야로 생각되요
잠시 마녀고양이님 서재에 다녀왔는데..어쩌면 마녀고양이 님이 작성하시는 방법이 그런게 아닌가 싶었답니다..

서평을 좀 써왔다 생각을 해서 그런지 요즘, 여러 생각이 드네요^^

stella.K 2011-05-1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글 읽으니 약간 뜨끔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제 글을 두고 하신 말씀 같아서.
그런데, 전 이즈음 서평이든, 리뷰든 목숨걸지 말자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바로 말씀하신, 각종 리뷰대회, 이주의 당선작이 어느 정도까지는 사람들에게
쓰는 것을 독려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면 변질되어 버린다는 거죠.
물론 한사람님의 이런 고민들이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저는 이즈음, 무슨 정신으로 리뷰대회를 열고, 매주, 또는 매월 리뷰 당선작을 뽑느냐고
주최자들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이건 약간 주제를 벗어나는지도 모르겠는데, 타 매체는 제가 관심이 없어 잘 모르겠고,
알라딘만 보더라도 이달의 당선작으로 변환한 뒤 그 변질의 정도는 이전보다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알라딘으로선 퀄리티를 높이기 위한 거라고 하지만, 그 전에 한사람님 만큼이나 좋은 리뷰는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고 뽑는지? 그걸 묻고 싶어졌습니다.
처음 저도 적립금 받을 요량으로 안 쓰던 감상문인지, 리뷰인지 모를 글을 썼고, 지금도 쓰고 있는데
요즘엔 이게 자꾸 발목을 잡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적어도, 저는 뭐가 좋은 리뷰냐 보단 조금 더 자유로운 내 글을 쓸 수 있어야 하고 그게 공감도 얻고 당선도 되고 그러면 좋겠는데, 그러기 전에 자꾸만 뭔가에 신경을 쓴다는 거죠.
어떻게 하면 규격에 맞는 글을 써서 적립금을 받아 볼까?
추천 못 받으면 괜히 비교당하는 것 같아 위축되고, 당선작 축에도 못들면
열등해져 버리는 것 같고. 점점 통속적이 되간다는 느낌.
무엇보다 내 글이 적립금 하나로 가치가 평가되는 걸 정말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보다 못하거나, 아니면 더 가치가 있거나, 둘중의 하나 아니겠습니까?
암튼 여러모로 고민이 많습니다.
이 얘기 한사람님 서재에 다 쏟아 놓을 건 아닌데, 또 말이 길어졌네요.
좀 더 정리한 다음 나중에 제 서재에 따로 올려보던가 그러겠습니다. 미안해요.ㅠ

한사람 2011-05-15 17:19   좋아요 0 | URL

에고...전혀 아니어요~(오해들 하실까봐 제 이웃님들이 아니라고 사족을 붙였는데 ㅠ.ㅠ)
스텔라님의 서평에서 위의 사항에 해당되는 경우를 느껴 본 적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들 서평자 모두는 위의 방식에서 결코 자유롭지가 못하죠..
다들 자신들도 모르게 해온 습관이고 또 별 문제를 못느끼는 글쓰기 방법인걸요
다만 좋은 서평, 안 좋은 서평이라고 구분 짓는다면 퍼뜩 떠오른 안 좋은 서평이라는 생각으로 쓴 글이랍니다^^(안 좋은 방법을 빼고 나면 좋은 방법이 남겠지 식으로요)

그리고 알라딘의 이달의 당선작에 대한 생각은...
저는 사실, 스텔라님만큼 그 문제를 생각해본적은 없어요..
온라인 서점에서 선정하는 리뷰들은 솔직히 어떤 공신력있는 기준에 대한 결과라기 보다는
회원의 충성도에 대한 격려나 신규회원의 확장을 위한 방편, 신간및 구간 판매량에의 제고등과 연관된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뽑혀도 안뽑혀도 크게 갸우뚱거리며 생각을 안해봤는데..

어떤 리뷰가 선정 될 만한 '좋은 리뷰'인지 당선작에 대한 기준에 대한 문제는
순전 온라인 서점의 권한이 아닐까요 ㅠ.ㅠ
어떠한 선정될만한 규격에 맞는 글이 따로 있다는 생각은 안해봤습니다..

그저 자주 보이는 분들이(?) 자주 선정되는구나, 정도로 밖에....

이 부분은 나중에 스텔라님의 제기하시는 글을 보고 더 생각해볼께요^^

네오 2011-05-16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성하게 하는 글이었고 동감하는 글이었습니다. 사실 근래에 들어와서 책에 대한 '리뷰'쓰기가 어려워 근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한마디로 독서가 재미없어졌으며 활자가 아니 이미지(트위터,페이스북)로만 감각의 수용이 작용하니 이제는 깊고 사유하는 글이 싫어지더군요~ 신속하고 재빠른 접속의 속도에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시간을 활용하면서 책을 접한다는 행위는 이제는 불필요한 행동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저또한 '어렵고' '현학적인' 글들을 좋아하지만 나중에는 저의 머리속에는 텅빈여백처럼 오랜기억을 가지고 그 활자들을 재생산이 수월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점이다.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지금 읽고 있는데 좋은 글은 역시 쉽고 재미있는 글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로자의 글을 인용하시며 왜 이책을 읽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리뷰의 효과를 언급하셨는데 그러면 그 나쁜책에 접근해야하는데 무엇인가의 선행과정이 용이하게 이뤄져야 겠지요? 한번 건드려보고 싶은 영역이네요~

한사람 2011-05-15 23:38   좋아요 0 | URL

저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하지 않아서 재빠른 속도의 시대를 실감하지는 못하는 경우랍니다
어떤 매체가 새롭게 등장하고 그것을 운용하는 유틸리티가 보편화되면 분명 주어진 시스템에 적응하고 그것에 매달리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해 아직도 허벅지 누르며 꾸욱 참고 있어요 ㅋ
우리 사회는 새로운 매체의 사용을 거의 폭력적으로 종용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네오님의 서평을 보고 전공과 지식을 바탕으로한 해석툴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마치 논문쓰던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주제넘지만, 그 현학적인 데이터들로 귀결되는 결론부에 조금만 더 감성이 보태어 진다면 하는 생각 ㅋㅋ 을 한 적이 있어요^^

이 책이 왜 별하나 인지를 알려주는 서평을 설득력있게 쓰는 것은 결국
논리적 비판의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자신만의 논리는 오랜 독서와 사유의 힘에서 나올테구요

그런데, 저도 얼마전 그런 리뷰를 나름대로 써본적이 있는데
사람도 모든 면이 별하나 이지 않듯이 책도 분명, 모든 점이 별 하나인 책은 역으로 불가능하지 않나 싶어집니다. 그러기 참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찬찬히 뜯어보면 그래도 좋은 구석이 있기 마련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다 뜯어보았는데 그래도 별 하나이다라는 책일거라면 애초부터 읽게되지 않을 확률이 많다는 생각이 드네요...만약 우연히라도 그런 책을 읽고 별 하나의 완벽한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필히, 리포트이거나 숙제, 혹은 의무가 아니었을지요 ㅋㅋ

穀雨(곡우) 2011-05-16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위적인 서평에서 크게 공감...^^ 누구 하나 다리 부러져야 한다는...ㅎㅎㅎ
서평이 주관적 사유가 바탕이 됨은 불가피하겠지만 저 같은 경우, 너무 사변적이거나 감상적으로 흐르려고
해서 늘 고민입니다. 게다가 전문비평가가 아님에도 지식의 섣부른 남용이 무엇보다 더 큰 고민....

그런데 글이라는 게 자꾸 쓰고 끼적이다 보니 생각의 그릇을 확장시켜 주는 것은 사실이더군요. 머릿속
생각으로만 머물던 고리들이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어휘의 선택, 내용의 연결은 분석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 생각을 거르는 거름망처럼 작용하더라는 말이지요.

물론 글 깨나 쓴다는 분들 앞에 비하면 맹물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한사람 2011-05-16 15:46   좋아요 0 | URL

곡우님...제가 아는 곡우님도 글깨나 쓴다는 분들에 속합니다 !!!

제가 느꼈던 곡우님의 서평은 '지식의 남용'이라기 보다는 '지식의 용해'였어요.
감상적이라기 보다는 감성의 절제였구요
사실, 이렇게 서로를 칭찬해도 자기가 부족한 것은 자신이 제일 잘알고 또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은 남들이 부러워 해도 크게 위로가 되지 못하죠 ㅋ

하지만, 곡우님이 이미 알고 계신 다양한 지식이 분명 곡우님의 머리와 가슴을 관통한 후
곡우님만이 할 수 있는 해석과 감상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는 느낌만은 기억합니다^^

작위적인 서평이 되는 이유는 아마도 더 잘 써보고 싶은 욕망때문일 터 인데,
저는 지난 일년간 이 작위적인 서평을 실컷 원없이 써보았기에 이제서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거 같아요 ~(누구보다도 서평으로 소설써온 일인이지요 ㅋ)






가연 2011-05-21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글 좋네요. 오랜만에 들렀습니다ㅠ 뭐라고 더하거나 뺄 말이 없네요. 무엇보다도 마지막 문단에 고개를 끄덕입니다ㅠㅠㅠㅠㅠ 정말 좋은 서평은 그 서평을 읽어줄 사람을 위한 건가요ㅠㅠ 무슨 형가와 고점리도 아니고.. 지들끼리 글 쓰는 건데ㅠㅠㅠ 그래서 항상 글을 쓸 때 고민을 하게 되더군요.. 물론 별로 많은 글을 끄적이지도 않았었지만ㅠㅠ

한사람 2011-05-21 14:56   좋아요 0 | URL

으흑...저는 글 잘썼다는 말도 감사하지만
글 좋다고 하시면 감동먹어요^^
글 좋다고 말하는 거 정말 맘에 들어서 좋아야 말한다는거..알거든요..

요즘은 4분의 3서평을 써볼까 생각해요
너무 완벽하려 애쓰지 않고 조금 남겨두는 식으로요

가연님은 어쩐지 바쁘신 분같아요...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주말이 여유로우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