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깊은 밤, 기린의 말 - 「문학의문학」 대표 작가 작품집
김연수.박완서 외 지음 / 문학의문학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나잇살의 이름값
박완서(1931-2011), 이청준(1939-2008), 최일남(1932), 윤후명(1946), 이승우(1959), 권지예(1960), 이나미(1961), 조경란(1969), 김연수(1970), 이명랑(1973). 이상, 감히 이 책을 이루는 주인공들을 열거해 봅니다.
이름을 부르고 나면 내게 다가와 꽃이라도 되어야 할진대 이들을 호명하고 나니 저는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수록된 작품들도 한결같이 그 먹먹한 이름값을 한답니다. 이 책은 2007년에서 2010년 사이 <문학의 문학>이라는 문예지에 실린 중견작가의 단편 10편으로 엮어진 소설집입니다. 작가들의 나이를 보니 이명랑 작가를 제외하면 모두 불혹을 지나셨습니다.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 이청준 작가와 같은 세대인 최일남 작가는 꼭 제 아버지와 출생연도가 같습니다. 저와 갑장인 김연수 작가를 기점으로 얼추 가까운 사촌 동생과 바로 위 언니에서부터 막내이모, 큰 삼촌, 고모부까지 꼭 집안 경조사라고 한자리에 모이신 어르신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속된 말로 애들은 가라, 식의 어른들 모임인 것이지요. 이 책을 덮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결론은 요즘 세간에 유행하는 어느 프로그램처럼 ‘나는 작가다’ 의 진짜(?) 라이브 소설 경연장이라도 구경하고 돌아온 느낌이었달까요. 문학의 연륜이라는 것, 세월의 내공이라는 것, 살면서 쓰면서 그들이 축적해온 것들이 담담하면서도 엄숙하게 녹아들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묵직한 감동을 선사하더군요. 고개가 절로 숙여지더라는 것이죠. 고개를 숙이니 새삼 이참에 처연하게 떨어진 꽃잎들이 서러운 계절을 확인합니다. 이번 봄엔 간다는 것, 가버렸다는 것에 슬퍼하지 말자 다짐을 했더랬죠. 삼년 째 불혹 증후군을 앓고 있는데 병도 오래되니 진화하는가 봅니다. 처음엔 나이드는 것이 꼭 계절에 지는 것만 같았는데 이젠, 슬슬 중년이라는 말도 익숙하고 내가 입어도 될 옷처럼 느껴지거든요. 이 책과 저와의 인연을 중년이라는 공감으로 정리하자면 이 책은 ‘중년이 그리워지는 소설’, ‘중년을 위로하는 소설’,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제가 소개를 할 순서는 이 책의 목차와는 다릅니다. 얼마 전 작고하신 박완서 작가와 이청준 작가의 작품을 앞에 두고, 그 다음부터는 나이순입니다. 이깟 순서가 뭐 대수라고 생각나는 대로 적어도 알아주는 이 하나 없겠지만, 어쩐지 이번만큼은 윗물 아랫물에도 예의를 차리고 싶었습니다. 나이가 뭐 중요 하냐,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나이들어서 그런 것일까요. 점점 나이드신 분들에게 깍듯이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 더 오래 더 많이 써온 것이 자랑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보기에 한참 어린 저겠지만 나이들지 않고서는 배어 나올 수 없는 향기, 아니 나이 들어서라야만 나오는 체액, 그 나잇살의 아름다운 완성을 보란듯이 증명하셨기 때문에요.
1.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2008) / 박완서(1931-2011)
저는 이 작품을 여러 번 읽고 읽을 때마다 청승을 떨었습니다. 이제 고인이 된 작가의 글이라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이 박완서 작가의 마지막 단편이라는 안타까움도 아니었습니다. 이토록 짜릿한 중산층 며느리의 속물적 심경은 이제 더 이상 만날 수가 없겠구나, 하는 애틋함이야 당연한 것이겠죠. 이야기는 영원해도 그렇게 한 세대는 가는 것일 테니까요. 허나, 이제 그 다음 세대인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차례구나, 내 할머니고 어머니가 아닌 내 이야기일 수 있구나 하는 현실감이 너무나 분명하게 잔인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꼭 먼저 간 남편은 아직도 젊은이인데 남겨진 아내만 할망구가 되어버린 얄궂은 운명만 같아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게 소설 속 주인공이 되었다가 저 역시도 사라지는 세대가 될 터이니까요.
박완서 작가는 생전에 ‘나는 사람과 세상에 복수하려고 글을 쓰게 되었다’ 고 한 바 있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 야속하기만 한 세상에게 보아라, 당신네들이 실은 이렇게 생겨먹지 않았소, 내가 모르는 줄 알았지? 하고 말하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상처를 글로 갚는 것이 작가들의 재주이자 팔자인 것일까요. 이 작품의 주인공은 며느리도 있(었)고 시어머니도 있는 낀 세대 며느리입니다. 물론 아들도 남편도 있지요.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잃은 작가가 눙쳐낸 며느리 보고서는 뭐라 언급하기조차 미안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사실적이고 속속들이 저릿저릿합니다. 일제시대 경성사범 학교를 나오신 교사출신 시어머니를 둔 며느리는 말합니다. 나는 결코 저런 잘난 시어머니는 되지 말아야 겠다고요. 그런데 여우같은 여자에게 홀려 장가간 아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남의 자식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우린 지금 남남이라니까요, 완전.’ 아무리 지들 좋아 한 결혼이라지만 부모에게 상의 한마디 없이 이혼한 자초지종이라도 들어보고 싶었던 주인공의 계획은 한 때 며느리였던 아들 전처와의 깔끔한 대화로 마무리됩니다. 작가는 묻습니다. 이들이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 어떤 며느리의 잘못 때문이냐고요. 혹시 아들의 어머니가 갱년기인 탓은 아닐까 하고요. 입술은 마르고 얼굴은 벌개지고 속에선 천불이 난다는데 나이들면 다 그런 것이냐고요. 시어머니에게 위로부터의 모멸감을 느낀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아래로부터의 패배감을 느끼며 집에 돌아옵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코 골며, 아, 아 간간이 신음하며’ 잠이 듭니다. 아니 꿈을 꿉니다. 집에서 못된 바람은 죄다 여자에게 불어 오나니 속에서 천불이 날 수 밖에요. 하지만 남편이라는 현실앞에선 완벽히 꺼지지가 않네요. 사람에겐 그래서 꿈이 필요한 걸까요. 가슴이 홧홧해지는 것이 꼭 갱년기 예행연습 만 같아, 이 작품을 예방약처럼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속은 좀 상해도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느새 속이 시원해지니까요. 아마 박완서 작가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2. 이상한 선물(2007) / 이청준(1939-2008)
이 작품도 이청준 작가의 유작입니다. 두 분 다 소설의 고향같은 분들이라 한자리에서 괜스레 마음이 황망해지는 시간이었어요. 저에게 이청준 작가의 단편은 '소설의 교과서'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한번 읽고는 제 뜻을 파악하지 못한 듯 싶어 두 번, 세 번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곤 한답니다. 이청준 단편들은 언제나 충분히 평범하고 느리게 시작하는 편인데 이 작품도 그저 나이 지긋한 한 사내가 고향길을 찾아가는 장면이 처음입니다. 그다지 별스럽지 않아 보이죠. 극적인 반전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심각한 사건이 날 것 같지도 않아요. 그래서 초반엔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되니 쉬워 보이는 구석이 있어요. 그런데 자꾸 따라 가다보면 정신을 차리지 않고서는 덮고 나서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많지가 않습니다. 꼭 어려운 문제 가르쳐 주는 선생님의 당부 말씀 같은 소설입니다. 설명을 하도 완벽하게 잘 하셔서 그럭저럭 수업 들을 땐 내가 내용을 이해했다고 생각이 들지만 집에 가서 혼자 풀어보려면 손댈 수가 없는 문제처럼 말입니다. 소설이 완벽하다고 선생님이 완벽하다고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이야기의 웅숭깊음, 소설의 절대성, 문학의 경지 같은 의미를 절로 떠올리게 합니다.
이청준 단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미덕은 그 완성도를 향한 모든 문장의 적확한 밀도 가 아닐까요. 전혀 작위성을 감지 할 수 없는 편안함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할 말을 하고 싶은 만큼만, 해야 할 만큼만 하고 붓을 놓습니다. 가령,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그는 그 돌판 조각이 진짜 벼루로 변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무연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혼자 중얼대고 있었다.’인데 이 문장만 떼어놓고 보면 꼭 이것이 끝인 것은 아닌 듯 합니다. 끝이라고 하기엔 아쉽고 남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여운속에서 몇 번이고 이 문장을 읽습니다. 그러다보면 아...중요한 것은 ‘그 돌판 조각이 진짜 벼루로 변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하는 우리네 심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돌판 조각도 벼루라고 우기고 그것을 알면서도 돌판으로 먹을 갈았다 하는 것이, 그런 사람이 있었다지, 그 사람을 알고 있네 하는 것이 바로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으니까요. 작가는 혼신을 다해 앞서 이야기가 생산되고 그것을 유통하는 마을사람들의 심리를 잘 설득해주었던 것인 걸요.
그래서 작가가 전해주는 ‘선바우골 인물전’의 인물들은 사실 '날궂이 하는 미친년'이나 유난히 큰 양물을 지녔다는 '장순이'나 비극적 천재 '씨름꾼'이나 동네 '그림자 도둑', '도깨비 할배'의 이야기가 아니고 ‘저 몹쓸 도둑이나 노름꾼, 패륜아 무리까지도 나름대로 사람살이의 반면 거울을 삼을 수 있었’다는 동네사람들의 이야기 인 것입니다. 그 동네사람들 중에서도 '걸어 다니는 법'전으로 불렸다는 '황기태 씨'가 동네 최고의 출세인물일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죠. 황기태 씨는 지방 중하위 공무원으로 크게 출세했다고 볼 수 없는 인물이지만 고향에선 공부로 출세한 그를 ‘선바우골 인물전’의 어엿한 주인공으로 여겼다네요. 작가는 기인이나, 재주꾼, 초인격 인물의 이야기가 신화를 만들고 신화를 통해 마을이 하나로 묶이는 과정, 알면서도 속아주며 풍진세상을 헤쳐 나가는 보통 사람들의 고집스런 세월을 담담히 보고합니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속담의 주인공, 전남 장흥이 고향인 작가가 고향을 위해 평생토록 해야 했을 일은 시골에 길을 닦아주고 다리를 놓아주는 일이 아니라 황기태 씨처럼 고향 인물전의 주인공이 되어주는 일은 아니었을까요. 아니 보다 많은 황기태 씨의 이야기를 만들고 전해주는 일은 아니었을까요. 이청준은 바로 진짜 벼루로 변신할 지 모르는 숫돌판을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는지 모르겠어요. 비록 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상한 선물’이라고 회자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3. 국화 밑에서(2010) / 최일남(1932)
주제넘지만 저는 여지껏 이런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유식하고 고상하게 혹은 어렵고도 근사하게 이 작품을 말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제 언어로 그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할 밖에요. 이 작품은 이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두 분의 고인을 제외하면 작가들 중에 가장 고령이시고요. (참고로 제 아버지가 1932 년생이신지라 아버지의 이야기만 같습니다) 가장 연장자가 말하는 소설은 가장 자연스런 ‘죽음’을 주고받는 대화 였습니다. 그냥 소설이라기 보다는 평소 생각으로 보였습니다. 평생토록 생각해온 것들을 다만 글로 적었다는 느낌이었어요. 주인공은 하루에 두 번의 장례식장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곳의 상주와 주거니 받거니 장례문화와 풍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제가 놀랍게 느낀 것은 소설언어가 격조높고 고풍스럽다는 것입니다. 같은 한국어인데 어딘가 국어수준이 높은 선진국 나라의 언어같았다고 할까요. (배운)어르신으로서 젠 체 하는 한자나 고리타분한 옛 글투가 아니라 수준높은 한글과 국어, 그리고 인문학적 용어들이 멋스럽게 용해되어 있었습니다. 단순히 의성어, 의태어의 맛깔스런 표현이 아니라 예를 들면 ‘미소를 띤 모습이 긴 세월을 와락 당겨 냅뜨는 폭인가, 그때 그 사람의 얼굴이 빈소에서 보다 훨씬 뚜렷했다.’ 혹은 ‘근력이 좋아 뵌다는 수인사에 내장은 엉망이라는 겸양이 상투적일지언정 말의 디딤돌로는 불가피하다.’같은 문장에선 이미 우리말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문체로 문학이라는 언어를 이룩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보시게. 사는 일이 들쭉날쭉인 터에 사람들의 삶에 언제는 서론결론이 따로 있었다고 믿나. 심심파적인 양 중간에 어쩌다 반전이 있기는 있거늘 그것도 믿을 게 못되네. 잘못 뒤집었다간 본전마저 날리기 쉬우니깐.”
그래서 위와 같은 구절은 마치 작가라는 대 인생선배가 한참 아래인 인생후배에게 전해주는 생활속 조언만 같습니다. 이 작품에는 장례를 말하는 영화와 소설, 시를 비롯해 작가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아는 만큼, 보고 듣고 느낀 만큼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저는 이제부터 누군가가 어떻게 죽고 싶느냐고 물어본다면 ‘화장실에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가고 싶다고 그렇게 시적으로 말하려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비로소 환해지는 죽음도 문학에는 있다더라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에는 죽음의 종류도 다양해 입맛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냐, 가령 어느 노작가의 잘빠진 소설에서처럼 말입니다.
4. 소금창고(2007) / 윤후명(1946)
작년에 윤후명 작가의 글을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2010 / 현대문학>에 수록된 ‘모래의 시’라는 단편으로 뵌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의 글은 전체적으로 몽환적이고 시적입니다. 그래서 끝내 철학적으로 마무리 되는 작품이기에 읽고 나면 더없이 쓸쓸해지는 바람같이 몹쓸 종류의 소설이죠. ‘모래의 시’는 어머니 임종 후 고향인 강원도 바닷가를 찾아가며 지나온 삶의 편린들을 시적인 감성으로 회상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건 '손 한 번 잡아보자'는 어머니의 유언이 마치 파도에 휩쓸린 모래알처럼 아스라이 흩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삶이란 그리움의 야적장 같은 것이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버려져 있는 저 폐품들을 보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폐품은 유품이 되어 달겨든다. 버려야지, 하면서 내놓았다가 다시 하는 수 없이 간직하곤 하는, 이젠 못 쓰는 낡은 물건들 속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리움들.... 많은 그리움을 뒤에 두고 우리는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 것일까.” - 모래의 시 中
우리는 늘 그렇듯이 추억을 찾으러 떠났다가 그리움만 잔뜩 발견하고 돌아오곤 합니다. 결국 그리움도 무언가를 찾기 위한 강렬한 의지로부터 생겨난 욕심일뿐 아닐까요. 누군가가 보고 싶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려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것이죠. 보고 싶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구요. 이번 소설에서도 작가는 그 시절을 찾아 떠납니다.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것이 마치 그리움을 해소해 주는 일인 것 처럼요.
더욱 낭만적으로 이제는 사라진 협궤열차를 타고 그 옛날 염전 바닷가에 위치한 소금창고를 찾아 떠납니다. ‘협궤열차’는 주인공에게 ‘지난 한 시절이 실려 있는 열차’이고 ‘내가 헤매 다니던 그곳’이며 ‘오랫동안 내 젊음을 보낸 공간’이기도 합니다. 열차를 타고 달리는 짧은 여행은 과거 ‘조개의 섬’이나 ‘갯벌의 황소’를 만나러 가는 길이며 친구들과의 추억이 깃든 그리움의 시원, 바로 ‘소금창고’와 재회하러 가는 길인 것입니다. 소금창고는 ‘순간이 마지막 휘발되기 전에 갈피 지어 차곡차곡 쟁여 둠으로써 추억을 발효시키’는 공간이었다죠. 그곳에서 추억을 나눈 친구들은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남루한 사진 한 장만 남았지만 그땐 그렇게 소금창고에서 시만 쓰고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라면에 바닷가 젓갈들만으로도 살아갈 계획을 세워놓고 그것을 ‘희망’이라고 불렀으니까요. 사람에게 어떤 희망은 죽는 날이라는 절망속에서도 죽도록 잊혀지지 않는 질긴 환영일까요. 그렇다면 주인공이 자꾸 우연히 마주치던 여자 여행객은 소금창고에 저장된 추억의 환영이었을지 모릅니다. 우연도 세 번이 넘으면 필연이라 했던가요. 아...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네요. 그것은 희망으로 동화(同化)되는 한 편의 동화(童話)였습니다. 열차가 달려가는 그곳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희망스런 날들의 시공간, 그 희망의 기록장 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추억은 아름다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소금창고에 꽁꽁 쟁여둔 소금, 세월이 지나도 절대 썩지 않는 소중한 그것. 나만의 그것 말입니다.
5. 한 구레네사람의 수기(2008) / 이승우(1959)
이 작품은 이 책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소설입니다. 저는 사실 소설에 종교적인 기운이 강하게 묻어나 있는 글을 별로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예수와 십자가의 의미를 등에 업고 인간 구원의 과정을 그려내는 작가의 행보가 썩 맘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성경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 제가 호감가지는 장르의 글은 아니었던 것이죠. 구레네 사람 시몬은 병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려고 골고다 언덕길로 끌고 갈 때, 그 처형장면을 구경하려고 언덕 가까이 왔다가 잡히는 바람에 예수가 무거워 힘들어하는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는 인물입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기독교 역사상)영광스런 큰일을 한 사람이죠. 작가는 이 성경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시몬의 시점으로 서술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다시 쓰는(re-writing) 방식의 소설 인지라 저는 최근에 익숙한 서사를 재해석하기로 유명한 소설가 최제훈 작가를 떠올렸습니다. 최제훈 작가의 전략이 텍스트의 변주로 이른바 읽는 사람 마음대로 독자 ‘좋을 대로 해석하기’였다면 이승우 작가의 전략은 ‘다른 눈으로 해석하기’로 생각됩니다. 역사는 인물과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서술하는 시점의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이 작품에서 시몬은 흑인인데다가 장사꾼으로 등장합니다.(구레네는 지금의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지방에 해당) 아들과 함께 돈되는 곳을 찾아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보따리 장사꾼인 것이죠. 작가가 이미 가지고 있던 제 편견을 누그러뜨리며 전혀 다른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생각한 것은 바로 시몬이 사람의 아들이라 불린다는 나사렛 사나이를 두고 인간적인 의심을 품는 부분이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 를 섬세한 소설로 완성시킨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되는 과정과 그 순간에 일어나는 한 인간의 깨달음을 종교적이지 않게 주형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시공간에 자석같이 편입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 인간이 그것이 구원인지 변심인지 무엇인지 인식하기 전에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설명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체험이 아니면 감동받기 힘든 것이죠.
“그리고 나는 예감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람으로 인해 나의 인생인 달라질 거라는 예감은 바위처럼 견고했다. ... 그가 세상을 구원할 능력을 가졌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의 눈과 손에 붙잡혀 다른 존재로 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롭게 변화되지 않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그 사람이 예수가 아니더라도 살면서 한번쯤은 겪게 되는 순간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특별해 보일 것 같은 순간의 솔직한 보편성에 감동받았습니다. 결국 구원받는 순간은 늘 바라던 구애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아닐까요. 나를 구원해주는 대상이 예수가 아니면 어떤가요. 중요한 건 지금부터 달라질 내 인생 인 것이지요. 그건 흑인이건 장사꾼이건 구원을 원하는, 혹은 원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공평한 시작 아닐까요. 돌이켜 보건대, 제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기대하건대, 앞으로도 이 순간이 다시 오길 바라게 되네요. 그러니까, 끝내 ‘희망’을 설득하며 묘한 끌림을 주는 매력적인 소설이었습니다.
6. 퍼즐(2007) / 권지예(1960)
이 책에서 가장 소름끼치고 을씨년스러워 한나절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통속적일 수 있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사연이 미세한 고품격의 감성들로만 조각조각 맞추어지는 느낌. 같은 불륜이라도 감독에 따라 예술영화가 되듯이 말입니다. 마지막 순간 책을 덮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완벽히 맞추어진 퍼즐의 잔상에 애도의 시간이라도 가져야 할 것 같았습니다.
"단 한 조각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완전하게 맞추기 위해 퍼즐 게임은 존재하는 것이다."
여인은 5대 독자의 집안에 재취로 시집을 옵니다. 순전 씨받이 역할로 말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웃기기도 하야 전처가 낳은 딸의 방에선 임신 테스트 키트가 발견되지요. 처음부터 대놓고 아들낳기를 강요받아온 이 여인은 여러 차례 태아감별 검사로 강제적 인공유산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폐허가 된 육신은 어느덧 폐경이라는 절망을 받아들여야 했고 가족의 외면속에서 정신마저 피폐되어 갑니다. ‘한 세상 지나며 씨를 내지 못하고 꽃이 진 자신의 몸을’ 매순간 자각하는 여인은 전처 딸의 창가에 둥지를 튼 새와 고양이 울음소리와 사라진 아기들의 뼈, 핏덩이로 흩어진 살점들을 제 정신으로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족이 된지 18년이 되었지만 늘 ‘물 위의 기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작품에서 여인의 취미로 묘사된 퍼즐을 맞추는 작업은 거꾸로 완성된 작품에서 하나씩 퍼즐이 사라져 가는 게임으로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소멸의 완성이 퍼즐게임의 승리일 수 있다는 것. 여인은 끝내 사라짐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킨 것이니까요. 미술품에 애정을 쏟는 남편은 겉모습만 중시하는 가식적인 중산층의 표상이겠죠. 내면의 아름다움과 상관없이 형식적인 틀에 맞춰 아들이라는 퍼즐 하나가 간절했던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거부하는 전처 딸이 둥지에 든 새를 혐오하는 것은 자발적인 낙태와 함께 인명을 경시하는 다음 세대의 환유이겠지요. 파출부 자식이면서 지적 장애를 가진 다 큰 아들이라도 하나 있었다면 좋겠다는 여인의 마지막은 권지예 작가의 계략이자 치밀한 각본의 결과입니다. 포르말린에 채워져 물러 터지고 말 과육과도 같은 살점의 영구보관. 그녀가 스스로 뚜껑을 닫으며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되어버린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뚜껑을 덮으면 엄마 뱃속처럼 따뜻해서 괜찮을 거라는 그래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는 그곳은, 혹 누군가가 뚜껑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곳은 아니었을까요?
7. 마디(2007) / 이나미(1961)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삭발’을 감행합니다. ‘요즘 부쩍 스무 살 이후로 이십년 세월이 드문드문 도막난 채 떠오른다’는 주인공이니 얼추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모양입니다. 그녀는 음대 작곡과 출신의 강사인데 어린 시절 장독대에서 떨어져 귀를 크게 다친 경험일랑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 사실이 환기되느냐 하면 삭발하고 보니 그토록 엄청난 상처를 남긴 흉터가 세상에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즉, 머리만 깍지 않았어도 잊고 살아도 좋을 상처였지요. 왜 머리를 깍아야 했을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어찌어찌하다 마흔에 드디어 삭발하게 된 이유를 말하는 소설인 것입니다. 삭발하였으므로 오래된 상처, 잊었던 나를 발견한 이야기일테니까요.
삭발을 하게 된 경위는 여느 소설과 다르진 않았습니다. 그녀는 실연을 당했고 친구는 배신했으며 교수임용에도 실패했으니까요. 그런데 작가는 그간의 사연에 구구절절 치중하기 보다는 삭발식으로 향하는 심정과 삭발식의 순간에 보다 집중합니다. 사진관과 목욕탕, 미용실로 옮기는 발걸음이 얼마나 장중하던지 흡사 입대를 앞둔 누군가가 생각나기도 했으니까요. 직업적으로 청각이 누구보다 중요한 그녀에게 감응 신경성 난청이라는 뜻밖의 진단은 아무리 잘 견뎌온 인생이라지만 새로운 상처가 되고도 남았겠지요. 작가의 오랜 내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멀지 않았습니다. 삭발이라는 초강수도 울고 갈 꽃구경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마디’가 제목으로서 울림을 주는 절절한 깨달음. 생물의 마디는 절연되었기에 마지막이 아니라 지금부터 성장할 수 있기때문에 소중한 마디였던 것이죠. 잘라내었기 때문에 새롭게 자라나길 기다리는 마디였던 것입니다.
“최근 내 인생도 전지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했다. 자의든 타의든 쳐낼 것은 쳐내고 그 상처의 마디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굵고 튼실해진다는 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몽당나무들.”
가지를 치는 것(전지작업,剪枝作業)이 과실의 생산을 늘리기 위한 작업 이었다는 것을 알 게된 불혹이야 말로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는 나이’라는 작가의 마지막이 저는 어쩐지 이 책에서 주제상으로는 가장 젊다고 느껴진 소설이기도 합니다. 아직, 마흔밖에 되지 않은 것이니까요. 작가의 문장들도 아픔을 무릅쓰고 곁가지를 잘 다듬어 내었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입니다. 생각보다 마흔 즈음에 찾아오는 불혹병이 깊고 쓰라리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젊고 건강하게 한 이십년 살다보니 그 시절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룬 것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다면 없는 대로 자아성찰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게 되어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죠. 제 경우도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처럼 ‘난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내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제와 없어진 무엇을 발견하는 일은 실로 ‘나이 마흔에 벌어 놓은 건 나이뿐이’라는 이 소설의 허탈함과 꼭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상처의 가지치기, 전지작업이 필요했던 제게도 선물같은 작품이었습니다. 가지치기를 끝내고 다음의 열매를 기다리는 이 심정을 당신도 알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8. 파종(2009) / 조경란(1969)
잘은 모르지만, 작가들은 이런 소설을 훌륭한 소설이라고 말할 듯 합니다. 꼭 화장을 하고 나왔는지 분명히 알고는 있지만 전혀 화장을 안한 듯 느껴지는 고난이도의 화장술처럼 말입니다. 기초부터 꼼꼼히 바를 걸 다 바르고 색조도 종목별로 다 했지만 누구보다 자연스러워 마치 원래 타고난 얼굴인듯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화장술. 알고 보면 그게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인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죠. 하루아침에 표현할 수 있는 테크닉이 아님을, 오랜 세월 터득하고 반복되어온 끝에 이루어진 진화의 산물임을 화장하는 사람은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소설가를 글쓰는 기술자로 보았을 때 절대 흉내낼 수 없는 수준높은 기술력으로 탄생된 제품일 것입니다.
우선 이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가족’입니다. ‘어제는 달에 갔습니다.’ 라는 생뚱맞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적 도입이 저는 좋았습니다. 뭐 대충 가족이 시적이기 얼마나 어렵습니까. 소설에서 만난 가족들은 (우리 가족과 똑같이)대개 ‘구질구질’하거나 ‘지긋지긋’하기 마련이니까요. 작가는 달나라에 착륙한 우주인처럼 달밤의 장면을 아름답게 중계합니다. 그 에메랄드빛 바다에 표독스런 송곳니를 가진 바다코끼리를 보았다는데 그 녀석이 꼭 자기 식구들 같다고 노래하네요. 서로의 몸통에 작살처럼 쑤셔 넣는 송곳니야말로 우리네 가족들의 오래된 무기라고요. 무릎을 탁치며 이것은 시라는 실로 소설을 뜨개질하는 작가의 기술력이다, 이렇게 감탄을 했습니다.
그렇게 바다코끼리의 송곳니를 가지고 돌아와 우리 가슴속에 서서히 후벼 파는 기술을 작가는 미련없이 보여주더군요. 읽는 동안만큼은 이 책에서 이 작품이 제일 아팠거든요. 사실, 가족이라는 존재는, 고의로 상처를 주기보다는 툭툭 늘 습관적으로 스크래치를 내고 가지 않습니까. 어떨 땐 상처인지도 모르고 지나갈 때가 더 많은 게죠.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집에서 오래 살다보면 서로의 송곳니도 흉기가 아니라 공구로 생각되니까요. 드라이버 좀 돌렸다고 아프다 소리치면 그건 우리끼리 엄살인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글로 소설화되고 나면 참 전혀 새로운 아픔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 아픔을 별스럽지 않게 감당하는 가족은 아버지와 딸입니다. 아픔을 과장하지 않고 단순하게 절제하면서도 그 순간을 정밀하게 포착해낸 작가의 솜씨가 일품입니다.
“아버지는 나 몰래, 나는 동생 몰래 모두가 잠든 한밤중의 식탁에서 눈치껏 술을 마십니다. ...이곳에서 나라는 존재는 저녁 밥상을 치우는 것으로 깨끗이 끝납니다. 조금만 배려받지 못하면 풀이 죽고 무시당한 느낌이 들곤 해요. 나이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를 보면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는 나는 아무 데서나 엎드려 잠들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동생은 엎으려 있는 내 귀를 왼손으로 잡아 끌어올리면 언니야, 또 달에 갔다 왔냐? 혀를 차기 마련이지요. ”
일본에 시집간 동생이 팔에 기브스를 하는 바람에 살림을 도와주러 간 아버지와 큰 딸은 어쩌다보니 둘도없는 내면의 술친구가 되버립니다. 이들이 가족간의 상처를 견디는 방법은 공교롭게도 알코올이었거든요. 힘이 되주려 간 것이지만 눈치 덩어리가 된 아버지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큰 언니는 도쿄라는 낯선 도시 어느 시장 골목을 헤매돌다 허름한 술집에서 반갑게도 재회합니다. 술을 끊지 못해 서로 울고 싶은 마음으로 웃어보는 두 사람, 서로에게 ‘딱 한잔’만 권하며 술잔을 건네던 그 장면은 조경란 작가가 말하는 웅숭깊은 가족의 백미였습니다. 아버지는 딸네 집 베란다가 허전해 꽃이라도 심어보려고 꽃씨를 사오는 분이었어요. 타국에서 사온 꽃씨가 시금치 씨앗인지도 몰랐고 파종시기도 모르셨지만 시금치가 명아주과라는 풀인 것은 아는 사람이었어요. 여기저기 빈터에서 흔히 자라지만 툭 던져놓으면 잘도 뿌리를 내려 쑥쑥 자라는 풀 말입니다. 어쩌면 가족이란 장미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시금치처럼 질긴 것이 아닐까 싶어요. 마침 시금치는 찬 바람과 눈을 맞고 자란 1월 것이 가장 맛이 좋다고 하잖아요. 각자 가진 송곳니로 서로를 할퀴어도 그토록 시린 세월을 지나온 가족이야말로 서로에게 가장 뜨거운 존재들이겠죠. 조경란의 <파종>은 가족이라는 흔하고도 질긴 씨앗을 송곳니처럼 특별하게 심어주는 소설이었습니다.
9. 깊은 밤, 기린의 말(2010) / 김연수(1970)
이 작품은 이 책의 표제작이면서 첫 수록 작입니다. 책을 덮고 조용히 왜 이 작품이 표제작이 되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솔직히 제목만으로 보면 소설집의 이름이 될 만한 작품으로는 이 작품이 가장 문학적으로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열 편을 묶어주는 아예 다른 언어로 제목을 지을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깊은 밤, 기린의 말’은 의미심장한 네이밍이라는 것이죠. 특히 동물원이 운영중인 대낮도 아니고 ‘깊은 밤’에 들려오는 ‘기린의 말’은 어떤 의미일까. 기린이 말은 할 수 있으며 또 한다 해도 누군가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기린이 말을 한다 가정했을 때 그럼 어떤 내용을 말 하였을 것인가. 그런데 왜 하필 기린이란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기린’이 의미하는 바를 성찰하는 이야기이며 그것은 이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과적 전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기린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우리는 기린이 하는 말을 꼭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기린이 말을 하지 않았거나 들리지 않았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어도 말입니다.
이처럼 기린에게 눈과 귀를 기울여보면 작가가 왜 자폐아 가정을 관망하여 관통하는 동물로 기린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봄날 쌍둥이 자매와 자폐동생 태호 삼남매는 동물원을 가게 됩니다. (동물원에서는 꼭 벚꽃이 흩날리거든요) ‘엄마와 아빠는 우리를 동물원에 버리려고 한 적이 있었다.’는 꽤 자극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도입은 알 수 없는 슬픔을 예고하는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물원에서의 ‘기린은 멀리서 우리 쪽을 바라봤다. 우리는 기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기린은 무엇도 흔들지 않았다. 기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즉 이들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때 기린은 마치 자폐아 동생처럼 소통이 불가능한 대상인 것입니다. 쌍둥이 자매는 ‘기린과 태호가 말하는 방식’이 같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 작품에서 태호의 엄마는 ‘시인이 되지 못하고 내성적인 쌍둥이와 자폐아의 엄마가 된’ 꿈을 잃어버린 중년으로 등장합니다. 엄마는 태호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닐지어니’라 시를 적습니다. 엄마는 시를 적고 태호가 관심을 보인 강아지에게 ‘기린’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기린’이라 말하면 태호가 유일하게 반응을 보이며 좋아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날부터 태호와 기린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겠죠. 신기한 것은 태호가 기린과 소통이 되(었다 생각하)자 엄마는 문학 신인상 공모에 당선이 되며 시인의 꿈을 이루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애끓는 절망을 적은 것이 애틋한 희망이 되어버린 겁니다. 헌데, 얄궂게도 기린은 앞 못보는 장애 강아지였습니다. 같은 상처를 지닌 존재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 그건 꼭 기린과 태호만은 아닐 겁니다. 태호와 가족은 이제 기린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죠. 우는 이유를 알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무리 깊은 밤일지라도 그것은 기린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기린의 말은 시각장애처럼 아픔을 가진 사람이 들려주는 울음과 같은 목소리가 아닐까요. 모두 잠든 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이 소설이라는 시공간에서 각자 생의 상처와 고통을 토해내는 작가들의 깊고도 조용한 말... 그것은 강아지를 기린이라 생각하며 행복을 느끼는 태호에게 희망이 되고도 남는 말일테죠. 누구에게나 들리는 말은 아니고 태호처럼, 태호가족처럼 기린과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독 더 생생히 들리는 한밤중의 교신일테죠. 작가들의 발신음이 별처럼 수놓아지는 아름다운 밤일테이죠.
당신은 기린의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기린의 울음소리에 같이 울어 본적이 있나요?
10. 제삿날(2009) / 이명랑(1973)
이 작품을 가장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명랑하다기 보다는 맹랑하달까. 한편의 잘 짜여진 단막극처럼 꽁트로 여겨지는 구성과 솔직하고 시원한 대사들이 매력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소설은 화자가 여러 명입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이며 각자의 입장에 처한 주장을 비교해 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왔습니다. 모두들 자기 생각만 하는 어른들이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 나라고 별 수 있었을까 싶어 슬퍼지기도 하더군요. 밖으로 꺼내놓고 말을 안해서 그렇지 속으로 삼키는 말을 말풍선에 달아봅시다 ! 모두 똑같을 테죠. 이 책에서는 가장 나이가 어린 작가지만 그녀가 들고 나온 문제는 우리사회 만연되어 가고 있는 ‘노인 부양 문제’ 였습니다. 노인을 둘러싼 자기들 문제겠지만요.
소설에선 두 어머니를 둔 아들과 며느리가 등장합니다. 두 어머니는 현재 과부인 실정이고 이들은 우연히 만나 같이 살게 된 경우입니다. 그 우연이라는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엄청난 비밀이었다는 것인데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밝혀지는 출생과 양육의 모든 과거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주인과 더부살이 관계인 이들 두 어머니가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자식들이 병원에 모이게 되었고 여기서 병원비와 간병인에 대한 의견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죠. 작가는 이 상황에서 주인 어머니의 큰아들과 큰 며느리, 더부살이 아주머니의 아들과 며느리를 각각 공평한 화자로 내세우며 정당한 발언권을 부여합니다. 이들 네 명이 속내를 드러내며 어떻게든 자기 부모를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작태는 속된말로 재수가 없는 꼴이지요. 그 와중에 주인 어머니의 큰 며느리는 충격받아 쓰러진 척, 쇼를 연출하기까지 하네요. 더부살이 아주머니를 내쫓았다는 막장 며느리는 ‘그나저나 이 노인네는 왜 죽지도 않나?’ 하며 자칫 잘못하다가 병수발 들지 모르는 자신의 오늘에 적나라한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런데 이들 네 명의 배은망덕한 자식들을 뒤로 더 충격적인 반전의 커밍아웃을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분이 있었으니.... 우리 어머니들은 왜 그렇게 모두들 기구하기 짝이 없을까요. 두 과부가 거짓말처럼 공유한 귀신의 사연이 그것입니다. 어찌 보면 자식들을 속여 온 두 어머니의 세월 속에서 인생의 죄와 벌을 논하는 짜릿한 반격은 속이 다 시원할 정도였지만, 책을 덮고 나면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참 완벽해 보였다고 할까요. 조금더 씁쓸해도 좋았을 듯했는데 너무 완벽해 인간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그 점, 그것만이 옥의 티였습니다. 그것도 실은 위의 어르신들의 작품을 읽었기에 자동적으로 비교되는 결과였구요. 제가 인위적으로 나이순으로 작품을 배치했는데 그건 아마도 세월따라 쌓여지는 나잇살만큼의 연륜, 마음의 무게가 아닐지요.
나이듦의 시간값
긴 서평을 지양하려 했는데 이번에도 실패했습니다. 요즘 제가 젊은 작가들의 소설집을 동시에 읽고 있는 터라 이 책은 나이는 괜히 먹는 것이 아니라는 끄덕임을 주는 시간이었어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대개 아찔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매스도 예리하고 송곳도 날카롭지요. 반면에 지긋하신 작가들의 소설은 느리고 두껍지만 둔중한 울림이 있습니다. 나이든다는 자신감을 선사하는 자랑스런 작품들이라고나 할까. 좋은 소설, 좋은 작가가 많겠지만 자신의 위치와 경력에서 작품으로서 완벽한 소설을 완성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저는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당대에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으로만 느껴집니다. 조금 호들갑을 떨어보자면 같이 살아주셔서 읽게해 주셔서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 만큼이요. 허나 현대미술관 같은 갤러리에서 이름난 화가들의 작품을 모두 관람한다고 해서 전 작품을 이해하고 돌아오진 않지요. 그냥 가슴으로 느낄 뿐, 작가가 말하려 했던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 작품들을 모두 잘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돌아오는 길이 분명 벅찬 감동으로 가득했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진실이랍니다.
나이가 드니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고상하게, 더 품격있고 교양있게 나이들 수 있을지 그것도 고민이 될 때가 많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고민은 나이가 들어도 어째 나이들어 기대하는 자기모습이 아닌 것 같기에 계속 하게 되는 고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나이 들었다고 다 용서되고 다 알아지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씀이죠. 욕심이 사라지기는 커녕 헛된 바램은 더해지고 부질없는 기다림도 생기더란 말입니다. 이제껏 먹은 것이라고는 나이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벌어 놓은 것이라고는 나이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때 이렇게 나이든 작가들의 나잇값 제대로 하는 소설을 읽는 것도 좋은 처방인 듯합니다.
이제 '깊은 밤, 기린의 말'쯤이야 모두 알아 듣고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강아지도 그가 좋다면 기린이라 부를 수 있고 그래서 기린이기에 못다한 말까지도 강아지 안아주듯 보듬을 수 있는 나이이길 바랍니다.
그 말귀 알아듣는 알찬 시간이야 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나이듦의 시간이 아닐까요. 나잇값을 한다는 것, 그 나잇살만큼 불어난 시간값을 한다는 말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