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서평을 어떻게 써야 할까 생각을 정리중이다. 정확히는 어떤 서평이 '좋은 서평'일까라고 말하고 싶다.
우연히 알라딘 인문 MD 서재에 실린, <인터뷰> ‘서평계의 두 고수 고명섭기자와 로쟈 이현우를 함께 만나다’ (http://blog.aladin.co.kr/bookeditor/4786365) 라는 글을 보았다. 마지막에 좋은 서평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로쟈님의 견해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현우 : 저는 좋은 서평의 조건보다는 효과 면에서 말씀을 드릴게요. 저는 어떤 책을 안 읽도록 설득해주는 서평이 제일 좋아요. 돈과 시간을 절약하게 하거든요. 별 하나짜리 서평을 설득력 있게 쓰는 거죠. 본인은 불만이겠지만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유익하니까요. 별 다섯 개짜리 서평보다 오히려 하나짜리 좋은 서평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마존에서 서평을 볼 때 별 하나짜리와 다섯 개짜리를 보는데, 하나짜리도 짧은 거는 특별히 새길 게 없어요. 그런데 길게 차근차근 왜 이 책이 별 하나인가를 알려주는 서평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으로 좋은 서평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서평. 돈과 시간을 요구하는 서평이죠. (웃음) 사서 꽂아두기라고 해야겠다는 마음을 부추기는 글 말이에요. 세 번째는 잘 정리해주는 서평인데, 살 수도 있고 안 살 수도 있지만 읽은 척할 수 있게 해주는 서평이죠. 어디 가서 한 마디 던질 수 있는 서평이요. 고명섭 선생님께서 이런 서평을 많이 써주시죠.
자연 내 서평은 어디에 속할까를 갸우뚱해보고 나는 1. 어떤 책을 안 읽도록 설득해주는 서평 2.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서평 3. 잘 정리해서 읽은 척 할 수 있게 해주는 서평 中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여지껏 좋은 서평을 쓰려고 노력해 왔다기 보다는 그냥 좋은 글을 쓰려고 안간힘을 써오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다 보니 확실히 꼭 일년 전의 내 서평보다는 지금의 서평이 발전을 이룬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과연 내 서평이 좋은 서평인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는 주저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니체의 말>에 가슴을 때리는 문장을 만났다.
해석의 딜레마
모든 일은 어떻게든 해석이 가능하다. .....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해석을 하는 순간부터는 그 해석속에 자신을 밀어 넣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결국 해석에 사로잡히고, 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시점에서만 사물을 보게 된다. 요컨대 해석 또는 해석에 기인한 가치 판단이 자신을 옴짝 달싹 못하도록 옭아매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하지 않고서는 상황을 정리할 수가 없다. 여기에 인생을 해석한다는 것의 딜레마가 있다. - 농담, 음모 그리고 복수 中
정확한 이유에 근접하지 못하고 있던 갑갑함을 시원하게 뚫어주던 한 구절, ‘해석 또는 해석에 기인한 가치 판단이 자신을 옴짝 달싹 못하도록 옭아매는 것’ 에서 나는 좀처럼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어떨 땐 어쩌다 (큰 고민없이)시작된 해석의 틀에서, 주어진 분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그대로 침몰한 채로 글을 마감하곤 했던 것. 혹시 나는 깊숙하게 해석한 것이 좋은 서평의 토대라고 믿어온 것은 아닐까.
나는 솔직히 지나간 내 서평은 다시 쳐다보지도 않는다. 길고 지루하고 해석은 또 얼마나 세세한지 다시 읽으면 깨끗이 삭제하고 싶어 질까봐 그냥 모아두는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다수 리뷰대회 수상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선정하는 이달의, 이주의 리뷰같은 행운은 거의 성실성(?)과 분량, 그리고 잘 써보겠다는 의지(?)가 반이상이었다고 느껴진다. 그동안 새롭고 창의적인 해석이라기 보다는 그저 주어진 책 자체에 종합적인 분석을 해온 내 경우, 적어도 이 사람이 책은 꼼꼼하게 읽었구나, 하는 태도 하나는 어필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 성실성과 태도, 혹은 기교만 늘어가는 필력들만으로는 좋은 서평이 되기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좋은 서평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고명섭 기자와 로쟈 이현우님처럼 전문적으로 서평을 쓰고 그 서평이 영향력을 미치는 분들이 아니더라도 나는 드디어 ‘좋은 서평’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놀랍다 놀라워) 그런데 분명한 답이 있을 것 같은 질문이 외려 ‘좋은 사람’이라는 기준처럼 더 애매하고 어렵다. ‘안 좋은’ 서평은 알 것도 같은데 말이다. 세상에 책 많이 읽은 사람, 글 잘쓰는 사람은 너무도 많은데 책 많이 읽었다고 글 잘 쓴다고 꼭 서평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책 많이 읽고 글을 잘 쓰면 서평을 잘 쓸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을까. 서평을 자꾸 쓰다보면 결국 서평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어쩐지 서평은 쓸수록 어려워진다. 그런면에서 거침없이 휘갈겨온 지난 일년이 그립다 그리워!)
<내가 생각하는 ‘안 좋은’ 서평>
1. copy & paste & transform
- 신문기사, 백과사전, 기존의 책 인용이 과도하게 사용된 경우-어디까지가 기사이고 어디서부터 의견인지 구분이 안 가므로 언뜻 보기에 굉장히 유식해 보인다는 가시적 효과는 발생한다.(주로 라틴어 어원, 그리스 신화, 기호및 사회학 용어, 신종언어의 인용도 포함-물론 나도 포함, 내 이웃님들은 절대 오해를 하시면 안됨. 어디까지나 '과도'하게 의지할 경우임)
- 처음엔 객관적 사실 인용에서 시작해 마치 자신의 견해인듯 변형하는 행위-기사를 가져와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환기를 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번 유사하거나 반박하는 결론으로 매듭지어 또 다른 새로운 기사를 만드는 행위. 결론이 기사를 통해 사유한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기존내용에 업어가는 습관을 형성하므로 기사없이는 절대 서평을 쓸 수 없다.
2. 작위적인 개인경험
- 소설의 내용과 비슷한 개인의 경험을 그럴듯하게 과장 및 2차 주형(사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 경우는 리뷰대회 접수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서평의 첫 시작일 경우가 많다. 극적인 個人史는 분명 글로써 임팩트한 매력을 제공하기 마련이므로. 나 역시도 나도 모르게 이런 방법을 자주 사용해왔다. 이른바 리뷰의 소설화 ! 지난 일년 간의 경험상 이 방법은 잘만 활용하면 거의 수상권에 안착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번 맛들이면 극적인 개인경험의 시나리오에서 절대 헤어 나오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내 인생에서 누구하나 죽었거나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는 이야기의 시작을 할 수가 없다. 정말로 소설과 똑같은 일이 내게 벌어졌을 수도 있지만 매번 이런 방식의 구라로(우연히 꼭 같은 경험-그러므로 공감백배-절대 잊지 못함) 서평을 완성하면 극적인 個人史 없이는 어떤 서평도 완성할 수가 없다. 언제나 미완성인 느낌이 드는 것이다.
대부분 개인사의 감동적인 주형은 어느 정도 필력이 있는 서평자들이 꺼내드는 카드일 경우가 많다. (또 출판사에서는 대부분 이런 서평을 선호한다) 그리고 좋은 글, 감동을 선사하는 글이 될 확률이 높다.(하필 그 소설의 주인공처럼 나도 도둑질을 했다니까) 그런데 대회같은 가시적인 표식을 배제하면 과연 좋은 서평인가는 모르겠다. 앞으로 스스로 지양하고 싶은 방법이다.
3. 화제만을 유도하는 전략적 수사
- 가령 지금 세간에 유행하는 어떤 책이나 어떤 현상이 있다고 치자. 어떤 책의 서평을 쓸때 당연히 지금 주요이슈인 사회문제나 트렌드를 떠올리게 되며 그것에 비추어 내 사고를 정리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꼭 별 상관없어 보이는 ‘신정아’나 ‘고현정’을 들먹이며 단순화제성으로 갖다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끝까지 읽어보면 해당책의 서평이 아니라 신정아 비판이다. 헐) 깊이있는 서평이라야만 좋은 서평인 것은 아니다. 나조차도 서평엄숙주의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중이니까. 그런데 제발, 그 이야기 하고 싶으면 그 책의 서평을 쓰는 게 어떤가. 자신은 그런(?) 책들에 관심없는 사람이므로 그 책은 사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이말 만은 꼭 하고 싶다며 신랄한 비판을 하는 대상이 왜 절대 그녀의 책은 아닌 것인지.
4. 논리의 전개가 퍽이나 주관적인 비판
- 내가 감동받은 책이 또 다른 서평자의 입장에선 정말 실망일 수가 있다. 소설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그런데 자기 맘에 안 들면 꽝이고 들었으면 훌륭하다 식의 비판을 ‘그냥’ 이 한마디로 밀고 나가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물론, 대부분의 알라딘 서평자들은 논리의 아름다움을 중요시 하는 분들이므로 이런 분들은 거의 없다고 보고 싶지만 간혹 알려진 서평자들도 자세한 이유를 들지 않고 ‘실망이다’, ‘수준이하다’ 식의 간단명료한 글을 올린 것을 본 적이 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는 강박, 나는 솔직한 서평자라는 자부심, 솔직한 글에 대한 열렬한 지지등의 여러 이유로 한번 잡은 방향이 여지를 주지 않고 뻗어나가는 경우가 있다. (시원하게 솔직한 글일수록 추천은 늘어난다. ㅋ ) 하지만 니체 식으로 말하면 솔직이라는 해석의 딜레마에 빠져 그 안에서 꼼짝없이 갇혀버린 것이다.
이럴때 나는 흔들린다. 거짓인 서평은 ‘안 좋은’ 서평인 것이 맞으나 솔직한 서평은 ‘좋은’ 서평인가, 하고 말이다.
그야말로 두서없이 생각나는 것만 적어보았다. (원래 안좋은 거 말하기는 좋은 거 말하기 보다 훨씬 쉽다 ㅋ)
이제 좋은 서평을 정리할 차례이다. 하지만 난 아직 그럴싸한 답을 정리하기 어렵다. 로쟈님과 고명섭 기자처럼 답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내게도 그런 날이 올까? 좋은 서평은 말이죠, 결국 자기 맘에 드는 서평이 아닐까요? 자기 완성도에 다다른 것인지는 자신만이 알잖아요. 혹은 좋은 서평이라는 게 말이죠,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도 이 책이 이런 책이구나 깨닫게 해주는 서평 아닐까요? 뭐 이런 식의.
그런데 꼭 좋은 서평을 써야하나요?
누구를 위해 좋은 서평은 존재하는가,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출판사? 작가? 독자? 평론가? 아님, 서평자 자신?
결국 책좀 읽고 글좀 쓰는 분들이군요 !
흑, 그럼 좋은 서평은 적어도 서평을 읽어줄만한 사람들을 위한 글인 건가요?
그렇담, 굳이 (지들끼리 ㅋ)좋은 서평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그래도 서평없이는 상황을 정리할수 없으니, 여기에 서평의 딜레마가 존재하네요, 니체는 천재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