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약속
책을 받아들면 마음으로 이 책을 언제까지 읽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 책 약속은 칼같이 지키는 편이다. 책이 책상에 쌓이고 점점 높이가 높아지는 것만큼 스트레스도 없기 때문에. 누가 언제까지 읽으라고 강요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책을 치우지 않는 책상이 제일로 하루를 무겁게 한다.
#2. 피로
나는 책을 빨리 읽는 편은 아니다. 제일 빨리 읽었던 시기는 20대 때였던 것 같다. 엄마가 책을 참 좋아 하셨는데 아주 옛날, 그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는 한자리에 앉아서 책 좀 오래보면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눈도 침침해져서 이것도 늙어서 할 짓은 아니라고. 그런데 이 말씀을 이제야 실감한다. 책을 좀 오래 본 것 같은 날은 확실히 눈 상태가 양호하지가 않다. 내 평생 처음으로 책 좀 즐기면서 보려고 눈에 좋다는 영양제를 샀다.
#3. 계획
직장다니지 않고 집에서 시간이 많을 것 같은 주부도 주말이 좋다. 사실 주부는 평일이 더 여유롭긴 한데 이 마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다같이 마음이 여유로와지는 분위기속에서 물리적, 심리적 숙제로부터 얼마간 해방된 느낌? 그래서 언젠가부터 금요일이 되면 이번 주말에 무엇을 하나, 이런 고민을 위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주말을 무사히 넘겼을 때 야릇한 보람까지도.
받거나 얻거나 가져다 놓고 아직 책거리를 못한 책을 마저 읽기로 했다. 다음의 세권 중에 한권은 서평을 쓸 생각이다. 나는 소설집을 습관적으로 읽는 편인데 여지껏 그 이유를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냥 내 스타일과 잘 맞아서? 정도로만. 그런데 소설집의 단점은 끊어지기 때문에, 끊어서 쉬어갈 수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언제라도 끊고 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흐름이 툭툭 끊어지는 주부들의 주말엔 소설집이 유용하다. 오늘은 딸아이와 <위대한 탄생>을 봐줄 것이고, 일요일은 임재범 노래를 들으면서 벌써부터 눈물 흘릴 계획을 야무지게 세운 터이다.
그 나머지는
하나, 2011 젊은 작가상 수상집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이 올해로 두 번째인데
이 책을 작년에 받아 들고 ‘젊음’과 ‘젊은 작가’, ‘젊은 소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바퀴 돌아왔다.
첫 수록작이 대상작인 김애란의 작품이다.
이 작가 확실히 성숙해졌다.
<물속 골리앗>은 내가 읽었던 김애란은 아니었다.
뭐랄까. 더 징그러워졌다고 할까.
나는 소설 읽으면서 청승맞게도 잘 우는 편인데
읽으면서 울컥했던 소절을 옮겨본다.
마치 내가 적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 나는 좀 외로웠다. 얼마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그리고 이럴 때 내게 다른 형제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들이 존재했다면 이렇게 어두운 날, 그 모든 자식들이 모여 뭔가 상의해볼 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그중 누군가는 모든 걸 나보다 잘해 나갔을텐데. 아버지를 매장하는 것도, 어머니를 위로 하는 것도, 전구를 갈거나 잡다한 고지서를 처리하는 일 역시 말이다. 하다못해 그들은 나보다 더 잘 울었으리라. "
- 물속 골리앗 / 김애란
두울, 깊은 밤, 기린의 말 (문학의 문학)
이 책을 어쩐 일인지
한 달 넘게, 만지고 쓰다듬고 껴안고만 있을 뿐 아직 다 읽지를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미안하지 않은 건 박완서 작가의 글 때문인 듯하다.
자꾸 그 페이지만 다시 보게 된다.
죽은 사람의 영화는 애절하기만 한데
죽은 사람의 글은 애절, 애통은 물론 애끓는 유언같다.
이제는 이런 방식의, 이런 내용의 , 이런 글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슬픔이 오롯한 작품이었다.
" 찬바람 난 지 언젠데 자꾸 속에서 열불이 나려고 해서 손사래로 부채질을 하다말고 내가 미쳤지, 나는 세면대로 가서 찬물로 북북 세수를 하고 외출준비를 했다. 뭐가 미쳤다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이 판국에 손사래로 바람을 내려는 건 확실히 미친 짓이지만 더 미친 짓은 남편에게 뭔가 하소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였다. 오늘 온종일 내가 무슨 일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지 최소한 남편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출근하려는 남편에게 슬쩍 운을 뗀다는 게, 여보 나 왜 이렇게 울화가 치밀고 얼굴이 화끈거리지, 했더니 그가 한다는 소리가 갱년긴가 보군, 했다. 그래 갱년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화상이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지가 여자에 대해 뭘 안다고."
-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 박완서
세엣, 2011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작가)
이 책은 다른 소설집과는 다르게
같은 작가들이 해당 소설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과정이 지면으로 정리되어 있다.
작가들끼리는 이런 걸 중요시 하는 구나, 이런 글을 잘 쓴 글이라 하는구나 하는
평가기준을 엿볼 수 있다.
세간의 평가와 크게 다르진 않지만
나름대로 해당연도의 문제작들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내겐 흥미로왔다.
수상작도 아니고 순서도 없다.
작년에도 이 책에서 선택된 소설들은 이상하게도 기억이 오래가는 구석이 있었다.
(단편은 원래 잘 잊어먹게 되있다)
그중에 내가 좋아라 하는 편혜영의 작품을 옮겨본다.
" 조는 언제고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우연히 교통사고에 휘말려 그가 없이도 태연히 계속될 이 세계로부터 사라져 버리거나 사라지고 싶어지는 순간이 닥쳐올지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해왔다. 그는 한 번도 삶을 가차 없이 버리고 떠나려는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충동을 부채질만한 기막힌 우연을 만난 적도 없었다. 지금의 삶이 그다지 지속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기회도 없었다. 그는 인생이라는 게 공평하고 정연하고 이성적인 게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은근히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으나 막상 그럴 기회가 없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
- 서쪽으로 4센티미터 / 편혜영
그래.
이번 주는 임재범을 비롯한 김애란, 박완서, 편혜영....실로 여러분들과 주말을 견뎌볼테다.